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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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 전미연 / 열린책들 (2014) [원제 : Stupeur et tremblements (1999년)]

[My Review MMXXXIII / 열린책들 23번째 리뷰] 아멜리 노통브를 극찬하는 이들은 그녀의 문체에서 '잔인함과 유머'가 공존하고 있다고 설명을 늘어놓는다. 인정한다. 그녀에겐 유머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유머와 함께 곁들여진 '잔혹함'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난 그런 그녀의 문체가 혐오스러워졌다. 그로테스크(기괴함)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잔혹한 유머에 나는 왜 한때 나마 열광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 뿐만 아니다. 그녀의 모든 소설이 다 그렇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보냈던 '나의 찬사' 위에 덧바르는 리뷰를 쓰고자 한다. 잘못 썼다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녀의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2)에 뒤를 이은 '실시간적 배경'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녀의 첫 소설이 공전의 대히트를 치고 난 앞뒤의 '전후사정'을 개인적인 경험담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도 이브도 없는>에서 소회를 밝힌 '연애담(아멜리의 첫사랑)'의 뒷부분에 소개된 '첫 직장 뒷담화(?)'가 이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벨기에 사람 '아멜리'가 고국(?)을 떠나 일본에서 '프랑스어 과외'를 하던 중에 얻어 걸린 '번듯한 직장'에서 경험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본 기업의 문화는 '서양인'에게 쉽게 적응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이질감)를 아주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하여 소개하고 있음으로 일본인 독자들도 하여금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준 아멜리 노통브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식으로 비유하며 정리하자면, 우리 나라에서 태어난 '서양여자'가 다섯 살까지 살다 고국으로 되돌아 갔는데, 어릴 적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고, 그 추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서 어른이 되어 다시 대한민국을 찾아오게 되었고, 그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대한민국'에 눌러 앉기 위해 '직장'까지 얻게 되었는데, 한국의 직장 문화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만 잔뜩 겪다가 꼴랑 1년 만에 '사직서'를 내고서 고국으로 되돌아갔는데, 그 1년 간의 경험담을 소재로 삼아서 쓴 소설을 '고국의 독자들'에게 먼저 선보이고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이다. 고국의 독자들은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직장 문화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서양인이 견뎌내기에 너무도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며 '우스개소리'를 곁들여서 잔혹하게 묘사했는데, 이걸 '한국의 출판사'가 한국의 문화에 대한 서양인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질책(!)으로 받아들이고 버젓이 '뒤침(번역)'을 한 뒤에 출간을 했더니, 한국의 독자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더라는 식이다.

딴에는 이게 맞는 듯 싶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제목조차 너무도 일본스럽기 때문이다. 애초에 '누구'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하는가? 다름 아닌 '일본의 왕(천황)' 앞에서 모두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서양인들도 예외는 없다는 식으로 제목을 갖다 붙이고서, 어느 한 일본대기업의 직장문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문화들을 '일본의 전통(?)'이라면서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대기업이 '외국 사원'을 뽑아놓고 '자국의 문화'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알맞게 적응을 해야 한다고 우겼던 것일까?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아멜리는 점점 더 '한직(한가한 직책)'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끝내는 '화장실'을 사무실 삼아 '화장지 바꾸는 작업(미화원이 해도 될 일)'을 외국계 직원이 해야 마땅할 직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왜 이런 하릴없는 '고급 인력낭비'를 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리고서 이를 '일본 사람들의 체면치레'를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서양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열이면 열, 모두 '일본은 이상한 나라'로 읽고 말 것이다. 왜냐면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정상적인 일본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들조차, 일본기업의 이상한 직장 문화에 특별히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고치려 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서 고초를 겪은 아멜리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전할 뿐, 그녀의 퇴직을 만류하거나 잘못된 '직장 문화'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본의 문화가 원래부터 그런 것이니 '서양 사람'인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극복할 수 없을테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퇴사하는 것이 일본기업이나 당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당연한 조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서술하는데도 이에 대한 비판이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도리어 '아멜리 노통브의 농담'이 시의적절했다면서 이 소설을 계기로 '일본의 문화'를 서양에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앞으로는 더욱 더 '일본의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서양 사람들의 도전을 환영한다는 '프론티어(?) 정신'을 설파하는데 할애하고 있는 듯 싶다. 여기에 한국의 독자들도 '반면교사'로 삼는 누를 범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직장문화도 '잘못되고 고쳐야 할 점'이 많으니, 아멜리와 같은 서양사람들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비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면서 말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동양인이 서양(유럽)의 기업에 취직했다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비판'을 넘어 '맹비난'을 퍼부은 소설을 쓰면, 서양도 그 책을 기꺼이 뒤쳐내어 자국의 잘못된 직장 문화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일게다. 오히려 무례하고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재소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이 소설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걸까? 나는 매우 불쾌하다. 아멜리, 당신이 뭐 돼? 67년생이면 87년도에 일본기업의 문화가 비판을 넘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만큼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 당시 일본의 경제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경제 2위' 달성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어마어마한 성장을 하고, 전세계가 '일본의 선진 기업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그 당시 일본 기업의 행태는 끔찍할 정도의 '고강도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른 '인권유린의 현장'일 수 있지만, 적어도 1999년 당시에만 해도 맹비난을 할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아멜리는 그런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인지, 모르고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 소설을 펴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일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표현은 잊지 않고 꺼내든다. 맹비난을 아낌없이 선사했지만 애정한다는 것만큼은 진심이라는 듯이 말이다.

