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원전 완역판 5 : 공명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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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이 <공명>이다. 소설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면서, 게임 <삼국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템'이다. 그럴만큼 제갈공명은 중요인물이다. 그를 일컫는 별칭조차 '와룡'이나 '복룡'이다. 흔히 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용을 꼽는데, 제갈량이 아직 취직(?)도 못한 시골 은자로 꼭꼭 숨어 있는 모양새를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며, 실제로 소설속에서도 제갈량의 등장만으로 이야기는 급반전을 이루며 활기차게 된다. 다음 권에서 '적벽대전'을 다룰 참이니 제갈량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겠다.

 

  우리가 애써 주목해야 할 대목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유능한 신하'를 모셔가기 위한 위촉오 삼국의 쟁탈전이 바야흐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줄거리는 관우의 오관참육장을 시작으로 손책의 죽음과 손권의 등장, 조조와 원소의 대결 '관도대전'이 펼쳐지고, 그 와중에 유비진영은 조조의 품을 떠난 뒤에 원소에 빌붙었다 '여남'에 터를 잡는가 싶더니, '형주의 유표'의 식객으로 전락했다가 '신야'에 정착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가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유능한 신하들'이 나름의 재능을 펼치다가 각국의 운명을 결정짓기도 하고, 이야기의 방향을 전환시키기도 하면서 종횡무진 이야기가 펼쳐진다.

 

  먼저, 강동의 오나라를 살펴보자. 손견이 죽고 손책의 치세가 이어지며 오나라는 강력한 국가의 면모를 갖춰나가게 된다. 물자도 풍부하고 인물도 많으며 장강(양쯔강)으로 둘러쳐진 천혜의 요새 같은 지형속에서 오나라는 무럭무럭 성장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인물' 느낌이 풍기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장강의 상류엔 '형주의 유표'가 건실히 자리하고 있고, 장강의 북쪽은 조조와 원소가 활개를 치며 확고한 영역권을 행사하고 있기에 좀처럼 진출할 기회를 얻기 힘들다. 아직 국가의 기틀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기에 먼 훗날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훗날의 오나라마저 '고인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사마씨(진나라)에게 멸망하고 만다. 암튼, 그런 손책이 손견에 이어 오나라의 번영을 위해 착실히 기틀을 쌓고 있었으나 사냥을 나섰다가 비명횡사할 뻔했고, 명의 화타가 겨우 살려놓았으나, '우길'이라는 신선같은 도인을 시기질투하다 끝내 급사하고 마니, 오나라는 '손권'이라는 어린 새주인을 맞이하게 된다.

 

  나라를 다스리기에 아직 어린 군주를 보필할 유능한 신하가 꼭 필요했던 손권은 형님의 친구이기도 한 주유가 노숙을 천거하자 기꺼이 수락하고, 제갈근을 직접 발탁하는 등 든든한 버팀목이 될 인재를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름지기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선 많은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제 아무리 잘난 사람일지라도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의 크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수많은 인재를 발탁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유용한 일을 도모하는지 감독하는 일이 '지도자의 첫번째 덕목'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권은 탁월한 군주였다.

 

  한편, 조조는 스스로 영웅이라 뻐기며 온갖 잘난 체를 다하더니 '황제의 밀서사건'으로 된서리를 맞고서 '국구 동승'을 비롯해서 모반자를 색출하고 숙청하는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숙청대상 1호쯤으로 여길 '유비'는 자신의 감시망을 유유히 탈출하더니 원소에게 붙었다, 여남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유표에게 빌붙는 등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조조가 한판 승부를 펼쳐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하북의 원소세력'이었다. 황하의 북쪽땅을, 그것도 가장 비옥하고 인물 많은 알짜배기땅을 차지한 거대한 세력이 조조의 등뒤에 버티고 있는 한 조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란 위기 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소세력은 뭐든지 조조보다 10배는 많이 갖추고 있었다. 단순히 병력의 숫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말이다. 이를 테면, 조조가 겨우 1만명의 군사를 갖춰 원소를 공격할라치면 원소는 장병 10만에, 기병 10만, 식량 10년치, 군수물자 빵빵, 거기다 구름같이 많은 장수와 참모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조 진영에선 굴하지 않고 원소와 결판을 내야 한다고 야심차게 주장하는 신하들이 많다. 하후돈, 허저, 서황, 장료 등 두려움을 모르는 무장뿐만 아니라 순욱, 순유, 정욱, 그리고 곽가 등 참모들까지도 하나같이 승산이 높다며 원정을 주장한다. 그만큼 조조 휘하에는 일당백의 유능한 신하들이 많고, 그 유능함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서 드러난 자신감이다. 거기다 조조의 용병술은 신묘하기 그지 없으니 군신간의 의기투합이 이리 출중하니 승리는 따논 당상이라는 듯 하다. 반면에 원소 진영에도 만만찮고 쟁쟁한 인물들이 구름같이 많았으나 '한마음'으로 똘똘 뭉치지 못하고 내분에 휩싸이고 말아 그 큰 세력을 갖고서도 '관도대전'에서 패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원인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 것이 바로 원소의 '팔랑귀'를 들 수 있다. 이말에도 혹하고 저말에도 혹하는 바람에 유능한 신하가 모처럼 충성스런 마음으로 책략을 일러주어도 군주의 애정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는 '반대측 신하'가 정반대의 대책을 일러주면 삽시간에 마음이 해까닥 돌변하고 마는 것이 원소의 가장 큰 단점이었던 것이다. 자고로 지혜가 부족한 군주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 '충언'과 '간언'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충언과 간언의 결정적 차이점은 무엇인가? 대개 충언은 대의(큰일)를 위해 개인적인 손해를 감수하자고 말하고, 간언은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자고 말하는 법이다. 원소의 처지에서 조조의 침략은 맞서 싸우기보다 든든히 버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애초부터 큰 차이가 나는 전력인데 뭣하러 '조그만 이익'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나가 큰 희생을 치른단 말인가. 그저 천혜의 요충지를 방어막으로 삼고 상대의 기세가 줄어들 때까지 버티다 상대가 지쳤을 때 반격에 나서면 필승이었다. 그런데도 원소는 조조의 공격에 발끈해서 총공격을 나섰다가 어이없게 대패를 하고 말았다. 만약 원소가 저수의 충언을 받아들여 방어전을 펼쳤으면 조조는 거꾸로 치명타를 받고 오래도록 회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곽도(곽상도?)의 간언을 받아들여 섣불리 거대한 덩치를 가볍게 놀리다 거꾸로 치명타를 받고 마니 어리석기 그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유능한 신하'를 어찌 써먹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조조처럼 유능한 신하를 미리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유용하게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 조조처럼 할 자신이 없다면 적어도 원소처럼 '팔랑귀'가 되어선 안 된다. 충언과 간언조차 구분할 줄 모른다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한편, 유표 진영은 한가롭기 그지 없다. 관도대전이 한창일 무렵에는 조조와 원소가 서로 편을 먹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조조는 원소와 손을 잡고 양쪽에서 공격 당할 걱정에 유표에게 친하게 지내자고 하소연했고, 원소는 우리 함께 조조를 합심해서 죽여버리자고 유표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유표는 양측의 러브콜에 무반응으로 일축했다. 아니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기만 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면 유표에게는 야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황실의 종친으로 천수를 누리다 편하게 눈 감으면 그뿐이라는 사람에게 천하를 뒤흔들 결정이란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던 것일테다. 그렇게 아무 편도 들지 않다가 유비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레 조조와 척을 지게 되었다. 급기야 조조가 관대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이제 조조의 칼끝은 서서히 유표쪽으로 향하게 되고 말았다. 그 시작은 '신야'에 머물고 있는 유비였다.

