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자풍 1 - 쾌자 입은 포졸이 대륙에 불러일으킨 거대한 바람 쾌자풍 1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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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쾌자풍 1 : 쾌자 입은 포졸이 대륙에 불러일으킨 거대한 바람>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V / 해냄 3번째 리뷰] 리뷰가 많이 늦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근래에 지독한 '슬럼프(?)'를 겪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더위'를 먹은 탓인지 좀처럼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닌데, 읽는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기도 했고, 암튼 그랬다. 덕분에 한 일주일 가량 'K-POP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만 줄기차게 보고 또 보았다. 헌트릭스의 '골든'과 '테이크 다운', 사자보이즈의 '소다팝'과 '유어아이돌'만 온종일 흥얼거리며 멍 때리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벌써 한 달 내내 그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이우혁의 역사소설(?) <쾌자풍>이다.

뭐, 이우혁 소설을 리뷰하면서 <넷플릭스>에서 대박을 터뜨린 '케데헌'을 이야기하는가 싶지만, 묘하게 '연관성'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직접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직접 언급하기도 했지만, 한국인과 중국인의 '정서(?)'가 비슷하면서도 확연하게(!) 구분되는 무엇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충(忠)'과 '의(義)'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는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뭔가 감이 오시는 분들이라면, 국가 차원의 문제가 발생하고 '국가 위기'에 당면했을 때,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충'을 앞세워서 개인적인 희생이 따르더라도 일단 '국가의 위기', 달리 말해 '모두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서 일치단결 하는데 반해서, 중국인들은 국가적인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그것이 '개인적인 의리'와 연관이 없으면 일단 '나몰라'라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면하고 난 뒤에야, 홀연히 등장한 '영웅(?)'이 있어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맞서 싸우는 희생적인 모습을 재확인(!)하고 나면, 그때서야 '의리'를 내세우며 단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런 미묘한 차이가 '제삼자(특히,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국인'과 '중국인'은 명백하게 그 차이점을 알아채고, 서로를 구분할 수 있고, 그 미묘한 차이점 때문에 한국인과 중국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도대체 '충성'과 '의리'의 차이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충신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변치 않고', '흔들림 없는' 꼿꼿한 성정을 떠올린다. 이는 동아시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잘 보여주듯 죽으면 죽었지 '불충'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한다. 허나 중국인들은 왕조가 짧고 자주 바뀌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처럼 꼿꼿한 성정의 충신 이미지를 찾기가 힘들다. 그보다는 '실리'를 따지고 '개인적인 의리'를 따지면서 그때, 그때에 따라서 '다른 말(?)'을 내세우는 등, 우리가 보기에는 충신치고는 변덕이 죽 끓듯 하다 싶은 사람조차 '충신'이라고 하는 등 쫌 그렇다. 대신에 '의리'를 앞세우다보니 누군가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펴며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런 의리(?) 지켜야 중국인답다는 것인지 모를 엉뚱한 모양새를 보이기도 한다. 뭐, 극단적이긴 하지만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만물중국기원설' 같은 것들이다.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막무가내 식의 '억지주장'을 곧이 믿을 사람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어떤 중국인이 그게 맞다!'고 억지주장을 한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맞다!'고 동조하는 것이 최고(?)의 '의리'라고 여겨서 13억 중국인이 한 목소리도 '헛소리'를 주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걸 보는 중국인들은 대다수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조금만 생각을 하면 '틀린 주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일단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중에 '수정'을 하든, '사과'를 하든, 그건 나중일이고, 일단은 중국인끼리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틀린 것을 알면서도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싶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팩트폭격'을 날리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틀린 건 틀린 거고, 맞는 건 맞다고 '옳은 소리'를 곧잘 한다. 그리고 이런 한국 사람들의 성향은 '충성'에 충실한 모양새를 잘 보여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절대 '충성'을 다하고, 옳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 성정이야말로 '한국인답다'고 할 수 있다.

암튼, 요즘 '케데헌'이 인기몰이를 하며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다. 무슨 일에서건 '충성'을 다하는 한국인의 문화가 전세계인들의 눈에 보이게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에 반해서 '의리'에 따르며 경우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스런(?) 중국인의 문화에는 공감하기 힘들어하고, 더 나아가 '억지주장'을 하면서까지 한국문화를 깎아내리려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한국문화'가 원래는 '중국의 것'이었다면서 은근슬쩍 숟가락 얹으려는 속셈을 뻔히 드러내고, 심지어 '중국의 것'을 빼앗아(?) 갔으면서도 중국에 고마워하지도 않는 '한국사람들'이 너무 뻔뻔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고 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도 당한 서양인들조차 중국인들의 뻔뻔스러움과 억지주장에 두손 두발을 다 들고 만 모양이다.

