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2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20주년 개정판)
J.K. 롤링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수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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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에 이어 2권에서는 '마법사의 돌'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볼 작정이다. 익히 알다시피 <해리포터 시리즈>는 해리가 호그와트 마법학교 1학년부터 7학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각 학년마다 해리와 그의 친구들이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데, 단순히 1, 2, 3...으로 나열하지 않고 각 학년마다 '고유의 제목'을 달아놓았다. 1학년은 '마법사의 돌', 2학년은 '비밀의 방', 3학년은 '아즈카반의 죄수', 4학년은 '불의 잔', 5학년은 '불사조 기사단', 6학년은 '혼혈왕자', 그리고 졸업반인 7학년은 '죽음의 성물'이라고 말이다.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제목만 읊어도 아련한 추억에 젖어들고 말 것이다. 다름 아니라 '제목'에서 해리가 겪게 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에서 언급한 제목은 줄거리는 물론 핵심 사건과 그 개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로 작용하고 있어 꼭 알아둘 필요가 있다.

 

  1권에서 해리는 해그리드를 만난 뒤에 '다이애건 앨리'에서 입학 물품을 산 것을 기억할 것이다. 마법세계를 처음 경험하는 해리에겐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갖기 위해 '마법세계의 화폐'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린고트'라는 도깨비 은행에 먼저 들른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곳에는 해리의 부모가 남긴 막대한 유산이 있었고, 해리는 더는 가난하지 않고 부유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1학년이자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꼬마 해리에게 그닥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필요한 돈'만 꺼낸 뒤, 나머지는 금고에 남겨두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해그리드가 덤블도어의 심부름이라면서 그린고트에서 찾아온 물건이 있었다. 2권 후반부에 밝혀지지만, 그 물건이 바로 '마법사의 돌'이었던 것이다.

 

  육신을 잃어버린 볼드모트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 '새로운 몸'이 필요했고, 완벽한 환생을 위해서 '마법사의 돌'이 꼭 필요했지만 해리 포터의 활약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때 해리에게 힘을 보태준 것이 바로 '마법사의 돌'이 가진 원초적 힘이었고, 그 힘을 탐냈던 당사자인 볼드모트는 퀴렐 교수의 몸과 함께 사그라들게 되었다. 물론 볼드모트는 또 다른 계획을 세우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암튼, 마법 초보자인 해리가 무시무시한 어둠의 힘을 내뿜는 볼드모트를 꺾게 만들었던 '마법사의 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돌은 오래전 '연금술사'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귀한 돌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실체는 없으며, 때문에 아무도 본 적도 없고, 형태도 알지 못하며 '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물질'이다. 하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연금술'에 꼭 필요한 재료였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연금술'은 아직까지 누구도 실현시키지 못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 재료인 '마법사의 돌'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마법사의 돌'은 실체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 어떤 물건이라도 '값비싼 황금'으로 만들 수 있는 핵심재료이긴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금술사라면 누구라도 '마법사의 돌'을 발견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더랬다. 그렇게 연금술사들의 지혜가 모이고 쌓여가면서 '마법사의 돌'은 점점 '현자의 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실체가 없는 '상상의 물질'이 되면서 연금술사들의 갖추어간 지혜가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당시 최고의 '지성'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따라서 연금술사가 황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황금에 못지 않은 '새로운 물질'과 '해박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으니 연금술사의 노력이 헛된 것만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과거의 연금술이 오늘날에는 '화학'이라는 이름으로 재정립이 되었고, 현대는 '화학물질'이 없었다면 첨단제품은커녕 일상생활조차 누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학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법사의 돌'이 가진 힘은 실현불가능한 일조차 거뜬히 해내는 힘으로 해석이 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이 책의 제목으로 '마법사의 돌'이 선정되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이룰 수 있는 힘의 원천을 갖게 된다면 무슨 소원을 빌겠는가? 책속에서 해리는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아직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1학년 꼬마아이의 소원으로 너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덤블도어 교수는 그 힘을 그런 식으로 쓰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순리를 거스른 댓가를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을 거라며, '죽은 자'를 되살리는 소원은 내려놓으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볼드모트가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는 과정을 해리 포터는 쭉 지켜보게 된다. 물론 '죽음조차 초월하는 엄청난 힘'에 대한 무한한 동경은 가지게 되지만, 그보다는 친구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엄청난 힘'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대신 '사랑과 행복'을 얻게 되는 과정을 매 학년마다 꾸준히 보여준다.

