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화의 사기 5 : 역사에 이름을 새기다 장자화의 사기 5
장자화 지음, 전수정 옮김, 사마천 원작 / 사계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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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자화의 사기 5 : 역사에 이름을 새기다>  사마천 / 장자화 / 전수정 / 사계절 (2018)

[My Review MMXCIV / 사계절 15번째 리뷰] 이 책은 사마천 이 쓴 <사기>에 실린 내용 가운데 '작가 장자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여기는 대목을 '간추려서' 옮겨 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마천이 쓴 '원작' 그대로를 옮기지 못하고, 대략적인 얼개가 어그러지지 않을 정도로 '축약본' 형태로 5권을 추려 놓았다. 그래서 어린이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지만, '원작'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으면, 짤막해진 줄거리만으로 각각의 역사적 인물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편이다. 혹여 이 책을 재밌게 읽고서 <사기>에 관심이 생겼다면 '원본'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아무래도 이 책만으로는 살짝 부족하다. 딴에는 '원전 <사기>'에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다른 역사서'를 참고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어 완성도를 높이긴 했지만, 이 책 자체가 '축약된 내용'이라 인물의 됨됨이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고, 널리 유명한 사건만 추려서 늘어놓은 탓에 '변죽'만 들끓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아쉬웠다.

암튼, 이 책의 시리즈는 5권으로 마무리했다. 그럼 총정리를 해보자. 사마천은 한 나라 때 사람으로 '역사'를 편찬했지만, 그가 쓴 <사기>는 '유가'적 느낌보다는 '법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국가기관'에 속하지 않고 '개인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기>가 쓰여진 뒤에 집필된 반고의 <한서>나 좌구명의 <좌전> 등이 모두 '유가'적 관점으로 쓰여진 것만 보아도 그렇다. '국가기관'을 대표해서 집필했거나 '한 나라의 충신 자격'으로 역사를 기술했을 때에는 '유가'를 강조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조금은 '실리적 관점'으로 서술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법가'를 강조하는 기술이 엿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한 고조 유방'이 진시황이 세운 진(秦)을 멸망시키고 한(漢)을 건국했으나, 진시황이 기틀을 세운 '법가사상'을 완전히 몰아내고 '유가사상'만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어려웠던 탓에 국가의 큰 틀은 '유가사상'을 따랐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의 것들은 여전히 진시황이 터를 닦은 '법가사상'을 크게 고치지 않고 그래도 써왔기에 사마천도 그런 식으로 '역사'를 서술했을 거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까닭에 사마천의 <사기>는 유가적으로 숭상 받는 이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가사상에서는 욕을 들어도 좋을 인물들을 높이 평가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협객'을 칭송한 대목인데, 다른 역사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점이라도 봐도 좋을 것이다. 이를 테면, 사람을 죽인 살인자, 남을 다치게 한 강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 심지어 불량배나 깡패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도 '의(義)'를 행했다면 '성인(聖人)' 못지 않은 칭송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형가'다. 그는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자결을 한 사람이다. 과연 이런 사람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을까?

물론, 진시황을 폭군으로 상정하고, 폭정을 일삼는 나쁜 임금이 천심을 잃고서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백정들마저 편히 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임금이라면, '암살'을 해도 괜찮다는 논리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원한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 천하의 대세를 따르고 만민의 평화를 위해서 결행한 구국의 결단이니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인 셈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히틀러, 트럼프, 윤석열, 때려 잡자는 구도와 다를 바가 없으니 마땅한 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나쁜 놈들은 법과 원칙도 없이 제 맘대로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망쳐버릴 수 있어도 착한 사람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쁜 놈들을 처단(?)하려 든다면 똑같은 폭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형가가 죽이고자 한 인물이 진정 '폭군'이 맞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 진시황은 죽어 마땅한 암군이자, 폭군인가? 춘추전국시대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탄생한 멋진 시대이지만, 영웅의 탄생이 평화로운 시대가 아닌 혼란스런 시대에 등장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춘추전국시대는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기에는 너무 혹독한 혼란기였던 셈이다. 그런 혼란을 일거에 잠재우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시황, 도량형을 통일하고, 문자를 통합하는 과정을 강행하여 얻은 이득이 분명 더 크다는 점을 들어서 진시황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보기보다 희대의 영웅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형가'는 위대한 성군을 암살하려 한 '암살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원한도 아닌 '연나라 태자 단'의 원한을 대신 실행에 옮긴 '살인청부업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마천은 아무런 원한도 갖지 않은 형가가 아무런 이득도 얻지 않고, 오직 '의'로움만 앞세워서 태자 단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암살을 시행하려 했다는 점을 들어서 참으로 뛰어나다고 극찬을 한 것이다. 이런 예는 자주 반복 되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은연중에 사마천과 비슷한 논리를 내세워서 '의협의 영웅들'을 양산(?)하는 경향까지 내비칠 정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호전>에서 양산박의 108 도적들을 영웅으로 평가하는 것이고, 일반대중에게는 '무협지'로 대변되는 영웅들이 대개가 다 그런 살인을 눈 감고도 해내는 실력자들이다. 물론, 무협지나 무협영화를 즐겨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이기에 '의협'을 내세워서 불구대천의 복수를 완수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에 열광하던 시절도 있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솔직히 멋지긴 하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런 영웅들의 행보가 자못 '유치'하다는 느낌이 부쩍 들곤 했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까닭으로 <사기>를 비롯해서 고전에서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의로운 죽음으로 오래도록 이름을 날리는 경우가 참 많고 다양하다. 백이와 숙제처럼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 충성스런 행동으로 죽기를 각오한 결의는 고개가 절로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주인을 살리고자 '천한 목숨'을 희생시켜 '귀한 목숨'을 구하는 행위를 온당케 여기는 대목은 삐딱하게 읽힐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행태는 <고전>을 읽으면서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무튼,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유가사상에서 중시하는 '충'을 무턱대고 강조하지 않았다. 임금도 임금다워야 충성을 바칠만 하지, 그렇지 못한 임금은 '의협'의 이름으로 죽여도 좋다는 메시지를 뿌리 깊게 담아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역사서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색다른 점으로 봐도 좋다. 허나 '의협'의 이름이라도 해도 될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사기>에서는 이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아서 <사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중이떠중이들은 '의협'의 이름으로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영웅행세를 하는 얼토당토 않는 일이 자행되고 있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중국의 고전'을 더욱 제대로 읽어야 한다. 어설픈 중국 '찬양'도 볼 품 없지만, 무지한 중국 '비난'도 꼴불견인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잣대'는 안에서든 밖에서든 올곧아야 쓰임새가 톡톡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대적 한계를 이해하고, '그 시대' 상황에 알맞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기울이되, 오늘날에 맞지 않는 것에는 과감히 철퇴를 내릴 자세도 필요하다. 그때 맞다고 지금도 맞지는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때 틀렸다고 지금도 틀리지는 않을 수도 있음을 알고, 올곧은 '잣대'로 <고전>을 즐기면 좋겠다.

