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5 -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의 대격변 시대 벌거벗은 세계사 5
최호정 그림, 김우람 글, 조한욱.김대보 감수,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기획 / 아울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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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을 집중조명 해본다. 이 두 인물이 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말이 있는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드세요"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이다. 사실 두 말은 모두 '가짜'에 가깝다. 다시 말해 두 인물이 직접적으로 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들이 전해지는 것일까? 그건 바로 '군중'이 두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했는지 진위여부와는 상관없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자연스런 흐름이 두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편, 프랑스 혁명은 기존의 계급사회(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혁명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혁명정신으로 '자유, 평등, 박애(형제애)'라는 세 가지를 내세우며 국가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질서체계인 '공화제'에 대한 민중의 열의를 잘 드러내주었다. 그 과도기적인 혁명 와중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나갔으며, '나폴레옹'은 제3신분(평민)으로 왕이 사라진 혼란한 정국의 안정시키는 영웅으로 등장했다가 황제의 자리에서 몰락하고 만다. 그런 까닭에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프랑스 혁명'을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어린이책'이다.

 

  그렇다면 어린이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달달 암기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또한 '미래 예측'을 위해서 과거를 분석하는 것도 어린이들에게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어린이들이 '역사적 사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딱 두 가지다. 바로 '역사적 사실'이 지닌 의미를 알고, '역사적 인물'의 삶을 통해 꿈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인류의 발자취를 통해 인간이 저지른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게 되면 어른들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이치를 깨닫게 되고, 그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명한 인물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삶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고, 어떤 삶이 가치가 있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 역사책은 '사건'과 '인물'을 적절히 조율하면서 이해하기 쉽게 구성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떻게 조명하면 좋을 것인가? 역사에서 다루는 '여성'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역사가 '남성중심'적이라는 그릇된 편견으로 오래도록 써왔다는 비판으로 시작해서,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여성'에 관한 올바른 시선까지 자세하게 풀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성편향적인 관점'은 또다른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게 되므로 지양해야 하며, 늘 '양성평등적인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을 가르지 않는 똑같은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조명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시 프랑스 사회가 얼마나 '잘못된 시선'으로 평가를 받았는지 살펴보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속에서도 단지 '여성',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편,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인지, 아니면 탐욕스런 권력욕만 가득한 잔혹한 독재자인지 조명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스런 정치국면을 빠르게 안정시킨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리더)였으며, 외국의 침공을 무수히 막아낸 구국의 영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총제, 집정관, 그리고 황제의 자리를 장기간 차지하면서 저지른 끔찍한 학살과 반대파를 향한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자행한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물론 한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 '일부분'만 가지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너무 극단적인 '두 가지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나폴레옹 같은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준점'을 정하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자유, 평등, 박애'였고, 이를 내세워 주변국 민중들에게 널리 전파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던 점에서 평가를 내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나폴레옹이 혁명군의 수장이 되어 주변국의 민중을 해방시키는 목적을 내세워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런 영웅조차 '권력의 맛'을 본 뒤의 행동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만행들이었다. 