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 타인 지향적 삶과 이별하는 자기 돌봄의 인류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28
이현정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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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행복하다'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불행하다면서 선진국 가운데 '자살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라는 낡아빠진 이념 사이의 갈등을 넘어 세대간, 젠더간 따위에도 '시기와 질투, 그리고 혐오'까지 온갖 나쁜 것들이 다 들어 있는 '판도라 상자' 같은 형국에 처하고 말았다. 제발 그 안에 담겨 있는 나쁜 것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상자를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추구했던 '멍청함'이 오픈해버리고 만 셈이다. 대한민국의 '판도라 상자'에도 희망이 남아 있기는 한걸까?

 

  <서가명강> 시리즈 '인류학 편'인 이 책은 '한국인의 욕망'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본래 '인류학'은 역사적, 지역적으로 다양한 사회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다양한 인간의 삶과 사고방식에 관심을 둔 학문이기에 현재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탐구하기에도 딱 좋은 학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 '타인의 욕망'을 무작정 따라하는 '보편적인' 한국인들이 타인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에서 펴낸 책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담긴 책이란 말이다.

 

  우리 사회는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비이성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자하면, 심각할 정도로 '남'을 의식한다. 그냥 자신만의 개성으로 살아가도 충분한 것조차 '남들의 눈에 튀어 보이지 않는지'에 대해서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한국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경향이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오죽하면 '엄친아/엄친딸'이라는 말이 나왔겠냔 말이다. 유독 '엄마 친구의 아들/딸'은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으며,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입사하고, 젊은 나이에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차도 사고, 집도 사고, 해마다 해외여행을 하며,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를 밥 먹듯이 한다. 분명 어제도 말 했는데, 오늘 또 말하고, 내일도 엄마 친구의 아들, 딸은 그렇게나 잘났다고, '금쪽같은 내 새끼'를 기죽일 정도로 잘났다고 끔찍할 정도로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대한민국의 모든 엄마'가 어쩜 그토록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삶을 자기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인지다.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성격이 좋다'는 평가는 다분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잣대인데도, 천편일률적으로 '엄마 말씀을 잘 따르는 자식'이 곧 '성격이 좋은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거기에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대기업 입사'한 뒤, '좋은 차' 사고, '좋은 집' 장만하고, '결혼'도 일찍하고, '아기(손주)'도 순풍순풍 낳고,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산다는 증거로 '해외'로 싸돌아다녀야만 훌륭한 삶, 다시 말해,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인지 '누가' 정했느냔 말이다. 어찌 하여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이처럼 '똑같은 삶'을 성공이라고 정해놓았는지 궁금하다. 하물며 위에 열거한 것 가운데 '하나'라도 빼먹으면 '실패한 삶'으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루저(낙오자)'라고 비난하기 일쑤다. 심지어 그런 자식을 둔 엄마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렇다면 '공부' 좀 못하고, '성격' 좀 나쁘고(?), '삼류대학' 나오고, '비정규직' 신세에, 좋은 집은커녕 월세 마련하기도 버겁고, 차 살 돈도 없어 '뚜벅이 신세'로 전락하면, 당근 '국내여행'도 변변히 가지 못할테니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실패자란 말인가? 설령 그런 삶을 실패라고 한다고 쳐도 '실패'로 낙담에 빠진 이에게 위로를 건내기는커녕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을까봐서 주눅이 든 삶을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러니 '자살율 1위'라는 불명예를 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남이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거나 누리면 그뿐인 것이다. '차가 없는 삶'이라도 자기만족으로 살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으며, '집 없는 천사'처럼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소유욕'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자아실현을 통한 '나눔'과 '베품'으로 더 많고 더 큰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방식도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누가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서 '높은 담장'을 두르고 '내려다 보는 삶'을 살면 부러워서 미쳐버리는 못된 습성을 '성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해서 '그런 삶'을 살라고 부추기고 만다. 그래서 결국 '남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불행에 빠지고, '남의 삶'을 가지지 못해서 자기만족을 할 줄 모르는 멍충이가 되고 만다. 왜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게 만드냔 말이다. 그래선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얼짱'이나 '몸짱'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쓰곤 한다. 그것만으론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얼짱'이나 '몸짱'이 되지 못하면 '자기관리'조차 하지 않은 게으른 사람으로 치부하며, 못 생겼으면 '화장'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뚱뚱하면 '다이어트'나 '운동'이라도 죽어라해서 모두가 '얼짱'이 되어야 하고, '몸짱'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기에 이르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나마 요즘엔 '성형'이나 '화장'조차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다보니 조금쯤은 덜 강요하는 분위기가 되어 다행이지만, 그런 부족함을 더 채우기라도 하듯 '몸짱 열풍'이 불어재끼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먹방'도 함께 대유행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한편으론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며 먹으면서 '몸매'는 식스팩에 개미허리를 유지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셈이다.