이쯤해서 장자화의 <사기>는 마무리하고, 못다한 이야기는 이희재의 <사기> 시리즈에서 하겠다. 아무래도 '대만 작가'가 풀어놓은 관점보다는 '한국 작가'가 풀어놓은 관점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수월할 듯 싶어서 그런다. 조만간 다시 이야기 물꼬를 터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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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1분 철학 관계수업
서정욱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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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1분 철학 관계수업>  서정욱 / 중앙books(중앙북스) (2025)

[My Review MMXCIII / 중앙books(중앙북스) 4번째 리뷰] 철학의 과제는 '우주, 자연,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철학자는 이런 물음에 나름의 답을 구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모양이다. 그런데 철학자라고 하면 왠지 '고독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너무 무겁고 어려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인걸까? 아니면, 기껏 내놓은 답이 너무 난해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 어떤 답이든 '철학'은 너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므로 '철학자'와는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의외로 철학은 '인간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해준다. 생각해보면 '인간관계'도 철학 못지 않게 어려운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철학자들도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고독을 즐기는 철학자라면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대화'는 혼자 할 수 없고, 둘 이상의 사람과 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소크라테스도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 유명한 '산파법'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좀처럼 끝나지 않는 물음을 통해서 끝끝내 '너 자신을 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니, 기껏 대화를 한 상대가 기분 좋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철학자들은 유창한(?)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통달한 지혜를 전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왜 그랬을까? 그게 궁금했는데, 이 책 <만화로 보는 1분 철학 관계수업>을 읽어보니, 그 답을 알겠다. 그건 바로 '인간관계'를 좋게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철학에 관한 나름의 비법을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란 걸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10명의 철학자'는 각자 나름의 '인간관계의 핵심 코드'를 풀어냈다. 먼저, 프로타고라스는 '나 자신을 먼저 보호할 줄 알아야,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설 자리'도 마련하지 않고서 무작정 배려부터 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남'을 배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이다. 설령 '자기희생'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셈이다. 그리고 '상대의 배려'를 존중해주고 드높여 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배려를 받고도 고마워할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른다면, 배려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끝없는 배려를 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관계'가 아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제논은 '이성'이 중요하단다. 긴 말이 필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중용)'을 실천하란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적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건 설명이 좀 필요할 것이다. 바로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철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인간은 '이성'을 중시한다. 감성과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다보면 자신을 망치기 쉽지만 '이성'을 추구하면서 살다보면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선과 악 가운데 '선'을 추구하며 살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말이다. 그런데 매번 선한 행동만 하며 살기는 쉬울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지키라고 했다. 중용은 '정중앙'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적당하고 적절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매번 선(이성적)한 것만 추구하는 삶도 힘들고, 매양 악(본능적)한 것만 추구하는 삶도 식상하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쉬이 지치지 않게 '적당한 선'을 지키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선한 것'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우렐리우스는 한 술 더 떠서 '금욕적인 삶'을 살라고 권한다. 그래야 적을 만들지 않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적이라도 '그 앞에서' 금욕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적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였다. 황제가 스스로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며 살고, 그 삶을 '의무'로 여기고 있는데, 누가 감히 로마 황제 앞에서 적이 되어 맞서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럼 황제 정도의 '권력'과 '권위'가 없는 사람은 금욕적인 삶을 살아도 의미가 없는 걸까? 그건 아니다. 아무런 권세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금욕'을 지키며 사는 삶, 그 자체가 아름답기에 그 앞에서 두 눈을 다시 씻고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존중받게 된다는 말이다. 설령 내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선한 행동'만을 보고 진심으로 칭찬을 해준다면 '악한 행동'으로 앙갚음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 그런 사람도 있겠다 싶으면, 다음 철학자를 만나러 가보자.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영국에서 계몽주의를 배워서 프랑스에서 널리 퍼뜨리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자신과 의견이 달라도 들어주고 존중하면서 논쟁을 펼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프랑스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몽주의자들은 중세의 신앙이 너무 맹목적이라면서 비판하는 입장이었는데, 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던 '프랑스 권력자'들에게 계몽주의는 너무도 위험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프랑스에서 환영받지 못한 철학자였다. 그럼에도 볼테르는 '관용(똘레랑스)'를 강조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비난하는 이들의 의견조차 끝까지 '경청'하며 존중해주는 볼테르였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그럴 수 있던 까닭으로 '다름'을 설명했다. 비록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지만, 그건 상대의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볼테르 자신과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일축해버리곤 한 것이다. 그리고 '내 의견'을 존중받기 원한다면 '상대 의견'도 존중해주어야 한다면서 '관용정신'을 설파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똘레랑스'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볼테르가 있기 전까지는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자, 앞에서 '악한 의도'를 가진 이가 '악한 행동'까지 일삼고 있다면, 나와 '다름'일 뿐이라고 생각해보자. 악하다고 보이던 것이 그저 '다른 의도'와 '다른 행동'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물론, 미친 놈이 칼을 들고 설치고 있다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관계법을 상기시켜야 좋을 것이다. 먼저 자신부터 보호하는 것이 첫번째다.

