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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3 - 넓은 변방에서 부딪치는 천하의 도리 ㅣ 쾌자풍 3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쾌자풍 3 : 드넓은 변방에서 부딪히는 천하의 도리>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X / 해냄 5번째 리뷰] 아직 완결되지 못한 소설이 또 하나 있다. <치우천왕기>도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출판사'가 바뀌는 헤프닝을 거쳐 결국 '완간'이 되긴 했지만, <파이로 매니악>과 마찬가지로 4권 출간을 앞두고 '함흥차사'가 되고 만 케이스를 만들고 말았다. 일찌기 <퇴마록>이란 '대서사'를 완결시킨 이우혁이기에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꽤나 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10년이 넘도록 '완결'도 하지 않고서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은 '이우혁답지 않다'고 단언하고 싶다. 어쨌든 '뉴 퇴마록(가제)'으로 <퇴마록>의 뒷이야기를 쓰겠다는 결의(?)를 내비쳤고, '또 하나의 지구(!)'를 만들면서 퇴마사들이 있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퇴마사들이 없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구분해서 쓸 수도 있음을 밝혔으니, 살포시 기대할 따름이다.
<쾌자풍>은 별 능력도 없고 덜 떨어진 조선 포졸 지종희가 중원무림의 절정고수조차 풀지 못하는 난제를 얼렁뚱땅인 방법이지만, 의외로 절묘한 방식으로 찰떡같이 해결해내는 '블랙 코미디'같은 유쾌한 소설을 쓰려던 것 같다. 그런데 애초에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으나 '사안'이 중대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해나가다보니 그런 능력조차 능력이라면 능력이랄 수 있으니 '초기의 캐릭터 컨셉'에서 실패했거나, 부담을 느끼고 더 이상의 사건 전개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 이는 <파이로 매니악>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극한'으로 내몰다보니 '풀어낼 이야기'가 너무 부담스러워지고, 별다른 능력도 없이 '정의감' 하나로만 버티다가 더는 해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용두사미'격으로 어설프게 이야기를 결론 짓는 것보다는 더 많은 심사숙고를 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암튼, 이 소설은 <쾌자풍>이라고 한다.
<쾌자풍>은 의외로 '도리'에 대한 물음을 곧잘 던진다. 사마천이 역사서 <사기>를 지어놓고 '천하의 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지만, 이우혁은 <쾌자풍>을 써놓고서 '천하의 도리'를 논하고자 하는 모양이다. 왕조시절의 '천하의 도'란 왕도정치의 궁극적인 실현이 가능하겠느냔 물음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선한 왕이 선정을 베풀어서 온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천하를 평정해서 외침 걱정없이 누구나 안빈낙도를 실행할 수 있는 시절을 구가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어디 '임금 하나'만 잘나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천하의 공도'라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입에 올리며 세상이 저들 꼴리는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도리'가 어긋났다면서 임금 탓으로 돌리고, 저들의 맘에 흡족하지 않아 수틀리기라도 하면 임금을 갈아엎으면 어긋난 도리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곤 하니 문제란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정치를 공부하고, 경제를 공부하는 것들이 모두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 같다. 그렇다면 명나라 초기에 발생한 '토목의 변', '탈문의 변'이 벌어져서 발생한 억울한 일을 당한 사연을 한 번 생각해보자. 외적(몽골 오이라트)이 쳐들어왔는데 무능한 황제(정통제)가 간신의 언변에 속아 몸소 출정을 했고, 제대로 군사를 다루지 못해 첫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고 황제가 산 채로 포로가 되어 버린 사건이 '토목의 변'이다. 명나라로서는 최고의 위기 상황을 맞이했고, 포로가 된 황제를 앞세워서 북경을 포위 공격한다면 명나라로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황제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성을 지켜냈더라도 볼모 신세인 황제가 죽임을 당했더라면, 나라를 구했더라도 황제를 구하지 못한 죄를 물었을 것이고, 반대로 황제의 목숨은 구했더라도 나라는 망해서 온백성이 외적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신 우겸은 '새 황제(경태제)'를 내세워 국가를 온전히 살리는 수를 마련했고, 이는 외적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아주 절묘한 묘수였다. 그렇게 외적을 물리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패전을 하고 퇴각을 하는 오이라트의 군대는 애써 잡았던 명 황제(정통제)를 살려서 돌려보냈기에 '문제'가 발생했다. 한 나라에 '두 명의 황제'가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겸은 급한대로 정통제를 '상황'으로 삼아 자금성의 깊은 곳에 유폐시켰고, 경태제로 하여금 국정을 이끌어나가게 하였다.
