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아리 - 누구나 겪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던 데이트 폭력의 기록
이아리 지음 / 시드앤피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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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까운 일이지만 '데이트 폭력'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일이다. 그것도 둘 만이 있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힘쎈 가해자와 연약한 피해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데이트 폭력이 더 끔찍한 건 '가스라이팅'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이란 심리적 학대의 한 유형으로 상황을 조작, 왜곡시켜서 피해자의 기억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를 테면,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널 사랑하는데 뭔들 못하겠니?"..라면서 폭력을 정당화하고 '길들이기'를 시행하며, 가해자가 원하는 대로 피해자가 바뀔 때까지 끊임없이 폭력과 협박, 억압, 강제, 수탈까지 서슴지 않기에 '데이트 폭력'은 피해자에게 지옥보다 더한 아픈 상처를 남기곤 한다. 그래서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는 가해자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리 폭력적인 상황이 연출(?)되어도 흔한 연인들 간의 '사랑싸움'으로 치부되기에 가해자에게는 "여자가 맞을 만 했네"라며 별일 아닌 듯 폭력을 두둔하고 피해자에게는 "왜 안 헤어졌어요?"라면서 은근히 모자란 탓을 하며 '데이트 폭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심지어 피해자의 신고로 가해자가 '현행범'으로 체포된 상황이라 할지라도 조서를 작성하는 자리에 당사자인 두 남녀를 동석시켜 제대로 작성조차 할 수 없게 만들거나, 서로 떨어져 있다고 해도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선처'할 것인지, '고소'할 것인지, 그도 아니면 '합의'할 것인지 물으며, 울먹이며 벌벌 떨고 있는 피해자에게 '사건종결'을 서두르는 모양새를 취해 당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가해자는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나게 되고 피해자에게 '2차 폭력(스토킹, 살해협박, 살인 등)'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종종 뉴스를 장식(!)하곤 하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이별할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고,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게도 이러한 상황을 분명히 알림과 동시에, 직장이나 이웃에게도 정확한 정보를 알려서 충분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데이트 폭력'이 발생하기 전에 분명히 하는 것이고, '데이트 폭력' 발생 후라면 경찰 등 관련 기관의 도움을 받아서 안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귀가 시간에 경찰동행을 신청하는 등 가해자와 완벽한 차단을 하는 것이 보다 안전할 것이다.

 

  허나, 연인 사이였다는 것이 종종 발목을 잡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를 완벽하게 격리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 '데이트 폭력'의 가장 큰 문제점이고,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의 한계가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가해자는 피해자의 연락처는 물론이고, 집주소도 알고 있으며, 심지어 '현관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거기다 요즘엔 SNS가 활발한 탓에 오프라인 뿐만 아니라 온라인 상에서도 스토킹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피해자에 대한 악의적인 거짓까지 서슴지 않고 퍼뜨릴 수 있기에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는 가해자와 헤어진 뒤에도 불안에 떨며, 악몽도 꾸는 등 심리적 장애를 겪기도 하며, 심하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 등 그 심각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다 이아리>는 실제 '데이트 폭력의 경험'을 웹툰 형식으로 낱낱이 밝혀낸 책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데이트 폭력'의 끔찍함과 심각성을 직접 경험한 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난감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가해자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도 거의 없고, 일단 피해자가 피해를 당하기 전까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피해를 당하더라도 고작해야 '접근금지명령'과 같은 유약한 처벌이 대부분이고, 가해자를 '사회적 격리'시킬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탓에 가해자의 보복에 노출될 위험을 막기 위한 노력은 전적으로 피해자에게 맡겨 놓는 소극적인 대책 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렇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 사회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데이트 폭력 가해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사랑싸움'이라는 미명으로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억울한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가장 큰 까닭은 "당신도 얼마든지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 평생을 모태솔로로 살 작정이 아니라면 누구나 사랑에 빠지고 데이트를 하는 연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그 연인이 한순간에 '폭력'을 일삼는 또라이라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말이다. 더 끔찍한 것은 폭력을 방조하며 '남일'로 치부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 도움조차 청할 수 없는 피해자가 되어 버린다면 어쩔 것인가 말이다. 이는 매맞는 아내/남편이 발생하는 부부싸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부부 사이는 '이혼'을 통해서 법적인 보호라도 받을 수 있지만, '연인 사이'에는 법적인 보호는커녕 보상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더욱더 보호하고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연애하는 것조차 '법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한다는 것이 웃긴 일이라면, 폭력을 저지르는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점에 주목해야 한다. 폭력이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폭력의 심각성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연인 사이는 겉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감춰진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일단 '폭력'이 눈에 띄게 보인다면 분명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기에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피해자의 하나 뿐인 목숨마저 좌지우지하는 무소불위의 '우위'를 선점하고서 폭력을 자행하는 일이 태반인 것이다. 그렇다면 '데이트 폭력'을 단 한 번이라도 저지르면 사회적 매장을 시켜도 좋을 엄벌이 필요할 것이다. 적어도 가해자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행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두 번 다시 폭력을 저지르지 않을 때까지 '완벽한 사회적 격리'가 필요하단 말이다.