이제 영국의 '경험론', 프랑스의 '합리론'을 만났다면, 독일의 '관념론'을 만날 차례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긴 버겁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정언명령)'만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그 의무는 반드시 선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만 지켜도 '인간관계'는 저절로 지켜지게 된다. 아시다시피 칸트는 '정확한 시계'보다 더 정확한 일상을 살았다. 칸트는 일상생활까지도 '의무'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산책'하는 것으로도 이웃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셈이다. 만약 칸트가 그 의무를 저버리고 '오늘은 피곤하니까 산책을 쉬어야지'라는 식으로 스스로 의무를 어긴다면, 이웃사람들도 칸트가 산책을 제 시간에 나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의무'로 삼고서 '반드시' 지켰다. 그랬기에 이웃사람들에게 뭔가 '울림'을 전해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관계의 시작'이란 것이다. 상대에게 진하디 진한 '울림'을 전하면 인간관계는 저절로 성숙해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였다. 인생이 참 엿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지만,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밝음'만 보면서 살라고 조언해주었다. 또한, 인간은 욕심도 많아서 불행해지기 쉽지만, 쇼펜하우어는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도 했다. 남들이 무엇을 하며 사는지 보고만 있으면 욕심만 부추기게 되고 결국은 그 욕심 때문에 불행에 빠진다고 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즐길지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행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어둠'이 짙게 깔렸더라도 '밝음'에 집중하라고 말한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게 좋지 않느냐면서 말이다. 아무리 엿 같은 상황이더라도 '부정'적인 것을 보지 말고 '긍정'적인 것을 부각시켜야 한다. 그럼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엿 같은 세상은 '전쟁'도 불사하며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다. 내가 원하든 말든 '전체주의'의 광기에 휩쓸려 세계대전을 치뤘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강제적인 힘을 가진 '독재자'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니체가 답했다. 힘(권력)이 인간관계를 좋게 만든다고 말이다. 인간은 힘(권력) 앞에 약한 모습은 보인다. 절대복종도 하고, 굴욕적인 모습도 보이며, 때로는 힘을 향한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등등 말이다. 그러니 '인간관계' 나부랭이도 어쩔 수 없이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를 향상시키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선택이 있을까? 힘을 길러야 한다.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 권위적인 존재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때 '선한 힘'이 '악한 힘'보다 인간관계를 더 좋게 만들 거라는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플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한 힘'을 가지려 애쓰지만, 그게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악한 힘'을 가지려 들곤 하지만, '인간관계'만 더 나빠질 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다. 니체는 이를 '아폴론(이성)'과 '디오니소스(감성)'로 표상했다. 이성은 좋은 것, 감성은 나쁜 것으로 '대변'할 순 없어도, '대신'할 수는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갈고 닦기 힘들어서 감성에 쉽게 휘둘리곤 하지만, 그래도 더 밝은 태양에 끌리는 것처럼 '아폴론적인 힘'에 큰 의의를 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없는 것처럼 '군주적인 힘'은 소수의 몫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같이 '다수의 군중'이 힘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감성)적인 힘이 필요한 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그너의 음악'이라고 니체는 예를 들었다. 음악이야말로 '군중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니체는 너무 '강한 힘'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위버멘쉬(초인)' 같은 이의 등장을 꿈꿨다. 물론 나중에는 '탄생'이 아니라 '진화'라는 개념으로 전환시켰지만, 그조차 '인간관계'에 있어서 넘치는 힘이 없으면 무용하다고 말한 것 뿐이다. 이는 니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시대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전후시대를 맞아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끝으로 레비나스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10명의 철학자가 말하는 '인간관계'를 관통하는 핵심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를 존중하고 남도 존중하라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든 싫든 '자신'과 '타인'이 관계를 만들어가야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까닭도 '철학자들의 조언'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 직접적인 답이 되지는 않을지언정 '실마리'는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더해지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권위적(?)인 철학자들의 눈에 프롬의 철학은 허섭스레기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지 못해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술'이 부족해서 운명적인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인간관계'를 어려워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함축되어 있지 않은가?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다람쥐 챗바퀴를 돌듯 '주변'만을 맴돌 뿐이다. 그러니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싶어도 만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정말 없느냐? 그건 아니다. 인구 1000만 도시에 살고 있어도 '아는 사람'이 1000만 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알려고 노력한 사람'이 몇 명이냐다. 인간관계는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조언에 집중해보길 바란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위의 '10가지 조언' 가운데 2~3가지만 실천해도 아주 좋은 방향으로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바로 당신부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실천하며 '도덕적 의무(정언명령)'에 철저히 따르면, 아무리 엿 같은 세상이고, 독재자 같은 나쁜 권력에 휘둘리는 상황일지라도 당신 자신부터 보호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넘지 않는 선'을 지키는 초인이 되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중받는 사람이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이렇게나 심오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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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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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 안정효 / 소담출판사 (2015) [원제 : Brave New World(1932)]