이렇게 일단락이 되어서 정통제가 천수를 누리다 죽고, 경태제의 후손으로 하여금 황실의 명맥을 잇게 하면 순탄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어린 경태제는 건강이 안 좋았고, 재위 8년째 그만 붕어하고 만다. 그리고 뒤이어 새로운 황제로 '천순제'가 등극했는데, 이 사람은 과거 '정통제'로 불리던 이였다. 옛 임금이 다시 재위에 오른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우겸의 세력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하고 말았으니, 이를 '탈문의 변'이라 부른다. 비록 역적으로 내몰며 죽었으나 백성들은 안다. 우겸이 충직한 신하였으며, 큰 위기를 맞아 슬기롭게 처신하여 만 백성을 위한 훌륭한 정책을 주도한 훌륭한 위인이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홍치제' 때가 되자 억울하게 역적으로 내몰려 죽임을 당한 '우겸'을 충신의 반열에 올렸고, 억울하게 죽은 넋을 기려 '사면복권'하였으며, 살아남은 우겸의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모든 죄를 묻지 않는다고 일단락을 하였다. 비록 황제의 위치에서 '사과'나 '사죄'라는 표현을 쓰지는 못하기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다한 셈이다.
그런데 당한 처지에서는 어찌 억울한 것이 없겠는가. 특히 우겸의 아들 우담에겐 지울 수 없는 치욕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복수를 다짐해도 이상치 않을 것이다. 이는 제삼자 입장인 백성들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아무리 황제라지만 나라를 구한 의인인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목숨을 앗아가고 역적으로 몰아 패가망신을 당하게 하다니, 너무 심한 처사라고 우담을 동정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허나 '왕조시대'에서는 그런 억울함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충신'이란 이름으로 죽어나간 우국지사들이 차고도 넘쳤던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황제를 모시는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지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랏일을 하다보면 그런 일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사실 그런 각오도 없이 국록을 먹는다면 책임감도, 사명감도 없는 썩은 관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우담은 관리가 아니니 어떤 기준으로 평가를 해야 마땅하냔 말이다. 충신의 아들이라도 관직이 없으니 백성의 관점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우담은 그런 하소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현 황제 '홍치제를 죽이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천하의 공도'를 근거로 내세운다. 역대 왕조를 돌아보면, 나라의 큰 변고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황제'에게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황제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판단되면 '역성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역모가 아니라 '천심(하늘의 뜻)'이었다고 포장(?)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담은 과거 '정통제(천순제)'가 저지른 잘못과 이를 비호했던 무능한 간신배들을 처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혁명'을 일으켜서 '천하의 도'가 과연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심판을 받아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논리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명나라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가능한 논리다.