 

  너무 무거운 형벌이라고 생각하는가? 성폭력과 성추행과 같은 비인간적인 짓을 하고서도 뻔뻔스럽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상상을 해보라. 당신의 옆자리에 '가면'을 쓰고 정상인처럼 행동하는 성범죄자가 함께 하고 있다고 상상을 해보란 말이다. 그들도 '인간'이니 '인권'을 보장받아 마땅하겠지만, 한순간에 '인간'이길 포기하는 그 짐승들이 우리 사회 속에 자유롭게 나다니게 만들고서 어찌 안심하며 살 수 있겠느냔 말이다. 심지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인지도 모르고 사랑에 빠져서 스스로 피해자인 줄도 모르고 '길들여져' 버리는 끔찍한 상황을 난, 감히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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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백
김려령 지음 / 비룡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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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들의 고민은 무엇일까? 기성세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행동을 보며 일컫는 말이 '신인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신인류의 범주에 든 청소년들도 '세대차이'를 느낄 정도로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이자 순차적으로 X세대, Y세대, N세대 등등으로 부르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새천년을 일컫는 '밀레니엄'의 M과 가장 최근의 청소년을 이르는 Z세대를 합쳐 'MZ세대'라고 묶어 부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청소년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들을 '별종'이라고 바라보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인 듯 싶다. 이렇게 과거의 기성세대와는 달리 자신의 정체성에 스스럼없이 자기 의견을 밝히는 청소년들에게도 고민이 있을까?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럼 무얼까? 하지만 그 고민이라는 것이 대단히 많고 다양할 것이기 때문에 한 가지만 딱 꼬집어서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 가운데서도 '도벽'과 '이혼'으로 자기 고민에 빠진 두 청소년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문제아 학생'으로 낙인 찍힐만 한 사안을 슬기롭게 문제해결하는 청소년과 어른들의 현명한 해결 방법에도 관심을 두면 좋을 책이기도 하다. 부족할 것 없이 풍요로운 요즘 세대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남자주인공은 고등학생으로 특별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예민한 감각을 소유한 덕분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훔쳐낼 정도로 손이 재빠른 친구다. 그래서 주인공은 남다른 손재주로 친구들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훔쳐서 되파는 방식으로 돈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그렇다. 주인공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지만 '도둑놈'인 셈이다. 그는 별로 훔칠 마음이 없지만 재주가 비상한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사이에, 아니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 사이에 그 물건이 자기 수중에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주지만, 변명할 것도 없이 그냥 '도둑질'을 한 것이다. 정말 나쁜 짓이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심지어 잃어버린 주인조차 주인공을 도둑으로 몰지 않을 정도로 친구들과도 사이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겉과 속이 다른 '나쁜자식'은 절대 아니다. 스스로도 반성할 정도로 양심은 있지만, 누구도 자신을 꾸짖고 추궁하지 않으니 반성을 하고 용서를 구할 방도를 모른채 세월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결국 친구들에 의해서 도둑질을 하는 현장이 발각되고 말았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여자주인공은 평범한 고등학생이지만 이혼가정으로 남다른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않아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아서 끝내 이혼을 하고, 여자주인공은 엄마와 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재혼을 해서 새아빠와 함께 살고 있다. 여기까지는 별탈이 없는 그저 평범한 가정으로 보이지만, 정작 문제는 '친아빠'가 일으킨다. 엄마를 뻔히 두고서 바람을 폈던 친아빠는 이혼을 한 뒤에도 딸에게 연락을 하며 애정표시를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어릴 적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밖에 나가 엄마 아닌 여자와 불륜을 저지른 기억이 생생한 까닭에 친아빠의 애정표시가 달갑지 않다. 그래서 친아빠에게 화를 내는대도 그때뿐, 또다시 연락을 하면서 아빠의 집으로 초대를 한다. 그 집에는 엄마의 물건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데, 그런 집에 엄마 아닌 여자를 끌어들여 생활을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여자주인공을 번번히 초대를 해서 주인공의 속을 긁다 못해 들끓게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주인공은 반친구들과 함께 친아빠의 집을 털러 가는데,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어린이들조차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 되는데, 하물며 훌쩍 커버려 어른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청소년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고민을 하찮게 여기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루곤 한다. 도벽을 멈출 수 없는 남주와 친아빠의 물색없는 애정공세에 빡쳐버린 여주의 고민이 정말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가? 똑같은 문제를 '어른'에게 대입을 하면 심각하지만, '청소년'이기 때문에 그닥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학생이기 때문에 어른처럼 완전한 책임을 묻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처벌을 하는 수준은 아니고, 그보다 낮은 수준에서 다루긴 할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 자체가 대수롭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제목에 그 해답을 담아놓은 듯 하다.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는 '고백'이라는 단어 앞에 '가시'를 붙여놓았기 때문이다. 목에 조그만 가시가 걸리면 정말 불편하듯 '고백'이라는 가시가 단단히 박혀 있어서 고민을 말하지도 못하고 안 하지도 못하는 괴로움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흔히 청소년들은 말 못할 고민을 가슴에 담고서 끙끙 앓기도 한다. 대부분의 고민은 시간이 해결해주고, 때로는 망각이라는 해결법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자못 심각한 고민에 빠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애꿎은 청소년들도 대단히 많을 것이다. 그런 청소년들에게 적절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럼, 그 손길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좋은 것은 무엇일까? 고민이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같은 어른들이 척척 해결해주는 것일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겠지만, 어른들의 해결법이라는 것이 으레 물색없이 학생들의 '자존감'을 짓밟고, 해결은커녕 '마음의 상처'만 주는 터무니 없기도 하니, 마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남주와 여주의 고민도 '형사처벌'과 '접근금지명령'과 같은 강압적이고 끔찍한 결말로 끝맺는 어른들이 많을 것이기에 현명한 방법은 더더군다나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란? 마음에 맞는 친구끼리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청소년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정의로운 방법으로 해결하고, 아픈 마음을 보듬어주는 서로 보듬어주는 지혜를 발휘하는 등 친구의 잘잘못까지 품어주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찐한 우정이 참으로 좋은 방법일 것이다. 어릴 적엔 누구나 거짓말도 하고, 일시적으로 탐이 나서 친구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상처로 남을 더욱 아프게 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 등 삐뚫어진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이를 두고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하고, 미성숙한 인격체라고도 한다. 그렇기에 잘잘못을 가리고 처벌을 하기 이전에,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며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훈육을 곁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체가 어른일 때에는 부작용을 낳기 일쑤다. 그렇기에 친구들끼리 찐한 우정으로 잘못을 감싸주고 뉘우칠 '기회'를 통해서 잘못을 바로 잡는 방법이 꼭 필요한 법이다.

