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나라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2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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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2 : 환상의 나라 오즈>  라이먼 프랭크 바움 / 최인자 / 문학세계사 (개정판 2023 / 초판 2007) [원제 : The Marvelous Land of Oz(1904)]

[My Review MMLXIII / 문학세계사 5번째 리뷰] <오즈의 마법사>를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뒷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무려 13편이나 말이다. 그런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면 <오즈의 마법사 1편>만큼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회오리바람을 타고 우연찮게 '오즈'라는 신비한 나라에 도착한 도로시와 토토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 그리고 겁쟁이 사자와 함께 신 나는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참 재밌다. 딱히 교훈을 주는 내용도 없이 그저 신비하고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처음 쓰여진 게 1900년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10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읽어도 재밌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의 어린이 독자들은 <오즈의 마법사>를 읽고 난 뒤에 어떤 느낌이었을까? 요즘처럼 '볼 거리'가 넘쳐나는 시절도 아니었기에 어린이 독자들이 '후속작'을 써달라고 작가에게 편지를 쓰고 또 썼단다.

그런데 정작 프랭크 바움이라는 작가는 <오즈의 마법사>의 뒷이야기를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애초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하고 싶은 것'은 마음껏 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그리 잘 된 것이 없었단다. 그러다 아내와 장모의 권유로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어른들을 위한 쓴 책'들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마더 구즈(서양판 '옛날 옛적 이야기')' 책들이 좋은 반응을 얻어서 결국 <오즈의 마법사>까지 쓰게 되었고, 이게 대박을 터트린 셈이다.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둔 뒤에 또다시 '어른책'을 몇 편 써냈는데,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단다. 그러다 3년 뒤에 어린이독자들의 편지에 힘을 얻어서 <오즈의 마법사> 후속작을 기획했고, 이듬해에 2편에 해당하는 <환상의 나라 오즈>를 쓰게 되었단다. 바로 이 책이다. 어린이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프랭크 바움은 죽는 날까지 '오즈 시리즈'만 쓰다 마지막 14권을 쓸 당시에 병원에서 지내고 있었으며, 마지막 책이 출간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렇게나 사랑받은 책들인데, 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그 까닭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애초에 '후속작'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상상력'이 발현되지 않았기에 이런 졸작(?)이 탄생한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뒷이야기'에 목말랐던 당시의 어린이들은 다시 시작된 '신비한 오즈 이야기'에 열광을 했고, 작가는 '떨어지는 영감'을 붙잡아 쥐어 짰지만 별소득이 없자 '독자들이 보낸 편지의 요구사항'을 참고(?) 삼아서 뒷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느낌이 다분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개연성 부족'이 몰입감을 많이 떨어지게 만든다.

이를 테면, 전편에서 '사기꾼'으로 밝혀진 오즈의 마법사에 앞서 오즈를 다스리던 왕이 있었고, 그 왕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오즈마 공주'가 오즈의 적통 왕위승계자라는 이야기가 2편의 주된 줄거리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은 난데 없이 '팁'이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그런 까닭에 주된 줄거리를 알기까지 소설의 중반부까지 모두 읽어야만 '핵심 이야기'에 겨우 돌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까지 '팁'이란 소년이 못된 마녀 몸비에게 노예처럼 억울하게 지내고 있었고, 그 마녀에게서 탈출을 감행하는데 하는 김에 '호박머리 잭'이라는 동료와 함께 떠나게 되는데, 이 호박머리 잭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 것이 마녀 몸비라는 조금은 억지스런 상황으로 시작한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는지 전혀 알 수도 없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팁은 '위대한 마법사'가 살고 있다는 오즈로 떠나게 되고, 처음엔 뚜벅뚜벅 걷다가 힘이 들어서 말을 타고 달려가고 싶은데, '없던 말'을 구할 수 없으니 못된 마녀에게서 훔쳐낸 마법가루를 이용해서 '목마'를 하나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을 타고 팀과 잭은 오즈로 향하는데, 허술하게 만들었기에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겪게 된다는 설정을 깔아놓았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다 알고 있으면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싶은 내용인데, 처음에 읽을 때에는 이게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가 맞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낯선 느낌이 든다. 그나마 1편에 나온 주인공인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이 합류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오즈의 마법사'가 맞구나 싶지만, 이미 이야기는 중반이 넘었다. 그리고 난데 없이 등장한 '소녀들'로만 구성된 군인들이 뜨개질 나무꼬챙이를 무기 삼아 오즈의 에메랄드 성을 점령하더니 우두머리 소녀인 '진저 장군'이 허수아비 왕을 내쫓고 새로운 '오즈의 여왕'으로 등극하고 만다. 졸지에 성을 빼앗긴 허수아비는 성을 되찾기 위해서 양철 나무꾼이 황제로 머물고 있는 뭉크킨 나라로 갔다가 성을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더 큰 힘을 얻고자 착한 마녀 글린다가 살고 있는 남쪽 나라로 찾아간다. 그곳에 도착해서 도움을 얻으려 했는데 '정식 왕위승계자'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오즈마 공주'의 살았는지, 죽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기에 수긍한 허수아비와 일행들은 글린다와 함께 오즈의 성을 탈환하기 위해 떠나는데...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결국엔 '오즈마 공주'를 무사히 찾아내고 오즈의 에메랄드 성의 주인으로 자리매김을 한다는 결말이다.

