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생각하는 아이
안노 미쓰마사 지음, 황진희 옮김 / 한림출판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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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는 아이>  안노 미쓰마사(安野 光雅) / 황진희 / 한림출판사 (2019)

[My Review MMLVIII / 한림출판사 3번째 리뷰] 안노 미쓰마사는 20세기 일본의 미술 거장으로 알려졌지만, 교육에도 크게 관심이 많아서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미술 교사'로 활동하기도 하고, 교사를 그만 둔 뒤에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집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단다. 그가 그린 <이상한 그림책>(비룡소, 2006)은 '글자'가 하나도 없는 그림책으로도 유명하지만,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의 기법을 착안해서 그림책을 선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단다. 전쟁의 먹구름으로 암울했던 패전 뒤의 일본 어린이들에게 '교과서'조차 마련하지 못한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이 습득한 '지식'에 근거해서 참교육을 실현시키려 애쓰던 교육가로도 알려져서 일본에서는 꽤나 유명한 인물이며, 서양 미술계에서도 '일본의 거장'으로 소개되어 널리 알려진 미술가이자, 교육가란다.

그래서 그가 쓴 이 책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는 굉장히 교육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담긴 '교육적인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 대부분이고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라 아쉽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글쓴이가 무려 1926년 생이라서 그렇다. 무려 100년 전 사람이 쓴 참신한 내용이라, 그가 주장하는 '어린이교육'에 대한 참신한 시선은 모를 것이 없을 정도로 다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를 만들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어린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최고이니, 어른들(특히, 선생님과 학부모)은 좀 빠져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나가는 즐거움을 익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배우고 익히는데 가장 좋은 학습법은 다름 아닌 '놀이를 통한 공부'라면서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고 웃고 떠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주장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 아닌가?

문제는 그 방법이 정말 좋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데, 그 방법으로 '최적의 학습법'을 터득해서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로 성장하기까지 성공한 예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대한민국 교육도 그렇지만 일본도 아이가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여유'가 없기로 유명하다. 나이가 차면 '학년'이 올라가야 하고, 학습역량이 부족한 학생이 있다면 '보충수업'이라도 해서 억지로 학습수준을 맞춰서 진학을 시키며, 공부 재능이 없는 학생은 교사도 포기(?)하고 그냥 조용히 지내다 졸업하기만을 기다리는(?) 불성실한 교육체계로 뭇매와 질타를 받기 일쑤다.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는 결코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거의 드물고 선천적으로 이미 터득하고 있는 천재가 아닌 이상, 스스로 학습법을 시전할 수 있는 역량을 갖기까지 제대로 된 학습방법은 없다시피한 게 안타까운 교육 현실이다.

왜냐면 교사나 학부모의 '학습 개입'이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아이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읽을 때도 아이가 그림 속에 푹 빠져서 헤엄을 치며 놀다가 '이건, 저기에서 봤던 거고, 저건, 여기에서 봤던 건데, 이런 원리가 담겨 있었구나'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전에, 선생님이 먼저 "여러분, 14쪽을 펼쳤나요? 거기에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죠.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힌트는 바로 '물 속에 사는 동물'이에요. (3초 후) 모두들 찾았나요? 아직도 찾지 못했다면 그림책을 뒤집어서 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제 찾았죠? 맞아요. 깊은 숲 속 그림인데 그 속에 '고래 한 마리'가 숨어 있었어요. 다 찾은 학생들을 위해서 모두 박수 짝짝짝! 자, 이제 다음 쪽에서 또 찾아볼까요?" 한정된 수업시간(40분 정도)에 2~30명이나 되는 학생들에게 똑같은 '학습진도'를 나가고, 똑같은 '학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란 것을 십 분 공감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학습법'을 터득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 가운데 몇 명이라도 이 수업을 한 뒤에 '그림책 속에는 우리가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미지의 지식세계'가 담겨 있으니 그걸 찾기 위해서 충분히 깊이 생각하는 공부습관을 들여야 해. 그리고 보는 시선에 따라서 잘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니까 '다른 시선'으로 보려는 시도도 충분히 해야지. 그럼 나중에는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공부라는 건 정말 재밌는 거잖아ㅎㅎ' 이란 생각을 하는 어린이가 생기겠냔 말이다. 더구나 '공부가 재밌다'는 것까지 터득한다고? 정말 꿈 같은 일이다. 학부모들은 더 가관이다. '자기 눈(어른의 시선)'에 보이는 것을 아이가 찾으면 대만족을 하고, 그렇지 못하면 '대실망'을 하면서 아이 앞에서 천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가 얼마 텀을 두지도 않고서 바보라고 근심걱정을 늘어놓는 바람에 자녀들이 '스스로 학습법'을 터득하기도 전에 엄마의 예민함에 '경기'부터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엄마에게 혼난다는 '경험'만 잔뜩 길러주어서 자녀가 공부를 더 좋아하기는커녕 점점 더 싫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위인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부터 특출한 성향을 보여주었다가 아니다. 대개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경우가 더 많고 어떤 '특별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평생을 그 일에 매진을 하다가 세계적인 위업을 달성한 위인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에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을 맹신하여 소중한 제자나 자녀를 망쳐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하지 않길 바란다. 그나마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다른 사람들보다 '경험'을 많이 겪었다는 점이다. 물론 '직접 경험'을 많이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비교적 짧은 어린 시절에 남들보다 월등히 많은 경험을 축척하려면 '독서(간접 경험)'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은 모든 어린이가 '위인'이 되지는 않지만, 세상의 모든 위인은 수많은 책을 읽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니다. 더구나 세계 명문가로 손꼽히는 집안에서는 '특별한 서재'를 갖추고 있는 경우도 참 많다. 어린 시절에 그 서재에서 온갖 영감을 얻었다가 어른이 되어서 특출난 업적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위인전'에 소개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런 서재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토마스 에디슨의 경우에는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빌려다 읽었다고 소개하곤 한다. 특히 '에디슨 독서법'이라고 해서 A부터 시작해서 책장에 꽂힌 책을 순서대로 모두 읽어재끼는 독서법은 지금도 유명하기도 하다. 물론 현재는 너무 책이 많은 환경이라서 그리 권장하는 독서법은 아니지만 말이다.

