206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3
아서 C. 클라크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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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의 마무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목성이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태양계에는 '2개의 태양'이 존재했고, 또 하나의 이름은 '루시퍼'라 불렀다. 왜 악마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좀 나중으로 미루고...

 

  실제로 목성이 '항성(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이론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목성은 '행성'치곤 상당히 큰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천문학자들은 목성의 질량이 조금만 더 무거웠다면 태양계는 '쌍성계'가 되었을 것이고, 우주 곳곳에는 '쌍성계'가 훨씬 더 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양처럼 질량이 작은 별이 홀로 빛나고 행성도 이렇게나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특별한 경우라고 지적하곤 한다. 하지만 태양계가 '쌍성계'였다면 지구에 이렇게나 많은 생명이 태어나긴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면 생명은 '밤'에 더 많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이 한낮보다는 달빛이 은은한 밤에 '잉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등동물'일수록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잠을 자야 하는데, '두 개의 태양'이 번갈아 뜨게 되면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는 '밤의 시간'이 줄어드는 탓에 생명이 번성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지적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더구나 '야행성 동물'의 경우엔 잠보다 더 중요한 '먹잇감 구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어 '동물의 번성'에 큰 차질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생태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질 것이 분명하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번성하게 되었다. 바로 목성의 위성이었던 '에우로파(유로파)'다. 이제는 목성이 행성의 지위에서 승격을 하여 '항성(태양)'이 되었으니, 에우로파도 당당히 '행성의 지위'를 얻게 된 셈이다. 2권의 초반에 중국의 우주선이 에우로파에 '연료보급'차 착륙을 했다가 괴생명체에 의해 우주선이 파괴되고 유일한 생존자는 '그 사실'을 알리고서 조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비록 소설속 이야기지만 '에우로파'에 생명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셈이다. 그러다 목성의 주변에 있던 '티코석판(TMA-1)'이 불현듯 사라졌다가 목성을 '새로운 태양(루시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행방불명이 되었던 데이비드 보먼이 존재를 나타냈고, 새로운 메시지도 전달했다. [이 모든 행성들은 에우로파를 제외하곤 당신들 것입니다. 에우로파에는 착륙을 시도하지 말길.] 

 

  과연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3권의 시작은 '루시퍼 탄생'으로부터 50년이 훌쩍 지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 '에우로파'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그리고 왜 하필 50년 뒤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던 걸까? 이런 이야기의 맥락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상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1986년에 지구를 찾아왔던 '헬리 혜성'이 76년 뒤인 2062년에 다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전편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헤이우드 플로이드 박사가 바로 '헬리 헤성'에 직접 착륙해서 탐사를 하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실제로 2003년에 일본 탐사선 '하야부사'가 소행성에 착륙해서 시료를 채취한 뒤 2010년에 성공적으로 귀환한 일이 있었기에, 소설에서 '헬리 혜성'에 착륙해서 탐사를 마치고 유유히 떠나는 장면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하야부사도 무사귀환에는 실패하고 우여곡절 끝에 시료를 채취한 '캡슐'만을 무사히 보낸채, 지구의 대기권 속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지만, 앞으로 더욱 기술발전을 이룬다면 '혜성탐사' 정도는 우아하게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암튼, SF소설 <206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혜성탐사를 무사히 마친 플로이드 박사가 자신의 손자인 크리스 플로이드가 불시착한 '에우로파'로 구조를 떠나면서 이야기가 더욱 흥미진진해지게 된다. 과연 '접근금지명령(?)'을 보낸 에우로파에서 무사히 구조작전이 성공적으로 마치게 될 것인가? 이쯤해서 태양계의 새로운 별 '루시퍼의 등장'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실 태양계의 이름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족보'에서 따오기 마련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말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성경'에 나오는 악마(사탄)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다니..과연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사실, '루시퍼'는 하느님을 따르는 대천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를 짓고 '타락천사'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악한 정령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탄'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목성'을 스스로 빛나게 만든 '티코석판'이 어떤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복선을 깔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에우로파 행성'은 진정한 악의 소굴이 될 거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곳에 불시착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서 클라크가 '사악한 악령'을 외계생명체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락천사(루시퍼)'의 다른 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루시퍼가 왜 천사의 신분으로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지 말이다. 하느님은 죄 많은 인간들을 벌 주고자 했단다. 그 명을 받은 천사가 바로 루시퍼였고 말이다. 그런데 명을 받고 내려와 벌을 내리려고 하니, '죄를 받아 마땅한 인간들'이 아니라 '불쌍한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루시퍼의 눈에는 말이다. 그래서 불쌍한 인간들이 '회개'를 하고 벌을 면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가 되어 루시퍼가 '대신' 벌을 받게 되었더란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루시퍼는 '타락천사'가 아니라 죄 많은 인간들 '대신' 벌을 받은 메시아(구원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와 그닥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이런 '루시퍼'를 악마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우주를 방랑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더욱 흥미를 더해간다. 곧 마지막 4권의 이야기도 풀어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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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6
헤르만 헤세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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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친숙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것은 <데미안>일 것이다. 하지만 보다 친숙한 작품을 꼽으라면 <수레바퀴 아래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그의 소설이 유독 '청소년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고, 이 책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가 딱 그 시기의 꿈 많은 소년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데미안>속 주인공 '싱클레어'도 소년의 모습을 엿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는 유년기를 거쳐 성인으로까지 성장하고 말지만, '기벤라트'는 안타깝게도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넘지 못하고 꿈이 좌절되는 경험이 적나라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청소년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된 까닭은 작가인 '헤세'가 그런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이 바라는대로 '자신의 꿈'을 접고 맹목적인 엘리트 코스(출세길)를 따라가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자살'을 시도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작가로 크게 성공한 뒤에 '자전적인 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필했고, 이 책을 통해서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아픔을 정화시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접한 수많은 청소년들도 은연중에 '공감'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이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자살이 '선진국 중, 1위'라는 비극적인 현실속에서 이 책은 분명 달리 읽혀야 마땅하다고 보여진다.

