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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ㅣ 펭귄클래식 48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한 개인이 국가 전체를 뒤집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테니, 이를 태면, 혹시라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집단'이 생긴다면, 국가는 그 '집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국가 전복위험성'이 짙은 사안들을 거르고 골라서 국가의 평화와 국민들의 안녕을 해친다는 죄를 물어 단죄하는 것은 정당한걸까? 만약 그것이 정당하다면, 그런 집단을 색출해내기 위해 반항적인 국민들이 발생할 가능성을 애초에 막기 위해 철저한 '감시사회'를 만드는 것도 용인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온국민의 손발놀림 하나하나를 모조리 CCTV로 '지켜보고' 도청장치로 '엿듣는' 단 말이다. 사생활이 보호받아야 마땅한 '장소'까지 빠짐없이 말이다. 조지 오웰은 그런 '감시사회'를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려냈다. 소설 <1984>가 바로 그렇다.
이 책이 오웰의 유고작인 것도 눈여겨볼 만하겠지만, 책이 출간된 해가 1949년이라는 사실도 꽤 중요해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냉전시대'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 진영'이 서로 대립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영국사람'인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당연히 '공산주의(사회주의)'일 것으로 보이지만, 소설속의 배경은 의외로 '영국'이었다. 분명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자본주의 진영'이었음에도 오웰은 '영국'을 감시사회의 최정점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웰은 전후복구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영국 사회의 혼란'과 '무능력함'을 비꼬기 위해서 이런 소설을 구상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런 질문에도 의아함은 여전히 남는다. 소설속의 '절대권력'을 쥐고 흔드는 권력자는 '공산주의'를 딱히 옹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나치즘'을 비롯한 '파시즘', '군국주의'를 아우르는 '전체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일까? 소설 속에서 '런던'은 [오세아니아]에 속했고, [오세아니아]와 전쟁을 벌이던 상대는 [유라시아]였다. 하지만 소설 중반을 넘어서면 [오세아니아]는 상대를 바꾸어 [동아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그러다 막판이 되면 [유라시아]와 다시 전쟁을 벌이는 혼란스런 상황이 펼쳐진다. 하지만 전세계가 '세 개의 대륙'으로 쪼개지거나 누구와 누구가 싸우는 것도 왜 싸우는지도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벌이는 전쟁은 단순히 저마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소모전'일 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전쟁을 통해 국민들을 불안감에 빠뜨리고 위기감을 조성하고서 '집권당'에 비판하는 세력을 견제하고 온국민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은 서로를 향해 큰 피해를 주지도 않으면서 전투를 치루며 그저 '끊임없는 소모'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불안요소를 만들어 '권력'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이 전하는 전황 소식은 꽤나 심각하게 전해진다. 그래야 국민들이 적절한 불안감에 빠져 '빈곤한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심각한 불평등을 조장해도 국민들이 불평불만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1984>에서는 국민들이 '무식'한 채로 살아가는 것을 그냥 방치할 뿐이다. 왜냐면 그것이 '장기집권'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속에서 권력을 차지한 '내부당'의 일인자는 '무지는 힘', '자유는 속박', '전쟁은 평화' 따위 같은 말도 안 되는 '거짓'을 국민 모두가 믿도록 강요한다. 한마디로 '우매한 군중'으로 만들어 지배하기 쉬운 '사회구조'를 건설하는 것이 당의 최우선 목표인 셈이다. 행여나 이런 부조리한 국가지배구조가 잘못되었다고 인식하고 잘못을 수정하려 '내부당'에 저항하는 세력이 만들어진다면, 그런 세력이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전에 '사상경찰'과 '군인' 들을 풀어서 잡아들이고 감옥 같은 곳에 가둬두고 모진 고문과 세뇌 과정을 거쳐 저항을 하지 못하게 '원천봉쇄'를 하고 있다. 오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상범'이나 '저항군'을 잡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공개처형'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을 '순교자'로 만들거나 '우상'으로 만드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로마황제가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거나 중세시대 마녀사냥을 통해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끔찍하게 처형함으로써 권력의 지속을 꾀했으나, 끝내는 실패를 하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내부당의 독재'에 반기를 드는 이가 등장하게 되면 그를 잡아다 가두어두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부당한 권력'에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부정'하게끔 만드는 집요한 고문을 시작한다. 허나 결코 고문중에 사망에 이르는 일은 없도록 철저히 조심한단다. 그렇게 죽고 만다면 그것조차 '당을 부정했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란다. 오직 그들이 모진 고문을 통해 '죽을만큼' 괴로운 고통을 끊임없이 받으며 '스스로를 부정하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고문을 이어갈 뿐이다. 모진 고문에 못이겨 당에 충성하겠다는 '거짓자백'은 소용이 없다. 단지 고통을 못이겨 억지로 한 '거짓'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죽지 못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의식'에서라도 저항하길 포기하고 철저히 당에 충성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당이 원하는 것에 무조건 순응하는 단계, 이를 테면, 2+2=5가 맞다고 당이 원하면, '그것'이 곧 진리라고 순응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겨우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풀려난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번 당을 배신한 자에겐 '총살'이 곧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단지 '언제' 총살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때고 당이 '원하는 순간'에 아무도 모르게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넣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세아니아]의 사형방법이다.
