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이주, 왜 고국을 떠날까? - 책가방문고 23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4
루스 윌슨 지음, 전국사회교사모임 옮김, 설동훈 감수 / 내인생의책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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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더잘 시리즈 4]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4 : 이주, 왜 고국을 떠날까?>  루스 윌슨 / 전국사회교사모임 / 설동훈 / 내인생의책 (2010)

[My Review MMCXXXI / 내인생의책 11번째 리뷰] 이주(Migration)는 자기가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뜻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자기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로 떠나는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국제이주'나 '이민'이란 말로도 쓰고 있으나, 정치적 · 경제적 · 종교적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가 살던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을 이야기하려 한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2010년 이전에 벌어졌던 '사례'가 소개되어 있으나, 이 글을 쓰는 2025년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사례를 예로 들어서 리뷰하고자 한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 이유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사례들이 지금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강제이주', '난민' 문제는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자국보호와 자국이익이 우선시 되는 '자국우선주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보다 훨씬 더 강도가 센 '극우화'로 인해서 이주민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하지 못할 정도로 천박해진 선진국들의 낯뜨거운 민낯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이런 문제들을 짚고 넘어가 볼까 한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얼마나 너그러울까? 가까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오버투어리즘'이 문제되고 있다. 엔저효과(?)로 인해 전세계 관광객들이 일본을 찾아갔지만, 시골 구석구석까지 탐방하듯 관광을 하며 소비를 하는 '한국관광객'과는 다르게 '다른 나라 관광객'들이 일본에서 주로 관광하는 곳은 '유명 대도시'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일본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로 인해 짭짤한 수익을 본 곳은 '도쿄' 같은 대도시 정도였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관광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적자'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외국관광객들이 '값싼 일본돈'을 물쓰듯 펑펑 쓰고 돌아다녔지만, 그로 인해 수익을 창출한 곳은 '대기업 프렌차이즈' 정도였고, 일본 소상공인들에게는 별로 수익이 돌아가지 않아서 '서민 경제'는 빨간불이 켜진 셈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물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하는 바람에 외국인들은 자국에 비해서 엄청 싸다며 엄청나게 소비를 했고, 그로 인해서 일본 서민들은 '월급'은 오르지 않고, '물가'만 올라서 가뜩이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고 있는데, 외국인까지 무지막지하게 들어와서 '싹쓸이'를 해버리니, 일본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빈곤한 삶을 살게 되는 일이 벌어졌단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는 '이중가격제'를 허가하고, 외국인 손님과 일본 지역 손님에게 '가격차등'을 두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외국인들은 이를 '차별'이라 느끼고 일본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버리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관광대국'으로 성장하겠다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관광객을 향한 차별정책을 추진하는 이상한 행보를 걷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외국인 혐오'다. 외국 관광객이 일본을 찾아오는 것은 좋지만, '일본문화'까지 존중하는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절'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고 있다. 이게 단순 관광객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본으로 '이주'를 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감을 부추기는 일이 매우 빈번해졌다고 한다. 물론 일본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각자 '고국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일본에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살아가겠다면서 '민폐'를 끼치거나 '일본문화'를 폄하하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이주민들에 대한 반감은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정도를 넘어서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대우'를 당연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EU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젠지세대 시위'는 점점 극우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큰 문제다. 물론 EU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극우열풍(?)'이 벌어지고 있는 듯 하고, 특히 10대, 20대의 젊은 층이 그런 '극우세력화'하려 시위와 폭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 우려스러울 정도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극우화' 되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부담'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해 화가 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불똥은 외국에서 일자리를 찾으러 온 '외국 이주민'들에게 향하고 있다. 자국의 젊은이도 일자리가 부족해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외국 이주민이 들어와서 더욱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맞지 않은 점이 있다. 외국인이 구하는 일자리는 대부분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 낮은 임금의 노동이고, 자국의 젊은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는 '고학력, 고임금, 사무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은 세대들이 '같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극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국인을 너무 많이 받아들이게 되면 각국의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복지정책의 혜택'을 보게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젊은 세대가 폭발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내는 '세금'으로 외국인들을 먹여 살리는 정책에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세금인상'과 같은 정책을 쏟아내는 선진국에서는 더욱더 가열찬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프랑스가 그렇다. 엄청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세금인상안'을 내놓고, '복지혜택'은 줄이는 정책을 쏟아내자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다. 비단 프랑스뿐 아니라 '경제 적신호'가 켜진 나라들은 요즘 대부분 이렇게 성난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단다. 그리고 이들은 '외국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고 말이다.

