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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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 창비 (1995) [개정판 2006년 / 개정증보판 2025년]

[My Review MMLXXIII / 창비 10번째 리뷰]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조직'에 가담한 것이 이유가 되어서 귀국하지 못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자 홍세화는 그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서 빠리에 정착하게 되었단다. 대한민국만 안 되고, 어느 나라에나 거주할 수 있는 특이한 여권을 들고서 말이다. 홍세화는 그렇게 프랑스에 '난민 신청'을 하게 되었고, 택시 운전사가 되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빠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서 훗날 1995년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저자를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독재 세력'이 온갖 부정부패로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던 그때가 되어서 말이다. 그리고 '똘레랑스(굳이 따지자면 '관용 정신')'라는 개념으로 당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만들었고,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진지한 성찰을 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책'이기도 하다. 한국사람들은 '정(情)'이란 감정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프랑스사람들은 '똘레랑스'란 독특한 이성으로 무장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홍세화를, 프랑스 사회는 기꺼이 받아주더라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2025년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과연 '똘레랑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저출생 문제로 인해서 '인구절벽'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초고령화 문제로 인해서 우리 사회의 '경제성장의 동력'이 점차 둔화될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인구가 절감하게 된다면 2050년 무렵이면 한국사회에서 '한국인'은 멸종할 수도 있다는 빨간등이 번쩍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심각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한국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출생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법이다. 무작정 한국여성에게만 아이를 둘 이상 낳으라고 강요하는 방법이 아닌,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젊은 나이에 연애와 결혼,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돌아서고, 이를 위해서 정부는 젊은이들이 자녀를 낳고 기르는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정책에 올인을 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방법이 그동안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닥 희망이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한국사회의 인구를 늘리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솔직히 이 방법 말고 다른 대안은 거의 없다. 딴에는 '통일 한국'을 이루어서 북녘에 있는 25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 방법에는 '통일 비용'이라는 또 다른 천문학적인 비용이 별도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저출생과 초고령화에 드는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부담'만 더욱더 가중시키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이민'을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민'에 대해서 긍정적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민'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이민자'에 대한 시선 또한 결코 곱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 나라보다 '선진국'이고 '강대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이민'을 오고 싶어하고, '귀화'를 하려는 모습을 볼 때에는 그닥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있긴 하지만, 무슬림과 같은 '특정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나, 화교와 같은 '특이한 사상'에 물든 집단에 대한 혐오 따위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려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이질적인 문화'로 인한 불편 내지 불쾌함 때문에 절대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연 우리가 '똘레랑스'를 발휘하여 이를 극복해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홍세화는 왜 똘레랑스를 강조했던 것일까? 30년 전에 프랑스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무엇 때문에 홍세화는 그렇게 감개무량했던 것일까? 이건 거꾸로 생각을 해봐야 이야기를 수월하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99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난민'을 신청한 외국인이 있었다면,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그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일단 프랑스사회에서는 그게 가능했었다. 귀국을 허락치 않아서 오도가도 못하던 홍세화를 기꺼이 받아주고, '택시 운전사'라는 일자리도 제공했으며, 프랑스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수많은 프랑스사람들이 '외국인'이었던 홍세화를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며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는 이게 가능했을까? 외국인은 차치하고 '홍세화'라는 이질적(?)인 정치사상조차 받아들이지 못해 내쫓은 사회였는데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25년의 대한민국도 그리 달리진 것은 없다. 지금도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대기하고 있는 '난민'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그나마 몇몇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난민신청'을 통과했더라도 한국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위해서 '자국의 문화'를 완전히 버리고 '한국 문화'를 완벽하게 받아들일 각오(!)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하기 힘들다고 한다. 난민신청보다는 조금 수월한 '귀화신청'조차 녹록치 않다. 한국인과 결혼을 한 '배우자 특별전형'이 아니고서는 결코 쉽지 않은 귀화인데, 그조차 '취업'을 목적으로 한 사기행태가 만연하자, 단순히 '결혼한 사실'만 증빙해서는 허락치 않는 쪽으로 선회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과연 이런 한국사회에서 '똘레랑스'가 온전히 받아 들여졌다고 볼 수 있을까?