전편인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처음부터 확실한 목적이 있는 여행을 떠났다. 도로시는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가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찾아나선다. 여행 도중에 만난 허수아비는 똑똑해지고 싶어서 위대한 마법사에게 '뇌'를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빌기 위해서였고, 양철 나무꾼은 인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배신으로 인해 따뜻한 마음도 잃고 차가운 몸뚱이만 남게 되었기에 '심장'을 얻고 싶어서였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겁쟁이 사자는 '용기'를 얻기 위해서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4명의 주인공들은 각각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머나먼 여행길을 떠났고, 숱한 위기와 신 나는 모험을 겪었지만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우정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펼치며 결국은 모두 바라던 소원을 이루게 되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런데 후속작인 <환상의 나라 오즈>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그저 '작가의 필요'에 의해서 급조 된 듯 합류하게 된 느낌마저 들기 때문이다. 서둘러서 오즈에 가기 위해서 '달리는 목마'를 만들어내고, 포위된 에메랄드 성에서 탈출하기 위해 '날으는 검프(사슴을 닮은 동물)'를 만들어 등장시키고, 에메랄드 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글린다의 군대'가 동원된다. 애초에 허수아비가 잘 다스리고 있던 에메랄드 성을 빼앗은 '진저 장군'의 전쟁 목적도 허술하다.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것이 힘들고 하기 싫으니 에메랄드 성에 널려 있는 '에메랄드 보석'을 훔치러 수많은 소녀들이 모였고, 그런 소녀들을 이용해서 '진저 장군'이라 불리는 소녀는 허수아비를 내쫓고서 '여왕'으로 등극한 뒤에 오즈의 모든 남자들에게 여자가 하는 허드렛일을 강요하는 법을 만들고, 여자들은 예전의 남자들처럼 놀고 먹는 일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소녀들'이 전쟁을 일으킬 만한 정당한 명분이 되리라 보는가? 훗날 '글린다의 군대'가 동원되어 '진저 여왕'을 내쫓은 다음에 '오즈마 공주'가 정식 여왕으로 승계를 받은 뒤에 오즈의 남자들은 환호성을 외쳤단다. 더는 힘든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오즈의 여자들은 어땠을까? 역시 남자들과 똑같이 환호했단다. 그 까닭은 남자들이 만든 '맛없는 음식'을 더는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고, 여자들은 모두들 본래에 하던 '힘든 집안일'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자신이 차린 맛있는 음식을 남자들과 맛있게 먹었단다. 이럴 거면 '전쟁'은 왜 한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지만, 이건 좀...

이런 식으로 '개연성'이 매우 부족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서 솔직히 크게 감동을 받은 것이 없다. 100여 년 전 어린이들은 '환호'를 했을지 몰라도 21세기 어린이들은 그닥 '환호'할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뒷이야기가 무려 12편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본편보다 나은 속편은 아닌 셈이지만, 이렇게나 얼렁뚱땅 펴낸 '속편'은 나머지 12편을 위한 '서론'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새롭게 등장한 오즈의 진정한 주인공 '오즈마 공주'가 어떤 일을 펼쳐낼지 궁금하기도 하며, 아직 재등장할 기회가 없었던 '도로시'와 '겁쟁이 사자'가 남았다. 그리고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이 펼쳐낼 모험이야기도 아직 제대로 펼쳐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관점으로 '희망'을 걸어본다면 나머지 뒷이야기는 좀 더 다채롭게 이야기가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뭐,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속은 김에 제대로 속아보려 한다. 남은 12편의 이야기도 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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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1
이우혁 지음 / 미컴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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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1>  이우혁 / 미컴 (1998)

[My Review MMLXII / 미컴 1번째 리뷰] '퇴마록 2부'에 해당하는 <뉴 퇴마록(가제)>이 출간되길 기다리면서 이우혁 작가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17권짜리 소장판 <퇴마록>도 구했기에 '국내편'에 이어 '세계편'을 읽을 준비를 하고 있고, 말 많던 <치우천왕기>(엘릭시르)도 새로 읽고 있으며, 새롭게 탄생할 '이우혁의 세계관'이 가장 잘 드러난 <왜란종결자>를 읽을 준비를 하던 차에 아직까지 읽지도 못했던 이우혁의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바로 이 책 <파이로 매니악(전3권)>을 비롯해서 <바이퍼케이션(전3권)>, <쾌자풍(전3권)>, <고타마(전2권)>라는 책이었다. <파이오 매니악>을 제외하고 나머지 책들은 2010~2012년 사이에 출간되었는데, 내가 이 당시에 '독서논술' 수업을 한창 하던 시기라서 [어린이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독파했을 때였다. 그래서 <퇴마록>의 작가 이우혁이 출간한 책인데도 그닥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 않은가.

그리고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이 또 있다. 바로 말 많았던 <치우천왕기>(들녘) 9권 모두를 사놓고 목놓아 기다리던 독자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5년 뒤에 느작 없이 '출판사(엘릭시르)'를 바꿔서 새로 쓰고 완간을 내놓았다고 하니, 일종의 '배신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애초의 출판사에서 '종결'이라도 내놓고서 '수정판'을 내놓았더라면 그나마 '더 좋은 작품을 쓰려고 고심이 많았구나' 하는 이해라도 했었을텐데, 그간 일언반구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고 '연재'를 중단하더니, '완결'을 했다는 기쁜 소식도 무색하리만치 내용을 대폭 수정해서 '또 다른 책'을 썼다니...그럼 기존의 책(들녘)을 사모았던 독자들은 그냥 '바보'로 만드는 꼴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배신감에 이우혁의 '다른 작품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미 10년도 훨씬 지난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유독 '엘릭시르' 출판사의 책들은 사 모으지 않았는데, 작년에 쭉 읽어보니, 나름 괜찮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정판'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해묵은 미운 감정이 쬐끔은 사그라들었다. 그래서 늦은감이 많지만 이우혁의 다른 작품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은 바로 <파이로 매니악>이다. 1998년에 쓰였다는데, 미처 출간 소식을 접하지 못해서 읽지 못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 시절에는 서울 중심가에 있는 '큰 서적'이 아니면 '동네 서점'에서 오프라인으로 책을 구입해야 하던 시절이라 '서점 주인'이 책을 들여놓지 않으면 책을 접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열악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들리는 소문으로나마 '퇴마록의 작가가 <스포츠신문>에 소설을 연재한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사실 '신문연재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었다. 왜냐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그 연재를 읽기 위해서라도 신문을 매일 사러 가는 수고를 해야 했는데, 그게 귀찮았고, 다른 하나는 신문을 일일이 사러 가기 귀찮았다면 '정기구독'이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그 당시엔 신문구독을 할 정도로 금전적 여유가 없던 시절이기도 했고, 당시 '스포츠신문'이라면 조선일보(스포츠조선) 아니면 동아일보(일간스포츠)였을텐데, 조중동 같은 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차로 <파이로 매니악>은 나와 인연이 없는 소설책이었던 셈이다.

