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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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넥서스Friends 1번째 리뷰] 히로시마 레이코 작가는 <전천당> 이후 두 번째 소설로 접하게 됐다. 이 소설도 <전천당>과 비슷한 느낌이다. 일본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현대의 사상'을 담아 연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배경은 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에도 시대'를 펼쳐 냈다. 17세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 가문이 권세를 누리던 '에도 막부시대'라고 해야 하겠으나,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칼잡이(무사)'의 활극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적한 시골마을의 공동주택에서 벌어지는 요괴 대소동인 까닭에 '막부'라고 하는 거창한 시대극(사극)은 아니다. 제목 그대로 '인간의 아이'가 '요괴'를 돌보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잔잔하게 펼쳐지는 '주니어소설'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애초부터 '주니어소설'로 쓰여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레이코 작가가 스스로 밝히길 이 책은 '성인소설'로 집필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 <귀멸의 칼날>이 방영하던 시기였던 탓에 좀 더 '호러물'에 가깝고 피와 시체가 나뒹구는 잔혹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반려하면서 "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다시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새로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분량도 줄어들고 에피소드도 덜어내야만 했단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어린이도 읽고 즐길 수 있는 책이 되었다. 하지만 애초의 '스토리'는 유지한 탓에 책내용이 담고 있는 주제가 '성인용(?)'이라는 느낌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탓에 논술쌤의 관점에서 이 책을 '초등학생'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귀멸의 칼날>도 '19세 미만 관람불가'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완전 성인용도 아니기 때문에...애매한 책이다.

  1권의 내용은 주인공인 '야스케'란 소년이 길가에 있는 '하얀 돌'을 우연히 발견하고서는 실수로 떨어뜨려 깨뜨리고 만다. 그저 돌멩이를 깼을 뿐이니 별일 아닌 듯 싶었지만, 사실 그 돌에는 '요괴의 아이'를 돌봐주는 요괴 '우부메의 집'이었던 것이다. 돌이 깨짐과 동시에 우부메도 떠나버렸고, 요괴의 아이를 돌볼 요괴가 사라지자 '요괴 봉행소(재판을 담당하던 에도시대 관청 이름)'가 요란스러워졌고, 결국 돌을 깨뜨린 범인 야스케가 요괴에게 잡혀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벌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요괴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대신 맡게 된 것이다. 우부메가 다시 돌아와 요괴의 아이를 돌봐줄 때까지 말이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뒤에 이어질 내용이 얼마나 기괴하고 음산한 요괴들이 등장할지 자못 궁금해질 테지만, 막상 뒷이야기를 읽어 보면, 살짝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특히 '호러 마니아'라면 말이다. 왜냐면 인간의 아이, 야스케가 처음으로 돌보게 된 요괴 아이가 바로 '매실절임(일본 장아찌)'이기 때문이다. 정말 귀염뽀짝이다. 어린이를 위한 소설로 개작했다는 느낌을 확연하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괴는 요괴다. 인간을 해치는 '포식자 요괴'는 아니지만, 요괴이니만큼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전천당>의 느낌이 물씬 났다. 특정 년도가 적힌 동전에 해당하는 물건만이 가진 독특하고 신비한 능력 때문에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가득했던 것처럼,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서도 요괴마다 독특한 특징과 사건이 벌어지며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하지만 시대배경이 옛날이고, 요괴가 등장하는 몽환적인 배경이 자못 '이국적인 느낌'마저 든다. 일본에는 특히나 '요괴'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본의 애니미즘은 좀 더 유별 날 정도로 많은 요괴가 등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요괴들은 '장난꾸러기 님프'나 '괴팍한 고블린'처럼 사람에게 크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일본의 전설에는 섬뜩한 요괴들도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고, 이런 요괴들은 종종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살육을 즐기는 끔찍한 괴물로 등장하곤 한다. 한국형 귀신은 '원한'을 품은 경우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일본형 요괴는 원한의 유무와 상관없이 사람의 피와 살을 탐하고, 살육을 거듭하며 능력을 키우는 요상한 취향까지 거침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흔하다. 