 

  왜냐면 모든 일에는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반드시 동반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 인과관계가 말도 되지 않고 엉뚱하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처벌에 앞서 스스로 반성하고 고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때로는 가시가 박힌 듯 '말하지 못할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그럴 때에도 먼저 한 발 다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어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들도 '청소년 시기'를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이들의 생뚱맞은 말과 행동이 '무슨 이유' 때문에 나온 것인지 살짝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늠조차 할 수 없기에 '신인류'라고 부를 지경에 다달았지만, 그래도 한 발짝 다가가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현명한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꼰대처럼 "~라떼는 말이야"는 말부터 늘어놓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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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5 - 1931-1935 만주침공과 새로운 무장투쟁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5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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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초반, 세계는 1차세계대전의 후유증의 하나인 '대공황'으로 치닫는 과정을 겪고 있었고, 일제는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대륙으로 약진하여 만주와 몽골까지 식민화 시킨 뒤, 중국 본토를 침략할 대대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 맞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확고히 하며 다채로운 성격을 띨 정도로 각각의 계열에 따라 각각의 무장항쟁과 항일투쟁을 벌여왔다. 그 가운데 눈여겨 볼 대목은 단연 '한일애국단의 의거'였다. 1932년 1월, 4월에 벌인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뿔뿔이 흩어진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식민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한국민중들의 독립의지가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면 아래로 잦아들던 독립운동의 기치가 다시금 활발해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역사교육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이 바로 '근현대사' 부분이다. 그 가운데서도 '항일투쟁사'는 아직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채 '반쪽짜리'로 드문드문 배우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바로 독립운동가들이 수많은 계열과 계파로 나뉘어 이합집산을 하기도 했고,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억압적 통치체제를 강화했기 때문에 활동에 크나큰 걸림돌로 작용한 덕분이다. 그 가운데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그리고 '무장투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들 중에 '공산주의계열의 활약'은 아직도 쉬쉬하는 분위기라는 것이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을 낱낱이 밝히지 못한 까닭은 이들이 해방이후에 대부분 이북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이고, 민족주의계열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배반자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며, 공산주의계열의 무장투쟁은 훗날 김일성세력으로 흡수되거나, 김일성에게 숙청 당하는 결말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반공노선을 내세운 남쪽의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시절에 '이름'조차 들먹일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의열단을 이끌며 일찌감치 독립운동을 벌였던 그였고, 김구와 더불어 해방에 이르기까지 목숨을 돌보지 않고 큰 성과를 이뤘던 그였는데도, 해방 이후 김원봉이란 이름은 철저히 감춰지고 말았다.