 

  당신도 그럴 수 있겠는가? 죽음조차 초월하는 '최강의 힘'을 포기하고, 친구의 우정과 가족의 사랑, 그리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어른들은 감히 '선택'할 수 없지만 해리와 그 친구들은 우정을 지키기 위해 '마법사의 돌'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욕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법사의 돌'이 힘을 제대로 발휘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해리가 아닌 어른들이 '마법사의 돌'로 해결하려 들었다면, 볼드모트의 부활을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고, 어쩌면 '또 한 번의 마법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성장 동화>를 읽다보면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어른들이 '직접' 해결하면 될 일을 가지고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아이들이 모험을 떠나고, 아이들이 악당을 물리치는...도대체 왜 '힘든 일'은 죄다 아이들에게 맡겨놓고 어른들은 무책임하게 '방관'만 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해리 포터>를 읽다보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은 일을 해결하기는커녕 사태를 악화시키기 일쑤라는 것을 말이다. 도무지 양보라는 것도 모르고 대화와 타협도 할 줄 모르며, 오직 싸우고 뺐고 이기는 것에만 열을 올리고마는 어리석기 그지 없는 족속이 바로 어른들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현명하다' 싶을 정도로 사건의 핵심을 파고들고, '욕심'을 포기할 줄도 알며 '싸움'을 멈출 줄도 안다. 아이들조차 알고 있는 이런 지혜를 왜 어른이 되어선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일까. 다음 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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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1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20주년 개정판)
J.K. 롤링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수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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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전의 추억을 다시 꺼낸다는 건 쉬운 일만은 아니다. 마치 조각난 퍼즐을 맞추듯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며, 때로는 군데군데 빈곳을 채우지 못해 그대로 방치해 버리기 일쑤인 탓이다. 심지어 왜곡되고 윤색되다 못해 '거짓'을 진실인냥 새로 채워넣기도 한다. 없던 사실마저 있었던...아니, 있었음직한 '허구'적 사실로 변질되곤 하니..애초부터 꺼내지 아니하는 것보다 못한 일이 태반일게다. 허나 '오래전 책'을 다시 꺼내드는 일만큼은 아무런 부담이 없다. 심지어 옛 기억과는 사뭇 달라도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다르면 다를수록 '읽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니 매우 유익한 일이기도 하다. 그 오래전, '공전의 히트'를 쳤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마침맞게 '새 뒤침(번역)'이 나왔으니 더할나위 없겠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가난한 미혼모였던 롤링 작가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소설임과 동시에 '판타지 소설'의 교과서가 되어 버렸다. 마침 <해리포터>가 유행하던 시절에 '논술교사' 자격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아주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해리포터> 이전에 '판타지의 교과서'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었더랬다. 물론, 아동문학에서 다루는 '판타지 소설'의 계보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판타지 장르'의 개척자는 분명 톨킨이었다.

 

  하지만 톨킨의 판타지는 어린이들이 '접근'하기에 쉬운 장르는 아니었다. 너무 많은 종족이 등장하고, 너무 방대한 서사를 품고 있었으며, 어린이들이 이해하기에 난해한 '세계관'을 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시대상도 너무나 옛날이었다. 중세시대의 기사들이 등장하는 <원탁의 기사> 풍의 '성배 이야기'가 주된 모티브이면서, 온갖 몬스터급의 괴물종족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중세보다 훨씬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그리스도교적인 세계관이 등장하기 이전의 세계라야 '오크', '난쟁이(드워프)', 그리고 '엘프' 등과 같은 종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 시대에는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말을 타는 '기사'는 없었다. 그래서 톨킨의 세계관은 '어른의 영역'이었다.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그 속에서 묘한 호기심과 동경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경험을 거친 닳고 닳은(?) 어른들의 이야기 말이다.

 

  그런 까닭에 <해리포터>의 등장은 어린이들에게 반가운 일이었다. 일단 시대상이 '현대물'로 친근했고, 이야기속의 주인공들이 어린이 독자들과 '같은 또래'였다는 것이 가장 잘 먹혀들어갔다. 그런데도 어딘선가 들었을 법한 '익숙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법사와 마녀들의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갔으니 당시 어린아이들의 호기심이 대폭발했던 것이다.