황제가 되고 싶다는 욕심에 '가짜뉴스'를 퍼뜨려 민중의 인기를 끌어모으는데만 신경 쓴 탓에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숙청해버리는 모습이나, 프랑스가 식민통치하고 있는 나라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고, 자신의 군대를 앞세워 다른 나라의 왕위를 빼앗아놓고도 저항을 하면 어김없이 탄압하고 목숨을 빼앗는 짓거리를 서슴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신나간 독재자가 분명하다. 이런 독재자에게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정신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나폴레옹은 애초부터 '혁명정신의 수호자'라기보다는 그저 '신분상승'에 눈 멀어 오직 '권력욕'만을 탐한 독재자였다는 평가가 정당할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 인물을 집중조명할 때에는 '명백한 기준'을 정하고 '날카로운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겐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단지 부자가 되어 풍요롭고 안락한 생을 꿈꾸는 것이 아닌 '진짜 인생'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역사의 수많은 전쟁영웅들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시대를 겪었기에 나타났을 뿐이다. 그런 혼란스런 시대에도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모두를 위한 고귀한 희생'을 선택한 인물들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그런 영웅들은 평화로운 시대에서도 정의롭고 도덕적으로 살아갔을 것이라고 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그런 영웅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게 '역사'를 잘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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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7 : 망촉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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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유비에게 머물고 다스릴 영지가 마련되었다. 오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세상을 만들 터전이 생긴 것이다. 바로 '형주'다. 조조의 100만 대군에 맞서 유비와 손권은 손을 잡고 '불의'에 맞선 다음에 유비가 갖게 된 영지인 셈인데, 실상을 좀 들여다보면, '적벽대전'은 결국 '조조 vs 손권'의 싸움이었는데, 싸움의 패자인 조조는 수많은 군대와 강남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잃은데 반해, 싸움의 승자인 손권은 조조의 세력을 '강북(장강 이북)'으로 내몰았을 뿐,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되었다. 옛 유표의 영지였던 '형주땅(양양, 강릉, 강하 등등)'은 유비가 홀랑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적벽의 승리'는 손권, 혼자만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유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지만, 손권으로서는 큰 승리의 대가로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되었으니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유비가 애써 얻은 '형주땅'은 온전히 자신의 땅이 아닌 손권에게서 '빌려 왔다'는 형태로 끝을 맺게 된다. 훗날 유비가 '촉땅(익주)'을 얻을 때까지 말이다. 유비와 손권이 서로 불화를 겪게 될 빌미가 된 사연이다. 암튼, 유비는 '형주'를 발판 삼아 제갈량이 구상했다고 전해지는 '천하삼분지계'를 실현시키려 한다. 비로소 '위촉오, 삼국의 시대'가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하지만 '천하삼분지계'는 좋은 구상은 아니었다. 앞으로 유비가 얻게 될 '촉땅'은 조조가 차지한 중원땅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고, 험한 지세로 가로막혀 있어 '한 번 들어가면' 좀처럼 바깥으로 나오기 힘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좋은 땅'은 이미 조조와 손권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마당에 유비가 뒤늦게 발판을 마련한 것도 너무 늦은 감이 든다. 그런 까닭에 유비에게 '형주땅'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바로 '외진 촉땅'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비록 촉의 북쪽에 있는 '한중땅'이 있기는 했지만, 그쪽도 결국엔 '조조의 세력'이 선점을 해버린 까닭에 유비는 애써 얻은 촉땅이건만 뻗어 나갈 수 있는 '문'이 꼭 닫혀진 셈이다. 나중 일이긴 하지만, 유비와 조조가 죽은 뒤에는 더욱더 꽉 막힌 형세가 유지되고, 촉과 동오의 관계가 험악해진 까닭에 '제갈량의 출사표'는 유명무실해질 뿐이었다. 그 까닭은 바로 '인재의 부족'에 원인이 있다. 애써 땅을 얻었지만 그 땅을 다스리고 지켜낼 '사람'이 부족해진 촉은 너무나도 불리한 형세에 놓이게 된 셈이다. 그런 까닭에 '천하삼분'이란 이름은 그저 이름에 그쳐 버리고 '한나라'는 멸망의 절차를 밟게 될 뿐이다. 그리고 뒤이어 펼쳐진 '위진남북조', '5호16국' 시대는 그야말로 대혼란의 시대였다.

 