 

  어디 이뿐인가. 우리 사회가 빠른 속도로 '초고령화', '저출생'의 문제로 위기에 빠지자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애를 낳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비난이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도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홀로 아이를 낳으면 '미혼모'와 '사생아'라고 낙인을 찍으며 '동반자살'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로 내모는 사회풍토가 여전한 것이 웃길 뿐이다. 대한민국이 '인구절벽'이라는 위기 탈출을 하는데 보탬이 된다며 칭찬(?)해도 괜찮은 상황 아니냔 말이다. 오히려 '미혼모'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데 어려움이 클테니 '십시일반'을 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해서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선이지 않느냔 말이다.

 

  이런 사회문제들은 '타인의 시선'에 너무 목을 매다보니 벌어지는 촌극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타인지향적인 삶'을 뿌리 깊게 내린 결과,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떻게 비춰지느냐'가 더 중요한 가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정상적인 삶으로 못박아 버리고나니 가장 중요한 가치가 '경제력'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대한민국 사회는 그 어떤 가치보다 '경제'에 치중하고 말았고, '경제성장'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은 만병통치약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이다. 그 탓에 '경제성장'으로 일어나는 여러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가며 추진하지 못하고, 문제가 불거지면 그냥 덮어버리고 밀어붙이는 일이 자꾸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그동안 미뤄왔던 사회문제가 '복합적'으로 발생하며 좀처럼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는, 앞이 깜깜한 사태를 직면하고 만 셈이다.

 

