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6 : 젊은 예술가의 초상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6
박성문 글, 이철희 그림, 손영운 기획, 제임스 조이스 원작 / 채우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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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의 자전적인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한 대목에서 '좋은 작품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좋은 작품은 인간의 감정을 사로잡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라는 표현을 빌리는데, 무언가에 '사로잡히게' 만들 정도의 감정이 생긴다면 좋은 작품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저 밋밋한 좋지 못한 작품이라고 한 구분하였다. 여기에 한 눈에 사로잡을 만한 '형식'까지 갖춘 작품이라면 미인을 바라볼 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일까? 어디에 살까? 남자 친구는 있을까? 무엇을 좋아할까? 말을 한 번 걸어볼까? 하고 꼬리에 꼬리는 물며 궁금해하는 것이 생기는데, 바로 이런 감정이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런 궁금증이나 관심이 '광휘'를 만든다고 했고, 조이스는 다시, 광휘를 '무언가에 사로잡히고, 더 깊이 몰두하여 진실된 모습을 깨닫는 것'이라고 풀었다.

 

  그렇다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좋은 소설'일까? 많은 이들은 제임스 조이스가 기존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현대소설(모더니즘)의 기틀을 닦았다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존의 소설이 '행위 중심'으로 서술한데 반해, 조이스는 '의식 중심(떠오르는 이미지)'으로 이야기를 서술함으로써 소설속에 '초현실주의'를 실현시키는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평가하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독자들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다보면,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배경지식'이 필요한데,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이 무작정 '좋은 소설'이라는 평만 믿고서 소설속으로 뛰어들다보면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에라도 어질어질 멍한 채 이리저리 헤매기만하다가 책을 덮어버리기 일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그리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허나, 작품속에 담긴 '배경지식'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책'이 왜 그토록 극찬을 받는 소설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명의 예술가가 탄생하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 중심'으로도 읽어도 좋고, 영국의 식민지로 신음해야만 했던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며 '민족주의의 각성'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도 있으며, 종교인으로서의 소명의식과 안정적인 직장인으로써의 '종교에 대한 성찰' 등등 하나의 소설을 읽었을 뿐인데, 독자가 지니고 있는 '배경지식'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다양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펼쳐내는 소설이야말로 훌륭한 소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서울대선정 문학고전'으로 읽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고전문학의 깊이를 체험하지 못한 예비독자들에게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물론, 길라잡이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만 달달 암기하듯 '감상'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진정 '고전문학'에 담긴 참뜻을 이해하는데 스스로 한계를 긋는 작업일 뿐이다. 더구나 이 책은 '만화형식'이라서 '원작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제대로 맛볼 수도 없으며, 그런 기법을 통해 선보여지는 '작가의 분신'인 소설속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수많은 갈등과 고민도 생생하게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저 원작에서 '그런 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정보'만 달달 외우고 '시험대비'만을 위한 독서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법답안처럼 제시되어 있는 '작품해석'을 이해한 뒤에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작품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길 바란다. 이 책은 그런 '재해석'을 위한 첫 디딤돌로 활용해야 더욱 바람직하며, 이 책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토록 두서없이 서론이 장황한 까닭은 나 역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으며 엄청 헤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의식의 흐름기법'이지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기도 전에 확확 바뀌는 장면연출과 부족한 배경지식으로 인해 제대로 된 이해를 하기 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자, 이제는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썰을 풀어보아야겠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예술가의 자전적인 소설인 까닭에 작품속의 인물과 배경이 마냥 '허구성'을 띤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설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진심 가운데 나는, 작가의 고국이 '아일랜드'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강대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하는 민족주의자가 있는 반면에, 어둡고 아픈 현실 앞에 '삶의 당위성'을 빌미로 내세우며 그런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삶의 길을 찾아나서는 현실주의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나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상가(?)'들이 모두 아일랜드인이라는 점이 비극의 시작인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의 눈에는 조국의 어두운 앞날이 예견되는데도 비굴하게 압제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포를 배신하면서도 오직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반면에 현실주의자들의 눈에는 거대한 바위에 달걀던지기 꼴로 하나 뿐인 소중한 목숨마저 헛되게 낭비(?)