 

  유비는 조조에서 원소, 여남에서 형주까지 유랑을 하면서 조자룡이라는 유능한 무장을 얻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으나 인연이 미치지 못해 아쉬운 이별을 해야 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서로 정처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고나니 연이 맺어지게 된 것이다. 거기다 관우가 조조의 품에서 벗어나면서 주창이라는 부하와 관평이라는 양자를 얻게 되었으니 유비진영에 인재가 늘어나게 된 셈이다. 허나 든든한 무장을 얻긴 했으나 '지략가'가 마뜩찮았다. 허나 마침맞게 '서서'라는 군사를 맞이하여 조조의 선봉격이었던 조창과 이전의 공격을 막아내지만, 조조의 책사였던 정욱의 꾀에 빠져 서서는 유비의 품을 떠나 조조 진영쪽으로 향하게 된다. 그때 융중이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제갈량을 유비에게 소개해주고 가니, '삼고초려'가 펼쳐지며 이 책의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유비는 서서라는 '책사의 맛'을 한 번 보고서 제갈량을 더욱더 갈구하게 된다. 그동안 관우와 장비의 용맹, 손건과 간옹의 헌신으로 근근히 버텨왔지만, 유비 진영은 한실의 종친이며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로 명성을 날리는 것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세력으로 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비의 꿈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인데 송곳 하나 꽂을 땅뙤기 하나 건사하지 못한 처지로 오래 살다보니 더욱 그랬다. 사마휘 선생에게 '와룡과 봉추' 이야기를 듣고 나선 유비의 늙은 몸을 더욱 부풀어 오르게 하는 꿈이 곧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진 탓이다.

 

  그런데 정작 제갈량은 변변한 세력도 없는 유비에게 빌붙을 생각은 없었던 듯 싶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의 집에 얹혀 살아가다 숙부마저 폭삭 망하자 '가난'을 경험한 어린 제갈량은 자신의 실력을 마을껏 펼쳐볼 수 있는 든든한 터전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배다르지만 장성한 형님인 제갈근이 오나라의 중신으로 신임받고 있으니 자신도 그에 못지 않은 높은 직위를 탐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에 대해 이문열이 평전한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삼고초려'를 마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유세객이 되어 조조와 원소, 유표 등을 오가며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을 것이라 평했다. 그런데도 시골에 머물렀던 까닭은 조조와 원소 진영에는 이미 '책사'가 넘치는 상황이라 경쟁이 치열해서 쉽사리 고위직에 오르기 힘들 것이라 보았고, 유표 쪽은 유기와 유종이란 두 아들의 후사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채씨 외척'이 이미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신입직원에게 큰일을 맡길 까닭이 없었기에 취직할 생각은 더욱 없었다고 평했다. 손권이 제갈근을 중용한 까닭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행운이었을 거라고 짐작을 하니, 제갈량은 유비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라 보았다. 훗날 방통 역시 유비 진영에 슬며시 발을 들여놓는 것을 보면, 당시 군웅들 간에 세력형성이 이미 완성단계에 접어들어 '취업전선'이 녹록치 않았기에 취직을 바라는 젊은이들의 등용문이 한창 어려울 때라는 사실이 단단히 한 몫 한 것이라 평했다.