암튼, 이제라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막상 읽으니 이 소설...정말 '매니악'하다. 대한민국 사회의 '암적인 존재'를 리스트로 만들어서 '사재폭탄'으로 처형을 한다는 기막힌 발상이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첩보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대한민국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다. 2025년인 지금도 경악스러울 내용인데, 만약 나와 '인연'이 닿아서 내가 이 소설도 '소장'하게 되었다면, 어쩌면 내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내 전공이 '화공(유기화학)'쪽이기도 하고, 전공을 그대로 잘 살렸다면 '고층빌딩 폭파철거'쪽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화약놀이'를 좋아했던 터라 한창 때였던 20대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내 진로'도 그쪽으로 정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IMF를 맞아서 '취업'이 참 힘들 때였기 때문에 알바 같은 것을 하면서 '묻지마,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던 공시족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그즈음에 '발파 공법'과 관련된 자격증 시험도 준비할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연이은 '불합격'으로 진로를 확 바꾸게 되었고, 그렇게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이 '독서논술쌤'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읽던 '어린이책'에 깊은 감명을 얻고서 시작한 새 삶이었는데, 그때 만약 <파이로 매니악>같은 소설을 읽었다면 '발파 시공사'쪽을 전전하면서 '폭발물'을 다루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내용은 정말 그로테스크하다. '폭탄 전문가' 동훈과 '신문기자' 영이 우연찮게 만나서 의기투합을 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 둘이 만나서 모의(?)를 하는 것이 다름 아니라 '테러리스트'가 할 법한 암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작가가 한국사람이고, 등장인물과 배경도 모두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그런 무시무시한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더란 말이다. 그런 끔찍한 내용을 써낸 작가도 대단한(?) 사람일 수 있지만, 그걸 읽고 있는 '독자(나를 비롯해서 말이다)'도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칼이나 총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여 '처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짐승'이기에 사람이라 부르지도 않고 '죄수'라고 지칭하며 죽기에 꼭 알맞은 폭탄을 터뜨려서 '천벌'을 받았다는 느낌이 물씬 나도록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 죄수들의 신상을 살짝 이야기하자면, 독재정치를 벌여 저항하는 국민들을 조직적으로 폭행하는 '정치깡패두목'을 폭사시켜 죽였고, 친일파의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일제가 가공한 '식민사학'을 정통하다 주장하여 대한민국의 역사를 수치스럽게 만든 '사학교수'를 불태워 죽였으며, 정치적 부정부패와 비리를 감싸고 '엘로우저널'을 퍼뜨리던 악질적인 '신문사사장'을 엉덩이부터 면상까지 수많은 쇠구슬로 꿰뚫어버려서 시신을 벌집처럼 만들어 버렸으며, 부실공사로 애먼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중생들과 원조교제를 일삼던 '악덕업자'를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해서 그 아래 깔려 압사시켜 죽여버렸던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벌 받아 마땅한 놈들만 골라(?) 죽이는 통쾌한 액션 같지만, 이 소설의 제목이 <파이로 매니악>이라는 것에서 덜컥 걸림돌이 꽉 막혀버리고 만다. 직역을 하면 '방화(파이로)+광의(매니악)'라고 해석이 되지만 조금만 풀이하면 '폭파 전문가'라고 해석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익스플로전(explosion)'이 아니라 '파이로(pyro)'라는 것은 우리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전문적인 방화'라고 해석할 수 있단다. 다시 말해, 수많은 인명살상을 위한 방화가 아니라 꼭 죽여야 할, 꼭 죽어 마땅한 '한 사람'만 골라서 죽일 수 있는 '특화된 폭발'이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특화된 방화'가 가능한 인물이 바로 '동훈'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우리 사회에서 굴곡지고 어두운 단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신문기자 '영'과 만나게 되자 둘은 의기투합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명은 '자살'을 하러 한강 다리로 갔고, 다른 한 명은 '청부살해'를 당해 포대에 담겨 한강에 빠져버렸는데, 그렇게 '생을 마감'할 뻔(?)했던 두 사람이 운명적이 아닌 '공교롭게' 만나는 바람에 둘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처리(?)하고서 대한민국 사회를 좀 먹고 악영향을 끼치는 '죄수 리스트'를 만들어서 천벌을 단행하자고 했던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나쁜 놈들이 돈과 권력을 쥔 '사회고위층'이라는 이유로 법망을 피해서 유유자적하며 제멋대로 살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한민국에서 아주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꼬락서니가 몹시 불쾌했기 때문이다. 내란과 외환죄를 저지르고도 '인권' 운운하면서 법꾸라지처럼 대한민국의 법을 우롱(!)하고 있는 '내란세력들'만 봐도 딱 그렇다. 여기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면죄부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의 암적인 존재들이 얼마나 많으냔 말이다. 이런 놈들만 딱 골라서 '천벌'을 내릴 수 있다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할 듯도 싶다.

