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 미루는 습관 끊어내는 끝까지 해내기의 기술
피터 홀린스 지음, 솝희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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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중요한 것은 '습관'이다. 거창한 계획을 짜고 화려한 시작을 알리지만 '용두사미'격으로 흐지부지 끝내고 마는 것도 습관이고, 이번에는 꾸준히 하고 부지런히 달리겠다고 다짐하지만 '작심삼일'형으로 중도포기하고 마는 것도 습관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지만 애초에 세운 계획을 끝까지 완수해내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습관'을 바꾸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끝내기 습관'을 갖기 위해선 3가지만 개선해도 충분할 것이다. 첫째는 생각은 그만하고 일단 실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목표를 완수할 때까지 끝없이 동기부여해야 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완수의 걸림돌은 싹 제거하고 날마다 한발짝씩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귀띔을 제공하고 있지만, 위의 3가지가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3가지에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수단은 '선언문 작성', '미루지 않기', '딴짓하지 않기', '과한 목표 세우지 않기' 등이다.

 

  그렇다면 한 번 세운 계획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다름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방법이고 성공하기까지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한 번 시작했다하면 끝을 보고 마는 당차고 성실한 사람에게 '실패'란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했다하면 100% 성공률을 자랑하는 것도 바로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공하는 DNA를 가졌다면 바로 '끝을 보는 습관'이 그 증거일 것이고, 끝을 보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 습관'을 가졌다면 당근 성공하기 마련일 것이다.

 

  이렇게나 '성공비결'이 쉽고도 간결하며 이해하기도 쉬운데 왜 성공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일까? 그게 바로 '끝내기 습관'을 기르기까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제 성공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 '끝장'을 보는 것도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히 '성공'에 다달았다고 모두가 인정할 때까지 '전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적인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누구나 달성하기 쉬운 '단기목표'를 세우고, '완수의 기쁨'을 연속적으로 꾸준하게 만끽하는 것이 비결이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목표를 세우고, 어렵고 복잡한 목표보다는 쉽고 간단한 목표로 세분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그리고 성공비결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멀티테스킹'보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싱글테스킹'에 주력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공할 확률이 40~70% 정도라면 과감하게 추진하고, 이에 미치지 못한 낮은 확률로 '도박'을 하지도 말 것이며, 너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느라 '타이밍'을 놓치지도 말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 허황된 희망에 부풀어 오르지도 말 것이며, 너무 과도한 생각이나 너무 심한 걱정 따위를 할 필요도 없다고 못 박았다. 모두 '완수하는 습관'을 기르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자, 정리하면 성공비결은 간단하다. 끝장을 볼 때까지 멈추지 마라. 완수하는 습관을 들이면 누구나 성공에 도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단 세운 목표는 매일 꾸준히 밀고 나가는 힘이다. 그 힘을 잃지 않는 한 당신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계획한 일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설령 올해 안에 달성하지 못해도 괜찮다. 멈추지 않고 끝까지 해낸다면 당신의 성공습관은 빛나는 결말을 달성할테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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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1 : 구운몽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1
윤병언 글, 정찬호 그림, 손영운 기획, 김만중 원작 / 채우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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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가장 핫한 '애정소설'을 꼽으라면 <춘향전>을 꼽는 이들이 많겠지만, 나는 단연 <구운몽>이라 말할 것이다. 왜냐면 <구운몽>은 로맨스소설 코드의 정석이랄 수 있는 '잘난 남주'와 '예쁜 여주'가 등장하며 잘난 남주는 '하는 일'마다 대성공을 이루어 출세가도를 달리고, 예쁜 여주는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주와 지혜마저 빼어나니 읽는 내내 흐믓하게 읽어낼 수 있어 '최고의 읽는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데도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적절히 녹아 있어 읽고 난 뒤에는 '철학적 사유'까지 즐길 수 있으니 단연 최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대부분 '작가미상'인 한국고전소설에 비해 '서포 김만중'이 임금(숙종)에게 바른말을 간언하다 유배형을 받은 뒤 절해고도에서 홀로 계신 어머님을 위로하기 위해 하룻밤에 지어낸 소설로도 유명하니, '표현론적 관점' 뿐만 아니라 '반영론적 관점'으로도 소설을 감상할 수 있기에 읽는이로 하여금 다채로운 즐거움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거기에 김만중이 이 책 이외에도 <사씨남정기>, <서포만필>과 같은 책들을 펴낸 까닭에 '작가의 생각(의도)'를 비교분석하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으니, 여러 모로 <구운몽>은 읽는 가치와 함께 재미까지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우리 문학인 것이다. 여기에 '순한글문학'으로 펴냈으니 그 가치는 두 말할 것도 없다.