암튼,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만드는 최적의 방법에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리고 '책 속의 정답'을 가르쳐주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학습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도 소개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늘날처럼 방대한 정보를 습득해야 하고 발빠르게 정보 처리를 해야하는 시대에는 걸맞지 않는 학습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책을 던져주고서 스스로 터득하라는 것보다는 이 책에서 터득해야 할 것은 '이런 것'이야, 그것을 찾을 때까지 꼼꼼하게 읽어보렴. 그렇게 터득한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저런 것들이 있단다. 흥미가 생긴다면 도전해보고, 아니면 다른 흥밋거리를 찾아보려무나..라면서 살짝 '지도(코칭)'를 해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는 지식을 '암기'할 때에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주기율표'를 외우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들 선보여주고, 굳이 외우지 않아도 '주기율표'를 효율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만 터득하게 해줘도 충분할 것이다. 구구단을 외운다고 '천재적인 수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내노라하는 수학천재들도 구구단을 못 외워서 '손으로 직접 곱셈 계산'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요한 것은 암기할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가 너무 좋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런 아이로 만들겠다는 '방법론'에는 여전히 교육자들마다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아이로 모두 만들면 참 좋겠지만, 100명의 학생들 가운데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성장할 아이는 10명 안팎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될 아이는 그보다는 많은 5~60명은 될 것이다. 나머지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남의 생각'을 이해하고 잘 따르는 것으로도 만족하는 어른으로 자랄 것이며, 극소수의 아이는 그것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엉뚱한 짓을 하는 어른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엉뚱한 짓을 하는 어른들이 '금전적인 성공'을 거둬서 대박인생을 사는 경우도 참 많은 것이 현실이니까 말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했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와 '공부 잘하는 아이'를 동일하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린 까닭이다. 우리는 '스스로 내린 생각'에 절대평가를 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창의적인 생각'에 어떻게 점수를 매길 수 있겠느냔 말이다. 설령 '점수화'했다고 치더라도 그 점수를 제대로 공정하게 매겼다고 수긍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점수를 매기려면 '모범답안'을 마련해야 하고, 그 모범답안에 최대한 접근한 것에 높은 점수를 준다면, 그건 이미 '창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생각'을 한 것이라면 모두가 긍정적으로 평가를 내려야 한다. 이미 알려진 지식이라 할지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스스로 생각하는 올바른 습관'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써 스스로 생각했는데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평가절하를 받는 경험을 겪게 되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점점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힘든 교육과정인 까닭에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가르친다고 포장하고서는 사실은 '공부 잘 하는 아이'로 만들려는 계획이었기에 그렇게나 집착하며 매달렸던 것이다.

이게 교육계의 딜레마인 까닭에 공교육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만드는 것은 살짝 방만하게 시행해도 괜찮다고 본다. 애초에 완벽한 '스스로 학습법'을 시행하고 평가할 수조차 없다면, 그런 간판을 내걸고서 '자율적'으로 공부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정작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로 만들기로 작정했다면 사교육(과외)이나 가정학습에서 기대를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면 '소수 정예'로 구성해서 자율적으로 학습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천차만별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개성에 알맞게 적절한 학습법의 '변형'을 허용할 수 있는 자유는 사교육과 가정교육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기'에 걸맞는 학습지도법을 통달한 전문가의 지도편달이 필수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딜레마 때문에 글쓴이인 안노 미쓰마사 선생님도 공교육계를 떠나고 나서야 진정한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를 위한 그림책을 그리기 시작했단다. 아무래도 제약을 많이 받는 자리에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학습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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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이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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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마스다 미리 / 이소담 / 이봄 (2017) [원제 : 今日の人生 (2017년)]