  어쨌든,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면, '적벽대전'을 거쳐 '유비의 혼인', '마등의 죽음', 그리고 '유비의 입촉'까지 펼쳐진다.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받아 마땅한 이는 '어린 봉황(봉추)'이라 불리는 '방통'이다.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도착했을 때 사마휘가 "와룡과 봉추 중 하나라도 얻게 된다면 천하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하지만 유비의 입촉 과정중에 방통은 '낙봉파'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람이 태부족한 유비의 세력에겐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던 셈이다. 방통이 온전히 살아서 유비의 입촉을 도왔다면, 촉땅엔 제갈량이, 형주엔 방통이 머물면서 온전히 지켜냄은 물론이고, 훗날 유비가 중원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화수분'처럼 쏟아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정을 취하고서 북쪽의 '한중땅'을 넘어 중원의 서쪽과 남쪽에서 조조 세력을 공략했으면 빵빵한 물자를 바탕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위엄도 충분히 뿜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도 '유비가 오래 살았다'는 가정하에서나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면 유비가 겪는 인재부족은 그의 아들인 '아두의 모지람'이 최정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아비의 성품을 반의 반만이라도 갖췄다면 좋았을 것을 애초의 그릇이 작은 탓에 제갈량조차 십분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방통의 이른 죽음'으로 벌어진 일이니, 그의 죽음이 더욱더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 더욱 어이 없던 죽음은 바로 '주유와 마등의 죽음'이다. 주유는 제갈량과 더불어 적벽의 대승리를 거두는 일등공신이었건만, 속이 너무 좁은 인물이었다. 특히 자신의 재능보다 더한 제갈량의 재능을 시기하고 질투한 덕분에 제 명을 다 살지도 못하고 죽은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기 마련인 것을 어찌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능력'을 질투하고,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죽는단 말인가. 만년 2인자로 살아야만 했던 '폭풍저그 홍진호'도 자신의 능력을 '스타크래프트'라는 한계에 가두지 않고 프로게이머를 넘어 다양한 재능을 펼치며 '화려한 재기'를 보여주고 있건만, 어찌하여 주유는 오직 제갈량이라는 산을 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속좁게 운명을 한줌의 재로 불사르고 말았느냔 말이다. 오나라에 주유보다 못한 인물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 인물도 제각기 능력을 발휘하며 오래오래 살았건만, 주유는 그러지 못했으니 속좁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등은 서량땅에서 힘을 길러 '헌제의 밀지'를 받아 역적 조조를 죽일 수 있는 명분을 얻었는데도 조조가 펼쳐놓은 '그물망'을 피하지 못하고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마초'는 아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한순간이나마 조조를 궁지로 내모는 역량을 발휘했으나, 지혜가 부족한 탓에 '조조의 모사꾼들'에게 휘둘리다가 마등과 의형제를 맺은 한수와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스스로 몰락하고 만다. 훗날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복수를 하려 들지만 그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만다.

 

  어찌 이야기를 풀어내다보니 어느덧 <삼국지>도 종반을 향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은 하나둘 떠나보낼 시간이 된 것이다. 다음 이야기부터는 본격적인 '위촉오, 삼국의 시대'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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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펭귄클래식 48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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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한 개인이 국가 전체를 뒤집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테니, 이를 태면, 혹시라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집단'이 생긴다면, 국가는 그 '집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국가 전복위험성'이 짙은 사안들을 거르고 골라서 국가의 평화와 국민들의 안녕을 해친다는 죄를 물어 단죄하는 것은 정당한걸까? 만약 그것이 정당하다면, 그런 집단을 색출해내기 위해 반항적인 국민들이 발생할 가능성을 애초에 막기 위해 철저한 '감시사회'를 만드는 것도 용인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온국민의 손발놀림 하나하나를 모조리 CCTV로 '지켜보고' 도청장치로 '엿듣는' 단 말이다. 사생활이 보호받아야 마땅한 '장소'까지 빠짐없이 말이다. 조지 오웰은 그런 '감시사회'를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려냈다. 소설 <1984>가 바로 그렇다.

 

