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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ㅣ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8
소포클레스 지음, 이미경 옮김 / 별글 / 2018년 2월
평점 :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08] <오이디푸스 왕 : 오이디푸스 왕 / 안티고네 / 엘렉트라> 소포클레스 / 이미경 / 별글 (2018)
[My Review MMLXXIX / 별글 3번째 리뷰] 이 책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을 읽을 때면 어릴 적에 읽었던 '세계명작 문고판'이 떠오른다. 집에 소장하고 있던 '문고판'은 그야말로 '저가보급형'이라서 종이재질로 허름한 편이었지만, 친구집에서 우연히 보게 된 '세계명작전집'은 비록 문고판 형식이었지만, 낱권마다 '비닐커버'가 씌워져 있었고, 종이재질도 상당히 좋아서 아주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그 친구네 집에 몇 번 더 방문하며 책을 빌려가려 했지만, 2권 정도 빌려보는 게 전부였더랬다. 그래도 '그 기억'만은 오랫동안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별글클래식'을 읽을 때면 '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분명 그 때 읽었던 책과는 제목도 내용도 완전 다른 책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호감이 가는 책이라서 다 읽어볼 작정이다. 물론 기약은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너무나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소포클레스'의 대표작으로 '정해진 운명'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한 인간에게 내려진 슬픈 서사가 <오이디푸스 왕>의 핵심 포인트다. 이어지는 <안티고네>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와 법률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라는 엄청난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티고네가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 오이디푸스의 딸이기에 슬픔은 더욱 배가 된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엘렉트라>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와 그녀의 내연남을 단죄하기 위해서 칼날을 벼르고 또 벼르는 '복수극'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사실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동명의 소설책'이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지만, 다른 소설은 대개 '뒤친이(번역가)'만 다른 것에 비해서, <오이디푸스 왕>은 소포클레스의 대표적 비극작 여러 편이 각기 다르게 수록된 경우가 많기에 기회가 된다면 '다른 출판사'의 책도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이 주로 '그리스 신화 이야기'에서 비극의 모티브를 따왔기에 각각의 비극일지라도 '동일한 주인공'이 펼쳐 보이는 '또 다른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상당히 많은 비극 작품들이 서로의 앞뒤 이야기를 해주고 있기 때문에, '비극 작품들'을 연결해 놓으면 장엄한 그리스 비극의 대서사를 엿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그 모든 작품들을 '단 한 권'으로 총망라해 놓은 것은 찾아보기 힘든데,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너무 많은 작품이라서 '판권'이 별개인 탓에, 출판사마다 주력으로 사들이는 판권에 한계가 있어서 그런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소포클레스 전작'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책 저책을 다 뒤적거리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암튼, 별글클래식에서는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그리고 <엘렉트라>다.
먼저 <오이디푸스 왕>은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어리석은 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운명을 정한 대상이 무려 '신(아폴로)'인데 어찌 한낱 인간의 몸으로 신이 정한 운명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이 '비극'은 다름 아니라, 어차피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몸부림을 치며 거부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내용으로 전개가 이루어진다. 물론, 결론도 신이 정해준 운명을 거부하지 말고 따르라. 그래야 현명한 인간이다. 그에 반해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 온몸으로 저항한다면, 그 끝은 무시무시한 신의 분노를 불러오거나, 아니면 인간으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게 될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몸으로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 교묘한 꾀를 부렸으나, 결국엔 그 꾀에 자신이 넘어가 애초에 정해진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저지르고 말았으며,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 한 형벌로 가장 치욕스런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고, 제 어미의 뱃속에서 낳으면서도, 또한 제 어미에게서 아들과 딸을 낳게 만드는 가장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게 만든다.
그런데 인간 오이디푸스의 행적을 뒤쫓아가면 어느 한 구석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없는 '영웅, 그 자체'인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한 인간으로서 '오이디푸스'처럼 살라고 한다면 정말 영광스러울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어릴 적 '목동의 아들'인 줄 알고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았고, 우연히 코린트의 왕실에 입양되어 왕자로서 살았으나 겸손하게 살았다. 그러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탁'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절대로 그럴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는 양부모의 품을 떠나 양부모께 부끄러운 짓을 할 수 없도록 '원천차단'을 시도한다. 물론 코린트를 떠나서도 자신이 '입양'된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신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줄도 전혀 몰랐다. 그렇게 발길 닿는데로 떠난 오이디푸스는 사람을 해친다는 '스핑크스 괴물'을 처치하고 일약 '테베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그러다 우연히 '삼거리'에서 만난 오만방자한 늙은이를 죽여버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늙은이가 하필이면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다. 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였던 것이다. 이로써 신탁의 하나가 끝내 이루어졌다. 정해진 운명은 제대로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신탁의 당사자인 오이디푸스는 이 사실을 모른다. 그렇게 오이디푸스는 창졸지간에 임금을 잃어버린 '테베의 백성들'을 위해서 새로운 테베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라이오스 왕의 아내였던 이오카스타와 혼인함으로써 '왕실의 혈통'에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남겨진 신탁마저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은 이오카스타 왕비를 아내로 맞아 두 아들과 두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신탁이 이루어진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의 백성들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쓴다. 선정을 베푸는 훌륭한 임금 오이디푸스를 맞이한 테베의 백성들도 만족해하고 말이다.