트럼프 2기 정부가 들어선 미국은 어떤가? 관세 전쟁을 해서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부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실상은 만만한 '동맹국'들을 후려쳐서 뜯어낸 돈으로 잔치를 벌이려 했던 것이 들통났다. 그러다 대한민국 이재명 정부가 굳건히 버티며 불리한 협정문에 끝까지 사인을 하지 않자 '조지아'주 이민관리국(ICE)이 대한민국 국민을 불법체포감금한 뒤, 강제추방을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가 아니라 '미국인 일자리'를 늘려주기 위한 공장을 '대신' 지어주는 일을 하던 고급엔지니어들이었다. 그들은 '공장'이 완공된 뒤에 미국에 눌러앉아 살 사람도 아니고, 고국인 대한민국으로 되돌아올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이 한 일도 철저히 '미국인'을 대상으로 일자리를 늘려주기 위한 일을 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미국 당국은 이들을 '불법이민자' 취급을 했고, 미국에서 내쫓아 마땅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물론, 이 사건의 결말은 대한민국의 완승, 미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이민정책'에 완벽한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바로 이민으로 성공한 미국조차 '이민'은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이다. 이제 더는 '이민'을 환영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인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정상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끝나고 난 뒤의 '반세기 동안의 평화 번영'이 인류의 역사를 되돌이켜 봤을 때 '비정상'이었다는 말이다. 인류는 그만큼 폭력이 일상이던 삶을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럼 앞으로 '이민'은 절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가 펼쳐질 거란 예상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주'는 멈추지 못할 것이다. 왜? 평화가 지속되지 못하고 전쟁이 여기저기에서 터지게 되면 피치 못하게 '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재에도 아프리카 · 아시아에서는 정치갈등이 심해서 혼란 끝에 '내전'을 벌이고 있으며, 오랜 갈등과 내전으로 인해 경제적 빈곤을 겪게 되면 '먹고 살기' 위해서 고국을 등지는 '난민'이 속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이주'를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고 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분쟁으로 인해서, 경제적 빈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향하는 이주민들의 발길'은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유엔난민기구(UNHCR), 국제이주기구(IOM) 등에서 이주 난민을 도와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국제기구조차 '재정 부족'을 호소하며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선진국들의 경제여건이 지금보다 더 나았던 2010년대에도 '재정 부족'을 호소했는데, 요즘처럼 선진국들조차 '재정난'을 호소하며 내부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 얼마나 더 난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재정적 여유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재정 지원이 원활하다고 '난민 문제'가 단박에 해결될 일도 아니고 말이다. 유대인 경전 <탈무드>에도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줘라"고 말했다. 난민들에게, 이주민들에게 적은 임금이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주 효과적인 대책이란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가?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다. 인류 역사상 '일자리'는 늘 부족했고, 경제가 호황일 때에도 '외국인 차별'로 인해서 이주민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주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이주민들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게 어렵다는 말이다.

그럼 이주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훌륭한 이주민'에 대한 예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이 책에도 소개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가 전쟁을 피해서 미국에 이주했을 때, '외국인 이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했더라면, 오늘날의 미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또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정착했다면 오늘날의 초강대국은 아마도 '그 나라'가 아니었을까? 물론, 아인슈타인이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으니 '외국인 이주민'이었을지라도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뛰어난 인재'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지만, 평범한 외국인들은 입국을 거절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물론, 오늘날에는 그런 인재를 서로 영입하기 위해서 각국이 경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누가 얼마나 현명하고, 누가 뛰어난 업적을 남길 줄 알고 '골라서' 환영한단 말인가? 일단 누구라도 환영해서 받아들인 뒤에 잘 대우하고,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길 꾀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은 아닐까? 대만계 미국인 잰슨 황이 왜 대만이 아닌 미국에서 '사업'을 했겠느냔 말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이 '사업'을 벌이기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훌륭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인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 세계 모두는 '이주'에 대한 시선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와 그런 사회의 차이는 앞으로 더욱더 큰 차이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뭐, 독일의 메르켈 정책의 사례처럼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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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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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2>  베르나르 베르베르 / 이세욱 / 열린책들 (2023) [원제 : L'Ultime Secre (2001년)]

