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이주윤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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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한글을 쓰고 읽는 대한민국은 전세계 인류 가운데 가장 '문자학적 축복'을 넘어 사치를 누리고 있다며 전세계 언어학자들이 극찬해 마지 않고 있다. 왜냐면 전세계에 언어를 가진 국가나 민족은 많지만, 그 언어에 딱맞는 '문자'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문자 가운데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단 하루만'에 쓰고 읽을 수 있으며, 영특한 사람이라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대한 문자를 가진 우리 나라인데도 '문법 체계'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라서 웃음거리(?)가 될 지경이라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한글의 원조인 '훈민정음'이 반포된 건 1443년이지만, 이 문자를 우리가 온전히 갈고 닦으며 쓰게 된 것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던 탓이 크다. 창제 당시에는 '중국문자'와 다른 오랑캐 문자를 쓸 수 없다며 천대를 받았고, 누구나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지독히 반감을 품은 당시 '기득권층'의 저항에 궁중의 여인들을 비롯한 '소외계층의 문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탓에 제대로 된 '문법체계'를 갖출 기회조차 없었으며, 비로소 주목받게 된 때에는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었기에 '우리 민족'이 쓰는 '우리 문자'조차 제대로 연구할 수 없어서 조악하고 열악한 처지에 놓인 학자들에 의해 '기초문법'이나마 갖추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해방이 된 뒤에 '우리 말'과 '우리 글'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게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혼란스런 해방정국의 여파로 아름다운 우리 글의 문법조차 이러쿵저러쿵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고 억지로 껴맞추게 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이렇게 '국어 문법'은 어렵사리 정리되었지만, 최소한 '맞춤법 통일안'조차 일사분란하고 일맥상통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일상 생활'에서 헷갈리게 쓰이고 있는 실정이며, 심지어 '맞춤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조차 <국어사전>을 들춰보지 않으면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도 헷갈리는 점은 '국립국어원'에 문의를 해본 뒤에야 겨우 쓰게 되는 경우가 적잖다. 더욱 큰 문제는 '국립국어원'조차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거나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어색한 똥고집을 부리며 꼭 '그렇게' 써야만 한다고 장광설을 내놓는 경우가 허다한 문제점이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저것도 모두 '표준어'로 공표하는 통에 수많은 예외조항만 만들어 놓는 '누더기'가 된 지 정말 오래 되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이런 혼란스럽고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글쓴이는 '최소한의 맞춤법'조차 제대로 쓰지 않는 오빠는 정말 정떨어진다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물론 완전 동의한다. '신조어'깜도 되지 않는 '엉터리'로 소듕한 한글을 더럽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정말 많기에 글쓴이의 분노(?)에 적극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난, 사소한 문자나 간단한 톡을 쓸 때에도 '맞춤법'에 맞게 쓰고, '띄어 쓰기'에 철저하려 노력하며, '전하는 내용'에 어긋나지 않는 '표준어 사용'을 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철저한 노력을 하게 된 까닭도 첫사랑의 영향이 크다. 첫사랑에게 최대한 귀여움을 어필하려고 '혀 짧은 듯'한 문자를 보냈다가 '맞춤법'을 지키라고 핀잔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 첫사랑은 '출판사 편집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방 맞은 뒤부터는 열심히 '맞춤법 공부'를 했고, 그렇게 난 '논술쌤'이 되었다. 물론 난 '미혼'이다. 그런 비슷한 경험(?) 때문이었던 걸까?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어버렸고, 급기야 글쓴이에게 '공개구혼'이라도 하고픈 심정이 들었지만, 참고 있다. 혹시라도 그 사이에 솔로가 아닐까봐서 말이다. 나 말고 그녀가 말이다.