 

  그런데도 제갈량이 '삼고초려'와 같은 형식적인 면을 유비에게 강요(?)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또한 이문열은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권력'의 틈바구니에 낑겨들어 '핵심세력'으로 급상승하기 위해선 유비의 갈망이 필요했던 듯 싶다고 평했다. 확실히 제갈량은 노쇠한 유비 진영의 새내기에 속한다. 다들 40대 중반을 훌쩍 넘겼는데, 이제 갓 20대 후반인 제갈량이 '군사'라는 중책을 맡아버리면 병장들이 장악한 내무반에서 '소대장 길들이기'가 펼쳐지는 것처럼 자신을 견제하려는 알력이 발생할 것이라 짐작했던 탓이다. 말마따나 관우는 제갈량과 사사건건 부딪히고 만다. 한마디로 젊은 놈이 깝죽거리는 꼴을 보기 싫다는 것인데, 이런 제갈량과 관우의 갈등은 훗날 '형주에서 맞이한 최후'에서 잘 보여지듯이 권력의 핵심역할이었던 관우가 변방의 전선에서 비명횡사하고 만 사건으로 일단락이 되었다고 이문열은 평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분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이문열의 평론은 과한 면이 있다는 얘기다. 훗날 '천하삼분지계'를 펼치기 위해 깔아놓은 포석 정도로 '제갈량의 등장'을 평가해야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변변한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유비 진영이 제갈량을 만난 이후에 급성장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의 공로는 온전히 '제갈량'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기 때문이다. 과연 뛰어난 인재를 발탁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만큼 중차대한 일인지 잘 보여주는 경우이기도 하다.

 

  과연 요즘도 뛰어난 인재를 모셔오기 위해 '삼고초려'만큼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삼고초려'는 필요없는 것일까? 유능한 인재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오늘날에 '천거'와 같은 등용방식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소위 '엘리트'라는 지배계층의 속성이 얼마나 얍삽하고 천박한지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의는 고사하고 개인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국가도 팔아쳐먹으려 드는 그들의 뻔뻔함에 두손 두발 다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정하면서도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어떻게 갖춰야 할 것인가? 나는 유비의 '삼고초려'가 그 대안이라고 본다. 인재는 큰꿈을 키우고, 지도자는 인재를 모시기 위해 서로가 '진심'일 것, 사사로운 이익 뒷전으로 미루고 대의를 위해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 큰일을 도모하는데 '열심'일 것, 바로 이 '진심'과 '열심'이 이루어낸 결실이 바로 '삼고초려의 핵심'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존망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진국이라 전세계의 인정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국격'이 뿌리채 흔들리게 된 것도 우리 사회가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않고 관리감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평등과 투명이라는 잣대만 들이대어 '큰꿈'을 꾸었을 인재들을 '성적순'으로 난도질하고, '생기부'를 날조해 '고급수저들'만 골라 뽑아온 관행이 낳은 비극이라고 말이다.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우리는 갖추고 있느냔 말이다. 만약 그것이 엉망진창이었고 부족했다고 인정한다면 다시금 '삼고초려'를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지도자'와 비록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마뜩찮지만 세상을 바꿀만한 '패기'로 가득한 젊은 인재를 등용시킬 수 있는 '삼고초려(인재발탁) 시스템'이 필요할 때다. 그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는 증거는 무엇으로 증명할 것이냐고? '결과'로 보여주면 되지 않겠는가. 1년간 써보고 아니면 갈아치우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엔 '리스크(위험부담)'가 너무 크다는 지적엔 공감한다. 허나 애써 '정직원'으로 뽑아놓고 빈둥빈둥 놀고 쳐먹는 철밥통들보다는 리스크가 덜하다고 보는데...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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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4 : 신도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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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다시 <삼국지>를 손에 들었다. 잠시 잠깐 '딴짓'을 좀 했더랬는데, 생각보다 오래 시간이 걸렸다. 뒤늦게 시작한 만큼 빠르게 읽어나가려 한다. 읽어야 할 '삼국지'가 이 책만이 아닌 까닭도 있다. 황석영의 책도 있고, '조조전'도 있으며, '반삼국지'라는 것도 이 참에 다시 읽으며 리뷰를 할까 한다. 늘상 이리 글로 약속을 하고도 내일모래글피 자꾸 미루기만 했지만, 빈약속은 하지 않는다. 언제고 반드시 써낼테니 기다려달라. 댓글 하나 없는 것이 기다리는 이는 없을 듯 싶지만 말이다. 한편, 얼마전에 '블로그'를 정리하면서 '독서기록'을 샅샅이 뒤적거렸는데, 생각보다 '실종'된 리뷰가 많았다. 대략 6~70편 정도가 사라진 듯 싶은데, '블로그'에 남긴 글조차 깜쪽같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더 '이곳저곳'에 기록을 남겨놔야 하겠다. 온라인도 결국 믿을 게 못된다.

 

  어쨌든, <삼국지 완역판 4권>이다. 4권의 제목은 바로 '신하가 해야할 도리(臣道)'도 왕이 해야할 도리가 있는 것처럼 신하도 마땅히 해야할 일이 있음을 이르는 말일게다. 4권의 주요 줄거리는 조조가 여포를 토벌하고 동승이 조조암살을 꾀하고 조조와 원소의 한판 대결인 '관도대전의 서막'이 펼쳐지는 와중에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했다가 유비가 살아있는 소식을 전해듣고 유비의 일가족을 데리고 유비의 품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하였다. 마지막 장면은 '오관육참장'이라는 고사로 전해지기도 하는데, 마땅히 신하라면 주군에게 충성을 받치고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으로도 널리 전해지는 유명한 대목이다. 조조는 유능한 인재를 탐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럽다 할 사람으로 휘하에 구름같은 인재를 갖추고서도 '관우'를 탐하는 모습은 이 고사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관우는 조조가 베푸는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옛주인인 유비를 쫓아 고행길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마땅히 '신하가 갖춰야 할 도리'가 바로 이것(!)이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5권의 시작이 바로 관우가 파죽지세로 다섯개의 관문을 뚫고 여섯명의 장수를 베며 유비를 찾아나가는 장면일테니 정말 볼만 할 것이다.