[My Review MMLVII / 이봄 15번째 리뷰] 마스다 미리가 '오사카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막상 '그 책'을 읽으니 도통 알 수 없는 내용으로만 담겨 있어서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 책을 읽고 나니 마스다 미리가 말하고 싶었던 '오사카 사람만의 특징'이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뭐, 지금도 '오사카 사투리'랑 '표준 일본어'의 차이점을 알 수는 없지만, 도쿄 사람들은 '절대' 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마스다 미리는 그녀의 책속에서 주야장천, 그야말로 줄기차게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오사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혼잣말처럼' 은근슬쩍 찔러(넛지) 넣는다는 것이다.

이걸 우리 식으로 굳이 바꿔서 이해를 돕는다면, 판소리에서 '소리꾼과 고수' 사이에 오고 가는 말과 행동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소리꾼이 소리를 하는 도중에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니리'와 '발림(너름새)'을 하면 고수는 이에 흥을 돋우기 위해서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이다. 이걸 오사카 사람들은 '보케(웃기는 쪽)와 쓰코미(헛점을 찌르는 쪽)'를 한다고 마스다 미리는 말했다. 그래서 마스다 미리가 오사카 사람처럼 '순발력' 있게 보케와 쓰코미를 능숙하게 날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사카 사람이라면 '그런 정도'는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고, 적당한 상황이 오면 흥이 많고 정도 많은 오사카 사람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재미'를 즐기곤 한다는 식으로 그녀의 모든 책 속에서 은근슬쩍 '본심(혼네)'을 드러냈던 것이다. 뭐, 굳이 그걸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상관은 없지만, 그걸 이해하는 순간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들을 즐기는 폭이 무한해지게 된다는 것을 이 책 <오늘의 인생>을 읽으면서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로 '나의 하루가 반짝하고 빛난다'는 문구를 달고 있다.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포착하여서 만화의 컷을 구성하였기에 '마스다 미리의 일기'를 몰래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비밀 내용이 담겨 있거나 하지도 않는다. 다만, 마스다 미리만의 반짝반짝하는 눈빛으로 우리 주변 풍경을 바라보다가 '바로 이거다!' 싶은 것이 있으면 '만화컷'으로 쓱쓱 그려 내듯 술술 풀어내었기 때문에 '읽는 맛'이 상당히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심오한(?) 문제의식'은 다루지 않는다. 그저 누구나 경험할 법한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크지 않은 행복을 캐치 하고 있고, '독신여성'이기에 느끼는 쓸쓸함과 그에 적당한 위로까지 '스스로' 챙기는 그녀의 배려심(?)에 적지 않은 위로를 얻기도 한다. 그렇게 쓸쓸한 존재인데도 얼마든지 사랑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넌지시 던져주고 있긴 한데, 아쉬운 점은 개인적인 문제점에서 발단한 외로움과 서러움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된 '사회문제'까지 왜 여성 혼자, 아니 늙어서 서러운데 '주변에 도와줄 남자 하나' 없는 존재이니 그런 거라고 매몰차게 질타당하는 것까지 마스다 미리는 홀로 극복하려 애를 쓰느냔 말이다. 그런 문제라면 '사회공론화'해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서 해결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은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공론화'를 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이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한 탓에 '사회불만'은 점점 치솟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그런 불만이 쌓여서 사회문제가 극단화 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끝내는 '극우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음모론'에 빠져 극우적인 정치세력에 몰표를 던지는 젊은이들이 증가 추세라는 뉴스를 볼 때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사회문제'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해 답답해 하다가 결국엔 '극우화'가 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사회현상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혼자서 속앓이를 하지 말아야 한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을 때면 늘 어둡다. 그 어둠 속에서 마스다 미리 홀로 반짝반짝 하고 있긴 하지만, 얼마나 외롭게 보이는지 아는가? 왜 혼자서만 그 짐을 다 지려고 하느냔 말이다. 당신의 책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결코 '희망'이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왜냐면 목소리를 냈으면 '외향적인 뿜뿜'이 있어야 하는데, 늘 '내향적으로' 삭히고 말기 때문이다. 30, 40대 독신여성이라도 당당히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겠느냔 말이다. 외쳐야 한다.