하며 불가능에 가까운 '조국의 독립'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부추기는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현실을 제임스 조이스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이스는 소설속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반민족적인 행태'를 일삼는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아니, 어린시절에도 부당한 처우를 받으면 당당히 '옳음'을 밝히고 한 점 부끄럼없이 떳떳한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겼던 자신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런 올곧은 성품이었기에 '성직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고민하던 시절에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사창가를 들락거렸던 자신에게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런 고통은 자신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면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가정의 생계를 걱정해야만 하는 '청년시절'이 되자 생계를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야 하는가? '자신의 꿈(자아)'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술가의 혼을 갈고 닦아야 하는가?로 고민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민족적인 고뇌'를 내려놓지 않았다. 당시의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출세와 안녕을 위해서 조국을 배신하고 '영국의 입맛'에 딱맞는 설교를 늘어놓는 비겁한 모습과 예술이란 이름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수준 낮은 창작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베끼면(도둑질)서도 부와 명예를 적당히 건져올려 배를 채우면서도 부끄러울 줄 모르는 몰염치함도 서슴없이 비판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작중화자인 '스티븐 디덜러스'는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 그리스의 뛰어난 장인 '다이달로스'처럼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화려한 비행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을 보여준다. 어려움에 빠진 '조국'과 '가정'의 비참한 현실을 낱낱이 고발하면서도 '예술가의 혼'을 불태울 열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였는데도, 현실은 중국에 이어 미국을 '종주국'으로 삼고, 강대국(?) 일본의 식민지인처럼 '강자의 입맛대로' 시키는 일에만 충실히 따르는 멍청이가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라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 말이다. 이런 멍충이들은 미국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일본이 '아직'도 강대국이라는 꿈에서 깨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미국의 간섭 없이도 잘살 수 있고 일본 따위는 한 수 아래로 보아도 될 정도로 후진국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어찌하여 외면하게 되었을까? 몹시 궁금할 지경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런 멍충이들이 대한민국에 절반 가까이나 살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절반이나 되는 멍충이들을 깨우쳐주는 일이 아니다. 이미 깨어있는 나머지 절반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멍충이들이 활개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멍충이들을 깨우치게 하는 일보다는 분명 쉬운 일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이 무어냐고? 그 첫 번째는 무엇보다, '돈, 많은 놈'이 부럽다면 그놈들이 '사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돈, 많은 놈'은 그 가운데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돈, 많은 놈'을 '돈도 많은 분'으로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 문화 등등 총체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부익부빈익빈이 만연하고, 계층사다리가 사라져버려서 '없는 사람'은 출세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그럼 당당히 요구해라! 대한민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라고 말이다. 그게 바로 '해야 할 일'이다. 정치인들이 후진적으로 썪어서 서민들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그런 놈들을 '찍어준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정치는 '선거'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하는 것이다. 당당히 요구해라!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돈도 많은 분'만이 이 땅에 충만해질 때까지 '해야 할 일'을 망각하지 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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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 1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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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까지 '여담'을 조금 풀어놓자면, <열림원>에서 출간한 '쥘 베른 컬렉션'을 한창 사모으고 있었던 때로 돌아가야 한다. 살림살이가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이라 책을 많이 사지 못하던 때여서 진짜 '소장각'인 책들만 사모으던 터였는데, 쥘 베른의 열혈팬이었던 나는 이 책에 아낌없이 홀릭해버렸다. 그렇게 10권을 모았는데, 이상하리만치 책의 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분명 '컬렉션 목록'에는 <신비의 섬>을 비롯해서 <황제의 밀사>, <기구 타고 5주간> 등등이 소개되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느 날 갑자기 '후속작'이 출간되었는데, 막상 사려고 보니 '표지갈이'가 되어 버린 '개정판'으로 출간해버린 것이다. 가격이 오른 것은 둘째치고, 기존에 소장하고 있는 책들까지 싹다 '표지갈이'가 되어, 이전과는 아주 다른 '장서'로 재출간이 된 것이었다. 더구나 '이전 장서'와는 책의 높이마저 달라져서 '구매욕구'가 싹 사라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쥘 베른 컬렉션'은 새단장한 모습으로 또 다른 모습의 '쥘 베른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연이어 새책들이 출간되었더랬다. 하지만 난 끝내 '개정판'을 사모을 수가 없었다. 마치 '개정판'을 사모으게 되면, 기존에 모았던 책들에 대한 '배신(?)'을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난 왠지 모를 '배신감'에 '개정판'에 대한 미움만 키워나갔다. 하지만 그 '개정판'도 오래 가지 못하고,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소위 '잘 팔리는 책들(?)'만 엮어서 또 다른 '표지갈이'로 지금의 책이 출간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해저 2만리>에 등장했던 '네모선장의 정체'가 <신비의 섬>에서 밝혀진다는 문구를 읽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말없이 '또또 개정판'에 해당하는 이 책을 구매해서 읽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 책꽂이에는 두 개의 '이질감'이 가득한 쥘 베른 컬렉션이 장식하게 되었다. 앞으로 '또또 개정판'을 사모으게 될런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개정판이 출간되더라도 제발 '표지갈이'는 완간을 한 뒤에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넌지시 호소해보려 한다. 정말이지 '완간'도 되기 전에 표지를 바꿔버리면 구매욕이 현저히 떨어지고 만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말이다.