  이 책이 오웰의 유고작인 것도 눈여겨볼 만하겠지만, 책이 출간된 해가 1949년이라는 사실도 꽤 중요해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냉전시대'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 진영'이 서로 대립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영국사람'인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당연히 '공산주의(사회주의)'일 것으로 보이지만, 소설속의 배경은 의외로 '영국'이었다. 분명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자본주의 진영'이었음에도 오웰은 '영국'을 감시사회의 최정점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웰은 전후복구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영국 사회의 혼란'과 '무능력함'을 비꼬기 위해서 이런 소설을 구상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런 질문에도 의아함은 여전히 남는다. 소설속의 '절대권력'을 쥐고 흔드는 권력자는 '공산주의'를 딱히 옹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나치즘'을 비롯한 '파시즘', '군국주의'를 아우르는 '전체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일까? 소설 속에서 '런던'은 [오세아니아]에 속했고, [오세아니아]와 전쟁을 벌이던 상대는 [유라시아]였다. 하지만 소설 중반을 넘어서면 [오세아니아]는 상대를 바꾸어 [동아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그러다 막판이 되면 [유라시아]와 다시 전쟁을 벌이는 혼란스런 상황이 펼쳐진다. 하지만 전세계가 '세 개의 대륙'으로 쪼개지거나 누구와 누구가 싸우는 것도 왜 싸우는지도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벌이는 전쟁은 단순히 저마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소모전'일 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전쟁을 통해 국민들을 불안감에 빠뜨리고 위기감을 조성하고서 '집권당'에 비판하는 세력을 견제하고 온국민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은 서로를 향해 큰 피해를 주지도 않으면서 전투를 치루며 그저 '끊임없는 소모'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불안요소를 만들어 '권력'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이 전하는 전황 소식은 꽤나 심각하게 전해진다. 그래야 국민들이 적절한 불안감에 빠져 '빈곤한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심각한 불평등을 조장해도 국민들이 불평불만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1984>에서는 국민들이 '무식'한 채로 살아가는 것을 그냥 방치할 뿐이다. 왜냐면 그것이 '장기집권'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속에서 권력을 차지한 '내부당'의 일인자는 '무지는 힘', '자유는 속박', '전쟁은 평화' 따위 같은 말도 안 되는 '거짓'을 국민 모두가 믿도록 강요한다. 한마디로 '우매한 군중'으로 만들어 지배하기 쉬운 '사회구조'를 건설하는 것이 당의 최우선 목표인 셈이다. 행여나 이런 부조리한 국가지배구조가 잘못되었다고 인식하고 잘못을 수정하려 '내부당'에 저항하는 세력이 만들어진다면, 그런 세력이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전에 '사상경찰'과 '군인' 들을 풀어서 잡아들이고 감옥 같은 곳에 가둬두고 모진 고문과 세뇌 과정을 거쳐 저항을 하지 못하게 '원천봉쇄'를 하고 있다. 오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상범'이나 '저항군'을 잡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공개처형'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을 '순교자'로 만들거나 '우상'으로 만드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로마황제가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거나 중세시대 마녀사냥을 통해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끔찍하게 처형함으로써 권력의 지속을 꾀했으나, 끝내는 실패를 하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내부당의 독재'에 반기를 드는 이가 등장하게 되면 그를 잡아다 가두어두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부당한 권력'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부정'하게끔 만드는 집요한 고문을 시작한다. 허나 결코 고문중에 사망에 이르는 일은 없도록 철저히 조심한단다. 그렇게 죽고 만다면 그것조차 '당을 부정했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란다. 오직 그들이 모진 고문을 통해 '죽을만큼' 괴로운 고통을 끊임없이 받으며 '스스로를 부정하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고문을 이어갈 뿐이다. 모진 고문에 못이겨 당에 충성하겠다는 '거짓자백'은 소용이 없다. 단지 고통을 못이겨 억지로 한 '거짓'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죽지 못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의식'에서라도 저항하길 포기하고 철저히 당에 충성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당이 원하는 것에 무조건 순응하는 단계, 이를 테면, 2+2=5가 맞다고 당이 원하면, '그것'이 곧 진리라고 순응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겨우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풀려난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번 당을 배신한 자에겐 '총살'이 곧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단지 '언제' 총살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때고 당이 '원하는 순간'에 아무도 모르게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넣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세아니아]의 사형방법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원스턴 스미스'는 그렇게 철젛나 '감시사회' 속에서 당이 하는 일에 '의문'을 품고 은밀히 접근한 '저항세력'의 손을 잡고, 아내가 아닌 줄리아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 이들을 감시하던 '내부당'에 의해 모든 사실이 발각이 되어 감옥으로 끌려가고 모진 고문을 받다 겨우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 전체 줄거리다. 하지만 모진 고문에 못이겨 '스스로 저항'하길 포기하고 얻어낸 '자유의 삶'인 까닭에 윈스턴은 행복할 리가 없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모두를 '배신'해야만 했고, 가장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는 가장 사랑했던 '줄리아'가 그 고통을 대신해야 마땅하다는 자백을 꺼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했던 마지막 '인간다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난 뒤에야 당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윈스턴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풀려난 윈스턴은 '이미' 인간이 아닌 셈이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독재자의 말로는 끝내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독재자의 승리'를 결말로 장식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권력을 위해서라면 온국민을 '감시'하고,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권력'에 반하는 세력은 끔찍한 방법으로 분쇄시켜버리고 만다. 그래서 결국에는 '독재자의 권력'이 영원토록 유지되는 사회를 만들고야 말았다. 이런 끔찍한 사회가 영원토록 존속하게끔 '결말'을 지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1984>년에 말이다.