 

  암튼, 맞춤법을 지키면 '섹시'하다는 글쓴이의 주장에 당당히 한 표를 던진다. 맞춤법을 지킨 글을 읽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실수를 발견하면 실망감도 커지는...글쓴이와 비슷한 경험이 정말로 많아서 '공감'으로 충만한 책을 읽는 유쾌한 독서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 보았다. 맞춤법을 '이토록' 지키기 어렵다면 좀더 쉬운 맞춤법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이를 테면, 있으나 마나한 '사이시옷' 같은 건 아예 없애버리고, '띄어 쓰기' 규정은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한 뒤에 '뜻'만 적확하게 전할 수 있다면 모두 맞게 바꾸는 것 말이다. 사실 '사이시옷'이라는 게 얼마나 어이가 없냐면, '장맛비[장마삐/장맏삐]'처럼 발음규정도 확실히 규정하지 못하고, 뜻조차 '장마 때 오는 비'인지 '장맛 나는 비'인지 헷갈린 예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초점[초쩜/촛쩜]'처럼 '한자어'인 경우에는 무조건 빼라는데, 애초부터 예외규정을 둘 요량이면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장면' 같은 경우처럼 오래도록 '자장면'만 옳고 '짜장면'은 틀렸다고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혼용'해서 쓰고 있으니 둘다 표준어로 허용해준 사례가 많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권고사항은 애초부터 듣지 않고 박박 우기면 해결될 일이라는 해석까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와 '허용'이 남발되면 혼란이 가중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허나 언어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만듦-쓰임-죽음'의 과정을 겪게 마련이고, 그로 인해 '문법체계' 또한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문법체계를 누더기처럼 깁고, 이해하기 어렵게 장황한 부연설명을 늘어놓은 것들을 싹 골라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결국 '문법'도 많이 쓰이고, 자주 쓰여야 사랑받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문법 체계'에 대한 접근이 쉽고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어렵지 않게 접근해서 모두가 널리 알맞게 쓰는 한글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문법책>과 <맞춤법>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만 할 것이다. 그동안에는 읽기만 해도 졸음이 쏟아지는 딱딱한 책이 많았지만, 이 책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처럼 쉽고 재미난 책이 널리 사랑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글사랑을 더욱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관심'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 책을 '불알이며' 읽으면 정말 누구나 '맞춤법 천재'가 되고 '뇌섹남/뇌섹녀'가 되는 특급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더는 '맞춤법'을 초등학생 때만 배우는 유치한 공부라고 매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작 어른들은 절대로 '받아쓰기 만점'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점을 받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우리 맞춤법'이 어렵기 때문인 것이고, '맞춤법'의 눈높이를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우리가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레 우리 모두가 수준 높은 '교양인'이 된다는...뭔가 했던 말 또 한 느낌이지만.. 암튼, 맞춤법은 관심을 가져주는 만큼 재밌고, 지켜주는 것만큼 섹시하다는 글쓴이의 말씀에 공감하는 바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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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 : 진실의 영혼 시공그래픽노블
알렉스 로스.알렉스 로스 지음, 이규원 옮김 / 시공사(만화)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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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더우먼은 '여성 히어로'의 대명사다. 놀랄 만큼 강한 힘에 날아오는 총알도 막을 수 있는 팔찌, 그리고 묶이면 진실만을 토해내는 밧줄이 그녀의 능력이다. 하지만 원더우먼의 힘이 이것 뿐일까? 물론 아니다. 그녀의 원천적인 힘은 '아름다움'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조화를 이루며 불의에 당당히 맞서는 정의로움이 그녀의 진짜 힘이다. 바로 원더우먼이 강력한 까닭은 그녀의 겉모습이 아닌 진정으로 아름답고 올곧은 마음가짐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원더우먼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묻히기 십상이다. '남자들이 지배한 세상'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고작 '섹시한 외모'에서 찾으려는...심지어 '성적 도구', 그 이상으로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더러운 속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남자보다) 잘난 여성'은 비난과 질타의 대상이 되곤 한다. 비단 남자만의 어리석음은 아니다. 같은 여성끼리도 '자유와 평화, 정의, 그리고 박애에 앞장서는 여성'에게 신랄한 비난을 퍼붓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지한 남성과 '똑같이' 그녀의 섹시한 외모에 초점을 두어 비난하기 일쑤다.

 

  만화속에서 '원더우먼'은 아마존 부족의 공주로 재탄생했다. 아마존은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사회'를 일컫는 말인데, 전설에 전해지기로는 '남성들에게 핍박 받은 여성들'이 무리를 이뤄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따로 떨어져 은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여성들만이 존재하는 사회지만 '아마존 전사'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아마존 전사들은 기존의 남성 전사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아마존 전사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점점 잊혀져 갔다.