그러나 사람이 '짐승'을 잡아 죽일 때도 그 처참한 광경에 눈과 귀를 막고, 역하고 비위 상하는 냄새가 한가득 뿜어져 나와서 구토를 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사람'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폭탄'으로 죽였는데, 그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는 살벌한 풍경을 보며 어찌 덩실덩실 춤을 추며 즐길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저 멀리서 터지는 미사일과 폭탄은 '불꽃놀이'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선사할 순 있겠으나,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한 조각의 살점으로 분해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핏방울로 산화한 그 자리는 '화염'이 치솟아 불바다가 되었음에도 고기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누구도 쉽사리 다가가 '구조활동'을 하기 힘들게 만들고, 운이 좋아 팔다리만 잃은 채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지르는 신음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한 셈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끔찍한 장면 묘사'를 아주 생생하게 하고 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런 '충격'을 목격하고 고통 받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다. 심한 욕지기가 절로 나온다는 설명과 죄수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난 뒤에 구역질을 하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안 했으면 싶을 정도다. 그냥 통쾌하게 벌 받아 마땅한 놈들을 '처단'했다는 정도로 마무리하면 좋았으련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렇게 '잔혹한 묘사'를 거르지 않고 다 표현한 소설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전민희의 소설 <룬의 아이들 : 데모닉>이었다. 여기서 '전투인형'이 등장하는데 전쟁의 참혹함에서 '인명살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을 대신해서 싸우는 '인형'들이 존재하는데, 그 인형들조차 죽는 모습이 너무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똑같은 외형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피부도 인간과 똑같고, 심지어 인형의 내부에는 '인간의 피'가 똑같이 흐르고 있다는 설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쟁의 참혹함은 사라지기는커녕 '전투인형들의 죽음'은 곧 '사람의 죽음'과 하등 다를 것이 전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끔찍한 일을 왜 하는걸까? 그 전투인형들과 함께 싸우는 인간들은 그 참혹한 장면을 직접 보고 겪으며 엄청난 공포를 느낄 정도인데 말이다. 여기서 작가의 한마디는 "그래야 전쟁의 끔찍함을 깨달아서 전쟁을 멈출 것 아니에요. 전쟁을 멈추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비참한 전투만이라도 덜 할 수 있다면, 이런 끔찍한 장면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고 잔인한 짓인지 잘 알 것 아니에요"였다. 끔찍하고 참혹한 장면을 여과없이 보여줘야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전쟁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얘기에 머리를 한 대 쿵하고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파이로 매니악>의 작가 이우혁도 그런 의도가 다분했을 것으로 본다. 만약 죽어 마땅한 나쁜 놈들을 깔끔하게(?) 죽여버리는 통쾌한 장면만 강조하고 말았다면 이걸 따라하려는 '범죄모방' 심리가 강하게 작동했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칼이나 총도 아니고 '폭탄'이 주요 소재인 소설이라서 더욱 조심스러웠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내가 이우혁 작가를 좋아하는 까닭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세상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수단'을 쓰지만 결코 '그 수단'이 온전히 정당성을 갖추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와 방법으로도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살인죄'를 저지르면 아무리 정상참작을 한다고 해도 '사형판결'을 받게 된다. 대한민국 법 체계상 사형판결을 오래도록 집행하지 않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사형판결'을 없애지 않고 있다. 아무리 '부작용'이 심하다고는 해도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사형제도'가 있다고해서 흉악범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엄하게 죄를 물어서 엄한 벌을 준다'는 법의 존재만으로도 흉악범죄의 발생 비율이 낮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런지는 중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법이 존재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한민국은 '착한 사람'이 여전히 많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 진짜 '나쁜 놈'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점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연못을 흐린다는 속담처럼 정말 '나쁜 몇 놈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눈쌀을 지푸리게 만든다. 정말이지 그런 나쁜 놈들만 골라서 딱딱 '천벌'을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멋진 상상을 하면서 2권을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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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8 : 개인 vs 사회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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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8 : 개인 VS 사회>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3)

[My Review MMLXI / 돌핀북 8번째 리뷰] 정치가 어려운 까닭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정답 없는 것'이 비단 정치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치는 '실생활'과 밀접한 정도가 아니라 '실생활, 그 자체'인 까닭에 어떤 현안이 떠오르든 반드시 '옳은 정답'을 찾아야만 하겠기에 극도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단적인 예를 들어서, '개인의 권리'와 '사회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 망설이게 된다.

홍수가 나서 댐이 범람할 위기에 처했다고 치자. 이대로 10분이 지나면 오메가시티가 그대로 물속에 잠길 위험에 놓였다. 물론 범람 위기경보가 조기에 울려서 시민들은 대부분 대피에 성공해서 도시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서 안전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대로 범람이 되어서 오메가시티를 덮친다면 수많은 공장과 회사들, 발전소와 군사시설, 병원, 교육시설, 박물관과 문화재들 모두가 물속에 잠겨서 복구하는데만도 엄청난 비용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당장 수도인 오메가시티가 기능을 상실한 틈을 타서 '적국'이 침공할 우려도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사시설'만큼은 지켜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범람할 물길을 돌릴 수 있는 '조그만 댐'을 하나 폭파시키면 오메가시티로 들어갈 물을 대부분 '알파 마을'로 돌릴 수 있어서 안전을 확보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 '사회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조그만 댐'을 폭파시켜서 범람을 '알파 마을'쪽으로 유도해야 옳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조그만 댐'을 폭파해서 물을 '알파 마을'로 돌린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여 명의 마을 주민들은 미처 대피할 시간이 없어서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더구나 이제 남은 시간은 5분밖에 남지 않았고 '알파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노년층이라서 지금 당장 알린다고 해도 안전하게 대피할 시간도, 구조할 시간도 없다. 하지만 마을의 늙은 주민들 백여 명을 '희생'시키면 오메가시티를 구할 수 있고, 오메가시티를 복구하는 비용보다는 훨씬 적은(?) 비용을 들여서 알파 마을도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범람이 지나고 나면 '알파 마을'에 사는 사람도 더는 없을테니 복구비용 자체를 아낄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백여 명의 알파 마을 주민들이 희생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비용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결정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결정해야 할 '당신'의 부모님이 알파 마을의 주민이고 '당신'의 아이들마저 방학을 맞아 부모님댁에 놀러 가서 함께 머물고 있다. 과연 당신은 홍수라는 재난 앞에서 '사회의 이익'을 앞세워 오메가시티를 구할 것인가? '개인의 권리'를 생각해서 알파 마을을 구할 것인가? 당신의 선택은? 60초 뒤에 공개하겠다.