내가 이런 문제점을 느꼈어요! 우리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보지 않겠어요!! 그러면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하고 희망 찰 것 같아서요!!! 나도 그렇지만, 당신도 사랑 받기에 딱 좋은 오늘의 인생을 살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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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오늘을 만끽하는 이야기 (양장본) 오늘을 산다 2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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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산다 2]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오늘을 만끽하는 이야기>  마스다 미리 / 박정임 / 새의노래 (2024) [원제 : ヒトミさんの戀]

[My Review MMLVI / 새의노래 1번째 리뷰] 정말이지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는 차고 넘친다. 온라인 서점에서 단순검색하는 것만으로도 200개가 훌쩍 넘어가는 수를 자랑한다. 20여 년 동안 그녀의 책들이 이토록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더구나 대부분 '평점'도 높은 편이다. 가볍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일까? 30대 여성들의 고민을 대신 해준 덕분일까? 그렇지만 남자인 내가 읽었을 때엔 '문제의식'만 있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는 답답한 책이었다. 뭐랄까? 여자들의 수다를 세 시간 넘게 들으며 깔깔대고 웃고 떠든 느낌이랄까? 정말 재밌는 수다였는데, 정작 헤어지면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눴던 거지? 하면서 씁쓸해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도 그랬다. 띠지에는 [기대도 없이 절망도 없이, 오늘을 산다'면서 마스다 미리 월드의 정수 <오늘을 산다> 시리즈 2편]이라고 적혀 있다. 기대도 없고, 절망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40살의 여성대표, 사와무라 히토미 씨의 삶'을 이렇게 적어 놓았던 것이다. 너무 부정적이지 않은가? 여자 나이 40살이 뭐 어때서 말이다.

앞서 '수짱 시리즈'나 '내 누나 시리즈', 그리고 '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 시리즈' 등에서 '30대 독신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성도 자기계발을 위해서 대학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해외연수도 다녀오고 그러면 취업도 늦어지고, 승진을 하기 위해서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를 미루다보면 '30대 독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흔한 요즘이라고 썰을 풀었다. 그러나 여성의 신체는 20대를 정점으로 찍고서 30대로 접어들면 무엇을 하든 '늦었다'는 꼬리표가 붙어서 우울해질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것'을 두고서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부담'을 더해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몇 자 적기도 했는데, 마스다 미리의 책에서는 '부담'을 덜기는커녕 일본사회 전체가 여성의 늦은 결혼, 늦은 임신, 늦은 출산, 늦은 육아를 탓하는 것을 넘어 '싸움에 진 개(けんかに負けた犬)', [줄여서 '負け犬(마케이누)'라고도 함]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이건 완전히 '인권모독'에 해당하는 언어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을 일본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고, 심지어 여성들끼리도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며 '20대에 결혼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스스럼없이 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짱도, 히토미도 자신을 '싸움에 진 개' 신세가 된 것에 우울감을 표현할 뿐, 이렇게 독신이 된 것에 대한 '사회문제'는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몫', '여성의 몫'으로 전가하고 만 셈이다.

난 이게 몹시 불편하다. 그래서 일본의 문화에 대한 정보를 여러 모로 검색해보니 일본의 정치가들은 '저출생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을 장려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말'이라는 썰을 접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일본의 '초고령화 진입 시기'를 조금 늦추는 효과를 보기도 했다는데, 이게 잘한 정책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본이 이렇게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해서 '사회문제'를 완화(?)시킬 즈음, 대한민국은 초고속으로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말았다. 물론 우리 나라도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정치선동가들에 의해서 '젊은 여성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일이 종종 벌어졌으나, 우리 여성들은 그따위 발언을 한 시키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발언'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마스다 미리의 책들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양상이 참으로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물론 몰상식한 일본정치가의 발언을 두고 마스다 미리 작가 한 사람을 탓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작가도 '시민의식'을 갖고 있다면, 문제적 발언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차원에서 뭔가 액션을 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만약 마스다 미리의 책에서 그런 발언을 찾았다면 '내 마음'에 쏙 드는 작가였을텐데 말이다. 그저 수다를 떠는 정도의 이야기꺼리로 '에피소드'화 시켜버린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뭐, 일본 사회 전체에 그런 '문제의식'이 공론화 되지 않는 이상에 굳이 그걸 문제로 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테고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고 싶다. 이 책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의 주인공인 '사와무라 히토미'는 40대 독신여성의 삶을 살면서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인가? 어쩌다 보니 결혼적령기를 놓쳐 버렸고, 직장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있지만, 남자직원에 비해서 '승진'이 빠른 것도 아니고 여전히 남자직원의 '보조역할'에 만족하는 '오피스레이디(OL)'의 삶으로 만족하고 있나? 이야기 속에서 히토미의 아버지 사와무라 씨는 82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것으로 설명했다. 그렇게 70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40대 독신여성의 삶에 자조 섞인 뉘앙스만 잔뜩 담아 놓은 내용을 읽으며 '행복'을 말한다면, 그 일상에 충분히 공감할 젊은 여성들, 그리고 히토미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은 또 얼마나 공감할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50대 독신남성'으로 접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기대'를 품고 살고 있으며, '절망'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연애나 결혼이 거의 불가능한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기대'를 접지는 않았다. 비록 건강에 부쩍 신경을 쓸 정도로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적어도 '나이'보다는 젊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그런 덕분에 '기대'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무슨 일이든 의욕적으로 하려고 노력하고, 그 때문에 '절망' 따윈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려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는가? 그 절망감은 오히려 30대에 더 컸다. 흙수저로 재산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뿐인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계층사다리를 올라서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릴 때가 더 많을 때에 '절망감'이 절정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한 30, 40대를 지나고 나니, 오히려 삶을 즐기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운'이 찾아오지 않은 아쉬움은 털어버리고 내 주위에 널려 있는 '행복'을 찾아내어 만족한 느낌을 얻는 지혜였다.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으면 묘한 '동질감'을 느낄 때도 있다. 국적은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또래'가 주는 그런 느낌 말이다. 같은 세대를 살았구나 싶은 그런 느낌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좀 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데, 너무 주변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인물들의 묘사가 가득해서 마뜩찮다. '그걸 굳이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싶은 대목이 너무 많다는 말이다. 일본어에는 '상대의 기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참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걸 좋게 표현해서 '배려심이 많다'고도 하는데, 그건 너무 피곤하다.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표현하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넌 그게 문제니까 좀 고쳤으면 좋겠어"라고 지적을 해줘야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분명히 잘못하고 있고,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도, 그걸 '직접적'으로 지적으로 하면 기분 나쁠테니까 좋게 좋게 돌려서 말을 하면, 어느 세월에 문제를 고쳐서 더 나은 사회가 되겠느냔 말이다. 일본인들끼리는 그렇게 돌려서 말을 해도 잘 알아들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소리도 자주 하던데, 그렇게 잘 알아 듣는 것 같지도 않다. 정작 '외부의 쓴소리'에는 귀를 닫고서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일본인들이 더 많으니 하는 소리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모습은 정말 꼴불견이지 않은가? 그런데 일본에서는 강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약자에게 허리를 펴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미덕이고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논리에 순종하는 모습에서 나는 '행복'을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뭐 그리 심각하게 읽느냐고? 성평등시대에 '사회적 약자'인 여자가 남자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야만 '여성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히니까 하는 소리다. 이건 안 될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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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외전 3 (무선 보급판) 퇴마록 (반타)
이우혁 지음 / 반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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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 외전 3>  이우혁 / 반타 (2025)

