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 형이하학적 성찰
기욤 르 블랑 지음, 박영옥 옮김 / 인간사랑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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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달리기'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달리기 예찬' 같은 내용은 없다. 또한 이 책은 '철학책'이지만 저 높은 이상(이데아)을 품고 쉼없이 달려야만 하는 책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부담감 없이, 그저 '달리기'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편한 책이다. 그러니 여타의 '철학책'처럼 지혜를 사랑하는 의무감 따위는 과감히 벗어던지고 그냥 읽으면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평범한 '달리기'를 이렇게까지 생각해볼 수 있구나..하는 느낌만 가지면 된다. 외워야 할 구절도 하나 없으니 편하게 읽길 바란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프랑스는 대입시험으로 '바칼로레아'라는 논술시험을 치룬다. 물론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시험이긴 하지만 학생들만 시험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도 참가한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사람의 글은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며, 전국민이 다 함께 읽으며 논평을 일삼는다고 한다. 이처럼 프랑스 국민들은 모두가 '철학자'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다름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이 '답안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바칼로레아 시험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답을 저마다 나름대로 작성하며 온 국민이 열린 토론을 벌이곤 한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대학입시시험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 것은 '세계1등' 못지 않지만, 그 시험이 끝나면 그저 '결과'에만 관심을 둘 뿐, 무슨 문제가 출제되었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불수능'이었는지, '물수능'이었는지, '시험점수'는 몇 점인지, 몇 점 정도가 되어야 '인서울'할 수 있는지...이런 결과물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하긴 수능시험이 전부 객관식이고, 간단한 주관식 문항만 있을 뿐이니, 문제가 궁금할 턱도 없다. 하지만 우리도 '수능논술시험'을 치루고 있는데, 논술문제가 이슈가 된 적이 없는 것에는 의아하지 않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하긴 우리나라 논술은 '찬반서술'이 고작이라서 '주어진 지문'에 대한 '논리적사고력'만을 평가할 뿐이라서 논술답안지가 천편일률적일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논점에서 벗어나면 고득점을 얻을 수 없으니, 애초에 '창의적인 답안'이 나올 수 없는 환경이다. 그러니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처럼 '천차만별의 답안지'가 온 국민들에게 공개되며, 온 국민이 논술문제를 풀어내며 저마다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는 대축제를 벌이는 즐거움 따위를 우리가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하긴 우리는 '철학하는 분위기'를 좀처럼 느낄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앉은 양반들은 체면을 중시하느라고 '남의 의견'에는 날선 비판을 날리다 못해 비난마저 아낌없이 퍼부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의견'은 두루뭉술하게 피력하며, 술에 물 탄듯, 물에 술 탄듯, 그저 비난 받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기 바쁘다. 자그마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더욱더 '철학'하고 멀어진다. 그 힘쎈 권력으로 세상살이 좀 나아지게 만들려는 궁리보다 어느 땅을 사들여 투기를 일으키고 그 덕분에 호주머니 좀 두둑하게 불리려는 속셈밖에 부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부정부패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아주 위인 소리 들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제는 좀 깨달으셨으리라고 본다. 우리 국민들이 '철학'도 없는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주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직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철학'인 셈이다.

 

  이 책 <달리기>를 보라.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걷기'와 '달리기'에 대한 철학적 글쓰기를 말이다. 우리는 걸을 때 그냥 '걷기'만 하고, 뛸 때 그냥 '달리기'만 하려 든다. 걷기와 달리기의 결정적인 차이점도 생각지 않고서 말이다. 걸을 땐 '목적지'가 없어도 걷게 된다. 하지만 달릴 땐 없던 '목적'도 생기기 마련이다. 왜냐면 '목표'가 없으면 달릴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걸을 때도 '목표'를 정할 수 있고, '목적'을 정해 착착 나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걷기는 아무 생각도 목표도 없이 걸을 수가 있다. 정처없이 걷고 또 걸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달리기는 다르다. 우리는 달리는 행위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웬만한 '목적'이 없으면 절대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달려본 적이 있는가? 건강을 위해서 달리고,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착하기 위해 달리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달리기도 하고, 버스나 지하철, 그리고 항구를 떠나기 직전의 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달린 적도 있을 것이다. 공항에서도 마찬가지다. 또는 누군가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달린 적도 있을 것이다. 정반대로 반드시 잡기 위해서 죽어라 달린 적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걷기'와 '달리기'는 목적지향적의 유무라고 하는 차이점이 두드러지는 행위인 것이다.