 

  그런데 '그 땅'에서 다이애나(원더우먼의 본명)가 태어났다. 아니 만들어졌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여성만의 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으로 태어난 생명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아프로디테와 아테나 여신'에 의해 흙에서 빚어져 태어난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에겐 '정의를 지킬 원천적인 힘'을 이어 받아서 말이다. 그렇게 태어난 다이애나는 숙명적으로 온 세상의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수호하려고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나가려 한다. 그리고 그속에서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아낌없이 쏟는다.

 

  그러나 세상은 '원더우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잘못을 저지른 남성들은 원더우먼 앞에서 준엄한 꾸짖음을 받으면서도 흘끔흘끔 '원더우먼의 몸매'를 감상할 뿐이고, 각성하지 못한 여성들은 '원더우먼의 구원'을 받으면서도 '자신(여성)과 다른 강한 힘'에 또 다른 두려움을 느낄 뿐이다. 그럴수록 원더우먼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뽐내며 온세상의 나쁜 점들을 하나씩 고쳐나가려 한다. 그렇게 해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줄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돌아온 시선을 따가울 뿐이다. 이미 '남성의 지배'에 길들여진(!) 여성들은 원더우먼을 이해하지 못했고, '남성의 지배'에 익숙한 남자들은 쳐맞으면서도 '섹시한 몸매'만 감상할 뿐이다. 평범한 여성과는 '다른' 색다른 매력을 가진 원더우먼조차 '언젠가는(!)' 남성에게 순종하는 여성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인간일 뿐인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남성이 지배하고 여성이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정말 그런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인간이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한 '최적의 시스템'일 뿐이다. 인간은 오직 남자만으로 이루어져 살아남을 수 없고, 오직 여성으로만으로 무리지어 번성할 수 없는 법이다. 반드시 양성이 어우러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잘 살아갈 수 있다. 이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개념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차별의 잣대'로 삼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십분 이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는 대부분의 사회는 남자를 우위에 놓고 여성을 그 밑에 놓아 '남자가 군림하는 사회'를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사회'라고 기준 삼고 있다. 행여 그 반대가 되면 '비정상'이라 낙인 찍고 애써 바로 잡으려 고집부리곤 한다. 이를 증명할 예는 얼마든지 많다. 전세계적으로 '여왕'의 존재는 부정 당하기 일쑤고,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부각시키곤 해서 '또 다른 여왕'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기 일쑤며, 수많은 '(남성)왕' 가운데 무능력하거나 못된 짓을 일삼았으면 '폭군'이라고 명명하며 '불운의 시대'가 잠시 스쳐지나갔다고 어물쩍 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탐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는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제점은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런 까닭에 '페미니즘'은 남녀를 불문하고 주목할 만 하다. 아, 물론 요새 청년들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혐남'과 '꼴페미' 따위의 극단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니, 나는 '여성운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개인적으로 어설프게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발언했다가 '남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받은 경험 때문이다. 물론 충분히 이해한다. 남자인 나는, 어두운 밤거리를 걸으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속으로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배려'로 엘리베이터를 탈 때, 여성과는 웬만해선 같이 타지 않으려 한다. 여성운동가인 나를 '치한 취급'해도 탓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말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정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억울한 남성들은 말한다. 이는 명백한 '역차별'이라고 말이다. 여성들이 무차별적으로 남성을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이 정상은 아니라고 말이다. 불편한 점은 십분 이해한다. 허나 '남성지배사회'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그런 역차별쯤은 가볍게 능가할 것이다. 여성들이 죄없는 남성을 '변태, 치한, 범죄자' 취급을 해서 불편하다고? 수많은 남성들이 '죄없는 여성들'에게 가한 폭력과 억압, 그리고 차별 등등은 어쩌구 말이다. 한껏 예쁘게 꾸미고 나갔는데 기분 잡치고 곧장 집으로 숨고만 싶은 '여성만의 불편함'을 이해하는 남성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런 불만이 있다면 속시원히 토로하고,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하고, 법적인 도움을 받으면 될 일, 아니냐고? 귀가하는 여성의 뒤를 쫓아 '무단침입'한 성범죄자조차 '여자가 먼저 자신을 유혹했다'고 증언하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사회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