 

  이렇게 인기를 거듭거듭 급상승하게 되자 '판타지 교과서'라는 그럴 듯한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판타지 세계'를 그린 작품의 완성도는 [현실세계-판타지세계-다시 현실세계]로 되돌아오는 '완성형 구성'으로 짜여져야 하는데 <해리포터>가 딱 그렇다는 얘기다. 거기다 현실과 판타지 세계를 이어주는 분명한 통로가 등장해야 한다는데, <해피포터>에서는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이라는 명확한 통로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영국의 낡은 기차역인 '킹스 크로스'역은 <해리포터> 덕분에 인기 관광명소가 될 정도였단다. 뭐, 직접 가본 적은 없기 때문에 '팩트체크'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암튼, 이렇게 인기를 끌던 소설이었는데 요즘 어린이들은 조금 시들한 모양이다. 심지어 <해리포터>를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격세지감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서론은 이쯤하고, <해리포터>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몇 자 적어보려 한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1권에 해당하는 <마법사의 돌>은 뒤에 이어질 7권까지의 내용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법사의 돌>을 철저히 분석하면 술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편으로 나뉘어진 <마법사의 돌> 가운데 1편인 이 책은 외롭고 불쌍한 해리 포터가 자신도 모르는 '탄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머글(평범한 인간)들이 사는 현실세계와 마법사(위저드)와 마녀(위치)들이 사는 마법세계가 존재한다는 환상적인 세계관을 펼쳐 멋드러지게 작가는 그려냈다. 이렇게 광대하게 펼쳐낸 세계관 속에 '외롭고 불쌍한 줄' 알았던 해리 포터가 실상은 '인기절정의 유명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극적인 탄생 배경'과 묘한 어우러짐을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 일이지만 현실과 마법세계, 모두를 구해낸 영웅이 고작 '열한 살의 어린이'라는 사실에 어린이 독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별로 어렵지도 않고 다분히 평이한 '세계관'으로 전세계 어린이 독자들을 단번에 사로잡게 된 비결은 과연 이뿐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해리포터>에는 현실에서 곧잘 마주하게 되는 '차별'이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흔적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름을 말해선 안 되는 존재'의 등장이다. 모두가 알면서도 차마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종종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는 문제이기도 한 '차별문제' 말이다. 다름 아닌 <순종 vs 잡종>이 이 책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핵심문제다. 다시 말해, 순수한 혈통이 우월하다는 저변의식 때문에 마법세계를 뒤흔드는 대사건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잡종에 해당하는 '혼혈'과 '머글(마법을 할 줄 모르는 평범한 인간)'은 사라져줘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살육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바로 '볼드모트'였으며, 그런 '악의 화신'과도 같은 이를 따르는 '순수한 혈통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부릴 줄 모르는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죽음을 선물했던 것이다.

 

  허나 '마법의 실력'과 '순수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탓에 '볼드모트와 그 추종자들'을 제압한 마법사와 마녀들이 있었으니 호그와트 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 출신의 '선한 의지'를 갖춘 정의의 사도들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호그와트의 교장을 지내고 있는 알버스 덤블도어다. 덤블도어는 볼드모트 패거리들과 대등하게 싸우며 '악의 무리들'을 무찌르고 있었는데, 볼드모트가 해리포터의 부모를 죽이고, 어린 아기였던 포터까지 악랄한 저주 주문으로 죽이려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죽고 말자.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은 하나둘 모습을 감추고, 기회를 봐서 변절하고 배신을 하는 등 '정의의 사도' 측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 덕분에 '마법세계'는 평화를 되찾았고 일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암튼, 그런 비밀을 간직한 채 포터는 더즐리 이모부의 집에서 불행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열한 살 생일 즈음에 해리포터에게 '편지'가 배달 된다. 처음엔 한 통이었지만 나중엔 셀 수 없이 많던 바로 '그 편지' 말이다. 그 편지엔 '호그와트 마법학교 입학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그로 인해 해리 포터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마법사'로 말이다. 물론 아직은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 마법사'지만 말이다.