 

  먼저, 장자의 '나비의 꿈'을 이야기 하련다. 바로 '꿈과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깨어보니 자신으로 돌아왔더라는 이야기다. 분명 장자와 나비는 '별개'이건만, 꿈이 진실인지 현실이 진실인지 '분별'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구운몽>에서도 성진은 불가의 몸으로 팔선녀를 희롱한 죄로 '양소유'라는 인간으로 환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동시에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다시 불가의 몸으로 되돌아와 큰 깨달음을 얻고 속세를 떨쳐내고 부처로 귀의하였다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도 완독을 한 뒤에 '성진의 삶'이 진실인지, '양소유의 삶'이 진실인지 속속들이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운몽>은 분명 인간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유쾌한 이야기가 분명하지만, 그렇게 인간세상에서의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이로다는 '색즉시공'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반독자들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온갖 부귀영화가 다 부질없으니 '인생, 뭐 있어? 그냥 즐기는 거야!'라고 살라는 것인지, 만 가지 근심이 허황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무소유의 삶'으로 안분지족하며 살라는 것인지 헷갈리기 딱 좋다. 이를 김만중의 삶에 빗대어 분석한다면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께 충신이 되길 마다하지 않은 결과가 '유배의 삶'이었고, 그 덕분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고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는 '불효의 삶'을 살았으니, 김만중은 실로 '인생무상'을 제대로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관점에서 김만중은 '유학자의 삶'을 살았으나 '불가의 도리'를 깨달아 덧없는 삶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구운몽>은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의 사상이 적절히 배합되어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그중에서도 '입신양명'에 최선을 다하는 유가의 삶과 '색즉시공'의 깨우침을 목표로 삶은 불가의 삶의 '절충'을 모색한 점이 단연 으뜸이다. 도교의 색채는 신선과 선녀의 등장으로 몽환적인 느낌을 극적으로 살려내고, '몽유계 소설'이라는 장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낸 것으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러니 어떤 사상에 더욱 큰 가치를 두고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난 '유교의 코드'로 <구운몽>을 읽어내는 것이 요즘 MZ세대들에게도 취향저격일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의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는 것보다 '하나뿐인 인생'을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싶기 때문이다. 추호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으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 역시 '성진의 삶'보다는 '양소유의 삶'에 더욱 열광하는 독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개 서생에 불과한 양소유가 천부적인 재능을 뽐내며 '하는 일'마다 천복을 누리다 승상의 지위까지 얻어 최고의 명예를 다 누리는 삶을 누가 마다할 것이냔 말이다. 더구나 어여쁘고 어진 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라하고, 절세가인의 부인들이 시기와 질투로 싸우기는커녕 사이좋은 자매처럼 화목하게 지낸다니 '가정의 평화'는 모든 사내가 꿈꾸는 최고의 이상향이며, 그 자녀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니 얼마나 즐거운 소설이냔 말이다.

 