  물론 쉽게 해결될 수는 없다. 특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문제'만 보아도 양 진영으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듯 서로 양보와 배려, 대화와 타협조차 하려 들지 않는 것이 큰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 "너희가 없어져야 대한민국이 잘 된다"는 막말과 욕설의 끝장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이런 대한민국이 갈등과 혐오를 봉합하고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사회'로 거듭나게 될 수 있을지 몹시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문제는 풀리기 마련이다. 풀리지 않는다면 '문제'라고 불릴 까닭도 없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문제의 거의 대부분은 너무나 빨리 경제성장을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쌓아두기만 한 탓이라면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리고 사회문제가 심각해지면 해질수록 사회구성원들 스스로 반성과 성찰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는 진단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 그리고 혐오 문제'만큼은 결코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건 우리 사회가 건전하지 못하고 병들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병이 들었을 땐 '적절한 처방'이 꼭 필요하다. 처방만으로 부족하다면 '치료'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까진 치료단계가 아닌 '처방'만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거라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자기 행복을 위한 처방'을 꼭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기 욕망'을 키워나가고, 남들 기준의 성공적인 삶이 아닌 '자기 만족'을 성공기준으로 삼은 삶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모두가 똑같은 개성, 똑같은 재능, 그리고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인데, 어찌 '똑같은 성공'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기준'이라면 가능한 '기준'으로 바꿔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기준'도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만들어가야 마땅하다. 누구나 딱 한 번 사는 삶인데 '내 기준'대로 살아야 더욱 만족스런 삶이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내 삶을 풍족하게 만족시키기 위해 '남의 삶'을 참고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의 삶'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무작정 '따라하기'로 복붙해버리는 삶은 불행의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는 순간부터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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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공동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인도적 대북협력 전략 구상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외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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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남북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다달은 상황에서 '공동대응방안'을 모색하는 내용의 책은 취지를 떠나서 '실현가능성'을 먼저 따져보기 마련이다. 특히, 2024년 북한의 신년사는 "남북은 통일의 대상이 아니라 적대관계일 뿐이고, 전쟁과 같은 유사상황이 벌어진다면 전적으로 '대한민국'의 책임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평화 협력은 고사하고 전쟁이나 발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런 '벼랑 끝 전술'의 뒷모습에는 날로 악화되는 경제상황으로 인해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과 분노를 '공산당'이 아닌 '다른 곳'으로 분출하도록 정책노선을 다잡은 것이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우발적'인 전쟁발발의 위험성은 언제나 높았기에,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되는 까닭은 '끝장'을 볼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벌어지는 전쟁도 어느 한 쪽이 압도적인 전쟁상황인데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양측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다 못해 '회생불가능'에 가까울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누구 하나 '항복'할 생각도 하지 않고, 국제사회도 그저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고 해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자동참전'을 하게 될 '미군' 때문에 '중국군'도 참전할 가능성이 높고, 덩달아 '대만'까지 전쟁에 휘말려서 결국엔 '미국 vs 중국'이라는 두 나라의 전쟁을 우리가 대신 치루는 '대리전 양상'으로 벌어지면서, 진짜 전쟁을 벌이는 중국과 미국은 별 피해도 없이 '한반도'만 또다시 작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녕 이런 비극이 뻔히 보이는 전쟁을 심심풀이로, 또는 '특정정권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어리석은 짓은 제발 하덜 말길 바란다. 그렇다면 답은 오직 하나다. 아무리 첨예한 갈등으로 치닫는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의 두 나라'는 협력하고 평화를 구축해야만 한다.

 

  이 책은 '대북협력사업'을 시작한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인도적 대북지원부터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그간 남북간의 협력이 꾸준히 지속되어 왔음을 일깨워준다. 특히, '기후변화'에 직면한 북한도 홍수, 가뭄, 태풍, 폭염 등 연이은 자연환경재해가 일어나면서 기후변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해왔다고 한다. 그로 인해 '온실가스 배출량'이 꾸준히 하락한 몇 안 되는 국가들 명단에 오르는 등 북한이 '기후위기'를 맞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도 보여왔다고 한다.

 