자, 그럼 이제 이 소설의 내용을 소개하겠다. 저자가 밝혔듯이 이 소설은 '무협소설'이 아니라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역사적인 사실(팩트)에 허구적인 '픽션'을 가미한 '팩션 소설'이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시대배경'은 15세기 명나라에서 벌어진 '탈문의 변'을 주요 사건으로 삼았다. '탈문지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벌어진 '토목의 변'을 알아야 할 것이다. 1449년 명과 몽골(오이라트)이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명 황제였던 '정통제'가 간신 왕진의 말에 속아 전투에 참전했다가 50만 대군이 몰살을 당하고 황제인 '정통제'마저 포로로 잡혀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 일을 '토목보'에서 벌어진 사건이라하여 '토목보의 변', 줄여서 '토목의 변'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황제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 명나라는 몽골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정통제를 앞세우고 몽골군대가 북경으로 밀고 온다면 명나라 군대가 아무리 많더라도 '황제의 목숨'을 두고 어찌 반격이라도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명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그런데 이때 충신이 등장해서 사태를 수습했으니, 다름 아니라 '새 황제'를 내세워서 포로로 잡힌 정통제를 대신하게 한 뒤에,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새 황제가 바로 정통제의 이복동생인 '경태제'다. 몽골군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굳건히 북경을 수비하는 명나라 군대에 막혀서 더이상 진군하지 못하자, 쓸모가 없어진 '정통제'를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명나라로 되돌려 보낸 뒤 철군하고 만다. 그래서 명나라는 졸지에 '황제'가 두 명이 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경태제를 옹립한 충신은 정통제를 '상황'으로 삼고 폐궁시켜 버리지만, 병약했던 경태제가 제위 8년만에 큰 병에 걸리자, 이를 기회로 삼은 정통제가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황제에 자리에 등극해버리고 만다. 이때가 1457년이었고, 이 사건을 '탈문의 변'이라고, 새로 연호를 '천순'으로 내거니, 그가 바로 '천순제'다. 한 명의 황제가 '정통제'와 '천순제' 두 차례나 황제의 자리를 앉게 된 셈이다. 이런 사태를 맞아서 명나라의 조정에는 어떤 파문이 일었겠는가? 누가 '충신'이고, 누가 '역모'를 한 것인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고변하는 일대 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암튼, 이때 명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충신이 바로 '우겸'이란 인물이다. 허나 천순제는 '우겸의 공'을 높이 사기에 앞서서 자신에게 '의리'를 져버렸다고 하여 황제에 재등극하고 난 뒤에 바로 처형시켜 버린다. 만약 천순제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우겸을 높이 평가하고, 청렴결백하고 사심 없었던 신하의 충심을 높이 평가하기만 했더라도 명나라는 큰 혼란을 겪었음에도 큰 어려움 없이 기강을 바로 잡아 태평성대를 누릴 수도 있었겠지만, 간신에게 놀아나던(?) 똑똑치 못한 임금이었던 '정통제'였기에, '천순제'도 변변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왕조시대에 '두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것을 곱게(?) 봐줄 수는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요는 이런 역사적 관점을 두고도 한국인과 중국인의 '인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통제와 경태제라는 '두 명의 임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명'이라는 나라가 맞이한 어려움을 해결한 것에 초점을 맞춰서 '국난극복'의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를 불충이라 여겨서 우겸을 충신 중의 충신으로 평가하겠지만, 중국에서는 아무리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불충'인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고, '의리'적인 관점에서도 정통제를 버리고, 경태제를 내세운 행위의 부당함을 내세워 처형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평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정난과 반정의 역사'를 봤을 때, 두 임금을 섬긴 이를 '충신'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다. 허나 계유정난의 공신들이나 인조반정의 공신들 가운데 '국가에 끼친 손익 평가'를 거쳐서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이런 평가에 있어서 '개인적인 의리'를 당연히 고려사항이 아니다. 오직 '국가를 위한 우국충정'만을 평가의 잣대로 삼을 뿐이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에는 이게 좀 애매한 예가 많은 모양이다. 뭐, 중국에서는 그런 '잣대(기준)'가 일반적일 수는 있겠지만, 한국인의 기본 잣대로 보면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고평가되고나, 정반대로 저평가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모양이다.