 

  물론, 지금은 1984년을 훌쩍 지난 시점이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조지 오웰의 '예언(?)'이 맞아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우리도 '전두환'이란 독재자를 맞아 이도저도 못하던 암울한 시기였기에 꽤나 관심 받던 소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머지않아 <1987>을 맞아 민주화의 물꼬를 틔우게 되었다. 그리고 부당한 권력은 언제고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 말이다. 그런데도 <1984>에선 부당한 권력이 집권한 채로 결말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어떤 평론가는 이를 두고 비전문소설가인 조지 오웰의 '한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허나 아무리 비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뛰어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조지 오웰이 마땅한 '사회비판'도 없는 소설을 써냈으라곤 쉬이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암울한 미래'를 그려서라도 결단코 '부당한 권력'이 설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역설적인 의도'가 깔렸던 것은 아닐까? 부당한 독재권력이 영원토록 집권하기 위한 '유일한 꼼수'가 바로 '폭력'이니, 독재자가 들 '몽둥이'만 제거하면 부당한 권력이 설 자리는 없다는 명백한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말이다.

 

  부당한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지독한 악취'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공작'을 벌이고, 무고한 이들에게 '오명'을 뒤집어 씌워 자신들의 악취를 감춰보려 애쓰기 마련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상대의 잘못'을 지적해 똑같이 '더러운 짓'을 했으니 쌤쌤이다..라는 전략을 곧잘 쓰곤 하는데...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대국민쇼'에 속아넘어가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긴 하겠으나, 결코 속지 않는 '똑똑한 국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똑똑한 국민들은 부당한 권력자를 온전히 놔두질 않았다. 4·19혁명, 5·18민주화혁명, 6월혁명,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정당한 저항의 물결'은 멈출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또다시 부당한 세력이 득세하는 시절이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가만히 지켜만 볼 국민들이 아니다. 비록 <1984>에선 저항에 실패한 주인공의 나약한 모습이 연출되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의 <1984>는 '미완성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결말을 도려낸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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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가 뭐예요? 미래를 여는 키워드 2
이시한 지음, 황정하 그림 / 풀빛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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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마크 주커버그가 자신이 설립한 '페이스북'을 '메타'로 이름을 바꾸면서 본격적인 메타버스 구현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시점은 바로 5년 뒤인 2025년이라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들도 메타버스가 실현가능한 시점을 24~25년즈음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메타버스 세상'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무겁고 거추장스런 '고급 장비'를 착용해야만 메타버스 세계로 입장이 가능한 까닭에 낯선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제페토'라는 메타버스가 운영중이라고 하니 머지 않은 미래에는 본격적인 메타버스가 우리의 일상을 빠르게 확대될 것이 틀림없다.

 

  쉽게 말해서 '메타버스'는 게임속으로 들어가 직접 게임캐릭터(아바타)가 되어 실제처럼 게임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가상현실속에서 실제처럼 '또 다른 일상'을 경험할 수 있다고 이해해도 좋다. 더 중요한 것은 '메타버스'로 구현된 세계에서는 현실에서처럼 똑같은 일상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그래서 돈을 벌어서 '현실'에서 쓸 수도 있다.

