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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1분 철학 관계수업
서정욱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5월
평점 :
<만화로 보는 1분 철학 관계수업> 서정욱 / 중앙books(중앙북스) (2025)
[My Review MMXCIII / 중앙books(중앙북스) 4번째 리뷰] 철학의 과제는 '우주, 자연,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철학자는 이런 물음에 나름의 답을 구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모양이다. 그런데 철학자라고 하면 왠지 '고독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너무 무겁고 어려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인걸까? 아니면, 기껏 내놓은 답이 너무 난해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 어떤 답이든 '철학'은 너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므로 '철학자'와는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의외로 철학은 '인간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해준다. 생각해보면 '인간관계'도 철학 못지 않게 어려운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철학자들도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고독을 즐기는 철학자라면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대화'는 혼자 할 수 없고, 둘 이상의 사람과 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소크라테스도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 유명한 '산파법'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좀처럼 끝나지 않는 물음을 통해서 끝끝내 '너 자신을 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니, 기껏 대화를 한 상대가 기분 좋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철학자들은 유창한(?)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통달한 지혜를 전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왜 그랬을까? 그게 궁금했는데, 이 책 <만화로 보는 1분 철학 관계수업>을 읽어보니, 그 답을 알겠다. 그건 바로 '인간관계'를 좋게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철학에 관한 나름의 비법을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란 걸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10명의 철학자'는 각자 나름의 '인간관계의 핵심 코드'를 풀어냈다. 먼저, 프로타고라스는 '나 자신을 먼저 보호할 줄 알아야,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설 자리'도 마련하지 않고서 무작정 배려부터 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남'을 배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이다. 설령 '자기희생'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셈이다. 그리고 '상대의 배려'를 존중해주고 드높여 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배려를 받고도 고마워할 줄 모르고, 베풀 줄 모른다면, 배려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끝없는 배려를 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관계'가 아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제논은 '이성'이 중요하단다. 긴 말이 필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중용)'을 실천하란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적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건 설명이 좀 필요할 것이다. 바로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철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인간은 '이성'을 중시한다. 감성과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다보면 자신을 망치기 쉽지만 '이성'을 추구하면서 살다보면 '선'을 행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선과 악 가운데 '선'을 추구하며 살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말이다. 그런데 매번 선한 행동만 하며 살기는 쉬울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지키라고 했다. 중용은 '정중앙'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적당하고 적절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매번 선(이성적)한 것만 추구하는 삶도 힘들고, 매양 악(본능적)한 것만 추구하는 삶도 식상하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쉬이 지치지 않게 '적당한 선'을 지키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선한 것'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우렐리우스는 한 술 더 떠서 '금욕적인 삶'을 살라고 권한다. 그래야 적을 만들지 않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적이라도 '그 앞에서' 금욕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적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였다. 황제가 스스로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며 살고, 그 삶을 '의무'로 여기고 있는데, 누가 감히 로마 황제 앞에서 적이 되어 맞서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럼 황제 정도의 '권력'과 '권위'가 없는 사람은 금욕적인 삶을 살아도 의미가 없는 걸까? 그건 아니다. 아무런 권세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금욕'을 지키며 사는 삶, 그 자체가 아름답기에 그 앞에서 두 눈을 다시 씻고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존중받게 된다는 말이다. 설령 내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선한 행동'만을 보고 진심으로 칭찬을 해준다면 '악한 행동'으로 앙갚음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 그런 사람도 있겠다 싶으면, 다음 철학자를 만나러 가보자.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영국에서 계몽주의를 배워서 프랑스에서 널리 퍼뜨리고자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자신과 의견이 달라도 들어주고 존중하면서 논쟁을 펼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프랑스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몽주의자들은 중세의 신앙이 너무 맹목적이라면서 비판하는 입장이었는데, 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던 '프랑스 권력자'들에게 계몽주의는 너무도 위험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프랑스에서 환영받지 못한 철학자였다. 그럼에도 볼테르는 '관용(똘레랑스)'를 강조했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비난하는 이들의 의견조차 끝까지 '경청'하며 존중해주는 볼테르였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그럴 수 있던 까닭으로 '다름'을 설명했다. 비록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지만, 그건 상대의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볼테르 자신과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일축해버리곤 한 것이다. 그리고 '내 의견'을 존중받기 원한다면 '상대 의견'도 존중해주어야 한다면서 '관용정신'을 설파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똘레랑스'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볼테르가 있기 전까지는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자, 앞에서 '악한 의도'를 가진 이가 '악한 행동'까지 일삼고 있다면, 나와 '다름'일 뿐이라고 생각해보자. 악하다고 보이던 것이 그저 '다른 의도'와 '다른 행동'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물론, 미친 놈이 칼을 들고 설치고 있다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관계법을 상기시켜야 좋을 것이다. 먼저 자신부터 보호하는 것이 첫번째다.