유독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의 특성을 닮은 듯도 싶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는데 무슨 원한을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막 싹쓸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요괴들의 성격도 그런 모양인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는 그런 끔찍한 요괴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면 시대배경은 '과거'의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은 '현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의 전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겠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사고방식은 분명 요즘 것이다. 바로 '인간의 권리'를 담은 인권사상이 엿보인다. 물론 등장인물 태반이 '요괴'인 탓에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이 동물의 모습이긴 하다. 그치만 그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주제의식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이 책을 '성인호러물'이 아니라 '어린이용'으로 출간해보라고 했던 모양이다. 단순히 피와 살이 튀기는 끔찍함이 아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고귀한 생각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요괴는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다. 인간이 아닐 뿐더러 '살아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천 년을 훌쩍 넘겨서 살아가는 요괴들의 삶에 고귀함 따윈 애초부터 없다. 백 년을 살아도 지겨운 것이 '인생'인데, 천 년을 살면 지겹다 못해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잃고 심심풀이로 인간을 잡아 먹는 요괴들의 삶을 그려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레이코 작가가 그린 '요괴'는 좀 달랐다. 그들의 수명이 언제까지인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요괴일망정' 유년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의 유약함을 지키고 보살펴 주려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딴에는 일본도 '초고령화 사회'가 된 지 오래되었기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을도 꽤나 많을 것이다. 심지어 현재 일본사회는 '고독사(홀로 늙어 돌봐줄 사람도 없이 죽어서도 주검마저 거두어줄 사람 없이 그대로 방치된 죽음)'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기에, 이야기 속에서나마 어린아이를 돌보는 풍경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이야기를 좀 더 읽어본 뒤에 꺼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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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 - 신대륙 이주와 독립전쟁 미국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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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과사상사 8번째 리뷰] 다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작정하고 책구매도 했다. 나름 '균형잡힌 미국사'를 초보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역시 책이나 차는 '두 번' 우려 먹어야 제맛인 듯 싶다. 처음 읽었을 땐 막막했는데, 다시 읽으니 뭔가 감이 잡히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의 역사는 '두 얼굴'을 지녔다. 하나는 세계 최강대국으로 우뚝 선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뒷구녕으로 할짓 못할짓을 다하는 추악한 민낯이다. 그리고 미국은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듯 싶다. 그 증거는 바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붕괴'다. 한때 미국은 전세계의 경찰 노릇을 톡톡히 하며 '감배 놀이'를 즐겼었다. '감배 놀이'란 남의 잔치에 가서 감놔라 배놔라 참견하는 놀이다. 물론 여전히 미국은 초강대국이 틀림없다. 그런데 더는 '감배 놀이'를 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도 보란 듯이 미국과 맞짱 뜰 각오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이스라엘은 감히 미국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말살을 밀어붙이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북한마저 미국과의 대결을 저울질하며 간을 보고 있으니, 미국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암튼 이번 기회에 미국에 대해서 요모조모 뜯어볼 작정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미국사'만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오늘날 미국의 주축이 된 '백인들의 기원'은 물론이고, 미국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원래 '아메리카 원주민'이라 불어야 마땅하겠지만, 편의상 '인디언'이라 칭한다)', 그리고 각지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 들의 기원까지 살펴보면서, 이후에 '이주민'이 된 히스페닉과 아시안 들까지 지금의 '멜팅 스폿'을 이룬 미국의 인종적인 문제의 근원까지 파헤치고, 이주해온 백인들의 본고장이었던 '유럽문화'까지 함께 아울러 살펴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산책'의 시작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항해를 준비한 시절의 '유럽의 분위기'부터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리뷰에 일일이 '요점정리'하듯 쓰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안목'이니 말이다.