  허나 북한의 이런 적극적인 참여의 이면에는 북한의 거의 유일한 에너지이자, 주요에너지인 '석탄채굴'이 대홍수로 인해 급감한 탓이라고 한다. 탄광이 홍수로 물에 잠겨버리자 '효율성 높은 석탄'을 채굴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대신 '뗄감' 사용이 늘어나게 되자 홍수를 막아줄 나무가 사라진 탓에 홍수와 태풍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한 에너지부족 사태는 점점 더 만연하게 된 셈이란 말이다. 그런 까닭에 북한은 '기후위기'를 표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할테니 국제지원을 해달라. 국제지원을 늘려주면 '온실가스감축량'을 원래의 계획보다 더 많이 감축할 수 있다"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북한의 '에너지부족'과 '주민들의 굶주림'이 심각하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도움의 손길이 북한에 닿지 못하는 상황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외부와의 소통'을 꽉 막아버리기도 했고,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라는 도발로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지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지만, 미국은 이러한 북한도발에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왔고, 한 술 더 떠서 '북한의 자금줄'을 더욱 옥죄는 봉쇄정책을 더욱 강화한 탓에 '국제지원'은 좀처럼 시원하게 뚫리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도움을 주던 '남한'마저 정권이 바뀌면서 '대립적인 구도'로 전환하게 되어 북한은 그야말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절대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극한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는 '압력밥솥'의 김을 빼는 것과 같은 지혜를 내놓아야만 한다. 이 책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직간접적인 인적물적교류'를 늘리는 방안과 같은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이 더 유연하고 관대하게 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기후변화'를 넘어 '기후위기'가 극한으로 치닫는 남북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자 뉴스에도 '기후위기'는 시시각각 지구 곳곳을 위협하고 있다. 유럽대륙을 강타한 기상이변은 북유럽을 꽁꽁 얼려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 '외출 자제령'이 내려졌다고 하고, 서유럽에는 태풍과 홍수로 물난리를 겪고 있다고 한다. 24년엔 동아시아에도 '기상이변'이 속출할 거라는 예측이 난무한 가운데 '기후위기'는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새해벽두부터 자연재해는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해 말 중국 사천성(스촨성)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남아 일대와 일본 북서부지방을 강타한 지진으로 대혼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는 큰 피해가 없다고는 하나 '기후위기'도 용케 피해나갈 수 있을지는 장담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피해를 본다면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극한으로 치달은 두 나라의 정치는 못말린다고 하더라도 '기후변화'라는 공동의 위기를 빌미로 '남북협력사업'의 물꼬를 트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 물꼬를 마중물 삼아 영원한 평화와 번영의 길로 함께 나아가면 더욱 좋고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남북공동연구'가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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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동물대탐험 1 : 비글호의 푸른 유령 - 동물들의 숨바꼭질 '의태' 최재천의 동물대탐험 1
최재천 기획, 박현미 그림, 황혜영 글, 안선영 해설 / 다산어린이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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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들에겐 '놀이'가 곧 '학습'이다. 다시 말해, 놀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란 말이다. 그런데 전세계적인 감염병이 대유행을 하는 시대를 사는 어린이들에겐 최악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감염을 막기 위해 '비대면 학습'이 대유행을 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또래끼리' 어울리고 싸우면서 평생에 남을 추억과 함께 '최고의 학습'을 해야만 하는데도, '팬데믹'을 겪으면서 도통 어울리면서 뛰어노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았다. 심지어 한층 사람들의 '얼굴표정'을 보면서 여러 감정과 사회성을 배울 나이인데, 사람들마다 온통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쓴 모습만 보았던 터라 요즘 어린이들은 '표정'조차 어색하게 짓고, '감정표현'마저 서툰 경향을 띠는 것 같아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영특한 아이들은 마스크를 뚫고서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내고, 독서와 영상을 통해서 '최고의 학습역량'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향형 어린이'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활달한 성격을 지닌 '외향형 어린이'들은 신나게 떠들고 뛰어 다니면서 학습을 더 잘하는 법인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특히, 어린이들과 동식물 등 '생물학'과 관련된 공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초등학교 방과후 교문앞에서 '병아리'를 파는 날이 많았다. 보통 한 마리에 100원이라는 큰 부담없는 값을 치르고서도 엄마에게 혼날 생각에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병아리를 구경하던 어린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떠올려보란 말이다. 자신과 같이 팔딱팔딱 심장이 뛰고 자신의 손 안에서 따뜻함을 뿜어내는 노란병아리를 쳐다보던 그 시절을 말이다. 요즘 아이들이라고해서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즘이야 강아지다, 고양이다 별걸 다 키우는 통에 조금 시들해졌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밖에도 산으로 들로 시냇가로 온동네를 쏘다니며 온갖 동물과 곤충, 그리고 온 주변을 형형색색 물들이던 여러 식물들을 보고 만지면서 자연스레 '생물학 박사'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도시 어린이들은 이런 자연스런 '경험'을 좀처럼 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렇기에 이 책 <최재천의 동물대탐험> 시리즈는 값질 수밖에 없다. 자연을 뛰어다니며 놀면서 배워야 마땅한데도 '독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배운다는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웬만한 '생태박물관'보다 더 생생한 생물의 신비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꽤나 훌륭한 어린이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풀어낸 점이 매우 좋았다. 요즘도 어린이들에게 '진화'란 애니메이션 <포켓몬>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더 익숙할 테지만, <포켓몬>에서 등장하는 '진화'는 다윈의 진화론과는 사뭇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잘못된 선입견을 가질 우려가 크다. 어쩌면 <포켓몬>에서 말하는 '진화'란 곤충의 탈바꿈(변태)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알-애벌레-번데기-어른벌레로 이어지는 곤충의 탈바꿈처럼 '피카츄-라이츄'로 탈바꿈한 것이다. 여기서 포켓몬 진화는 '능력향상'을 보이기 때문에 '생물의 진화'도 점점 능력이 향상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진화는 '방향성'이 없기 때문에 꼭 진화를 했다고 해서 더욱 '고등생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진화론의 잘못된 상식'까지 꼼꼼하게 짚어주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의 주제는 '의태'다. 의태란 어떤 생물이 다른 생물을 흉내내거나 닮아서 혼동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생물의 세계에서 '의태'는 매우 흔히 벌어지기 때문에 알아두면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여기서 '진화론의 핵심'을 파악해두는 것을 학습센스쟁이들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바로 어떤 생물이라도 '의도적'인 의태를 하며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화론의 핵심은 '자연도태'다. 이는 '환경적응'에 유리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의 대원칙으로, 같은 생물인데 우연히 '색깔'이 다른 A와 B가 있다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해 A가 B로 색깔을 순식간에 바꾸는 것은 '진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진화'는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수백만 년에서 수억 년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 어떤 생물도 '한순간의 짧은 시간'에 스르륵 모습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의태'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나뭇가지'를 닮은 대벌레의 조상이 포식자인 새의 눈을 속이고 살아남았는데, 그 이후로도 점점 더 '나뭇가지'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대벌레만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고, 그밖의 대벌레의 조상들은 포식자의 눈에 잘 띄어서 후손을 많이 남기지 못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올바른 것이다.