 

  헌데 나는 이런 대목보다 헌제의 국구(왕비 '동대비'의 아버지)인 동승이 역적 조조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대목이 더 눈에 띄었다. 조조는 일찍이 동탁과 그 수하들에게 모진 수모를 당하고 있는 헌제를 구출해내는 것에 성공한 충신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탁과 마찬가지로 헌제를 허수아비처럼 내세우고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는 역적의 수괴임을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하북의 원소를 비롯해서 형주의 유표, 강동의 손권, 서량의 마등, 그리고 헌제의 황숙인 유비 등의 세력이 조조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던 탓에 감히 황제를 능멸하는 일까지는 저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조조는 승상이란 직위에 올라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신하라면 황제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반드시 죽였으며,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면 '황명(황제의 명령)'을 내세워 토벌의 명분을 세우니 '조조군'에 저항을 하면 황명을 거역한 역적이 되고, '조조군'에 항복을 하면 이런저런 빌미를 내세워 숙청을 해버리니 조조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끝끝내 황위를 찬탈할 것이 틀림없다는 슬픔예감을 수많은 영웅들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럴 때, 마침맞게 헌제가 국구 동승에게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사하며, 그 속에 '밀명'을 담았으니 "역적 조조를 멸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여러 충신들이 황제의 밀명을 받들어 '조조를 토벌하겠다'고 호응하니, 토벌 가능성이 높은 군웅으로 서량의 마등과 황숙으로 불리는 유비 등이었다. 허나 유비는 여포 토벌이후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는 처지라 뾰족한 수가 없다가 마침 '전국옥새'를 내세워 황제라 참칭하던 원술을 벌하러 가겠다며 조조에게 3만 군사를 빌리니, 원술 토벌이후 서주, 소패, 하비에 자그마한 세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유비가 세력을 이제 막 갖췄을 즈음에 '헌제의 밀서'가 들통이 나고 말았다. 동승의 집에서 일하던 남자종 하나가 동승의 어린 애첩과 정분이 났다 들통이 난 뒤 모진 매를 맞은 뒤 앙심을 품고 도망을 쳐서 조조에게 밀고를 해버린 탓이었다. 때마침 '명의 길평'도 조조 암살을 시행하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평소 조조가 두통이 심했기에 '두통약'이라 속이고 독약을 먹이려 했던 것이다. 허나 이미 밀고를 들은 뒤였기에 길평의 암살은 실패로 끝나고, 동승을 비롯해 허도에 머물고 있었던 여러 충신들이 '연판장'에 이름을 올린 것마저 발각이 되면서 조조의 분노를 피해갈 수 없었다. 끝내 충신들의 집안을 멸문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헌제의 아이를 임신중인 '동대비(동승의 딸)'마저 목졸라 죽이고 마니 조조의 악행은 갈데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이런 조조를 보면서 감히 '영웅'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한왕조가 무능하고 백성의 민심이 떠났으며 멸망의 기운이 깊어졌다하더라도 감히 '신하'된 자로서 할 '도리'를 다했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황건적의 난이 한창일 때 젊은 시절의 조조는 한 관상가에게 "난세의 능신, 치세의 간웅"이라는 점괘를 받았다고 한다. 평범한 이가 들었다면 한없이 기분 나빠했을 나쁜 점괘인데 조조는 '그것도 좋다'라면서 반겼다고 한다. 이게 과연 무슨 뜻인고 하니, 어리저운 세상이면 능숙해지고, 태평한 세상이면 간사해진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팔자가 '거꾸로' 트였으니 어지럽고 뒤숭숭한 세상을 만들어야 팔자가 편해지고, 태평하고 평안한 세상이면 팔자가 꼬여 간사스런 일을 해서라도 세상에 풍파를 만들 썩을 놈이란 뜻이다. 왜냐면 세상이 어지러워야 제 운수가 트이는 팔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인 승상에 올랐으니 세상이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조의 평판은 나쁘지 않다. 휘하에는 구름같이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 저마다 재능을 뽐내고 조조의 눈에 들고 칭찬을 받기 위해 '무슨짓'이라도 하려고 득달처럼 매달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조의 눈에 드는 것이 곧 '한 황실에 충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헌제의 목숨을 구하고 헌제를 모시고 있는 조조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한 황실'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라고 여겨진 탓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순욱'이다. 순욱은 뛰어난 지략으로 조조를 한평생 보필하는데 조조의 영민함을 받들어 충성을 다하면 한 황실의 안녕과 더불어 만백성이 평안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조조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에겐 '역적 프레임'을 걸고 발본색원하는데 앞장 섰던 인물이기도 하다. 허나 훗날 조조에게 '빈잔'을 선물 받고 자결을 명받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조조가 본색을 드러내 헌제에게 선양을 받으려는 불충에 동참하지 않은 결과였다. 과연 충성스런 신하라면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하는가? 아님 독재자에게 충성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가?

 

  헷갈리기 쉽지만, 정답은 뻔하다.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마땅하다. 독재가같은 인물이 나온다한들 '패싱'이 정답이다. 당장에 목숨이 아까워서 납작 엎드리는 한이 있더라도 진정한 신하라면 국가에 충성을 하는 것이 정답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국가를 참칭하고 '자신'이 곧 '국가'라면서 국가가 아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못난이들이 간혹 생기곤 한다. 더욱 못난놈들은 그런 못난이를 추종하며, 그런 못난이를 앞세워 저들만의 이익을 챙기는 놈팽이들이다. 이런 못난이와 놈팽이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국민들의 자존심마저 헌신짝처럼 내다버리고 제놈들의 이득에만 열을 올리기 마련이다.