정녕 사랑하기 때문에 따끔한 회초리를 들고서 사정없이 후드러 팬 것일까? 하지만 사랑했다고 보기에는 소설속에서 묘사된 '일본인의 모습'은 망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어쩜 인간이 '저런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자기(아멜리) 편'을 들어준 일본인에 대한 애정 어린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편'을 들지 않은 일본인에 대해서는 인정사정 없이 뭇매를 선사했다. 인격 이하의 비난도 빼놓지 않고서 말이다. 이런 걸 '유머'라고 할 수 있을까? '잔혹한 유머'라고 설명하면 좀 덜 창피하고 덜 노여울까? 아니, 난 그렇지 않았다. 같은 동양인의 관점에서 굉장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이따위 소설을 '소설'이라고 펴낸 아멜리 노통브에 대해서 노여움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일본을 너무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삐뚫어진 감정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따위 기괴한 애정 표현을 '사랑'으로 포장하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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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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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장 지글러 / 유영미 / 갈라파고스 (2016) [원제 :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ee a Mon Fils (1999년)]

[My Review MMXXXII / 갈라파고스 6번째 리뷰] 이 책의 물음은 간단하다. 지구에 사는 인구가 120억이 넘는다고 해도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넉넉하게 식량을 생산하고 있는데, 왜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어린이들이 굶주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5초에 1명 꼴로 죽어가야만 한단 말인가? 글쓴이는 이런 물음에 명확한 답을 한다. 첫째, '부자들의 욕심'이 너무 과한 탓이고, 둘째, '선진국들의 경제구조적 문제' 때문에 넉넉한 식량을 제대로 나눠주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말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가난한 나라들의 불안정한 정치구조적 문제'를 꼽았고, 마지막으로는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그리고 '전쟁(내전 포함)' 때문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줄기는커녕 점점 늘어나고 있고, 더 큰 문제는 이런 문제가 버젓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래서 '기아 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조차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 이게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일상에서 '가난'에 대해서 잘 배우지 않는다. 90년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크게 선회한 뒤부터는 더욱 그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기아'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는 선생님도 없으며, 교육현장에 몸 담고 있는 선생님들조차 '기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한민국에서는 '광고'에서나마 아프리카 빈민국들의 실상을 보여주며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들에게 후원을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다. 더구나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는데, "한국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 배불리 먹일 생각할 바에야 한국의 빈민들부터 먹여 살려라"라는 목소리가 드높은 실정이다. 불과 70여 년 전에 '외국의 원조'가 없으면 굶주리던 한국 국민들이 하는 소리라고 본다면, 정말 끔찍한 태세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겨낸 가난이고, 굶주림인데 말야. 너희들도 그런 고통에서 면하려면 '근면 성실'하게 일을 해서 정당하게 대가를 받을 생각을 해야지 '구걸'부터 할 요량이면 너희들은 평생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악담(?)을 서슴지 않고 말하기도 한다.

딴에는 틀린 말도 아니지만 실상을 알면 감히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아프리카나 아시아 곳곳의 나라들이 '빈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자국민들을 '기아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까닭은 다름 아닌 '식민정책의 후유증' 때문에 경제성장의 발목이 붙잡혔고, '후진적인 정치관료의 부패'로 인해서 식량원조 받은 것조차 제대로 된 분배 되지 않으며, 심각한 경우에는 해묵은 '정치적 갈등', '경제 이권'을 두고 벌이는 내전으로 인해서 세계적인 구호활동조차 보호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는 '근면 성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다. 실제로 빈국들의 농부들은 정말 열심히 농사를 짓고 생산물을 풍족하게 수확하기도 하지만 '굶주림'을 개선할 수 없는 구조라고 한다. 왜냐면 그들이 생산하는 것은 '자신들이 먹을 것'이 아닌 '외국에 수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들의 정부는 이렇게 수출하고 받은 돈으로 '자국민'들을 먹일 식량을 수입해 오는 방식을 쓰는데, 이게 꽤나 비효율적이기도 하며, 동시에 정부관료의 부패로 인해서 제대로 분배조차 되지 않아 근면 성실한 국민들을 굶주리게 만든다고 한다.