 

  암튼, 내가 <신비의 섬>을 읽게 된 까닭은 앞서 말한 '네모선장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문구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1권을 다 읽어보니, 첫 느낌은 '어른판' <2년 동안의 휴가(15소년 표류기)>를 읽은 듯한 느낌도 들고, '무인도'에 정착해 아무 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생존'해나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느낌도 들었다. 1권의 줄거리에서 '네모선장의 비밀'이 밝혀지는 내용은 없었지만, 네모선장의 흔적(?)인 듯한 '암시'가 되는 부분들은 몇몇 있었다. 다섯 명의 조난자 중에서 네 명은 폭풍속을 기구를 탄 채 날다가 추락하던 중에 해안가에 표류해서 운좋게 생존하지만, 단 한 명은 '동굴' 속에서 발견 되었다는 점이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 같은 섬의 호수에서 괴물같이 거대한 듀공이 격렬한 사투 끝에 죽임을 당했는데, 듀공의 사체가 '날카로운 칼'에 의해 잘려진 것같은 상처가 커다랗게 있었다는 점, 그리고 조난자와 함게 표류한 개, 토비가 새로 정착한 동굴을 거처로 삼은 뒤에도 '바다로 통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는 통로 근처에서 이상하리만치 경계를 하고 으르렁거리는 장면이라든지, 마지막으로 덫에 걸린 새끼돼지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로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다가 딱딱한 돌 같은 것을 씹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돌이 아니라 '납으로 만든 총알'이었다는 점에서 탐정같이 예리한 독자들은 '네모선장의 비밀'과 연관지을 수 있는 단서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해저 2만리>에서도 네모선장이 바다 한가운데 아무도 알지 못하고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섬에서 '노틸러스호'를 기항하고 수리를 하거나 보급을 하는 '신비한 섬'을 언급한 대목이 있기에 <신비의 섬>에서 '무인도'라고 알려진 '링컨 섬'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증거'들은 애독자들에겐 단지 '무인도'가 아니라는 설정, 그 이상의 설렘을 발동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흥미진진한 '단서'들은 일단 2권에서 다시 '본격, 추리'를 해보도록 하고, 다시 책의 줄거리로 시선을 돌려보려 한다. 먼저 줄거리는 단순하다. 다섯 명의 조난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기구를 타고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인 리치먼드에서 탈출에 성공하지만, 하필 탈출할 때의 날씨가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이었던 탓에 운좋게 탈출에 성공한 것이 그만, 폭풍속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렇게 남서쪽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려가다가 망망대해에 추락을 면하기 위해 기구 안에 실었던 '모든 것'을 기구밖으로 떨구며 근근히 버티다 '운좋게(?)' 육지를 발견하고 불시착을 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 육지는 망망대해에 갇힌 섬이었다는 전개다. 그리고 그 섬은 대륙이나 가까운 섬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뱃길과도 멀리 떨어진 탓에 그야말로 '완벽하게'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였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이토록 아무 것도 없는 섬에서 '생존의 불씨'를 되살린 것은 다름 아니라 '인류의 지혜', 그리고 '문명의 지성'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믿기 힘든 현실이 펼쳐지면서 '쥘 베른의 역작'이라는 면모가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이는 다섯 명의 조난자가 대단한 능력자들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그렇다. 그 뛰어난 능력은 그들의 이름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먼저, 만물박사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이러스 스미스'는 Cyrus(키루스)라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대왕의 이름에서 따왔고, <뉴욕 헤럴드> 신문기자인 '기디언 스필렛'은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용맹함을 갖춘 지성인으로 척박한 무인도에서도 위대한 모험가로 활약하며 조난자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발벗고 나서는 영웅적 인물이었다. 또한, 사이러스의 하인을 자처한 '네브'라는 흑인이 등장하는데, 북군으로 참전한 사이러스는 네브를 노예신분에서 해방시켰지만, 원래부터 충직하고 성실하며 헌신적인 성향을 띤 네브는 해방된 뒤에도 사이러스의 하인을 자처했더란다. 이런 '네브'의 이름은 성경에 등장하는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군주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대왕에서 따왔다. 이 대왕은 백성을 사랑한 자애로운 왕이었으며 왕비를 위해 손수 '공중정원'을 만들어줄 정도로 지극정성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항해에 잔뼈가 굵은 선원 출신의 '펜크로프', 그리고 모험을 좋아하고 박물학에 뛰어난 재능을 갖춘 소년 '허버트'가 합류하여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에서 무엇이든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신비한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 설정과 전개는 이 책이 <15소년 표류기>나 <로빈슨 크루소>와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까닭은 앞선 두 소설에서는 표류자들이 '우연한 계기'로 생존에 필요한 물자나 원료를 얻게 되면서 무인도에서 생존하고 끝내 탈출하게 되지만, <신비의 섬>에서는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완전 고립된 무인도에서 '자체적인 노력'만으로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무인도에서 용광로를 만들어서 '철기도구'를 제작해낸다든지, '니트로글리세린'이란 폭발물을 조제하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정도로 '화학제조'를 실현한다든지, 맨몸으로 표류했음에도 굻어죽지 않을 정도를 넘어서서 매일매일 '사냥'에 성공해서 '고기(단백질)섭취'를 가능케하여 무인도에서 문명을 일구어내는 왕성한 체력을 뿜뿜해내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소설이라도 뻥이 좀 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허나 쥘 베른은 이러한 '무모한 설정'을 온전히 '과학의 힘'을 바탕으로 완벽히 무마시켜버렸다. 