 

  원더우먼 이야기를 하다가 샛길로 빠지긴 했지만, 암튼, 대통령 당선인께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마당에 고민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몇 자 끄적였다. 근본적으론 '양성평등'이 완벽히 이루어져서 '여가부' 따위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진정한 양성평등은 '차이'는 인정하고 '차별'은 없애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배려'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영웅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잘난 여성(원더우먼)의 등장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잘난 남성이 해결해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고쳐야 할 문제점은 바로 '우리의 시선'이다. 아직도 '원더우먼의 몸매'만 감상할 요량이라면 '양성평등'은 점점 멀어질 것이다. 진정한 원더우먼이 '수많은 남성 영웅들' 틈바구니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을 때 '그녀의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지지해줄 작은 배려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시선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되 겉모습이 아닌 착한 마음가짐과 올곧은 가치관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하겠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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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신화 한빛비즈 교양툰 15
우용곡 지음, 전인혁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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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와 종교,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참으로 묘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선을 그을 수도 없고, 이렇게 보거나 저렇게 볼 때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싸그리 뭉뚱그려서 '낡은 것'으로 폄하되면서 '비현실적'이라고까지 매도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역사왜곡'이니 '동북공정'이니 떠들면서 '그 옛날의 것'으로 과거를 평가하고 오늘과 미래를 재고 점치는 등의 일을 여전히 벌이고 있다. 심지어 고대에 벌어진 일로 한중일 삼국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놀랄 지경이다.

 