그나마 이렇게 굶주리는 나라는 양반 축에 든다. 내전이라도 벌어지는 나라는 농부들이 일상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터전에 '정부군과 반정부군' 사이의 전투라도 벌어지면 삽시간에 일가족 모두가 사살되기도 하고, '정부군과 반정부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정도로 약탈이 벌어지며, 어느 한 쪽을 돕기라도 하면 반대측에서 끔찍한 보복을 저질러서 일상 생활조차 편하게 할 수 없을 지경에 빠지고 만다.

이런 모든 비극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농부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다. 빈국들의 농사법은 선진국에 비해 '생산량'이 극도로 떨어진다. 비싼 농기계를 쓰지 못할 뿐더러 소와 같은 동물의 힘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온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한다. 그나마 '비료'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어서 오직 '비옥한 땅의 힘'에만 의지할 뿐이고, 그마저도 '날씨(적당한 강수량)'가 돕지 않아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한 해 농사는 망쳐버리고 만다. 그러면 또다시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의 식량원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면 굶주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낭만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선진국 정부가 이런 일련의 '기아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돕겠다고 나서면 '다국적 기업'은 자신들의 경제적 손해를 들어서 이런 정책들을 맹렬하게 반대하고 저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도 이런 반대여론에 부딪혀 '인도주의 정책'을 밀어붙이지 못하고 슬그머니 기업의 편을 들어 슬그머니 지원 정책을 내려놓고 만다. 그럼 UN 같은 곳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좋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하지만, 정작 문제는 '재정적 어려움'을 내세워 이마저도 제대로 원조하지 못하고, 설령 식량원조를 했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나라에 딱 맞는 지원 정책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색(?)내는 용도로 천편일률적인 지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정작 굶주리고 있는 이들에게 제대로 지원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를 테면, 북한의 기아 주민들을 위해 쌀 100만 톤을 지원한다고 해도 이를 정확하고 골고루 분배할 수 있는 인력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북한 주민'이 아닌 '북한 군부대'와 '군간부'가 중간에서 착복을 해도 나몰라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강력한 제재'를 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할 일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 왜냐면 지원 받는 나라에서 '내정간섭'을 하지 말라고 거부하면 딱히 제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인가? 이래서 문제, 저래도 문제라면 도대체 '기아 문제'에 대한 해결법은 없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딱히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왜냐면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세계 사람들의 '공감'과 더불어서 '연대'가 꼭 필요하고, 그리고 이를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기아 문제'에 대한 실태는커녕 그런 일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 해결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가난'은 게으른 사람들의 필연이고, 이들을 돕는 일은 '게으름'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게으름'을 조장하는 일이라면서,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을 철저한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서 죽어버려도 괜찮은 사람들로 치부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인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를 '구조적 문제'라고 하는데,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해도 부를 쌓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의 문제'가 가난한 이들이 늘어나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오늘날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완전자유시장'을 추구하기보다는 '강력한 정부의 규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부의 재분배'가 실현되어야 하고, '복지정책'을 늘려서 먹고 사는 문제만이라도 해결해주어야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세금'을 늘리고(부의 재분배), '복지 정책'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부자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반발이 심해진다는 점이다. 이들의 불만은 '경제불황'을 불러왔고, 사회 전반에 경제 침체를 불러와서 모든 사람들이 살기 힘들게 만든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다시금 '부익부 빈익빈 문제'를 불거지게 만드는 악순환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자들도 만족하고, 빈자들도 행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방안이다. 왜냐면 부자들이 빈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주머니를 열고서 자발적인 '부의 재분배'를 이루어야 하며, 동시에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고 유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세금'을 납부하고, 넉넉한 '복지 정책'으로 온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여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럼에도 글쓴이인 장 지글러는 '낭만적인 해결법'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우리가 '기아의 고통'을 제대로 알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면 적어도 '배가 고파서 죽는 어린이'가 발생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당신은 전세계적으로 5초에 1명 꼴로 어린이들이 굶어서 고통 받다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셈인가 라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답할 사람이 아직 많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지)'을 모으면 문제 해결은 오히려 쉬울 수 있다고 당부를 하기도 한다. 다분히 '측은지심'에 호소하는 소극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오히려 실현가능한 방법 같지 않은가? 몰랐다면 돕지 않겠지만 알고 나면 돕지 않을 수 없다면서 말이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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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
이우혁 / 들녘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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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 :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  이우혁 / 들녘 (1994)