 

  <삼국지>에서는 이런 못난이와 놈팽이들에게 '바른소리'를 목놓아 외치던 인물이 있다. 바로 '예형'이란 선비다. 예형은 끝끝내 '입바른 소리'를 하다 제 목숨줄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만 인물로 비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조와 조조의 똘마니들에게 날선 비판을 아끼지 않은 충의로운 선비로 봐야 한다. 오늘날로 치면 독재자에게 가감없이 '바른소리'를 외친 인물이니 영웅 중에 영웅이고, 애국지사 중에 으뜸으로 쳐야 할 것이다. 충성스런 신하란 '국가'와 '만백성'을 위해 제 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옳은소리'를 목놓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독재자에게 알랑방귀나 껴대는 놈들보다 훨 낫지 않느냔 말이다.

 

  이렇게 동승과 길평, 그리고 예형으로 이어지는 '조조에게 저항하는 이들'의 대목을 읽으면서 요즘의 어수선한 대한민국 정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조를 암살하려 했던 것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것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왕조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이고, 온국민에게 주권이 주어진 '민주주의 시대'에는 누구 한 사람을 죽인다고 속시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못난이 하나 죽이는 것보다 놈팽이들을 발본색원하는 것이 더욱 중하다. 이승만이 키운 '친일매국 놈팽이들', 박정희가 키운 '군인출신 놈팽이들', 전두환과 노태우가 키운 '유신세력 끄나풀들', 김영삼이 키운 '반민주적인 경제거물들', 이명박과 박근혜가 키운 '몰염치한 뉴라이트세력들', 그리고 윤석열과 얍삽하고 저열하기 이를 데 없는 '자칭 엘리트집단들의 저질스런 패악질'을 지켜보면서 <삼국지>를 열독해야 할 이유를 또 하나 찾고 말았다.

 

  비록 한나라는 조씨와 사마씨에 의해 차례차례 짓밟히고 말았지만, 대한민국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아무리 독재세력들이 시곗바늘을 '거꾸로' 되돌려 놓으려 할지라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용서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저들의 세상인 것마냥 제멋대로 굴지만 시곗바늘은 째깍째깍 '앞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년 총선은 다가오고 대통령의 임기는 늘어나지 않는다. 꼴랑 1년 만에 참으로 대한민국을 망쳐놓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뿌리뽑아야 할 세력들이 누구인지 더욱 잘 알아볼 수 있게 된 '기회'로 삼을 때다. 대한민국은 결코 윤석열과 똘마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바닥에 임금 왕이라 써놓고 지가 왕인줄 착각하는 대통령은 정말 아니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주권자인 국민의 '신하'에 불과하다. 감히 신하가 '국민의 주권'을 제것인냥 맘대로 쓰다간 큰코 다칠 것이다. 제발 '신하가 마땅히 해야할 도리'를 깨닫고, 지금 국민들이 외치는 '바른소리'를 귀담아 들을 것을 명한다. 니가 가야할 길은 거기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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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6 :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NEW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56
신현정 지음, 박종호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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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학문의 경계'를 부수는 과학책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과학발전사의 '패러다임(틀)'을 깨는 결정적 열쇠가 되었다면 슈뢰딩거의 책은 물리학자가 생물학책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통섭의 열쇠'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치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문구처럼 '새는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가 '틀안에 박힌 지식'에 머물지 않고 '지식의 경계'를 허물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을 선사한 셈이다. 실제로 슈뢰딩거 이후로 수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공분야'를 뛰어넘어 다양한 학문연구를 한 덕분에 현대과학은 진일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지금까지도 '과학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을 하며 꾸준히 읽히는 책이라 한다.

 

  물론, 과학책은 시간이 흐르면 '낡은 지식'이 되어 쓸데없게 되어 버리곤 한다. 스마트폰 출시 이후에 더는 고물과 다를 바 없는 '플립폰'을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리한 폰'이 등장하고나니 더는 전화기가 '전화와 문자'만 보내는 통신수단으로 그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안테나 뽑아 다이얼을 띠띠 누르던 그 시절의 낡은 폰을 오늘날에는 거들떠 보지 않는 것이 상식일테다. 그런데 여느 폰과 달리 '새로운 폰'을 발명하는데 유용한 팁을 선사하는 폰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영리한 폰'을 넘어 '초월하는 폰'을 연구하는데 기반이 될 영감을 선사하는 폰이 있다면 꾸준히 쓰지 않겠느냔 말이다. 일반 사용자는 쓰지 않을지라도 '핸드폰 발명가'라면 기꺼이 읽고 또 읽으면서 발명의 초석을 다질 것이 틀림없다.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바로 그런 책이다. 과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샘솟게 만드는 영감책 말이다.

 

   사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전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읽었을 때 '오류'가 많은 옛날책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70년도 훌쩍 넘은 이 책이 현재의 과학도들에게 필독서가 된 까닭은 바로 '과학의 경계'를 허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슈뢰딩거는 물리학자(양자역학)였다. 그런데도 물리학자의 눈(관점)으로 '생명의 비밀'을 파헤치겠다고 뛰어들었고, 그의 시도가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선사한 것도 사실이다. 유전자의 비밀을 파헤친 왓슨과 크릭도 사실은 '생물학자 출신'은 아니었단다. 원래는 평범한 화학자였는데 슈뢰딩거 이후에 '새로운 영감'을 얻어 DNA의 나선구조를 기가 막히게 풀어낸 공로로 노벨상을 거머쥐게 되었단다. 이처럼 책 자체는 별볼일 없는 내용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널리 읽히는 까닭은 바로 '통섭의 힘'을 깨우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통섭이란 그저 해박한 지식을 뽐내며 이것저것 모두 통달한 지식을 쌓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과학의 눈으로 예술을 파악하고, 시인의 눈으로 날카롭게 사회비판을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통섭'인 것이다. 교육계에서도 이런 힘을 아이들에게 깨우치기 위해 '통합교과'를 기반으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스팀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배우는 처지에 놓인 이들이 '학습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한 가지 전공에 빠삭해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언제 두세 가지 전공지식을 쌓고 실력을 뽐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런 까닭에 '통섭의 힘'은 결코 학습자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어서는 효과를 볼 수 없다.