 

  이렇게 실제 세상과 똑같이 구현되었기 때문에 집에서 몇가지 장비만 갖추면 멀리 여행을 직접 떠날 필요없이 '관광'을 즐길 수도 있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공연'을 직접 찾아가지 않고서도 '관람'할 수 있으며, 출퇴근의 불편함 없이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학교수업'을 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직접적인 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집에서 가만히 머물러만 있으니, '지구온난화', '탄소배출제로' 등을 실현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라도 선진국에선 발빠르게 '메타버스'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메타버스를 구현하는데에 문제점도 많다. 첫째로 아직까지 메타버스 세상이 실제와 똑같이 구현되지 않았기에 가상현실에 들어가면 '멀미'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하지만 점점 기술이 발전하고 있고 정부차원에서 투자개발을 아끼지 않고 있기에 금방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로는 '언어장벽'이 있다는 점이다. 가상세계는 전세계에서 '동시접속'이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원활해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AI 번역기'가 완벽히 구현되지 않아서 글로벌한 세상을 만드는데 애로사항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셋째는 메타버스로 입장하는 '장비'가 너무 비싸고 거추장스럽다는 점이다. 메타버스 안에서는 '아바타'가 대신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 아바타의 행동거지를 우리 몸에 '직접' 부착한 센서로 작동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머리에 쓰고 몸에 붙여야만 한다. 그 장비가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오랜 시간 접속하지 못하게 만든단다. 특히 여름철에는 너무 더워서...하지만 앞으로는 '접속장비'가 스마트폰만큼 저렴(?)하게 대량보급될 것이고, 지금보다 쉽고 조작할 수 있게 '일상 아이템'으로 바뀔테니 크게 걱정한 것은 못 된다.

 

  허나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는 '현실도피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 문제'다. 메타버스는 현실세계와는 다른 가상세계인 까닭에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중독'과 같은 현실도피를 추구하는 '현실부적응자'가 등장하게 된다면 분명 사회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가상세계라지만 너무나도 실제 현실과 비슷하게 구현을 하다보니 '현실'과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고, 현실세계에서보다 가상세계에서의 삶이 더 만족스러운 경우에는 가상세계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려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게다가 '범죄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가상세계에서는 '아바타'로 된 모습으로만 활동을 하기 때문에 가상세계에서 '아바타'를 상대로 살인을 저질러도 현실에서 직접 죽인 것이 아닌 까닭에 처벌이 쉽지 않다. 또는 '성추행'이나 '언어폭력'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가상세계와의 접속을 끊어버린 뒤에라도 상처와 고통으로 괴로워할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현실세계에서 각자 결혼을 한 유부남, 유부녀가 '가상세계'에서 사랑을 빠져 연애와 결혼까지 해버려서 문제가 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경우에도 '현실'이 아닌 '가상'으로 벌인 일이니 현실세계에서 '불륜'으로 처벌받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사기범죄'가 벌어지는 일이 빈번하다고 하니 하루라도 빨리 '가상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나 법적조치가 뒤따라야 하겠고, 무엇보다 스스로 '도덕규범'을 성실히 지켜지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문제점이 많은 곳이지만, 언젠가는 구현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10대는 '메타버스'에서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급한 것은 지금의 30~40대다. 20대들은 어느 정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지만, 30~40대들의 '10년 후'는 40~50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재 '메타버스'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게다가 '낯선 세상에 대한 적응력'도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이들이 한창 '경제력'을 갖춰야 할 나이인데, 확확 바뀌는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자연도태'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는 노후준비가 덜 된 50~60대도 마찬가지지만 어차피 살 날이 많지 않은..쿨럭쿨럭

 