[My Review MMLV / 반타 4번째 리뷰] <퇴마록 : 말세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멈춘 지 20여 년이 흘렀다. '세기말 현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던 퇴마사들의 퇴마행이 21세기 초엽(2001년)에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팬들이 '종결'을 아쉬워했고, '뒷이야기'를 바랐다. 그러나 저자는 끝내 답을 주지 않았다. 나름 '열린 결말'이었기에 퇴마사들의 최후를 나름의 상상력으로 반추를 거듭했지만, 어느 것 하나 흡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갈피를 잡지 못해 더욱 안달이 났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래서 또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왔을 때도 큰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오탈자를 잡거나 미흡하거나 흡족하지 못했던 내용의 '줄거리 수정'만 있었을 뿐,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고 '후속작'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다. 적어도 '말세편의 외전'이라도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외면(?)해버린 저자에게 솔직히 실망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드디어, 드디어 <외전 3>가 나왔다. 그리고 '말세편의 뒷이야기'가 정리되었다. 솔직히 저자의 고심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철저히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퇴마록이 쭈욱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각설하고, <외전 3>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드디어 말세편의 진정한 결말 내용'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두루뭉술한 '열린 결말' 따위가 아니라, '닫힌 결말'이었고 진정한 '말세편의 종결'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준후가 '징벌자와 구원자의 탄생'을 확인하고, 세상을 종말로부터 구원했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박신부와 현암, 그리고 승희가 벌이고 있는 '최후의 결전장'으로 서둘러 달려가는 것으로 끝맺음을 했었지만, <외전 3>에서 그 '뒷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그리고 준후가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박신부의 죽음, 그리고 현암과 승희가 손을 꼭 잡고서 놓지 않고 있던 '두 사람의 일부분'이었다. 그리고 오열했다. 결국 세상을 구원하길 바랐던 퇴마사들의 염원이 하늘에 가 닿았고, 그 바람이 이루어졌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을 때, 3명의 퇴마사들은 끝내 죽음을 맞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말세의 예언'이었던 탓에 전세계의 능력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나름 저마다 말세의 도래를 막기 위해서 둘로 갈라져 싸웠으나, 끝내는 퇴마사들의 말이 옳았고, 그들의 행보가 가장 옳은 길이었음을 재확인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를 믿지 못하고 싸운 결과는 가장 '선하게 살았고', 가장 '옳은 일만 했던' 퇴마사들만의 죽음이었다. 그런 퇴마사들을 믿지 못해 막으려 하고, 방해하고, 심지어 공격했던 이들조차 살아남았는데, 세상의 말세를 막아내고 온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큰 공을 세운 '3명의 퇴마사들'만이 죽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 화가 나는 사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죄악을 미워하되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는 일념으로 저들의 목숨을 앗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악랄한 공격을 그저 묵묵히 막아내기만 할 뿐, 결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겠다면서 그 처절한 상황에서도 절대 끔찍한 살인행위를 하지 않다가 '생의 끝자락'에서 숨이 다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사그라들었을 뿐이다. 아무런 원망도 없이 말이다. 세상에 이런 고귀한 죽음이 있겠는가?