 

  책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시골마을에 살던 한스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러자 마을의 어른들은 한스를 자랑거리로 삼았고, 그가 '엘리트 코스(졸업 후, 교회 목사가 될 수 있는 명문학교에 진학)'를 밟아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당연히 한스의 아버지도 한스가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미 정해진 출세길을 따라 얌전히 순응하기만 하면 큰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할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대와 믿음이 어린 한스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분명 '목사'가 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을 것이며,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멋진 삶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세상에 대해 이제 겨우 눈을 뜬 어린 학생으로서 진정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지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한걸음씩 걷다 보면 답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하라는 공부'만 묵묵히 할 뿐이다. 정작 한스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낚시를 하고 또래 친구들과 수영을 하며 어울리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공부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일과의 거의 대부분을 '공부'에만 쏟는 생활에 지쳐가는 평범한 청소년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긴장된 하루하루를 보내다 입학하게된 '신학교에서 지내는 삶'은 엄격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한스는 자주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스는 '헤르만 하일러'라는 친구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갑갑하고 답답한 신학교에서 보내는 나날들 가운데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던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일러는 좀 색다른 친구였다. 물론 어려운 입학시험을 치루고 들어올 수 있는 명문학교였기에 하일러도 수재임에 틀림없었지만, 하일러는 억압적이고 복종만을 강요하는 학교의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시인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하일러의 성적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학교측에서는 하일러를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고 아무도 그와 어울리지 못하게 조치를 취한다. 이는 한스에겐 끔찍한 형벌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문제아'라면서 어울리지 못하게하다니 말이다.

 

  결국, 하일러는 학교의 규칙을 밥 먹듯이 어기다 퇴학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한스는 차마 그러지 못한다. 왜냐면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의 기대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도 결국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심신이 지쳐서 더는 학업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스는 퇴학 아닌 퇴학을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서 말이다. 이런 취급을 당한 한스의 아버지는 한스를 마을의 공장에 취직 시켜버린다. 왜냐면 집안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아서 '밥벌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는 어렵사리 취직한 공장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공장일의 노동도 자신이 바라던 일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한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스는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비록 한스 스스로 '자신의 꿈'을 말한 적은 없지만, 그가 공부하면서, 학교에 다니면서, 그리고 아름다운 엠마와 잠시나마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리고 적성에 맞지도 않는 공장엘 다니면서도 한스에게 한줄기 위로를 해준 것은 한적한 시골마을을 품고 있던 자연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한스의 꿈이 무엇인지 무엇인지 물어봐주지 않았기에 한스도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스는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던 자연의 품으로 홀연히 떠나고 만다.