 

  독립운동은커녕 친일에 앞장 섰지만 해방이후 반공을 외쳐서 '애국자'가 된 친일파들은 숱한데, 우리는 진정한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딴에는 그렇다. 혼란한 해방정국에 이어 세계대전의 축소판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빈국을 오늘날의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키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고, 비록 늦기는 했지만 오늘날에 와서 '독립운동가'를 훌륭히 대접하는 멋진 나라가 된 것도 '경제발전'을 이룩한 애국자(?)들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이다. 또한, 뜨거운 열전을 마치고 '미소냉전'으로 인한 두 가지 갈림길에서 미국의 편에 선 것이 지금에 와서 보면 '최선'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지나간 옛일은 묻어두고, 거북스럽게 들춰내서 논란만 크게 만들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다가 좋게좋게 지내자고 말이다.

 

  과연 그게 좋은 일이고 최선인걸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두가 누리는 행복은 '독립운동가들의 피, 땀, 눈물' 없이는 설명할 길이 없다. 독립운동가들이 하나 뿐인 목숨을 아끼지 않고 활약한 덕분에 우리는 그 빛나는 업적을 귀감 삼아 당당히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친일파와 매국노들 덕분에 우리가 잘 살고 있는 거라면 왜 당당히 '친일'을 권장하고, '나라 팔아 먹는 짓'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이 땅에서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당당히 가르치란 말이다. 나라에 위기가 찾아오면 앞장서서 외세를 끌어들이고, 외세의 힘에 빌붙어 네 이웃과 동족을 헐값에 팔아넘기며 제 이익을 챙기는 놀라운 업적을 왜 감추기 급급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자신들의 업적인냥 떠벌리냔 말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일본은 지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기 때문에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하며 일본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아서 제 잇속만 챙기려는 '군국주의'를 다시금 부활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평화헌법'도 휴짓조각으로 만들고 '군사대국화'를 꿈꾼다. 우리도 부끄러운 줄 모르면 다시금 강대국들의 입맛에 딱 맞는 '전쟁터'를 제공해주고 온국민에게 고통과 설움을 겪게 만들 것이다. 지금 우리는 '미중대결'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 고민할 때가 아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 나라는 그 '대결의 장'을 제공하는 아픔을 또다시 겪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짝 정신 차려야 한다. 러시아의 침공에 우크라이나가 대항하는 것을 눈여겨 봐야 한다. 그곳에서도 '친러파'가 길을 내주어 우크라이나 점령을 도운 앞잡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과연 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 자손만대 호의호식하며 살 것 같은가?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편을 드는 전세계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독립의 의지를 활활 태우는 그들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는 전세계인들 말이다.

 

  이젠, 친일을 하는 것이 대세였고,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누구나 다 친일파였다...는 변명에 비겁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독립운동가처럼 하나 뿐인 목숨을 내놓아야만 한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이 참으로 대단한 일을 했다고 칭송을 아끼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도 마땅한 대우를 해줘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 친일파를 옹호하는 짓은 삼가줬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철저한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줘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빨갱이 운운하는 품위 없는 행동은 제발 안 했으면 한다. 빨갱이로 낙인 찍는 행위는 대한민국을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만들고 편을 가르기만 하는 부작용을 낳는 '백해무익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맹점을 저격하고 공산주의란 대안을 제시했던 마르크스의 이론을 포용하고 대대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국가들도 속속 세계적인 자본주의체제로 들어와 함께 경제시스템을 굴려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공산주의를 표방하면 빨갱이라 부르고, 중국의 공산주의는 감히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고 여전히 무역을 하는 이중적인 잣대를 내세울 참인가. 어차피 공산주의는 그게 그거인데 말이다.