  헌데 말이다. 과연 현실에서 '여덟 명의 아내'가 절세가인의 미모를 갖추고 재벌 못지 않은 부와 유명 아이돌 걸그룹의 멤버일 정도로 재능을 갖추고도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이는 '일부일처제'였던 조선시대에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구중궁궐에 사는 임금도 '수많은 여인네'를 제것(?)처럼 여겼으나 그속에서 피어나는 암투는 늘 피비린내를 풍겼다는 사실만 보아도 비현실적인 요소다. 진정 소설의 허구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한 현실을 꿈결처럼 창조해낸 김만중은 정말이지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속에선 절대로 불가한데도 '현실'처럼 그려놓았으니 얼마나 대단하냔 말이다. 물론 <구운몽>에서 '양소유의 삶'은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런 '비현실적인 요소'쯤이나 얼마든지 허락될 것이다. 여자들도 <꽃보다 남자>과 같은 드라마를 꿈꾸며 빵빵한 꽃미남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비명을 지를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꿈같은 현실은 매정한 현실에선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양소유의 삶'을 꿈꾸며 '성진의 삶'에 깊은 고민을 더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디까지가 나에게 허용된 '욕심'인가? 따위의 고민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은 욕심이 과해서 '무욕의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깨닫기보다는 더이상 버릴 욕심조차 없는 '무소유의 삶'을 강제하기에 욕심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비극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지금 사는 현실은 10억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매주 로또를 구매하는 '200만원짜리 인생'을 살지만, 가혹한 현실은 10억이 없으면 살맛조차 느낄 수 없게 만들어 '실현되지 않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마는 비극의 연속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진의 삶'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한낯 꿈에 불과한 '10억짜리 인생' 따위는 잊고 내 수준에 딱 맞는 '타협의 삶'을 최선을 다해 즐길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양소유의 삶'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비록 이번 생은 '성진의 삶'을 살 운명일지라도, 운명처럼 찾아오는 '양소유의 삶'이 끝자락일지언정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그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은 '팔선녀의 아내'를 맞이할 수 없어도 '팔선녀' 같은 하나 뿐인 아내와 함께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가끔 선녀처럼 보이지 않으면 어떤가. 가끔일망정 선녀처럼 보이는 마누라도 없이 쓸쓸이 늙어가는 나도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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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리우바 가브리엘레 지음, 천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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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그림책'으로 엮어낸 책으로 소개하면 좋을 듯 싶다. 요즘엔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느 그래픽노블보다 훨씬 '색채감'이 뛰어나기 때문에 100여 쪽에 달하는 그림책으로 소개해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책 읽는 부담은 한껏 낮추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을 읽어나갈 마중물로 삼기에 딱 적당한 느낌이었다. 사실 아직까지 그녀의 책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편집>으로는 몇몇 작품을 읽어보긴 했지만, 그녀의 대표적인 소설을 차마 읽지는 못했다. 왜냐면 그녀가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우울한 성향을 갖고 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심한 사람과 친해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때는 '조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쾌활한 성향을 내비치다가도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한없이 침울해져서 주위의 사람들까지 '전염'시켜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멜랑꼴리한 여친과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 근데 그런 사랑을 내가 했다. 그것도 끝내는 짝사랑으로 말이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장'이 없던 그녀와 끝을 내는 것이 그렇게나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소설에서 '우울했던 그녀'를 발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분위기는 시종 우울하다. 색감에서 느껴지기도 하고, '무표정'한 모습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생애가 그러했기에 거부감은 없었다. 책의 내용은 그녀가 '동성애' 상대였다는 '비타 색빌웨스트'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평생을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다던 그녀도 '뜨거운 사랑'을 나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면서 그녀에게도 '사람냄새'가 나기도 했을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비록 그녀만을 바라봤던 남편과 나눈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녀도 가슴 뜨겁게 사랑할 줄 아는 '평범한 여자'였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뜨거웠는데 버지니아는 '버림'을 받았고, 끝내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는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안타깝다기보다는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결말이라는 엉뚱한 느낌이 들고 말았다. 왜냐면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는 원래 그런 것 같기에 말이다. 허나 이런 엉뚱한 느낌은 내가 아직 그녀의 소설들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테다.

 

  이제 그녀의 소설속에서 그 까닭을 찾아보고자 한다. 물론 목적은 '버지니아 울프=우울=자살'이라는 등식을 깨버리기 위해서다. 한 여자의 생애를 아름답게 만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온통 차갑고 어둡게 만들기는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도 가슴 따뜻한 여인이었음으로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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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 열하일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박교영 글, 박수로 그림, 손영운 기획, 박지원 원작 / 채우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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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오랑캐에게 굴복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조선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쪽으로 북벌의 명분을 세워야 마땅하거늘, 엉뚱하게도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의리'를 다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북벌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이른바 '사대주의'다. 허나 실상은 '주인'을 잃은 강아지마냥 큰 개 앞에서 물지도 못하고 앙앙 짖어대는 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이것이 더욱 치욕스럽다. 자존심도 없고 자립심도 없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이르렀는데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모양이다. 명을 대신해서 강성해진 청에게 '사대'를 하더니, 열강의 강탈 앞에 청나라도 맥을 못추게 되니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일본이 패망하니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더니, 명실공히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에 아직도 '친일파'가 득세하고, '친미파'가 권세를 누리는 형국이니 말이다.

