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3분 철학 : 서양 중세·근대 철학편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2
김재훈.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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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철학에 이어 '중세와 근대의 철학'을 다룬 책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고대의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을 밝혀내는데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한편, 중세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신은 있다'는 전제 아래서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옥신각신하며 근대를 맞이했고, 근대 철학자들은 '이성'을 판단하는 근거로 설왕설래를 하며 '합리론과 경험론'이 대립을 이루다.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러 결론이 내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앙에 젖은 중세 철학자들의 사유방법과 찬란한 이성의 빛에서 황홀감을 만끽한 근대의 철학자들을 만나보자.

 

  중세시대의 철학은 '신앙으로 시작해서 끝을 맺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불렀던 까닭은 깜깜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맹목적이어서 다른 곳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었던 빡빡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곳을 쳐다본 이들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다른 곳을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안 본 것과 매한가지고, 못 본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중세철학도 눈여겨볼만 한 것이 있다. 교부철학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스콜라철학의 아퀴나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존재를 이상 세계로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증명하였으며, 아퀴나스는 실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탄탄한 논리로 증명하였다. 이는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따온 것으로 그리스도교가 '버렸던(그리스로마) 사상'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탄탄하게 세우는데 쓰였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런 까닭에 중세시대는 매우 모순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또한, 그리스도(하느님)에 의해 뭉뚱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철학적 사유가 아주 하릴없는 짓거리는 아니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근대철학의 핵심'인 이성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철학자들은 '이성(진리, 사유)'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이론을 내세웠는데, 크게 두 가지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바로 그것이다. 합리론의 대표주자는 '데카르트'다.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을 정도 '절대진리'에 해당하는 '생각하는 나, 자신'으로 철학적 사유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합리론이다. 반면에 경험론은 '생각'하기 위해선 먼저 '경험'이 따라야 한다면서 생각에 앞서 행위가 더 중요한 판단기준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경험했기에 머리속에 떠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하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후의 철학자들은 합리론과 경험론을 왔다갔다하면서 '철학은 더욱더 분화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논란의 종지부를 지른 이가 나타났으니,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는 '경험없는 생각은 부질없으며, 생각없는 경험은 무쓸모다'라면서 합리적 경험론, 또는 경험적 합리론이랄 수도 있는 '종합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바로 '판단의 기준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판단함으로써 대상을 인식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동안에는 '사과는 맛있다'는 사실을 사과를 떠올리기만 해도 알 수 있다는 합리론과 사과를 먹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경험론으로 옥신각신했는데, 칸트는 사과는 '맛있다'고 인식하고, 직접 먹어봐서 '맛있다'고 알 수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이 사과를 '판단'한 것에 중점을 두어 "선험은 감각에 우선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제 칸트의 등장으로 철학적 논란은 종식된 것처럼 보였으나, 헤겔이 뒤이어 등장하면서 '현대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겔이라면 '변증법'으로 유명하지만, 변증법의 내용을 풀어보면, 고정관념, 또는 자기신념조차 변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끊임없는 '자기부정'으로 자기 안에 내제한 '새로움'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른바 '정-반-합'이다. 눈 앞에 '있던' 사과를 먹어서 '없는' 사과로 만들면, 몸속에서 소화과정을 거쳐 '에너지'로 발산할 수도 있고, 응가속에 '씨앗'으로 배출되어 또 다른 사과나무를 창출할 수도 있다. 여기서 '에너지'로 발산할 경우, 뉴턴의 '사과'가 될 수도 있고, 세잔의 '사과', 아담의 '사과', 그리고 잡스의 '사과'가 될 수 있는 등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지고, 그 '사과(정)'들은 또 다시 '부정(반)'되어 '또 다른 것(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자꾸 반복되기도 하고, 심각한 논쟁을 하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아침에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여명'이 밝아오기 위해 기나긴 어둠속을 헤매기도 하는 법이다. 철학의 중세와 근대가 그러했다. 물론 현대철학에 들어섰다고해서 마냥 순탄하지만도 않지만, 중세와 근대시대의 답답하리만치 지루한 공방이 있었기에 오늘날에는 그런 논란이 일사천리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본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엉터리 정치질을 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 미칠 지경이지만, 이런 꼴통들이 아직까지도 높은 지지율로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더 '답이 없는 세력'이 곳곳에 뿌리내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낡고 구태의연한 짓거리를 일삼는 무리들이 있을까 싶지만,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뿌리 뽑는 일'이 아니라 '더욱 밝게 비추는 일'이다. 뿌리 뽑으려 해봤자 더욱더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어갈 뿐이다. 하지만 밝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선하고 좋은일'로 세상을 가득 채우면 그뿐이다. 당장은 답답할지라도, 혹은 때려야 속시원할지는 몰라도 못난놈들과 똑같은 짓을 해봤자 '너도 똑같다'는 비아냥만 돌아올 뿐이다. 차라리 온 대한민국 시민이 교양으로 철철 넘치게 되면 '가짜'들은 설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 '밝은 학문'인 철학(밝을 철, 배울 학)을 널리 익히면 좋을 터이다. 그래야 저놈들이 부끄러워 뒈질 것이다. 너무 낭만적인 방법 아니냐고? 낭만만큼 멋진 방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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