저자 이우혁은 이를 <쾌자풍>의 소재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포졸 복장인 '쾌자'를 입고서 대륙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이다. 뭐, 1권의 내용에서는 아직 '대륙'으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상황이고 '변죽'만 잔뜩 늘어놓은 지루한(?) 장황설로만 가득했다. 특히 조선 평안도 위화 고을의 포졸 '지종희'의 성격 묘사가 이야기의 2/3를 차지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특별한 능력이 있지는 않지만 중국의 무술 고수를 단 한 번의 몽둥이질로 제압해버리는 실력(?)을 선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자도 익히지 못하고 <소학>을 겨우 땐 까막눈(?)이지만 모국어인 조선말을 비롯해서 '북경어', '여진말', '몽골말' 등등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천재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이렇게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지 포졸'이 벌이는 일대 사건들마다 일사천리로 풀어내는 '해결사'의 면모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종 잡을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착한 성정을 지닌 캐릭터다. 그렇다고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냐 싶으면, 하는 말마다 '쌍욕'을 달고 살고, '품행' 또한 날건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도 않는다. 쉽게 말해 '말'보다 '주먹'이 먼저인 대책 없는 왈패 기질을 타고 났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망나니 같은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지만, 절대로 '국익'을 해치는 범죄나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는 짓을 저지르는 일은 극도로 조심하고 다닌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선'을 넘지 않는 아슬아슬한 맛이 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아니라 '그 이하'의 행동을 일삼는 천덕꾸러기라고 보면 딱 좋을 인물이다. 암튼, 그가 벌인 말썽 때문에 '지 포졸'은 조선을 떠나 중국 명나라에서 막중한 임무를 띠고 활약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2권에서부터 본격적인 '대륙적 활약'을 선보여줄텐데, 크게 기대는 안 하련다. 하는 짓거리가 대략 난감할 것이 뻔해서 말이다. 그래도 결코 부끄러운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선'을 분명히 지키면서도 '묘수와 꼼수'를 오가며 대대적인 활약을 펼쳐보일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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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뚝딱 누구나 쉽게 읽는 역사이야기 - 선생님이 쓴 누구나 쉽게 배우는 우리 역사와 문화
권혁운 지음 / 가온누리(도서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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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으로 뚝딱 누구나 쉽게 읽는 우리 역사이야기 : 선생님이 쓴 누구나 쉽게 배우는 우리 역사와 문화>  권혁운 / 가온누리 (2024)

[My Review MMLXXIV / 가온누리 1번째 리뷰] 이 책의 글쓴이는 '지적장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이른바 특수학교에서 장애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셈인데, 일반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학습이 느리고 힘겨워 하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나도 논술수업을 진행하면서 종종 '역사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역사의 개념은커녕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시켜주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역사수업'은 그저 외우기만 잘 하면 되는 '암기과목'이라고 여기기 십상이라,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단순 암기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접하게 되면,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구한 전통을 어찌 다 외울 수 있겠냐고 반문도 하지만, 그걸 제대로 이해하는 학생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 힘든 일을 하시는구나 하고 거듭 존경스러워 할 따름이다.

잘 아시겠지만, 한국의 역사는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고대 4대문명이라고 일컫는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고작 4000년 전에 불과하고, 이집트 문명은 3500년 전, 인더스와 황허 문명은 고작해야 2500년 전 문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도 역사 시대별 구분은 고작해야 7개 밖에 되지 않는다. 고조선으로 시작하여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그리고 대한민국이다.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일본은 섬나라여서 특수한 경우라고 치고, 가까운 중국조차 왕조국가만 27개인데 말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한국 역사의 자긍심'을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서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수난의 역사'만을 강조하곤 한다. 외부의 침략도 많았지만, 내부의 혼란도 참으로 많아서 백성들이 참 살기 힘들었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실 '천년 왕국'으로 널리 알려진 통일신라만 해도 '나당전쟁(670~676)' 이후 후삼국으로 갈라지기 전(9세기 말)까지 200년 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별다른 외세의 침략이 없었고,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며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런 혼란은 세계 어느 왕조시대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커다란 수난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니 이런 시기를 '평화롭다'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략(11세기)과 몽골의 침략(13세기) 사이 200여 년간의 평화가 있었고, 조선이 건국(1392년)된 뒤부터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기까지도 역시 200년 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또한 '병자호란(1637년)' 이후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도 200여 년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한 번 왕조가 들어서면 기본적으로 5~600년 정도는 유지한 것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가까운 중국만 해도 200년도 채우지 못하고 망해버린 왕조가 얼마나 많으냔 말이다. 그러니 '한국의 역사'를 마냥 '수난의 역사'라고만 퉁치고 넘길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 평화로운 기간 동안에 이룬 '역사적 업적'에 대한 평가도 우리가 새롭게 조명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은 'K-컬처(한류열풍)'로 전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음식이나 상품, 문화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앞에 'K-'만 붙이면 아주 좋은 것으로 인식될 정도를 넘어서 '고급'이라는 인상마저 심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좋았던 것을 우리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얼떨떨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역사를 다시금 되돌아보면 '과거'에도 분명 그런 '멋진 역사'를 가졌던 때가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옛날 '왜나라'는 백제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제의 모든 것을 숭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로 인해 '한반도'에서 왜로 넘어간 사람들을 '도래인'이라 부르며 환대를 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더구나 통일신라의 '울산항'에는 아라비아(인도 등지) 상인이 직접 찾아와서 무역을 하러 왔고, 실크로드의 '종착지'는 황금의 나라 신라였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고려의 제일 무역항 '벽란도'는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널리 알려져서 '코리아'라는 이름도 그 당시에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었냐 말이다. 이쯤 되면 우리 역사에서도 자랑할 것 투성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한국인은 '위기'에 강하다는 사실도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한민족'은 똘똘 뭉쳐서 어려움을 이겨냈으며, 나라가 망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되살려서, 결코 다른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고유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해내는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전세계 어디에도 이토록 오랫동안 '고유한 문화'를 지켜내고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널리 알려진 역사가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서양의 그리스로마 문화, 동양의 중국 문화를 빼고는 '한국의 문화'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일본처럼 '섬나라'가 아니라 '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지도 않았고, 정말 많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침략도 당하고, 교류도 정말 빈번했는데도, '한국의 문화'는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도리어 외국인조차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한국인'이 되길 원했다는 사실이다.