이제 영국의 '경험론', 프랑스의 '합리론'을 만났다면, 독일의 '관념론'을 만날 차례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긴 버겁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정언명령)'만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그 의무는 반드시 선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만 지켜도 '인간관계'는 저절로 지켜지게 된다. 아시다시피 칸트는 '정확한 시계'보다 더 정확한 일상을 살았다. 칸트는 일상생활까지도 '의무'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산책'하는 것으로도 이웃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셈이다. 만약 칸트가 그 의무를 저버리고 '오늘은 피곤하니까 산책을 쉬어야지'라는 식으로 스스로 의무를 어긴다면, 이웃사람들도 칸트가 산책을 제 시간에 나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의무'로 삼고서 '반드시' 지켰다. 그랬기에 이웃사람들에게 뭔가 '울림'을 전해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관계의 시작'이란 것이다. 상대에게 진하디 진한 '울림'을 전하면 인간관계는 저절로 성숙해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였다. 인생이 참 엿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지만,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밝음'만 보면서 살라고 조언해주었다. 또한, 인간은 욕심도 많아서 불행해지기 쉽지만, 쇼펜하우어는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도 했다. 남들이 무엇을 하며 사는지 보고만 있으면 욕심만 부추기게 되고 결국은 그 욕심 때문에 불행에 빠진다고 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즐길지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행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어둠'이 짙게 깔렸더라도 '밝음'에 집중하라고 말한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게 좋지 않느냐면서 말이다. 아무리 엿 같은 상황이더라도 '부정'적인 것을 보지 말고 '긍정'적인 것을 부각시켜야 한다. 그럼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엿 같은 세상은 '전쟁'도 불사하며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다. 내가 원하든 말든 '전체주의'의 광기에 휩쓸려 세계대전을 치뤘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강제적인 힘을 가진 '독재자'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니체가 답했다. 힘(권력)이 인간관계를 좋게 만든다고 말이다. 인간은 힘(권력) 앞에 약한 모습은 보인다. 절대복종도 하고, 굴욕적인 모습도 보이며, 때로는 힘을 향한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등등 말이다. 그러니 '인간관계' 나부랭이도 어쩔 수 없이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를 향상시키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선택이 있을까? 힘을 길러야 한다.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 권위적인 존재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때 '선한 힘'이 '악한 힘'보다 인간관계를 더 좋게 만들 거라는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플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한 힘'을 가지려 애쓰지만, 그게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악한 힘'을 가지려 들곤 하지만, '인간관계'만 더 나빠질 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다. 니체는 이를 '아폴론(이성)'과 '디오니소스(감성)'로 표상했다. 이성은 좋은 것, 감성은 나쁜 것으로 '대변'할 순 없어도, '대신'할 수는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갈고 닦기 힘들어서 감성에 쉽게 휘둘리곤 하지만, 그래도 더 밝은 태양에 끌리는 것처럼 '아폴론적인 힘'에 큰 의의를 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없는 것처럼 '군주적인 힘'은 소수의 몫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같이 '다수의 군중'이 힘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감성)적인 힘이 필요한 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그너의 음악'이라고 니체는 예를 들었다. 음악이야말로 '군중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니체는 너무 '강한 힘'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위버멘쉬(초인)' 같은 이의 등장을 꿈꿨다. 물론 나중에는 '탄생'이 아니라 '진화'라는 개념으로 전환시켰지만, 그조차 '인간관계'에 있어서 넘치는 힘이 없으면 무용하다고 말한 것 뿐이다. 이는 니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시대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전후시대를 맞아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끝으로 레비나스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10명의 철학자가 말하는 '인간관계'를 관통하는 핵심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를 존중하고 남도 존중하라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든 싫든 '자신'과 '타인'이 관계를 만들어가야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까닭도 '철학자들의 조언'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 직접적인 답이 되지는 않을지언정 '실마리'는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더해지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권위적(?)인 철학자들의 눈에 프롬의 철학은 허섭스레기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지 못해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술'이 부족해서 운명적인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인간관계'를 어려워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함축되어 있지 않은가?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다람쥐 챗바퀴를 돌듯 '주변'만을 맴돌 뿐이다. 그러니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싶어도 만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정말 없느냐? 그건 아니다. 인구 1000만 도시에 살고 있어도 '아는 사람'이 1000만 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알려고 노력한 사람'이 몇 명이냐다. 인간관계는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조언에 집중해보길 바란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위의 '10가지 조언' 가운데 2~3가지만 실천해도 아주 좋은 방향으로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바로 당신부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실천하며 '도덕적 의무(정언명령)'에 철저히 따르면, 아무리 엿 같은 세상이고, 독재자 같은 나쁜 권력에 휘둘리는 상황일지라도 당신 자신부터 보호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넘지 않는 선'을 지키는 초인이 되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중받는 사람이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이렇게나 심오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