무릇 인류에겐 '지식 축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는 달리 우월할 수밖에 없고, 그런 우월함을 바탕으로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밑바탕에 깔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무모한 '과학만능주의'의 폐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인간의 관점'에서만 '자연의 섭리'를 논하고, 그런 섭리의 위험함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신이 내린 축복'으로만 해석하며 자연과 환경 파괴를 일삼는 모습은 이 소설의 유쾌함에 살짜쿵 걸림돌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쥘 베른이 19세기 작가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이 지구의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어쨋든, 1권은 씹던 고기에서 '납 총알'이 발견되어 2권에서 벌어질 파란만장한 모험담을 예고하며 마무리하였다. 2권에서는 또 어떤 '네모선장의 비밀'이 파헤쳐질지 기대가 만빵이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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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세계사 5 -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 처음 세계사 시리즈 5
초등역사교사모임 글, 한동훈.이희은 그림,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감수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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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 공부를 하다보면 '중간이 어렵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도 '처음'과 '끝'은 기억이 생생하기 마련인데, '가운데'에는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 가물가물하고, 순서도 헷갈리기 십상인 것처럼 세계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어서 '모든 것'을 다 씹어먹을 듯한 열정으로 달려왔다하더라도 '중세'를 넘어 '근대'로 넘어가는 이즈음의 역사가 아리까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모두 10권의 시리즈 가운데 5권에 해당하는 부분이 그렇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하지만 막상 정리해서 이야기하자면 떠듬떠듬 헷갈리고 마니 말이다. 더구나 요즘 세계사는 '서양(유럽)중심사'를 벗어나 '중동아시아사'와 '아메리카문명', 그리고 '이슬람문명'을 비롯해서 '인도사', '중국사', '한국사', '일본사'까지 아울러 소개하고 있기에 광범위한 세계사를 눈앞에 두고서도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감도 잡을 수 없게...아니 주눅이 들 정도로 방대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방대한 역사'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효율적인 방법은 없을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쿠르트 50병을 마시는 방법'으로 표현해보려 한다. 요쿠르트 한 병은 누구나 부담없이 단번에 쭉 들이킬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병조차 뚜껑을 까서 마시기보다 밑을 이빨로 뜯어서 쪽쪽 빨아먹거나 꽁꽁 얼려서 반으로 잘라 먹는 '기이한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역사공부를 해서는 결코 인류역사 오천년을 총망라하여 정리할 도리가 없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일 것이다. 그러니 그냥 '요쿠르트 한 병'을 가볍게 쭉 들이키는 상상을 하길 바란다. 이렇게 '한 병 마시기'가 너무나 수월한 관계로 '다섯 병'을 한 팩으로 포장된 상태에서 빨대를 하나씩 꽂아 쪽쪽 빨아먹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런 도전(?)의식이 샘 솟았나보다. 다섯 병도 손쉽게 들이키는데 '50병'을 마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요쿠르트 50병을 커다란 대접에 부어서 한 번에 들이키는 '무모한 시도'를 하는 사람도 봤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한 병에 50밀리리터라고 해도 열 병이면 500밀리리터이고, 그렇게 다섯 배를 하면 2500밀리리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 커다란 생수 1리터(1000밀리리터)를 2병 반을 원샷하는 셈이다. 이게 보통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역사공부가 그렇다. 단원 하나하나는 외울 것도 만만해보이고, 이해해야 할 것도 고만고만해보이지만 '역사책' 10권을 통째로 외우고 이해하려 들면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렇다면 요쿠르트 50병을 모두 마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시간적 여유'를 두고서 '한 번에 한 병씩' 꾸준히 마시면 50병은 물론, 100병도 거뜬히 마실 수 있게 된다. 역사공부는 무릇 이렇게 하는 것이다.