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사실이다. 오늘날의 'K-컬쳐'가 괜히 붐을 일으킬 정도의 매력을 뿜뿜하고 있는 것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낭설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런 '위대한 역사'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수난의 역사'라고 자조적인 자세를 취했던 까닭은 지난 100여 년간 참으로 끔찍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경제위기 등등 말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그걸 다 이겨내고 오늘날의 영광을 맞이했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걸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왜냐면 '한국의 역사'가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숱한 어려움도 겪었지만, 그 위기를 겪을 때마다 우리는 똘똘 뭉쳤고, 결국엔 극복을 해낸 뒤에 전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화려하고 강력한 '문화의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자, 서론이 길었다. 이 책 <한 권으로 뚝딱 누구나 쉽게 읽는 역사이야기>는 이런 '문화의 힘'을 지니고 있는 우리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역사책이다. 지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집필한 역사책이기에 어렵지 않게 핵심만 쏙쏙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물론 초등학생들이 '처음으로 읽는 역사책'으로 삼기에도 딱 좋다. 자녀에게 '한국사'를 직접 가르치고 싶은 학부모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각 챕터마다 '우리 역사'를 잘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생생한 역사체험'을 경험시켜주고 싶다면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역사를 '암기'하는 것에 집중하는데 그치지 말고, 자랑스럽고 위대한 우리 역사를 가르칠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가르치길 바란다. 한국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런 역사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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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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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 창비 (1995) [개정판 2006년 / 개정증보판 2025년]

[My Review MMLXXIII / 창비 10번째 리뷰]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조직'에 가담한 것이 이유가 되어서 귀국하지 못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자 홍세화는 그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서 빠리에 정착하게 되었단다. 대한민국만 안 되고, 어느 나라에나 거주할 수 있는 특이한 여권을 들고서 말이다. 홍세화는 그렇게 프랑스에 '난민 신청'을 하게 되었고, 택시 운전사가 되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빠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서 훗날 1995년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저자를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독재 세력'이 온갖 부정부패로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던 그때가 되어서 말이다. 그리고 '똘레랑스(굳이 따지자면 '관용 정신')'라는 개념으로 당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만들었고,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진지한 성찰을 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책'이기도 하다. 한국사람들은 '정(情)'이란 감정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프랑스사람들은 '똘레랑스'란 독특한 이성으로 무장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홍세화를, 프랑스 사회는 기꺼이 받아주더라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2025년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과연 '똘레랑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저출생 문제로 인해서 '인구절벽'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초고령화 문제로 인해서 우리 사회의 '경제성장의 동력'이 점차 둔화될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인구가 절감하게 된다면 2050년 무렵이면 한국사회에서 '한국인'은 멸종할 수도 있다는 빨간등이 번쩍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심각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한국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출생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법이다. 무작정 한국여성에게만 아이를 둘 이상 낳으라고 강요하는 방법이 아닌,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젊은 나이에 연애와 결혼,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돌아서고, 이를 위해서 정부는 젊은이들이 자녀를 낳고 기르는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정책에 올인을 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방법이 그동안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닥 희망이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한국사회의 인구를 늘리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솔직히 이 방법 말고 다른 대안은 거의 없다. 딴에는 '통일 한국'을 이루어서 북녘에 있는 25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 방법에는 '통일 비용'이라는 또 다른 천문학적인 비용이 별도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저출생과 초고령화에 드는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부담'만 더욱더 가중시키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이민'을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민'에 대해서 긍정적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민'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이민자'에 대한 시선 또한 결코 곱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 나라보다 '선진국'이고 '강대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이민'을 오고 싶어하고, '귀화'를 하려는 모습을 볼 때에는 그닥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있긴 하지만, 무슬림과 같은 '특정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나, 화교와 같은 '특이한 사상'에 물든 집단에 대한 혐오 따위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려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이질적인 문화'로 인한 불편 내지 불쾌함 때문에 절대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연 우리가 '똘레랑스'를 발휘하여 이를 극복해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홍세화는 왜 똘레랑스를 강조했던 것일까? 30년 전에 프랑스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무엇 때문에 홍세화는 그렇게 감개무량했던 것일까? 이건 거꾸로 생각을 해봐야 이야기를 수월하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99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난민'을 신청한 외국인이 있었다면,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그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일단 프랑스사회에서는 그게 가능했었다. 귀국을 허락치 않아서 오도가도 못하던 홍세화를 기꺼이 받아주고, '택시 운전사'라는 일자리도 제공했으며, 프랑스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수많은 프랑스사람들이 '외국인'이었던 홍세화를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며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는 이게 가능했을까? 외국인은 차치하고 '홍세화'라는 이질적(?)인 정치사상조차 받아들이지 못해 내쫓은 사회였는데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25년의 대한민국도 그리 달리진 것은 없다. 지금도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대기하고 있는 '난민'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그나마 몇몇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난민신청'을 통과했더라도 한국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위해서 '자국의 문화'를 완전히 버리고 '한국 문화'를 완벽하게 받아들일 각오(!)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하기 힘들다고 한다. 난민신청보다는 조금 수월한 '귀화신청'조차 녹록치 않다. 한국인과 결혼을 한 '배우자 특별전형'이 아니고서는 결코 쉽지 않은 귀화인데, 그조차 '취업'을 목적으로 한 사기행태가 만연하자, 단순히 '결혼한 사실'만 증빙해서는 허락치 않는 쪽으로 선회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과연 이런 한국사회에서 '똘레랑스'가 온전히 받아 들여졌다고 볼 수 있을까?