[My Review MMCXXX / 열린책들 25번째 리뷰] 지난 1권 리뷰에 이어 질문의 '답'을 먼저 말한다면, 인간이 느끼는 쾌락과 행복의 근원이 되는 위치는 바로 '뇌량'이다. 현재는 의학용어들을 우리말로 바꾸는 노력의 일환으로 '뇌들보(corpus callosum)'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좌뇌와 우뇌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신경세포가 집합된 곳'이다. 소설에서는 이곳에 전기자극을 주어서 '최강의 쾌락, 또는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고 했는데, 최근에 와서는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위치 많고,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밝혀냈다. 아직도 뇌의 신비는 모두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행복감과 '인위적인 조작'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만약 '자연적 행복'과 '인위적 행복'을 구분할 수 없고 똑같이 느낀다면 베르나르의 소설에서처럼 누구에게든 '뇌수술'을 시술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뇌수술'을 하지 않고도 '뇌들보의 쾌락 중추'를 강렬하게 자극할 수 있는 알약을 개발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법은 옳지 못한 것 같다. 행복의 느낌이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그 느낌의 정도가 똑같든, 같지 않든 간에, 일상 생활에서 '쾌감'과 '행복'을 누릴 만한 행동과 일을 한 뒤에 받는 '보상'이 아니라, 단지 '버튼'을 누르는 행위나 '알약'을 삼키는 단순함을 통해서 얻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인간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의 쾌감과 가족의 행복을 얻으려 윤리도덕적인 바른 생활을 하려 노력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그저 '버튼'의 쾌감과 '알약'의 행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버튼과 알약을 차지하려 폭력을 쓰는 것조차 자제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중화' 되고 언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게 된다면 쾌감과 행복의 오남용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우려스러운 상황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사무엘 핀처'가 뇌수술을 받고 난 뒤에 보여준 말과 행동의 과격성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쾌락의 중추'에 전기자극을 줄 수 있는 스위치를 얻기 전에는 선하고 품위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하지만 '그 스위치'를 손에 넣게 되자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빠져들어서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계속 더 많은 자극, 더 강한 자극을 원할 뿐이었다. 그러다 '치사량'이 넘는 자극을 주었다 판단하여 스위치를 멈추는 순간, 사무엘 핀처는 "멈추지마! 더 자극해달라고!"라면서 자제심과 이성을 잃고 오직 쾌락만을 쫓는 야수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다 자극을 그만 멈추고 쾌락 수위가 현저히 낮아지고 나서야,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 절제하지 못한다면 자칫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사무엘 핀처는 '행복 스위치'를 타인에게 넘겨 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스위치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 바로 장루이 마르탱이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핀처는 '행복 스위치'를 누를 수 있는 '동기'가 필요했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목표달성을 했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는 방식이어야 했다. 핀처는 그 동기로 '체스 대결'을 선택했다. 바로 이 '체스 대결' 이야기가 소설의 맨 처음에 보여주었던 '컴퓨터와 인간의 대결'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소설의 전개 방식을 상당히 흥미롭다. 현재에 벌어진 '살인 사건'을 추적해 나가는 이지도르와 뤼크레스 두 탐정(?)을 가장한 두 기자가 감춰진 비밀을 풀어나가고,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거듭 교차하면서 하나씩 나타나는 단서를 풀어서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다. 그 과정중에 밝혀지는 '뇌의 비밀'이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다. 그래서 겉으로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처럼 보이지만, 다 읽고 나면 '인간의 뇌에 감춰진 신비'가 한가득 풀어헤쳐 진다. 마치 한 편의 <백과사전>을 다 읽고 난 듯한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된다. 이게 베르나르 소설의 특색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20여 년이나 지난 '낡은 지식'이긴 하지만, 아직도 '뇌 연구'는 속속들이 밝혀진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기에 베르나르의 <뇌>로 호기심을 가득 품고서, 본격적인 '뇌 탐구'로 들어가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이 처음 나왔던 시절에는 '컴퓨터'와 '인공지능'에 관한 풍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불과 20여 년 만에 그쪽 분야는 눈부신 발전과 성과를 이미 얻어냈다. 그래서 인간보다 더 뛰어난 '초인공지능(AGI)'이 곧 실현될 것으로 전망하는 지금에 와서, 고작 '체스 대결'로 인간을 이긴 컴퓨터가 세계 최고의 대우를 받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옛이야기가 되버리고 말았다. 짧게는 5년, 길게 보면 20년 안에 인간의 뇌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AGI가 상용화될 것이다. 그 때에는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 제발 인간이 초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설령 노예가 될 수밖에 없더라도 초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윤리도덕적으로 선한 행동만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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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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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 문학과지성사 (2010)