그러나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준후는 분노한다. 세상의 말세를 부추긴 '원흉(?)'들은 버젓이 살아 숨쉬는데 왜 말세를 막고 세상을 구원한 이들이 '대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느냔 말이다. 이건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저들은 살아서 숨쉴 '권리(?)'가 정말이지 요만큼도 있을 수 없었기에 준후는 분을 참을 수 없다. 그런데 고작 10대 소년 하나가 분노한다고 해서 두려울 것이 무엇일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만 비췰 것이겠으나, 준후는 고작 '소년'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온세상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극복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퇴마사'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세상의 이치, 곧 '섭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도 그렇게나 위대한 일을 행했으면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전지전능한 신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도 이런 일을 해낸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질 능력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애초에 멸망했어야 마땅할 세상을 구해냈으니, '그 세상'을 멸할 수 있는 능력, 즉 '말세의 권능'을 장준후에게 준 것이다. 애초에 퇴마사 네 명에게 골고루(?) 노나 주었어야 하겠으나 생존자는 준후 한 사람이었으니 준후에게 그 권능이 몰빵(?)된 것도 있다. 그리고 준후는 그렇게 주어진 권능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써버린다. 퇴마사들을 되살리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퇴마록>이 '판타지소설'이라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막가지는 않는다. 준후가 얻은 '그 권능'으로 세상을 멸할 각오를 했으나, 일단 살아남은 능력자들에게 '죽은 사람'을 되살릴 방도가 있는지 물었던 것이다. 만약 '없다면' 바로 그 즉시 세상을 멸할 각오였고, 반대로 '있다면' 그 방도를 서슴없이 시행할 각오였다. 허나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방도라는 것이 있을 턱이 만무하다. '부활'이 실제로 가능했다면 그간 있었던 싸움이 무색할 정도로 다시 되살려내었을 테니 말이다. 이 사실을 준후라고 모를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말세가 온 지경'에서도 저마다의 욕심을 놓지 않았던 저 어리석고 맹목적인 능력자들을 그냥 순순히 일상으로 되돌려보낼 생각이 전혀 없던 준후였다. 이젠 '퇴마사'들도 죽고 없는 마당인데, 또다시 저들이 서로의 능력을 사용하며 반목할 경우에, '말세'는 다시 돌아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권능'을 갖게 된 장준후도 이번 말세를 막기 위해 엄청난 주술적 힘을 낭비(!)한 덕분에 남은 생명이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기에 더욱 독하게 나갔다.