비단 한국사회만 탓할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경기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프랑스사회'에서도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극심해지고 있고, 특히 '이민자'에 대한 거부감과 피로감까지 서슴없이 내비치고 있기에 홍세화가 말하던 '똘레랑스' 가득한 프랑스사회는 현재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극우정당의 우세'를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죽하면 '이민자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조차 '불법이민 단속'에 나서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이민자라 할지라도 '백인이 아닌 인종'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추방조치를 취하고 있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태는 정말이지 볼썽사납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과연 이런대로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요구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딴에는 그렇다. 우리 속담에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홍세화도 과거 30년 전에 풍요로운 프랑스 사회였기 때문에 '난민'으로 환영받을 수 있었지, 오늘날과 같은 혹독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프랑스 사회였다면, '아시아계 이민자'라는 딱지로 인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하기 딱 좋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대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문화조차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땐 나몰라라 하고 말 것인가?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로 작정한 이상, 인간은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야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건 '똘레랑스'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이상향'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고자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살만한 세상인 셈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착한 사람이 훨씬 더 많기에 살만한 세상인 것이다. 만약 이런 믿음마저 사라져버린다면 그땐 정말 인간 멸종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을 한 '짐승'들만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을테니 말이다.

솔직히 홍세화가 이 책에서 말한 '똘레랑스'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홍세화도 언급했듯이 '우리말'로 적절히 뒤쳐낼 문화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굳이 따져서 '한국인의 정 문화'에 빗대어 놓기도 했지만, 그것과 '프랑스사람들의 똘레랑스'는 또 다른 결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뭉뚱그려서 '관용 정신'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너그럽게 대하는 자세만으로 보기에 모자른 감이 없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서야 비로소 '너그러운 자세'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위치에 있을 때에는 '너그러울 수 없'지만, 똘레랑스는 높낮이와는 아무 상관없이 펼쳐 보일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이를, 한국인의 감정적인 자세와 프랑스인의 이성적인 자세를 비교하면서 풀이하기도 했지만, 이성적인 한국인도 '똘레랑스'를 구현하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점이 분명히 있긴 하다. 암튼 '똘레랑스의 본질'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더라도 상관은 없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한국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 나가면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꼭 '프랑스식 원조 똘레랑스'여야만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국식에 걸맞는 '똘레랑스'로 만들어서 대한민국을 아름답게 만들고, 그걸 또다시 한국식으로 포장해서 '역수출'하면 그뿐이다. 오늘날의 '한류열풍'처럼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를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 선진국이 되었다. 비록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네 인심'을 전세계에 널리 나눠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더구나 전세계가 '한국 문화'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럴 때 보여주면 된다. 잘난 척이 아니라 '진정한 멋'을 보여주면 그뿐이다. 30년 전에 홍세화가 겪은 '똘레랑스, 그 멋짐'을 우리에게 소개해줬듯이, 이제는 '한국 문화의 멋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해야 할 때다. 그리고 여전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똘레랑스, 그 이상'을 발휘해서 차근차근 해결해가려는 노력이 절실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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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 - 세계문학 전집을 읽으며 나를 찾아가는 시간
최에스더 지음 / 사부작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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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  최에스더 / 사부작북스 (2025)
[My Review MMLXXII / 사부작북스 1번째 리뷰] 책을 읽고 리뷰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중노동'에 빗댈 수 있을 정도로 고된 업무(?)였다. 대한민국의 '독서인구'가 선진국 가운데 최저인 상황에서 취미 삼아서 책을 읽는 분들은 그나마 많아졌지만, 책을 읽고 그에 따른 감상까지 일일이 독후감으로 쓰는 분들은 개중에도 드문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각종 '온라인서점'에서 블로그나 사락을 운영하는 분들이 써대는 리뷰를 보면 정말 많이 쏟아내듯 쓰고 있긴 하지만, '리뷰'에 쏟은 정성의 차이는 정말이지 하늘과 땅 차이를 방불케 하고, 그런 리뷰를 꾸준히 써내는 분들 또한 '편차'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읽고 쓰는 이'들 중에서도 읽는 사람만 읽고, 쓰는 사람만 줄곧 쓰고 있기에 차이가 극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평생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단 한 편의 리뷰'도 쓰지 않고 잘만 살고 있지만, 어떤 분들은 평생동안 '일만 권의 책'을 읽으려 들고, 읽는 족족 '리뷰'로 자신이 살고 갔다는 흔적을 남겨 놓기도 한다. 그 가운데 정말 글을 맛깔나게 잘 쓰시는 분들이 이 책 <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와 같은 '독서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한다. 나도 리뷰어로 20년 간 2000편이 넘게 쓰긴 했지만, 그런 행운(?)은 아직 만나지 못해서 참으로 부럽기 그지 없다.