우리는 개인의 권리를 더 중요하다고 여기면 '개인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회의 이익을 더 중시한다면 '집단주의'라고 말한다. 이 둘 가운데 무엇이 옳은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면 '주관적인 신념'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든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웬만한 사안들은 '어느 쪽의 이익'이 더 크고, 더 중요한지를 따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극단적인 경향'을 띠게 되면 나타난다. 개인주의의 극단화는 '이기주의'이고, 집단주의의 극단화는 '전체주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문제다. 하지만 '이기주의'는 어느 정도 선에서는 '통제'가 가능하다. 사회 전체가 건전하다면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 소수를 처벌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 전체가 '이기주의'에 빠져서 저들의 욕심만 채우면 그뿐이라고 여긴다면 큰 문제겠지만, 그때에도 '다수의 이익'을 생각하는 쪽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서 제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주의자'들을 혼내주려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자칫 잘못 되었을 때 '사회 전체'를 불이익 줄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아주 큰 아픔을 겪게 된다. 바로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그런 희생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회는 종종 '광기 어린 폭력'을 자행하곤 했기 때문에, 우리는 '전체주의'를 경계해야만 한다. 더구나 전체가 '비윤리적인 경향'을 띠어서 개인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개인의 행동에 책임을 묻지도 않고, 잘못을 자행한 개인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왜냐면 책임은 '전체'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이 대표적인 '전체주의'가 보여준 폐해다. 이런 전체주의는 흔히 '독재자'를 낳고 독재자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 보장(?)된다는 사상을 강제 주입시키며 사회 전체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을 그저 방치하고, 그로 인해 사회가 망가지길 바란다. 그래야 자신의 '영구 독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럼 사회적인 관점에서 '좋은 일'과 '나쁜 짓'을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윤리'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도 '윤리'를 따르려는 까닭은 아무리 자신의 권리나 사회의 이익을 소중히 여겨서 그 권리와 이익이 더 많은 쪽으로 따르려 한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하는 원칙이 '윤리'에 위반되는 것이라면 '나쁜 짓'으로 간주하고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윤리'조차 주관적인 신념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지만, 그래도 두 가지로 구분하곤 한다. 하나는 '의무론'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론'이라고 한다. 도덕 법칙이나 의무를 준수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생각하는 '의무론'과 다수의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생각하는 '목적론'이다. 의무론을 따르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종교인'들이다. 또한 목적론을 따르는 대표적인 사람은 '안중근'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의무론'은 과거지향적이고, '목적론'은 미래지향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윤리조차 '절대적인 잣대'는 아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절대적인 도덕(정언명법)을 말하며, 이렇게 외쳤다. "나의 마음을 경외심으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내 머리 위에 반짝이는 하늘의 별과 내 안의 도덕률이다."라고 말이다. 칸트는 내가 하는 '착한 일'로, 세상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 '착한 일'을 따라하게 할 수 있다면, 온 세상은 착한 사람들로 가득한 선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모든 상황에서도 옳은 것, 다시 말해 '절대적인 도덕'을 법칙으로 세우면 도덕이 무너지는 시대를 되살릴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에 반론을 던진 이가 있었다. 바로 <공리주의>를 쓴 벤담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많은 사람이 행복할수록 이익일 뿐이라면서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벤담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인 주장이었기에 나중에 존 스튜어트 밀이 '원초적인 쾌락'만 따질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쾌락'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공리주의'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키기도 했다. 뭐, 양적이냐 질적이냐도 주관적인 신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에 어려운 문제겠지만 말이다.

어떤가? 정치, 참 어렵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분명히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가 어렵게만 느껴진다면, 그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것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사람, 저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을 경청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혜안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기본적으로 똑똑해야 한다. 그러나 똑똑하다고만 해서 정치를 잘 한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똑똑해도 '자기 이익'만 챙기려 들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정치가 아니라 '독재'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 좀 잘 하는 사람을 뽑고 싶다면 '실력'도 갖췄으면서 '윤리'적인 사람을 골라야 한다. 그렇다고 '도덕적 흠결'이 전혀 없는 착한 사람만 뽑으라는 얘기도 아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을 고려해서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지혜를 유용하게 써먹어야 한다. 대한민국 '검찰공화국'을 만들어서 자기편이 아닌 사람을 무턱대고 '범죄자 취급'하고 내로남불 했던 '윤석열과 아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은 생각도 않고, 남들이 저지른 행동 하나하나를 '법적으로' 따져서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결국엔 '깨끗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무리하게 감옥에 쳐넣으려고 하더니, 자신들은 내란과 외환이라는 무거운 죄를 저지르고도 '모든 사법절차'를 따져서 법망을 피해가려는 '법꾸라지 행태'를 자행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절대로 두 번 다시 '대한민국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정치가 어렵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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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3
이우혁 지음 / 들녘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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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3 : 초치검의 비밀>  이우혁 / 들녘 (1994)

[My Review MMLX / 들녘 7번째 리뷰] 퇴마록 국내편의 완결은 바로 이 3권에 수록된 '초치검의 비밀'이었다. 국내 오컬트 장르 소설 가운데 가장 스케일이 크고 거대한 미스터리 속에 감춰진 비밀이 꺼내지면서 퇴마사들의 행보는 드디어 '국내'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장쾌한 스토리로 전개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국내편 3권에 수록된 이야기는 '초치검의 비밀'을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밤은 그들만의 시간', '쌀', '그네'도 퇴마사들의 특색을 엿볼 수 있는 깔끔한 단편이며, 이런 단편 스토리를 빼놓지 않아야 '퇴마사들의 능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번에 '개개정판(반타)'이 출간되면서 <퇴마록>을 다시 읽는 분들이 많을 텐데, '개정판(엘릭시르)'과의 내용 차이는 크지 않지만, '초판(들녘)'과의 차이는 꽤 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미 '개정판'을 내놓을 때 대대적인 수정을 한 탓이 크지만, '초판'의 서술이 좀 더 '자세하다 못해 장황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개개정판'은 이야기 서술의 군더더기를 깔끔하게 걷어낸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하지만 '국내편'에서는 딱 거기까지다. 내용상의 차이점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간혹 '문장'만을 걷어낸 것이 아니라 '문단'까지 덜어낸 경우도 눈에 띄긴 하지만, 소설의 내용을 읽는데 큰 불편을 느낄 정도로 많이 '축약'한 것은 없다. 다만, '초판'의 서술이 좀 더 '날 것, 그대로'인 느낌이 강하고, '거친 표현'도 많았기에 더 생생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에 비해서 '개개정판'은 좀 더 단정하게 순화하여 '강렬한 전달력'이 좀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테면, 일제강점기 일제의 만행을 밝히는 부분에서 좀 더 거칠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부분이 다소 차분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바뀐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주석 설명'에서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초판'의 주석에 비해서 '개개정판'의 주석은 분량부터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무튼, <초치검의 비밀>은 납량특집을 준비하던 신문기자가 '강화도'에서 발굴된 500구가 넘게 매장된 왜구의 시체를 취재를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즘엔 '시원한 여름맞이'를 위해서 등골이 오싹한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지만, 90년대만해도 극장가를 비롯해서 '안방극장'이라고 불리는 TV프로그램에서 '납량(오싹한) 특집'을 참 많이 했더랬다. 그래서 신문기자들이 이를 취재하기 위해서 강화도로 가는 도중에 엄청난 능력자들로 보이는 무리를 발견하면서 이야기가 점점 고조된다. 현현파, 오의파, 그리고 청홍검을 든 여인이 등장하는 등등 너무 많은 등장인물이 강화도로 속속 모여들고 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는 도대체 누가 등장해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크게 살펴보면 '국내의 도인들'이 떼거리로 등장하고, '일본의 도인들'이 3명 등장하며, 거기에 우리의 퇴마사들이 참여한다고 보면 좋을 듯 싶다. 퇴마사들이 참여했다고 말하는 까닭은 강화도에 모인 수많은 도인들은 '목적'이 분명하지만, 퇴마사들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결코 탐내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강화도에 모인 까닭은 다름 아니라 '초치검(일명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얻기 위해서다.