 

  또한, 원숭이가 '진화'하여 인간이 된 것도 아니다. 영화 <혹성탈출>에서는 전쟁이나 재앙으로 인해 '인간의 절멸'한 빈 자리를 원숭이를 비롯한 유인원들이 차지하고서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갖게 되었다는 스토리라인을 짜서 흥미를 끌었으나, 이는 '진화론'에 위배되는 내용일 뿐이다. 원숭이와 인간이 서로 닮은 것은 그들의 머나먼 조상이 '하나인 공통조상'이었는데, 우연찮은 계기로 서로 다른 개체로 진화를 해온 것이라 이해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원숭이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결코 '인간'으로 진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더 똑똑한 원숭이일 뿐이다.

 

  이러한 '진화론의 핵심'을 이해하고 나면 '생물의 의태'도 살아남기 위해 특정한 생물의 모습이나 냄새 따위를 발바르게 '흉내낸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흘러 '특정한 모습이나 냄새'를 생물종이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더욱더 많이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생물의 모습이 '우연찮게' 닮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의태를 '흉내 내기'라고 단순이해를 하고 나면 꽃등에가 벌과 닮기 위해서 '특정방향'으로 진화를 한 결과라고 잘못 이해할 리가 없게 된다. 그저 꽃등에의 머나먼 조상 가운데 '벌'과 비슷한 모양을 지닌 꽃등에게 더 많이 살아남아 더 많은 후손을 남길 수 있었고, 점점 더 벌의 모습과 닮은 꽃등에만이 더 많이 살아남아 '개체수'가 늘어나게 되어 지금의 꽃등에 모습을 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면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 '우등생'인 것이다.

 

  평소 최재천 선생님은 '통섭'이라는 학습법을 강조했다. 통섭을 쉽게 말하면 '하나'를 깨우치면 '열'을 깨닫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학문의 경계'를 허무는 통합교육을 넘어 '이쪽의 지식'을 '저쪽의 지혜'로 삼는 통섭교육은 어린이들의 창조융합능력을 키우는데 아주 적합한 학습법일 것이다. 바로 그 '통섭'을 강조한 선생님이 직접 참여해서 쓰신 책이니 얼마나 훌륭할 것이냔 말이다. 앞으로 이 책의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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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3 - 대항해 시대의 콜럼버스와 엘리자베스 1세 벌거벗은 세계사 3
최호정 그림, 김우람 글, 박구병 외 감수,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기획 / 아울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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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은 유럽이 이끈 '대항해시대'를 맞이하는 시작이었다. 그리고 새로 개척한 '바닷길'이 열리자 인도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톡톡히 이득을 보던 '이슬람 문명의 쇠퇴'를 알리는 교두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메리카 대륙에서 강탈한 금은보화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는 일찌감치 해상무역을 선점한 해양강국으로 우뚝 선다.

