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착각 - 몸과 마음에 대한 통념을 부수는 에이징 심리학
베카 레비 지음, 김효정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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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노화'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경로석'을 따로 마련해서 노인을 공경하는 문화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경로석은 '노약자석'으로 이름을 바꾸고 노인을 비롯한 약자까지 배려(?)하는 좌석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 '노약자석'에 누가 앉아 있는가? 대부분 '먼저 탄 사람'이 앉아 있곤 한다. 물론 여전히 노인이 승차를 하면 굳이 '노약자석'이 아니라도 젊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표정까지 아름답진 않다. 마지 못해 자리를 비켜주는 듯 벌레 씹은 표정을 애써 감춘 '무표정'을 지으려 노력하지만 말이다. 왜 '무표정'인가? 우리 사회발전을 위해 일찍이 공헌을 한 노인분들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 예절바른 행동을 몸소 실천했는데 말이다.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오히려 먼저 자리를 내어주지 못해 죄송스럽고 더 편한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치열한(?) 예절경쟁이 벌어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경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노화'에 대한 인식이 이미 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젊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듯 싶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한 살'이라도 더 많게 나이를 속여 어른대접을 받고 싶어했는데 반해, 근래에는 '한 살'이라도 어리게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다 못해 '어려 보인다'는 말이 어느새 칭찬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30대는 40대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20대는 30대를 불쌍히 여긴다. 심지어 10대는 20대가 되길 '거부'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른이 되기 싫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경향은 비단 '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라 굉장히 복합적인 사회적 원인이 작용한 탓이 크겠지만, 여기서는 '노화'에 관한 원인만 따져보려 한다. 이 책의 제목이 <나이가 든다는 착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는 다름 아닌 '긍정적인 연령 인식이 주는 굉장한 긍정 효과'다. 간단히 말해서, 노화(늙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만 바꿔도 '노인성 치매' 등과 같은 노년 질병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아울러 '100세 시대 장수 비결'의 으뜸으로 꼽고 있다.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나이를 잊고 살기'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나이를 잊을 정도로 활동적인 어르신들이 '무병 장수'를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팩트가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심지어 '알츠하이머 유발 인자'라고 불리는 유전자를 갖고 있는데도 '연령 인식'을 나이가 들수록 지혜롭다, 경험이 많을수록 능력자다 등과 같이 긍정적으로 가지는 것만으로도 질병에 걸릴 확률을 현저히 낮출 수 있고, 질병에 걸리거나 다쳤을지라도 '회복'이 훨씬 빠르다는 근거를 글쓴이는 강조하면서 '긍정적 연령 인식'이 가져오는 건강한 삶을 주장했다.

 

  과연 '생각(인식)'만 바꾸는 것으로 그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보자. 동물원에서 쇼를 공연하는 두 마리의 물개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한 물개에겐 무조건 '긍정적 표현(칭찬)'만 하고, 다른 물개에겐 무조건 '부정적 표현(꾸중)'만 한다고 치자. 어느 물개가 공연에서 훌륭한 묘기를 펼칠 수 있을까? 당연히 '칭찬'만 들은 물개가 훨씬 잘 할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물개를 대신해서 '자녀'라고 대입을 해보면 어떨까? 더 길게 기간을 잡아 '청년'때까지 계속 칭찬과 꾸중만을 계속 대입했더라면 어땠을까? 그 청년들이 늙어서 '노인'이 된 뒤에도 주위에선 끊임없이 '긍정과 부정의 표현'을 편향적으로 계속 이어나갔다면 두 노인 가운데 누가 더 장수할 가능성이 크겠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구성원들이 '노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노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인식을 바꿔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거의 대부분 '무병장수하는 마을'로 거듭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은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선 '노인' 한 명이 죽으면 온 부족원들이 크게 슬퍼한다고 한다. 까닭인 즉슨,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란다. 부족원들은 '문자기록'보다는 '구술기록'에 익숙한 탓에 매일 저녁마다 모닥불 앞에 모여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의 '경험담'을 모든 부족원들이 듣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60년 이상의 인생경험을 갖고 있는 부족원을 잃어 다시는 그 '경험담'을 들을 수 없다고 하니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경로사상'을 다시금 불러 일으켜야만 할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대접'받고, 나이가 많을수록 '할일'이 더 많은 사회가 진정 건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 너무나도 많은 지금의 우리 사회의 모습에선 상상하기도 싫은 일일 수도 있다. 자칭 '애국보수'라는 이름을 내걸고 성조기를 흔들고, '엄마부대'란 이름으로 일장기를 휘날리며 이 땅의 젊은이들이 미국과 일본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외치며, 수구꼴통과 사이비종교가, 거기에 삿된 무당들과 낡은 풍수가들까지 끌어들이는 못난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존경해 마지않을 노인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눈에 띈다면 주저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우리의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은 분들이 계시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나이 먹고도 철없는 노인분들은 빼고 말이다.