[My Review MMXXXI / 들녘 6번째 리뷰] <퇴마록> 애니메이션이 개봉하면서 다시금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물론 '개봉작'을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했다. 그리고 작가 이우혁이 "이것은 '퇴마록'이 맞다"고 인정할 만큼 싱크로율이 높은 작품이었다. 원작소설의 팬들이라면 다들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다만 '원작'과 '애니'와의 간극은 있다. 우선, 무려 30년이라는 '시공간의 차이'가 발생했다. 단순히 시간만 흘러간 것이 아니라 '원작소설'의 주무대가 된 공간조차 세월에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1994년에는 '핸드폰'이 있긴 했지만 크기가 무려 '벽돌'만해서 벽돌폰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2025년에는 '스마트폰'을 전국민이 하나씩 가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올드팬들은 '향수'에 젖어 들고 '추억'에 흠뻑 빠져들 수 있겠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감동은커녕 '공감'조차 할 수 없는 대목일 것이다. 그래서 '퇴마록씨네마유니버스(이후 '퇴씨유')'가 필요할 것이다. 정확히는 '애니메이션'이 되겠지만, 뭐 어쨌든, 원작소설과는 사뭇 다른 '퇴씨유'의 세계관으로 대폭 바뀌어서 <퇴마록> 애니메이션이 올드팬과 젊은 세대를 모두 아우르는 접점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원작소설'과는 사뭇 다른 '애니메이션'의 줄거리가 어떻게 전개될지 몹시 궁금할 따름이다. 마치 '마블코믹스의 원작만화'가 <어벤져스>라는 MCU(마블시네마유니버스)라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다시 재정립한 것처럼 말이다. 첫 번째 애니에서는 <퇴마록 국내편 1권>의 내용을 십분 활용하여 네 명의 퇴마사들이 모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교주가 폭주해서 악령으로 등장하는 '하늘이 불타던 날'을 주요 테마로 삼아 줄거리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올드팬들은 성당에서 '대악마 아스타로트'가 처음부터 등장하는 장면에서 전율했을 것이다. 원래는 <퇴마록 세계편 3권>의 마지막 장면인 블랙서클을 이끄는 마스터가 불러낸 악마였는데, 이를 살짝 비틀어서 <퇴마록 국내편 1권>에 나오는 '파문 당한 신부'의 클리세를 오브지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나중에 합류하는 '현승희'까지 함께 만나는 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현승희가 '애염명왕의 아바타라'였는데, 박신부 앞에 나타난 아스타로트를 제압하기 위해서 현승희의 몸에서 몸소 밖으로 힘을 표출하여 막아내는 장면까지 연출하였다. 아쉽게도 승희의 등장은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엔딩 쿠키영상'에서 성당에서 기절하여 쓰러진 현승희의 스마트폰 액정에 '현웅(승희의 아버지)'이 등장하였기에 <퇴마록 애니메이션 2편>이 굉장히 기대가 된다. 여기 <퇴마록 국내편 2>의 제목이 바로 '승희의 아버지'가 등장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승희가 퇴마사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작컨대, 애니메이션 <퇴마록 2편>은 승희의 합류를 다룬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로 시작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현암의 무기인 '월향검'이 1편에서는 등장하지 않았기에, 2편에서는 '귀검 월향'에 대한 서사도 함께 서술해야만 한다. 그래야 2편의 주요 줄거리인 <생명의 나무 : 사악한 뱀신의 등장, 브리트라>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1편에선 해동밀교의 교주가 <해동감결>에 적혀 있는 예언을 바탕으로 서교주 자신이 해동밀교를 크게 부흥시킬 적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데 반해서, 2편에서는 아마도 '잘못된 신앙심'으로 말미암아 '사악한 주문'조차 영생을 하려는 인간의 삐뚤어진 욕망으로 실현되는지 스펙타클하게 보여줄 것이다. 1편에서도 박신부와 이현암, 그리고 장준후가 보여주는 '퇴마합진'이 화려한 영상미를 보여줬다면, 2편에서는 새로 합류한 '현승희'가 더욱더 강렬한 '퇴마합진'의 힘을 보여줄 것이다. 왜냐면 현승희의 능력이 바로 '퇴마사들의 영능력'을 더욱 높여주고 '힘'도 증폭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원작소설 <퇴마록 국내편 2>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부분은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와 '귀검 월향', '생명의 나무'. 이렇게 세 편이다.