비단 한국사회만 탓할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경기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프랑스사회'에서도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극심해지고 있고, 특히 '이민자'에 대한 거부감과 피로감까지 서슴없이 내비치고 있기에 홍세화가 말하던 '똘레랑스' 가득한 프랑스사회는 현재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극우정당의 우세'를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죽하면 '이민자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조차 '불법이민 단속'에 나서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이민자라 할지라도 '백인이 아닌 인종'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추방조치를 취하고 있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태는 정말이지 볼썽사납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과연 이런대로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요구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딴에는 그렇다. 우리 속담에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홍세화도 과거 30년 전에 풍요로운 프랑스 사회였기 때문에 '난민'으로 환영받을 수 있었지, 오늘날과 같은 혹독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프랑스 사회였다면, '아시아계 이민자'라는 딱지로 인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하기 딱 좋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대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문화조차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땐 나몰라라 하고 말 것인가?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로 작정한 이상, 인간은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야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건 '똘레랑스'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이상향'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고자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살만한 세상인 셈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착한 사람이 훨씬 더 많기에 살만한 세상인 것이다. 만약 이런 믿음마저 사라져버린다면 그땐 정말 인간 멸종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을 한 '짐승'들만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을테니 말이다.

솔직히 홍세화가 이 책에서 말한 '똘레랑스'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홍세화도 언급했듯이 '우리말'로 적절히 뒤쳐낼 문화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굳이 따져서 '한국인의 정 문화'에 빗대어 놓기도 했지만, 그것과 '프랑스사람들의 똘레랑스'는 또 다른 결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뭉뚱그려서 '관용 정신'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너그럽게 대하는 자세만으로 보기에 모자른 감이 없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서야 비로소 '너그러운 자세'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위치에 있을 때에는 '너그러울 수 없'지만, 똘레랑스는 높낮이와는 아무 상관없이 펼쳐 보일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이를, 한국인의 감정적인 자세와 프랑스인의 이성적인 자세를 비교하면서 풀이하기도 했지만, 이성적인 한국인도 '똘레랑스'를 구현하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점이 분명히 있긴 하다. 암튼 '똘레랑스의 본질'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더라도 상관은 없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한국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 나가면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꼭 '프랑스식 원조 똘레랑스'여야만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국식에 걸맞는 '똘레랑스'로 만들어서 대한민국을 아름답게 만들고, 그걸 또다시 한국식으로 포장해서 '역수출'하면 그뿐이다. 오늘날의 '한류열풍'처럼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를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 선진국이 되었다. 비록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네 인심'을 전세계에 널리 나눠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더구나 전세계가 '한국 문화'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럴 때 보여주면 된다. 잘난 척이 아니라 '진정한 멋'을 보여주면 그뿐이다. 30년 전에 홍세화가 겪은 '똘레랑스, 그 멋짐'을 우리에게 소개해줬듯이, 이제는 '한국 문화의 멋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해야 할 때다. 그리고 여전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똘레랑스, 그 이상'을 발휘해서 차근차근 해결해가려는 노력이 절실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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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 - 세계문학 전집을 읽으며 나를 찾아가는 시간
최에스더 지음 / 사부작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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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  최에스더 / 사부작북스 (2025)
[My Review MMLXXII / 사부작북스 1번째 리뷰] 책을 읽고 리뷰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중노동'에 빗댈 수 있을 정도로 고된 업무(?)였다. 대한민국의 '독서인구'가 선진국 가운데 최저인 상황에서 취미 삼아서 책을 읽는 분들은 그나마 많아졌지만, 책을 읽고 그에 따른 감상까지 일일이 독후감으로 쓰는 분들은 개중에도 드문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각종 '온라인서점'에서 블로그나 사락을 운영하는 분들이 써대는 리뷰를 보면 정말 많이 쏟아내듯 쓰고 있긴 하지만, '리뷰'에 쏟은 정성의 차이는 정말이지 하늘과 땅 차이를 방불케 하고, 그런 리뷰를 꾸준히 써내는 분들 또한 '편차'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읽고 쓰는 이'들 중에서도 읽는 사람만 읽고, 쓰는 사람만 줄곧 쓰고 있기에 차이가 극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평생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단 한 편의 리뷰'도 쓰지 않고 잘만 살고 있지만, 어떤 분들은 평생동안 '일만 권의 책'을 읽으려 들고, 읽는 족족 '리뷰'로 자신이 살고 갔다는 흔적을 남겨 놓기도 한다. 그 가운데 정말 글을 맛깔나게 잘 쓰시는 분들이 이 책 <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와 같은 '독서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한다. 나도 리뷰어로 20년 간 2000편이 넘게 쓰긴 했지만, 그런 행운(?)은 아직 만나지 못해서 참으로 부럽기 그지 없다.