  그렇다면 지금의 10대는 '메타버스 세상'을 맞아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통찰력'을 키우는 방법이란다. 통찰력은 모든 일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초기 메타버스는 '구현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때도 '통찰력'을 발휘해서 더 나은 메타버스 세상을 구현하는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완벽히 구현 될 낯선 세상'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도 '통찰력'은 큰 힘이 될 것이다. 왜냐면 통찰력은 지식을 많이 쌓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척보면 착하고' 이해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만약 첫번째 통찰이 실패했더라도 두번째, 세번째 통찰력을 휙휙 발휘하면 되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이 통찰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인문학 독서'를 즐기는 것이다. 인문학에는 오랜 세월 '인간이 살아온 모든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을 즐겨 읽으면서 '생각하는 힘'을 기르면 통찰력도 저절로 깨닫기 마련이다. 여기에 '질문하고 답하는 것'을 즐기는 또래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제 미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기술발전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단 말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생각'을 기르는 것이다. 현실문제가 심각해지더라도 '문제해결'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결된 문제가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으로 흐르지 않게 '긍정적인 생각'을 담아내야만 한다. 물론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회로'를 항상 작동시키고 있어야 멋진 미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메타버스'는 우리가 새로 만들 세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기왕이면 새 세상에는 '좋은 것'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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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3 : 오만과 편견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3
윤주연 글, 최익규 그림, 손영운 기획, 제인 오스틴 원작 / 채우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로맨스 소설'로만 보게 되면, 자존심 강한 엘리자베스와 무뚝뚝한 다아시가 만나서 서로를 오해하고 불만을 쌓다가 끝내는 사랑의 결실인 결혼에 골인한다는 이야기로 끝맺게 된다. '해피 엔딩'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기에 이 소설은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정말 그뿐일까? <오만과 편견>이 그 정도의 소설이라면 이처럼 오래도록 사랑받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결혼을 꿈꾸는 여성'이 통속적 사회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과 마찬가지로 '여성해방'을 담고 있는 소설이기에 더욱 사랑받았던 것이다.

 

  19세기 영국여성들이 왜 결혼에 목을 매달게 되었을까? 그건 바로 '경제적 독립'을 하기 위해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상속'은 오직 장남에게만 주어진 권리였다. 남자조차 차남과 삼남은 상속의 대상에서 빠져 있기 때문에 물려받을 재산은 거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군인'이나 '성직자'가 되어 사회고위직과 명예를 얻어 부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여자는 아예 상속의 대상에서 제외 되었고, 만약 물려받을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가까운 남자친척'이 대신 물려받는 '한정상속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상속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여성은 철저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돈 많은 남자'를 잡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못되는 낮은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젊은 여성들이 예쁘게 단장하고 '무도회 순례'를 나서는 까닭은 한창 예쁠 때 '돈 많은 남자'를 꾀어내 안락한 노후를 맞이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는 좀 남달랐다. 결혼의 조건이 '진실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남자가 아니라면 청혼에 승낙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 스스로도 그런 '완벽한(?) 남자'에게 걸맞는 숙녀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 덕분에 수많은 남정네들이 '그녀'를 탐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눈높이에 딱 맞는 남자가 아닌 까닭에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노력'만으로 성사되지 않는다. 상대가 아무리 오만불손해도 첫눈에 꽂히는 '무엇'이 있어야 불꽃이 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그런 경우였다. 둘은 첫만남부터 사랑의 불꽃이 튀어 올랐으나 서로가 갖고 있던 '고집스런 조건'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에게 받은 첫인상 때문에 줄곧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장점'이 아닌 '단점'만 확인하며 급기야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서로의 단점이란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었다. 사실 둘은 모두 '합리적인 성격'으로 모든 상황을 꼼꼼하게 따지는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이 불타올랐음에도 사랑에 휩쓸리지 않고 서로를 관찰하는 용의주도(?)함마저 닮았다.

 

  그런데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게 매력을 느꼈음에도 그녀의 집안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낮은 지위(젠트리: 하급귀족)'이고 가난하며 돈 많은 남자만 밝히는 천박한 언행을 일삼는 가족들의 대화를 듣고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부류라고 섣불리 판단을 내려 버린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걸맞게 '오만한 말과 행동'으로 오해를 사게 된다. 한편, 엘리자베스도 첫만남에서 다아시에게 묘한 호감을 느꼈으나 그가 내뱉는 말과 행동으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냉혈한일 것이라는 섣부른 '편견'에 빠지고 만다. 둘은 이렇게 서로의 단점만 확인하고서 자신의 가슴속에서 싹튼 사랑의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만다.