 

  과연 '누가' 한스를 죽음으로 내몰았던걸까? 아니면 한스는 나약한 자의 최후인 '자살'을 하고 만 것일까? 소설에서는 그의 죽음이 '타살'인지 아닌지 젼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스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꿈을 배우는 학교가 아니라 '출세(성공)'를 위해서 맹목적으로 '공부하는 기계'가 되고 마는 신세가 한스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과연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대로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왜 학교는 학생들에게 '꿈'을 가르치길 포기하고, 오직 '국영수 만점'만을 강요하는 걸까? 정작 '국영수 만점'을 달성한 뒤의 삶을 가르쳐주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개성'과 '재능'을 타고났다고들 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가 바라는 정답은 '명문고-명문대-대기업-아파트장만-안락한노후' 뿐이다. 그토록 수많은 직업과 다양한 개성이 있는데도, 가장 바람직한 삶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온국민이 딱 '저것' 한가지만을 바랄 뿐이다. 과연 저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장'이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대한민국 행복지수는 너무나도 형편없다. 그런데도 왜 '저런 틀에 박힌 삶'을 강요하는 걸까?

 

  이제는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정도는 어린이들도 쉽게 알 수 있다. 온가족의 웃음소리가 넘쳐나야 행복하다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오직 '명문대 입학', '대기업 입사'만이 유일한 행복이라고 외치는 사이, 우리 사회는 어느 새 '웃음꽃'을 잃어버린 슬픈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맞이한 것은 '초고령화 / 저출생 사회'가 아니냔 말이다. 행복한 아이를 낳아 기를 자신을 '잃어버린 세대들'이 아니냔 말이다. 무한 경쟁을 추구하는 이토록 슬픈 비극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분명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웃음을 되찾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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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동물대탐험 2 : 나무늘보의 노래 - 달라서 좋아, 동물들의 생존 전략 최재천의 동물대탐험 2
최재천 기획, 박현미 그림, 황혜영 글, 안선영 해설 / 다산어린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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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각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진화를 했다. 1권에서는 '의태'를 다루면서 생물들이 서로 '흉내내기'를 통해서 생존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는데, 2권에서는 '공생'을 다뤄며 생물의 다양성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생물은 '살아남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왜 살아가려고 하는지는 잠시 접어두어야 '생물학'을 보다 깊이 생각해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생물들의 생존전략이 얼마나 다양한지에만 좀더 집중을 하면 좋겠다.

 