 

  여기에 철학을 더해 보면 어떨까? 달리기를 통해서 숭고한 업적을 남긴 역사자료를 들춰보면, '마라톤전투'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0여킬로미터를 쉼없이 달렸던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마라톤의 유래'다. 여기에 제1최 올림픽 개최지였던 그리스 아테네에서 승리한 선수가 '그리스 선수'였다는 사실로도 우리는 철학적 관점을 펼쳐낼 수 있다.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올림픽을 성사시키면서 과거 그리스에서 열렸던 대축제를 재현해서 세계 평화를 이바지하려 했다는 숭고한 업적 또한 철학을 해보잔 말이다. 우리나라의 손기정선수가 히틀러가 개최한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경기에 참가해서 우승을 했고, 1등을 했음에도 가슴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있어 '승리자의 포즈'를 취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도 철학하기 딱 좋을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철학'을 해봄직하지 않은가?

 

  굳이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누구의 이야기를 소재삼아 쓰지 않아도 좋다. 그저 자신만 알고 있는 이야기도 얼마든지 철학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철학은 '형이상학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건 플라톤이나 칸트 따위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그냥 '형이하학적인 철학적 담론'을 이야기하면 그뿐이다. 난 이래저래해서 어떻게저떻게 '달렸어'. 그랬더니 이런저린 일이 벌어지게 된거야. 그래서 난 깨달았지. 나에게 달리기란 이런 거라고 말이야. 어떤가? 어려운가? 되게 쉽지 않은가. 이런 것도 철학인 것이다. 이 책의 내용 또한 그렇고 말이다. 이 책이 괜히 [프랑스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철학책]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것이 아니다. 청소년도 이해할만한 쉬운 철학이란 얘기다.

 