  책 속에도 언급되긴 했지만, 나이 50살이 넘어가면 '세계 명작'이라 불리는 고전소설들의 내용이 느닷없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경험을 받게 된다. 물론 어릴 적부터 꾸준히 고전소설을 즐겨 읽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충족해야만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꼭 책을 많이 읽어야만 가능한 경험이 아니라 삶을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겪었다면 누구라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고전 명작'을 쓴 작가들도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어야만 자신의 작품 속에 잘 녹여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 어릴 적에도 어른들은 "만화책 같은 시시껄렁한 책만 읽지 말고 '한 사람의 인생'이 잘 녹아 있는 고전 소설을 많이 읽어라"라는 말을 종종 한 것이다. 어릴 적에는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내가 그때의 어른의 나이가 되고 보니 저절로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이게 '평범한 사람'이 깨닫는 지혜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지천명'의 나이(50살)가 넘어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는 인생의 참진리를 10대와 20대의 어린 시절에 깨우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게 깨달은 진리로 30대에 세상을 환히 밝힌 사람들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위인들의 삶'일 것이다. 이게 바로 고전 명작을 가까이에 두고서 즐겨 읽어야 하는 명백한 이유다. 학교 성적은 엉망이어도 세계 명작으로 손꼽히는 책들을 어린 시절부터 즐겨 읽었던 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서 세상에 펼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사례는 각종 '위인전'의 단골 스토리이기도 하다. 왜냐면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명작 소설을 잘 읽지 않는가? 사실 잘 읽지 않는 것보다는 '읽어도' 뭔 내용인지 갈피를 잘 잡지 못한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고전 소설 좀 읽어보셨다고 자부하는 분들조차 한 번 읽기에도 버거운 '벽돌책'이 있는가 하면, 원체 어려운 내용인데다 따분하기까지 한 '딱딱한 어조'로 인해서 단 한 줄만 읽었을 뿐인데 졸음이 쏟아지게 만드는 '지루한 책'도 읽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전 소설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다고 깔깔대면서 읽는 독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지겹고 따분하지만, 그걸 꾹 참고 끝까지 읽으니 참 좋은 책인 것 같더라는 막연한 느낌만 받을 뿐이기에 접하기를 꺼리는 분들이나, 그렇게 읽기를 꺼리는 책도 있다. 그래서 '고전 소설'을 그럭저럭 재미나게 읽을 수 있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바로 이 책 <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의 저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착각은 금물이다. 아무리 재밌게 풀어서 설명해준 '리뷰'를 읽었다하더라도 '원작'을 읽어서 얻는 감동에 비하면 '새 발의 피'보다도 못한 아주 미세한 감흥 하나를 겨우 얻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전 소설'을 읽을 자신은 업으니, 남들이 써놓은 '짤막한 리뷰'를 대신 읽고 고전 소설을 읽은 척한다면 정말이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허튼 짓(!)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아무리 잘 쓴 리뷰일지라도, 그건 그저 '한 사람의 견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해하기에 너무 난해해서 '약간의 귀띔'을 받을 목적이라면 남이 써 놓은 리뷰가 정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리뷰만으로 '원작의 깊이'를 모두 이해했다거나 통찰할 수는 없는 법이기에 그렇다. 이는 '전문가'가 쓴 리뷰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답게 그들이 써놓은 '평론'이 아무리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고 이해가 쏙쏙 되는 문장 해독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평론'은 평론일 뿐, 결코 '대작'이라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된 말로 아무리 독설로 유명한 '평론가'라고 하더라도 일류는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면 평론가들 가운데 '일류'가 있다면 남들이 써 놓은 글에 대거리만 늘어놓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대작'을 써 놓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비유해서, 일류는 '명작'을 쓰지만 삼류는 '평론'을 쓴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리뷰어(평론가)를 폄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리뷰'에 감동해서 읽기를 그치지 말고, 반드시 '원작'을 읽고서 대작의 깊이를 스스로 느껴보기실 권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한편, 이 책의 제목이 <그 남자는 책을 읽었다>다. 후속작도 곧 나올 듯 한데 <그 여자는 길을 찾았다>로 잡은 듯 싶다. 이 때문에 '남자'는 책을 읽을 뿐이고, '여자'는 책 속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식으로 독자를 '성별'에 따른 차별을 심화시킨 것 같은 선입견을 주기도 한다. 또는 책을 읽는 행위가 주는 '남녀간의 차이'를 선별적으로 나눠서(?) 주는 것이라고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남자는 책을 읽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여자는 굳이 책 속에서 '살 길'을 찾아나서야 할 정도로 절박한 것 아닌가 싶은, 그런 느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후속작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책들을 따로 골라서 리뷰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적어도 우리가 '고전 명작'이라고 부르는 한에는 말이다. 