  다시 돌아와서, 자연환경은 생각보다 아늑하고 포근하지 않다. 그렇기에 보다 '효율적인 생존'을 위해 모든 생물들은 저마다 '생존전략'을 짠다. 이를 테면, 육식동물인 사자는 이빨과 발톱을 날카롭게 발달시켰고, 초식동물인 얼룩말은 다리를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발달시켜서 '생존율'을 높였다. 하지만 '에너지효율'만 놓고 본다면 몸집을 불리는 것이 '체온유지'에 유리하기 때문에 몸집이 큰 동물이 생존율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몸집을 키우다보면 '급격한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그리고 '먹이가 풍부한 따뜻한 곳'을 서직지로 삼으면 생존율은 높아지겠지만, 자신을 먹이로 삼는 '포식자'도 덩달아서 늘어나기 때문에 생존율이 급감하기도 한다. 그래서 '먹이가 적은 극한 환경'을 서식지로 삼기도 하는데, 먹을 것이 부족하고 살아가기에 부적합할 정도로 춥거나 건조한 지역이라서 '포식자'가 현저히 줄어드는 이점이 있어, 의외로 '생존율'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생물은 저마다 '살아가기' 위한 독특한 전략을 세우고, 주어진 자연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이 또한 오랜 시일이 지나고 나면 '진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이렇게나 다양한 생존전략 가운데 '공생'은 복잡한 생태계를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이른바 '꽃과 꿀벌의 공생관계'처럼 서로 다른 생물끼리 협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꿀벌'이 사라지면 결국엔 '꽃'도 사라지고, 최종적으로는 '인간'도 더는 살아갈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최근에 겪은 '코로나 팬데믹'도 마찬가지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숙주로 삼는 '천산갑'을 사람들이 자주 잡아먹게 되면서 '인간'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원래는 '감염고리'가 없던 별개의 개체였던 야생의 '천산갑'과 도시의 '인간'이 어찌하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다보니 복잡한 생태계의 그물로 얽히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모든 생물들의 생존전략 가운데 하나인 '공생'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만 끼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꽃과 꿀벌', '꽃과 나비', '개미와 진딧물' 등등과 같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의 협력적인 공생관계도 생태계는 허용하지만, '개미와 진딧물'의 공생관계에서 피해를 보는 '식물의 관점'에서 보면 얻는 것도 없이 빼앗기기만 하는 '기생관계'도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미와 진딧물'이 번성하게 되면 식물은 결국에 말라죽고 만다. 야생에 사는 '천산갑'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품고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었다. 애초에 '감염고리'조차 형성되지 않았던 관계로 '우연히' 천산갑과 인간이 마주치더라도 천산갑에 살고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산갑이 인간에게 '특효약'이라는 소식이 퍼지면서 인간은 야생에 머물던 '천산갑'을 도시의 시장에서도 판매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그렇게 '가깝게' 자주 접촉을 하다보니 '코로나바이러스'가 천산갑에서 인간에게까지 감염을 시키는 '연결고리'를 만들게 된 셈이다. 그런데 천산갑을 숙주로 삼고 있을 때에는 크게 위험하지 않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을 수 있게 되자 '면역체계'를 형성하지 못한 인간들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도 '생태계의 그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사슴을 습격하는 늑대가 골첫거리가 되자 늑대를 몽땅 사냥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포식자'가 사라진 사슴들은 '개체수'가 불어나 숲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숲이 황폐해지자 사슴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사슴을 보호하려고 늑대를 사냥했던 것인데, '인간의 개입'으로 늑대가 사라지자 결국엔 보호하려고 했던 사슴도 사라지고 만 셈이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깨달은 '인간'은 늑대를 복원하였고, 사슴의 개체수가 적절히 유지되자, 숲도 다시 살아나는 '생태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연환경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생물의 다양성을 망가뜨리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은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생물종을 멸종하지 않도록 '인간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된 셈이다.

 

  물론, 인간도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개발하고, 인간이 살기에 알맞은 환경'을 조성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동안에 너무 '인간중심적인 개발'만을 앞세운 탓에 야생의 자연속에서 살던 동식물들이 살아갈 터전을 잃고 '인간이 사는 곳'으로 침범(?)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황폐하게 만든 탓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환경을 황폐하게 만든 탓에 우리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특정한 생물종'을 절멸시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테면, 함부로 바다에 버린 쓰레기들이 모여 태평양 한가운데 거대한 '쓰레기섬'이 웬만한 대륙의 크기 만하게 커져서 '바다생태계'를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었고, 그 섬에 모인 플라스틱이 더 잘게 분해되면서 '미세 플라스틱'으로 인해 바다를 터전으로 삼은 생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바다거북의 콧구멍에 들어간 플라스틱 빨대를 기억할 것이다. 심지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고래의 뱃속에 소화를 시키지 못한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잔뜩 들어가서 죽은 사체를 본 일도 있을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심각한 문제는 그저 '빙산의 일각'만큼일 것이다. 그 아래 잠겨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태계 파괴'를 일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은 생물학을 다룬 어린이책이고,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파괴'로 인해 벌어지는 위험성까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부모님들이 먼저 읽고서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할 '배경지식'으로 삼아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 왜 중요한 일인지 설명해주면 좋을 것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지식'은 없는 법이다. 그리고 '배경지식'을 많이 알고 있으면 있는만큼 세상은 보다 더 넓어보이기 마련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훌륭한 독서법은 이책과 저책 '사이'에 숨겨진 지혜를 찾아내는 '남다른 안목'을 키우는 방법이다. 흔히 말하는 '행간'을 읽어내는 방법과 같은 것이다. 그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생물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독서'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 말이다. 앞서 설명한, 이책의 '지식'을 저책의 '지혜'로 삼는 통섭의 학습법을 숙련시켜야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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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 타인 지향적 삶과 이별하는 자기 돌봄의 인류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28
이현정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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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행복하다'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불행하다면서 선진국 가운데 '자살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라는 낡아빠진 이념 사이의 갈등을 넘어 세대간, 젠더간 따위에도 '시기와 질투, 그리고 혐오'까지 온갖 나쁜 것들이 다 들어 있는 '판도라 상자' 같은 형국에 처하고 말았다. 제발 그 안에 담겨 있는 나쁜 것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상자를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추구했던 '멍청함'이 오픈해버리고 만 셈이다. 대한민국의 '판도라 상자'에도 희망이 남아 있기는 한걸까?

