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불가능 대한민국 - 고도성장의 기적 이후, 무엇이 경제 혁신을 가로막는가 서가명강 시리즈 26
박상인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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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북스 22번째 리뷰] 대한민국 경제가 폭망하고 있다. 비단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전 정부에도 손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는 길은 '재벌 개혁'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경제학자들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대한민국 경제를 망치는 주범은 바로 '재벌'이며, 가족 경영으로 대대손손 '기업'을 물려주는 형태로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니, 하루라도 빨리 서두르지 않는다면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30년'을 대한민국도 똑같이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수도 없이 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재벌들은 꿈쩍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더 '수직계열화' 시키며 자회사, 손자회사, 증손자회사(?)까지 만들어 '일감 몰아주기'로 손실을 최소화하며 버틸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중소기업이 개발한 '신기술'을 가로채거나(기술탈취), '전속계약'을 미끼로 삼아 가격을 터무니 없이 깍아버려(단가 후려치기) 중소기업이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고 대기업에 더욱더 의존하게 만드는 경제구조 환경을 조성해서 대한민국 경제가 스스로 혁신과 융합할 수 있는 기회마저 송두리채 앗아가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 체제로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은 분명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 전세계가 놀라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가난한 '농업국가'였던 대한민국을 70년대부터 발빠르게 '산업화', '도시화'를 외치며 성장동력을 끌어올려 90년대에는 전세계가 놀랄 정도로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서 '경제선진국의 대열'로 진입한 것은 누가 뭐라해도 자랑스러운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업적을 이룩하는데 '대기업'이 제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대한민국 대기업이 이룬 '위대한 업적'은 정부의 공적자금을 몰빵한 결과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 모두가 '대기업'에 매달려서 키워낸 결과로 이룬 결과란 말이다. 여기에 '대기업' 스스로 기술혁신을 이룩해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것이라면 좋았으련만, 다른 선진국들이 만들어놓은 '기술력'에 기대어 더 빠르게 더 값싸게 '모방'한 결과, 대한민국 수출 효자 상품으로 등극할 수 있었고, 이런 제품을 발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대기업 문화'가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셈이다. 한마디로 '제조업'에 치중해서 빠르게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21세기 세계 경제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급격한 기후변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온실효과를 절감할 수 있는 '탄소중립'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을 선언했고, 2050년에는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해야 하며, 가깝게는 2030년부터 '탄소중립'을 맞추기 위해 기존 에너지를 대신해서 '재생에너지 100%'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이런 일련의 경제산업 흐름을 담아 'RE100', 다시 말해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을 대한민국도 호언장담했다. 허나 윤석열 정부는 기존의 재생에너지 주력상품이었던 태양광과 풍력으로 이를 충당하기 요원하자 문재인 정부때 배제했던 '원자력'을 탄소배출하지 않는 에너지원으로 되돌려 놓기로 하고, 원자력 발전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보고도 '탈원전의 의지'를 박살 내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재생에너지개발 후발주자인 대한민국이 다른 선진국의 충족율보다 뒤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보다 재생에너지 충당률이 뒤쳐진 것은 '기술력 문제'가 아니라 '개발 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 때는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재생에너지 기술개발을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꺼리라도 있으련만, 윤석열 정부는 어떠한 변명조차 하지 않고서 적반하장격으로 'RE100' 따위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 대한민국 경제는 건제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무식한 발언을 하느냔 말이다. 그 뒤에 이어질 '대기업의 성장신화'를 믿어 의심치 않고, 정부도 그런 '대기업'을 팍팍 밀어줄 야심찬 계획과 정책이 있으니 국민 여러분께서는 걱정을 붙들어 매라는 거짓말을 또 할 셈인가?