  책 속에도 언급되긴 했지만, 나이 50살이 넘어가면 '세계 명작'이라 불리는 고전소설들의 내용이 느닷없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경험을 받게 된다. 물론 어릴 적부터 꾸준히 고전소설을 즐겨 읽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충족해야만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꼭 책을 많이 읽어야만 가능한 경험이 아니라 삶을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겪었다면 누구라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고전 명작'을 쓴 작가들도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어야만 자신의 작품 속에 잘 녹여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 어릴 적에도 어른들은 "만화책 같은 시시껄렁한 책만 읽지 말고 '한 사람의 인생'이 잘 녹아 있는 고전 소설을 많이 읽어라"라는 말을 종종 한 것이다. 어릴 적에는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내가 그때의 어른의 나이가 되고 보니 저절로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이게 '평범한 사람'이 깨닫는 지혜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지천명'의 나이(50살)가 넘어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는 인생의 참진리를 10대와 20대의 어린 시절에 깨우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게 깨달은 진리로 30대에 세상을 환히 밝힌 사람들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위인들의 삶'일 것이다. 이게 바로 고전 명작을 가까이에 두고서 즐겨 읽어야 하는 명백한 이유다. 학교 성적은 엉망이어도 세계 명작으로 손꼽히는 책들을 어린 시절부터 즐겨 읽었던 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서 세상에 펼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사례는 각종 '위인전'의 단골 스토리이기도 하다. 왜냐면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명작 소설을 잘 읽지 않는가? 사실 잘 읽지 않는 것보다는 '읽어도' 뭔 내용인지 갈피를 잘 잡지 못한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고전 소설 좀 읽어보셨다고 자부하는 분들조차 한 번 읽기에도 버거운 '벽돌책'이 있는가 하면, 원체 어려운 내용인데다 따분하기까지 한 '딱딱한 어조'로 인해서 단 한 줄만 읽었을 뿐인데 졸음이 쏟아지게 만드는 '지루한 책'도 읽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전 소설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다고 깔깔대면서 읽는 독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지겹고 따분하지만, 그걸 꾹 참고 끝까지 읽으니 참 좋은 책인 것 같더라는 막연한 느낌만 받을 뿐이기에 접하기를 꺼리는 분들이나, 그렇게 읽기를 꺼리는 책도 있다. 그래서 '고전 소설'을 그럭저럭 재미나게 읽을 수 있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바로 이 책 <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의 저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착각은 금물이다. 아무리 재밌게 풀어서 설명해준 '리뷰'를 읽었다하더라도 '원작'을 읽어서 얻는 감동에 비하면 '새 발의 피'보다도 못한 아주 미세한 감흥 하나를 겨우 얻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전 소설'을 읽을 자신은 업으니, 남들이 써놓은 '짤막한 리뷰'를 대신 읽고 고전 소설을 읽은 척한다면 정말이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허튼 짓(!)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아무리 잘 쓴 리뷰일지라도, 그건 그저 '한 사람의 견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해하기에 너무 난해해서 '약간의 귀띔'을 받을 목적이라면 남이 써 놓은 리뷰가 정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리뷰만으로 '원작의 깊이'를 모두 이해했다거나 통찰할 수는 없는 법이기에 그렇다. 이는 '전문가'가 쓴 리뷰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답게 그들이 써놓은 '평론'이 아무리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고 이해가 쏙쏙 되는 문장 해독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평론'은 평론일 뿐, 결코 '대작'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된 말로 아무리 독설로 유명한 '평론가'라고 하더라도 일류는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면 평론가들 가운데 '일류'가 있다면 남들이 써 놓은 글에 대거리만 늘어놓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대작'을 써 놓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비유해서, 일류는 '명작'을 쓰지만 삼류는 '평론'을 쓴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리뷰어(평론가)를 폄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리뷰'에 감동해서 읽기를 그치지 말고, 반드시 '원작'을 읽고서 대작의 깊이를 스스로 느껴보기실 권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한편, 이 책의 제목이 <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다. 후속작도 곧 나올 듯 한데 <그 여자는 길을 찾았다>로 잡은 듯 싶다. 이 때문에 '남자'는 책을 읽을 뿐이고, '여자'는 책 속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식으로 독자를 '성별'에 따른 차별을 심화시킨 것 같은 선입견을 주기도 한다. 또는 책을 읽는 행위가 주는 '남녀간의 차이'를 선별적으로 나눠서(?) 주는 것이라고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남자는 책을 읽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여자는 굳이 책 속에서 '살 길'을 찾아나서야 할 정도로 절박한 것 아닌가 싶은, 그런 느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후속작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책들을 따로 골라서 리뷰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적어도 우리가 '고전 명작'이라고 부르는 한에는 말이다. 