 

  애초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사대주의'를 표방한 것은 큰 나라를 '견재'하기 위한 술책이었을 뿐인데, 지배층인 사대부가 큰 뜻을 품기는커녕 점점 나약해지다가 끝내는 '붕당'을 이루어 사단칠정 따위의 뜬구름만 잡기에 이르니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쳐 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도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결국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앞서 말한 '자존심'도 버리고 '자립심'도 내다버리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 멍멍 짖어대는 바로 그 '개나리'들이 말이다.

 

  이런 무능한 집권층을 한껏 비웃어주고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위대한 풍자가가 있었으니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시험 따위는 집어치우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기로 한다. 영조로부터 친히 칭찬을 들으며 과거를 보아 급제하라고 권할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과거장에 들어선 그가 목격한 것은 벼슬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현장이었으며, 온갖 부정행위를 눈감아주는 난장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도 억지로 주위에서 떠미니 과거장에 다시 들어가긴 했으나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답안지에 수묵화를 그려내고 뛰쳐나와 버렸단다. 애써 벼슬자리에 오른다하더라도 썩은내 풀풀나는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기도 싫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북학'을 주장하는 까닭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바로 손자병법에도 나온 '적을 이기기 위해선 필히 적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들은 말로는 치욕을 씻고 오랑캐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하면서, 청나라의 홍이포에 대적할 변변한 '기술력'조차 갖추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정예병인 '팔기군'을 상대하려면 '기마부대'를 양성하고, '기마술'을 단련해야 할텐데, 그 기본이 될 '준마'를 기르기를 게을리해서 겨우 '조랑말'로 하루 반나절밖에 달리지 못하는 기병에, 소매는 넓고 바짓단은 치렁해서 혼자서는 절대 말을 몰지 못하는 양반네들이 대다수인데도, 입만 열만 '북벌'을 외치고, 명나라에 '보은'하자고 나불댄다. 다 부질없는 소리다. 청나라를 이기자면 청나라를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옳은 방법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박지원이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단에 꼽사리 낄 수 있게 되어 여행을 했다가 기록을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보통은 황제가 북경에 머물고 있으니 대부분의 조선사신단이 다녀온 뒤에 쓴 기록은 <연행일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박지원이 사신을 갈 때에는 황제가 더위를 피해 '열하'로 피서를 갔기 때문에 조선사신단도 덩달아서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박지원은 다른 사신단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오게 되는 행운까지 얻게 되었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다른 기록보다 더욱 많은 견문을 담을 수 있었다.

 