  1권의 핵심은 '미국의 주인은 누구인가?'다. 물론 한나라의 국민이 '주인'이고, 주권을 누리는 이가 '주인'일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이며, 국민이 주권을 누린다. 하지만 미국의 국민은 '다인종'인 탓에 주인된 인종이 '따로'인 듯 싶고, 주권을 누리는 이도 '따로' 있는 듯 싶을 정도다. 그리고 그 주인은 바로 '백인'이고 말이다. 왜 미국은 이런 식이 되었을까? 솔직히 미국내 백인이 차지하는 수는 '소수'에 가깝다. 그런데도 미국 경제 '전체의 부' 대부분을 '백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은 거의 모두 '백인들의 입맛대로' 움직이고 있다. 전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히스페닉'을 비롯해서 유색인종들은 온갖 차별을 아직도 다 받고 있는 실정이다. 왜 미국이 이 모양이 되었는지 짐작케 하는 내용이 바로 1권에 담겨 있는 셈이다. 바로 '미국의 독립혁명'의 주체가 바로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건국의 아버지' 이야기는 2권에 나오니 잠시 묻어 두겠다.

  원래 미국이 위치한 '북아메리카'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이라 불려야 마땅하겠지만,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 땅을 '인도'라고 철떡같이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도착한 섬들(지금의 카리브해 섬들)을 '서인도제도'라 불렀고, 이곳의 원주민들을 '인디언(인도사람)'이라 부른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인해 유럽인들의 대대적인 이주가 곧바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기에 북미대륙 동부해안은 너무나도 척박하고 추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이주민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굶어죽기 딱 좋았다.

  하지만 초기 유럽인들은 '종교의 자유', '굶주림으로부터 탈출' 따위를 목적으로 한 자발적 이주도 있었지만, 영국에서처럼 '범죄자 국외추방지'로 미국이 낙점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삼삼오오 미대륙으로 건너온 '백인 이주민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그리고 인디언들에게 '농사법'도 배우고 익혀서 유럽에 생산물을 수출을 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백인 이주민들이 성공적으로 농사를 지어 무역으로 이득을 톡톡히 본 작물은 다름 아니라 '담배'였다. 그런데 담배농사에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백인들을 대신해서 농사를 지을 일손이 필요했는데, 그런 이유로 데리고 온 이들이 바로 '아프리카 흑인'이었다. 물론 처음엔 '인디언'에게 힘든 농사일을 시켰지만, 이들은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땅의 원 주인'이었다. 그런데 백인들이 자신들의 땅을 빼앗는 것으로도 모자라 노예로 삼는다는 정책에 고분고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흑인들이 낙점된 것이다. 그 흑인들의 일부는 '계약하인'으로 정해진 기간동안 노동을 하고 난 뒤에 '자유인'이 되었다고도 하지만, 더 많이 필요해진 노동력 때문에 '흑인노예' 시장이 활기를 띠자 애초에 머물던 흑인노동자들도 곧 '노예'처럼 부려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흑인을 노예로 삼는 것은 <성경>에도 적혀 있다는 근거를 내밀면서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했다. 인디언 대신 흑인이 노예가 되었다고 해서 '인디언의 삶'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더 많은 백인들이 미대륙으로 이주해오자 인디언들은 '살곳'조차 백인들에게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대륙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 했다. 그리고 '흑인노예 무역'과 '인디언 사냥'으로 백인들은 영토를 점점 늘려 나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기로 미국의 시작은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제임스 타운'에 정착한 백인들이 원주민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자, 이를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땡스 기빙데이(추수감사절)'를 제정해 기리고, 이후 더 많은 백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하게 되었고, 곧이어 영국의 압제에 당당히 자율적인 민병대를 조직해서 독립의 기치를 올리고, 정정당당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둬 '정의로운 독립국가'를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허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내용이다. 왜냐면 '선한 이미지'만 남기고 '나쁜 이미지'는 쏙 뺐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흑인 노예무역'과 '인디언 사냥'을 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역사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를 '두 얼굴의 역사'라고 평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고 '반미감정'을 부추기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미감정'이 아니라 '미국을 이길 수 있는 해법'이기 때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로울 일이 없다(지피지기 백전불태)'고 <손자병법>은 말한다. 그러니 아직 미국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대한민국이 '반미감정'만 앞세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미국의 노예'로 살 일도 아니기에 미국에 대해서 철저히 알아보잔 말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반미'고, '승미'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화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러니 미국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 것은 알고, 선한 이미지는 드러내고 칭찬을 아끼지 말고, 추한 이미지는 절대 잊지 말고, 되려 속는 일은 더더구나 없어야 한다. 이것이 '외교의 기본'이다.