 

  이쯤해서 호그와트 학교를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이 학교는 마법사와 마녀들을 가르치는 유서 깊은 학교로 '네 개의 기숙사'에서 학생들이 기거하며 여러 마법을 배우는 곳이다. 기숙사는 각각 용감한 그리핀도르, 선량한 후플푸프, 정의로운 레번클로, 그리고 지혜로운 슬리데린으로 나뉘어 있다. 어느 기숙사에서 배우든지 훌륭한 마법사가 되는 것에는 분명하지만, 호그와트 학교 내에서는 기숙사간에 '선의의 경쟁'을 통한 '배움의 장'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해리 포터를 비롯해서 수많은 학생들이 여러 사건사고를 겪으며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하지만 기숙사 내부를 들여다보면 '순종과 잡종'에 대한 편견으로 인한 학생들 간의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심지어 교수들조차 그런 편견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는 '그 사람(볼드모트)의 추종자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특히, 볼드모트가 머물며 마법을 익혔던 '슬리데린'은 여전히 '순수한 혈통의 마법사'만이 마법을 배워야 한다며 해리 포터 일행을 괴롭히고 곤란하게 만들곤 한다.

 

  분명, 마법 실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왜 이런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끝끝내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일까? 이는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도 쉽사리 연상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어린 독자들까지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바로 '우월의식'이 저변에 깔리게 되면 좀처럼 고칠 수 없다는 교훈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순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박탈 당해 마땅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쉬움과 동시에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 또한 쉽게 떠오르게 만든다. 허나, 그러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서 문제다.

 

  왜냐면 '순수'가 어느 정도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에 쉽게 혹하는 속성을 악용해서 '미움'을 차별하고, 나아가 '제거'하기까지 하려들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도 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움받는 존재'가 아름다움과 맞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테면, 잘 생긴 애가 못 생긴 애를 아무 이유도 없이 때렸는데, 못 생긴 애는 맞아서 울고 잘 생긴 애도 덩달아 따라서 울고 있다면 당신은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심지어 잘 생긴 애가 울면서 자신이 맞았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못 생긴 애가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하려해도 좀처럼 믿지 않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그런데 해리 포터가 당당히 '못 생긴 애(혼혈)'의 편을 들어주려 한다. 마법세계의 인기절정의 꼬마법사가 '잘 생긴 애(순수한 혈통)'들과는 반대의 편에 서서 마법세계의 문제점을 바로 잡으려 한단다. 이야기가 점점 재밌어지지 않겠는가? 다음 편에서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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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 - 한국의 문화 전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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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강준만을 들여다 보려 한다. 오래전에 읽기만 하고 리뷰를 쓰지 않은 책도 있거니와 간만에 읽은 '강준만의 논조'가 조금은 달라진 듯 해서 말이다. 물론 '기득권'에 굴하지 않고 '소신과 양심'에 어긋남이 없는 '목소리'는 여전한 듯 보였다. 허나 그의 '칼날의 방향'이 달라지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대한민국의 지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달라진 듯 보여 아쉬울 따름이다. 그의 칼날은 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과 같을 줄 알았는데, '검찰독재'가 예상되는..아니 기정사실이 된 지금에 와서는 방향이 살짝 달라진 것 같은 것은 느낌은 '나만의 착각'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의 칼날이 무뎌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무튼 이 책은 '정치적 올바름(PC)'에 관한 책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올바름을 빗대어 상대를 비난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무한히 착한 척을 하고, 상대를 악마로 취급하거나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타락시켜 반박조차 할 수 없게 몰아대며 맹비난을 퍼붓곤 한다. 허나 말만 번지르르할 뿐 스스로도 실천하지 못할 높은 수준의 '도덕적 명분'만 앞세우는 키보드워리어를 'PC충'이라면서 비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치어리더의 의상이 너무 선정적이라면서 대학생의 치어리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들이다. 정작 '치어리딩'을 하는 당사자가 괜찮다, 부끄럽지 않다, 운동경기의 요소일 뿐, '선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문제'가 아니냐면서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의사를 밝혀도, '정치적 올바름'을 앞세우는 이들은 "그건, 당신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음흉한 시선은 분명히 존재하고, 당신들이 그런 '관음증 환자' 따위에게 길들여지고, 심지어 '가스라이팅'을 당했을 수도 있다면서, 오직 당신들을 위한 결정이니 허락할 수 없다"고 할 지경이란다.