  허나 보고 들은 것이 더 많은 것보다 <열하일기>가 소중한 까닭은 연암의 문체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대부들이 쓰던 방식은 '고전체'라고 해서 옛 경전을 따라 쓰는 것을 최고로 쳤다. 허나 이런 글을 읽기에 너무 딱딱해서 금방 지루하고 따분해지는 경향이라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고루한 지식인들의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였을 것이다. 허나 '연암체'는 달랐다. 억지로 점잖고 고상한 체하기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듯 써냈으니 얼마나 읽기에도 시원시원하고, 엣 중국의 것을 빗대어 표현하기보다는 당시 '조선의 현재'를 [날것, 그대로] 가감없이 속시원히 써내렸고, 거기에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얼마나 신선했겠느냔 말이다. 이런 '연암체'로 쓰여진 <열하일기>는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너무 많은 인기탓에 '베껴쓰기'로 유통이 되니 가히 '조선의 르네상스(문예부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암체는 곧 명맥이 끊기고 만다. 권좌의 불안함을 '반듯함'으로 자리보전하던 정조가 '문체반정'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문체반정이란 '패관문학' 같은 잡스런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오직 '고전체'만을 바른형식이라고 못박아 버린 것을 일컫는다. 정조는 박지원에게도 두 번 다시 '연암체'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지 않으면 벌을 내릴 것이고, 맹세를 한다면 벼슬을 내리겠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연암이 연암스럽지 않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 뒤로 '연암체'를 따라쓰지 못하니 제대로 부흥하지도 못하고 '조선의 문학'은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북학'도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흐지부지 사그라들게 된 것이다. 정조의 이른 죽음과 '세도정치의 폐단'이 조선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더니 끝내 근대화가 움트던 시기에 일제에게 더욱더 치욕스런 강제병탄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열하일기>는 다양한 관점으로 읽기를 거듭해야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조선 양반들의 무능함'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유쾌함 뿐이지만, 조금만 곱씹어보면 그속에 '조선의 미래'를 위해 꼭 해야만 할 것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에도 매우 중요하다. '북학파'를 재조명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 이용후생(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도구나 물건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쓴다), 실사구시(이론만이 아닌 실제 경험과 사실을 통해 진리를 탐구한다) 같은 당시의 구호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당시 조선 사대부의 무능은 '사물의 이치'에 통달했다면서 입으로만 나불대고, 실제로 검증하고 '팩트체크'를 하자고 하면 궤변을 늘어놓거나 '권위'를 앞세워 윽박지르기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일본 핵오염수'가 위험하다고 지적하면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검증되었다고 미친소리만 늘어놓다가 '직접 떠다가' 마셔보라고 하면,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내보내는 폐수가 더 위험한대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다고 딴소리하고, 중국이 오래전부터 핵오염수를 방류해서 서해바다가 오염되었는데도 그동안 잘 먹어오지 않았느냐면서 헛소리를 지껄이고만 있다. 오늘날에 연암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가 쓴 <호질>에는 북곽선생과 과부 동리자와 그의 어리석은 다섯 아들을 '누구'에 빗대어 썼을지 몹시 궁금하다. <허생전>에서 이완대장은 현재의 누가 제격일까? 그리고 <광문자전>과 <예덕선생전>은 어느 분에게 걸맞는 이야기일까?

 

  그러고 보니 누군가 그랬다. 시절이 어지러울 때 '남의 고전'에서 지혜를 얻으려 들지 말고, '우리 고전'에서 지혜를 찾으라고 말이다. 우리 현실에 딱맞는 열쇠는 우리의 선조들이 미리 만들어 두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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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무지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알랭 바디우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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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하건데 나 역시 '철학적 사유'가 쉽지는 않다. 허나 철학도 읽다보면 그닥 어렵지 않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철학 따위가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철학자, 그들'이 쓰는 용어가 낯설기 때문이다. 일상용어와는 사뭇 다른 뜻을 지니고, 단어만 보아서는 그 뜻을 쉬이 짐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심리학'의 관점에서 과학적 연구를 거듭한 분야인 까닭에 정신분석적인 용어도 '철학용어'만큼 낯설고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을 포함한 [Umbr(a)](이하 '엄브라') 시리즈도 정신분석학의 대가들이 참여하였기에 꽤나 난해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독자들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지만, 그속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고민하던 내용들이 촘촘히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리뷰도 그런 발견의 일부로 봐주면 좋겠다.

 

  대한민국은 때아닌 '검찰공화국'을 경험하고 있다. 바로 검사출신 대통령이 출현했기 때문인데 이런 '법조인 출신'이 정치를 하니 대한민국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일명 '눈 떠보니 후진국'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 셈이다. 분명 판검사 나으리가 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하고 어릴 적부터 수재소리를 듣던 '똑똑한 양반'임에 틀림없을 텐데, 어째 하는 일마다 '얼뜨기'처럼 엉망이고, 잘 하는 것이라곤 '저들만의 세상'을 만드는 재주 뿐이란 말이냐. 어느 방송인의 말마따나 앞으로 대한민국 정치에서 '검사출신'은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속내가 얼마나 시커먼지 이번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뼈저리게 느꼈을테니 말이다.