[My Review MMXCII / 소담출판사 6번째 리뷰]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짓꿎은 질문이지만, 그때 그때마다 선택이 달라지는 질문이 있다. 바로 '똥맛 나는 카레'와 '카레맛 나는 똥' 가운데 하나를 먹어야 한다면 무엇을 먹겠느냐는 질문이다. 10대 때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본질'을 더 중시했기에 비록 똥맛일지언정 카레를 먹겠다고 선택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선택에 흔들리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똥맛'보다는 '카레맛'을 선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비록 '생체건전지'로 전락할지언정 비극적인 현실을 마주하며 처참함을 느끼며 힘겹게 살아가느니 '허상'에 불과하지만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환상(꿈)속에서 맛난 음식과 안락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꿈속에서 깨어나면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전제되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뜬금없는 질문으로 서두를 꺼냈지만,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는 미래가 바로 이런 세상을 펼쳐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랬다.

때는 2540년, 영국의 도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이 쓰여진 시기가 'DNA 나선구조'가 밝혀지기 20여 년 전이었던 탓에, 오늘날의 정교한 유전자 조작까지는 아니어도 아주 그럴 듯한 방식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애초부터 '계급적 분화'에 성공했다는 설정을 보여주었다. 지배자 계급은 알파와 베타다. 이들은 외모도 훌륭할 뿐더러 지능까지 뛰어나서 태어날 때부터 '권력자'가 되거나 '관리자'가 되어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쾌락적인 삶을 영원히 누리며 살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인 감마와 델타, 그리고 엡실론은 난자 하나에서 가지를 쳐서 '96개의 쌍둥이'를 생산(?) 해낼 수 있다. 이들은 외모부터 작고 볼품 없으며, 엡실론 계급인 경우에는 얼굴에서 콧구멍 2개만 겨우 보일 정도로 괴상한 형체를 띄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힘이 쎄서 노동력을 전담하기에 딱 알맞은 계급이다. 심지어 노동자 계급은 애초부터 '책과 꽃'을 멀리하도록 세뇌를 시켰기 때문에 하릴 없는 지능을 발달시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분화된 계급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지 않을까? 이를 테면, 노동자 계급이 지도자 계급을 보면서, 저들은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며 살지 않느냐면서 말이다. 그럴 걱정은 전혀 없다. 이 세계에는 '소마'라는 합법적이고 부작용이 전혀 없는 안정적인 마약이 있는데, 이것을 일정량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애초에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사회구조인 셈이다. 심지어 '소마'는 알약 형태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즐겨 먹는 '음식'에도 첨가될 수 있기에 울적하고 괴로울 때, '쾌락'을 원하는 만큼 복용하기만 하면 온몸에 '쾌락'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장치를 통해서 '소마'를 강제로 흡입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불행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주인공이 나타난다. 계급은 알파 플러스 계급인데 외모는 '노동자 계급'으로 오해할 정도로 왜소하고 못생겼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 멋진 신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인공부화장'을 관리하던 이가 실수로 마르크스의 수정란에 알콜을 부어버리는 실수를 했기 때문에 지능은 뛰어난데 외모는 볼품 없게 태어났다고 한다. 그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마르크스는 '자유 연애'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소마로 외로움을 달래고 불만을 잠재우는 일을 반복했다. 사실 이 세계에서는 '가족' 같은 개념을 가장 경멸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신, 출산, 육아 같은 일은 '야만인'들이 할 법한 일이고, 이들은 오직 '쾌락'만을 위한 섹스를 즐길 뿐이다. 그것도 '한 명의 이성'에게만 매달리는 것은 바보짓이고,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멍청이 취급을 한다. 날마다 섹스 대상은 바뀌며 '사랑'이란 감정도 유치하다 여기며 오직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에서는 '노화'라는 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서른 살 정도의 젊음을 유지하며 '그 이상'의 나이를 먹어도 절대 늙지 않는다. 늙는 것은 오직 '심장'뿐이다. 그렇게 심장만 노화를 겪다 더는 버티지 못하게 되면 '고통'도, '질병'도 없이 '즉사'할 뿐이다. 그래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저 인생 가득 '쾌락'만 즐기다 떠날 뿐인 셈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런 쾌락을 즐기지 못한다. 왜냐면 '못생겼기' 때문에 알파나 베타 계급의 여성들은 섹스 상대로 거들떠도 보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은 애초에 마르크스 같은 지배 계급과 상종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 베타 계급의 여성인 '레니나'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베타 계급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미녀였다. 그녀의 눈에는 마르크스가 귀엽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둘은 친하게 지낼 수 있었고, 둘은 '여행'을 함께 떠나기로 약속한다. 바로 '야만인 보호구역'인 뉴멕시코로 말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 도착한 그곳에서 둘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그곳에서는 '가족'이 존재했고, '임신, 출산, 육아, 심지어 모유수유까지' 직접 다하는 불결하고 불쾌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니나는 운명적인 남자를 만나게 된다. 