 

  물론, 정치적 올바름의 역사는 서양에서 오래된 것이며,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아직 초기 단계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위의 사례도 미국의 한 대학에서 벌어진 일일 뿐, 우리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볼 수 있단다. 허나 우리 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쟁이 현재 벌어지고 있으며, 초기 단계라고는 하지만, 정치권과 언론에선 이미 '정치적 올바름'에 관해서 심각한 설전이 오갈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를 테면, '싸이의 흠뻑쇼'를 둘러싼 논쟁들,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운 여러 문제제기 등, 심지어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감정이 사나워지는 말말말 등을 볼 때, 우리 사회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걱정이 앞설 지경이다.

 

  간략히 예를 들자면, 싸이가 콘서트장에서 뿌리는 물이 300t에 달한다는 뉴스에, 누군가는 '봄가뭄에 농민은 속이 타들어가는데 물낭비가 웬말이냐'면서 인별에 올리는 반면에, 또 다른 누군가는 '코로나로 숨죽였던 대중문화가 이제 겨우 기지개를 켜는 것일 뿐인데, 타들어가는 농민 걱정만 눈에 보이고, 겨우 숨통을 틔우려는 대중들의 울화통은 안 보이는 것이냐, 농사 짓는 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이 '선한 척'하며 싸이의 흠뻑쇼를 비난하는 것은 PC충과 다를 바가 없다'며 비난을 쏟아낸다. 여기에 '팩트체크'를 한답시고, 농민들의 목마름은 봄에 벌어진 일이고, 싸이의 흠뻑쇼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장마철에 열리는데, 뭔 상관이냐고 댓글을 달고, 또 다른 이는 '이말, 저말, 다 맞는말이지만, 봄가뭄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니, 우리 모두 자중하고 농민들의 시름이나 속시원히 해결할 방안을 이야기하자'면서 논쟁은 끝없이 이어지기 마련이란다.

 

  결국, '정치적 올바름'에서 나오는 말들의 향연에서 '틀린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듣다 보면 다 옳은 소리이고, 적절한 지적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모두가 옳은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빠진다. 어느 한 쪽만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 되는 셈이고, 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다보니 끝내는 '모두'가 기분이 나빠지게 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심하다고 한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란다. 이런 트럼프의 모습을 보면서 유권자들이 '나도 그래'라면서 공감을 하고, 유세 현장에서 상대진영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한 제스쳐가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고 호감으로 돌아서게 하였다는 분석이다. 이 정도면 '정치적 올바름'은 쓴소리를 넘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도덕적 명분에 입각해서 '옳은 소리'를 던졌다하더라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이 나빠지는 '쓴소리'가 되면, 도리어 비난의 화살이 쏘아지게 되고 만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이 진정 '쓴소리'인지, '맹비난'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상 구분할 명백한 '경계'도 그을 수 없고, '분간'도 할 수 없다. 공정한 심판을 볼 수도 없으며, 누구도 무어라 단정 지을 수도 없다. 그저 서로를 향한 날선 비난만 남게 되어 '비판 의식'도 사라지고, 긍정적 효과를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정치적 올바름'은 사라져야만 하는 것일까? 정녕 긍정적인 효과는 찾을 수 없고 온통 부정적인 결과만 낳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강준만도 애기했듯이, '겸손'이 해결방안이 될 수 있다. 상대의 쓴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바람직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통'의 매개체가 될 수도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지적한 '날카로운 제안'에 모두가 합심하여 '해결 방안'을 모색해나간다면 '정치적 올바름'도 칼부림이 날 지경으로 내몰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질문'을 던지는 쪽이 언제나 유리하다는 점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연못의 개구리는 대가리가 깨쳐 죽는다는 점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명해져야 한다. 언제나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나 엄정한 법적 조치, 여기에 '팩트체크'까지 질문자도 동일하게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약자의 질문을 봉쇄하고 기득권자에게 짓눌려서 발언조차 못하게 막으려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대부분 '약자'가 강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형식이기 때문에 충분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허나 강자가 '약한 척'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따위의 악용 사례가 얼마든지 있기에 또다시 '명석한 판단'이 필요한 법이다.