초치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역사책 <태평기>를 참고해야 한다. 그 책에 일본 남북조 시대를 마감했을 때, 남조의 천황이 북조의 천황에게 힘에서 밀려 패배하고 천황의 상징과도 같은 '삼종신기(야타의 거울, 구사나기의 검, 야사카니의 구슬목걸이)'를 품에 안고서 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런 까닭에 남조의 고다이고 천황 이후에 일본 황실에 전해지는 '삼종신기'는 가짜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삼종신기'의 하나인 검을 천총운검(초치검)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퇴마록>에서는 이를 살짝 비틀어서 고다이고 천황이 죽고 '남조의 멸망'이 확실시 되었을 때, 부하 장수였던 미쓰마사에게 '초치검'을 맡기고 가짜 삼종신기를 들고서 자결했고, 미쓰마사는 '초치검'을 들고서 남조의 부활을 꿈꾸며 '한반도'로 향했고, 이곳 강화도에서 '초치검'과 함께 묻혔다는 설정을 하였다. 남조가 멸망할 당시가 1392년이고, 이 해에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한창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을 때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지어낸 이야기인 것이다.

이처럼 '초치검의 비밀'은 역사적 개연성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라 읽다보면, 점점 더 이야기 속에 빠져들면서 읽게 된다. 먼 과거에 일본 남조의 부활을 꿈꾸고 한반도를 찾아와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하고 말이다. 더구나 현재 시점에서 일본의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도인 3명이 찾아와서 '초치검'을 차지하려 든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검을 차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미처 완수하지 못한 '일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꿍꿍이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강화도에 잠들어 있는 500구의 왜구 시체를 깨워서 말이다. 도대체 왜구들이 강화도를 찾아온 까닭은 무엇이며, 500구의 해골이 가지런히 눕혀진 채 발굴된 것도 기이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단순히' 도적질을 하려고 찾아온 왜구들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되어서 벌인 일이며, 차곡차곡 질서정연하게 해골들이 눕혀진 것을 보아서는 '집단 자살'이나 '의도된 할복'을 하고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벌인 계략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더구나 일본의 도인 가운데 '스기노방'이라 불리는 도인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한국의 혈자리를 찾아 기맥을 끊겠다면서 풍수적으로 좋은 기운이 모이는 곳을 찾아 '쇠말뚝'을 박는 만행을 저지른 장본인이었단다. 이런 짓을 저지른 위인들이 강화도를 찾아와서 '초치검'을 차지하려 드는 목적이 결코 순수할 리 만무하다.

이야기는 점점 고조되며 한국의 도인과 일본의 도인이 마주하며 싸우려는데, 일본 도인들이 암기와 독을 쓰면서 한국의 도인 가운데 상당수가 목숨이 경각에 다다르는 위험천만한 일을 당하게 된다. 동시에 500구의 왜구를 해골의 모습으로 살아나게 만들어서 한국의 도인들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는데, 드디어 퇴마사들이 나서며 500구의 왜구 시체들과 일본 도인 3명과 한 판 대결을 벌이게 된다. 상대적으로 열세인 퇴마사들을 돕기 위해 박수무당인 철기옹과 '주기(붉은깃발)선생'이라 불리는 박상준이 퇴마사들을 도와 일본측과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게 참 볼만하다.