  그런데도 난 이 책을 읽고서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어..라고 말한다면, 철학책이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간 '철학'과 담을 쌓고 살다보니 '철학적 사유'에 대해 굉장히 낯설게 느끼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책에서 비유하고 있는 '철학책'들은 모두 프랑스청소년이라면 학창시절에 한 번쯤 읽거나 들어봤던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에 주눅들 필요는 전혀 없다. 프랑스 청소년들은 이렇게나 어려운 책들을 읽었고, 다 이해하고 있구나...싶어서 위축될 필요가 전혀 없다. 그 청소년들도 철학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학적인 내용은 '전문가'에게 맡겨두고 그냥 즐기면 된다. 철학책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해. 그런데 넌 '어떻게' 생각해? 하고 말이다. 이 책은 절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부러웠다. 어려운 철학을 언급하며 주절거리는 저자의 박식함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나의 철학'은 이런데, '너의 철학'은 어떠니? 라고 부담없이 묻고 답하는 분위기가 말이다. 경험이니 관념이니 어려운 철학은 '전문가'에게 떠넘겨주고, 우리는 일상에서 '철학'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일상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면 된다. 정치이야기도 좋고, 경제이야기도 좋고, 사회, 문화, 이슈 등등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데 난 저렇게 돌아가면 좋다고 생각해. 넌 어떠니? 라고 가볍게 묻고 답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분위기가 아닐까 하고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다시,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간다면, 난 '달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목표와 목적 뚜렷하게 두다보니 '방향'은 옳게 잡았고, 촌각을 다툴 정도로 급박한 것이 아니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늘 '여유'를 두고 일찍 서두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보니, 나는 뚜렷한 목적과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부지런히 걷는 편이다. 그리고 걸을 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똑바르게 곧장 걷곤 한다. 걷다가 지칠 우려도 있으니 늘 손에는 책을 들고서 읽으며 걷는다. 책을 읽으며 걸으면 '집중력'이 향상되고, '잡념'이 별로 생기지 않으니 참 좋다. 물론 여유롭게 걷다보니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휘뚜루마뚜루 빠른 속도로 걷는 것이 아니다보니 풍경조차 '주의깊게'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면서 걷는 것을 난 참 좋아한다. 그래서 난 '달리는 법'이 거의 없다. 필요할 땐 누구보다 빠르고 힘차게 뛰어가겠지만 말이다. 이런 나와 '철학적 사유'를 함께 할 분은 없으신가요? 진지한 분이면 환영입니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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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모닝 확장판 - 더 쉽고 더 확실하게 더 원하는 삶으로 바꿀 수 있다 미라클 모닝
할 엘로드 지음, 윤영삼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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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계발의 저자들이 '아침'을 주목한다. 하루일과를 일찍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분명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서 말이다. '아침형 인간'이라는 단어가 꾸준히 메가히트 되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 할 엘로드도 [당신의 하루를 바꾸는 기적 / 아침, 6분이면, 충분하다]는 문구로 '미라클 모닝'을 쉽게 풀어냈다. 하지만 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단지 '아침형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은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무려 10년 전부터 '미라클 모닝'은 '아침형 인간'과 다르다고 말해왔지만, 여전히 '그렇게'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서 당혹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할이 이야기하는 '아침 기적'은 단순히 하루일과를 '일찍' 시작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일어나자마자 '6분이면 충분할' 자기만의 긍정루틴을 짜고 하나하나 실현해 보라는 조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조건 아침에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는 기적인 셈이다. 분명 '아침형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할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도 매우 중요한 '긍정루틴'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무작정 '일찍'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에는 우려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왜냐면 사람마다 '자기만의 생활리듬'이 있는데, 무리하게 바꾸다보면 기적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망칠 우려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렇게 무리하게 하루를 시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차라리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것이 더 낫다고 권한다. 그리고 일어나면 하룻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그 일'을 차근차근 실행으로 옮기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삶의 기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어려운 일'을 겪기 마련이다. 그럴 때 누구는 좌절하고, 누구는 절망을 딛고 일어나 성공하곤 한다. 할은 후자에 주목했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미라클'을 내밀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그런 도움을 받는다면 마다할 리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딛고 성공에 이르는 삶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나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할은 그 기적을 '누구나' 갖게 할 수 있는 힘을 선사하고 싶었다. 다름 아닌 '자신'도 그런 실패를 경험했고, 그 실패를 딛고 성공적인 삶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담이야말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게는 '기적'같은 일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라클 모닝'이 너무 어렵기만 하다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광휘(아우라) 앞에 두 눈을 꼭 감고 말 것이기에 할은 최대한 쉬운 방법을 제시하였다. 바로 일상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로 말이다. 이를 테면, 내 일상을 '방해하는 요소'를 없애버리기. 어지럽혀진 '방 청소'하기. 스트레스 받는 일은 과감히 없애버리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그리고 무엇보다 '안 될거야'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은 버리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으로 '나만의 루틴'으로 일상을 꾸미기 등과 같은 누구나 간단히 조언만 들으면 바꾸고 실천할 수 있는 일들로 '하루일과'를 기운차게 시작하라고 조언할 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긍정루틴'이다. 할 수 없다기보다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가지는 것으로도 충분히 '기적'을 일으킬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자신감마저 갖기 힘든 분이라면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끄적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마저도 '쪼개서' 정말로 간단히 실천할 수 있는 '자기만의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해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얻게 되는 '성취감'이야말로 진정한 '미라클 모닝'의 핵심이니, 그것을 온몸으로 느껴보라고 말이다. 그렇다 '성취감'만큼 강한 '기적의 공식'은 없다.