 

  그리고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일랑 하덜 말자. 특히 '스트레스'를 가장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기 때문이고, 스트레스만 쌓였을 뿐인데도 우리 몸에 '염증수치'를 높여 나을 병도 낫지 않게 만든다고 한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스트레스' 받을 일이 점점 많아지겠지만, 그럼에도 스트레스 따위 훌훌 털어내버릴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하잔 말이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긍정적 연령 인식'이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미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노인이 주변에 계시다면 위로부터 건내기 전에 '칭찬'부터 시작해보자. 잘 생겼다, 참 예쁘다, 중후하다, 고우시다는 말도 아끼지 말고, '경험담'을 자랑삼아 이야기할 수 있게 기꺼이 말벗이 되어주고 옛이야기도 부탁해보자. 그리고 노인이어도 '활동적인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운동과 여행, 그리고 취미생활도 즐길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일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없다지만 이젠 달라져야만 한다. 아니 예전처럼 노인을 공경하는 사회로 거듭나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런데 늙으면 늙을수록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까? 구박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까? 아니 늙으면 아예 '제거'해버려야 속시원한 사회를 만들고도 두렵지 않은가 말이다. 걸핏하면 '100세 시대'라고 부르면서 어찌하여 점점 늙은이를 폄훼하는 시대를 살아가느냔 말이다. 그렇게 노인을 증오하며 80세 이상을 제거해버리면, 다음엔 70세 이상을 제거하려 들 것이고, 머지 않아 60세, 50세로 점점 각박해지고 말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연령 인식'을 달리하게 되면 60세가 넘어서도 총기가 넘치고 활력이 넘치는 노인이 될 것이라 이 책이 호언장담하고 있다. 70세가 넘어서도 젊은이 못지 않은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도 말한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하더라도 금세 회복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여러 증거자료를 내놓으며 확신하고 있다. 심지어 '치매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수명이 다할 때까지 발병하지 않고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연령 인식'만 갖고 있으면 말이다. 자, 지금 당장 '나이가 든다는 착각'은 떨쳐버리고 '나이'를 잊고 살길 바란다. 그럼 '무병장수'도 절로 따라온다고 한다. 어차피 '믿으면 본전' 아니겠는가.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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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시민 불복종 (합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종인 옮김, 허버트 웬델 글리슨 사진 / 현대지성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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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지성클래식'도 다른 인문학책 못지 않게 애정하던 시리즈였는데, 개인적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어느덧 친근하게 리뷰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겨우 5권째 리뷰이지만 기회가 닿는대로 리뷰하고자 한다. 맘만 먹으면 '100리뷰 달성'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아직은 맘이 먹어지지 않는다.