책 내용의 깊이와 '성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시대적 배경'에 따른 한계점이 부각되느냐 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소위 '전근대적인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이 남성에 비해서 형편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지 아닌 지에 따라서 '여성의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만 구분될 뿐이다. 그리고 애써 이런 구분을 할 필요도 없이 오직 '인간문제'만이 있을 뿐이라는 올바른 시각만 가지고 있다면, 굳이 편견을 가질 것도 없다고 하겠다. 애초에 모든 소설 속 주인공들은 '문제의 원인'을 유발하는 존재일 뿐이다. 문제가 없다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고 말이다. 단지 그 주인공이 다수인 '남자'이냐, 소수의 '여자'이냐일 뿐이다. 이는 작가도 어쩔 수 없이 '경제적 여유'를 가진 독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그러니 그런 구분을 애써 나눌 필요는 없었을 텐데, 뭐, 굳이 책 한 권에 모두 담을 수 없어 '나누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볼 수도 있겠다. 이런 구분보다는 '주제별' 구분을 해서 나눴으면 더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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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3
이우혁 지음 / 미컴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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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3>  이우혁 / 미컴 (1999)

[My Review MMLXXI / 미컴 3번째 리뷰] 결론부터 말하자면, 26년 전에 '4권에 계속'이라고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미완성'한 작품이다. 당시 <퇴마록 : 세계편>을 완결하고 <퇴마록 : 혼세편>을 한창 연재하던 시절이었고, <퇴마록 : 말세편>을 예고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치우천왕기>도 '연재중'이었고, <왜란종결자>도 '집필중'이었던 시절이었을텐데, 왜 <파이로 매니악>을 연재 중단했던 것일까? 뭐, 알 수는 없다. 하긴 <치우천왕기>도 얼마 뒤에 '연재 중단'을 했다가 2010년이 넘어서야 새로운 출판사에서 '완결'을 했기 때문에, <파이로 매니악>의 팬들도 얼마간은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파이로 매니악>의 출간 소식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읽게 된 거라 분통을 터뜨릴 정도는 아니지만, 당시에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한 채 무작정 기다렸다면 꽤나 분노했을 거라 여겨진다. <치우천왕기> 때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암튼, 지금에 와서는 <뉴 퇴마록(가제)> 연재를 공표한 상태이니, 뭐든 기대하고 있다. <퇴마록 : 외전 3>에서 장준후가 세상을 구하고서 얻은 '권능'으로 '두 개의 지구'를 만들어서, 원래의 지구에는 '퇴마사'를 비롯해서 영능력자들의 모든 능력을 싹 제거한 뒤에 '현세적인 힘'으로 대결과 갈등을 벌이는 세계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 했고, 새로 만든 지구에서는 '퇴마사'들을 되살아나서..정확히 말하자면, '퇴마사'들을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서 '징벌자와 구원자'가 모두 태어나게 한 뒤에 벌어질 새로운 이야기를 '뉴 퇴마록'에 담을 거라고 예고했다. 그렇다면 <파이로 매니악>도 이야기 선상에서 다시 올려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엿장수(!) 맘대로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퇴마사'들이 등장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파이로 매니악>에서 펼쳐진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를 저질러 놓고서도 그에 상응하는 죄값을 달게 받기는커녕 호의호식하며 법망을 조롱(?)하며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나쁜놈들(일명 '죄수'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서는 행동파 유영이 있고, 화약 때문에 불우한 과거를 갖고 있지만 화약을 멀리할 수 없는 운명(?)적인 '파이로 매니악(화약전문가)' 민동훈이 있는 지구에서 펼쳐질 이야기가 다시금 쓰여질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비록 3권을 끝으로 '연재'를 더는 진행시키지 않았지만, '뉴 퇴마록'도 쓰여질 거라면 <파이로 매니악>도 다시 쓰여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영과 동훈이 죄수들에게 벌이는 단죄는 속이 시원하기 때문에 반드시 '완결'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방된 지 8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활개를 치며 '대한민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려는 이런 나쁜놈들을 곱게(?) 놔둬선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어떻게 독립을 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 이만큼이나 발전을 시켰는데, 고생이란 고생은 '온 국민'이 다 겪고, '나쁜놈들'은 단물만 쪽쪽 빨아 먹고 나라를 홀랑 말아먹으려 드느냔 말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놈들이기에 '파이로 매니악(P.M.)'의 부활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허구적인 소설 속에서라도 깨끗한 대한민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그러기에는 너무 과격한 설정이라는 점에서 우려스럽기 그지 없긴 하다. 아무리 죽일 놈이라고 하더라도 '사제폭탄'으로 팔다리를 날려버리거나 온몸을 화르륵 불태워버려 온전한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한 줌의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리는 잔혹함은 너무 심한 처사라는 지적이 있다면, 그에 마땅한 반론조차 대거리하지 못할 지경인 것은 솔직히 인정한다. 허나 자신들의 이익에 최선을 다한 '이기주의자'에 대한 처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였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에 이어 무능의 극치였던 노태우 정권, 김영삼 정권,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그리고 윤석열 정권까지 대한민국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하마터면 '나라꼴'을 파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뻔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제대로 된 죄값'을 달게 받은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말이다. 