  분명 '미국의 독립혁명'은 배울 점이 많다. 부당한 일에 당당히 맞서 싸워 꼭 지켜야 할 '도리'를 스스로 쟁취해냈기 때문이다. 허나 미국의 독립으로 인해 더 큰 피해를 본 '피해자'가 발생했는데도, 미국의 정책은 이들을 더욱더 궁지로 내몰고, 오직 '백인들만의 나라'로 만들고 말았다. 이런 나라를 '종교 박해'로부터 탈출해 '종교의 자유', '인권의 보장', 그리고 '독립의 기치'로 우뚝 세운 자랑스런 나라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물론, 모든 역사가 승자를 돋보이게 하고, 패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을 관행처럼 저지르곤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린 그런 나쁜 관행으로 당해본 '피해의 역사'를 겪어보았다. 그러니 이런 추악한 면모를 외면만 하지 말고 냉철하게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양의 위대함'만 늘어놓는 역사에 대해 경계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낱낱이 분석한 뒤에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반성'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잘못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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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꿈이 사라진 날 초등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임광희 그림 / 한솔수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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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솔수북 7번째 리뷰] 어린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권장해야만 하는 걸까? 물론 어린이들 스스로 꿈을 키워나가고 어른들이 그 꿈을 이루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어린이들에게 마음껏 꿈을 가지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 '꿈'을 빙자해서 '장래의 직업선택'에 관한 암묵적인 강요를 하고, 자유를 박탈하고, 무한 간섭을 할 요량이라면 '꿈' 이야기조차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어린이들에게 '직업'을 강제하느냔 말이다. 그로 인한 부작용이 더 크니 그냥 냅두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다.

  더 큰 문제는 채 '스무살'도 안 된 나이에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서게 만드는 대한민국 사회다. 그 어린 나이에 '평생직업'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을 강요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어쩌면 가장 중요한 '선택'을 강제하느냔 말이다. 그렇게 무한경쟁으로 내몰면서 무슨 '꿈타령'을 하느냔 말이다. 그냥 솔직하게 "네 인생은 '인 서울'에 달렸으니, '인 서울'이라도 해서 정규직의 발끝이라도 잡고 싶으면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하고, 공부로 성공할 것 같지 않으면 '재능'이라도 살려서 돈벌이에라도 일찍 뛰어 들고, 이도 저도 안 되면 결국 비참한 '비정규직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테니, 한 번 사는 인생 개고생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살아봐. 그게 싫으면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햇!!!"라고 '현실'을 말해 주길 바란다. 괜한 '장래의 꿈 이야기'를 꺼내서 돌려까기 하지 말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어른들도 어릴 적에 꿈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어릴 땐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데, 살아보니 '그 말씀'이 맞더라는 생각뿐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어릴 적 꿈'은 매우 소중하다는 것에 부정하는 어른들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만큼 꿈은 소중한 것이다. 아무리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가 만연하다고 하더라도 '꿈'만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데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책 <꿈이 사라진 날>은 의미가 깊다. 또다시 '외계인'이 등장해서 이야기의 본질을 흐려놓는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소중한 꿈을 지키고 이루겠다는 어린이들의 마음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두 말 하면 입 아플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엉뚱하다고 느껴지는 점은 지구인에게서 '꿈'을 사라지게 만들어서 외계인의 노예로 만드는 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그 외계인들의 침공에 차질을 주어 지구인에게 꿈을 되찾아주는 영웅들에게는 정작 '꿈이 없었다'는 설정이 어리둥절했다. 꿈을 갖고 열심히 잘 살던 '모범 지구인'들은 외계인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꿈을 갖는 걸 귀찮게 여긴 '불량(?) 지구어린이'가 영웅으로 설정된 것이 의아스러웠다. 이런 구성을 읽은 '초등저학년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외계인이 침공할 걱정(?)에 꿈을 갖지 않노라고 핑계를 대지는 않을까?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초등생은 없을 테니 걱정을 붙들어 매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놓고 싶은 심정이다.