 

  <처음 세계사 5>에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를 다루고 있다. 르네상스의 시작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점차 퍼지게 되었는데, 한 가지 분야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다함께 성장발전한 것이 큰 특징 중 한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학문, 예술, 문화 등등' 다방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르네상스의 특징'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인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유럽의 중세 1000년 동안 '신학 중심'으로 발전을 해오면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눈 뜨게 한 것이 르네상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무너지고 고대의 그리스로마신화 때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종교개혁'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톨릭 교회'에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게 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종교개혁'은 루터의 반박문을 시작으로 스위스의 츠빙글리, 프랑스의 칼뱅, 그리고 영국의 국교회와 청교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유럽은 '구교'와 '신교'가 대립 아닌 대립을 하게 되고, 같은 신앙을 두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갈등으로 커지더니 급기야 '종교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이즈음 서유럽국가들은 '인도 항로'를 새로 개척하기에 열을 올린다. 지중해로부터 인도로 갈 수 있는 길목을 '이슬람세력'이 가로막고서 통행료(관세)를 거두며 막대한 이익을 챙기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면 이러한 부대비용을 절약하고서 인도의 향신료로 얻을 커다란 이득을 새로 챙길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부풀어올랐기 때문이다. 이 당시 과학사의 업적으로 '지구는 둥글다'는 증거가 유럽인들의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고 말이다. 그래서 용감한 모험가들은 지중해를 벗어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항로와 대서양을 건너 지구 한바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 가운데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데 성공했고,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젤란은 실제로 세계 일주에 성공(마젤란은 필리핀 원주민에게 살해)하는 위업을 달성하며 '신항로 개척'에 큰 공을 세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아메리카 문명'은 끔찍한 비극을 맞이하는데, 다행스럽게(?) 마야문명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멸망했지만, 아스텍과 잉카 문명은 유럽인이 가지고 온 '총, 균'에 의해 원주민 대학살이 벌어지고 만다. 이렇게 아메리카의 자원을 강탈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은 '서구제국주의의 첫 번째 만행'을 저지르며 성장발전하게 된다.