 

  어차피 우리는 북한을 품에 안고 중국과 러시아도 발 아래 두고 대륙으로 뻗어나가 세계를 누비는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일본의 식민지, 중국의 종속국, 그리고 미국의 노예로 살아갈 것인가. 외세의 그 어떤 위협에도 당당히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다시금 되돌아보고, 이런 방법은 실패를 하고, 저런 방법은 별 효과가 없으며, 요런 방법이야말로 독립의 올바른 길이었다는 것을 배우는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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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세계 질서
레이 달리오 지음, 송이루.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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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말하는 흥망성쇠는 참으로 놀라운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 계속 될 것만 같은 초강대국 로마도 천 년이라는 '빅 사이클'을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전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도 400년 동안 점진적으로 흥하던 기세를 끝내 꺾더니 이제까지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래 새롭게 부각된 두 강대국 미국과 중국은 어떨까?

 

  미국은 독립한 이래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영토가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며, 그로 인한 지리적 이점은 미국을 '축복받은 나라'라고 불릴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다 '개척정신'이 미국에게 늘 성공만을 가져다주었던 탓에 남북전쟁과 대공황 등으로 나라가 휘청거릴 상황에 놓여도 기적과 같은 승승장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선 그 기세가 꺾이고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빅 사이클'은 영국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다.

 

  반면, 중국은 과거 그 어떤 나라보다 강하고 부유했지만 여러 부침 끝에 1800년대 이후부터는 나락으로 떨어져 열강의 식탁만 배불려주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1900년대 후반부터 빠르게 성장하는 기세는 역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으며 2000년대 접어들어서는 미국과 함께 G2시대를 논할 정도로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미국도 가볍게 재끼며 새로운 강자로 탄탄히 자리매김 할 수 있을까?

 

  레이 달리오의 <변화하는 세계 질서>는 '빅 사이클'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래 경제를 예측하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흔히 역사를 말할 때, 현미경과 망원경을 준비하라고 하는데, 현미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한 도구이며, 망원경은 멀리 내다보고 전체를 조망하는데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빅 사이클'이라는 것은 망원경의 장점을 한껏 살리면서, 동시에 현미경의 장점도 놓치지 않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일까? 우선 '빅 사이클'로 세상이 돌아가는 작동 원리를 분석하였고, 그렇게 분석한 결과, 놀랍게도 미국은 망하고 중국은 새로운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얼지 않은 미래에 미중전쟁은 발발하게 되며, 그 전쟁의 승자는 모두가 아는 데로 결론이 나게 될 것이다. 물론 미래에 벌어질 예측일 뿐이다. 전쟁이라고 해서 늘 뜨겁기만 한 것도 아니고 냉혹할 정도로 차갑게, 하지만 치열하게 진행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과거의 데이타'를 분석한 결과다. 우리는 미래를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무던히도 예측하려고 하지만, 예상대로 진행된 것보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미래를 맞이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그 방법은 '과거'를 들여다보는 방법이고 말이다. 왜냐면 지금 '현재'는 과거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과거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특정한 사실'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결과를 분석하고, 그 과거에 '현재'를 대입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고전적인 방법을 늘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빅 사이클'이라는 방식을 도입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해보았다.

 