 

  하지만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엄청난 물량의 금과 은이 너무 많이 유통되는 바람에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고, 구교와 신교의 종교갈등으로 이곳저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무적함대'를 이끌던 스페인은 점점 경제적으로 몰락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영국에서는 헨리8세가 영국 국교회를 공인하면서 '절대왕정'을 누렸고, 그녀의 둘째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집권을 하면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등 빛나는 업적을 남기며 '대영제국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콜럼버스'와 '엘리자베스 1세'라는 위대한 인물을 이 책 <벌거벗은 세계사 3>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영웅이기만 한걸까?

 

  우리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역사적 위인'으로 꼽고 '영웅'이라 칭송하길 마다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 아닌가?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지만 에스파냐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신대륙 발견'을 발견하여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에 엄청난 이득을 안겨준 자랑스런 인물임에 틀림없다. 엘리자베스 1세도 유럽의 변방이었고, '외딴 섬'에 불과한 작은 나라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정도로 위대한 대영제국을 만드는데 발판을 마련한 훌륭한 여왕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 빛나는 업적의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없이 죽음을 당해야 했고,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겨야 했으며,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며 온갖 노역과 수모를 당하는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다.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도 아니고 '인디언'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믿음의 자유를 빼앗긴 '종교전쟁'으로 말이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철썩같이 믿었고, 그래서 지금의 '캐리비안 해' 주변의 섬들을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분명 '인디언(인도사람)'도 아니고, 애써 유럽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부르려면 '아메리카 원주민'이라 불려야 마땅한데, 지금도 여전히 '인디언'이라 불리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이 '원주민들'을 제대로 대우해줄 생각조차 없었다는 것을 짐작케 해준다. 그런 까닭에 자신(백인)들이 원하는 만큼의 황금을 얻지 못하면 서슴지 않고 학살도 자행하고, 노예로 부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참한 짓으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다 죽게 만든 악마, 그 자체였다. 그렇게 아메리카의 문명이었던 아즈텍과 마야, 잉카 문명이 차례차례 모조리 말살되고 말았다. 스페인은 바로 여기서 빼앗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유럽 최강의 함대(무적함대)를 앞세워 대서양을 누비며 '해상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극적으로 몰살시키며 새로운 해상강국으로 발돋움한 이가 '엘리자베스 1세'였으며, 그녀는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드는데 첫 삽을 뜬 훌륭한 여왕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대영제국의 여왕폐하께서도 빛나는 업적을 세우기 위해 수많은 희생양을 제물로 삼아야만 했다. 물론 그 '학살의 시작'은 그녀의 아버지인 헨리8세가 시작하였다. 아들을 낳는 왕비를 얻기 위해 수차례 이혼을 했고, 가톨릭 교황이 이혼은 불가하다고 통보하자, '국교'를 바꿔서 자기 스스로 '새로운 종교의 수장'이 되어 맘대로 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 절대왕권을 누렸던 터였다. 그 '절대왕권'으로 인해 헨리8세는 '이교도 숙청'을 자행했고, 그의 첫째 딸인 '피의 메리 여왕'도 똑같이 따라했으며, 둘째 딸인 엘리자베스 1세도 마찬가지로 학살을 자행했다. 왜 영국의 퓨리턴들이 '믿음의 자유'를 얻기 위해 좁디좁은 메이플라워 호에 몸뚱아리 하나만 싣고 대서양을 횡단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 영국은 이교도를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이 멈춘 날이 없을 정도였단다. 왕이 영국 국교회로 강제로 바꾸자 '가톨릭신도'와 '청교도신도(퓨리턴)'가 화형을 당했고, 다시 가톨릭을 믿는 여왕이 들어서자 '국교회신도'와 '청교도신도'가 불살라졌으며, 또다시 국교회를 믿는 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가톨릭신도'와 '청교도신도'는 툭하면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어디 이뿐인가. 딴 나라가 종교전쟁(구교와 신교의 싸움)을 벌이면 영국은 둘 중 하나를 골라서 전쟁을 치룰 정도로 '전쟁을 참 좋아하는 왕'이었다. 과연 이들 왕들이 영웅이라 불려도 되는 걸까?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을 때, 수많은 나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늘날의 경제대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제국국가'였으며, 전세계를 '식민지'로 삼던 '약탈국가'였고, 그 식민지인들의 미개함을 문명화시켜주겠다는 아름다운 명분을 내세워 '학살'을 자행한 나라가였는데,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한 나라였으며, 세계 어디에도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으며,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으니 수탈과 약탈을 한 적도 없는데,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한류열풍'으로 붐을 일으키고 매료시켜버렸기에 엄청난 부러움을 샀기 때문이다. 그랬던 대한민국이 지금 쪼금 심각하게 삐걱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다니고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세계사를 배우면서 '위대한 위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전쟁광'에다가 '학살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고, 돈으로 흥한 자 돈으로 망한다고 했다. 하지만 덕을 베풀며 덕으로 흥하게 되면 덕으로 망할 수 없는 법이다. 덕으로 흥한 자를 망하게 만들면 '부도덕'하다 욕을 먹기 때문이다. 역사를 배우며 '한국사=수난사'라고 부끄러워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왜 우리는 알렉산드로스나 칭기스칸, 나폴레옹처럼 위대한 영웅이 나오질 않느냐고 한탄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한민국이 세계적 위상을 드높이며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합류하게 되니, 어떻더냔 말이다. 모두가 부러워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 위대함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바로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을 드높일 주인공들이다.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공영을 위해 당당히 앞장서는 빛나는 업적을 세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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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한해는 148편의 리뷰로 마무리하였다.