 

  암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너무나도 유명한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이제야 겨우 휘뚜루마뚜루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이들이 왜 <월든>을 필독서로 꼽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첫째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움이고, 둘째는 문학적 감수성으로 써내려간 아름다움이고, 셋째는 올곧고 올바른 예의바름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로의 글을 읽으면 먼저 가슴이 뜨거워지고 생각이 냉철해지며 행동거지 하나라도 허투루하지 않겠다는 마음씨가 새록새록 샘솟게 만들곤 한다. 이런 책을 어찌 읽지 않을 수 있느냔 말이다. 미국 교육정책으로 소로의 <월든>을 으뜸 필독서로 삼은 까닭도 정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난 이 책의 소중한 까닭 가운데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공학도의 시선'으로 책을 읽어내려갔기 때문인 듯 싶은데, 소로의 해박하고 유쾌한 '비유적 표현'들이 공학도의 눈에서는 그저 '자연풍경'을 '글자'로 옮겨 놓은 것으로밖에 인식이 되지 않은 까닭에서였다. 겨우 '뒤친이(역자)의 주석'을 읽고 나서야 깊은 사색과 시인의 마음으로 써낸 '감성적이고 중의적인 시적 표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기에 안타깝게도 난 <월든>의 아름다움을 반의 반의 반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소로의 위대함은 '정의로움'과 '예의바름'을 통해서도 굉장하다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특히나 이 책의 말미에 함께 수록된 <시민불복종>의 내용은 한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깊이 매료되고 말았다. "정부는 기껏해야 시민 편의에 봉사하기 위한 조직일 뿐이다"라는 문구만 읽어도 가슴속에 뻥뚫린 듯 시원상쾌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기반한 소로는 불의한 미정부가 부과한 세금을 내지 않은 탓에 수배를 당했고, 그 때문에 '월든 숲'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살아갔던 것이다. 소로는 그곳에서 2년여 동안 지내면서 '시민불복종'을 몸소 실천했으며, 월든 숲과 호수가 제공하는 자연에서 적응하는 것을 넘어 '자연예찬'을 적극적으로 하는 신봉자가 되길 기꺼워하며 스스로 은둔생활을 한 것이다.

 

  하지만 소로는 비록 깊은 숲속에서 홀로 지내지만 '문명인'의 모습을 내던지고 야성을 간직한 '야만인'으로 살아간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가장 문명인답게 살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경>과 <신화>를 벗삼고 중국과 인도 등 '동양사상의 경전'을 살펴보며 인간이 갖추어야 할 '지성'과 '도덕', 그리고 '생존'을 위해 농사와 사냥, 낚시 등을 직접 하면서 스스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월든>을 남겼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6차례나 '수정'을 거듭하며 마치 '팔만대장경'을 한자한자 깎아내듯 정확하고 올곧게, 그리고 올바른 마음을 수양하면서 써내려갔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월든>을 써낸 소로는 참으로 대단하고 위대한 인물인 것이다.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정부정책'을 왈가왈부하는 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허나 옳지 못하고 부당한 '정부정책'을 향해 온몸으로 거부하는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로 인해 수감이 되고 '자유'를 억압 당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덕분에 <월든>은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등 위대한 위인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단다. 지금도 불의한 정부정책에 바르고 따끔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게 <월든>은 큰 힘이 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대한민국에도 꼭 필요한 책임에 틀림없다. 특히나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에게 꼭 읽혀야 하는 중요한 책일 것이다. 그리고 '달걀로 바위치기의 교훈'을 의미심장하게 되새길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분명 '잘 깨지는' 달걀 따위로 '단단하기' 이를데 없는 바위를 깨부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허나 던져진 달걀을 맞은 바위는 반드시 '더러워'진다. 시간이 지나면 더럽다 못해 '달걀 썩는 냄새'로 뒤덮여서 코를 틀어쥐고 막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달걀을 연이어 맞게 된 바위는 깨어지지는 않을지언정 더럽고 냄새가 지독해져서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게 된다. 자, 이제 그 바위의 실체를 까발려보자. 단단하기 그지 없는 바위는 '권력자'를 뜻한다. 그런데 권력자가 부당한 짓을 일삼고도 잘못을 바로 잡지 않으려고 할 때 '깨어있는 시민'이라면 기꺼이, 그리고 반드시 '달걀'을 던져야만 한다. 그렇게 던진 달걀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쏟아진다면 '더럽고 냄새나는 권력자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달걀을 던지는 것으로 그쳐선 절대 안 된다. 코를 틀어쥐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고약한 썩은내를 풍기는 '바위'는 반드시 치워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시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소로는 '멕시코 전쟁', '노예주 확장 문제' 등을 이유로 19세기말 미국 정부정책의 불의함을 낱낱이 고발하였다. 비록 현실에서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백인의 이득'을 위해 정부정책이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소로의 <월든>을 통해서 우리는 잘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바꾸지도 않고, 감추기에 급급했던 '불의함'이 만천하에 드러난 오늘날에는 두 번 다시 저질러서는 안 되는 부당함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미국의 양심'이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물론 '불의한 정부'는 계속 나타날 것이다. 불의를 통해서 얻게 될 '달콤한 이익'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소로의 <월든> 덕분에, <시민불복종> 덕분에 아무리 달달한 이익이 눈앞에 있더라도 '불의한 짓'을 저지르면 언제고 '책임'을 져야만 하게 되고, 그 책임은 달달했던 이득보다 훨씬 더 무겁게 치뤄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깨어나야만 한다. 스스로 '깨어있지' 않으면 불의한 정부와 부당한 정책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하고, 이를 제때에 막지 못한다면 그 뒷감당은 우리 모두가, 아니 정확히는 '우리의 후손'이 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당면한 과제를 절대 외면해선 안 된다. 그 과제가 무엇인지는 잘 알 것이다. 당신은 '이미' 깨어있는 현명한 시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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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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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이 소설은 '해설'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우리 나라처럼 '교육열'이 유난한 환경에서 이 소설은 자칫 '의지박약한 청소년'을 경계하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동이라 불리던 한 소년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명문학교'에 입학했음에도 친구를 잘못 만나서 '문제아'로 찍히게 되고,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해 불명예스런 '휴학'을 했다가 끝내 사회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는 줄거리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제목에서 주는 '위압감' 때문에 '수레바퀴 아래' 깔리지 않으려면 '닥공(닥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창시절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잘못된 선입견처럼 강제주입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수레바퀴 아래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배경지식을 갖추어야만 한다.