[My Review MMCXXIX / 문학과지성사 5번째 리뷰] 거듭 말하게 되지만, '한강 소설'은 내게 어렵다.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가 강렬하게 빛나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끌어들여 찬란한데도 감탄할 수 없고 경건하다 못해 위축 들게 만들곤 하기 때문이다. 이게 내 솔직한 감상이라 할 수 있겠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서 그녀의 소설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소년이 온다>를 맨 처음 읽었고,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도 바로 이어서 읽었다. 그리고 살짝 텀을 두고서 <희랍어 시간>과 이 책 <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게 되었는데, 좀 힘들었다. 여느 통속소설과 같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가족'을 그리고 있지만, 한강 작가는 전혀 통속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자를 어두운 심해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깊고 깊은 심해가 주는 '경이로울 정도'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은 곧 '죽음'과 마주할 용기가 있어야 했기에 무척이나 이겨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도 '화가 서인주의 죽음'이 주된 이야기였다. 그녀의 친구인 이정희는 '자살'이 아니라 주장했지만, 평론가이자 그녀를 사랑했던 강석원은 '자살'로 기정사실화 한다. 그리고 서인주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살인사건(?)의 단서처럼 제공 되다가 마침내 마주하게 된 '진실'이 밝혀지자, 모두는 결국 '혼돈'속으로 빠져들고 말게 된다. 이런 이야기 전개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한강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서는 술술 잘 읽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서인주의 죽음이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피안의 세계'였고, 그렇게 밝혀진 진실이 주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기보다는 '혼돈'에 빠뜨리고 말았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결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또 이해하기 힘든 점은 '먹'으로 그려진 그림에 대한 예술적 감각과 효과, 그리고 그에 따른 해석과 감춰진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미술에 대해서 '문외한'과 다를 바 없는 나로서는 도무지 아리송할 따름이었다. 다만, 천문학적인 지식을 열거하며 서술하는 것을 통해서 '간접적'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지만, 문학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이 비문학적 관점을 더 많이, 더 자세히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무슨 의미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눈이 녹으면?"이라고 운을 띄웠다면, 이과적 독자들은 "물이 된다"라고 태연하게 답을 하겠지만, 문과적 독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봄이 오지요!"라고 답을 할 거라고 한다. 이런 답을 들은 이과적 독자들은 깜짝 놀라고 만다. 눈은 당연히 '고체화 된 물'이기에 상온에서는 자연스럽게 '액체화 된 물'이 될 것인데, 눈을 '물'이 아닌 '겨울'로 이해하고, 시간적 흐름에 따른 계절적 변화를 머릿속에 떠올려서, 눈이 녹는 계절인 '봄'이 온다는 서정적인 답을 내놓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신기할 따름인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는 [LIFE]라는 글자를 보면 문과적인 독자들은 '삶'이나 '인생'으로 이해하겠지만, 이과적인 독자들에겐 'Li(리튬)'과 'Fe(철)'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과적 관점이 더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과적 독자들이 정말 신기한 사람들로 인식될 것이다.

나에게 한강 소설은 그런 면모로 다가 온다. 물론 나에게 '문학적 이해력'이 많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실제로도 나는 '소설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은 편이긴 하다. 뭐, 무협지나 애정소설, 미스터리(추리)소설 같은 것도 '소설'로 쳐준다면 학창시절에 참 많이 읽긴 했지만, '순수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문학소설을 섭렵하지 못했다. 그래서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난 다음에 특히 '문학소설'을 많이 읽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뒤늦게 시작한 '만학도의 한계'를 한강 소설을 통해서 절실히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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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중국, 초강대국이 될까? - 책가방문고 22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3
안토니 메이슨 지음, 전국사회교사모임 옮김, 백승도 감수 / 내인생의책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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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3 : 중국, 초강대국이 될까?>  안토니 메이슨 / 전국사회교사모임 / 백승도 / 내인생의책 (2010)