 

  이에 대해서 강준만은 '문재인 정부'의 '약자 코스프레'를 예로 들면서, 지난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윤석열과 이재명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당부로 책을 마무리 했다. 아마도 이 책이 쓰여질 시기가 '대선 직전'이었고, 문재인 정부의 잘잘못이 여론의 심판대에 오른 시점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또한, 일부는 윤석열 정권의 초기에 쓰여졌을테고 말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의아한 점도 많았다. 설마 강준만이 윤석열의 '검찰독재'를 두둔하는 것인가..하고 말이다. 뭐, 더 지켜볼 일이다.

 

  암튼, '정치적 올바름'이 논쟁적으로 진행된다면 '하릴없는 소모전'에 불과할 것이다. 서로의 감정골만 더욱 깊게 만드는 원흉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럴 땐 '겸허한 자세'로 쓴소리를 받아들이고, '반성과 성찰하는 자세'로 대답을 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마냥 '양보'만 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소신'과 '양심'을 걸고 밀고 나아가야 할 때는 거침없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칭찬과 비판의 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비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면 거두어들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지혜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하는 머저리라면 그대로 생매장 당해도 쌀 것이다. 쓴소리와 비난도 구분 못하는 바보가 부끄러움까지 모른다면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한다. 안 그러면 여러 사람이 피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발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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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3 : 샤르댕 인간현상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3
심재규 지음, 권욱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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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르뎅의 <인간현상>은 매우 낯설었다. 무릇 '인문학'이라는 것이 전반적으로 '인간의 삶과 생각'을 다루다보니 대개 '인간'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겠지만, 인간을 '원자단위'로 쪼개놓고 분석을 시작하더니 끝내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하나'라면서 인간정신이 우리 인간의 진화를 이끎과 동시에 전우주적인 관점에서 '인간정신'으로 한곳에 모인다(그곳이 바로 '오메가 포인트')는 썰을 풀어내니 당혹스럽기까지 했더랬다. 더구나 지은이가 가톨릭 신부라는 신분으로 '과학'을 '종교'적인 관점으로 풀어낸 결과라고 하니 얼핏 읽다보면, 광신도가 지껄이는 영롱한 방언이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끝까지 읽어보니, 선한 지식인의 의무가 느껴지는 거룩한 말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샤르뎅이 말하는 '오메가 포인트'는 내가 줄곧 이야기하는 선도국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홍익인간 정신'과 일맥상통한 점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선한 마음으로 세계인을 감동시켜 널리 인류공영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대한민국 시민이 나아가야 할 길'과 샤르뎅이 말한 '인류의 지성이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곳이 바로 오메가 포인트인데, 그곳에선 모든 인류가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갈등과 차별을 멈추고 선한 마음으로 자신을 반성해나가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는 내용 같은 것들이다. 샤르뎅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과학'을 선택했는데, 끝내는 '과학과 종교의 융합'을 이끌어내며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길을 제시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는 지구에 등장한 지 고작 '1만 년' 남짓한 시간에 스스로 절멸하고도 남아 지구를 송두리채 파괴해버릴 고약한 무기를 만들어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이 저지른 잔학한 행위는 '인간의 지성'이라는 것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잘난 체를 할만 한 것도 못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쓰레기가 되고 마는 것일까? 샤르뎅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치 맹자가 '성선설'을 말하듯,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을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지자를 보낸 덕에 이미 인간이 선하게 살아가야 할 '목적과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은 애초부터 선할 따름이며, 그렇지 않고 잘못된 길로 접어든 까닭은 '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애초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제멋대로' 행동하려고 하지만 '반성'하는 사람은 자유의지대로 살더라도 남을 배려하고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당연한 요소는 애초부터 '인간'만이 가진 고유의 영역이 아니라 '최초의 생명체'에서도 찾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분자와 원자, 그보다 더 작은 '물질'에서부터 '생각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생각하는 힘'이 바로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정의내렸다. 다시 말해,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근원 물질에서 생겨난 '생명체'도 당연히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뇌가 발달한 인간도 '생각'을 하게끔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아주 작은 단위가 '생각'하는 것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생각에 멈춰 있을 뿐이다.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생각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게 되는데, 인간(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러 아주 복잡한 생각까지 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지성'만이 유일하게 '생각의 진화'를 이끌 수 있게 되었고, 그 진화의 최종단계인 '오메가 포인트'에 다다를 수 있는 것도 곧 '인간지성'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단다.