하지만 '태극 기공'에서는 현암이 한빈거사와 도혜 스님에게 각각 받은 '무예 실력'과 '70년 내공'으로 얼마나 대단한 기공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배경지식이 되는 내용이라 꼼꼼하게 읽어두면 좋다. 게다가 '영을 부르는 아이들'은 장준후의 능력과 선한 마음씨를, '낙엽이 지는 날이면'과 '귀화(鬼火)'는 이현암의 강인함 이면에 숨겨진 세심함을, '아무도 없는 밤'에서는 뒤늦게 발현되는 현승희의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원작소설이 좀 낯선 세대들도 있을 것이다. '영을 부르는 아이들'에서는 친구에게 직접 전화통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네 '집전화'로 전화를 걸어서 '친구의 어머님'이 연락을 받고서 친구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낙엽이 지는 날이면'에서는 스마트폰에서 직접 받은 스트리밍으로 바로 '연주곡'을 다운받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태여 '레코드판(LP판)'을 사모으며 음악을 감상한다는 설정이 꽤나 올드해 보이고, '귀화'에서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캐비넷 속 중요서류들'이 불에 타서 난감해 하는 직원들의 풍경이 꽤나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지금 같으면 '서버실'에서 화재가 나서 '데이터'가 모두 타버렸다고 설정을 바꿔야 할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밤'에서는 난데 없는 '하이텔'이 등장해서 '랜선'도 아닌 '전화선'을 타고서 통신을 주고 받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지금은 구경하기도 힘든 '투견장의 살풍경'이 묘사되기도 했는데, 애견인구 1000만을 돌파한 현시점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퇴마록>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퇴마사들이 사악한 악령을 퇴치하는 장면만이 아닌 '악령으로부터 구하려는 하나 뿐인 목숨과 순수한 영혼'에 대한 숨가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비록 퇴마사들은 악령을 퇴치하다 죽을지언정 '단 한 사람의 목숨과 영혼'이라도 살려내려 들고, 심지어 '악령의 조종'을 받아 제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퇴마사들의 목숨을 앗아갈 지경에 이를지라도 퇴마사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려 든다. 이 얼마나 숭고한 사명감이란 말인가. 이게 진짜 멋진 모습이다. 마치 화재가 발생하면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어서 화마가 앗아가려는 '한 생명'을 구해내는 소방관의 모습과 겹쳐 보일 정도다. 우리는 자신의 안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위험한 현장에서도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분들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느냔 말이다. 퇴마사들도 바로 그런 영웅과 다를 바가 없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활약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과연 3권에서는 어떤 감동스럽고 영웅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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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레벨업 7
추공 지음, 이백 그림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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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레벨업 7>  추공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2019)