책 내용의 깊이와 '성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시대적 배경'에 따른 한계점이 부각되느냐 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소위 '전근대적인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이 남성에 비해서 형편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지 아닌 지에 따라서 '여성의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만 구분될 뿐이다. 그리고 애써 이런 구분을 할 필요도 없이 오직 '인간문제'만이 있을 뿐이라는 올바른 시각만 가지고 있다면, 굳이 편견을 가질 것도 없다고 하겠다. 애초에 모든 소설 속 주인공들은 '문제의 원인'을 유발하는 존재일 뿐이다. 문제가 없다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고 말이다. 단지 그 주인공이 다수인 '남자'이냐, 소수의 '여자'이냐일 뿐이다. 이는 작가도 어쩔 수 없이 '경제적 여유'를 가진 독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그러니 그런 구분을 애써 나눌 필요는 없었을 텐데, 뭐, 굳이 책 한 권에 모두 담을 수 없어 '나누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볼 수도 있겠다. 이런 구분보다는 '주제별' 구분을 해서 나눴으면 더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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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3
이우혁 지음 / 미컴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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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3>  이우혁 / 미컴 (1999)

[My Review MMLXXI / 미컴 3번째 리뷰] 결론부터 말하자면, 26년 전에 '4권에 계속'이라고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미완성'한 작품이다. 당시 <퇴마록 : 세계편>을 완결하고 <퇴마록 : 혼세편>을 한창 연재하던 시절이었고, <퇴마록 : 말세편>을 예고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치우천왕기>도 '연재중'이었고, <왜란종결자>도 '집필중'이었던 시절이었을텐데, 왜 <파이로 매니악>을 연재 중단했던 것일까? 뭐, 알 수는 없다. 하긴 <치우천왕기>도 얼마 뒤에 '연재 중단'을 했다가 2010년이 넘어서야 새로운 출판사에서 '완결'을 했기 때문에, <파이로 매니악>의 팬들도 얼마간은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파이로 매니악>의 출간 소식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읽게 된 거라 분통을 터뜨릴 정도는 아니지만, 당시에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한 채 무작정 기다렸다면 꽤나 분노했을 거라 여겨진다. <치우천왕기> 때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암튼, 지금에 와서는 <뉴 퇴마록(가제)> 연재를 공표한 상태이니, 뭐든 기대하고 있다. <퇴마록 : 외전 3>에서 장준후가 세상을 구하고서 얻은 '권능'으로 '두 개의 지구'를 만들어서, 원래의 지구에는 '퇴마사'를 비롯해서 영능력자들의 모든 능력을 싹 제거한 뒤에 '현세적인 힘'으로 대결과 갈등을 벌이는 세계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 했고, 새로 만든 지구에서는 '퇴마사'들을 되살아나서..정확히 말하자면, '퇴마사'들을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서 '징벌자와 구원자'가 모두 태어나게 한 뒤에 벌어질 새로운 이야기를 '뉴 퇴마록'에 담을 거라고 예고했다. 그렇다면 <파이로 매니악>도 이야기 선상에서 다시 올려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엿장수(!) 맘대로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퇴마사'들이 등장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파이로 매니악>에서 펼쳐진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를 저질러 놓고서도 그에 상응하는 죄값을 달게 받기는커녕 호의호식하며 법망을 조롱(?)하며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나쁜놈들(일명 '죄수'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서는 행동파 유영이 있고, 화약 때문에 불우한 과거를 갖고 있지만 화약을 멀리할 수 없는 운명(?)적인 '파이로 매니악(화약전문가)' 민동훈이 있는 지구에서 펼쳐질 이야기가 다시금 쓰여질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비록 3권을 끝으로 '연재'를 더는 진행시키지 않았지만, '뉴 퇴마록'도 쓰여질 거라면 <파이로 매니악>도 다시 쓰여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영과 동훈이 죄수들에게 벌이는 단죄는 속이 시원하기 때문에 반드시 '완결'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방된 지 8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활개를 치며 '대한민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려는 이런 나쁜놈들을 곱게(?) 놔둬선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어떻게 독립을 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 이만큼이나 발전을 시켰는데, 고생이란 고생은 '온 국민'이 다 겪고, '나쁜놈들'은 단물만 쪽쪽 빨아 먹고 나라를 홀랑 말아먹으려 드느냔 말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놈들이기에 '파이로 매니악(P.M.)'의 부활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허구적인 소설 속에서라도 깨끗한 대한민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그러기에는 너무 과격한 설정이라는 점에서 우려스럽기 그지 없긴 하다. 아무리 죽일 놈이라고 하더라도 '사제폭탄'으로 팔다리를 날려버리거나 온몸을 화르륵 불태워버려 온전한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한 줌의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리는 잔혹함은 너무 심한 처사라는 지적이 있다면, 그에 마땅한 반론조차 대거리하지 못할 지경인 것은 솔직히 인정한다. 