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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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 전미연 / 열린책들 (2014) [원제 : Stupeur et tremblements (1999년)]

[My Review MMXXXIII / 열린책들 23번째 리뷰] 아멜리 노통브를 극찬하는 이들은 그녀의 문체에서 '잔인함과 유머'가 공존하고 있다고 설명을 늘어놓는다. 인정한다. 그녀에겐 유머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유머와 함께 곁들여진 '잔혹함'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난 그런 그녀의 문체가 혐오스러워졌다. 그로테스크(기괴함)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잔혹한 유머에 나는 왜 한때 나마 열광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 뿐만 아니다. 그녀의 모든 소설이 다 그렇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보냈던 '나의 찬사' 위에 덧바르는 리뷰를 쓰고자 한다. 잘못 썼다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녀의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2)에 뒤를 이은 '실시간적 배경'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녀의 첫 소설이 공전의 대히트를 치고 난 앞뒤의 '전후사정'을 개인적인 경험담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도 이브도 없는>에서 소회를 밝힌 '연애담(아멜리의 첫사랑)'의 뒷부분에 소개된 '첫 직장 뒷담화(?)'가 이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벨기에 사람 '아멜리'가 고국(?)을 떠나 일본에서 '프랑스어 과외'를 하던 중에 얻어 걸린 '번듯한 직장'에서 경험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본 기업의 문화는 '서양인'에게 쉽게 적응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이질감)를 아주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하여 소개하고 있음으로 일본인 독자들도 하여금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준 아멜리 노통브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식으로 비유하며 정리하자면, 우리 나라에서 태어난 '서양여자'가 다섯 살까지 살다 고국으로 되돌아 갔는데, 어릴 적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고, 그 추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서 어른이 되어 다시 대한민국을 찾아오게 되었고, 그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대한민국'에 눌러 앉기 위해 '직장'까지 얻게 되었는데, 한국의 직장 문화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만 잔뜩 겪다가 꼴랑 1년 만에 '사직서'를 내고서 고국으로 되돌아갔는데, 그 1년 간의 경험담을 소재로 삼아서 쓴 소설을 '고국의 독자들'에게 먼저 선보이고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이다. 고국의 독자들은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직장 문화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서양인이 견뎌내기에 너무도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며 '우스개소리'를 곁들여서 잔혹하게 묘사했는데, 이걸 '한국의 출판사'가 한국의 문화에 대한 서양인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질책(!)으로 받아들이고 버젓이 '뒤침(번역)'을 한 뒤에 출간을 했더니, 한국의 독자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더라는 식이다.

딴에는 이게 맞는 듯 싶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제목조차 너무도 일본스럽기 때문이다. 애초에 '누구'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하는가? 다름 아닌 '일본의 왕(천황)' 앞에서 모두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서양인들도 예외는 없다는 식으로 제목을 갖다 붙이고서, 어느 한 일본대기업의 직장문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문화들을 '일본의 전통(?)'이라면서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대기업이 '외국 사원'을 뽑아놓고 '자국의 문화'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알맞게 적응을 해야 한다고 우겼던 것일까?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아멜리는 점점 더 '한직(한가한 직책)'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끝내는 '화장실'을 사무실 삼아 '화장지 바꾸는 작업(미화원이 해도 될 일)'을 외국계 직원이 해야 마땅할 직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왜 이런 하릴없는 '고급 인력낭비'를 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리고서 이를 '일본 사람들의 체면치레'를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서양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열이면 열, 모두 '일본은 이상한 나라'로 읽고 말 것이다. 왜냐면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정상적인 일본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들조차, 일본기업의 이상한 직장 문화에 특별히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고치려 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서 고초를 겪은 아멜리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전할 뿐, 그녀의 퇴직을 만류하거나 잘못된 '직장 문화'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본의 문화가 원래부터 그런 것이니 '서양 사람'인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극복할 수 없을테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퇴사하는 것이 일본기업이나 당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당연한 조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서술하는데도 이에 대한 비판이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도리어 '아멜리 노통브의 농담'이 시의적절했다면서 이 소설을 계기로 '일본의 문화'를 서양에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앞으로는 더욱 더 '일본의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서양 사람들의 도전을 환영한다는 '프론티어(?) 정신'을 설파하는데 할애하고 있는 듯 싶다. 여기에 한국의 독자들도 '반면교사'로 삼는 누를 범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직장문화도 '잘못되고 고쳐야 할 점'이 많으니, 아멜리와 같은 서양사람들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비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면서 말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동양인이 서양(유럽)의 기업에 취직했다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비판'을 넘어 '맹비난'을 퍼부은 소설을 쓰면, 서양도 그 책을 기꺼이 뒤쳐내어 자국의 잘못된 직장 문화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일게다. 오히려 무례하고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재소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이 소설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걸까? 나는 매우 불쾌하다. 아멜리, 당신이 뭐 돼? 67년생이면 87년도에 일본기업의 문화가 비판을 넘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만큼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 당시 일본의 경제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경제 2위' 달성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어마어마한 성장을 하고, 전세계가 '일본의 선진 기업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그 당시 일본 기업의 행태는 끔찍할 정도의 '고강도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른 '인권유린의 현장'일 수 있지만, 적어도 1999년 당시에만 해도 맹비난을 할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아멜리는 그런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인지, 모르고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 소설을 펴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일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표현은 잊지 않고 꺼내든다. 맹비난을 아낌없이 선사했지만 애정한다는 것만큼은 진심이라는 듯이 말이다.

정녕 사랑하기 때문에 따끔한 회초리를 들고서 사정없이 후드러 팬 것일까? 하지만 사랑했다고 보기에는 소설속에서 묘사된 '일본인의 모습'은 망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어쩜 인간이 '저런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자기(아멜리) 편'을 들어준 일본인에 대한 애정 어린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편'을 들지 않은 일본인에 대해서는 인정사정 없이 뭇매를 선사했다. 인격 이하의 비난도 빼놓지 않고서 말이다. 이런 걸 '유머'라고 할 수 있을까? '잔혹한 유머'라고 설명하면 좀 덜 창피하고 덜 노여울까? 아니, 난 그렇지 않았다. 같은 동양인의 관점에서 굉장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이따위 소설을 '소설'이라고 펴낸 아멜리 노통브에 대해서 노여움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일본을 너무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삐뚫어진 감정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따위 기괴한 애정 표현을 '사랑'으로 포장하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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