[My Review MMXXX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7번째 리뷰] 판타지 소설을 읽다 보면 '세계관'이 갑자기 확장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특히 '성장형 주인공'이 등장하면 어김없이 '세계관 확장'을 마주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세계관 확장'이 늘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독자들마다 '호불호'가 갈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리하게 세계관을 확장시킬 경우에는 독자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꼴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다. <나 혼자만 레벨업>도 바로 그런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E급 게이트에서도 간신히 목숨만 건질 수 있는 형편없는 실력의 주인공이 '시스템의 도움'으로 계속 레벨업을 할 수 있는 '플레이어'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게 D급, C급, B급과 A급을 넘어 드디어 S급 헌터의 실력을 넘어서게 되니, 국내에 한정된 세계관으론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기왕 넘어버린 S급 헌터의 실력중에서도 극강의 레벨인 '국가 권력급 헌터'로 거듭나자, 이제 '성진우 헌터의 무대'는 제주도를 넘어 일본, 급기야 미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렇게 미국에서까지 '국가 권력급 헌터들'을 떡 주무르듯이 다루고 나자, 이제는 더 성장할 필요가 없을 듯 싶을 정도로 너무 성장해 버렸다. 그런 성진우 헌터 앞에 등장한 무대가 바로 '절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지배자들'과 '군주들'의 전쟁이었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세계관'에 당혹해 할 독자들을 위해 살짝 정리를 하자면, 인간들이 사는 지구에 느닷없이 '게이트'가 열리고, 그 게이트를 통해서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마수'들에 의해 무참히 살육 당하는 인간들이란 설정은 다름 아닌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진 두 존재, '일곱 지배자들'과 '아홉 군주들'이 안배(?)해 놓은 덫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저들끼리 싸우다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무(無)'로 되돌려놓자 저들의 여흥(?)을 위해서 싸움터를 '인간'들이 살고 있는 지구로 바꾸기 위해서, 지구를 '마력'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열어 놓은 문이었던 것이다. 그 '마력'이 넘쳐나야 '지배자'와 '군주' 들은 자신들이 가진 마력을 효율적으로 뿜어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인간을 도축하기 위해서 '사료(?)'를 먹이는 꼴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르려나... 암튼, '게이트'를 통해서 다른 세상에 가득했던 '마력(마나)'을 지구에 골고루 뿌리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헌터의 등장'은 뭐란 말인가? 어차피 '마력'이 넘쳐나게 되면 마력을 이겨내지 못하는 존재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성진우의 엄마가 걸렸던 '익면증'도 바로 그런 증거 가운데 하나다.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애초에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마력에 적응해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좋을 까닭은 없다. 그렇게 살아남은 소수는 어차피 '다른 공간'에 찾아온 지배자와 군주 들에 의해서 모조리 파괴될 운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헌터들이 등장한 까닭은 조금이라도 빨리 지구 곳곳에 '마력'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다. 인간들이 '게이트 사냥'을 통해서 얻은 '마정석'과 '마나석' 따위를 에너지원으로 삼아서 쓰면 쓸수록 다른 공간의 물질인 '마력'을 지구 곳곳에 널리 퍼뜨릴 수 있고, 그렇게 마력이 충만해지면 지배자들과 군주들이 활동하기 더 좋기 때문에 '헌터들'이 유용하게 쓰였던 것이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지배자와 군주 들간의 싸움에서 '그림자 군주'가 지배자들과 싸우고 있는 도중에 동료 군주들에게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배신을 당한 까닭은 '그림자 군주'가 가진 힘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림자 군단'이 점점 늘어나게 되어서 '적들'조차도 자신의 군대로 삼아버리는 어마어마한 스킬능력이 두려워서 '그림자 군주'가 지배자들과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그림자 군주'를 홀로 왕따(?)시켜 버리고 배후를 친 것이다. 그렇게 '그림자 군주'는 소멸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림자 군주'의 죽음은 달랐다. 애초에 '죽음'을 맞이한 존재를 자신의 군대로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지라 '자신의 죽음'조차 극복(?)해낼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캐릭터가 바로 '성진우'였던 것이다. 그리고 군주들에 의해서 몰살 당할 위기에 처한 '지배자들'도 자신들이 소멸되기 전에 '파편'을 남겨두어 인간들에게 숨어 들었고, 그렇게 해서 여느 인간헌터보다 '초월한 능력'을 갖게 된 '국가 권력급 헌터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헌터들이 아직은 마력이 충만하지 않은 지구에 먼저 찾아온 '군주들의 졸개(카미쉬)'를 처치하는데 빛나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뭐, 이렇게 설명을 늘어놓아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은 직접 읽고 느껴야 '판타지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각설하고, 지난 줄거리에서 아홉 군주들 중 하나의 습격을 받아 '고건희 협회장'이 암살 당하고 말았다. 알고 보니, 고건희 협회장도 초기에 탄생한 헌터들 중 '국가 권력급 헌터'에 속했던 헌터였고, 그의 내면에는 '지배자의 파편'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국가 권력급 헌터'만큼 실력을 뽐내지 못했던 까닭은 '헌터'로 각성했을 때가 70세에 가까운 나이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무리 엄청난 힘을 가졌더라도 '노화된 몸'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령의 나이에 각성한 것 때문에 '엄청난 마력'을 지녔음에도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존재감'만은 국가 권력급 헌터 못지 않았기에 대한민국 헌터협회를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군주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 때문에 '그림자 군주'로 재각성한 성진우를 '군주'가 아닌 '인간의 편'에 서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인간인 성진우가 '인간'이 아닌 '군주의 편'에 설 수도 있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왜냐면 어차피 '게이트'를 통해서 마력이 점점 더 넓고 짙게 퍼지고 나면 지구는 '군주들의 사냥터'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마력'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소수의 '헌터 인간'만이 살아남는 최악의 환경으로 변할 것이 틀림없고, 그렇게 살아남은들 결국엔 '군주들의 사냥감'이 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진우'는 인간으로 남아 '사냥'을 당할 것인지, 아니면 군주로 남아서 죽음도 초월한 존재로 '영생'을 누릴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런데 성진우는 '그림자 군주'로 각성한 뒤에도 '인간의 편'으로 남기를 바랐다. 왜 그랬을까?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과연 '인간의 편'을 들기로 한 성진우는 나머지 군주들의 반격을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까? 과거에도 한 차례 '패배'를 했던 그림자 군주였는데 말이다. 이제 마지막 한 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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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1 -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퇴마록
이우혁 지음 / 들녘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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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1 :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이우혁 / 들녘 (1994)