 

  <서가명강> 시리즈 '인류학 편'인 이 책은 '한국인의 욕망'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본래 '인류학'은 역사적, 지역적으로 다양한 사회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다양한 인간의 삶과 사고방식에 관심을 둔 학문이기에 현재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탐구하기에도 딱 좋은 학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 '타인의 욕망'을 무작정 따라하는 '보편적인' 한국인들이 타인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에서 펴낸 책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담긴 책이란 말이다.

 

  우리 사회는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비이성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자하면, 심각할 정도로 '남'을 의식한다. 그냥 자신만의 개성으로 살아가도 충분한 것조차 '남들의 눈에 튀어 보이지 않는지'에 대해서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한국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경향이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오죽하면 '엄친아/엄친딸'이라는 말이 나왔겠냔 말이다. 유독 '엄마 친구의 아들/딸'은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으며,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입사하고, 젊은 나이에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차도 사고, 집도 사고, 해마다 해외여행을 하며,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를 밥 먹듯이 한다. 분명 어제도 말 했는데, 오늘 또 말하고, 내일도 엄마 친구의 아들, 딸은 그렇게나 잘났다고, '금쪽같은 내 새끼'를 기죽일 정도로 잘났다고 끔찍할 정도로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대한민국의 모든 엄마'가 어쩜 그토록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삶을 자기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인지다.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성격이 좋다'는 평가는 다분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잣대인데도, 천편일률적으로 '엄마 말씀을 잘 따르는 자식'이 곧 '성격이 좋은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거기에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대기업 입사'한 뒤, '좋은 차' 사고, '좋은 집' 장만하고, '결혼'도 일찍하고, '아기(손주)'도 순풍순풍 낳고,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산다는 증거로 '해외'로 싸돌아다녀야만 훌륭한 삶, 다시 말해,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인지 '누가' 정했느냔 말이다. 어찌 하여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이처럼 '똑같은 삶'을 성공이라고 정해놓았는지 궁금하다. 하물며 위에 열거한 것 가운데 '하나'라도 빼먹으면 '실패한 삶'으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루저(낙오자)'라고 비난하기 일쑤다. 심지어 그런 자식을 둔 엄마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렇다면 '공부' 좀 못하고, '성격' 좀 나쁘고(?), '삼류대학' 나오고, '비정규직' 신세에, 좋은 집은커녕 월세 마련하기도 버겁고, 차 살 돈도 없어 '뚜벅이 신세'로 전락하면, 당근 '국내여행'도 변변히 가지 못할테니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실패자란 말인가? 설령 그런 삶을 실패라고 한다고 쳐도 '실패'로 낙담에 빠진 이에게 위로를 건내기는커녕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을까봐서 주눅이 든 삶을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러니 '자살율 1위'라는 불명예를 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남이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거나 누리면 그뿐인 것이다. '차가 없는 삶'이라도 자기만족으로 살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으며, '집 없는 천사'처럼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소유욕'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자아실현을 통한 '나눔'과 '베품'으로 더 많고 더 큰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방식도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누가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서 '높은 담장'을 두르고 '내려다 보는 삶'을 살면 부러워서 미쳐버리는 못된 습성을 '성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해서 '그런 삶'을 살라고 부추기고 만다. 그래서 결국 '남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불행에 빠지고, '남의 삶'을 가지지 못해서 자기만족을 할 줄 모르는 멍충이가 되고 만다. 왜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게 만드냔 말이다. 그래선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얼짱'이나 '몸짱'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쓰곤 한다. 그것만으론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얼짱'이나 '몸짱'이 되지 못하면 '자기관리'조차 하지 않은 게으른 사람으로 치부하며, 못 생겼으면 '화장'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뚱뚱하면 '다이어트'나 '운동'이라도 죽어라해서 모두가 '얼짱'이 되어야 하고, '몸짱'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기에 이르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나마 요즘엔 '성형'이나 '화장'조차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다보니 조금쯤은 덜 강요하는 분위기가 되어 다행이지만, 그런 부족함을 더 채우기라도 하듯 '몸짱 열풍'이 불어재끼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먹방'도 함께 대유행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한편으론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며 먹으면서 '몸매'는 식스팩에 개미허리를 유지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셈이다.