허나 자신들의 이익에 최선을 다한 '이기주의자'에 대한 처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였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에 이어 무능의 극치였던 노태우 정권, 김영삼 정권,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그리고 윤석열 정권까지 대한민국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하마터면 '나라꼴'을 파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뻔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제대로 된 죄값'을 달게 받은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말이다. 대한민국의 법치는 한마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였고, 소위 '보수세력'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들을 호위하는 '엘리트 집단'이 총동원이 되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등에 빨대를 꽂고서 '제 잇속'만 무한하게 챙기는 짓거리를 서슴지 않고, 염치도 없이 자행했더랬다. 그런데도 훗날 '들통'이라도 나면 그들은 충분한 죄값을 받았던가? 그런 적 없다. 도리어 그들의 죄를 밝히려던 사람들에게 '불똥'을 튀게 만들어서 없던 죄도 새로 만들어서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게 만들었고, 손이 있어도 글도 쓰지 못하게 분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서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진실'을 감추고 '거짓선동'을 세뇌(?)시키는 역할은 대한민국 언론이 도맡아서 처리(?)하곤 했다. 이렇게 80년 동안이나 나라를 틀어쥐고서 국민들에게 '진실'을 외면하게 만들려 하다가 '윤석열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과 맞물려서 그동안 저질렀던 온갖 추한 짓거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정말이지 구정물에 똥물을 섞어서 마시게 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었다. 그래서 <파이로 매니악>은 나쁜 놈들을 하나하나 '고깃덩이'로 산산조각 낼 때마다 후련해지는 맛(!)이 있는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우혁 작가도 너무 시원시원하게 나쁜 놈들을 날려버리는 것에 심취하다보니 좀 막나갔던(?) 모양이다. 드디어 나쁜 놈들을 처단하던 P.M.의 소재파악을 마친 '검사팀(씨저)'이 처음으로 조우하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연재 중단'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직 P.M.의 뱃속에 있는 '시한폭탄'의 시간은 8개월이나 남은 상황이다. 그러니 이제 겨우 4개월 남짓한 분량(총 3권)만 쏟아냈을 뿐, 남은 분량은 그 두 배에 해당하는 6권의 분량만큼이나 이야기가 남은 셈이다. 딴에는 빠른 진행을 선보여서 총 5~6권 정도로 마무리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중단된 연재를 되살려 내놓으란 말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이재명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니, 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기에 딱 좋은 시기가 아니겠느냔 말이다. 이왕지사 '김대중 정부'때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으니 이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물론, 20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 '핸드폰'도 없던 시절의 옛날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내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이우혁 작가가 <파이로 매니악>을 집필할 당시에도 영과 동훈을 그냥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짐작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단서를 많이 남겼다.

바로 '김중위의 입'을 통해서 P.M.의 폭탄제조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그냥 썩히기엔 아깝다는 이야기를 언급했고, 또한 '정소희의 입'을 통해서도 P.M.의 정신분석을 통해서 정상참작(?)이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윤영대 검사'의 윗선으로 보이는 그분의 정체가 아무래도 <퇴마록>에 등장하는 '검사 백호의 그분'과 동일한 인물(!)일 거라는 짐작이 들기 때문이다. 이우혁 작가는 대한민국의 정의는 올바른 사법시스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 '검사 출신'이 등장하는 것으로도 짐작케 하며 <퇴마록>의 검사 백호가 법체계의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로 보여주지 못햇으니, <파이로 매니악>에서 등장하는 윤영대 검사가 그런 인물로 등장하게끔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다만 이야기 초반에는 P.M.을 검거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독사'같은 인물처럼 보여주지만, 윤 검사의 윗선에 있는 그분의 영향력으로 '퇴마사'들이 대한민국을 세계 만방에 위력을 떨치게 만들었던 것처럼, '파이로 매니악'들을 검거한 뒤에 어떡해서든 살려내어 전세계의 위협을 받는 대한민국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현실판 영웅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이야기로 확장시켜 나가길 바란다. 그렇게 <파이로 매니악 : 세계편>, <파이로 매니악 : 혼세편>, <파이로 매니악 : 말세편>을 선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겨우 무기를 채워나가기에도 버거운 나라였지만, 불과 20여 년도 지나지 않아서 '방산업체의 수출호황'을 맞을 정도로 강력한 국방력을 자랑하며 무시무시한 무기체계를 '국산화' 시켜버리는 위엄을 선보이지 않았느냔 말이다. 여기에 민동훈 같은 '파이로 매니악'이 활약을 한다면 첨단 무기체계를 더 빨리 개발하는데 실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고, 국외의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영웅으로 활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유영은 언론개혁의 선봉장 역할을 주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언론이 제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정말이지 천추의 한이다. 그렇기에 P.M.이 윤 검사와 손을 잡고 나쁜 놈들을 발본색원하여 일망타진(?)한 뒤에 제대로 된 언론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다. 비록 소설 속의 허구라 할지라도 그런 속시원한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파이로 매니악>이 아닐까 싶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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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서가명강 시리즈 17