[My Review MMXXIX / 들녘 5번째 리뷰] 정말이지 2025년은 '퇴마록의 부활'을 알리는 새로운 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어 개봉하고, 또 <퇴마록 말세편>의 후속편이 조만간(6월 예정) 출간된다고 하니 말이다. 작년에 우연히 꺼내든 <퇴마록>으로 리뷰를 하고 있던 것이 참으로 마침맞게 딱 떨어져 더욱 생생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오디오북'까지 오픈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오디오북'으로 감상을 시작하다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장'하고 있던 <퇴마록>을 꺼내서 펼쳐놓았다. 그리고 눈으로 듣는 듯 생생하게 펼쳐지는 감동을 만끽했다. 더구나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관람하고 왔기에 내 눈앞에는 '이미지 영상'까지 화려하게 펼쳐지는 듯 했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읽고 또 읽으며 상상만 했던 일이 무려 30년 만에 실제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게 된 것이다. 정말 감동이다.

이번에 '오디오북'에 참여한 성우진들은 내게는 꽤 낯선 분들이었다. 하긴 내게 익숙한 성우 분들은 빨간머리 앤의 '고 정경애'분, 달려라 하니 홍두깨 선생님의 '고 장정진', 그리고 맥가이버의 '배한성' 성우이니 말이다. 암튼 박신부 역에 '곽윤상 성우', 이현암 역에 '민승우 성우', 장준후 역에 '김율 성우', 현승희 역에 '이주은 성우', 그리고 나레이션에 '장민혁 성우'가 참여했단다. 지금은 낯선 분들이지만 앞으로는 기억할 것이다. 내게 <퇴마록>은 영원할테니 말이다. 지금도 '내 기억'속에는 어릴 적 성우 분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곤 한다. 그것처럼 <퇴마록>도 그러할 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퇴마록>에 열광할 수밖에 없을까? 94년도에 군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만해도 그저 '세기말 현상'으로 여겼을 뿐이다. 새천년을 맞이하기 전에 '세기말 분위기'가 정말 판을 쳤기 때문이다. 나라꼴도 엉망이어서 '삼풍백화점'이 폭삭 무너지더니 뒤이어 '성수대교'까지 아침 출근시간이 막 끝나갈 무렵에 들려온 소식에 정말이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군을 제대하고 복학을 하니 IMF시대가 똭하고 차려졌다. 거리마다 노숙자들이 넘쳐났고 취업을 알아보고 있던 시절인데 기업들마다 '부도'할지도 모른다는 뒤숭숭한 이야기만 들려오던 우울한 나날이었다. 95년도만 해도 'OECD 가입'이라면서 선진국 운운하던 분위기는 어는 순간부터 싹 사라지고 '국가부도'라는 비상사태가 펼쳐지던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젊은 청춘이었던 내 또래들은 넘쳐나는 에너지를 쏟아낼 곳이 필요했다. 가뜩이나 오렌지족이니 낑깡족이니 하면서 고급(?)지게 놀고 자빠졌어야 할 나이였으니 뭐라도 해볼 탈출구가 필요했었다. 그 당시의 나는 '가난'이란 짐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누군가처럼 흥청망청 노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빠져든 것이 '판타지 세계'였다. 무일푼이던 내가 빠져들 수 있는 '최적의 코스'였다. 그렇게 나는 당시 한국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던 '새로운 세계'로 탈출 아닌 도피를 한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도피처럼 마주한 '판타지 세계'는 아주 놀라운 세상이었다. 더구나 '한국형 판타지'가 이제 막 시작되는 <퇴마록>의 기세는 날마다 기록을 갱신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해도 '온라인 서점'이 없었기에 대형서점부터 동네서점까지 <퇴마록>은 들여오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조금만 늦어도 '재고'가 부족해서 몇 주를 더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아예 '신간출간' 소식이 들리고 한참 뒤에 서점에서 느긋하게 사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엔 정가 5500원이었고, 동네서점에선 단골손님에게 500~1000원 정도 깎아주었기 때문에 나는 4500원 정도에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정도도 내겐 부담스런 가격이었다. 라면 하나가 2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 돈이면 라면 20개를 사먹을 돈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퇴마록>을 사모으는 것에는 아깝지가 않았다. 분명 읽고 또 읽을테니 말이다. 그때 정말 이 책을 얼마나 즐겨 읽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좋았다. 현실세계의 비극을 다 잊고 살 정도로 말이다.