 

  이 책의 핵심은 제목에 있다. 책 내용의 '현란함'이 결국 '제목'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법의 무지'는 '법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이고, 동시에 '법은 오직 '사건의 경위'만을 따질 뿐, '개인의 사정'에는 눈을 감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법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우리는 '법이 공정하다'고 느끼게 된다. 개개인의 사정에 무지하고 오직 사안에만 집중해서 법을 어겼으면 벌을 주고, 법을 어겼다고 보기 어려우면 무죄를 선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법적 판결'이 이상하다고 느끼곤 한다. 분명 사형을 받아 마땅한 범죄인이 지난한 법정다툼을 거쳐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아 뻔뻔스럽게도 고개를 쳐들고 부끄럼도 없이 당당한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반성의 기미는커녕 도리어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공공연하게 밝히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희화화한 <시카고>라는 뮤지컬을 관람하기도 하잖느냔 말이다. 반면에 우발적인 범죄를 저질렀을 뿐인데 너무나도 과한 형벌을 받는 억울한 이들도 많고, 자신보다 남을 위하고 사리사욕을 버리고 나라사랑을 더 많이 했을 뿐인데 부정한 정치인의 '표적수사'의 희생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법을 공정하다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뜻밖에도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오히려 '법을 악용'하는 사례가 넘치도록 많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법의 판결'에 순순히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다. 법은 우리 모두가 합의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따라야만 하고, 만약 법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폐기하거나 고쳐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도 '악법도 법이다'라면서 자신에게 언도된 부당한 판결에 당당히 맞서 독배를 마셨다. 이는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를 죽게 만든 법은 '악법'이 틀림없으니 마땅히 고쳐야 한다는 의미였고, 법을 악용해서 선량한 희생자를 만든 '장본인'들을 더욱더 부끄럽게 만드는 대철학자의 용기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게 되면, 우리는 법 자체의 문제점보다 '법을 다루는 사람'에게 문제가 더 많음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법의 무지'는 법에 관해서 무지한 사람들 앞에서 버젓이 법을 악용하는 세력이 진짜 나쁜 놈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의외로 법에 무관심하며 '법적절차'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기 늘 속고 당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법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법에 대해서 잘 아는 국민 앞에서는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지녔다한들 '법조인 관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좀처럼 해결하기 쉽지 않은 까닭은 '법률용어'가 너무 난해하다는데 있다. 또한 '법적절차'가 대부분 오랜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반짝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들 대다수가 생업으로 먹고 살기 바쁜데 언제 일일이 '법조항과 절차'를 속속들이 따져가며 지켜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법조인들의 사기행각'과 '국민들을 우롱하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날 뿐이다. 과정을 감추고 결과만 통보하는 일이 계속 반복하니 몇몇 식견있는 국민들의 반발이 먹혀 들어가겠느냔 말이다.

 

  그럼 효과적인 대안은 없는 걸까? 대다수의 국민들이 '법에 관해 무지'하고, 법조인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과정은 쉬쉬하고 결과만 통보하는 꼼수 앞에 선량한 국민들은 그저 '눈 뜨고 코 베는 일'을 그저 당하고만 있어야 하느냔 말이다. 더구나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 입장에서 시시콜콜히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그럴 때 유일한 방법은 딱 하나다. 결과를 통보할 때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명명백백한 시비를 가리도록 '요구'하는 일이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재차', '삼차', '사차'...온국민들이 이해할 때까지 '해명'하도록 요구하는 일이다. 그 결과에 만족하는 국민들이 과반이 넘을 때까지 국가는 의무적으로 해명해야 한다고 확답을 받아내야 한다. 그럼 적어도 '꼼수'는 부릴 수 없을 것이다. 비열한 '정적 죽이기'로 멀쩡한 법을 악용하는 일도 근절될 것이다.

 

  그럼에도 애매한 일은 여전할 것이다. 이 책에서도 사례를 들고 있는 '안티고네의 비극'처럼 말이다. 국법을 따르자니 천륜을 어기게 되고, 인간답게 행동하려니 조국을 배신하게 되는 일 앞에 우리는 '어떤 선택이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 책의 '정신분석적인 내용들'은 대부분 이렇게 애매모호한 사항에 대한 '가치관 논쟁'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논쟁의 결은 죄다 '철학적 사유'로 도배했다. 그러니 일반독자들은 철학논쟁에서 살짝 비켜나서 일상에서 일어날 법한 예시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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