대한민국의 법치는 한마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였고, 소위 '보수세력'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들을 호위하는 '엘리트 집단'이 총동원이 되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등에 빨대를 꽂고서 '제 잇속'만 무한하게 챙기는 짓거리를 서슴지 않고, 염치도 없이 자행했더랬다. 그런데도 훗날 '들통'이라도 나면 그들은 충분한 죄값을 받았던가? 그런 적 없다. 도리어 그들의 죄를 밝히려던 사람들에게 '불똥'을 튀게 만들어서 없던 죄도 새로 만들어서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게 만들었고, 손이 있어도 글도 쓰지 못하게 분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서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진실'을 감추고 '거짓선동'을 세뇌(?)시키는 역할은 대한민국 언론이 도맡아서 처리(?)하곤 했다. 이렇게 80년 동안이나 나라를 틀어쥐고서 국민들에게 '진실'을 외면하게 만들려 하다가 '윤석열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과 맞물려서 그동안 저질렀던 온갖 추한 짓거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정말이지 구정물에 똥물을 섞어서 마시게 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었다. 그래서 <파이로 매니악>은 나쁜 놈들을 하나하나 '고깃덩이'로 산산조각 낼 때마다 후련해지는 맛(!)이 있는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우혁 작가도 너무 시원시원하게 나쁜 놈들을 날려버리는 것에 심취하다보니 좀 막나갔던(?) 모양이다. 드디어 나쁜 놈들을 처단하던 P.M.의 소재파악을 마친 '검사팀(씨저)'이 처음으로 조우하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연재 중단'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직 P.M.의 뱃속에 있는 '시한폭탄'의 시간은 8개월이나 남은 상황이다. 그러니 이제 겨우 4개월 남짓한 분량(총 3권)만 쏟아냈을 뿐, 남은 분량은 그 두 배에 해당하는 6권의 분량만큼이나 이야기가 남은 셈이다. 딴에는 빠른 진행을 선보여서 총 5~6권 정도로 마무리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중단된 연재를 되살려 내놓으란 말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이재명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니, 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기에 딱 좋은 시기가 아니겠느냔 말이다. 이왕지사 '김대중 정부'때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으니 이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물론, 20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 '핸드폰'도 없던 시절의 옛날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내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이우혁 작가가 <파이로 매니악>을 집필할 당시에도 영과 동훈을 그냥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짐작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단서를 많이 남겼다.

바로 '김중위의 입'을 통해서 P.M.의 폭탄제조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그냥 썩히기엔 아깝다는 이야기를 언급했고, 또한 '정소희의 입'을 통해서도 P.M.의 정신분석을 통해서 정상참작(?)이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윤영대 검사'의 윗선으로 보이는 그분의 정체가 아무래도 <퇴마록>에 등장하는 '검사 백호의 그분'과 동일한 인물(!)일 거라는 짐작이 들기 때문이다. 이우혁 작가는 대한민국의 정의는 올바른 사법시스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 '검사 출신'이 등장하는 것으로도 짐작케 하며 <퇴마록>의 검사 백호가 법체계의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로 보여주지 못햇으니, <파이로 매니악>에서 등장하는 윤영대 검사가 그런 인물로 등장하게끔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다만 이야기 초반에는 P.M.을 검거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독사'같은 인물처럼 보여주지만, 윤 검사의 윗선에 있는 그분의 영향력으로 '퇴마사'들이 대한민국을 세계 만방에 위력을 떨치게 만들었던 것처럼, '파이로 매니악'들을 검거한 뒤에 어떡해서든 살려내어 전세계의 위협을 받는 대한민국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현실판 영웅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이야기로 확장시켜 나가길 바란다. 그렇게 <파이로 매니악 : 세계편>, <파이로 매니악 : 혼세편>, <파이로 매니악 : 말세편>을 선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겨우 무기를 채워나가기에도 버거운 나라였지만, 불과 20여 년도 지나지 않아서 '방산업체의 수출호황'을 맞을 정도로 강력한 국방력을 자랑하며 무시무시한 무기체계를 '국산화' 시켜버리는 위엄을 선보이지 않았느냔 말이다. 여기에 민동훈 같은 '파이로 매니악'이 활약을 한다면 첨단 무기체계를 더 빨리 개발하는데 실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고, 국외의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영웅으로 활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유영은 언론개혁의 선봉장 역할을 주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언론이 제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정말이지 천추의 한이다. 그렇기에 P.M.이 윤 검사와 손을 잡고 나쁜 놈들을 발본색원하여 일망타진(?)한 뒤에 제대로 된 언론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다. 비록 소설 속의 허구라 할지라도 그런 속시원한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파이로 매니악>이 아닐까 싶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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