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 열하일기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박교영 글, 박수로 그림, 손영운 기획, 박지원 원작 / 채우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조선은 오랑캐에게 굴복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조선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쪽으로 북벌의 명분을 세워야 마땅하거늘, 엉뚱하게도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의리'를 다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북벌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이른바 '사대주의'다. 허나 실상은 '주인'을 잃은 강아지마냥 큰 개 앞에서 물지도 못하고 앙앙 짖어대는 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이것이 더욱 치욕스럽다. 자존심도 없고 자립심도 없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이르렀는데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모양이다. 명을 대신해서 강성해진 청에게 '사대'를 하더니, 열강의 강탈 앞에 청나라도 맥을 못추게 되니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일본이 패망하니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더니, 명실공히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에 아직도 '친일파'가 득세하고, '친미파'가 권세를 누리는 형국이니 말이다.
애초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사대주의'를 표방한 것은 큰 나라를 '견재'하기 위한 술책이었을 뿐인데, 지배층인 사대부가 큰 뜻을 품기는커녕 점점 나약해지다가 끝내는 '붕당'을 이루어 사단칠정 따위의 뜬구름만 잡기에 이르니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쳐 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도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결국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앞서 말한 '자존심'도 버리고 '자립심'도 내다버리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 멍멍 짖어대는 바로 그 '개나리'들이 말이다.
이런 무능한 집권층을 한껏 비웃어주고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위대한 풍자가가 있었으니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시험 따위는 집어치우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기로 한다. 영조로부터 친히 칭찬을 들으며 과거를 보아 급제하라고 권할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과거장에 들어선 그가 목격한 것은 벼슬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현장이었으며, 온갖 부정행위를 눈감아주는 난장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도 억지로 주위에서 떠미니 과거장에 다시 들어가긴 했으나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답안지에 수묵화를 그려내고 뛰쳐나와 버렸단다. 애써 벼슬자리에 오른다하더라도 썩은내 풀풀나는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기도 싫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북학'을 주장하는 까닭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바로 손자병법에도 나온 '적을 이기기 위해선 필히 적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들은 말로는 치욕을 씻고 오랑캐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하면서, 청나라의 홍이포에 대적할 변변한 '기술력'조차 갖추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정예병인 '팔기군'을 상대하려면 '기마부대'를 양성하고, '기마술'을 단련해야 할텐데, 그 기본이 될 '준마'를 기르기를 게을리해서 겨우 '조랑말'로 하루 반나절밖에 달리지 못하는 기병에, 소매는 넓고 바짓단은 치렁해서 혼자서는 절대 말을 몰지 못하는 양반네들이 대다수인데도, 입만 열만 '북벌'을 외치고, 명나라에 '보은'하자고 나불댄다. 다 부질없는 소리다. 청나라를 이기자면 청나라를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옳은 방법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박지원이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단에 꼽사리 낄 수 있게 되어 여행을 했다가 기록을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보통은 황제가 북경에 머물고 있으니 대부분의 조선사신단이 다녀온 뒤에 쓴 기록은 <연행일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박지원이 사신을 갈 때에는 황제가 더위를 피해 '열하'로 피서를 갔기 때문에 조선사신단도 덩달아서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박지원은 다른 사신단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오게 되는 행운까지 얻게 되었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다른 기록보다 더욱 많은 견문을 담을 수 있었다.
허나 보고 들은 것이 더 많은 것보다 <열하일기>가 소중한 까닭은 연암의 문체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대부들이 쓰던 방식은 '고전체'라고 해서 옛 경전을 따라 쓰는 것을 최고로 쳤다. 허나 이런 글을 읽기에 너무 딱딱해서 금방 지루하고 따분해지는 경향이라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고루한 지식인들의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였을 것이다. 허나 '연암체'는 달랐다. 억지로 점잖고 고상한 체하기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듯 써냈으니 얼마나 읽기에도 시원시원하고, 엣 중국의 것을 빗대어 표현하기보다는 당시 '조선의 현재'를 [날것, 그대로] 가감없이 속시원히 써내렸고, 거기에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얼마나 신선했겠느냔 말이다. 이런 '연암체'로 쓰여진 <열하일기>는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너무 많은 인기탓에 '베껴쓰기'로 유통이 되니 가히 '조선의 르네상스(문예부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암체는 곧 명맥이 끊기고 만다. 권좌의 불안함을 '반듯함'으로 자리보전하던 정조가 '문체반정'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문체반정이란 '패관문학' 같은 잡스런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오직 '고전체'만을 바른형식이라고 못박아 버린 것을 일컫는다. 정조는 박지원에게도 두 번 다시 '연암체'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지 않으면 벌을 내릴 것이고, 맹세를 한다면 벼슬을 내리겠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연암이 연암스럽지 않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 뒤로 '연암체'를 따라쓰지 못하니 제대로 부흥하지도 못하고 '조선의 문학'은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북학'도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흐지부지 사그라들게 된 것이다. 정조의 이른 죽음과 '세도정치의 폐단'이 조선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더니 끝내 근대화가 움트던 시기에 일제에게 더욱더 치욕스런 강제병탄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열하일기>는 다양한 관점으로 읽기를 거듭해야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조선 양반들의 무능함'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유쾌함 뿐이지만, 조금만 곱씹어보면 그속에 '조선의 미래'를 위해 꼭 해야만 할 것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에도 매우 중요하다. '북학파'를 재조명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 이용후생(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도구나 물건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쓴다), 실사구시(이론만이 아닌 실제 경험과 사실을 통해 진리를 탐구한다) 같은 당시의 구호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당시 조선 사대부의 무능은 '사물의 이치'에 통달했다면서 입으로만 나불대고, 실제로 검증하고 '팩트체크'를 하자고 하면 궤변을 늘어놓거나 '권위'를 앞세워 윽박지르기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일본 핵오염수'가 위험하다고 지적하면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검증되었다고 미친소리만 늘어놓다가 '직접 떠다가' 마셔보라고 하면,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내보내는 폐수가 더 위험한대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다고 딴소리하고, 중국이 오래전부터 핵오염수를 방류해서 서해바다가 오염되었는데도 그동안 잘 먹어오지 않았느냐면서 헛소리를 지껄이고만 있다. 오늘날에 연암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가 쓴 <호질>에는 북곽선생과 과부 동리자와 그의 어리석은 다섯 아들을 '누구'에 빗대어 썼을지 몹시 궁금하다. <허생전>에서 이완대장은 현재의 누가 제격일까? 그리고 <광문자전>과 <예덕선생전>은 어느 분에게 걸맞는 이야기일까?
그러고 보니 누군가 그랬다. 시절이 어지러울 때 '남의 고전'에서 지혜를 얻으려 들지 말고, '우리 고전'에서 지혜를 찾으라고 말이다. 우리 현실에 딱맞는 열쇠는 우리의 선조들이 미리 만들어 두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