 

  여기까지가 기존의 <미라클 모닝>에서 말한 기적의 공식이었다면, 이번 '확장판'에서는 '미라클 이브닝'까지 제시하였다.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맞이할 '미라클 모닝'을 위해서 하루일과를 행복하게 마무리하고 꿀잠을 잘 수 있는 비법이 담겨 있다. 물론 이미 '미라클 모닝'을 경험한 분들이라면 이번 '확장판'이 제시하는 미라클 이브닝을 이미 실천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이미 충분하게 성공했을테니 말이다.

 

  정리하면, 상쾌한 아침을 시작하며 '하룻동안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을 계획표에 짜넣고, 차곡차곡 쌓은 성취감으로 성공의 문을 활짝 열라는 메시지가 <미라클 모닝>의 핵심 키포인트다. 물론 날마다 성공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성취감이 충만하게 느껴지지 않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도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다음에는 성취감을 반드시 느낄 수 있는 계획을 짜넣어주면 된다. 그렇게 날마다 차곡차곡 쌓인 기적들이 여러분들의 삶에 성공을 선사할 것이 틀림없다면서 말이다. 어떤가? 성공이라는 것이 아직도 멀게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이 책 <미라클 모닝, 확장판>으로 자기계발을 시작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의 특장점이 바로 성공이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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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 4 : 화산섬의 호모 에렉투스 - 어린이를 위한 호모 사피엔스 뇌과학 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
정재승.차유진 지음, 김현민 그림, 백두성 감수 / 아울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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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권에 이어 이번에도 '호모 에렉투스'에 대한 내용이었다. 3권에 등장한 에렉투스는 추운지방에 살던 '북경원인'이다. 반면 4권에 등장하는 호모 에렉투스는 더운지방에 살던 '자바원인'이다. 이 둘의 차이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뇌용량은 북경원인이 1000cc이고, 자바원인은 900cc라고 한다. 반면에 신체적인 조건은 북경원인보다 자바원인의 키와 덩치가 더 컸다고 한다. 이런 차이점이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여러 가지 '해석'이 필요하다. 명백이 드러난 두 가지 차이점을 두고서 '어떤 이유'로 둘 사이에 차이점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대면서 '과학적 가설'을 세우고, 그에 딱 맞는 증거들을 더 찾아내게 되면 '정설'로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정설이었다하더라도 연구를 거듭하게 되면 새로운 정설이 정립되는 법이다. 이렇게 학문은 끝없이 발전하게 된다. 그러니 공부는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추운지방에 '적응'한 북경원인은 체구는 작지만 눈 덮힌 산속에서도 체온을 덜 빼앗기도록 진화를 거듭했을 것이다. 더운지방에 적응한 자바원인은 찌는 듯한 더위에 열을 더 잘 발산할 수 있도록 체구를 키웠던 셈이다. 또한 이 둘은 주위 환경이 제공하는 '먹을거리'에도 차이가 있었기에 섭취하는 영양분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테면, 신선한 채소를 섭취하기 힘든 얼음땅에서 생존한 '이누이트'들은 주식인 바다표범에서 우리몸이 필요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고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그렇다면 북경원인과 자바원인도 주어진 자연환경에 훌륭히 적응하면서 제한된 먹거리를 통해서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도록 진화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처럼 '인류의 진화'는 주어진 환경에 완벽히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인류는 '어떻게' 환경변화에 적응하게 될 것일까? 인류세라고도 불릴 정도로 엄청 빠른 변화를 보여주어 '기후위기'로 불릴 지경인 지구는 멀지 않은 미래에 인류가 살기 힘든 환경으로 바뀔 것이 분명해졌다. 이제는 '탄소중립'이나 '탄소제로' 같은 느슨한 대책으론 '기후위기'가 초래할 인류대멸종의 시나리오를 막을 수 없다고 많은 과학자들이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시나리오가 시작될 시기는 멀게는 2050년, 가깝게는 2035년을 점치고 있다. 