분명 '야만인'이 틀림없는데 완벽한 외모에, 똑똑한 지성까지 겸비한 '최고의 매력남' 존을 만났던 것이다. 둘은 그렇게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야만인 보호구역'을 벗어나 '문명세계'로 함께 건너 오게 된다. 한편, 마르크스는 여행을 오기 전에 총통에게서 전달 받은 '린다'라는 여성과 만나게 된다. 린다는 원래 '문명세계'에서 살던 여성이었는데,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여행을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던 여성이었다. 그렇게 행방불명이 되었던 린다는 '존'이란 아들을 그곳에서 출산하고, 손수 길렀던 것이다. 사실 린다는 '야만인'과 사랑에 빠져서 문명세계를 벗어나 야만인 보호구역에 정착하고 아들도 낳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문명세계를 떠났던 탓에 야만스런(?) 삶에 지쳤고, 아들 존에게 '문명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버텼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르크스와 레니나는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린다와 존을 함께 동행하기로 한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문명세계'로 되돌아온 린다와 존은 처음 얼마 동안은 행복해 한다. 린다는 오랜만에 '문명세계의 향락'에 푹 빠졌고, 존은 레니나와 '정신적 사랑'을 완성(?)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레니나는 오직 쾌락만을 쫓아 존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려고만 한다. 애초에 '정신적 사랑'이 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갈등하게 되고, 그 사이에 엄마 린다가 '소마 과도 복용'으로 사망하게 된다. 사실 린다는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오랫동안 험하게 살았던 탓에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있었고, 알파 계급답게 훌륭했던 외모도 뒤룩뒤룩 살이 쪄서 뚱뚱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화된 상태에서 다시 '쾌락적인 삶'을 누리다 그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족스런 삶을 살다간 린다와는 달리 아들 존은 충격을 받았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의 죽음이 '충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명세계에서는 아무도 존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가족이란 개념을 경멸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정한 '문명세계'에 반감이 든 존은 반사회적인 행동을 일삼다 총통의 제지를 받게 된다. 그렇게 마주한 두 사람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데, 이게 이 소설의 '백미'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문명세계'와 '비문명세계'의 개념이 완전히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문명세계'로 그려졌지만, 사실은 '비인간적인 모습'만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묘사된 곳이 더욱더 '인간적'으로 비춰질 정도다. 존은 총통이 말하는 '이상적인 세계'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인간답게 살겠다고 선언을 하면서 괴로워하다 끝내 목을 매어 죽음을 택하고 만다. 유일한 가족을 잃은 슬픔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원초적인 슬픔'을 겪고 있는 이에게 위로할 줄 모르는 '비정한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이 평생을 동경하며 살아왔던 '문명세계'에 대한 실망감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멋진 신세계>가 정말 형편없는 세계라는 사실만 다시금 깨닫게 될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이 매력적인 까닭은 분명 '그 세계'가 멋지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는데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세계'를 동경하고 꿈꾸게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녹록치 않을 때 더욱 그렇다.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마약 중독'에 빠지게 된 원인이 바로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현실이 너무도 비극적이기에 잠시 잠깐이라도 '행복'을 느껴보기 위해서 마약을 스스로 투입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마약이 주는 행복감이 너무 짧고, 비극적 현실에서 헤어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적은 비용'으로 극한의 고통으로부터 '일탈'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마약 투여'밖에 없기에 그렇다. 차라리 소설에서처럼 '부작용'이 없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더욱 끔찍할 뿐이다.

더 끔찍한 사실은 <멋진 신세계> 속에 그려진 문명세계가 바로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밸트 위에서 착착 만들어지는 자동차가 대량생산되고, 그 차가 팔려서 얻은 엄청난 자본으로 풍요로운 부를 창출해낸 세상이 바로 '문명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축된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은 '무한한 노동력'이 무제한으로 투입되었을 때 가능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 세계의 노동계급은 정말로 '비인간적인 형태'였다. 오직 노동만을 위해서 '대량생산(!)'된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가치로 존중받지도 못하고, 오직 노동을 위해서만 소비되다가, 불평과 불만이란 감정이 싹트지 못하게끔 '책과 꽃'을 경멸하도록 세뇌 당하고, 그런 세뇌로도 감출 수 없는 불행함은 '소마'라는 신경안정제로 제거해버린다. 만약 현실 세계의 '노동자'들도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면 정녕 행복할 수 있을까? 두 번 물으면 입 아플 것이다.