여기까지 보면, 오이디푸스는 영웅적인 면모만 보여줄 뿐, 절대로 '나쁜 인간'일 수가 없다. 딱 한 명을 죽였다. 근데 '삼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던 불한당이었을 뿐이다. 근데, 사실 '친아버지(라이오스 왕)'였던 것이다. 그리고, 딱 한 번 결혼을 했다. 근데 원했다기보다는 백성들의 부추김을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떠밀리듯 한 결혼이었는데, 살다보니 너무 금슬이 좋았고, 그래서 네 명의 아들딸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근데, 사실 '친어머니(이오카스타 왕비)'였던 것이다. 그래도 알고서 저지른 잘못도 아니고, 모르고 살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근데 오이디푸스의 신탁 때문에 테베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전염병이 돌면 '신의 분노'에서 원인을 찾았고, 신이 분노한 까닭은 감히 인간의 몸으로 신이 정해준 운명을 거스르려 한 죄인이 테베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임금으로서 '그런 죄인'을 찾아내서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죄인이 다름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일 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그걸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가 '대예언자 테이레시아스'다. 그녀는 자신의 점괘로 테베에 역병이 도는 원인을 잘 알고 있다. 허나 그 사실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그 죄인은 죄인이로되 너무도 훌륭한 임금이자 선량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훌륭한 임금이자 멋진 영웅이었고, 인간으로서도 매력이 철철 넘쳤는데, "사실은 말야. 테베에 역병이 도는 천벌을 몰고 온 자가 바로 너야!" 라고 발설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입을 꾹 닫고 있으려 했는데, 애초에 입만 열면 '신뢰'를 얻지 못할 형벌을 받은 테이레시아스는 입만 열면 '대예언'을 하면서도, 그걸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결코 믿지를 못한다. 그래서 "사실은 너, 형편없는 거짓말쟁이지! 니가 말하는 예언은 다 엉터리지!"라는 소리에 분노해서, 해서는 안 될 '악담' 같은 예언을 마구 쏟아낸다. 그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같은 신탁이 사실은 딱 맞아 떨어졌고, 한 번 정해진 운명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만 재확인하고 말았던 셈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영웅이다. 아무리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일지라도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울먹이는 비겁한 짓거리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기에 그 죄를 달게 받아들이며 서슴치 않고 자신의 두 눈을 '자신의 손'으로 찔러 멀게 만든다. 그리고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테베'를 떠나 영원한 떠돌이로 살아갈 것을, 다시 말해 '속죄의 삶'을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테베의 백성들은 죄가 없으니 역병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길 당부하며 조용히 사라지듯 테베를 떠난다.
<오이디푸스 왕>을 읽다보면,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어서 좀 답답한 느낌이 든다. 물론 '비극적 요소'는 차고도 넘치기 때문에 온갖 슬픔과 애통함을 느낄 수 있지만, 오이디푸스처럼 멋지게 살았으면 조금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출구 없는 미로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갇힌 인간이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모양새가 너무도 끔찍한 형벌처럼 다가오며, '비극'을 최고조로 솟구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애써 탈출하려 애쓸 필요가 무엇이냔 말이다. 이래도 고통스럽고, 저래도 고통스럽다면, 가장 고통을 덜 겪을 수 있는 '멈춤 상태'로 영원히 지속하게 될 것이 아니냔 말이다. 어느 멍청이가 고통스러울 것을 뻔히 알면서 고통스러운 일을 반복하겠느냔 말이다. 결국 인간은 '탈출구가 있다'는 믿음을 버리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에 '오이디푸스'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을 '귀띔'해 준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바뀔까?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비극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더욱더 희망이 샘솟는 긍정적인 방향을 엿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희망을 하나둘 해낼 때마다 더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전율하지 않았을까? 내가 <오이디푸스 왕>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궁금증이다.
<안티고네>와 <엘렉트라>는 다음 기회를 빌어서 썰을 풀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