 

  어디 이뿐인가. 우리 사회가 빠른 속도로 '초고령화', '저출생'의 문제로 위기에 빠지자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애를 낳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비난이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도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홀로 아이를 낳으면 '미혼모'와 '사생아'라고 낙인을 찍으며 '동반자살'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로 내모는 사회풍토가 여전한 것이 웃길 뿐이다. 대한민국이 '인구절벽'이라는 위기 탈출을 하는데 보탬이 된다며 칭찬(?)해도 괜찮은 상황 아니냔 말이다. 오히려 '미혼모'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데 어려움이 클테니 '십시일반'을 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해서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선이지 않느냔 말이다.

 

  이런 사회문제들은 '타인의 시선'에 너무 목을 매다보니 벌어지는 촌극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타인지향적인 삶'을 뿌리 깊게 내린 결과,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떻게 비춰지느냐'가 더 중요한 가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정상적인 삶으로 못박아 버리고나니 가장 중요한 가치가 '경제력'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대한민국 사회는 그 어떤 가치보다 '경제'에 치중하고 말았고, '경제성장'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은 만병통치약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이다. 그 탓에 '경제성장'으로 일어나는 여러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가며 추진하지 못하고, 문제가 불거지면 그냥 덮어버리고 밀어붙이는 일이 자꾸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그동안 미뤄왔던 사회문제가 '복합적'으로 발생하며 좀처럼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는, 앞이 깜깜한 사태를 직면하고 만 셈이다.

 

  물론 쉽게 해결될 수는 없다. 특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문제'만 보아도 양 진영으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듯 서로 양보와 배려, 대화와 타협조차 하려 들지 않는 것이 큰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 "너희가 없어져야 대한민국이 잘 된다"는 막말과 욕설의 끝장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이런 대한민국이 갈등과 혐오를 봉합하고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사회'로 거듭나게 될 수 있을지 몹시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문제는 풀리기 마련이다. 풀리지 않는다면 '문제'라고 불릴 까닭도 없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문제의 거의 대부분은 너무나 빨리 경제성장을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쌓아두기만 한 탓이라면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리고 사회문제가 심각해지면 해질수록 사회구성원들 스스로 반성과 성찰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는 진단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 그리고 혐오 문제'만큼은 결코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건 우리 사회가 건전하지 못하고 병들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병이 들었을 땐 '적절한 처방'이 꼭 필요하다. 처방만으로 부족하다면 '치료'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까진 치료단계가 아닌 '처방'만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거라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자기 행복을 위한 처방'을 꼭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기 욕망'을 키워나가고, 남들 기준의 성공적인 삶이 아닌 '자기 만족'을 성공기준으로 삼은 삶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모두가 똑같은 개성, 똑같은 재능, 그리고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인데, 어찌 '똑같은 성공'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기준'이라면 가능한 '기준'으로 바꿔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기준'도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만들어가야 마땅하다. 누구나 딱 한 번 사는 삶인데 '내 기준'대로 살아야 더욱 만족스런 삶이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내 삶을 풍족하게 만족시키기 위해 '남의 삶'을 참고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의 삶'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무작정 '따라하기'로 복붙해버리는 삶은 불행의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는 순간부터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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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공동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인도적 대북협력 전략 구상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외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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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남북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다달은 상황에서 '공동대응방안'을 모색하는 내용의 책은 취지를 떠나서 '실현가능성'을 먼저 따져보기 마련이다. 특히, 2024년 북한의 신년사는 "남북은 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적대관계일 뿐이고, 전쟁과 같은 유사상황이 벌어진다면 전적으로 '대한민국'의 책임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평화 협력은 고사하고 전쟁이나 발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런 '벼랑 끝 전술'의 뒷모습에는 날로 악화되는 경제상황으로 인해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과 분노를 '공산당'이 아닌 '다른 곳'으로 분출하도록 정책노선을 다잡은 것이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우발적'인 전쟁발발의 위험성은 언제나 높았기에,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되는 까닭은 '끝장'을 볼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벌어지는 전쟁도 어느 한 쪽이 압도적인 전쟁상황인데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양측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다 못해 '회생불가능'에 가까울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누구 하나 '항복'할 생각도 하지 않고, 국제사회도 그저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고 해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자동참전'을 하게 될 '미군' 때문에 '중국군'도 참전할 가능성이 높고, 덩달아 '대만'까지 전쟁에 휘말려서 결국엔 '미국 vs 중국'이라는 두 나라의 전쟁을 우리가 대신 치루는 '대리전 양상'으로 벌어지면서, 진짜 전쟁을 벌이는 중국과 미국은 별 피해도 없이 '한반도'만 또다시 작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녕 이런 비극이 뻔히 보이는 전쟁을 심심풀이로, 또는 '특정정권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어리석은 짓은 제발 하덜 말길 바란다. 그렇다면 답은 오직 하나다. 아무리 첨예한 갈등으로 치닫는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의 두 나라'는 협력하고 평화를 구축해야만 한다.