  이를 테면, 중국의 고서에 나오는 '황제와 치우의 대결'을 이야기하며 중국인들은 끝내 황제가 이겼으니 중국이 최고라고 평가하고, 한국인은 열 번 싸워 아홉 번 이기고 겨우 한 번 졌으니 황제보다 치우가 더 위대하다면서 '동이족의 신화'를 부풀려서 현대 한국이 중국의 국력을 넘어선다고까지 평가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일본의 고서에 나오는 한 대목에 '여자천황이 임신한 몸을 이끌고 바다 건너 신라를 쳤으니' 한국은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마땅하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허구맹랑한 논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개인적으론 신화나 종교, 역사를 통해서 제 잇속만 챙기려는 탐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화나 종교, 역사는 모두 '문화의 일부분'인데, 포괄적인 문화의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문화의 우월성을 드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그 광대한 문화마저 '한국의 것', '중국의 것', 그리고 '일본의 것'으로 조그맣게 규정하려는 속좁은 심보의 결과물이라고 결론 내리고 싶다. 그런 까닭에 신화, 종교, 역사는 크게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정보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문화는 한 나라에만 국한 되지 않고 이웃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형성되기 때문에 먼 옛날부터 활발히 교류했던 한중일 삼국을 비롯해서 베트남과 대만, 유구까지 서로 비슷한 문화와 전통을 저마다 계승발전 시켜온 결과물인 셈이다. 이러한 문화에 우열을 가릴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생각의 저변으로 이 책 <만화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신화>를 읽으면, 우리 나라의 신화를 통해 유교, 불교, 도교, 무속신앙 등의 우리의 종교와 더불어 고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신화가 중국에서 비롯된 거였어?', '왜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유교와 관련이 없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거지?', '어? 치우는 우리 조상신인데, 왜 중국신인 황제에게만 제사를 지내는 거야?' 등과 같은 질문은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론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우리에게 '신화'가 왜 필요한 것인지 의미를 파악하면서 이 책을 풀어보려 한다. 앞서 밝혔듯이 조선은 '유교의 나라'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제사'인데, 그 까닭은 음양의 이치를 조화롭게 하여야 세상만물이 평안하게 된다고 조선사람(성리학자)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단 유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바라는 이치이고, 신화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 까닭이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유교'를 표방하였던 탓에 모든 것이 '유교식'으로 표현되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화를 통해서 민족의 우월을 따지는 행위는 지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한 것이니 개무시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무속신앙에 따른 제사 뿐 아니라 도교식, 불교식 제례까지 지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조선을 건국한 이들은 숭유억불을 내세우며 전국의 사찰을 축소하고 승려들을 핍박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천주학(서학)'을 탄합하며 수많은 천주신자들을 절두산에서 목을 베던 철저한 '유학자'들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고 막으려고 막아지고 골라담으려고 담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교의 나라'인데도 그 이전 왕조에서 시행되던 행사를 이어 나간 것이다. 또한, '단군제'나 '관왕묘 제례'와 같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제사방식만 살짝 유교식으로 바꾸어서 '민족의 정기'를 북돋우고 '충성스런 신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요긴하게 써먹었던 셈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는 중국신으로 여기는 신농, 황제, 기자 따위도 조선에서 적극 받아들여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지낸 수많은 제사와 제례를 살펴보면 '우리 고유의 신앙'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문화'까지 모두 엿볼 수 있다. 먼 옛날 공자나 맹자도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학문을 갈고 닦았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공맹의 도'가 무엇인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를 테면, 풍백, 우사, 뇌사, 운사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날씨의 신'에게 기원을 하는 주술적인 면 뿐만 아니라 '농업'이 나라 경제와 정치, 그리고 일상에까지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점을 엿볼 수 있고, 성현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음복을 바라던 유학자들이 명산대천과 성황신에게 제사를 고하는 모습을 통해서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오래전부터 깨닫고 실천하였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끝으로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 조상들이 신화를 품고 살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단연 '홍익인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고조선의 건국신화 속에서만 '홍익인간'을 찾곤 하지만, 반만 년전에는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최고의 사상이었다. 바로 '홍범구주'라는 말인데, 바로 뒤치면 '아홉 주를 평정해 천하를 이롭게 하라'는 뜻이다. 여기에 우리 조상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 사상을 펼쳤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이 지내던 제사는 모두 인간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어 모두가 평안하게 지내라는 뜻을 담아 지냈던 것이다. 그래서 선한 신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 빌었고, 악한 신에게는 제물을 바쳐 인간에게 해악이 미치지 않게 했으며, 자연신에게는 풍요를 빌고, 조상신에게는 후손들에게 복을 빌어주라는 뜻을 담아 정성스럽게 모셨던 것이다. 이쯤 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놈이 나쁜 셈이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신화'라고 하면 '그리스로마신화'만 떠올리지 말고, '우리 신화'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실제로 외국의 신화보다 '우리 신화'가 알고 나면 더 재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다가올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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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업분석이 처음인데요 - 꼼꼼한 생초보의 기업분석 입문기, 2022년 개정판 처음인데요 시리즈 (경제)
강병욱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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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도 잘 모르고 하지도 않는 내가 '주식책'을 읽고 있는 게 이상할 따름이지만, 그 누구도 '주식'을 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주식공부 차원'에서 관련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그닥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인다. 다만, '주린이'인 처지에 주식책에 대해서 나불거리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주린이들을 위해서 몇 자 적어보련다.

 

  이 책은 <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의 '후속작'으로 주식에 대해서 기초를 닦았다고 여기는 분이 좀더 심화된 '종목투자'에 대한 공부를 하기 딱 좋은 책이다. 주식투자자의 목표는 주식를 사고 파는 과정을 통해서 '이득을 최대한 많이 내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운빨에만 맡긴 채 '투자원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투자를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앞서 <저는 주식투자가 처음인데요>에서도 투자에는 '원칙'이 필요하고, '철학'을 세워야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투자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좋은 종목을 고르는 안목'이 필요한 법이다.

 