 

  먼저, 주인공의 이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에 해당하기 때문에 어린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년 주인공이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주제파악'을 하기 위한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 소년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을 헤아려야 한다. 바로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다. 각각의 이름에 담긴 뜻은 '기벤라트(충고 좀 해줘)', '하일너(치유하다)'다. 이렇게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을 알고 나면 주인공 '한스'가 겪는 방황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기숙사의 문제아로 낙인 찍힌 '헤르만'이 사실은 우리 사회가 지닌 병폐현상을 말끔히 '치유'할 수 있는 인재였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사실 주인공 한스는 자기 스스로 원해서 '공부'를 한 것이 아니었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어른들이 하라는대로 공부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한스에게도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다. 공부성적이 우수한 편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 선생님을 비롯해서 동네어른들 뿐만 아니라 특히 아버지가 유독 기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공부를 잘 하는 한스를 보며 기뻐한 것은 '한미한 가문'을 한스를 통해서 부와 명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한스의 뛰어난 성적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고, 대견해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스는 공부가 즐겁지 않았다. 뛰어난 실력과는 별개로 점점 늘어나는 '공부분량'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스는 점점 또래 친구와 어울리는 시간도 줄어들게 되었고, 스트레스를 받거나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즐겼던 낚시와 산책도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스는 학창시절을 '공부벌레'로만 살게 된 셈이다. 그럼에도 한스는 꾹 참고 공부에 매진한다. 아직 한스에게는 '공부'가 인생의 전부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어른들이 모두 한스에게 공부만을 권하는 분위기여서 한스는 더욱더 '다른 데' 한눈을 팔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한스가 '신학교 합격'을 하고도 방학동안에 다른 여유를 갖지 못하고 교장과 선생과 목사에게 일주일 내내 '선행학습'을 한 까닭이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마냥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달리기만 했다. 합격자들 가운데 2위로 합격한 실력자가 입학과 동시에 성적이 뒤쳐지지 않도록 또 공부만 한 셈이다. 이런 한스에게 제대로 된 '충고(조언)'를 해주는 어른은 없었던 것일까? 사실 있긴 있었다. 동네에서 신발을 만드는 '가죽쟁이 아저씨'가 계셨는데, 오직 이 분만이 한스에게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절대 아니다'라고 유일하게 조언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해주는 이 아저씨를 자주 찾아뵙지 않는다. 의도적이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주위에 온통 '공부하라'는 잘못된 충고를 하는 어른들 뿐이라서 제대로 된 인생조언을 듣고도 죄책감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스의 잘못된 판단은 '문제아' 하일너를 만난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반면에 헤르만은 자유분방한 아이였다. 분명 36명밖에 합격하지 못하는 수재 중의 수재임에 틀림없었지만, 하일너는 '신학교'에서 고분고분하게 공부만 하다가 국가가 배출하는 '목사'가 되어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일너는 그저 '안정된 돈벌이'나 '유망한 직장인'에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내면이 하고자 하는대로 나아가고 싶은 진취적이며 자유로운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일너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자유롭게 지껄일 수 있는, 그렇지만 한껏 절제되고 엄선된 '언어'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줄 수 있는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때로는 날카로운 사회비판을 담기도 하고, 때로는 아름다움, 그 잡채를 예찬하기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은 간절한 이유도 역시 '이름'과 마찬가지로 '하일너(치유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반된 두 소년이 어둡고 음침한 신학교 기숙사 '같은 동아리방'에서 만나게 된다. '모범생'과 '문제아'가 만나서 벌어질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책제목'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레바퀴'에 대해서 조망해야만 한다. 