또한, 고도로 발달된 과학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경각심도 심어준다. 오히려 비윤리적으로 과학의 고도화를 실현시킨다면 '과학적 성과'와는 별개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마저 보여준다. 그렇다고 '과학의 발전'을 임의적으로 멈추게 할 수도 없으니 더욱 황망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멋진 신세계'를 꿈꿔야 하는 걸까? 적어도 이 소설과는 정반대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쾌락 추구'와 '소마'만큼은 탐나지 않을까? 늘상은 아니더라도 아주, 아주 가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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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차별을 인간에게서 배운다 - 인간과 기술의 공존을 위해 다시 세우는 정의 서가명강 시리즈 22
고학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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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 22] <AI는 차별을 인간에게서 배운다 : 인간과 기술의 공존을 위해 다시 세우는 정의>  고학수 / 21세기북스 (2022)

[My Review MMXCI / 21세기북스 42번째 리뷰] 요즘 다시 'AI 관련주식'이 들썩거리고 있단다. AI 기술 주도권을 두고서 선진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 간의 패권 경쟁이 다시 치열해졌기 때문이란다. 가히 'AI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완전한 AI 기술력을 보유하고, 무엇보다 '선점'한 나라가 전세계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의 '산업혁명' 때와 같이 후발주자들이 있을 것이고,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서 선도국가들이 후발주자에게 역전을 당하고 패권을 넘겨주는 전례가 있기에 'AI 혁명'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한다. AI 혁명이 시작된다면 AI가 자율적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기 때문에 '단 1초'도 쉴 틈 없이 빛의 속도로 쭉쭉 나아갈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선도국가가 개발속도를 늦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단 1초'가 뒤쳐진 2위 기술국가가 1위 기술국가를 영원히 앞지를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왜냐면 '인간끼리의 경쟁'이 아니라 'AI끼리의 경쟁'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은 실수도 하고, 여유도 부리고, 삽질도 할 수 있기에, 후발주자가 잠자는 시간도 아껴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면 빠르게 뒤쫓아갈 수도 있고 역전할 가능성도 충분히 엿볼 수 있지만, 완전한 자율로 스스로 판단까지 완벽하게 해낼 AI끼리의 경쟁에서는 '단 한 발짝' 앞섰을 뿐인데, 영원히 앞서고, 순위가 뒤바뀔 가능성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AI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각국의 경쟁은 가히 '총성 없는 전쟁'일 뿐, 뜨거운 열전을 방불케 할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숨가쁜 경쟁에서 살짝 물러서서 '윤리적'이고, '공정함'에 대해서 한 번 되돌아보고자 한다. 바로 AI가 완벽하지 않고, 인간보다 훨씬 더 '차별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AI가 내린 결과에 대한 공정성 시비를 따져볼 것이 많다는 사실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블라인드 채용 방침'을 내세우며 '인간'이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AI'에게 채용 정보를 알려주고 공정하고 편견 없는 심사 결과를 기대했는데, 막상 채용결과를 보니 남성지원자가 80%, 여성지원자는 20% 합격한 결과를 선보였단다. 이것이 과연 '공정한 심사 결과'였을까? 한편, 미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는데, AI를 이용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 결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스펙인데도 '에밀리'는 합격을 했는데, '자말'은 불합격을 하는 사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한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건 바로 '이름'과 같은 정보만으로도 AI는 남녀의 '성별'을 구분할 수 있었고, 백인과 유색인종의 '인종'을 구별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차별을 그대로 반영해서 채용 결과에서 '남성'과 '백인'이 더 유리한 결과치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물론, 이를 보강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더 감추는 방식으로 AI가 '차별'을 할 수 없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AI가 인간보다 더 공정할 거라는 신뢰는 무너진 셈이다. 애초에 AI는 완전한 '무(無)'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문명과 버금가는 '이상향'을 창조해낼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만들어낸 정보'를 초기 입력값으로 넣어줘야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인류가 쌓아올린 방대한 정보에 이미 '차별적인 요소'가 가득한데, 어떻게 그 결과값이 완벽하게 공정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인간을 대신한 AI 판사가 법정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릴 것이란 기대를 저버리게 된 것이다. 이미 수많은 판례를 검토하여 가장 '객관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을지언정 '인간 판사'처럼 사건 당사자가 처한 환경과 주변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개선의 의지'까지 고려해서 내리는 '인간적인 판결'을 AI 판사에게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얼마전에는 '챗GPT'에게 소금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을 물었더니, 챗GPT는 '브롬화나트륨'이 나트륨(소금)을 대신 할 수 있다고 답변을 했단다. 이를 곧이 곧대로 믿은 사람은 '덜 짜게 먹는 건강식'을 만들겠다며 소금을 음식에서 완전히 빼버리고, 대신 '브롬화나트륨'으로 대체했는데, 이게 오히려 건강에 악영향을 미쳐서 정말로 '정신과' 진료까지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고 한다. 브롬화나트륨을 장기 복용하게 되면 '환각 증상'을 보일 수도 있는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르는데, 챗GPT는 이런 정보까지는 미처 전달하지 못하고 '소금의 대체재'로 브롬화나트륨을 권했고, 챗GPT를 맹신했던 이용자는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키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단다.