 

  한편, 이슬람 문명은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를 넘어 '중앙아시아'와 '인도'에까지 영향력을 뻗치는데, 각각 '오스만 제국', '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이다. 앞서 '칭기즈 칸의 정복전쟁'으로 헝가리까지 뻗어갔던 '몽골제국'은 칭기즈 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여러 개의 '칸국'으로 나뉘게 되었고, 몽골군에게 크게 놀라 휘청거렸던 이슬람세력은 '오스만 제국'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되고, 칸국으로 자리 잡았던 '몽골의 후예들'은 각각 중앙아시아를 발판삼아 '티무르 제국'으로, 인도로 뻗어나간 이들은 '무굴 제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티무르 제국은 한 세대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인도에 정착한 '무굴 제국'은 인도의 힌두교와 결합하면서 인도의 왕조로 자리잡게 된다.

 

  또한, 원나라를 세워 중국땅에 정착한 '몽골의 후예'는 한족의 저항에 밀려 '북원'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 자리에는 새로 '명나라'가 새워지게 된다. 그렇게 명태조 '주원장'은 강력한 통치력으로 자금성도 세우며 강력한 황권을 세우지만, 그가 죽자 '후계 문제'에 휩싸여 형제들이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왕권 다툼'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명나라의 기세는 날로 커지게 되고, 급기야 '정화 함대'가 아프리카까지 조공무역을 성사시키면서 전세계에 '화교'를 정착시키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즈음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새로 건국되었는데, 세종대에 이르러 나라기틀을 다잡더니 '과학기술, 문화예술'이 날로 성장하여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에는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큰 업적을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선조대에 이르러 '임진왜란'이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끝으로 일본은 혼란기를 맞이하는데, 이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군웅할거를 시작하더니 점차 '힘이 쎈 영주(다이묘)'를 중심으로 새 판이 짜여지더니 급기야 서로 뺏고 빼앗는 전쟁이 일상처럼 벌어지게 된다. 때마침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이 전해지면서 전쟁을 직업으로 삼는 '상비군'이 결성되는데, 이를 최초로 전쟁에 잘 활용하였던 이가 바로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도 통일의 위업을 앞에 두고서 '혼노지의 변(믿었던 부하에게 배신을 당함)'을 마지막으로 수명을 다하게 되고, 노부나가의 복수에 앞장 섰던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의 전국통일은 달성이 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상비군'을 적절히 해체하지 못한 히데요시는 '대륙정벌'이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는데, 그 첫 단추로 '정명가도(명나라를 치려하니 조선은 길을 내주어라)'를 핑계삼아 대대적인 조선침략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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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2만리 아셰트클래식 1
쥘 베른 지음, 쥘베르 모렐 그림,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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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정신>의 '아셰트클래식' 시리즈는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인 책이다. 한 눈에 보아도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고 클래식한 색감과 고풍스런 디자인이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빼놓은 수 없는 매력은 '도감'이다. 흡사 백과사전을 펼쳐보는 듯한 세세한 '그림'만으로도 오래된 고전속에서 캐내는 '지적 보물'이 듬뿍 담겨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나기에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여왔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책에 단 하나의 단점을 꼽자면 '값비싼 책값'이다. 멜빌의 <모비 딕>이나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같은 명작은 이 책 이외에도 수많은 책이 있었고, 읽었기 때문에 그만한 값을 치르고 사모으기에는, 솔직히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아셰트클래식'만의 장점을 또 하나 꼽자면 빼어난 '도감'과 더불어서 '원작, 그 잡채'의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명작의 값어치를 제대로 아는 독자들에게는 더할나위없는 훌륭한 시리즈가 될 것이다.