작가 헤세는 이 소설을 '자전적인 소설'이라 말했다. 자신의 어릴 적 경험에서 비롯한 소설이 창작된 셈이다. 과연 두 소년 가운데 누가 '작가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던 걸까? 헤세도 어릴 적에 자살시도를 했던 점에 비추어보면 아마도 '한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헤르만'이 작가가 되고 싶었던 이상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헤세는 목사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운 형편속에서 '목사'가 되길 강요받았지만 병약하고 자살시도 끝에 '시인'이 되길 꿈꿨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두 주인공 모두가 바로 '헤세의 어린시절'을 본뜬 자화상이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속에서 한스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깔려 죽고 만 셈이다. 여기서 '수레바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괴물과 다를 바가 없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데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밟아버리고 말겠다는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거대한 괴물에 깔려죽은 아이들은 '무엇'이고, 용케 살아남은 아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수레바퀴 아래 깔릴 운명은 다름 아닌 '사회부적응자'들이다. 기성세대가 만든 '수레바퀴'는 잘 굴러가기 위해서 그 밑에 깔릴 수밖에 없는 사람은 가차없이 밟고 지나가버린다. 그렇다면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그건 아니다. 수레바퀴가 '왜' 굴러가는지도 모른채 그저 굴러가는대로 아무 생각도 없이 '굴려지는 도구'로 길들여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수레바퀴가 멈추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만 눈치껏 알고 있을 뿐, 그 수레바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 굴러가는지도 모른채 그저 '굴러가는대로' 돌고 또 돌아갈 뿐이다. 그러다 그 수레바퀴에서 '낙오'라도 되면 다시 깔릴 위험도 있고, 아니면 사회에서 버림을 받을새라 허둥지둥 '그 수레바퀴'에 다시 탑승하려 애쓰는 안쓰러운 상황만 펼쳐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은 '수레바퀴 위'에 있는 것일까? 아래에 깔리면 사회부적응자이고, 위에 탑승하면 사회적응자라고 할 때, 수레바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듯이 자유롭게 제 갈길을 가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오직 그런 사람만이 '그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앞만 보는 말'에게 잔인한 채찍질을 가하는 마부(기득권층)와 맞설 '위대한 주인'인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어린 독자들이라면 바로 이 '위대한 주인의 실체'를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비록 소설속의 주인공은 비극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현명해지기 위해 공부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현명해지기는커녕 '공부벌레'가 되어버리거나 '공부하는 기계'처럼 공부하는 학생들이 되고 만다. 점점 '아는 것'이 더욱 많아질터인데 도대체 왜 그런걸까? 바로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목표'를 상실한 탓이다. 공부에 '성공보장 코스'라도 있는 것처럼 '명문고-명문대-대기업'이라는 코스를 밟아야만 성공한 인생이라는, 아니 적어도 '넉넉한 삶'과 '안락한 노후'를 보장받기라도 하는 양, '닥공'하는 청소년들이 너무 많다. 그것보다는 '나는 어른이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이다'라는 구체적인 꿈을 꾸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지겹도록 공부만 해야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 꼭 '교육부장관'이 되어서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즐겁고 재미나게 공부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들 것이며, 그렇게 공부한 대한민국 학생들이 세계최고의 인재로 발돋움해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멋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멋진 꿈을 꾸는 학생들이라면 정말 좋겠다. 그저 돈 많이 버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목적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꿈'을 꾸고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멋진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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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17편의 리뷰를 작성했다.