 

  마치 '뉴턴의 사과'처럼 우연히 뉴턴의 어깨 위에 떨어진 사과에서 영감을 얻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떠올린 것처럼,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처럼 피곤한 몸을 욕조에 담그는 우연한 일상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는 것처럼 '통섭의 힘'을 길러야만 한다. 결코 이학문 저학문 '학문의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수준에서는 도저히 발휘할 수 없는 성격인 것이다.

 

  또한, 고수는 고수끼리 통하는 법이다. 요리에 통달한 요리사는 접시 위에 요리를 뛰어넘는 예술을 담아내는 경지에 오르기 마련이다. 어디 예술뿐인가. 뛰어난 요리사는 '영양학'을 연구한 박사보다 더 뛰어난 과학적 지능을 뽐낼 수도 있다. 이런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인재들은 의외로 많다. 명문대 출신 가수가 많고, 특히 수학에 능숙한 공대출신 가수가 뛰어난 가창력과 독특한 음색, 기발한 연주법으로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요즘에 '투잡'은 기본이다. 한가지 재능으로 평생을 먹고 살기가 참 힘든 세상이란 말이다. 이런 시절에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해봐야 한다. 요즘 아이돌 가수도 노래만 잘해서는 부족하니 작곡도 할 줄 알고, 연기도 할 줄 알고, 예능도 잘 해야 한다. 요컨대 만능엔터테인먼트쯤 되야 성공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슈뢰딩거는 참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셈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열심이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려는 욕심만 키우다보면 이도저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과학도가 아닌 '일반독자'라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보다는 이 책을 추천한다. 과학적인 지식과 영감보다 더 한 것을 얻게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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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1987년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열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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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열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쓸 당시만 해도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이 한창이었다. 김재규의 총부리가 박정희를 향하고 '서울의 봄'이 잠시 잠깐 찾아왔었지만, 민주주의는 곧바로 찾아오지 못하고 다시금 '군사정권'이 들어서 '유신독재의 그늘'은 더욱더 짙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쓰여지고 난 뒤에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 '6월항쟁'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니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의심쩍은 구석이 없지 않다. 과연 이문열은 '민주화 투쟁'을 위해 이 책을 썼던 것일까?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이승만 독재 아래에 놓인 '자유당정권 시절'이다. 오직 힘과 권력을 가진자들만이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으며, 권력에서 밀려나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던 암담한 시절이었는데, 그런 권력조차 정당하지 못한 부정한 방법으로 차지한 무리들이 떠세를 부리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참담한 시절이었을까. 그런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시골의 초등학교'를 주된 배경으로 '급장 엄석대와 전학생 한병태'의 대결이 중요 줄거리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런 이야기구조로 보았을 때, 한병태의 외로운 싸움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투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태는 승리하지 못하고 끝내 석대에게 굴복하고 달콤한 굴종의 열매를 맛보는 것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른이 되어서도 '경제적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잔인한 패배감을 맛보는 결말을 보면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은 이들이 이 작품을 볼 때 '미완의 민주주의 혁명'의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고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탓에 이문열은 오래도록 '민주화 투쟁'에 긍정적인 시선을 지닌 작가로 오해도 했었는데, 2008년 촛불혁명 당시 "나는 보수주의자다"라는 양심고백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뜨악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 뒤에 다시 읽어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과연 '민주화 투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그런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왜냐면 이 작품의 결말에서 한병태가 현실의 비참함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석대가 만든 세상'을 철저히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재자와 다를 바 없었던 엄석대가 만든 세상이 그토록 그리운 까닭은 비록 더러운 세상일지라도 석대에게 굴종을 바치기만 하면 '달콤한 열매'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정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영혼이니, 민주적 방식의 정의로움이니 다 부질없고 그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부러울 따름인 너덜너덜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하긴 누가 '경제적 풍요'를 마다할 것인가. 조금쯤 더러움과 타협을 하고 부당한 권력일지라도 넙죽 엎드리는 굴욕을 살짝 견디기만 하면 넓디 넓은 고층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고급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고, 어딜 가서든 갑질을 하며 융숭한 대접을 만끽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깟 양심이 뭐가 대수라고, 그깟 자존심이 뭣이 중하다고 애지중지 끼고 살아야만 한단 말인가. 조금만 비굴해도 넉넉하게 살 수 있고, 사알짝 굴욕을 당해도 '경제적 풍요'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용기가 샘솟게 될테니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한병태가 석대에게 굴종한 뒤, 그가 누린 '달콤한 열매'는 다름 아닌 다른 학생들이 석대의 횡포가 무서워 갖다 바친 '상납과 뇌물'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토록 원하던 '달콤한 열매'의 진실도 과연 무엇이겠느냔 말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독재정권'에게 무참히 빼앗긴 서민들의 피와 땀이었을 것이다.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라는 것이 사실은 열심히 살아가는 착하고 평범한 서민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가로채서 제 호주머니를 그득 채운 '사악한 욕심'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한병태는 바로 그런 부당한 방식으로 빼앗은 '경제적 풍요'를 그리워하고 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픈 현대사속에서 '일그러진 영웅'을 그리워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남들은 어찌 살든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심보가 바람직한 것이라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경제적 풍요'만큼은 절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부정한 짓을 통하더라도 '경제적 풍요'만 보장해준다면 적당히 타협하고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풍요가 '착하고 선량한 이들의 몫'을 빼앗은 결과였대도 그랬겠냐고 되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고, 자존심도 버리고 강자에게 굴종하며, 힘 없는 이들의 몫을 강탈하는 파티에 '초대장'을 받는다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참석하겠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결코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없다고 일깨워주니, 일순간 의아해 한다. 너희들은 '석대가 마련한 잔칫상의 진실'을 알고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한병태가 괴로워하는 까닭이다. 석대를 비롯한 '악인들의 세상'에 몸 담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면서 그들이 만들어준 '경제적 풍요'를 탐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병태는 석대가 만든 세상을 그리워한다. 석대는 일그러져 있을지언정 '영웅'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 일그러진 영웅을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며 말이다.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준 그 영웅이 다시 돌아온다면 기꺼이 맨발로 환영할 거라면서, 지금의 비참하고 빈곤한 생활을 벗어나게만 해준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나는 싫다. 내가 누리는 풍요는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열심히 살아온 결과라고 믿고 싶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뿐인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어려움을 함께한 이들이 많았기에 지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굴곡진만큼 21세기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 이런 대한민국일진데, 나라를 망치게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라조차 망신살이 뻗치게 만드는 세력이 아직도 떠세를 부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죄 많은 장본인들을 그리워하고, 그들이 남긴 찌끄래기도 못 먹어서 안달이 난 못난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영웅은 결코 '일그러진 모습'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못난 영웅을 쫓아낸 경험이 많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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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수상한 비타민C의 역사 - 아주 작은 영양소가 촉발한 미스터리하고 아슬아슬한 500년
스티븐 M. 사가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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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비타민C'를 채내에서 스스로 합성할 수 없다. 그래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통해 반드시 섭취해야만 한다. 그런데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비타민C 부족'으로 인해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꼭 필요한 필수영양소인데도 아주 적은 양만 필요했기 때문이다. 섭취 방식도 아주 간단했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식사할 때 조금씩 곁들여서 먹어주기만 하면 충분한 양을 섭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이 필수영양소가 부족해지면 어떤 끔찍한 일을 겪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과거에는 질병에 걸리는 이유가 '신이 내린 형벌(천벌)'이라거나 '더러운 공기(미아즈마)' 때문이라고 맹신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타민C 부족'으로 생기는 질병이 유독 '낮은 신분'에게서만 발병한 탓에 먼 바다를 항해하면서 더럽고 불결한 환경에 놓인 '하급 선원'들에게 으레 생기는 질병이려니 하면서 그저 방치했기 때문이란다. 그 질병이 바로 '괴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무기력해지고 쉽게 피곤해하며, 피부에 반점이 생기며 가려움증을 유발하다가 잇몸이 붓고 피가 나며 끝내 이가 빠져버려 음식조차 씹어먹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는 괴상한 병이었단다. 이 병으로 인해 선원을 몽땅 잃어버리고 선장을 비롯한 소수의 인원만 항구에 돌아오는 일을 겪으면서도 정작 '발병의 원인'을 몰라 의학계에서도 대처방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더란다.