불과 10여년 밖에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런 증거들은 전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온난한 기후의 영향으로 북극의 빙하가 현저히 줄어들자 북극의 냉기를 가둬두던 '제트기류'가 느슨해졌고, 그로 인해 '북극한파'로 중위도지역까지 하강하는 바람에 북미대륙과 북유럽을 영하 40도 이하로 떨어지는 맹추위를 겪고 말았다. 이에 반해 남유럽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때아닌 홍수와 태풍으로 물난리를 겪고 있고, 해변가에 형성된 저지대 도시들이 엄청난 해일과 침수피해를 받아 재산피해가 극심하고, 인명피해까지 벌어지는 끔찍한 일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거기다 대규모 화산폭발과 지각변동으로 인한 지진피해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현상을 앞으로는 더욱 자주 겪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라고 안전지대가 아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이러한 극심한 환경변화에 얼마나 충실히 대비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하고 나서야 엄청난 자연재해의 위력을 실감하는 건 너무 무능할 뿐이다. 그렇다고 '위기대응'을 잘 한다고해서 극심한 환경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를 잘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적응력'이다. 과연 현생인류는 인류의 먼 조상과 같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적어도 도시에 살고 있는 인류는 '기후위기'로 인한 인류멸종 시나리오에서 많이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 무엇보다 도시의 자연환경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먹여 살릴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경제적 논리'로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콘크리트 건축물만 잔뜩 확장하는데 열중한다면, 그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뻔하지 않은가? 도시, 근처에 도시사람들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숲과 자연환경 그대로인 생태계를 조성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적어도 도시 유지시스템이 망가진다고 하더라도 '자연의 품속에서' 근근히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진화속의 '적응'이라는 것이 백만 년 단위의 긴 시일이 걸리는 일이고, 기후위기로 파괴되는 것이 도시뿐만 아니라 '자연환경, 그 자체'일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지구의 모든 것을 바꿔놓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적응'해낼 인류가 남기를 희망할 뿐이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몇몇 부자와 권력자 들만 살아남는 최악의 시나리오 말고 말이다. 인류 진화는 건강한 신체와 밝고 맑은 정신의 소유자의 몫이어야만 할 것이다. 점점 이 책을 통해 발휘하는 상상력이 흥미로워진다. 아직 이야기의 흐름은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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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1 : 국내편 퇴마록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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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엔 넉넉치 못한 형편이라 '무엇'을 소장하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용돈이랄 것도 없던 시절이라 '통학버스'를 타기 위해 매달 받던 차비를 아껴서 소설책을 사모으곤 했다. 그 첫 책이 바로 '김용의 <영웅문>'이었고, 대학시절 알바를 하면서 틈틈이 모았던 책이 바로 '이우혁의 <퇴마록>'이었다. 이 두 시리즈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책꽂이에 소중히 꽂혀 있다. 2만 권에 육박하는 책들 사이로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말이다. 그 시절에는 닳도록 읽었던 터라 그 내용이 지금도 줄줄 외울 지경이지만, 이번에 출판사를 옮겨서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그 소식조차 벌써 10년이 흐른 지금이지만...암튼, 옛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읽으려 한다.