통산 1600리뷰를 넘어섰고 '서평단 리뷰'는 1% 포인트가 줄어들었다.

카테고리별 리뷰는 '어린이책'에 집중한 달이었지만,

'인문학'과 '역사', '소설', '청소년', '과학' 카테고리의 책도 골고루 리뷰했다.

하지만 점점 '서평리뷰'는 줄어들고 '도서관 대여책'과 '내돈내산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거기에 '전자책'도 한 몫하고 있는데,

초창기엔 읽기 힘들던 '전자책'이 시력이 떨어지면서 점점 읽기 편해지고 있다.

'글자확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리뷰쓰기에 탄력이 붙었다.

8월에 더욱 뜨겁게 써보려 한다.


참, 독서어플은 '북플립'과 '북모리'를 함께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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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3 - 무신정권과 반란의 시대 박시백의 고려사 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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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에서 집중조명해야 할 시대는 어디일까? 개인적으로는 '무신정변'으로 본다. 학창시절에는 '무신의 난'으로 배웠는데, 어느샌가 '정변'이란 명칭으로 불리면서 한층 격을 높여 바라보게 된 것도 한몫 했다. 과연 '무신정변'은 고려시대에 무엇이었을까?

 

  고려의 지배층은 '호족'으로 시작해서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뒤에 '무신정변 이후' 문벌귀족이 몰락하고 '무신'들이 권력을 차지하더니 '몽골항쟁 이후'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원나라의 뒷배로 성장한 '권문세족'이 집권을 했다가 고려말에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해서 조선개국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를 좀더 들여다보면 집권층을 '문신과 무신'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호족(무신)-문벌귀족(문신)-무인정권(무신)-권문세족(문신)-신진사대부(문신)으로 도식화 해보면 무신보다 문신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신이 집권을 하던 시대는 '호족'과 '무인정권' 때 뿐인데, 호족들도 초기에만 무신이었을 뿐, 광종의 과거제 실시 이후에는 호족들도 과거급제를 해야 대접을 받을 수 있었기에 빠르게 '문신'으로 변신하였고, 이후 문신으로 완전탈바꿈한 '가문'끼리 서로 혼인을 하며 '문벌귀족화'에 성공하였기에 호족들도 마냥 '무신집안'은 아닌 셈이다. 이렇게 고려는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문신이 집권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문신들은 태반이 제거되고 말았다. 고려의 의종이 조선의 연산군처럼 사치와 향락으로 일관하며 허구헌날 잔치와 사냥을 벌이는 통에 '무신'들은 임금을 비롯해서 환관과 내시, 문신, 그리고 기생들까지 호위하기 바빴던 것이다. 말그대로 날이 좋아도 '호위', 날이 좋지 않아도 '호위', 날이 적당해도 '호위'만 하느라 잔치는커녕 놀이에도 끼지 못해 임금의 '관심'은커녕 날마다 퍼주는 '하사품'조차 챙기지 못하니 불만이 커져갈 뿐이었다. 그러다 하급 문신이 대장군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벌어지자 무신들은 일제히 칼을 들어 문신들을 도륙하는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집권층이던 문신들을 깡그리 제거한 뒤에 무신들이 국정을 운영하려하니 제대로 될 턱이 없다. 일찍이 '문신'들이 도맡아서 하던 일을 어깨너머로 배웠다한들 '정치의 생리'조차 이해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신들이 나서면 무신들은 어김없이 단칼에 베어 없애버리고 말았다. 무신들이 단단히 화가 났고 불만이 오래도록 쌓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신집권층'은 이의방을 필두로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다가 최충헌 대에 이르러 '최씨무인정권(60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몽골항쟁을 하며 고려의 자존심(?)을 한껏 살리기는 하지만 끝내 '개경환도'와 함께 무인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4권에서 다룰 예정이니 잠시 뒤로 미루고, 3권에서는 '무인정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니 다시 집중하도록 한다.