 

  그런데 '괴혈병 증세'를 보이는 선원들에게 '오렌지'를 보급해주면 증세는 급격히 완화되었고, 선원들에게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보급'한 배에서는 괴혈병을 앓지 않고 먼 바다를 항해하고 되돌아오는 '경험담'이 널리 퍼지게 되었단다. 실제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제임스 쿡 선장'의 선원들은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선원들에게 부족하지 않게 보충해주어 '높은 생존률'을 보여주기도 했더란다. 그런데도 정치인들과 의사들은 뱃사람들의 이런 경험에 주목하지 않았고, 바스쿠 다 가마의 신항로 개척 이후로 400여 년간 '괴혈병'은 원인도 모른 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으로 악명을 끼쳤단다.

 

  괴혈병과 비슷한 질병으로 '각기병'이 있는데, 이 질병 역시 '비타민 부족'으로 인한 질병이었다. 이 질병을 연구한 학자는 각기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 연구를 시도 했지만 각기병에 걸린 닭들을 아무리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도 병을 일으키는 세균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실험용 닭들에게 '우연한 실수'로 백미가 아닌 현미를 주었더니 '각기병'에서 회복이 된 것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발견을 한 이후에도 한동안 '각기병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다 나중에서야 '비타민 부족'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까닭인 즉슨, 백미에는 없는 '씨눈'이 현미에는 있었고, 바로 이 '씨눈'에 많은 무기영양소(비타민B1)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덕분이었다. 이것도 우연히 말이다.

 

  이처럼 '비타민 부족'이 괴혈병과 각기병 등과 같은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렸단다. 그 까닭은 매우 적은 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꼭 필요하다는 '상식'으로 전환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비타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꼭' 필요하다는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난 뒤에 인간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결핍으로 생긴 질병을 극복해주는 '영양소'가 어느새 '만병통치약'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런 그릇된 믿음에는 한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라이너스 폴링'이다. 비타민C 연구로 두 번이나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이기도 하다. 이런 명석한 과학자가 '고용량 비타민 복용법(메가도스)'을 고안해 전세계 선진국에 또 다른 질병을 선사하고 만 것이다.