그러자 저마다 나름의 방도를 내놓기 시작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퇴마사들의 영혼을 다시 불러온다고 해도 그들의 '육신'이 남지 않은 상태에서 되살릴 방법이 전혀 없다는데 있었다. 박신부는 자신의 기도력을 다 끌어모아서 대악마 아스타로트가 불러낸 악령들을 소멸하고서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고, 현암과 승희는 저들의 능력으로 충분히 '재래식 무기(총이나 폭탄 등)'를 사용하는 군인들을 상대할 수 있었고, '원소력'을 사용하는 아네스 수녀의 공격만 방어하면 그럭저럭 준후가 '징벌자와 구원자의 탄생'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버틸 수도 있었으나, 문제는 현암과 승희가 지닌 엄청난 능력으로 다가오는 군인들과 수녀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는데 있었다. 그저 잠시 기절시키고 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망가뜨리는데 능력을 소모하다보니, 수없이 빗발치는 총알과 폭탄 세례를 감당하지 못하고 공력이 다하자 그만 지쳐쓰러지고 만 것이다. 더구나 현암은 빗맞은 총알과 파편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승희를 업고 있었고, 마지막 힘을 다해서 현암의 오른손을 꼭 쥔 승희의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저 무차별적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그저 막기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 천정개혈대법으로 전신으로 공력을 보낼 수 있었기에 이처럼 버틸 수 있었을 뿐, 일반적인 능력자였다면 진작에 죽고 말았을 공격이었다. 그러다 공력이 다해서 쓰러진 현암과 승희을 향해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서 아네스 수녀는 C4(고성능 폭약)를 던져놓으라고 지시한다. 그래서 온전한 시신이나 남기지 못하고 '두 사람의 꼭잡은 손목'만이 남아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녕 퇴마사들을 되살릴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때 쥐어짜듯 내놓은 방법이 바로 '시간역행'이었다. 쉽게 말해서 '시간'을 되돌려서 박신부와 현암, 그리고 승희가 죽지 않게 도와주면 된다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무엇'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겠느냔 물음이다. 그런데 그 '무엇'이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바로 준후가 세상을 구하고 얻은 '권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권능으로 퇴마사들을 구해내고 준후는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되돌아오면 되는 방법이 제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역행'은 물리적으로 실행불가한 이론이다. 물론 '양자역학 이론'으로 접근하면 불가능한 방법이 아니고, '팽행우주', '멀티버스'로 입각해서 계산(?)하면 완전 불가능한 방법도 아니었다. 더 안전한 방법으로 '육신'을 가지고 시간역행을 하지 않고 '영혼'만 시간을 되돌린다면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는데 큰 걸림돌도 없어 보였다. 물론 그런 능력이야 여기 모인 사람들에겐 얼마든지 가능한 능력이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시간의 패러독스(인지 부조화)', 다시 말해, 얼핏 맞는 것 같지만 일부만 맞고 더 큰 문제점이 드러나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이를 테면, 아무리 '질량'이 없는 영혼이라지만, 아주 적은 질량일지라도 시간역행과 같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을 일으키게 되면 우주적인 차원에서 볼때 결코 적지 않은 큰 차이를 불러올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없던 일'을 '있던 일'로 바꾸는데 들이는 에너지를 무엇으로 바로 잡을 것이냔 말이다. 이는 절대불변의 물리법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일이라 그 파장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장준후는 시간역행을 해서라도 퇴마사들을 살리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권능'을 그런 일에 쓰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악을 물리치는데 그치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을 옳게 바로 잡는데 온 능력을 다할 뿐, 아무런 사욕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는 '퇴마사'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서 장준후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부여된 권능으로 '시간역행'을 시작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곳은 '천기 수호자'가 있는 곳이었다. <왜란종결자>에서 다루었던 '우주 팔계(신성광생사유환마)'를 다스리는(?) 그런 분들 말이다. 여기서 왜 뜬금없이 <왜란종결자>가 등장하느냐고 의아해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솔직히 나도 그런 사람이다. 전혀 의아해 하실 필요가 없다. 바로 '뉴 퇴마록'이 새롭게 시작할 '분기점'이 되는 지점이니, 의아해 하기보다는 '그런갑다'하고 여기는 것이 더 속 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따지기 좋아하는 분들'을 위해서 '작가의도'를 밝히자면, '뉴 퇴마록'을 새롭게 집필할 각오를 하면서 기존에 보였던 <왜란종결자>나 <파이로매니악> 등의 '세계관'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흡족'해질 때가 아니면 여간해서 책을 내놓지 않는 고집불통 작가인 점을 감안하면 그리 쉽게 독자들이 원하는 소설을 홀랑홀랑 내놓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암튼 '뉴 퇴마록'을 내놓을 당위성(!)은 마련해놓았으니 독자들은 기다리기만 하면 될 듯 하다. 이제 '판'을 깔렸고 '시작'만을 기다리면 된다. 20년도 기다렸는데, 몇 년을 더 못 기다리겠는가. 내놓기만 해라. '읽을' 준비는 이미 마쳤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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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사이클
레이 달리오 지음, 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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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사이클>  레이 달리오 / 조용빈 / 한빛비즈 (2025) [원제 : How Countries Go Broke : The Big Cycle]

[My Review MMLIV / 한빛비즈 171번째 리뷰] 전세계 경제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와중에 투자자들이 '방황'을 하고 있는 것에 더 큰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시점이다. 무엇에 투자해야 '안전자산'을 확보할 수 있고, 어디에 투자해야 '소득진작'에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안갯속을 걷고 있는 심정일 것이다. 이럴 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했던 레이 달리오의 한마디는 너무나도 소듕할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레이 달리오가 내놓은 <빅 사이클>은 투자자들에게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반가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레이 달리오는 확언하듯 말한다. "이 책은 '대규모 부채 사이클'의 비밀을 파헤치는 예언서가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읽은 이 책은 글쓴이의 말대로 '예언서'처럼 읽혔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말이다.

예언서라는 것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이야기 속에 '숨겨놓은 뜻'을 찾아내어 미래를 예측하고 현재에 대비할 수 있는 총력을 기울이게 만드는 역할을 주로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 <빅 사이클>은 분명 '미래 경제 예언서'라고 소개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트럼프 2.0 시대가 개막하고, 미중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전세계를 상대로 한 미국의 '관세전쟁'은 전세계 경제전망을 어둡게 만들고 있으며, 그로 인해 조만간 '국가 부도 위기'가 찾아올 나라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그 나라들 가운데 '미국'도 예외는 아니라고 레이 달리오는 경고를 높이고 있다. 그 근거로 미국의 '부채'가 급증해서 2035년에는 무려 50조 달러가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란다. 25년 현재 미국의 부채는 35조 달러인데, 이는 2010년에 불과 10조 달러가 조금 넘은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급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미국은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부채가 늘어나도 '중앙은행'에서 통화를 찍어내면 그뿐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런 일을 벌이면 '인플레이션'이 나타나 경기가 침체되고 경제가 악화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지만,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는 미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부채'가 늘어난다해도 그리 큰 악영향을 끼치는 일까진 일어나지 않고, 다시 경기가 호황을 맞을 때까지 '버티기'를 할 수 있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채를 탕감할 시간적 여유를 미국은 더 많이, (어쩌면 '미국 맘대로') 더 연장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축통화'의 장점이다.