 

  이 책은 '대북협력사업'을 시작한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인도적 대북지원부터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그간 남북간의 협력이 꾸준히 지속되어 왔음을 일깨워준다. 특히, '기후변화'에 직면한 북한도 홍수, 가뭄, 태풍, 폭염 등 연이은 자연환경재해가 일어나면서 기후변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해왔다고 한다. 그로 인해 '온실가스 배출량'이 꾸준히 하락한 몇 안 되는 국가들 명단에 오르는 등 북한이 '기후위기'를 맞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도 보여왔다고 한다.

 

  허나 북한의 이런 적극적인 참여의 이면에는 북한의 거의 유일한 에너지이자, 주요에너지인 '석탄채굴'이 대홍수로 인해 급감한 탓이라고 한다. 탄광이 홍수로 물에 잠겨버리자 '효율성 높은 석탄'을 채굴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대신 '뗄감' 사용이 늘어나게 되자 홍수를 막아줄 나무가 사라진 탓에 홍수와 태풍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한 에너지부족 사태는 점점 더 만연하게 된 셈이란 말이다. 그런 까닭에 북한은 '기후위기'를 표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할테니 국제지원을 해달라. 국제지원을 늘려주면 '온실가스감축량'을 원래의 계획보다 더 많이 감축할 수 있다"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북한의 '에너지부족'과 '주민들의 굶주림'이 심각하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도움의 손길이 북한에 닿지 못하는 상황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외부와의 소통'을 꽉 막아버리기도 했고,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라는 도발로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지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지만, 미국은 이러한 북한도발에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왔고, 한 술 더 떠서 '북한의 자금줄'을 더욱 옥죄는 봉쇄정책을 더욱 강화한 탓에 '국제지원'은 좀처럼 시원하게 뚫리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도움을 주던 '남한'마저 정권이 바뀌면서 '대립적인 구도'로 전환하게 되어 북한은 그야말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절대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극한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는 '압력밥솥'의 김을 빼는 것과 같은 지혜를 내놓아야만 한다. 이 책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직간접적인 인적물적교류'를 늘리는 방안과 같은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이 더 유연하고 관대하게 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기후변화'를 넘어 '기후위기'가 극한으로 치닫는 남북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자 뉴스에도 '기후위기'는 시시각각 지구 곳곳을 위협하고 있다. 유럽대륙을 강타한 기상이변은 북유럽을 꽁꽁 얼려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 '외출 자제령'이 내려졌다고 하고, 서유럽에는 태풍과 홍수로 물난리를 겪고 있다고 한다. 24년엔 동아시아에도 '기상이변'이 속출할 거라는 예측이 난무한 가운데 '기후위기'는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새해벽두부터 자연재해는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해 말 중국 사천성(스촨성)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남아 일대와 일본 북서부지방을 강타한 지진으로 대혼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는 큰 피해가 없다고는 하나 '기후위기'도 용케 피해나갈 수 있을지는 장담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피해를 본다면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극한으로 치달은 두 나라의 정치는 못말린다고 하더라도 '기후변화'라는 공동의 위기를 빌미로 '남북협력사업'의 물꼬를 트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 물꼬를 마중물 삼아 영원한 평화와 번영의 길로 함께 나아가면 더욱 좋고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남북공동연구'가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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