 

  먼저, 비타민C의 효능부터 정리해보자. 대표적인 효능은 면역력 증진, 항산화 기능으로 인한 염증 완화다. 이런 효능 덕분에 비타민C를 꾸준히 복용하면 면역력을 높여 '감기 예방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더 나아가 '항산화 효과'는 부풀려질대로 부풀려져서 외부 오염물질의 노출로부터 세포를 보호하고, 콜라겐 합성을 도와 신체조직을 튼튼하게 하며, 심혈관과 폐기능을 높여줘 심장과 폐를 보호하는 영양소로 소개하고 있다. 거기에 자외선으로 망가진 피부세포를 되살리는 효능도 있어 피부노화방지, 주름개선, 나아가 화상으로 인한 피부손상까지 놀랍도록 원상복구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이렇게나 좋은 영양소이니 많이 복용하면 할수록 좋다는 논리인데, 아무리 그래도 많이 복용하면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우려섞인 목소리에는 '우리 몸이 필요한 만큼 쓰이고 난 나머지는 소변으로 말끔히 배설된다'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한마디로 부작용은 전혀 없다는 소리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비타민C의 용량은 125밀리그램 정도이다. 이것도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며 성인기준 100밀리그램 정도면 최고용량에 다다르고, 하루 평균 50밀리그램씩만 섭취하면 차고도 남는 용량이란다. 그 이상으로 섭취한 용량은 거의 대부분 소변으로 배출되어 버려진다. 여기서 버려진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배설해야만 하는 이유 말이다. 몸속에 과다하게 간직하고 있으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결석'이 생기기 마련인데, 비타민도 과도복용시 요로결석이 생기는 주요 원인이 되곤 한다. 그밖에도 '신장기능'이 저하된 환자에겐 콩팥을 혹사시키는 결과를 낳아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약산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위장관기능이 약한 사람이 장기복용을 할 시에는 '소화기 질환'을 유발시킬 수도 있단다. 이런데도 비타민C를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만병통치약'으로 광고할 수 있을까?

 

  심지어 폴링박사는 치명적인 암환자에게도 '메가도스'를 권장해서 무리를 일으키곤 했다는데, 50밀리그램으로도 충분한 비타민C를 3000밀리그램부터 시작해 12000밀리그램까지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암세포만 골라서 말려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암환자를 상대로 '임상실험'을 해야 살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여 빈축을 샀다고 전한다. 실제로 비타민C가 정상세포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암세포만 골라서 죽이는 기능이 있다는 실험보고서가 있기는 하단다. 하지만 아주 극미한 조건 하에서 그런 결과를 보여주었으며, 실제 임상실험에서도 그 효과는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는 결론이 난 상황이란다. 그런데도 폴링 박사는 '메가도스 치료법'을 맹신에 가깝도록 주장하며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무리를 일으킨다고 한다.

 

  결론만 이야기해서 '비타민 과다 복용'은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심지어 우리는 일상적인 식단에서 충분한 양의 비타민을 섭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영양제'로 따로 복용할 필요는 더욱더 없다고 한다. 하루 100밀리그램이면 충분한 양이고, 주먹만한 크기의 오렌지 하나에 90밀리그램 이상을 함유하고 있고, 살짝 익힌 브로콜리 한 컵 정도에도 70밀리그램 이상 함유하고 있단다. 특히 감자의 경우엔 불에 익힌 조리법으로도 감자속에 함유된 '비타민C'가 손상되지 않으니 감자를 곁들인 식단을 먹으면 비타민 부족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괴혈병이나 각기병은 '이름'만 전해지는 질병으로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질병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현재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최극빈국에서나 들어볼 법한 질병이며, 웬만해선 경험하지 못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비타민C'를 따로 복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 팩트다. 또한 감기예방이나 암치료에 효과가 높을 거라는 이야기도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도 팩트다. 실제로 실험도 해보지 않고서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섣부른 결론이라는 지적에도 '비타민을 제한하는 실험'이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임상실험'을 굳이 강행해야 한다는 '폴링의 후예들'이 더 무례하다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이미 거대해질대로 거대해진 '비타민 영양제 시장'이다. 100밀리그램이면 차고 넘칠 용량인데 500밀리그램을 넘어 1000밀리그램, 심지어 알약형태로 2000밀리그램 이상을 복용하는 영양제를 꾸준히 복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누가 '부작용'을 제대로 설명이나 했는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이 책 <조금 수상한 비타민C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콤달콤한 영양제 드링크를 한입에 털어넣으면서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겠지만, 평범한 식단으로도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영양소를 '따로' 챙겨 먹는 일만큼은 다시 한 번 생각해봄직 할 것이다. 나도 그간 내 돈으로 사먹은 적은 드물지만 접대나 선물 용도로 '영양제 한 상자'를 아무 거리낌없이 소비하는 것은 그만 둘 작정이다. 저자도 수차례가 강조한다. 평범한 식단, 엄마가 차려주는 한상만으로도 우리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를 이미 충분히 섭취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따로' 영양제를 복용해야 할 필요성은 전혀 없으니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감기예방과 피부보호, 주름개선을 위해 꾸준히 먹고 싶고, 꾸준히 먹어서 효능을 봤다는 맹신도들의 경험사례에 혹하고 싶다면, 화장실에 버려지는 '노란 액체'에 주목하길 바란다. 당신의 몸이 '필요한 양'을 넘어 버려진 돈이다. 또 그렇게 버려진 '비타민C'가 돌고 돌아 채내에서 스스로 비타민C를 합성하는 생물의 몸에 '과다복용'을 강제로 시키는 일이 되며, 그런 일이 계속되면 생태환경을 파괴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하길 바란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만 '결석환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좀 상기할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이 먹은 탓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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