 

  읽다보면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특히,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서 '최초의 인간'을 만드셨다거나, 하느님의 형상을 본떴으니 그 사람의 마음이 선한 것은 당연하다거나, 최초의 사람에게 이르노니, '만물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라고 명하셨도다...같은 구절이 연상되면서, 오직 인간만이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으니 '최종 진화단계'에 다다를 수 있는 것도 오직 인간뿐이다. 그러니 인간은 선한 본성을 되살려 '반성하는 삶'을 살면서 궁극적으로 '오메가 포인트'에 다달아 온 우주를 지배(?)하라는 결론을 읽다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신부님이 열거한 '과학지식'과 말씀하신 '종교교리'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발 좀 깝치지말고 착하게 살아라"라는 금쪽같은 말씀인 듯 싶다. 왜냐면 책의 내용 구석구석에서 '선한 본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잘났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생명을 비롯해서 같은 인간에게까지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였기 때문이다. 간략히 정리하면, '만물의 영장이여, 제발 만물의 주인행세를 할 생각말고 철저한 반성을 끌어내서 만물에게 이득이 되는 생각을 먼저하고, 욕심을 버리고 베품을 나누는 삶을 살아갈지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현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과학적 증거'를 통해 증명해낸 셈이다. 읽다보면 '논리적 비약'이 심한 듯도 보이고, '교리문답'을 듣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바람직한 인간이라면 선한 본성을 끌어내야 하며, 지구를 두 번 죽이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며,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따뜻하고 풍요롭게 만들 생각만 하면서 살아가라는 좋은 말씀이 가득한 책이다. 근데 샤르뎅은 이 책을 <과학책>으로 읽어달라고 주문한다. 아마도 '종교인'으로서 비난을 받을 것을 의식해서 한 말이라고 짐작된다. 아닌 게 아니라 샤르뎅을 '악마'로 해석하며 맹비난하는 부류도 참 많다고 한다. 심지어 샤르뎅이 '악마의 대명사'로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심각 공격도 받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샤르뎅은 '선한 마음'을 진화의 관점에서 풀어냈고, 원자단위까지 쪼개서 철저히 분석한 결론을 내었을 뿐, '이단적인 요소'는 굳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새로운 종교를 내세운 것도 아니고, 그저 '착하게 살아주세요'라는 주문을 쪼끔 심오하게 풀어냈을 뿐이다.

 

  끝으로 샤르뎅은 '지식인의 의무'를 누구보다 진솔하게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자신이 '아는 것'을 혼자만 알고 묵히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러한 노력에 의한 메시지가 '선한 마음'으로 온 우주를 뒤덮고도 남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정말 대단한 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오메가 포인트'를 이해하면, 인간의 지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그 '똑똑한 머리'로 고작 남들 등쳐먹을 생각하지 말고, '뛰어난 지능'으로 세상을 더욱 밝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데 쓰라는 메시지 말이다. 오늘날의 엘리트 집단이 '그들만의 잔치'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볼 때면 스팀이 팍팍 받곤 하는데, 그 잔칫상에 <인간현상>을 던져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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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3분 철학 2 : 서양 중세·근대 철학편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2
김재훈.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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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철학에 이어 '중세와 근대의 철학'을 다룬 책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고대의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는데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한편, 중세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신은 있다'는 전제 아래서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옥신각신하며 근대를 맞이했고, 근대 철학자들은 '이성'을 판단하는 근거로 설왕설래를 하며 '합리론과 경험론'이 대립을 이루다.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러 결론이 내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앙에 젖은 중세 철학자들의 사유방법과 찬란한 이성의 빛에서 황홀감을 만끽한 근대의 철학자들을 만나보자.