 

  암튼, 고려시대에 무인정권은 '신분의 벽'을 허무는 시대였다. 무신정변의 주역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반란의 주역들'도 노비, 천민, 농민 등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 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른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호응을 얻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기 위해 수많은 민중들이 꿈틀꿈틀 대던 활기찬 시절이었던 것이다. 물론 왕조국가에서 '신분상승의 기회'라는 것은 대혼란을 뜻하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겐 너무나도 고통스런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태평성대에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떵떵거리며 잘 사는 시절일수록 가난한데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타고난 이들에겐 '비극'일 뿐이니 말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단 한 방에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혼란기'가 반가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무인정권시대'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이 인정받는 시대임에 분명했다. 물론 과거에도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었던 혼란기가 있기는 했다. 삼국시대에 숱한 '전쟁'이 그랬고, 후삼국시대에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대우를 받기도 했다. 허나 그시절에는 '골품제'라는 한계가 유능한 실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장보고'가 그랬고, '최치원'이 그랬다. 후삼국시절에 '견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 등이 호족이란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적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 신분상의 우위를 차지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까지 결코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인정권시대'에는 그야말로 천한 신분의 사람이라도 '능력'을 인정받으면 제 실력껏 올라갈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고 한들 그건 중요하지 않은 시대였다. 왜냐면 '대혼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우리 민족이 맞이한 '최초'의 계층사다리가 무한정 제공되었던 셈이다.

 

  허나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은 못된다. 왜냐면 그렇게 애써 '신분의 벽'을 허물었지만, 그로 인해 고려사회에 바람직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닥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계층사다리'도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빈부격차가 너무나도 심각해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극에 달해 흙수저는 결코 금수저가 될 수 없는 비극이 펼쳐진 암울한 현실을 살고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사회는 끝내 비극적인 혼란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고려시대 불만과 울분을 터뜨릴 수 없었던 무신들이 한순간에 폭발해서 모든 것을 때려부수던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이런 비극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선 천지가 뒤바뀌는 개혁과 피를 부르는 혁명 뒤에 찾아온 '신분의 벽'이 허물어지고 어렵게 되찾은 '계층사다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써먹어야만 할 것이다.

 

  그럴 때 소위 '흙수저들'이 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썩어 문드러진 '고위층'을 제거한 뒤에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부정부패를 일삼고 '저들만의 잔치'를 벌이던 고위층을 싹다 제거한 뒤에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지 않게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아야 한다. 아니 애초에 비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채우고, 공정하고 안정하게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만 한다. 부패한 대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부도처리되어 무너진다한들 나라경제가 휘청거릴 걱정이 없게 경제적 건전성도 확보해두어야만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싶겠지만, 어느 시대에나 '유능한 인재'는 차고도 넘치게 많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관건은 그런 인재를 잘 활용할 시스템이 없을까봐 걱정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무능한 정권'은 많았어도 '유능한 인재'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절로 통할 정도로 우리는 역사속에서 수많은 영웅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인재와 영웅들의 '인성'이 중요할 뿐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는데도 '쓰레기 인성'을 갖고 있다면 가차없이 폐기처분하면 그뿐이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매장해버리는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면 된다.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입만 열면 시궁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족속들을 그냥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우리가 '무신정변'을 다시금 살펴볼 적절한 시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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