 

  이런 둘의 '오만과 편견'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며 '결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내놓게 된다. 특히, 엘리자베스를 비롯해서 다섯 딸들을 시집 보내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인 베넷 부인을 통해서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을을 찾은 '명문가 청년들'을 상대로 자신의 딸들이 신부로 선택된다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을 여성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자에게 '결혼' 이외의 경제적 독립 방법이 없고, 노처녀로 늙어서 '경제적 부담'이 된다면 평생을 천덕꾸러기로 살아야 한다고..심지어는 여기저기 구걸이나 하는 거렁뱅이 취급을 받게 된다며 '결혼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바로 둘째딸인 엘리자베스다.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원치 않는 결혼'이나 '사랑 없는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마을을 찾은 사람은 콜린스라는 베넷가의 친척이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죽음과 동시에 그의 재산을 모조리 상속받을 유일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돈 많음'을 앞세워 다섯딸 가운데 한 명과 결혼을 목적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당시 영국사회는 사촌간의 결혼도 허용하였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었으며,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와의 결혼을 놓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첫째딸 제인은 '명문가 자제'인 빙리와 이미 사랑에 빠졌고 혼담이 오고 갈 상황이었기에 콜린스는 둘째딸인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한다. 당연히 엘리자베스는 사랑없는 결혼에 승낙할 리가 없다. 그러자 콜린스는 엘리자베스의 이웃이자 친구인 샬롯에게 청혼을 하고, 샬롯은 '풍족한 미래'가 보장된 그와의 결혼을 망설이지 않고 승낙해버린다. 물론 사랑도 없고, 무조건적으로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 역할이라는 부당한 요구를 할게 뻔하지만 샬롯은 결혼한다. 그게 그 당시 여성이 처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기꾼에 방탕하기 이를 데 없는 위컴과 엘리자베스의 동생인 리디아가 '야밤도주'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 당시의 여성은 교육을 통해 지식을 쌓는 일이 허락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인식되던 시절이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더라도 여성 스스로 이혼을 요구하거나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도 없었다. 오히려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잘못된 결혼을 했더라도 남자쪽에서 내치지 않는 이상 그냥 참고 살아야만 했다.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남자들은 돈 좀 있는 여성을 어떻게 해서라도 꾀어낸 뒤에 그 집안의 남자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뻔뻔한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곤 했다. 위컴도 바로 그런 부류였던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이렇게 '열악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을 해방시키고자 고집 쎈 엘리자베스를 주인공으로 발탁했고, 그런 그녀에게 딱 어울릴 만한 멋진 남성인 다아시를 등장시켰을 것이다. 여성은 사랑받아 마땅하고 남성은 그런 여성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완전한 사랑과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제인 오스틴이 스무 살에 이 책을 썼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녀도 부유한 청년들에게 청혼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작가 생활에 만족했다고도 전한다. 그녀는 애정없는 결혼은 '무덤에서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 듯 싶다.

 

  결혼의 조건은 무엇일까? 평생을 써도 줄지 않는 경제력,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어도 꿀리지 않는 외모,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지 않을 나이차이, 남부럽지 않고 부끄럽지도 않는 명성, 그리고 하고 싶은대로 해도 걸리적거리지 않는 성격 등등 결혼상대로 부족할 것이 없는 조건만 충족이 되면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결혼을 선택하면 행복이 아니라 '도박'일 것이다. 분명 따질 건 따져보아야 한다. 허나 하나하나 따지기만 하면 평생 '홀로 살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어찌보면 사랑과 결혼은 '완벽히 마련한 결과'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맞춰 나아가는 과정'에서 시작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변변한 사랑도 못해보고 결혼도 못한 총각이 내린 서툰 결론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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