목표가 150편이어서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볼까도 싶었지만

'숫자'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그만 마무리하였다.

 

한편, 23년은 건강이 많이 나빠진 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이래저래 신경 쓸 일도 많았고

돈벌이를 하는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할 뻔 하는 등

몸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게 하는 일도 참 많았다.

이제 다 지나간 일이니 몸도 마음도 빠르게 추스리는 24년으로 삼고자 한다.

 

24년에는 '서평이벤트' 같이 '의무적'으로 리뷰를 써야 하는 일을 최대한 줄이려 한다.

그보다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리뷰하는 원년으로 삼고 싶다.

물론 '독서논술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관계로

어린이책을 비롯한 청소년책 리뷰가 상당할테지만

그래도 그 이상으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에 집중하고 싶다.

그래야 출판사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부탁할 때 더 품격있는 리뷰를 써낼테니 말이다.

아직까진 정식으로 부탁한 출판사리뷰는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23년 후반기에 '출판사 통계'를 손수 내었던 것이다.

과거에 '주제별', '작가별' 리뷰를 써왔던 것에 비해서 좀더 체계적인 듯 싶어 흡족하다.

23년 '내가 가장 사랑한 출판사'는 [한빛비즈]였다.

상반기에 '한빛비즈 서포터즈'로 활동한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더는 서포터즈로 활약할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동안 감사할 따름이다.

 

24년에는 어느 출판사 리뷰를 많이 하게 될까?

[인간사랑], [21세기북스], [김영사(주니어포함)], [랜던하우스코리아(주니어포함)] 등등을

조심스럽게 꼽아본다.

물론 '장르별 독서'도 더욱 집중해볼 참이다.

요즘 집중리뷰하고 있는 <SF장르>도 있고, 더 많은 <사회과학>과 <과학> 분야의 책도

섭렵해볼 작정이다.

계획은 언제나 계획일 뿐이다. 리뷰로 보여줄 뿐이다.

24년 푸른 용의 기운을 받아 더욱더 박차를 가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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