 

  중세시대의 철학은 '신앙으로 시작해서 끝을 맺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불렀던 까닭은 깜깜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맹목적이어서 다른 곳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었던 빡빡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곳을 쳐다본 이들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다른 곳을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안 본 것과 매한가지고, 못 본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중세철학도 눈여겨볼만 한 것이 있다. 교부철학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스콜라철학의 아퀴나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존재를 이상 세계로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증명하였으며, 아퀴나스는 실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탄탄한 논리로 증명하였다. 이는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따온 것으로 그리스도교가 '버렸던(그리스로마) 사상'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탄탄하게 세우는데 쓰였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런 까닭에 중세시대는 매우 모순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또한, 그리스도(하느님)에 의해 뭉뚱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철학적 사유가 아주 하릴없는 짓거리는 아니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근대철학의 핵심'인 이성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철학자들은 '이성(진리, 사유)'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이론을 내세웠는데, 크게 두 가지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바로 그것이다. 합리론의 대표주자는 '데카르트'다.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을 정도 '절대진리'에 해당하는 '생각하는 나, 자신'으로 철학적 사유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합리론이다. 반면에 경험론은 '생각'하기 위해선 먼저 '경험'이 따라야 한다면서 생각에 앞서 행위가 더 중요한 판단기준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경험했기에 머리속에 떠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하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의 철학자들은 합리론과 경험론을 왔다갔다하면서 '철학은 더욱더 분화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논란의 종지부를 지른 이가 나타났으니,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는 '경험없는 생각은 부질없으며, 생각없는 경험은 무쓸모다'라면서 합리적 경험론, 또는 경험적 합리론이랄 수도 있는 '종합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바로 '판단의 기준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판단함으로써 대상을 인식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동안에는 '사과는 맛있다'는 사실을 사과를 떠올리기만 해도 알 수 있다는 합리론과 사과를 먹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경험론으로 옥신각신했는데, 칸트는 사과는 '맛있다'고 인식하고, 직접 먹어봐서 '맛있다'고 알 수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이 사과를 '판단'한 것에 중점을 두어 "선험은 감각에 우선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제 칸트의 등장으로 철학적 논란은 종식된 것처럼 보였으나, 헤겔이 뒤이어 등장하면서 '현대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겔이라면 '변증법'으로 유명하지만, 변증법의 내용을 풀어보면, 고정관념, 또는 자기신념조차 변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끊임없는 '자기부정'으로 자기 안에 내제한 '새로움'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정-반-합'이다. 눈 앞에 '있던' 사과를 먹어서 '없는' 사과로 만들면, 몸속에서 소화과정을 거쳐 '에너지'로 발산할 수도 있고, 응가속에 '씨앗'으로 배출되어 또 다른 사과나무를 창출할 수도 있다. 여기서 '에너지'로 발산할 경우, 뉴턴의 '사과'가 될 수도 있고, 세잔의 '사과', 아담의 '사과', 그리고 잡스의 '사과'가 될 수 있는 등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지고, 그 '사과(정)'들은 또 다시 '부정(반)'되어 '또 다른 것(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자꾸 반복되기도 하고, 심각한 논쟁을 하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아침에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여명'이 밝아오기 위해 기나긴 어둠속을 헤매기도 하는 법이다. 철학의 중세와 근대가 그러했다. 물론 현대철학에 들어섰다고해서 마냥 순탄하지만도 않지만, 중세와 근대시대의 답답하리만치 지루한 공방이 있었기에 오늘날에는 그런 논란이 일사천리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본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엉터리 정치질을 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 미칠 지경이지만, 이런 꼴통들이 아직까지도 높은 지지율로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더 '답이 없는 세력'이 곳곳에 뿌리내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낡고 구태의연한 짓거리를 일삼는 무리들이 있을까 싶지만,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뿌리 뽑는 일'이 아니라 '더욱 밝게 비추는 일'이다. 뿌리 뽑으려 해봤자 더욱더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어갈 뿐이다. 하지만 밝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선하고 좋은일'로 세상을 가득 채우면 그뿐이다. 당장은 답답할지라도, 혹은 때려야 속시원할지는 몰라도 못난놈들과 똑같은 짓을 해봤자 '너도 똑같다'는 비아냥만 돌아올 뿐이다. 차라리 온 대한민국 시민이 교양으로 철철 넘치게 되면 '가짜'들은 설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 '밝은 학문'인 철학(밝을 철, 배울 학)을 널리 익히면 좋을 터이다. 그래야 저놈들이 부끄러워 뒈질 것이다. 너무 낭만적인 방법 아니냐고? 낭만만큼 멋진 방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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