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 운운하면서 침몰하고 있는 까닭도 '경제력 집중 현상'을 해소하지 못하고, 새로운 기술혁신과 융합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일본 경제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선진국의 '기술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경제 신흥국가의 '기술력 상승'과 '가격경쟁력 뒤쳐짐'에 따른 발빠른 추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넛 크래커(호두까기)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대한민국 경제가 발빠르게 성장했던 까닭은 정부와 국민들이 '대기업'에 몰빵해서 국가경제를 성장시키는데 한몸처럼 움직였기 때문이고, 부족한 기술력은 선진국의 것을 '베끼기'를 해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성장에만 주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뤄 '경제대국'의 자리에 올라선 뒤에는 선진국들의 기술을 베낄 수만은 없다. 이제는 선진국의 기술을 넘어서고 더 앞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혁신과 융합'이 필요한데, 경제주체가 '대기업 중심'이다보니 혁신이라는 모험보다는 '인권비 절약' 등과 같은 손익계산을 통한 안정에만 몰입하고 있으니 대한민국 미래경제가 암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탄소중립'이라는 큰 걸림돌이 버티고 있는데도 아무런 노력조차 하고 있지 않는 '대기업'만 바라보고 있는 정부와 국민들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일본 경제의 지난 30년이 이랬는데, 이젠 대한민국 경제 차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불을 보듯 뻔한 셈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가? 역사적으로 경제적, 기술적, 환경적 큰 변화를 맞이한 시대에는 몸집이 큰 대기업보다 몸집이 작은 '중소기업'이 변화에 잘 대응했더랬다. 물론 타격을 받는 것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망해도 금방 다시 '새 중소기업'이 나타나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온갖 모험에 뛰어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중소기업이 망해도 '국가경제'에 큰 위기를 가져오지도 않는다. 왜냐면 실업자가 생기더라도 그 수가 적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직장을 옮기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기업은 변화의 시대에 모험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망하면 대량실직 사태가 벌어지고 지역경제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까지 휘청거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나서서 그 많은 실업자들을 챙겨주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애초에 '대기업'이 망하지 않도록 '공적자금'을 투입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대기업은 기술혁신에 올인하며 위기에 맞서 대응하지 않는다. 그동안에도 하지 않던 '기술혁신'이 공적자금을 투입했다고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기업은 결국 폭망하고 만다. 그리고 대기업을 기반으로 동거동락했던 '자회사'도 망하고, '손자회사'도 망하고, '증손자(?)회사'도 망하는 '줄줄이 도산'이 벌어지며 '지역경제'가 폭망하고, 더 나아가 '국가경제'까지 폭망하는 것이다. 특히나 '탄소배출'을 많이 하는 '제철회사'인 포스코가 망한다면 울산 인근 지역의 경제도 함께 망하고, 국가 기간산업이었던 제조업의 한 축이 무너지게 되니 대한민국 경제가 휘청일 것은 뻔한 이치다. 이런 위기감이 점점 임박해오고 있는데도 '대기업 개혁'을 손놓고 있을 것이냔 말이다.

  이제 대한민국 '대기업'은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던 사업들을 하나둘 내려놓고 '중소기업'들이 알아서 성장할 수 있도록 냅둬야 한다. 당장은 이들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꿀꺽하고, 중소기업의 이익마저 대기업의 계열사로 착복하면 '이득'을 챙기고, 국가경쟁력도 '성장'하는 듯 보일 테지만, 앞으로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등과 같은 새로운 기술력이 절실한 시점이 찾아오면 '대기업'만으론 대응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니 거의 '재벌 해체' 수준으로까지 대기업을 쪼개서 밀려오는 큰 파도에 의한 '충격'을 최소화해야만 한다. 그래야 뒤쳐진 '재생에너지 기술력'을 끌어올려 다시금 대한민국 경제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대기업 운영을 '친족경영'에서 '실력경영', '전문경영'으로 전환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탈취하지 말고 '제값'을 쳐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끌어 올려주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정부의 투명한 감시, 감독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나서서 '벤처기업'이니 '중소기업 지원정책' 따위를 추진하며 설레발 치지 말기를 당부한다. 정부의 '근시안적인 관료'들은 당장의 이익과 성과가 나지 않는 중소기업과 기술력에는 자금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혁신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정부관리자가 나서봐야 헛물만 켤 뿐이고, 세금낭비만 될 뿐이다. 그러니 중소기업 스스로 지지고 볶을 수 있게 '자유경쟁체제'만 만들어주면 된다. 오히려 규제대상은 '대기업'이어야 한다. 이들은 결코 스스로 '해체'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경제는 '빨간불'임에 틀림없다. 허나 대한민국 경제가 폭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폭망'한 뒤에 다시금 '기적'처럼 일어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는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하며 대혼란의 시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재벌 개혁'은 반드시 실천해야만 한다. 