  어린이들은 '모방심리'가 꽤나 발달했다. 그래서 '좋은 말과 행동'을 들려주고 보여주면 '좋은 말과 행동'을 따라하고, 그 반대의 상황도 똑같은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그래서 '애들 앞에서 냉수도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는 속담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교육에 앞서서 '밥상머리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고, 심지어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를 위해서도 '태교'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왜 동화책의 줄거리는 소중한 우리 아이들이 읽고, 더 나아가 전세계 어린이들이 읽을 텐데, 함부로 쓰느냔 말이다. 아무리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딴에는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교훈적인 내용'만을 강조하다보면 <어린이책>이 갖춰야 할 '재미'라는 가장 중요한 특장점을 놓쳐서 훌륭하지만 지루한 책이 되어 어린 독자들이 외면하는 책이 되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줄거리'를 살짝 바꾸는 것은 어떨까? 꿈 많은 '모범 지구인'이 외계인의 침공에 더 취약해서 꿈도 없는 '불량 지구인'조차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데, '모범 지구인' 가운데 외계인들의 침공 방식에 '특별한 면역력'을 가지 어린이가 있어서, 외계인의 야욕을 물리칠 방법을 찾아내고 '불량 지구인'과 함께 힘을 합쳐 외계인을 소탕한 뒤에, 꿈의 소중함을 인식한 '불량 지구인'들이 각성해서 온세계 지구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부풀게 만드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면 말이다. 교훈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격이 되지 않았을까.

  딴 이야기이긴 하지만...출판시장을 주욱 살펴보면, '외국작가'들의 책시리즈는 수십 편이 넘는 반면에 '국내작가'들의 책시리즈는 열 편을 넘기기도 힘든 모양이다. 물론 공전의 히트를 한 <마법천자문>을 비롯한 '교양학습만화'는 꽤 성공적인 양상으로 안착을 하며 계속 펴내고 있지만, 유독 <동화책>만큼은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해리포터>나 <전천당> 등의 사례를 보아도 잘 만든 세계관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기왕에 '사라진 날' 시리즈를 만들었으면, 지구어린이와 외계인 침공이라는 '세계관'을 구축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작가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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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돈이 사라진 날 저학년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김다정 그림 / 한솔수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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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솔수북 6번째 리뷰] 고정욱 작가의 '사라진 날'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이번에는 '돈'이 사라졌고, 역시 나쁜 '외계인 침공'이 원인이었고, 마무리는 착한 '외계인의 도움'으로 지구가 구원되는 전개였다. 물론 초등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위해서 외계인이 등장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에 매달리지 않고 단번에 해결하는 구성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조기 '경제교육'의 필요성에 늘 찬성하는 쪽이었기에 이른 나이의 독자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교훈적인 이야기에 박수를 보내는 바다. 그런데도 완독한 뒤에 영 개운치가 않다. 뭔가 껄끄럽기까지 하다. 앞선 책들에서 '책'이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고, '엄마'가 사라지는 내용과는 달리 '돈'이 사라지는 배경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먼저 통용되던 '화폐'가 사라져서 원시경제인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리고 '물물교환'이 꽤나 불편해서 새로운 '통화'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바코드(인식표)'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렇게 '화폐'를 대신한 새로운 통화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전에 '외계인'이 등장해서 지구정복을 위해서 돈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점부터 껄끄럽기 시작했다. 그러다 외계인의 지구정복 야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상화폐'로 대응하며 지구인들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고, 외계인들의 정복욕을 무너뜨린 것까진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외계인들이 물러난 뒤에 '가상화폐' 사용으로 인해서 투명한 쓰임새로 인해서 '부정부패'가 싹 사라져버렸다는 설정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과연 '가상화폐'만이 투명한 돈 씀씀이를 보장하는 것일까? '가상화폐'로 발생할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제점은 없을까? 그리고 '가상화폐'의 사용으로 정말 부정부패를 척결할 수 있을까? 이런 '팩트체크' 없이 <어린이책>에 가상화폐의 순기능만 선보이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어린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걸까? 라는 의문에 빠져들자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이책>이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수많은 '동화책의 결말'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맺음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왕자와 공주의 결혼을 '행복공식'으로 삼고, 바람직한 가족구성을 '권선징악'의 일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식의 결말을 마냥 '좋다'라고만 평가하지 않는다. 