 

  <퇴마록> 국내편은 다른 편에 비해서 비교적 짧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몰입도라고 할까? 세계관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 무엇이 살짝 빗겨나면서 마치 정리정돈이 되지 않은 방문을 여는 듯한 느낌처럼 매우 어수선한 느낌의 이야기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박신부를 비롯한 '4명의 퇴마사'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캐릭터'가 무엇인지 소개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국내편이 두 권(애초에는 세 권)이나 배정되었는데도 한결(?) 같이 퇴마사들의 특징과 능력의 '소개'만하고 있는 느낌은 좀 너무 많다 싶을 정도다. 이후에 이어질 '세계편'이나 '혼세편', 그리고 '말세편'처럼 각각의 퇴마사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통해서 무럭무럭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처럼 '국내편'도 진행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1권의 마지막에 소개된 <생명의 나무> 편은 국내편 가운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4명의 퇴마사들이 모두 등장해서 '흑마술'을 퇴치하고 사이비종교인 '브리트라(뱀)교(사악한 뱀을 숭상하며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악한 종교)'의 악행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아주 인상 깊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2권에서도 이어질텐데, 너무 짧게 이야기가 마치는 경향 때문에 매우 아쉬울 따름이다.

 

  어찌 보면 이런 아쉬움은 작가 이우혁이 '실험정신(?)'으로 국내편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세계편' 이후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확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편은 매번 '단편적인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어놓고서는 세계편부터는 탄탄한 세계관을 구축하고서 매력적인 퇴마사들이 전세계의 악령들을 잠재우고 인간세상의 평온을 위해 죽을 위기를 숱하게 넘기는 화려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퇴마록>을 사랑하는 독자일수록 '국내편'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아직까지 '한류열풍'이 전세계를 강타할 것이라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80~90년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한국의 퇴마록'이 장엄하게 펼쳐지지 못했다고 투덜대는 것도 남우세스러울 따름일 것이다. 그 시절을 살아본 세대는 <국내편>만으로도 충분히 <퇴마록>의 매력에 흠뻑 젖기에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아직 '판타지 소설'이 유행하지도 않던 국내상황에서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을 기반으로 온세상의 악령과 마신 들과 맞서 싸우며 인간세상을 어지럽히려는 사악한 세력에 맞서 당당히 싸우는 퇴마사들의 모험담,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매혹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살았던 이들이 조잡한(?) 귀신들의 등장만으로 '납량(한 여름의 더위를 피함)'하였으니 '국내편'에 등장하는 퇴마사들의 귀곡성에 얼마나 열광했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곧이어 펼쳐진 '세계편'부터 '말세편'까지 우리들에게 '납량의 품격'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세대들은 '납량특집'이라는 개념조차 없어진 것을 생각하면 '대한민국 공포소설의 차원'을 달라지게 만든 주인공이라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제 겨우 1권을 읽었을 뿐이다. 빠르게 '국내편'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퇴마록이 펼쳐진 '세계편'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연일 강추위로 영하의 날씨를 겪고 있지만 '서늘한 기운'이 충만한 <퇴마록>이란 '납량특집'속으로 빠져들 예정이다. 다음 편에선 우리나라의 신앙인 '무가', '도가', '불가'를 관통하는 '밀교'와 엑소시즘을 행하는 '가톨릭의 퇴마록'에 대해 나불거려볼 예정이다. 한때는 신비적인 '오컬트의 세계'에 푹 빠져지냈던 터라 아는 것은 많은 편인데...술술 풀어낼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힘 닿는데까지 열심히 써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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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 3 : 달려라, 호모 에렉투스! - 어린이를 위한 호모 사피엔스 뇌과학 정재승의 인류 탐험 보고서
정재승.차유진 지음, 김현민 그림, 백두성 감수 / 아울북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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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권에서는 '호모 에렉투스'를 다루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우리말로 '곧선 사람'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직립 보행'을 아주 잘 했다는 말이다. 물론 최초의 직립 보행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했지만, 아직 '호모(사람)속'이 아니라 '피테쿠스(원숭이)속'이기에 두 발로 걷긴 하지만 나무를 타는 동작이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진정한 '직립 보행'은 호모 에렉투스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렉투스의 척추뼈가 아주 반듯하게 곧선 형태를 띠고 있어서 나무를 타고 네 발로 기는 동작보다 '걷는 동작'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호모 에렉투스는 '아파렌시스(아프리카의~)'라는 명칭도 빼버렸다. 이는 초기 인류종들이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발굴된 것과 다르게 호모 에렉투스는 전세계 여기저기에서 발견된 덕분이다. 