  여기서 '좋은 종목'이란 쌀 때 사서 비쌀 때 팔 수 있는 종목이며, '매수시점'과 '매도시점'의 차익을 크게 할수록 좋은 종목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식을 하는 투자자라면 '당연한 얘기'고, 주식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인데, 투자를 하면 할수록 '좋은 종목'을 고르기가 힘들어지 때문에 고민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흔히 '초보자의 행운'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투자한 종목이 대박을 터트리며 많은 수익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행운도 잠시, 종합주가는 오르는데 투자한 종목만 내리막을 타거나 지지부진한 상황에 처해 매수를 할지, 매도를 할지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종목'을 고르는 안목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쳐보지만 '주린이'의 눈에는 그마저도 어려울 따름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좋은 종목'을 고르기 위해선 '기업분석'이 필수라고 한다. 그러나 '기업분석'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영역인 탓에 초보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을 따름이다. 이를 테면,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완제품'을 판매하는 종목은 주가가 하락하고, '원자재'를 판매하는 종목은 주가가 상승한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상식인데, 원자재 가격은 폭등하는데 완제품을 팔면서도 주가가 상승하는 종목도 있다는 것이다. 신개발을 통해서 신상품에 대한 기대가 모아지는 종목이라든지, 당장은 수익을 창출하기 어렵지만 신기술로 대박이 점쳐지는 종목 따위는 상황이 역전되어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편, 국내 투자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데 외국인 투자자들이 '사자세'로 돌아서서 마구마구 주가가 폭등하는 장세가 펼쳐지기도 하니 기업분석을 할 때는 '이론'만 따질 것이 아니라 '정보'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초보자들에게는 이것저것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 많아서 '간접투자'의 형식인 애널리스트에게 대신 투자를 맡기는 방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또는 기업분석을 전적으로 전문가인 애널리스트의 분석정보에만 의존해서 믿고 따르는 '매뉴얼'로 삼아 투자하기도 한다는데, 글쓴이는 '좋은 투자방법'은 아니라고 조언한다. 왜냐면 애널리스트의 분석정보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란다. 애널리스트가 투자전문가인 것은 맞지만 그들의 분석으로 인해 '주가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긍정적인 시그널은 소신껏 발표하지만, 부정적인 시그널은 애써 모른 척하거나, 부정적인데도 긍정적인 것처럼 바꿔서 발표하기도 하기 때문이란다. 왜냐면 애널리스트들도 '월급쟁이'인 탓에 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투자전문가의 말만 믿고 투자하는 방식은 결코 '좋은 투자방식'이 될 수 없고, 오직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소신과 철학에 따라 '자기만의 투자방법'을 익혀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바람직한 투자를 위한 '기업분석의 AtoZ'가 담겨 있고, 'Q&A' 방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웬만큼 주식투자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기업분석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주식투자에도 '철학'이 필요했다면 기업분석에도 '철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주식투자를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 바로 '팔랑귀'가 되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면 '가장 좋은 종목'은 '가장 수익이 많이 나는 종목'인데, 그런 투자처를 손쉽게 남들과 정보공유를 할 바보는 없기 때문이란다. 고로 주식투자는 '고독'하기 마련이란다.

 

  예를 들어, 기업분석의 대가인 '피터 린치'는 자기만의 철학으로 투자하기로 유명한데, 그의 투자원칙 가운데 유명한 것이 '이름이 이상한 주식'을 사모으는 것이란다. 그가 밝힌 이유는 '이름이 그럴싸 하면' 남들의 주목을 받기 쉽고 기업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 십상이지만, '이름이 이상하면' 투자자들에게 외면받기 일쑤고, 그래서 '기업가치'보다 더 낮은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에 더욱 큰 차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쌩뚱맞은 투자방식이지만 '자기만의 투자이유가 분명한 까닭'에 투자에 성공할 때와 실패할 때에 '원인분석'을 정리하기도 편리해진다. 이렇게 쌓인 '자기만의 투자원칙'은 아무도 따라하지 못하는 '성공노하우'로 거듭날 수 있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피터 린치는 그 가운데서도 '실패'를 줄이고 '성공'을 높이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했을 것이 분명하다. 투자철학이란 모름지기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난 '주식'은 잘 몰라도 '철학'은 웬만큼 안다. 또한 '철학'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실천하고 소신껏 행동한 다음에 원칙으로 승화시키는 것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철학'으로 거듭날 수 있다. 주식의 투자철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만의 '기업분석 노하우'를 쌓고 또 쌓으면 누구나 자기만의 철학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할 것이다. 실패는 줄이고 성공은 높이는 '원칙'을 찾는 것, 그것이 성공적인 투자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수많은 '분석방법'을 토대로 공부한 뒤에 '자기만의 투자철학'대로 전략적인 투자자로 거듭나길 바란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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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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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의 시선으로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본다는 것은 '역지사지'라는 효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간단하게 '우리의 역사를 제3의 관점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도 볼 수 있다'고 표현하면 될 것을 말을 어렵게 하느냐고 따진다면 '일본인 저자의 글쓰기'가 늘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에둘러서 말을 길게 끌다 못해 말꼬리를 붙잡기까지 한다고 핑계를 대련다. 이를 흔히, '혼네(감춘 속마음)와 다테마에(겉으로 드러낸 표현)'라면서 상대에게 폐를 끼치기 싫고 예를 다하기 위하는 일본인의 이중적인 표현법이라고 소개하지만, 이것조차 간단하지 못하니, 그냥 '일본의 사고방식'이라고 뭉뚱그려 말하고 싶다.