김광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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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 17]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김광현 / 21세기북스 (2021)

[My Review MMLXX / 21세기북스 40번째 리뷰] 듣고 보니 그렇다. 우리는 정말 '건축'에 대해서 배워 본 적이 없다. '건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얼마짜리냐?'이고, 다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내 집이냐? 남의 집이냐?'를 떠올릴 뿐이다. 정말 이런 생각이 '건축'에 관한 전부일까? 서울대학교 김광현 교수는 말한다. '건축은 우리 모두의 미래다'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집값(아파트)'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서민들은 평생을 벌어도 '내집 장만'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집값 안정'은 절실하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게 이 책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의 내용일리 없지 않겠는가. 김광현 교수는 단적으로 말한다. '건축'을 말하면서 '부동산'을 떠올리지 말라고 말이다. 하긴 그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은 까닭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어릴 적부터 '건축'에 대해서 거의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외국 고등학생이 한국으로 '교환학생' 자격으로 유학을 왔더란다. 그 학생은 '유럽의 건축 양식'에 제법 관심이 많았는데, 동양의 건축에 대해서도 공부할 겸 한국에 왔노라고 자기 소개를 했더란다. 그때 많은 학생들이 그 외국인 학생을 많이 반겼다고 한다. 그래서 외국인 학생도 자신이 알고 있는 '서양의 건축'에 대해서 알려주고, '동양의 건축', 그리고 '한국의 건축 양식'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해보겠다고 다짐을 했더란다. 근데 그런 다짐은 단 하루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한국의 학생들 가운데 단 한 명도 '한국의 건축'은커녕 '동양의 건축 양식'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 양반들이 살았던 '기와집'과 가난한 서민들이 살았던 '초가집'을 구분해줄 정도였으며, 경복궁과 민속촌에 있는 여러 한옥을 관람하면서도 '처마'와 '단청', '주춧돌' 따위의 유래와 이유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몹시 실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한옥'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을 여쭤봤지만, 선생님도 자세한 내용은 거의 모르고 있었으며, 부랴부랴 다른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러 진땀을 흘렸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 이야기가 2010년 즈음에 있었던 일이지만, 벌써 10년도 넘은 지금이라고 그닥 달라진 것은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외국의 경우에는 고등학생임에도 '건축 양식'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상당할 정도로 일찍부터 배운다는 사실이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에서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 전통적인 '건축 양식'에 대한 상식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거의 없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러 도시를 점령한 '아파트'를 왜 이렇게 많이 짓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저 '새집'이라고 지었으니 '돈'을 지불하고 살면 그뿐이지, 그 이상의 정보를 묻거나 궁금증을 가질 정도의 '호기심'도 갖고 있질 못한다. 그러니 우리가 '건축'이라 쓰고도 '부동산'으로 읽는 세태가 판을 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감도 잡지 못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김에, '좋은 학교'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자. '좋은 집'이라고 물으면 '비싼 집'이라고 답할 게 뻔하니까 말이다. 설마 '좋은 학교'라고 물었는데, 강남 8학군(?)을 거들먹거린다면 정말이지 실망이다. 적어도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학교라는 대답 정도는 나와야 정상일테니 말이다. 맞다. 학교란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곳이기에 좋게 만들려면 '잘 가르칠 수 있는 학교'여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학교의 조건'을 꼽는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이야기하겠는가? 아이들 '성적'을 올려줄 수 있는 실력 있는 선생님을 꼽을 것인가?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게 딴 생각과 딴 짓하지 않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한 학교일까? 기왕 우리가 '건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니, 건축과 관련 있는 답을 내놓자. 첫째는 그 학교를 방문하지는 않을 거지만 멀리서 그 학교를 바라만 봐도 '공부'하고 싶게 만든다면 좋은 학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둘째는 역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그 학교'에 반해서 학교 담장을 넘어서라도 안을 들여다 보려고 기웃기웃 거리게 만든다면 좋은 학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학교의 교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 '학교 내부의 모습'을 보고, 만지고, 각각의 교실에 들어가서 책상에 앉으니 저절로 '공부'가 하고 싶어지는 학교가 아닐까 싶다.