그럼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읽었나? 어릴 적부터 '오컬트 장르'를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에 종교의 신비주의, 초능력과 고대주술, 그리고 무협의 세계는 '내 전공분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너무 심취했었다. 그래서 박신부의 기도력, 이현암의 초월한 무공, 장준후의 화려한 주술력, 그리고 현승희의 아바타라와 마음을 읽어내는 초능력이 내 눈을 완전 사로잡았다. 하지만 좀 더 읽어나가다보면 그것만이 <퇴마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 지옥불에 타죽어도 시원치 않을 악당들조차 불쌍히 여기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퇴마사'들의 행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서양의 퇴마사들은 악당이라면 그저 처치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절대로 용서하는 법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근데 '퇴마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천인공노할 끔찍한 죄를 저질렀는데도 그들의 죄를 '심판'하지 않고, 인간이기에 도리어 '죽을 위기'에서 목숨을 건져내곤 한다. 그로 인해 자신들의 '안위'는 걱정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린가 싶었다. 처음엔 말이다.

퇴마사들이 가진 능력은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지닌 초능력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아니 슈퍼맨이나 배트맨은 할 수 없는 '원혼들의 저주'로부터 죄 없는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아니 '죄 많은 사람들'마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면서 구원해주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세상 모든 '원죄'를 한 몸에 지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은 죄를 '대신' 속죄하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신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현생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퇴마록>을 거듭해서 읽으면서 이런 '퇴마사들의 행보'를 이해하려 했으나 젊은 시절의 나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퇴마사들의 손발놀림 하나하나가 숭고해보였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매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일이라는 것에 눈을 떴던 것이다.

여중생을 납치해다가 성폭행을 저지르고 술집 접대부로 팔아넘기거나 외국 성매매업소에 팔아치우던 인신매매범이 처참한 꼴로 하나씩 죽어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원인을 알 수 없어 수사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놈들이니 꼴좋다고 남몰래 속시원해 하고 있던 사건이 생겼다. 이를 파헤치는 기자들도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면서 '사필귀정'이라 대대적인 보도는 하지 않고 있지만, 너무도 끔찍하게 살해된 시신들을 보면서 절로 욕지기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건 소식을 접한 당신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죽을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죄값을 치뤄야 하는 것이 맞긴 한데, 사람이 벌을 주면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놈일지라도 '저지른 죄'에 비해 '형편 없는 벌'을 받고 풀려났을 거라고 분개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만 불쌍히 여기고, 자신은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 만을 바라는 것에서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런데 퇴마사들은 그렇게 죽어 마땅한 놈일지라도 일단 그들이 '사람'이 아닌 '귀신'에 의해서 처참하게 죽어나간다면 옳지 못하다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원귀'의 행위를 막고 한을 풀어준 뒤에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귀신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고, 자신들의 영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겪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여기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퇴마사들은 왜 그러는 걸까? 그냥 원귀가 나쁜놈들을 죽여버리면 속시원하고 좋을 텐데 말이다. 한마디로 '권선징악의 표본'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천벌'도 그러한 원리이고 말이다. 그런데 퇴마사들은 '이세상 일'은 이세상 사람들이 '저세상 일'은 저세상 귀신들이 따로따로 분리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아무리 이세상에 문제가 많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저세상의 힘'을 빌려오는 것을 막으려 한다. 그게 '순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의 흐름을 자연 그래도 두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간혹 너무 적거나 너무 많아져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물의 흐름대로 놔두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다. 이때 사람의 개입을 해서 '물의 방향'이나 '물의 길'을 살짝 바꾸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그게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 '물의 흐름'을 거슬러서 아예 반대로 흐르게 하거나 꽉 막아버리려 들면, 이는 뜻하지 않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퇴마사'들이 등장해서 물의 흐름을 원래대로 바꾸어 놓는 것, 이게 '이야기의 핵심'이다.

기본적으로 퇴마사들의 행보는 '자연 그대로'를 추구하려 하고, 그 다음에는 '인간에게 이로운 방향'을 추구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아무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천기'를 거스르는 일이라면 막으러 나서고, 아무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세상이 아닌 저세상의 힘을 빌어서 하는 일이라면 결단코 막아선다. 왜냐면 세상의 기운이라는 것이 '조화'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에 '한쪽'이 이익을 얻으면 '다른쪽'은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그럼 그 손해 본 쪽에서 손해 본만큼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힘의 작용'이 생겨서 조화를 깨뜨리게 된다. 그리고 그 조화가 깨지는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은 피해를 볼 수도 있기에 퇴마사들은 그런 '조화'를 깨뜨리려는 세력들에 대해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막아선다. 정작 퇴마사들은 원하는 것도 하나 없이 말이다. 그저 애꿎은 사람들이 희생 당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 자신들은 죽다 살아나는 위험천만한 일을 겪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퇴마록>을 읽으면서 울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난 울었다. 내게는 그냥 재미만 주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퇴마록>의 '구판'이지만, '최신판'이 나오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싹 정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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