그러나 레이 달리오는 가까운 미래에 미국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지니게 되어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국가 부도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경기가 더 나아질 거라는 전망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부채'는 반드시 탕감해야만 할 빚이다. 그 '부채'를 영원히 탕감하지 않을 국가의 화폐를 누가 갖고 싶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미국이 아무리 '기축통화'를 지닌 국가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경기 진작을 통해서 '부채탕감'을 해나가는 노력을 보여줘야 미국이 '국가 부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예언한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현 대통령이 이런 노력을 전혀 벌이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관세'를 통해서 일시적으로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전략은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정도라고 지적하는 경제전문가들이 너무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냐면 '관세'를 올리면 일시적으로 세수가 올라 흑자가 되거나 적자의 폭을 줄일 순 있겠지만, 상대국도 바보가 아닌 이상, '보복관세'로 맞불을 놓아 미국에 타격을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미국의 역사'만 들춰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게 관세를 자국에 유리하게 매겼다가 폭망한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대영제국'이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렇게 영국이 폭망한 뒤에 미국이 새로운 패권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인데, 미국이 영국의 전철을 밟고서 폭망의 길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미국은 '첨단기술력'을 앞세워서 관세정책을 없애고 전세계를 '자유시장'으로 만드는 세계화에 앞장 섰던 나라가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해서 미국이 걷어들인 이익이 어마어마했다는 사실을 그새 잊은 것인가?

더구나 현재의 미국은 '첨단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시대도 아니다. 중국을 비롯해서 유럽, 인도,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까지 일부분이긴 하지만 미국의 원천기술보다 훨씬 좋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충분히 높인 상태다. 그런 미국의 처지가 안쓰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관세전쟁'을 벌여서 미국이 얻을 이익이 얼마나 오래 가겠느냔 말이다. 오히려 이런 '정황'들이 미국의 경제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고, 굳이 다른 '경제지표의 악화'를 전문적으로 이해하지 못해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 <빅 사이클>은 너무 심오하다 못해 전문적이어서 일반 독자들은 반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난해(?)한 단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대략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큰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미국만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고, 중국과 일본도 레이 달리오가 말하는 '빅 사이클'에서 절체절명의 경제위기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레이 달리오는 그의 <원칙>에서 "걱정하지 않는다면 걱정해야 하고, 걱정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 책 <빅 사이클>에서도 그 '원칙'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면, 그에 따른 각국의 '대비'가 진행중일테니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얘기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부분은 현 상황을 '낙관'하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문제를 직시하고 적절한 대비를 하고 있는가? 여기에 '물음표'를 제기하고 있는 이들이 많아서 걱정이 큰 것이다. 뭐 아무리 미국이라도 망할 때가 되면 망할 수밖에 없다. '한 국가'가 폭망한다고 해도 '다른 국가'가 그 자리를 대체할 테니 그리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영국이 폭망하자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현 시점에서 과연 어느 나라가 '미국'을 대체할 수 있을까? 미국처럼 '엄청난 소비'를 해대는 나라가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미국의 소비가 멈추면 '기후 위기'도 잊어버릴 정도로 지구 환경은 깨끗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경제'는 올스톱을 하게 될 것이다. 전세계 공장은 가동을 멈출 것이고, 물류이동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그럼 자연스레 소비도 위축되고 전세계 경제는 결국 멈추게 될 것이다. 그렇게 경제가 멈춰버린 지구 곳곳에서 '경제위기'도 같이 사라지면 좋을 텐데, 오히려 '국가 부도'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고,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점점 커져서 끝내 '전쟁 발발'로 이어지는 지옥문이 열리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면 전세계는 '부채'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실물경제에서 어느 정도의 '부채(빚)'는 부담이 아니라 '경기호황'을 부르는 호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세계는 자국의 경제안정을 위해서 약간의 '물가상승'을 유도했고, 그로 인한 '소규모 인플레이션'을 경제성장의 지표로 내세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현재는 '그 부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늘어나서 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심지어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한 미국경제마저 말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준비된 대안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바로'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지금은 그런 노력을 보이는 것조차 훌륭한 대안처럼 보일 정도로 위급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이 생각나는 시점이기도 하다. 과연 이번에도 레이 달리오의 예언은 적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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