이야기는 점점 무르익어서 단군의 상징인 '천부인'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애초에 일본 무사 미쓰마사가 무인 500명을 데리고 '고다이고 천황의 검(초치검)'을 들고 한반도를 찾아온 목적이 바로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단군왕검을 상징하는 '천부인'을 탈취해서 일본 남조의 부활을 꿈꿨던 것을 밝혀내게 된다. 아니 일본 황실을 되살리는데 '한국의 징표'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건 다름 아니라 일본 황실의 조상이 한반도에 넘어간 신라 장수라는 '역사적 진실'이 감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천황가가 '백제의 유민'이라는 사실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빼앗긴 삼종신기'를 되찾을 길이 막막한 터에 '단군의 천부인'을 탈취해서 일본에 가져가면 이미 망해버렸던 '남조의 부흥'을 이룩할 수 있을 거라는 목적에서 벌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단군의 천부인'이 일본 황실의 '삼종신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일까? 힘에서 밀려서 '진짜 삼종신기'를 갖고 있었음에도 '가짜 삼종신기'를 소유한 북조의 천황가에게 자리를 빼앗겼는데, '진짜 삼종신기'도 아닌 '단군의 천부인'을 내세우면 남조의 부활이 가능하겠느냔 말이다. 14세기만 해도 일본에선 자신들의 천황가가 '한반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닥 숨길 까닭이 없던 분위기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신라와 백제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천황가의 주축'이었다면 삼국시대보다 앞선 '고조선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통성'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일본의 삼종신기, 더구나 북조에선 '가짜 삼종신기'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정품 단군의 천부인'을 탈취할 수만 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으리란 설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면 '정품 단군의 천부인'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고, '일본의 삼종신기'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신민(臣民)들은 '명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강한 힘'에 복종하는 습성이 뿌리 깊게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장수가 천황가를 일구었다는 사실만 봐도, 당시 일본의 무사 집단을 힘으로 굴복시킨 '신라 장수'가 일본의 오야붕으로 자리 잡고서 왕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인들이 '힘'이 아닌 '명분'을 중시했더라면 아무리 신라 장수가 일본을 정복한들 '왕'으로 받아들였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히 '힘'에 복종하는 습성이 뿌리 깊었기에 '강한 자' 앞에서 철저히 머리 숙이는 관행을 시행했을 것이다. 그러니 북조의 힘에 밀려서 남조가 멸망했는데, 남조에서 살아남은 무사 하나가 '일본의 삼종신기'보다 우월한 '단군의 삼종신기'를 가지고 왔다고해서 머리를 조아릴 까닭이 없다. 그나마 '단군의 천부인'을 알아보고(?) 미쓰마사의 휘하로 '총집결'을 하는 무사 집단들이 무수히 많다면 어찌어찌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힘의 논리'에 민감한 일본인들이 '명분' 따위에 머리를 숙이고 구름처럼 모여들 것을 기대하기란 매우 힘들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이는 오늘날의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봐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군국주의 시절'의 제국주의 서열(?)을 중시하거나 '경제대국 2위'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본의 장,노년층은 여전히 '한류열풍'에 빠져든 일본의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는가 말이다. 현재의 일본 젊은이들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한국보다 나은 일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여전히 한국을 '열등한 존재'로 치부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애초에 '한국'에 뒤쳐진 일본의 현실을 받아들여서 '한국의 힘'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은 이런 일본의 행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 대등한, 서로 존중하는 자세로 일본을 대하고 있어서 '당혹스러움'은 오로지 한국인들의 몫이 되고 만다. 물론 단적인 예시를 들어서 풀이한 것이기에 100%의 모든 일본인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대체로 그런 습성이 있다고 알고 있으면, 일본인들을 조금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초치검의 비밀'은 살짝 빗나간 결말을 맞게 된다. 애초에 일본인들이 '명분'을 그리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90년대라는 점에서 당시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며 경제성장이 하락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긴 했지만, 당시 일본의 경제력은 대한민국에 비해서 꽤나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시절이라 더욱더 실현가능성은 없었던 설정이었다. 그럼에도 '초치검의 비밀'을 읽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 우리 한국이 일본을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할 때에 일본을 '힘'으로나 '명분'으로나 모든 면에서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뿌듯하고 당당한 느낌으로 <퇴마록 세계편>을 읽어나가면 퇴마사들의 행보 하나하나가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게 된다. 이제 세계로 나아가는 퇴마사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것이다. 커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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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우연하고 경이로운 지적 탐구 서가명강 시리즈 37
천명선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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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 37] <우리는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우연하고 경이로운 지적 탐구>  천명선 / 21세기북스 (2024)

[My Review MMLIX / 21세기북스 39번째 리뷰] 2005년 8월 미국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재난이 발생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집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할 일이 생겼다.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세워 놓은 둑이 터져버려 도시 안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기에 살기 위해서는 구조대의 손길을 받아들여 달랑 몸 하나만이라도 탈출을 해야 생존을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위험 상황 속에서도 42퍼센트에 해당하는 주민들이 대피를 하지 않았단다. 미처 난리를 피할 새도 없이 위험을 맞닥뜨려서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도 있었지만 구조대가 도착해서 피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집에 남기'를 선택한 38퍼센트의 주민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들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피난을 거부한 까닭으로 '반려동물을 두고 가고 싶지 않아서'라고 답했단다. 왜냐면 구조나 대피시 '반려동물 동반 금지'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반려동물을 집에 홀로 남겨두고 자신만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말에 공감한다면 당신은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공감하지 못한다면 동물은 인간과는 달리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기계'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첨예한 문제에 너무 이분법적인 구분이라 선택하기 힘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왜냐면 전세계 선진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대한민국은 동물애호에 관해서 7단계 등급 가운데 딱 '중간'인 4단계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동물이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마땅하다고 여기면서도 '육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맛난 육식을 값싸게 즐기기 위해서 '공장식'으로 길러낸 가축을 도살하는 것을 완전 금지하는데 찬성하지는 못하겠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아직 '동물에 대한 인식'에 완전히 자유로운 접근을 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 편리한대로만 단편적으로 생각하는데 그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바람직한 것일까? 이 책에 따르면 '인간도 동물인가?'라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혹시 아직도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여기고서 모든 생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또는 인간이 '산업혁명 이후' 수많은 생물들을 멸종에 이르게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엄청난 생태계 파괴를 일삼고, 심지어 지구 환경까지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어서 생태계의 다양성을 해치고 있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 동물들이 살고 있는 서식지까지 파괴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인간'에게만 이롭고, '인간 이외의 동물'에게는 끔찍한 결과를 낳고 있는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처럼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냥 살아가면 된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생물의 다양성'이 훼손되고 '생태계 파괴'를 지속시키면 우리 지구의 환경은 심각하게 파괴될 것이 자명하며, 그렇게 파괴된 환경 속에서 인간도 더는 살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런 걱정을 한다면 인간도 '동물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생물의 다양성' 속에 인간도 포함시키고, '생태계 보존'을 위해서 인간도 동참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을 멀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호주에서 있었던 일 두 가지를 예로 들겠다. 하나는 호주에 정착한 백인들이 '사냥감'으로 데리고 온 '토끼 24마리'가 초래한 결과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영국인들은 '사냥'을 스포츠처럼 여기며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호주에서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 '토끼 24마리'를 방사했는데, '천적이 없는 환경'에서 토끼의 수가 급작스럽게 늘어나고 말았단다. 수가 늘어난 토끼들은 농작물을 먹어치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호주의 자연 생태계를 교란시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단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토끼 사냥을 대대적으로 허용하고, 덫을 놓고, 독약을 사용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늘어난 토끼를 막기 위해서 무려 3000킬로미터에 달하는 '토끼 방제 울타리'를 설치해야 했단다. 그래도 늘어나는 토끼의 수를 감당하지 못해서 토끼를 살처분하기 위한 '바이러스 살포'까지 했지만, 그때 뿐, 얼마 안 가서 토끼는 엄청난 수로 불어나서 호주의 자연 생태계를 망가뜨리기 시작했단다. 이는 인간이 자연 생태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줌과 동시에 망가진 자연 생태계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어디 그뿐인가. 늘어나는 토끼를 감당하지 못하자 결국 '살처분'이라는 끔찍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고, 그로 인한 '엄청난 죽음'을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들은 심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와 충격, 그리고 공포를 느끼고 한동안 제대로 된 일상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증세에 시달리기도 했단다.