[My Review MMCXXVIII / 내인생의책 10번째 리뷰] 우리 청소년들이 '사회교과'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는 백과사전식 배경지식을 넓히고자 기획한 [세더잘 시리즈]다.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증을 따고서 참 많이 읽고 수업하는데 참고한 시리즈였다. 아쉽게도 100권을 채우지 못하고 시리즈는 마감되었지만, 애초에 기획한 '의도'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보탬이 되었으면 되었지 빼앗길 것은 없다는 생각 끝에 총정리를 하고자 한다. 딴에는 2025년인 '지금'에 와서 2010년의 '정보'로 가득한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의문도 들 것이다. 다시 말해, 케케 묵은 지식 말고 '최신 정보'로 가득한 새책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는 반문도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옛 지식보다는 새 지식을 배우기 위해 '새책'을 선호하는 것이 좋은 것은 두 말 하면 입 아플 정도로 맞다. 그러나 옛날 책이라고 '쓸모 없는 지식'만 담겨 있다는 오해는 하지 않길 바란다. 옛날 책이라도 책이 출간될 '시점'에는 늘 '최선 정보(지식)'를 담았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흘러간 만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정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 틀린 정보를 습득해서 잘못 이해하는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서 '새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공공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들은 대부분 폐기처분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 왜 폐기처분을 하지 않을까? 나름의 쓸모가 다 있기 때문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그 쓸모란 무엇일까?

이 책에서 중국은 서구 선진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을 하고 있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런 추세라면 중국도 미국과 맞대결 할 수 있을 정도로 '초강대국'의 면모를 보여주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15년이 지난 25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위상은 추락했고, 중국의 패권굴기(崛起:우뚝 일어섬)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의 질문인 '중국, 초강대국이 될까?'에 맞다고 답을 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세계질서를 선도하는 국가적 위상을 갖췄다기에는 중국이 너무나 편협하고 찌질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심지어 패악질이라고 비난 받을 짓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21세기 들어서 중국은 과연 어떤 나라였는가?

1980년대 이전까지 중국은 가난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사회주의 사상에 발목이 잡힌 '공산국가'라는 딱지를 벗어던지지 못했고, 산업시설은 후진적이었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낙후된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덩사오핑(등소평, 登小平)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도하면서 중국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고, 장쩌민(강택민, 江澤民)이 등장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발전의 시동을 걸었고, 90년대 이후부터 중국의 경제는 연 10%대의 높은 성장률을 보여주며 쑥쑥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로 인해 홍콩과 상하이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들어서게 되었고, WTO(세계무역기구, World Trade Organization)에 가입한 이후에는 엄청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며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서서 전세계 각국에 'Made in China' 제품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을 정도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나 미국과의 무역전쟁 이후 급격한 내리막을 보여주고 있어서 중국 경제에 적신호가 켜진 것 때문에 크게 위축된 현재다. 그렇지만 이 책이 출간된 2010년 당시만 해도 유명 기업 제품 가운데 'Made in China'가 찍히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계속 성장하게 될 중국이 '초강대국' 대열에 손쉽게(?) 진입하지 않을까 예상했던 것이다.

거기다 중국은 5000년 인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문화강국'이었기에 이런 예상에 청신호를 찬란히 켰던 것이다. 기원전 2000년 경의 '황하문명'으로 발원한 중국의 역사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 현대문명에 이르기까지 죽 이어온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전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청나라 왕조 시대를 마감하고 지난 100여 년간의 중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딛고 우뚝 일어선 중국이기에 더욱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폐쇄적인 공산주의 국가에 머물지 않고 '실용주의 노선'으로 자유시장경제에 진입함과 동시에 엄청난 성장동력을 보여준 중국 경제의 위력에 전세계인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10년대에 미국, 일본에 뒤이어 '경제대국 3위'에 입성한 저력을 보여줬으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넓은 영토, 10억이 넘는 인구, 풍부한 지하자원, 거기에 '문화강국'인 중국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성장할 것인지 기대를 한 몸에 받음과 동시에, 공산주의 국가가 세계적 패권을 거머쥐었을 때 세계 각국에 미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까지, 중국은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했던 것이다.