 

  사실, 난 '쥘 베른'의 열렬한 팬이다. 어릴 적부터 과학자의 꿈을 꾸었기에 쥘의 책은 과학지식의 원천이었다. 실제로 쥘의 책은 '경이로운 여행'이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그 여행은 땅 위는 말할 것도 없고, 땅속, 바다, 하늘, 그리고 우주까지 19세기 당시에 '가본 적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말그대로 '경이로움'으로 가득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다. 21세기인 오늘날에는 당연한 일로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100여 년이나 앞서서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쳐내는 드라마틱한 모험담을 술술 써내려갈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현불가능한, 그런 막연한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조목조목 들이대며 '그럴 듯한 상상력'을 펼쳐냈기에 훗날의 과학자들은 '쥘의 소설'을 바탕삼아 그대로 재현하는 '쉬운 업적(?)'을 남긴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를 테면,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책에서 커다란 대포를 만들어서 '텅빈 대포알'을 우주선 삼아 달을 향해 발사하는 황당한 줄거리는 인류 최초로 달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의 궤적과 꼭 닮아 있다. 마치 쥘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살짝 엿보고 돌아온 뒤에 소설을 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쥘의 소설'은 단순한 '공상과학(SF)'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미래과학 교과서'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터다. 물론, 오늘날에는 쥘이 상상한 '미래'조차 과거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의 역사'라는 점에서 쥘의 소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을' 가치가 충분한 소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쥘의 소설'이 읽혀 마땅한 까닭은 수많은 '경이로운 여행'을 성공한 인류가 아직도 속시원히 들여다보지 못한 곳이 남았기 때문이다. 바로 '심해'다. 인류는 아직도 '깊은 바닷속'을 잘 모른다. 아무리 무인탐사정을 띄우는데 성공하고 가장 깊은 바다의 비밀을 들여다봤다고 해도 여전히 인류는 바다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왜냐면 인류는 '수심 200미터', 흔히 말하는 '대륙붕'에서만 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깊은 바다에 '엄청난 자원(망간단괴 등)'이 그냥 뿌려져서 주우면 임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도, 인류는 그 자원을 캐낼 방법조차 찾아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처럼 '지구환경파괴'를 일삼는 인류에겐 영영 손을 댈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냅두고 싶은 심정이지만...암튼 인류는 여전히 '바다'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엄청난 '수압' 때문이다. 바다 밑으로 10미터 내려갈 때마다 1킬로그램의 압력을 견뎌야 한다. 해녀들이 수심 100미터속의 전복과 해삼을 캐낸다면 들어갔다 나올때마다 10킬로그램의 압력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능력이며, 당연히 그런 어마무시한 '조업환경'에서 작업하는 해녀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수심 200미터 내외에서는 이런 악조건을 견디며 작업할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잠수복'이 바로 그 예인데, 이것도 그보다 더 깊은 바닷속에서는 무용지물에 가깝다. 왜냐면 그 아래부터는 햇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깜깜한 암흑속이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조명'에 의해 간신히 어둠을 밝힐 수는 있겠지만, 깜깜한 어둠속에서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서야 고작 한발한발 겨우 발을 내딛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래서야 어디 '정복'했다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쥘은 <해저 2만리>라는 소설을 19세기에 내놓았다. 인류가 고작 '증기기관'에 의지해서 '돛 없는 배'를 망망대해에 띄워을 뿐인 '그 시점'에 쥘은 비록 소설속 공상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나트륨 전지'로 해저 1만미터를 누비는 엄청난 잠수함을 탄생시킨 것이다. 지금으로치면 '원자력잠수함급'이며, 원자력으로 만들어낸 '전기'로 움직이는 잠수함을 탄생시킨 것이다. 물론, 쥘이 살던 시대에도 '잠수함'은 있었다. 하지만 겨우 한두 사람이 탑승해서 발로 패달을 밟아 스크류를 돌려 이동을 하고, 나무로 만든 배의 밑바닥을 '드릴'로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잡한 수준이었는데, '원자력급' 상상력을 발휘해서 바닷속을 누비는 괴물, '노틸러스'를 탄생시킨 것이다. 나 어릴 적에 읽을 때에도 그 기발한 상상력에 혀를 내둘렀는데,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기발함은 정말이지 놀라울 뿐이다.