도대체 이런 '오류'를 왜 저지르는 것일까? 그건 AI를 완벽하게 '인간'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잘못에서 기인한다. AI가 아무리 완벽해지려 해도 애초에 '입력값'이 적절치 못한 상태에서는 AI도 얼마든지 '인간'처럼 실수할 수 있고, 오히려 인간이 아니기에 그저 '방대한 정보를 추려서 간략히 제공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건 완벽하게 자율적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AI가 탄생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최종선택'은 인간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세계 각국은 AI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서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일까? 혹시나 AI에게 '결정권'을 맡겼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개발속도'를 늦추지 못하는 까닭은 '경제적 이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AI 기술력을 선점했을 때 누릴 수 있는 '막강한 힘'도 한 몫 단단히 하고 말이다. 이는 '과학기술'을 첨단화 했을 때 우려되는 문제점과 상당히 닮았다. 더구나 AI는 인간의 노동력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신기술로 낙관하고 있는 점도 크게 우려 할 일이다.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었다가 오히려 과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깨우쳤을 때, 느꼈던 절망감이 더 컸다는 교훈을 AI로 또 한 번 느낄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AI는 빠르게 개발되고 있다. 그리고 AI가 인간의 지능보다 훨씬 더 똑똑해질 거라고 예측한 시기가 2030년으로 앞당겨졌으므로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 '특이점'이 지난 뒤의 우리의 일상은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인가? AI로 한층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로운 세상이 펼쳐지며 더 여유롭고 더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인간들이 살고 있을까? 아니면, AI가 더 철저하게 '학습'한 차별로 인해 인간은 더욱더 극과 극으로 갈려서 정치적, 경제적, 계급적 사회속에서 갈등을 심화하여 더욱더 혼란하고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게 될까? 개인적으로는 AI 개발을 적절한 수준에서 멈추고, 그저 '편리한 가전제품' 정도를 운영하는 AI로 전락해서 인간의 노동(특히, 가사일이나 위험한 노동 따위)을 대신하는 '편리한 도구'로 만들고, 최종적인 결정은 여전히 '인간'이 도맡아서 하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모든 일상의 주도권을 AI에게 맡기고서 끝내 '노예'로 전락한 인간들이 되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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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화의 사기 4 : 비상시국에 살아남는 법 장자화의 사기 4
장자화 지음, 전수정 옮김, 사마천 원작 / 사계절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장자화의 사기 4 : 비상시국에 살아남는 법>  사마천 / 장자화 / 전수정 / 사계절 (2018)

[My Review MMXC / 사계절 14번째 리뷰] 사마천의 <사기>는 술술 읽히는 역사책은 아니다. 유명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쉬이 읽히는 편이지만, 낯선 인물이 나오는 대목에서 어김없이 브레이크가 걸리며 미적거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비단 <사기> 뿐만 아니라 모든 '고전'이 다 그렇지만 말이다. 이 책 <장자화의 사기 4>권도 그런 경우다. 때는 '전국시대 말'에 해당하며 전국칠웅에 해당하는 연, 제, 조, 위, 한, 초, 그리고 진이 서로 '합종'과 '연횡'을 하며 치열한 수 싸움을 할 때는 읽을 맛이 크게 웃도는 편인데, 말기에 접어 들면 '진 나라'가 크게 우위를 잡으면서 나머지 나라들에서 '자충수'를 두는 등 망국의 조짐이 등장하면서 이름조차 낯선 인물들이 나라꼴을 우습게(?) 만드는 짓을 참 많이 저지르고 있는 시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책에서 낯익은 대목은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협객 형가' 이야기이고, 진 나라가 멸망하는데 일조했던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의 이야기, 한 고조 유방이 한 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 '대장군 한신' 이야기와 천하삼분지계의 원조격인 '회음후 한신'이 끝내 한 고조에게 토사구팽 당하는 대목 정도다. 이렇게 죽고 죽이는 이야기 한복판에서 '서로 살기 위해서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순간'을 한 데 모아 책 제목으로 <비상시국에 살아남는 법>이라고 지어 놓았다.

그런데 이건 좀 의외였다. 무릇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 '비상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이 나쁠 것이 없다고 여기며 책을 읽어 나갔는데, 읽다 보니 몇몇 인물들은 차라리 죽는 게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국시대'라고는 하나, 저 살자고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키고도 '영웅' 취급을 하고, 그런 영웅 소리를 듣는 양반이 자신이 해야 마땅한 일(?)마저 제 손으로 이루지 못하고, 애꿎은 선비(士)를 꼬드겨서(?) 대신 목숨을 담보로 일을 시키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그들이 과연 영웅이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란의 시기'라고는 하지만, 노자와 장자가 말하던 '도덕'이 추락하고, 공자와 맹자가 강조하던 '인의'가 사라져버린 듯 한 생각에 미쳤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통일의 위업을 이루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다. 연 나라 태자 단이 '형가'의 재주를 빌어서 폭군(?) 진시황을 암살하려 든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있는데, <영웅>(2003년)이다. 감독 장예모, 주연 이연걸, 양조위, 견자단, 장만옥, 장쯔이 등이 열연했기에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진시황을 암살하려 든 형가를 '협객'으로 볼 것인지, 한낱 '자객'에 불과한 것인지,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너무 극과 극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시황을 '폭군'으로 본다면 그를 암살하려 한 형가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사를 실행한 의로운 협객일 것이고, 진시황을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위대한 영웅으로 본다면 형가는 시대의 조류를 어그러뜨리는 깡패 같은 자객에 불과할 것이다. 허나 진시황과 형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인물들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무고한 관계였단 말이다. 그런데도 왜 목숨을 걸고 죽고 죽이려 만나야만 했던 것일까? 그건 바로 '연 나라 태자 단'이라는 인물이 중간에서 계략을 짰기 때문이다.

