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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3 - 무신정권과 반란의 시대 ㅣ 박시백의 고려사 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월
평점 :
고려사에서 집중조명해야 할 시대는 어디일까? 개인적으로는 '무신정변'으로 본다. 학창시절에는 '무신의 난'으로 배웠는데, 어느샌가 '정변'이란 명칭으로 불리면서 한층 격을 높여 바라보게 된 것도 한몫 했다. 과연 '무신정변'은 고려시대에 무엇이었을까?
고려의 지배층은 '호족'으로 시작해서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뒤에 '무신정변 이후' 문벌귀족이 몰락하고 '무신'들이 권력을 차지하더니 '몽골항쟁 이후'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원나라의 뒷배로 성장한 '권문세족'이 집권을 했다가 고려말에는 '신진사대부'가 등장해서 조선개국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를 좀더 들여다보면 집권층을 '문신과 무신'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호족(무신)-문벌귀족(문신)-무인정권(무신)-권문세족(문신)-신진사대부(문신)으로 도식화 해보면 무신보다 문신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신이 집권을 하던 시대는 '호족'과 '무인정권' 때 뿐인데, 호족들도 초기에만 무신이었을 뿐, 광종의 과거제 실시 이후에는 호족들도 과거급제를 해야 대접을 받을 수 있었기에 빠르게 '문신'으로 변신하였고, 이후 문신으로 완전탈바꿈한 '가문'끼리 서로 혼인을 하며 '문벌귀족화'에 성공하였기에 호족들도 마냥 '무신집안'은 아닌 셈이다. 이렇게 고려는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문신이 집권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문신들은 태반이 제거되고 말았다. 고려의 의종이 조선의 연산군처럼 사치와 향락으로 일관하며 허구헌날 잔치와 사냥을 벌이는 통에 '무신'들은 임금을 비롯해서 환관과 내시, 문신, 그리고 기생들까지 호위하기 바빴던 것이다. 말그대로 날이 좋아도 '호위', 날이 좋지 않아도 '호위', 날이 적당해도 '호위'만 하느라 잔치는커녕 놀이에도 끼지 못해 임금의 '관심'은커녕 날마다 퍼주는 '하사품'조차 챙기지 못하니 불만이 커져갈 뿐이었다. 그러다 하급 문신이 대장군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벌어지자 무신들은 일제히 칼을 들어 문신들을 도륙하는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집권층이던 문신들을 깡그리 제거한 뒤에 무신들이 국정을 운영하려하니 제대로 될 턱이 없다. 일찍이 '문신'들이 도맡아서 하던 일을 어깨너머로 배웠다한들 '정치의 생리'조차 이해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신들이 나서면 무신들은 어김없이 단칼에 베어 없애버리고 말았다. 무신들이 단단히 화가 났고 불만이 오래도록 쌓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신집권층'은 이의방을 필두로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다가 최충헌 대에 이르러 '최씨무인정권(60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몽골항쟁을 하며 고려의 자존심(?)을 한껏 살리기는 하지만 끝내 '개경환도'와 함께 무인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4권에서 다룰 예정이니 잠시 뒤로 미루고, 3권에서는 '무인정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니 다시 집중하도록 한다.
암튼, 고려시대에 무인정권은 '신분의 벽'을 허무는 시대였다. 무신정변의 주역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반란의 주역들'도 노비, 천민, 농민 등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 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른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호응을 얻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기 위해 수많은 민중들이 꿈틀꿈틀 대던 활기찬 시절이었던 것이다. 물론 왕조국가에서 '신분상승의 기회'라는 것은 대혼란을 뜻하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겐 너무나도 고통스런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태평성대에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떵떵거리며 잘 사는 시절일수록 가난한데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타고난 이들에겐 '비극'일 뿐이니 말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단 한 방에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혼란기'가 반가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무인정권시대'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이 인정받는 시대임에 분명했다. 물론 과거에도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었던 혼란기가 있기는 했다. 삼국시대에 숱한 '전쟁'이 그랬고, 후삼국시대에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대우를 받기도 했다. 허나 그시절에는 '골품제'라는 한계가 유능한 실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장보고'가 그랬고, '최치원'이 그랬다. 후삼국시절에 '견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 등이 호족이란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적이 있긴 했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 신분상의 우위를 차지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까지 결코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인정권시대'에는 그야말로 천한 신분의 사람이라도 '능력'을 인정받으면 제 실력껏 올라갈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고 한들 그건 중요하지 않은 시대였다. 왜냐면 '대혼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우리 민족이 맞이한 '최초'의 계층사다리가 무한정 제공되었던 셈이다.
허나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은 못된다. 왜냐면 그렇게 애써 '신분의 벽'을 허물었지만, 그로 인해 고려사회에 바람직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닥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계층사다리'도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빈부격차가 너무나도 심각해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극에 달해 흙수저는 결코 금수저가 될 수 없는 비극이 펼쳐진 암울한 현실을 살고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사회는 끝내 비극적인 혼란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고려시대 불만과 울분을 터뜨릴 수 없었던 무신들이 한순간에 폭발해서 모든 것을 때려부수던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이런 비극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선 천지가 뒤바뀌는 개혁과 피를 부르는 혁명 뒤에 찾아온 '신분의 벽'이 허물어지고 어렵게 되찾은 '계층사다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써먹어야만 할 것이다.
그럴 때 소위 '흙수저들'이 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썩어 문드러진 '고위층'을 제거한 뒤에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부정부패를 일삼고 '저들만의 잔치'를 벌이던 고위층을 싹다 제거한 뒤에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지 않게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아야 한다. 아니 애초에 비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채우고, 공정하고 안정하게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만 한다. 부패한 대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부도처리되어 무너진다한들 나라경제가 휘청거릴 걱정이 없게 경제적 건전성도 확보해두어야만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싶겠지만, 어느 시대에나 '유능한 인재'는 차고도 넘치게 많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관건은 그런 인재를 잘 활용할 시스템이 없을까봐 걱정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무능한 정권'은 많았어도 '유능한 인재'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절로 통할 정도로 우리는 역사속에서 수많은 영웅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인재와 영웅들의 '인성'이 중요할 뿐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는데도 '쓰레기 인성'을 갖고 있다면 가차없이 폐기처분하면 그뿐이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매장해버리는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면 된다.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입만 열면 시궁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족속들을 그냥 바라보기만 할 것인가. 우리가 '무신정변'을 다시금 살펴볼 적절한 시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