 

  물론, <해저 2만리>에서 '과학적 관점'으로 팩트체크를 하다보면 수많은 오류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최신잠수함도 겨우 내려보내는데 성공했을 수심 몇 천미터에 꼴랑 잠수복을 입고서 수 킬로미터를 산책(?)하며 바다목장(?)에서 길러낸 참치를 수족관에서 꺼내먹듯 하는 장면이나, 오래전에 수몰되었다는 '아틀린티스'를 굳이 걸어서 탐사하고, 잠수함으로 남극대륙 한복판에서 부상(?)해서 남극점에 도달했다는 묘사, 남극점을 찍고 되돌아오던 중에 '거대한 빙하'에 갇혀 잠수복을 입고 빙하속을 곡괭이로 깨어서 탈출하는 극적인 장면들은 아주 오래된 '깔깔 유머집'에나 나올 법한 웃기지도 않는 대목이긴 하지만, 수천 년전 인류의 유적과 유물을 보면서 '조잡함'보다는 '위대함'을 떠올리는 것을 감안한다면, 비록 '과학적 팩트'에는 위배된 사실일지라도 충분히 감탄할 수 있는 대목으로 미소지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라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독자들이 <해저 2만리>를 읽는다면, '과학적 사실'을 꼼꼼히 따지는 것보다는 '과학에 준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며 가까운 미래의 인류에게 '바다' 또는 '심해'라는 곳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곳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도 좋을 듯 싶다. 특히, 과학의 흥미에 이제 막 눈을 뜬 어린 독자라면 그러한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려주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이고 말이다. 분명 인류는 머지 않은 미래에 '땅'에서보다 더 많은 인류가 '바다'에서 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땅위'가 아닌 '바다위' 또는 '바닷속'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생명의 원천'이 땅이 아닌 바다라는 인식을 더 많이 갖게 될 거란 의미다. 지금도 이미 많은 인류가 '바다'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계 곳곳의 인구 1천만이 넘게 사는 도시들은 바다를 인접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인류의 먹거리 또한 이미 땅보다 바다에서 더 많이 얻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아직도 바다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바다에 대한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살짝 아끼고 싶다. <해저 2만리>의 줄거리와 '네모 선장의 비밀'은 <신비의 섬>에서 따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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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엔 11권의 리뷰쓰기로 마무리하였다.

10권을 넘긴 소소한 성적이지만, 마지막주에 '출판사 교정작업'을 하느라

막판 스퍼트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그로 인해 밀린 리뷰는 9월에 써낼 예정이다.

 

11편의 리뷰를 쓴 것으로도 '분석 데이타'에 큰 변동은 없다.

다만, '읽은책 100%'가 99%로 하락했는데,

이는 '읽은책'만 데이타에 반영하던 것을

앞으로 '읽는책'과 '읽을책'에도 입력한 값으로 인한 변화다.

각각 6권씩 '읽고 있는 책'과 '읽을 예정인 책'을 선별해서 데이타값에 변화를 주었는데,

계획적인 독서와 리뷰쓰기를 하기 위해서다.

이로써 매달 10권 이상의 리뷰쓰기가 목표달성을 이룰 것으로 기대한다.

 

아쉬운 것은 지금 기록하고 있는 '독서앱'으로는

'출판사 집계'와 '글쓴이 집계'가 통계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일이 헤아리는 방법도 있으나, 매번 주먹구구식으로 세기에는 너무 방대하다.

그래서 따로 블로그에 '집계'를 할 방법을 모색중이다.

올해 안에 그 방법을 실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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