이 책도 바로 그런 궁금증에서 '중국의 초강대국 진입'에 귀추를 주목한 것이다. 그렇지만 25년 현재의 중국은 '초강대국' 진입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물론,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파워만 놓고 본다면 미국과 더불어서 '패권국가'로 우뚝 올라섰음을 의심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화강국으로서의 위상'이 형편없이 추락했다는 데 있다. 엄청나게 치솟은 국가경쟁력에 비해 이를 따라잡지 못한 '중국인들의 추태'는 세계 각국에서 수없이 입증되었으며, 오죽하면 '중국관광객 사절'이라는 문구를 심심찮게 볼 수 있고, '중국인들이 쓰는 돈'은 환영하지만,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례한 중국인들'은 절대 환영받지 못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대국(大國)답지 못하게 '열등감'에 쩔은 듯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서 '모든 것이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입만 열면 떠들고 있다. 김치도 중국꺼, 한복도 중국꺼, 심지어 한글도 중국꺼라고 주장을 하면서 '한국이 이 모든 것을 중국으로부터 훔쳤다'는 억지주장을 아무 근거도 없이 나불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10억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한목소리로 '맞다'고 우기는(?) 상황속에서 전세계인들은 한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비단 한국의 것만 '중국꺼'라고 우기는 것을 넘어서서 '전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들은 모두 '중국꺼'가 원조(?)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밀어붙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종이도 '중국 최초', 피라미드도 '중국 최초', 문자도 '중국 최강(그러니 '최초'가 당연!)', 언어도 '중국 최강(전세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니까!! 그러니 세계공용어로 영어가 아닌 중국어를 쓰는 것이 당연!!!)' 등등 뭐든 중국꺼가 최초, 최강이라고 갖다 붙이는 대결(?)이라도 붙은 것처럼 열을 올리고 있는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계인들을 상대로 중국인들은 다짜고짜 논쟁을 시작하며 목소리만 높일 뿐이니 피곤해진 전세계인들은 '중국인 사절'이라는 팻말을 세우고 대화단절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상식적이고 교양적인 중국인들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민폐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 있는 중국인들이 훨씬 더 많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책에서도 '문화강국'으로써의 중국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전세계적으로 '중국문화'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한 것으로 이미 정평이 나버렸다. 1990년대까지 전세계에 큰 인상을 주었던 '홍콩영화(중국영화)'도 21세기 들어서는 더는 매력을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진정한 매력은 '남'이 추켜세울 때 발산되는 것이지 '나' 스스로 매력적이라고 강조를 하게 되면 되려 반감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매력적이어서 전세계가 인정해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이는 중국사회가 '폐쇄적인 탓'이 가장 클 것이다. 모든 정책은 중앙정부인 '공산당'이 알아서 밀어붙이고, 외국의 문화는 자국의 실리에 보탬이 되는 것만 '골라서(?)' 받아들이고, 건전한 비판마저 공산당이 '걸러서' 중국인들에게 전달하고 있으니, 정상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고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채 삐딱하게 발전한 탓이다. 그래서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중국문화'가 아무리 멋져 보여도 '중국인들의 유치찬란한 자화자찬'으로 인해 매력이 감퇴될 뿐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문화가 제대로 성장할 턱이 없다.

이런 기형적(?)인 중국의 성장에 전세계인들은 우려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이 책이 출간될 즈음인 2010년대만 하더라도 '중국의 높은 성장률'에 한껏 기대감을 품었지만, 중국은 성장한 만큼 인류공영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국가로 낙인이 찍히고 만 셈이다. 이런 중국이 세계 경제를 주름 잡는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는 것을 달가워할 세계인이 있을 턱이 없다. 당장 중국 경제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조차 '중국돈(차이나 머니)'만 환영할 뿐, 그에 걸맞는(?) '중국의 간섭'은 달가워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 여기저기에서 펼쳐지고 있다. 일례로 중국의 시진핑(습근평, 習近平)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신 실크로드)' 구상에 협력하고 있는 나라들도 중국의 도움으로 경제성장을 꾀하려 하고 있지만, 원치 않는 중국의 간섭에 몸살을 앓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패권국가로 거듭나려는 중국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미중 무역전쟁'을 벌이며 'G2 국가' 대결 양상을 보여 줬다. 하지만 이 대결은 미국의 추락과 중국의 선방으로 인해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혼돈을 부추겼고, 급기야 중국을 상대로 압도적 파워를 보여주지 못한 트럼프 미정부는 도리어 '동맹국 압박'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패악질과 잇따른 헛발질로 인해 더욱더 추악한 모습만 보여줬을 뿐이다. 이제 초강대국으로 인정 받는 미국이 쓸쓸한 퇴장을 받기 일보 직전인데, 과연 미국은 퇴장을 극복하고 다시 '정상화'를 할 수 있을지, 중국은 그간 선방하긴 했지만, 그로 인한 중국의 약점 또한 여실히 드러난 만큼 이를 개선하고 재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지 후속 조치가 궁금해진다.

