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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2만리 ㅣ 아셰트클래식 1
쥘 베른 지음, 쥘베르 모렐 그림,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평점 :
<작가정신>의 '아셰트클래식' 시리즈는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인 책이다. 한 눈에 보아도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고 클래식한 색감과 고풍스런 디자인이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빼놓은 수 없는 매력은 '도감'이다. 흡사 백과사전을 펼쳐보는 듯한 세세한 '그림'만으로도 오래된 고전속에서 캐내는 '지적 보물'이 듬뿍 담겨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나기에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여왔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책에 단 하나의 단점을 꼽자면 '값비싼 책값'이다. 멜빌의 <모비 딕>이나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같은 명작은 이 책 이외에도 수많은 책이 있었고, 읽었기 때문에 그만한 값을 치르고 사모으기에는, 솔직히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아셰트클래식'만의 장점을 또 하나 꼽자면 빼어난 '도감'과 더불어서 '원작, 그 잡채'의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명작의 값어치를 제대로 아는 독자들에게는 더할나위없는 훌륭한 시리즈가 될 것이다.
사실, 난 '쥘 베른'의 열렬한 팬이다. 어릴 적부터 과학자의 꿈을 꾸었기에 쥘의 책은 과학지식의 원천이었다. 실제로 쥘의 책은 '경이로운 여행'이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그 여행은 땅 위는 말할 것도 없고, 땅속, 바다, 하늘, 그리고 우주까지 19세기 당시에 '가본 적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말그대로 '경이로움'으로 가득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다. 21세기인 오늘날에는 당연한 일로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100여 년이나 앞서서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쳐내는 드라마틱한 모험담을 술술 써내려갈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현불가능한, 그런 막연한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조목조목 들이대며 '그럴 듯한 상상력'을 펼쳐냈기에 훗날의 과학자들은 '쥘의 소설'을 바탕삼아 그대로 재현하는 '쉬운 업적(?)'을 남긴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를 테면,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책에서 커다란 대포를 만들어서 '텅빈 대포알'을 우주선 삼아 달을 향해 발사하는 황당한 줄거리는 인류 최초로 달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의 궤적과 꼭 닮아 있다. 마치 쥘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살짝 엿보고 돌아온 뒤에 소설을 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쥘의 소설'은 단순한 '공상과학(SF)'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미래과학 교과서'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터다. 물론, 오늘날에는 쥘이 상상한 '미래'조차 과거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의 역사'라는 점에서 쥘의 소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을' 가치가 충분한 소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쥘의 소설'이 읽혀 마땅한 까닭은 수많은 '경이로운 여행'을 성공한 인류가 아직도 속시원히 들여다보지 못한 곳이 남았기 때문이다. 바로 '심해'다. 인류는 아직도 '깊은 바닷속'을 잘 모른다. 아무리 무인탐사정을 띄우는데 성공하고 가장 깊은 바다의 비밀을 들여다봤다고 해도 여전히 인류는 바다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왜냐면 인류는 '수심 200미터', 흔히 말하는 '대륙붕'에서만 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깊은 바다에 '엄청난 자원(망간단괴 등)'이 그냥 뿌려져서 주우면 임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도, 인류는 그 자원을 캐낼 방법조차 찾아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처럼 '지구환경파괴'를 일삼는 인류에겐 영영 손을 댈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냅두고 싶은 심정이지만...암튼 인류는 여전히 '바다'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엄청난 '수압' 때문이다. 바다 밑으로 10미터 내려갈 때마다 1킬로그램의 압력을 견뎌야 한다. 해녀들이 수심 100미터속의 전복과 해삼을 캐낸다면 들어갔다 나올때마다 10킬로그램의 압력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능력이며, 당연히 그런 어마무시한 '조업환경'에서 작업하는 해녀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수심 200미터 내외에서는 이런 악조건을 견디며 작업할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잠수복'이 바로 그 예인데, 이것도 그보다 더 깊은 바닷속에서는 무용지물에 가깝다. 왜냐면 그 아래부터는 햇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깜깜한 암흑속이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조명'에 의해 간신히 어둠을 밝힐 수는 있겠지만, 깜깜한 어둠속에서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서야 고작 한발한발 겨우 발을 내딛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래서야 어디 '정복'했다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쥘은 <해저 2만리>라는 소설을 19세기에 내놓았다. 인류가 고작 '증기기관'에 의지해서 '돛 없는 배'를 망망대해에 띄워을 뿐인 '그 시점'에 쥘은 비록 소설속 공상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나트륨 전지'로 해저 1만미터를 누비는 엄청난 잠수함을 탄생시킨 것이다. 지금으로치면 '원자력잠수함급'이며, 원자력으로 만들어낸 '전기'로 움직이는 잠수함을 탄생시킨 것이다. 물론, 쥘이 살던 시대에도 '잠수함'은 있었다. 하지만 겨우 한두 사람이 탑승해서 발로 패달을 밟아 스크류를 돌려 이동을 하고, 나무로 만든 배의 밑바닥을 '드릴'로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잡한 수준이었는데, '원자력급' 상상력을 발휘해서 바닷속을 누비는 괴물, '노틸러스'를 탄생시킨 것이다. 나 어릴 적에 읽을 때에도 그 기발한 상상력에 혀를 내둘렀는데,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기발함은 정말이지 놀라울 뿐이다.
물론, <해저 2만리>에서 '과학적 관점'으로 팩트체크를 하다보면 수많은 오류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최신잠수함도 겨우 내려보내는데 성공했을 수심 몇 천미터에 꼴랑 잠수복을 입고서 수 킬로미터를 산책(?)하며 바다목장(?)에서 길러낸 참치를 수족관에서 꺼내먹듯 하는 장면이나, 오래전에 수몰되었다는 '아틀린티스'를 굳이 걸어서 탐사하고, 잠수함으로 남극대륙 한복판에서 부상(?)해서 남극점에 도달했다는 묘사, 남극점을 찍고 되돌아오던 중에 '거대한 빙하'에 갇혀 잠수복을 입고 빙하속을 곡괭이로 깨어서 탈출하는 극적인 장면들은 아주 오래된 '깔깔 유머집'에나 나올 법한 웃기지도 않는 대목이긴 하지만, 수천 년전 인류의 유적과 유물을 보면서 '조잡함'보다는 '위대함'을 떠올리는 것을 감안한다면, 비록 '과학적 팩트'에는 위배된 사실일지라도 충분히 감탄할 수 있는 대목으로 미소지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라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독자들이 <해저 2만리>를 읽는다면, '과학적 사실'을 꼼꼼히 따지는 것보다는 '과학에 준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며 가까운 미래의 인류에게 '바다' 또는 '심해'라는 곳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곳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도 좋을 듯 싶다. 특히, 과학의 흥미에 이제 막 눈을 뜬 어린 독자라면 그러한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려주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이고 말이다. 분명 인류는 머지 않은 미래에 '땅'에서보다 더 많은 인류가 '바다'에서 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땅위'가 아닌 '바다위' 또는 '바닷속'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생명의 원천'이 땅이 아닌 바다라는 인식을 더 많이 갖게 될 거란 의미다. 지금도 이미 많은 인류가 '바다'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계 곳곳의 인구 1천만이 넘게 사는 도시들은 바다를 인접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인류의 먹거리 또한 이미 땅보다 바다에서 더 많이 얻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아직도 바다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바다에 대한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살짝 아끼고 싶다. <해저 2만리>의 줄거리와 '네모 선장의 비밀'은 <신비의 섬>에서 따로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