 

  이 책의 골자는 전세계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까닭을 살펴보면서 '이해당사국들의 셈법'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21세기에 들어서도 전쟁은 계속 일어나는 것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일본은 '타자의 관점'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일본의 관점'에서만 세계사를 이해하려 들고, 특히 '청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까지'의 세계사를 일본편향적으로만 이해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과연 일본인 저자의 입을 통해서 처절한 '역사반성'이 나오는 것인가 기대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다다르지 못하고 '변죽'만 울릴 뿐, 여전히 '일본은 잘났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연이어 '일본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서 질타를 서슴지 않는데, 일본인 치고는 '참 잘 때린다' 싶을 정도로 속시원하고, 역시 일본답지 않게 '빠른 전개'로 역사서술을 펼치고 있어서 색다른 느낌이 들 정도로 시원시원한 역사책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 근현대사'에 대해 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저자의 관점에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인 스스로 "정정당당하지 못했던 전쟁이었으며 일본에게 유리한 결론도 내지 못한 전쟁이었다"는 평가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의 결론은 '일본 청년들에게 바라는 바람직한 역사관 형성'으로 끝맺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닥 중요한 내용은 아니겠으나, <손자병법>에 이르길 '지피지기'하라 했으니 철저한 탐색은 필수라는 점에서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일본의 잘못된 선택'이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청일전쟁 승리'라고 저자는 말한다. 일본인에겐 대국과 싸워 이긴 첫 번째 전쟁이었고, 근대화로 이룬 최대의 성과라는 점에서 일본에게 이득만 가져온 '청일전쟁의 승리'가 왜 일본인에게 독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청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뒤이어 벌어진 전쟁에서 일본과 일본인은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연이은 헛발질을 하게 된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에 벌인 전쟁에서 "얻은 것은 없고, 얻은 것이 있더라도 수많은 젊은이들의 주검 위에 차린 밥상"이라는 식으로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이런 식의 표현 때문에 일본 청소년들 앞에서 강연을 한 저자가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꿋꿋하게 주장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전쟁은 돈이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면서 일본은 패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말이다. 물론,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초반까지 일본은 승승장구 했고, 일본을 '제국주의국가의 대열'에 낑기게 하여 대(大)일본인의 자긍심을 우주너머까지 찌르게 만들기도 했지만,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인해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죽어나간 것을 필두로, 청일전쟁을 빼고는 승리한 뒤에 '배상금'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으며 어마어마한 빚만 잔뜩 지게 되어 모든 일본인들을 경제난에 빠뜨렸으며, 심지어 '전쟁을 승리한 비결' 또한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비겁한 기습'이었다고 일본 청소년들에게 강연하였다. 그러면서 일본 청소년들에게 "세계사적 관점으로 일본사를 보아야 진실을 보게 된다"며 역사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밖에도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지만, 피해국의 관점에서 보면 '새발의 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다. 허나 일본 내부에서는 그정도만으로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릴지경이라는 것이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만들 뿐이고 말이다.

 

  암튼, 글쓴이는 일본이 전쟁을 통해서 얻을 것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과거의 집권세력들'이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면서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감이나 우리가 바라는 처절한 반성 따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일본인의 역사관점은 이런 것이다'라는 대략적인 그림이 보여질 뿐이다. 물론, 그 그림이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허나 '일본이 자랑스러워하는 과거의 전쟁의 진상은 이랬다'고 말하는 일본저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기에 색다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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