우리의 주인공인 '원스턴 스미스'는 그렇게 철젛나 '감시사회' 속에서 당이 하는 일에 '의문'을 품고 은밀히 접근한 '저항세력'의 손을 잡고, 아내가 아닌 줄리아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 이들을 감시하던 '내부당'에 의해 모든 사실이 발각이 되어 감옥으로 끌려가고 모진 고문을 받다 겨우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 전체 줄거리다. 하지만 모진 고문에 못이겨 '스스로 저항'하길 포기하고 얻어낸 '자유의 삶'인 까닭에 윈스턴은 행복할 리가 없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모두를 '배신'해야만 했고, 가장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는 가장 사랑했던 '줄리아'가 그 고통을 대신해야 마땅하다는 자백을 꺼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했던 마지막 '인간다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난 뒤에야 당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윈스턴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풀려난 윈스턴은 '이미' 인간이 아닌 셈이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독재자의 말로는 끝내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독재자의 승리'를 결말로 장식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권력을 위해서라면 온국민을 '감시'하고,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권력'에 반하는 세력은 끔찍한 방법으로 분쇄시켜버리고 만다. 그래서 결국에는 '독재자의 권력'이 영원토록 유지되는 사회를 만들고야 말았다. 이런 끔찍한 사회가 영원토록 존속하게끔 '결말'을 지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1984>년에 말이다.
물론, 지금은 1984년을 훌쩍 지난 시점이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조지 오웰의 '예언(?)'이 맞아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우리도 '전두환'이란 독재자를 맞아 이도저도 못하던 암울한 시기였기에 꽤나 관심 받던 소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머지않아 <1987>을 맞아 민주화의 물꼬를 틔우게 되었다. 그리고 부당한 권력은 언제고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 말이다. 그런데도 <1984>에선 부당한 권력이 집권한 채로 결말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어떤 평론가는 이를 두고 비전문소설가인 조지 오웰의 '한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허나 아무리 비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뛰어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조지 오웰이 마땅한 '사회비판'도 없는 소설을 써냈으라곤 쉬이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암울한 미래'를 그려서라도 결단코 '부당한 권력'이 설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역설적인 의도'가 깔렸던 것은 아닐까? 부당한 독재권력이 영원토록 집권하기 위한 '유일한 꼼수'가 바로 '폭력'이니, 독재자가 들 '몽둥이'만 제거하면 부당한 권력이 설 자리는 없다는 명백한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말이다.
부당한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지독한 악취'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공작'을 벌이고, 무고한 이들에게 '오명'을 뒤집어 씌워 자신들의 악취를 감춰보려 애쓰기 마련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상대의 잘못'을 지적해 똑같이 '더러운 짓'을 했으니 쌤쌤이다..라는 전략을 곧잘 쓰곤 하는데...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대국민쇼'에 속아넘어가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긴 하겠으나, 결코 속지 않는 '똑똑한 국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똑똑한 국민들은 부당한 권력자를 온전히 놔두질 않았다. 4·19혁명, 5·18민주화혁명, 6월혁명,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정당한 저항의 물결'은 멈출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또다시 부당한 세력이 득세하는 시절이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가만히 지켜만 볼 국민들이 아니다. 비록 <1984>에선 저항에 실패한 주인공의 나약한 모습이 연출되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오웰의 <1984>는 '미완성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결말을 도려낸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