진 나라는 연 나라를 토벌하려 했는데 국경이 맞닿지 않아 먼저 조 나라를 쳐야만 했다. 어차피 천하통일을 원했던 진시황에게는 어느 나라를 먼저 멸할지는 '순서'의 문제였을 뿐이다. 그래서 연 나라는 조 나라와 '합종'의 맹약을 지켜 함께 싸웠으나 강성한 진 나라 앞에선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조 나라는 멸망하기 직전이었고, 연 나라도 진 나라와 맞서 싸우길 포기하며 강경한 입장이었던 '태자 단'을 내쫓았던 것이다. 그렇게 쫓기던 처지의 '태자 단'은 진시황 한 명만 암살하면 어그러진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겠다는 염원에 '형가'에게 진시황 암살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해야 마땅한 일을 '부탁'한 관점으로 보아야 옳을까? 아니면, 해서는 안 될 일을 '청탁'한 관점으로 봐야 정당할까? 역시나 진시황에 대한 평가가 앞서야 내릴 수 있는 결단일 듯 싶다.

그런데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모호하게 두고서 '주변 인물'에 대한 평가만 옳다 그르다 말할 뿐이다. 중국 최고의 통일 업적을 남긴 탓에 영웅적인 면모를 부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진 나라가 통일왕조로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한 고조 유방에 의해 한 나라가 건국되었으니 '폭군의 이미지'로 낙인을 찍기는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가에 대한 평가는 '협의'라고 극찬을 했다. 비록 암살에는 실패했으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태자 단의 '요청'을 받고 한 번 맺은 약조를 지키기 위해 아무리 험난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신조를 지켰기에 그 '의리'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조로 말했다.

근데 아무리 '의리'를 높게 쳐준다 해도 '국가의 대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에까지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이 옳은 '도리'일지 의문스럽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의리'로 따질 일이지만, 한 나라의 임금을 해치는 일에도 '의리'를 개입하는 것이 온당한 처사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야 '법'이 왜 존재하며, '도덕'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의리'에 충실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져도 '의로운 행동'이었냐만 따지면 될 일일텐데 말이다. 아니 칼 끝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니 힘 쎈 놈이 가장 의로운 사람 행세를 해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의리'가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결코 약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일단 약자가 되면 살아서는 그들과 '정의'를 논하기 힘들고, 죽고 난 뒤에야 겨우 '동정심'을 사는 것이 고작일테니 말이다.

누가 영웅인지 따지는 일은 '기준'이 모호해서는 안 된다. 내 나라 영웅은 '이런' 기준을 삼고, 남의 나라 영웅은 '저런' 기준으로 따진다면 모두가 인정할 '영웅'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마천은 영웅의 기준을 '사건의 원인'에 두고, 그 원인의 옳고 그름만을 따졌으나, 그래서는 '똑같은 사안'인데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으니 모호할 따름이다. 따라서 '형가'를 의리를 다한 협객으로 극존칭을 삼고 싶었다면 무도한 힘을 앞세워 패업을 이룬 진시황을 죽이려 한 형가만 드높일 것이 아니라, 무도한 진시황이 세운 나라를 잘못된 '선택'과 '판단'으로 일찍 멸망하게 만든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도 똑같이 드높였어야 한다. 나쁜 놈이 세운 나라도 나쁜 나라임에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허나 역사를 이런 식으로 다루면 엉망일 게 분명하다. 역사는 '시대의 조류'이고, 일개 백성의 역사를 낱낱이 밝히기보다 '백성의 안녕과 평안'을 좌지우지할 국가의 대사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그렇게 따지게 될 때의 '기준'도 모두가 공정하다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근거가 타당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마천이 '형가'를 평가한 것에 큰 의의를 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일개 필부의 '의리'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하의 대세'가 진시황에게 기울었고, 그가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기에 '전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일상의 안정은커녕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먼저 죽여야만 하는 참극을 멈출 수 있게 한 진시황의 업적을 크게 보아야 함이 더 옳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역사는 돌고 돌아 진시황의 대업도 악정을 일삼는 폭군의 행태로 변하고 말았다. 그때가 되어서는 '폭군'을 없애고 억울하게 핍박받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백성을 위해 '난세'를 평정할 새로운 영웅을 찾는 것이 옳은 일이 될 것이다.

케데헌의 한의사가 한 명대사로 마무리 하련다. 병을 낫게 하려면 '병의 원인'을 알아내야 하는데, 그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 책은 '비상시국'에서 살아남는 법을 논한다면서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일부분'인 인물들의 고사를 늘어놓았다. 물론 대세를 읽어낼 줄 아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허나 현자가 팔을 들어 가리킨 '달'을 볼 줄 모르고 '손가락'만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을 뿐이라면,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요즘 같이 어지러운 시국에서 '진정한 영웅'이 누구이고, 그 영웅이 나아가는 길을 청소는 못해줄망정 딴죽은 걸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웅이라 지칭해서 꼭 한 사람만을 떠올릴 것은 없다.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영웅은 언제나 '위기 때마다 강한 모습을 보여준 위대한 국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위대한 국민들이 만들어가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영웅들이다. 제발 이런 위대한 국민들이 나아가는 길을 더럽히고 걸림돌이 되는 짐스런 분들은 제발 좀 자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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