왕자와 공주의 결혼이 무조건 '행복한 결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종이봉지 공주>처럼 왕자가 공주를 구하지 않고 '역발상'으로 용감하고 씩씩한 공주가 사악한 용에게 잡혀간 왕자를 구해주지만, 왕자는 용과의 결투 도중에 옷이 불타버리고 초라한 '종이봉지'로 몸을 가린 허름한 공주의 모습에 실망하고 투정하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는 결말을 시도한 동화책도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돈이 사라진 날>의 주제와 목적이 '어린이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저축의 필요성과 합리적인 소비를 가르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통화인 '인식표'와 '가상화폐'의 등장이 적절한 대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용하던 통화가 사라져서 '불편한 물물교환'을 보여주고, '아나바다 운동(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운동)'까지만 보여줬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중한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꼭 필요한 곳'에 요긴하게 쓰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더 뿌듯한 결말이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 민지가 200만 원을 스스로 모아서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는 꿈'을 실현시키는 결말로 말이다. 굳이 '외계인의 지구정복'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서 괜한 '충격요법'을 써서 '돈의 소중함'을 강요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은 것이다. 내가 완독 후에 껄끄럽게 생각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한편, 시리즈의 '일관성'을 갖추려는 작가의 고민은 이해하는 바다. 하지만 조금 더 고민을 한 뒤에 '결과'를 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 이번 책은 좀 뭔가에 쫓기듯이 급하게 썼다는 느낌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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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더 저널리스트 : 조지 오웰 더 저널리스트 2
조지 오웰 지음, 김영진 엮음 / 한빛비즈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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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빛비즈 138번째 리뷰] 앞으로 이렇게 정리를 해야 겠다. 그동안 쓴 리뷰는 '로마숫자'로 전체 표기를 하고, '출판사별 통계'는 리뷰의 첫머리에 장식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작가별 통계'도 따로 냈으면 좋겠지만, 워낙 중구난방으로 읽고 있고 지금까지 리뷰한 것을 '따로' 카운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포기하련다. 이제 내게 주어진 '리뷰 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은 시간동안 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련다. 어느 날, 내 리뷰가 멈추면...나도 없을테다.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널리스트'라고 꼬집고 싶다. 못난 정치꾼들의 '독재'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깨어 있는 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지금의 세계는 '펜이 사라진 시대'를 지나고 있다. 전통적인 매체인 '신문'은 본분을 잊은 지 오래고, 구독자들의 외면마저 받고 있다. '방송매체'는 못된 정권에 장악되어 '나팔수 역할'만이 전부인줄 착각하고 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새로운 매체로 자리잡은 '너튜브' 같은 곳에 기대를 걸어야 할 판이지만, 이곳마저 '가짜뉴스의 온상'이고 보니, 저널리스트가 살아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깜깜한 시절이다. 그렇기에 '저널리스트'라기엔 한참 부족하지만 '깨어 있는 시민'으로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다. 분명 '깨어 있는 분'들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늘 깨어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책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앞선 '헤밍웨이'와 '마르크스' 편과 짝을 이루는 책이다. 이들은 '소설가'이며 '사상가'이기도 했지만, 부당한 일에 참지 않은 '저널리스트'로 활약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사람'들이 남긴 저널들을 짜깁기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낸 것이다. 하지만 '시대순'으로 쓰여진 저널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따로 묶어서 엮었기 때문에, 이들이 펼쳐낸 '생각의 변화'나 '저널리즘의 흐름'이 잘 보이지 않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각각의 책들에는 '그들'이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저널리스트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회적 문제'가 있는 곳에 '저널리즘'도 함께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날의 세계적인 혼란이 벌어지는 한복판에 '저널리즘'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저널리스트'들의 생각들을 한데 엮어서 모두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수고가 잘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내 깜냥으로 그것들을 한데 엮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쨌든, 이 책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전쟁으로 혼란스런 아픈 시대를 살아간 조지 오웰이 참지 않고 쏟아낸 저널들을 한데 엮은 책이다. 오웰이 1903년에 태어나 1950년에 사망을 했으니 1, 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은 셈이다. 주요 저작물은 미얀마 주제 인도제국경찰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쓴 <버마 시절>(1934), 파리와 영국에서 궁핍한 생활로 연명하며 쓴 <파리와 런던 안팎에서>(1933)을 출간하였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담은 <카탈로니아 찬가>(1938), 영국과 소련의 정치를 우화 형식으로 쓴 <동물농장>(1945), 그리고 디스토피아적인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린 <1984>(1949) 등을 펴냈다. 하지만 그는 소설만 쓴 것이 아니다. <트리뷴>지를 비롯해서 다양한 신문에 정치적 논평을 써내는 등 날카로운 비평가로서의 모습도 훌륭히 보여주었다.