이제 국제상황은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초강대국으로 불리던 미국의 위치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중국은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하려다 좌초를 맞이한 형국이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정치, 경제의 재편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새롭게 초강대국 자리에 우뚝 올라설 국가가 누구일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5년 현재까지 '초강대국 지위'는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도 옛날의 미국이 아니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다시 말해,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란 말이다. 이런 혼란한 정국에서 새롭게 급부상할 나라는 과연 어느 나라일까? 그 나라가 대한민국이길 바란다. 물론 피지컬 파워에서 꽤 불리한 건 사실이지만, '소프트 파워'에서 대한민국은 결코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뒤쳐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전세계가 극찬하는 '한류열풍'은 괜한 것이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까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를 내세운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이 초강대국이 되는 것에 반대할 나라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아주 크게 작용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십분 활용해서 세계적인 '선도국가'로 발돋움함과 동시에 강력한 역량과 영향력을 발휘하여 군림하지 않는 '패권국가'로 전세계를 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량을 2025년 현재 국제무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이대로 계속 나아간다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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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전쟁 2.0 - AI 세계 전쟁의 실체와 대한민국의 전략 카드 AI 전쟁
하정우.한상기 지음 / 한빛비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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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전쟁 2.0 : AI 세계 전쟁의 실체와 대한민국 전략 카드>  하정우, 한상기 / 한빛비즈 (2025)

[My Review MMCXXVII / 한빛비즈 173번째 리뷰] 요즘 관심사가 급등한 주제가 있다. 다름 아닌 '인공지능(AI)'이다. 책을 봐도, 너튜브를 봐도, 온통 '인공지능 이야기'가 쏟아지듯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의 입에서도 "학교에서 내준 과제 때문에 '인공지능' 관련 책으로 수업을 하면 좋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이후에 '인공지능의 개발속도'는 눈부시게 발전할 것이고, 너희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인공지능 비서'를 스마트폰처럼 전국민이 하나씩 가지게 될 거라고 예언을 하듯 말했는데, 얼추 비슷하게 때려 맞춘 듯 싶다. 그래서 AI 관련 책을 자주 읽게 되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우울한 기분이 들곤 한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AI는 어떤가? 참 편리한 '도구'처럼 느껴진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엄청나게 압축해서 '요점정리'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처리속도'다. 정말 순식간에 해버린다. 만약 '인간'이 그런 작업을 대신했다면 몇 달 며칠이 걸렸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AI는 그걸 불과 몇 분, 아니 '몇 초'만에 뚝딱 해버린다. 더구나 그 '정확도'는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다. 그러니 이런 'AI 기술'을 경쟁적으로 더 뛰어나게 개발에 나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결과, 곧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 인공 일반 지능)로 업그레이드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인공지능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 '인간의 개입'이 필요했지만 '인공 일반 지능'이 탄생하는 순간부터는 더는 '인간의 개입'이 필요없게 될 뿐만 아니라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지능으로 스스로 판단하여 알아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 남지도 않았다. 짧게는 2년에서 길게 잡아도 5년 이내에 AGI를 만들어낼 기술이 개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특이점(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게 되는 순간)'을 2040년 즈음으로 전망한 것에 비해서도 무려 10년 안팎으로 앞당긴 셈이다. 물론 예상치 못한 여러 변수로 인해서 개발이 늦춰질 수도 있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봤자 10~20년 사이에 인간보다 더 월등한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이 탄생할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 AGI가 개발 완료되는 순간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까? 현재로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길, '인간의 노동'이 더는 필요치 않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를 두고 '다크 팩토리'로 부르고 있다. 말 그대로 '불 꺼진 공장'이란 얘긴데, 인공지능 로봇이 생산공장 라인에 깔리게 되면 '인간의 노동'을 완전히 대체하게 될 것이고, 인간이 없는 공장이므로 환하게 불을 켜둘 필요도 없게 된 셈이다. 그것도 24시간 풀가동을 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의 노동을 '인공지능 로봇'이 대체하게 되면, 기업은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고, 그로 인한 다량의 상품 판매로 인해, 엄청난 수익을 얻게 될 것 같지만, 노동에서 배제된 인간은 '임금(월급)'을 받지 못한 실업자로 전락하고 말테니, 상품을 살 여력이 없어서 경제는 폭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첨단기술력이 앞선 나라가 뒤쳐진 나라에게 수출을 해서 엄청난 수익을 얻는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뒤쳐진 나라에서 '상품 경쟁력'에서 밀린 '자국 상품'이 팔리지 않을테니, 후진국의 경제가 급속도로 위축될 것이며, 그로 인해 상품구매력도 현저히 낮아져서 심각한 무역불균형으로 인한 세계경제가 폭망하게 되는 시나리오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로봇세' 같은 것을 법률로 보장하고, 노동하지 않는 인간에게도 공평하게 '기본소득' 같은 명목으로 지급을 하게 되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 기본소득이라는 것이 풍족하게 주어질 리 만무하며, 딱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줄 것이 뻔하고, 삶의 질은 현저히 낮아져서 '우울, 자살' 등과 같은 일들이 더욱 빈번해질 것이며, 이에 참지 못한 이들이 '시위, 폭동'을 대규모로 일으켜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말이지 지옥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 같지는 않은가? 이렇게 지옥이 된 근본적인 까닭은 바로 극소수의 최상류층과 대다수의 극빈곤층으로 나뉜 사회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원천기술인 'AGI 소유' 여부에 따라서 이처럼 사회갈등은 극명하게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AGI보다 월등히 뛰어난 성능을 가진 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 : 초인공지능)로 개발이 되면, 이젠 '인간의 지적 영역'을 초월한 인공지능이 탄생하게 되기 때문에 인간은 더욱더 인공지능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될 것으로 전망한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초인공지능으로 발전한 존재가 등장하면 인간사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 해결을 위해 ASI에게 묻게 되면, ASI가 알아서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ASI가 해결까지 완료한 뒤에 인간에게 그냥 '통보'만 해주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개입'이 원천적으로 필요가 없게 된다. 이건 달리 말하면, ASI가 해결해 버린 일을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ASI에게 '어떻게 해결한 것'인지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이때 ASI가 대답한 내용이나 '해결과정'을 인간의 지능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ASI가 제공하는 편의만 누릴 뿐, 더는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남지 않게 된다.