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 경제가 다시 일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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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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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넥서스Friends 1번째 리뷰] 히로시마 레이코 작가는 <전천당> 이후 두 번째 소설로 접하게 됐다. 이 소설도 <전천당>과 비슷한 느낌이다. 일본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현대의 사상'을 담아 연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배경은 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에도 시대'를 펼쳐 냈다. 17세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 가문이 권세를 누리던 '에도 막부시대'라고 해야 하겠으나,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칼잡이(무사)'의 활극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적한 시골마을의 공동주택에서 벌어지는 요괴 대소동인 까닭에 '막부'라고 하는 거창한 시대극(사극)은 아니다. 제목 그대로 '인간의 아이'가 '요괴'를 돌보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잔잔하게 펼쳐지는 '주니어소설'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애초부터 '주니어소설'로 쓰여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레이코 작가가 스스로 밝히길 이 책은 '성인소설'로 집필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 <귀멸의 칼날>이 방영하던 시기였던 탓에 좀 더 '호러물'에 가깝고 피와 시체가 나뒹구는 잔혹한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반려하면서 "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다시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새로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분량도 줄어들고 에피소드도 덜어내야만 했단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어린이도 읽고 즐길 수 있는 책이 되었다. 하지만 애초의 '스토리'는 유지한 탓에 책내용이 담고 있는 주제가 '성인용(?)'이라는 느낌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탓에 논술쌤의 관점에서 이 책을 '초등학생'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귀멸의 칼날>도 '19세 미만 관람불가'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완전 성인용도 아니기 때문에...애매한 책이다.

  1권의 내용은 주인공인 '야스케'란 소년이 길가에 있는 '하얀 돌'을 우연히 발견하고서는 실수로 떨어뜨려 깨뜨리고 만다. 그저 돌멩이를 깼을 뿐이니 별일 아닌 듯 싶었지만, 사실 그 돌에는 '요괴의 아이'를 돌봐주는 요괴 '우부메의 집'이었던 것이다. 돌이 깨짐과 동시에 우부메도 떠나버렸고, 요괴의 아이를 돌볼 요괴가 사라지자 '요괴 봉행소(재판을 담당하던 에도시대 관청 이름)'가 요란스러워졌고, 결국 돌을 깨뜨린 범인 야스케가 요괴에게 잡혀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벌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요괴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대신 맡게 된 것이다. 우부메가 다시 돌아와 요괴의 아이를 돌봐줄 때까지 말이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뒤에 이어질 내용이 얼마나 기괴하고 음산한 요괴들이 등장할지 자못 궁금해질 테지만, 막상 뒷이야기를 읽어 보면, 살짝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특히 '호러 마니아'라면 말이다. 왜냐면 인간의 아이, 야스케가 처음으로 돌보게 된 요괴 아이가 바로 '매실절임(일본 장아찌)'이기 때문이다. 정말 귀염뽀짝이다. 어린이를 위한 소설로 개작했다는 느낌을 확연하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괴는 요괴다. 인간을 해치는 '포식자 요괴'는 아니지만, 요괴이니만큼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전천당>의 느낌이 물씬 났다. 특정 년도가 적힌 동전에 해당하는 물건만이 가진 독특하고 신비한 능력 때문에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가득했던 것처럼,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서도 요괴마다 독특한 특징과 사건이 벌어지며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하지만 시대배경이 옛날이고, 요괴가 등장하는 몽환적인 배경이 자못 '이국적인 느낌'마저 든다. 일본에는 특히나 '요괴'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본의 애니미즘은 좀 더 유별 날 정도로 많은 요괴가 등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요괴들은 '장난꾸러기 님프'나 '괴팍한 고블린'처럼 사람에게 크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일본의 전설에는 섬뜩한 요괴들도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고, 이런 요괴들은 종종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살육을 즐기는 끔찍한 괴물로 등장하곤 한다. 한국형 귀신은 '원한'을 품은 경우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일본형 요괴는 원한의 유무와 상관없이 사람의 피와 살을 탐하고, 살육을 거듭하며 능력을 키우는 요상한 취향까지 거침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흔하다. 