이건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이 말한 '좋은 건축물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우리는 '좋은 학교'라는 질문에 건축에 대한 생각을 쏙 빼놓고서 그 학교 안에서 공부에 집중하고, 명문대에 입학할 정도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에만 매몰된 생각을 할 뿐이다. 왜냐면 대한민국 곳곳에 있는 학교들이 거의 대부분 '거의 똑같은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애초에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00년 동안의 대한민국을 살펴보면,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당했고, 어렵사리 해방이 되었지만 곧이어 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고, 겨우 전쟁이 끝났지만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먹을 것'조차 남의 나라의 원조가 없었다면 굶어죽을 판이었는데, 팔자 좋게 '좋은집 타령'을 했겠는가. 더구나 '공공시설'에 들어가는 학교건물은 '디자인'과 '편리성'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적은 비용으로 효율을 높이는 방향'이면 그냥 오케이였을 것이다. 그렇게 '개발독재 시절'을 지나 '민주화시대'를 열었는데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그리고 21세기 들어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이지만 여전히 '건축'에 대해서는 걸음마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건축의 미래'도 그래야만 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건축'에 대해서 생각을 달리해야 할 때다. 조금은 서둘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건축'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김광현 교수는 우리 모두가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건축은 결코 돈으로 처발처발해서 지은 집이 아니라, 앞서도 말했지만, 바라만 봐도 아름다워야 하며, 직접 살아봤을 때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급지고 럭셔리한 고층아파트'만 짓자는 얘기가 아니다. 제발 '부동산'이라는 생각을 좀 떨쳐내자. 우리가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집'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부에 들어가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소리 지르는 집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바로 그런 집을 우리 손으로 짓자는 말이다.

그런데 '건축'은 혼자서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건축'은 시골 변두리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제멋대로' 지어서도 곤란하다. 왜냐면 '내가 봤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남이 봤을 때도'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 도시 전체가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건축가'가 될 정도로 건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아름답고 행복하게 거주할 수 있는 '아름다운 건축'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릴 적부터 '건축'에 대한 교육을 시작해야 하는 필요성과 함께, 100년이 지나도, 2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답고 살고 싶어지게 만들어진 건축을, 우리 모두의 힘으로 이룩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건축'은 필수인 세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새로 지어지는 건물'에 대해서 '가격'만 따지지 말고, 우리 동네에 딱 어울리는 멋지고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건축전문가'가 다 만들어놓고 정작 우리 맘에는 들지 않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건축에 대한 지식'이 곧 '상식'이 되어야 한다. 건축은 우리 세대 모두의 '관심'을 반영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에는 '비싼 집'만을, 아니 더 정확하게는 '싸게 샀는데, 값이 정말 많이 오를 것'으로 기대되는 마음만으로 '건축'을 대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그런 집들만 수두룩 빽빽하게 된 셈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뻔한 마음 대신에 '우리 동네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름다운 도시, 쾌적한 도시,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건축'에 담을 수 있다면,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점점 '그런 건축'들로 점점 더 많이 채워지게 되리라는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서가명강'답게 서울대에서 <건축학개론>를 듣는 것처럼 재미없는 이야기만 가득 담겨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핵심포인트만 따로 읽어낸다면 꽤나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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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의 일생 - 오늘이 소중한 이야기 (양장본),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 오늘을 산다 1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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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산다 2] <누구나의 일생>  마스다 미리 / 박정임 / 새의노래 (2024) [원제 : ツユクサナツコの一生]

[My Review MMLXIX / 새의노래 2번째 리뷰] 이 책은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마스다 미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소개도 있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내 취향'은 아니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감동의 여운...아니 '여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듯 싶다. <누구나의 일생>은 30대 독신 여성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이지만 생계를 위해서 도넛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쓰유쿠사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책 제목에 '일생'이란 표현이 있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주인공 쓰유쿠사는 32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곧바로 끝나지 않는다. 쓰유쿠사가 남긴 '만화'가 유작처럼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가 쓴 '만화 속' 주인공이 그린 '만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설정이다. 교과서에서 흔히 다루는 '액자식 구성'의 만화(?)