자, 그럼 이런 세상이 되었다고 치자. 과연 인간은 뭘 하며 살아야 할까? 모든 일은 '초인공지능'에게 맡기고 인간은 그저 '놀기만 하면' 될 것이다. 아무런 걱정도 없이, 고민도 없이 '초인공지능'이 대신 일을 하고, '초인공지능'이 제공하는 편의를 누리며 신 나게 놀면 된다. 과연 이런 삶을 사는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 또한, 초인공지능 덕분에 '인간의 질병'을 모두 낫게 할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은 '영생'을 누리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뭐, 난치, 불치의 경우엔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면, 인간의 몸을 '기계'로 대체하여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될 지도 모른다. 심지어 '인간의 기억'까지 새로운 저장매체에 '영구저장'을 할 수 있음으로써, 비록 육신은 썩어 문드러져도 '자신만의 정체성'을 영구히 간직할 수 있게 되어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상은 여기까지 워워~하기로 하자.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AI 기술 개발을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니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에 빠진다. 대한민국은 이런 '선택'을 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똑같은 '선택'을 할까? AI 기술력 패권을 선점하게 되었을 때의 '이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AI 기술은 '멈출 수 없는 기차'에 올라탄 것처럼 개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먼저 선점할 것인가? 불과 2년 전 <AI 전쟁>이란 책을 펴냈을 때만 해도, '미국과 중국' 그 다음은 '대한민국'이 가장 유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6위권이라고도, 10권이라고도, 어떤 곳에서는 20위권 밖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볼 수 있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뭐, 어느 한 가지 문제 때문에 이런 결과를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난국'이라고 봐야 할 정도란다. 그 자세한 문제들은 이 책 <AI 전쟁 2.0>에 상세히 나와 있으니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다행히 짧은 시간에 많이 뒤쳐지긴 했지만, 아주 늦은 것도 아니라는 진단도 함께 나오고 있어서 안심이 되긴 했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AI 기술 패권 경쟁에 뛰어든 각국의 치열한 상황을 보고 있으면, 우리도 뒤쳐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뛰어난 지능을 가진 AGI를 '악용'하지 않고 선한 '쓰임새'로만 쓰면서, AGI가 보편화된 사회에 인간이 잘 적응하기까지 서서히 변화하는 안정적인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누가 어떤 의도인지는 몰라도 '기술 패권'을 선점하기 위해 '급발진'을 하는 순간, 이 모든 평화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순순이 '후발주자'가 되는 것을 만족스러워 할 수도 없다. 후발주자가 되는 순간, 경쟁에서 밀리게 되고,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될 것이며, 다시는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선점'을 해서 너무 앞선 기술을 갖추게 되면, 그 역시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저자들은 '인류도 언젠간 멸망하게 된다'는 말을 빼지 않았다.

결국 '멸망'이란 단어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도 AI 기술을 개발해야만 하는 걸까?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인류멸망의 시점이 30세기일지, 40세기일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그때가 되면 인류는 '지구를 벗어나' 외계행성이나 거대한 우주선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상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일론 머스크는 인류를 화성으로 보내려고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완전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난 '지구'를 떠나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도 벗어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AI 관련 책을 보면 생각만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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