  그리조 오웰은 '사회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네편내편'을 가리지 않고 비판할 것이 있으면 참지 않는다는 속시원한 '사이다' 역할을 자처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이쪽저쪽'에서 다구리를 당하는 처지에 서기도 했다. 특히, 오웰은 '영국인'이면서도 '영국인'을 저격하는 글을 많이 썼다. 이를 테면, '무비판적인 애국심'은 참 애국심이 아니라 '국수주의'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대대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핀란드 군인에게 보낸다며 뜨개질을 시작했는데, 소련이 갑자기 '연합군'편으로 돌아서자 소련을 지지하며 뜨개질로 완성된 물품을 소련에게 보내는 영국인들을 향해 '모순덩어리'라며 비판을 한 것이다. 이처럼 영국인들은 '신념'조차 잃어버렸다며 맹렬히 비판을 했다. 그리고 영국인들이 식민지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에는 둔감하면서 자국민들이 받는 조그만 불편에는 악다구니를 퍼붓는 '우매한 대중'을 향해서도 아낌없이 비판을 날렸다.

  우리는 정의나 평등과 같은 신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만 급급할 뿐, 그런 신념 따위는 자신들보다 '더 훌륭한 분들'의 전유물이고, 더 웃긴 건 '그런 분들'만이 입에 달고 직접 만들어서 우매한 대중들에게 선심을 쓰듯 베풀어주는 것인냥 철저히 '남일'처럼 생각한다. 그러니 자신들에게 닥친 '불공정, 불평등한 일'이 발생을 했을 때만 부랴부랴 신념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든다. 그러나 그런 호소에 '응답해주는 이들'은 극히 소수일 뿐이다. 왜냐면 더 많은 대중들이 '그따위 신념'에 그닥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다른이의 고통'에 둔감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야만 한다. 적극적으로 간섭하거나 참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면 '관심'을 모아주란 말이다. 불평등한 일이 발생해도 '관심'을 쏟아줘야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잡기'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갈수록 살기 힘들어진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정치가'는 실종되고 '정치꾼'만 남아 국민을 우롱하고 '대국민 사기'를 벌이려는 못난이들만 설치는 마당에 '관심'마저 없다면 한국정치는 바로 설 희망조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정치참여'가 절실하다. 정치하는 사람치고 '믿을만한 사람'은 100% 없다. 그러니 정치인을 믿고 정치를 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 철저히 감시하고 언제나 감시해야 마땅하다. 특히,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정치인, 국민을 위해서 자기가 할 일을 말하기보다 국민을 위한다며 상대를 헐뜯는 일에만 열심인 정치인,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한 점의 부끄럼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정치인은 절대로 뽑으면 안 된다. 그런 당을 지지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정치는 '소신'을 갖고 해야 마땅하고, 대중은 '신념'을 갖고 지지해야 나라가 바로 서는 법이다.

  적어도 조지 오웰은 '자기만의 신념'에 투철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은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였으며,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명백해지면 '부족했다'고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웰의 저작물은 오롯하고, 오웰의 저널은 날이 번뜩인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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