그 가운데 우리와도 가까운 중국 동북쪽 지역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흔적이 대거 발굴된 덕분에 '인류의 기원'이 한때는 아프리카 기원설이 아니라 독자적 기원설이 주장되기도 했었다. 지금도 중국은 이런 '독자 기원설'을 고집하고 있지만, 현재는 '아프리카 기원설'이 인류진화의 정석으로 인정받고 있다. 왜냐면 '독자적'으로 진화했다기에는 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적 정보가 너무나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의 기원은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퍼져나가다가 남쪽 바다를 건너 동남아시아와 호주까지, 그리고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널리 퍼져나간 것으로 본다. 물론 그 시작은 단연 '호모 에렉투스'다. 아직까지 에렉투스가 바다를 건넌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사피엔스가 전세계에 분포한 것을 보았을 때, 에렉투스도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아직까지 그 '증거'가 발굴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암튼, 호모 에렉투스는 여러 모로 '적응의 천재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호모 에렉투스가 살던 150만 년전의 지구는 '세 번째 빙하기(6500만년전~1만년전)'가 막바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도 별로 없었고, 결정적으로 '스스로' 불을 피우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호모 에렉투스가 불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이 되었다. 허나 불이 꺼지면 다시 자연적으로 불이 발생할 때까지 생식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이들의 도구는 여전히 '석기'였으며, 아직 슴베찌르기 같은 고성능이 도구를 다룰 줄 몰랐기에 사냥을 나갈 때에도 '주먹도끼(뗀석기)'가 전부였다. 운좋게 '흑요석'이 많은 지역에 살던 호모 에렉투스는 좀더 정교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사냥은 무작정 쫓아가는 방법이 전부였다. 도망치던 사냥감이 제풀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뒤쫓다가 사냥감이 지치거나 방심한 순간에 떼거리로 덮쳐서 사냥하는 방식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 장면이 이 책에서는 너무도 생생하게 나타나 있어서 어린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모 에렉투스의 결정적 특징은 바로 '언어소통'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뇌용량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보다 약 두 배 정도 커졌고, 에렉투스의 폐와 후두부의 기능을 조사한 결과 매우 다양한 소리를 내기에 적합한 구조인 것이 밝혀졌다. 물론 호모 사피엔스보다 정교한 발음을 구사할 수는 없을테지만, 그럼에도 훌륭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언어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장점이 있었던 것일까? 유발 하라리도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네안데르탈보다 훨씬 불리한 신체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로 '후두부의 위치'를 손꼽고 있다. 다시 말해, 사피엔스는 발음하기에 적합한 후두부 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반해, 네안데르탈은 목구멍과 후두부 사이의 공간이 넓어서 '정교한 발음구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이렇게 '의사소통' 수단으로 언어가 제 기능을 하는 것의 차이로 인해서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언어구사의 유무'라든지, '언어생활의 정교함' 따위가 척박한 환경에서 적응하고, 더 많은 정보를 교환하면서 더욱더 많은 무리가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학문의 즐거움'은 단편적인 증거자료를 가지고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식의 지평을 넓혀나가는데서 찾을 수 있다. 비단 '과학'이나 '역사'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이 바로 이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삼아 발전시켜왔다. 이렇게 창조적 상상력으로 만들어놓은 지식은 '해석'이라는 정교한 작업을 거쳐서 '새롭고 또 다른 지식'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발전시켜온 학문의 근원이다. 그런데도 공부를 한답시고 '지식' 따위를 달달 외우기만 한다면 이런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생각을 넓힐 수 있는 '해석'을 맘대로 해보는 용기(?)가 필요하단 말이다. 틀린 해석이라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옳은 해석이 될 때까지 '타당한 근거'를 찾아내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억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궤변을 늘어놓으란 얘기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학자)들을 설득시켜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여겨질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가 학문을 하는 이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 '외계인의 관점'에서 살펴본 인류의 진화이야기의 특장점이 크게 발휘되지 않은 것 같다. 뭐랄까?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낮다고 해야 할까? 아우린이라는 '세계관'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고나 할까? 책의 줄거리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다음 편에서는 그런 매력이 발견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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