이래도 끔찍한 재앙에 대한 예로 부족했다면, 호주에서 벌어진 '최악의 산불'을 이야기하겠다. 2019년 6개월간 계속된 호주 산불은 '한반도 크기'의 임야를 송두리채 불태웠다. 주택과 건물 수천 채가 불탔고 33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산불로 인한 연기에 질식해서 사망한 사람만 수백 명이라고 한다. 여기에 56000마리의 가축이 미처 피하지 못해 불타 죽거나 강제 살처분 되었고, 12억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단순히 숫자만 나열해서는 그 피해가 얼마나 되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한반도 전체가 불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겨우 사람만 살아남은 셈이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재건'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재건 비용은 또 얼마가 될 것이며, 당장 몸을 뉘일 곳은 어디며, 비와 바람, 더위와 추위를 피할 공간은 어디 있으며,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생계 수단'은 무엇으로 마련할 것이냔 말이다. 호주 산불의 원인이 바로 '심각한 기후 위기' 때문이라는 보고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로 확실시 되고 있으며, 만약 지구적인 재앙이 당장 찾아온다고 해도 수많은 과학자들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 모든 재앙의 시발점이 '자연 생태계의 파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겠는가?

우리가 동물을 보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지 않고, 인간을 소중히 여기듯 동물도 똑같이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주고 잘 대우해주어야 우리가 사는 지구가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수많은 동물들을 오로지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서 희생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희생은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하다. 왜냐면 인간의 생명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동물실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쓰는 '생활용품'서부터 끔찍한 질병으로부터 인류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연구하는 '신약 개발'이나 '백신 개발'에 인간을 대신해서 먼저 동물에게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동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동물실험'을 완전히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쉽사리 하지는 못한다. 물론 모든 동물실험이 인간에게 유용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들이밀어서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그렇다면 신약이나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 '인간 실험'을 하자는 얘기냐면서 반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AI 컴퓨터 발달로 인해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동물 실험을 대체하고는 있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동물실험'은 계속 진행중이다

이처럼 어쩔 수 없는 '희생'을 치뤄야 한다면 적어도 '예우'는 갖춰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타도 만만치 않다. 왜냐면 모든 '동물 실험'이 인간을 대신해서 실험을 치르는 동물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하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을 한낱 '기계'로 치부하며 실험과정에서 겪는 동물들의 끔찍한 고통을 즐기듯이(!) 실험을 진행하는 냉혈한 같은 인간들도 아주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최소한 적은 고통을 겪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지 않고 그저 '망가진 기계'를 다루듯이 동물들의 생명을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하며, 그렇게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냉정한 '결과'만 채취해서 자신들의 업적 쌓기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약과 백신으로 인류의 생명을 구원한다는 숭고하고 위대한 공헌을 한다는 공명심에 사로 잡혀서 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동물 실험을 거쳐서 만들어진 '일상 생활용품'과 '신약, 백신'을 공급 받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쓰고 있다. 머리를 감을 때 눈에 들어간 샴푸거품으로 따가워하며 서둘러 씻어내지만, 그 샴푸를 제조할 때에는 '사람의 눈'에 들어가도 안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토끼의 눈'을 강제로 벌리고서 새로 만든 샴푸를 들이붓는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그 과정을 거쳐서 성능은 좋으면서 사람의 눈에는 해롭지 않은 '신제품'을 우리가 쓰고 있는 셈인데, 토끼는 그 실험을 통해서 '실명'을 하고, 그대로 '살처분' 당한다. 그 실험용 토끼는 그런 용도로 사육되었다가 '쓰임새'를 다하고 나면 그냥 죽임을 당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게 '동물 실험'의 한 예다.

이 밖에도 '인간의 관점'에서 동물에게 가하는 끔직한 행태는 너무나도 버라이어티하다. 이대로 계속 진행되어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인류가 '육식'을 금지하고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동물이 끔찍한 고통을 받는 것만큼이나 식물도 '살아있는 생물'이고, 동물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낀다고 하니까 말이다. 더구나 인간은 많은 양의 '단백질 섭취'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육식을 하는 것만큼 '고단백 선취'가 가능한 것도 없다. 그러니 인간은 '육식 식생활'은 앞으로도 계속 될 수밖에 없다. '동물 실험'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을 해야 한다면 인간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야생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살 공간을 확보하고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개발을 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인간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 해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동물을 위한 일'로 귀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동물이 살 수 없는 지구라면 결국 인간도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동물에 대한 권리를 '별도의 특별한 권리'로 여기지 말고, 인간이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처럼 동물들도 그런 권리를 누리며 함께 '공존'을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동물애호가(?)들이 벌이는 '당신의 접시 위에서 벌어지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강도 높은 캠페인까지 동참하라고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맛있게 즐긴 '육식'을 하면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공장식 축산이 아닌 드넓은 초원에서 맘껏 풀을 뜯고 뛰놀던 소, 돼지, 닭을 '최소한의 고통'을 겪을 방법으로 도축을 한 뒤에 식탁에 오르게끔 노력하자는 얘기다. 오직 '사육'을 위해서 좁디 좁은 우리에 갇혀서 살을 찌우기 위해 강제로 사료를 먹이고, 근육 증강제, 항생제를 과다 투여하고 난 뒤에 고기를 얻기 위해 도축을 할 때 '전기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리는...그런 몰상식한 방식은 더는 쓰지 말자는 얘기다.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맛있는 고기'를 얻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동물'에 대한 인식부터 차근차근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 먼 과거에 비해서는 분명히 우리네 인식도 많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개고기 식용도 금지하고 있고, 반려견 인구는 점점 더 많이 늘고...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맞이할 끔찍한 재앙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지구 생태계 파괴를 멈추지 못한다면 지구는 그보다 더 끔찍한 재앙으로 인간에게 되돌려 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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