일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글은 '여성 독자'들에게 감정을 건드리는 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남성 독자인 나에게도 아주 옅지만 '전해지는 그 감정'이 있긴 한데, 그 감정이 남자인 내 마음을 건드려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30대, 또는 40대 독신여성 독자에게는 그것이 그저 그렇고 그런 감정이 아니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나마 짬을 내서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묘한 매력을 선사하는 것 같다. 의도치 않게 몇몇 '마스다 미리' 팬이라는 여성 독자들과 우연히 마주하고 몇 마디 나눠 봤는데, 모두 그런 뉘앙스의 감상평을 전해주었다. "깊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짬이 날 때마다 읽는 편이라서...그냥 좋은 느낌이다. 뭔가 꽉 채운 듯한 감동을 전해주는 책은 아니지만, 잔잔하고 조용한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여백'같은 책, 그런 느낌이라서 좋았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스다 미리' 작가가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였으면 싶었다. 30대 독신여성이 뭐 어떤데? 40대 독신여성이 연하남과 데이트를 하는 게 문제라도 되나? '임신, 출산, 육아'는 여성의 사회적 '의무'가 아니라 여성만이 가진 고유의 '특권'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가진 특권이라면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여자 나이 '마흔'이 뭐가 어때서? 그 나이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여성의 매력'을 풍기며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니 박수라도 치고, 응원해야 하는 것이 더 '당연한 것' 아니겠어? 그런데 왜 뒤에서 수근수근 거리는 건데? 여성 인권이 어쩌고, 양성 평등이 저쩌고 떠들기에 앞서, 그렇게 비겁하게 뒤에서 속닥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딴죽을 걸어보라고! 그런 얼토당토 않은 딴죽을 걸은 다리몽둥이를 똑 분질러 놓을 테니 말이다!! 라면서 말이다. 잔잔한 여백과 담백한 여운이 가득한 글이 아니라 톡톡 쏘는 사이다 같은 청량한 목소리가 좀 더 낫지 않겠는가 하고 바랐을 뿐이다. 물론, 그런 '사이다 맛'과 같은 글이었다면, 그건 '마스다 미리'의 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인정하는데 무려 26권의 책을 읽어야만 했다. 굳이 '내 취향'도 아닌 책이었는데 말이다. 아주 미약하게 전해지던 '그 감성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이 더욱더 내 취향이 아니었던 점은 쓰유쿠사가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라 쓰유쿠사의 어머니도 죽은 것으로 나오고 쓰유쿠사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사인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코로나19'가 원인인 듯 싶지만..아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 듯 싶다. 제목 <누구나의 일생>처럼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족적을 뒤쫓다 보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도 싶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 책의 특색이지만, '아니어도' 상관 없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누구든 아무런 상관 없이 '저마다의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 가볍게 툭하고 '강조'할 뿐이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가볍게 생각하거나,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그건 마음 가는 대로다.

그건 우리가 '여백'을 감상하는 방법과도 일치한다. 여백에는 대개 아무런 그림도, 색깔도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을 채울 뿐이다. 그렇지만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그 '빈 공간'은 절대로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저마다 취향대로 그 '여백'을 채워나갈 뿐이다. 이런 감상법에 재미를 붙인다면 마스다 미리의 책들에도 정말 재밌는 '재미'를 채워나갈 수 있게 된다. 나처럼 '여백의 감상법'을 별로 즐기지 못한다면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할 것은 당연지사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여백을 정말 잘 채우지 못하는 나도 이 책 <누구나의 일생>에서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딸'이 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색한(?) 풍경 말이다. 보통은 '남자'가 먼저 죽고 '엄마와 딸', 또는 '엄마와 아들'이 사는 풍경이 결혼을 하지 않는 요즘 흔한 풍경일텐데, 이 책에선 '아버지와 딸'이 엄마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대화도 별로 없고,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듯 서로의 '공간'도 서로 겹치지 않으며 '한 집'에서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하룻동안의 안부를 묻고, 저녁을 함께 하며, 밤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딸은 아버지를 위한 '주전부리'를 챙겨주고,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맞고나서 후유증은 없는지 안부를 물으며, 아버지를 그런 착한(?) 딸을 위해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딸의 일상에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기 일상'에 심취하고 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혼기도 놓치고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바쁜 딸이 자신을 위해서 '수발'까지 들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이 아닌 '딸의 죽음'을 먼저 경험해야 했다.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하는 장면이라도 나오련만...일본에는 그런 문화가 없는 모양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그 누구도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는 '그런 장면'조차 통 보여주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이건만 왜들 그리 열심히들 살아가는 것인지...죽고 난 뒤에 가져가는 것도 하나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쓰유쿠사는 '만화'를 남겼다. 마침 맞게 한 출판사에서 쓰유쿠사가 연재하던 만화에 관심을 가지고서 '출간'을 약속하기도 했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쓰유쿠사의 삶이 먼저 '마감'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식출간이 아닌 '자비출간'이란 방법을 모색했지만, 그마저 비용면에서 여의치 않아 결국 '소책자'로 쓰유쿠사의 유작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딸이 살아 있을 때에는 질색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도 꿋꿋하게 훔쳐보던 아버지는 느닷없는 딸의 죽음에 보지 않았던 딸의 만화를 '유작'으로 남겨진 소책자로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서는 딸이 '할머니가 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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