  그렇게 레이 달리오가 예측한 미래는 우리가 바라던 미래인 것인가? 만약 바라던 미래가 아니라면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변화무쌍'한 법이다.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변화에 휘말려 대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그런 혼란마저 '과거'에는 '늘 있어왔던 것'이기에 우리는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중국과 미국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한민국이 되고 말 것인가? 정확한 예측과 철저한 대비로 강대국들이 초래한 변화의 물결을 타고 비약적인 도약을 하게 될 것인가. 그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의무이고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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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바른 나쁜 인간 - 도덕은 21세기에도 쓸모 있는가
이든 콜린즈워스 지음, 한진영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한때, 도덕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며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 큰 일을 하겠다던 정당이 부도덕한 방법으로 권력을 휘두르다 온갖 부정부패로 망신살을 당한 일이 있었다.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도덕군자로 행세하면서 경제적 부를 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제적 부를 쌓으면서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상상조차 하기 싫은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고 말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얼마나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일까? 욕심껏 살다보면 부도덕한 짓도 서슴지 않게 될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도덕적으로만 살다보면 자기 앞가림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인데 말이다. 과연 적절하고 균형잡힌 선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도덕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물론, 종교적인 율법은 걷어내고, 오직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고자 할 뿐이다. 우리는 흔히 윤리와 도덕을 '종교'와 연관짓는 오류를 범하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읽으면 안 된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종교적인 답변을 기대했다면, 안타깝게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 행동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할 뿐이다. 그리고 '같은 행동'이라도 동서고금에 따라, 사회문화에 따라, 세대에 따라 도덕적으로 보기도 하고, 부도덕하게 보기도 하는 '관점의 차이'를 서로 비교해볼 뿐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글쓴이는 그저 나열할 뿐이니 말이다.

 

  가장 흥미로운 내용은 '도덕과 섹스'를 다룬 단원이었다. 흔히 '예술과 외설은 한 겹 차이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만큼 애매하고 모호한 분야가 바로 '섹스'에 관한 내용인 탓이다. 그렇다고 야한 이야기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그보다는 '판단'해보길 권한다. 인간이 타고난 '성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인간 행동'에 대해서 말이다. 과연 불륜은 나쁜 일인가하고 말이다. 우리는 '사랑의 결실'을 섹스로 표현하곤 한다. 그리고 '종의 번성'을 위해서 이성간의 섹스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런데 누구하고는 되고, 누구하고는 안 되는 '도덕적 기준'을 과연 '누구'를 위해서 정했느냔 말이다. 막장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궤변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처첩제'에 대해 관대한 우리였고, 신분이 높은 남자, 권력(힘)을 가진 남자, 경제적 능력이 뛰어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에 대해 눈 감아주던 사회에서 살았음을 알고 있고, '여성인권'이 향상된 지금까지도 '능력자의 성욕구'에 너그러운 여성들이 많음을 인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 '여성의 성욕구'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어떤가?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불합리한 기준을 내세우고 남성에게 너그러운 분위기에 반해서 여성에겐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밀기 일쑤일 것이다. 더구나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들이밀면서 '여성에게만 까다로운 성도덕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남성의 경우엔 '결혼 유무'와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성욕구를 분출하고 해소하는 것에 관대하면서, 여성의 경우엔 '결혼 전'엔 무작정 엄격하고, '결혼 후'엔 강력한 출산의무를 지우는 사회분위기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인 셈이다. 더구나 '성매매'나 '성상품'의 대상의 거의 대부분은 남성은 구매자, 여성은 판매자라는 사실도 놀라울 뿐이다. 도덕을 넘어서 법적으로도 막는 일인데도 버젓이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섹스비디오'로 인한 성범죄 피해자는 여성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여성들이 이런 기준에 더 엄격하게 적용하며 '주홍글자'를 남긴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도덕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호하게 될 것이다. 과연 시대와 세대를 넘어선 만고진리의 '도덕기준'은 있기나 한 것일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도덕기준'을 과연 우리가 꼭 따라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이토록 유연한 도덕기준이기 때문에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단다. 식탁예절이 그렇고, 손님이 예절을 지킬 때 우리는 흐믓해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딱히 식탁예절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손님이 지켜야 할 예법이 때와 장소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정성스런 마음을 담아 공손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도덕'이 가장 장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로 확대해서 '판단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비록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법조항 같은 것이 없어도 '선한 마음'으로 행하는 '반듯한 몸가짐'을 보면 우리 가슴은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AI(인공지능)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통용될 것이다. 인공지능에게 도덕적 판단기준을 가르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인지,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되는지는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모순된 인간의 말과 행동을 보며 헷갈리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도덕은 미래사회에서도 꼭 필요하다. 딴에는 겉으로만 도덕적인 체하고 속으로는 제 잇속만 챙기는 못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법조항의 빈틈을 악용해서 '합법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겠지만, 그런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도 바로 '도덕'이 될 것이다. 비록 도덕, 그 자체는 힘이 없어서 아무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아 보일지라도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은 '도덕기준'은 불매운동과 같은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비양심적인 사람을 단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그때그때 다른 '도덕기준'일지라도 모두가 공감하는 '도덕기준'을 세우고 따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예의 바른 나쁜 인간>에게 따끔한 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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