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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평점 :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 창비 (1995) [개정판 2006년 / 개정증보판 2025년]
[My Review MMLXXIII / 창비 10번째 리뷰]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조직'에 가담한 것이 이유가 되어서 귀국하지 못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자 홍세화는 그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서 빠리에 정착하게 되었단다. 대한민국만 안 되고, 어느 나라에나 거주할 수 있는 특이한 여권을 들고서 말이다. 홍세화는 그렇게 프랑스에 '난민 신청'을 하게 되었고, 택시 운전사가 되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빠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서 훗날 1995년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저자를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독재 세력'이 온갖 부정부패로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던 그때가 되어서 말이다. 그리고 '똘레랑스(굳이 따지자면 '관용 정신')'라는 개념으로 당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만들었고,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진지한 성찰을 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책'이기도 하다. 한국사람들은 '정(情)'이란 감정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프랑스사람들은 '똘레랑스'란 독특한 이성으로 무장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홍세화를, 프랑스 사회는 기꺼이 받아주더라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2025년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과연 '똘레랑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저출생 문제로 인해서 '인구절벽'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초고령화 문제로 인해서 우리 사회의 '경제성장의 동력'이 점차 둔화될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인구가 절감하게 된다면 2050년 무렵이면 한국사회에서 '한국인'은 멸종할 수도 있다는 빨간등이 번쩍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심각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한국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출생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법이다. 무작정 한국여성에게만 아이를 둘 이상 낳으라고 강요하는 방법이 아닌,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젊은 나이에 연애와 결혼,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돌아서고, 이를 위해서 정부는 젊은이들이 자녀를 낳고 기르는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정책에 올인을 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방법이 그동안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닥 희망이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한국사회의 인구를 늘리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솔직히 이 방법 말고 다른 대안은 거의 없다. 딴에는 '통일 한국'을 이루어서 북녘에 있는 25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 방법에는 '통일 비용'이라는 또 다른 천문학적인 비용이 별도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저출생과 초고령화에 드는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부담'만 더욱더 가중시키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이민'을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민'에 대해서 긍정적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민'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이민자'에 대한 시선 또한 결코 곱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 나라보다 '선진국'이고 '강대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이민'을 오고 싶어하고, '귀화'를 하려는 모습을 볼 때에는 그닥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있긴 하지만, 무슬림과 같은 '특정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나, 화교와 같은 '특이한 사상'에 물든 집단에 대한 혐오 따위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려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이질적인 문화'로 인한 불편 내지 불쾌함 때문에 절대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연 우리가 '똘레랑스'를 발휘하여 이를 극복해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홍세화는 왜 똘레랑스를 강조했던 것일까? 30년 전에 프랑스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무엇 때문에 홍세화는 그렇게 감개무량했던 것일까? 이건 거꾸로 생각을 해봐야 이야기를 수월하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99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난민'을 신청한 외국인이 있었다면,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그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일단 프랑스사회에서는 그게 가능했었다. 귀국을 허락치 않아서 오도가도 못하던 홍세화를 기꺼이 받아주고, '택시 운전사'라는 일자리도 제공했으며, 프랑스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수많은 프랑스사람들이 '외국인'이었던 홍세화를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며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는 이게 가능했을까? 외국인은 차치하고 '홍세화'라는 이질적(?)인 정치사상조차 받아들이지 못해 내쫓은 사회였는데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25년의 대한민국도 그리 달리진 것은 없다. 지금도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대기하고 있는 '난민'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그나마 몇몇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난민신청'을 통과했더라도 한국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위해서 '자국의 문화'를 완전히 버리고 '한국 문화'를 완벽하게 받아들일 각오(!)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하기 힘들다고 한다. 난민신청보다는 조금 수월한 '귀화신청'조차 녹록치 않다. 한국인과 결혼을 한 '배우자 특별전형'이 아니고서는 결코 쉽지 않은 귀화인데, 그조차 '취업'을 목적으로 한 사기행태가 만연하자, 단순히 '결혼한 사실'만 증빙해서는 허락치 않는 쪽으로 선회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과연 이런 한국사회에서 '똘레랑스'가 온전히 받아 들여졌다고 볼 수 있을까?
비단 한국사회만 탓할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경기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프랑스사회'에서도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극심해지고 있고, 특히 '이민자'에 대한 거부감과 피로감까지 서슴없이 내비치고 있기에 홍세화가 말하던 '똘레랑스' 가득한 프랑스사회는 현재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극우정당의 우세'를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죽하면 '이민자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조차 '불법이민 단속'에 나서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이민자라 할지라도 '백인이 아닌 인종'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추방조치를 취하고 있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태는 정말이지 볼썽사납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과연 이런대로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요구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딴에는 그렇다. 우리 속담에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홍세화도 과거 30년 전에 풍요로운 프랑스 사회였기 때문에 '난민'으로 환영받을 수 있었지, 오늘날과 같은 혹독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프랑스 사회였다면, '아시아계 이민자'라는 딱지로 인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하기 딱 좋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대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문화조차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땐 나몰라라 하고 말 것인가?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로 작정한 이상, 인간은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야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건 '똘레랑스'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이상향'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고자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살만한 세상인 셈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착한 사람이 훨씬 더 많기에 살만한 세상인 것이다. 만약 이런 믿음마저 사라져버린다면 그땐 정말 인간 멸종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을 한 '짐승'들만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을테니 말이다.
솔직히 홍세화가 이 책에서 말한 '똘레랑스'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홍세화도 언급했듯이 '우리말'로 적절히 뒤쳐낼 문화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굳이 따져서 '한국인의 정 문화'에 빗대어 놓기도 했지만, 그것과 '프랑스사람들의 똘레랑스'는 또 다른 결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뭉뚱그려서 '관용 정신'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너그럽게 대하는 자세만으로 보기에 모자른 감이 없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서야 비로소 '너그러운 자세'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위치에 있을 때에는 '너그러울 수 없'지만, 똘레랑스는 높낮이와는 아무 상관없이 펼쳐 보일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이를, 한국인의 감정적인 자세와 프랑스인의 이성적인 자세를 비교하면서 풀이하기도 했지만, 이성적인 한국인도 '똘레랑스'를 구현하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점이 분명히 있긴 하다. 암튼 '똘레랑스의 본질'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더라도 상관은 없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한국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 나가면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꼭 '프랑스식 원조 똘레랑스'여야만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국식에 걸맞는 '똘레랑스'로 만들어서 대한민국을 아름답게 만들고, 그걸 또다시 한국식으로 포장해서 '역수출'하면 그뿐이다. 오늘날의 '한류열풍'처럼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를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 선진국이 되었다. 비록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네 인심'을 전세계에 널리 나눠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더구나 전세계가 '한국 문화'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럴 때 보여주면 된다. 잘난 척이 아니라 '진정한 멋'을 보여주면 그뿐이다. 30년 전에 홍세화가 겪은 '똘레랑스, 그 멋짐'을 우리에게 소개해줬듯이, 이제는 '한국 문화의 멋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해야 할 때다. 그리고 여전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똘레랑스, 그 이상'을 발휘해서 차근차근 해결해가려는 노력이 절실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