그렇다면 명나라 백성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민주사회도 아니었으니 굳이 백성들의 생각 따위는 들으나 마나일테지만, 그래도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했으니 백성의 의견도 들어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에도 바쁜 일상을 보내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백성들에게 뭐라 묻는다고 제대로 된 의견을 이야기해줄 턱이 없다. 더구나 백성들은 '힘(권력, 능력)'이 없다. 하다 못해 경제력도 없어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뒷배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나마 백성들 가운데 '무력'을 지니고 강호를 호령하는 '무림 집단'은 나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들 집단 중에는 '학식'을 가진 이들도 있고, '경제력'을 갖춘 부호도 있었고, 이래저래 수틀리면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무력'도 가지고 있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림의 도는 '의리'를 따르는 편이라, 크게는 황제에 충성을 다하는 것을 최선이라 여기지만, 때에 따라서는 '의'를 앞세워서 충보다 더 단단한 '의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무림 집단의 생리다. <쾌자풍>에서는 남궁칠협을 우두머리로 삼은 '남궁세가'가 중원의 무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바로 남궁칠협은 우담이 내세우는 논리가 더 경우에 맞다고 여기고 우담의 가담한 역모에 참여도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역모를 막으려 애쓰지도 않겠다며 '중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게 우리의 관점과는 사뭇 달라 의아해 보인다. 한국사람들은 위기에 강한 면모를 보여 평상시에는 '내부갈등'으로 심각하게 다투는 지경이라도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면 특유의 단결력을 뿜뿜하며 국난극복을 최고의 과제로 삼고, 이겨내는데 최선을 다한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그런데 중국사람들은 이게 아니다. 나라가 어렵고 힘든 것은 둘째 문제고, 첫째는 '의리'를 따지는 일이다. 그 의리에 따른 결과가 선하냐? 악하냐? 따지는 것은 둘째 문제다.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은 의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일본의 '무사도'를 따르는 집단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잘 보여주며, 소위 '조폭 집단'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행태이기도 하다. 평소에 '도리'에 대해 잘 따지며 '도덕'이니, '의리'니, '충성'이니 좋은 말은 다 따지던 놈들이 '다른 집단'에게는 일절의 양심도 없고, 도리도 없는 듯이 사람을 다칠 정도로 때리고, 심지어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왜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했냐고 물으면, 자신은 의리와 충성을 다한 일이기 때문에 반성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고 당당히 죗값을 치르겠다고 언성을 높인다. 물론 '법적 처벌'을 받아 판결을 받을 땐 온갖 비굴한 모습을 다 보이면서 말이다.
이런 모습은 절정의 무술을 보여주는 강호의 고수들도 마찬가지다. 고매하다고 자부하는 그들조차 '의리'를 따지면서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기이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작가 이우혁은 이러한 '중원의 의리'와 '천하의 공도'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착안하여, 포졸 지종희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들의 본모습을 파헤치고, 진정 별 것 아닌 인물이지만 '천하의 공도'를 잘 따르기만 한다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다소 엉뚱한 주제를 증명할 엉뚱한 캐릭터를 내세웠다. 만약 이우혁이 이 소설을 '완결'시킨다면 이런 주제도 완성시키고, '천하의 도'는 무력이나 권력, 경제력 따위를 뿜뿜하는 세력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지만 '선한 의지'로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따르는 이와 함께 한다는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완결'로 남는 바람에 모처럼 마련한 '천하의 도'를 실현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히틀러, 윤석열, 그리고 트럼프의 사례를 통해서 '힘 있는 사람'의 말로가 어떤지 잘 알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만약 그들이 가진 힘만으로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로 가득했을 것이다. 허나 '천하의 도'는 그런 이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잠시 잠깐 '그들의 손아귀'에 놓인 듯 싶어도, 결국엔 그들이 아닌 '선량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이들'에게 천하의 도가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착함', '도덕' 같은 것에는 절대적인 힘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무능'하고 '무력'해 보일 정도다. 그런데 '정의'라는 것과 함께 힘을 합치게 되면 '착함'과 '도덕' 같은 것들이 더욱 빛을 발한다. 왜냐면 그것에는 '한 점 부끄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뻔뻔한 파렴치한 이들을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강한 힘이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 '지종희'는 정의로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 다시 말해 '선을 넘지 않는 마음가짐'이 지종희로 하여금 한 점 부끄럼이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당당함이 꼬이고 꼬인 이들의 못된 심보를 단박에 치유하곤 한다. 이런 매력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왜 '미완결' 상태로 남겨 두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