유독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의 특성을 닮은 듯도 싶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는데 무슨 원한을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막 싹쓸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요괴들의 성격도 그런 모양인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책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는 그런 끔찍한 요괴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면 시대배경은 '과거'의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은 '현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의 전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겠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사고방식은 분명 요즘 것이다. 바로 '인간의 권리'를 담은 인권사상이 엿보인다. 물론 등장인물 태반이 '요괴'인 탓에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이 동물의 모습이긴 하다. 그치만 그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주제의식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이 책을 '성인호러물'이 아니라 '어린이용'으로 출간해보라고 했던 모양이다. 단순히 피와 살이 튀기는 끔찍함이 아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고귀한 생각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요괴는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다. 인간이 아닐 뿐더러 '살아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천 년을 훌쩍 넘겨서 살아가는 요괴들의 삶에 고귀함 따윈 애초부터 없다. 백 년을 살아도 지겨운 것이 '인생'인데, 천 년을 살면 지겹다 못해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잃고 심심풀이로 인간을 잡아 먹는 요괴들의 삶을 그려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레이코 작가가 그린 '요괴'는 좀 달랐다. 그들의 수명이 언제까지인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요괴일망정' 유년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의 유약함을 지키고 보살펴 주려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딴에는 일본도 '초고령화 사회'가 된 지 오래되었기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을도 꽤나 많을 것이다. 심지어 현재 일본사회는 '고독사(홀로 늙어 돌봐줄 사람도 없이 죽어서도 주검마저 거두어줄 사람 없이 그대로 방치된 죽음)'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기에, 이야기 속에서나마 어린아이를 돌보는 풍경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이야기를 좀 더 읽어본 뒤에 꺼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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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 - 신대륙 이주와 독립전쟁 미국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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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과사상사 8번째 리뷰] 다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작정하고 책구매도 했다. 나름 '균형잡힌 미국사'를 초보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역시 책이나 차는 '두 번' 우려 먹어야 제맛인 듯 싶다. 처음 읽었을 땐 막막했는데, 다시 읽으니 뭔가 감이 잡히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의 역사는 '두 얼굴'을 지녔다. 하나는 세계 최강대국으로 우뚝 선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뒷구녕으로 할짓 못할짓을 다하는 추악한 민낯이다. 그리고 미국은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듯 싶다. 그 증거는 바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붕괴'다. 한때 미국은 전세계의 경찰 노릇을 톡톡히 하며 '감배 놀이'를 즐겼었다. '감배 놀이'란 남의 잔치에 가서 감놔라 배놔라 참견하는 놀이다. 물론 여전히 미국은 초강대국이 틀림없다. 그런데 더는 '감배 놀이'를 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도 보란 듯이 미국과 맞짱 뜰 각오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이스라엘은 감히 미국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말살을 밀어붙이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북한마저 미국과의 대결을 저울질하며 간을 보고 있으니, 미국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암튼 이번 기회에 미국에 대해서 요모조모 뜯어볼 작정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미국사'만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오늘날 미국의 주축이 된 '백인들의 기원'은 물론이고, 미국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원래 '아메리카 원주민'이라 불어야 마땅하겠지만, 편의상 '인디언'이라 칭한다)', 그리고 각지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 들의 기원까지 살펴보면서, 이후에 '이주민'이 된 히스페닉과 아시안 들까지 지금의 '멜팅 스폿'을 이룬 미국의 인종적인 문제의 근원까지 파헤치고, 이주해온 백인들의 본고장이었던 '유럽문화'까지 함께 아울러 살펴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산책'의 시작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항해를 준비한 시절의 '유럽의 분위기'부터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리뷰에 일일이 '요점정리'하듯 쓰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안목'이니 말이다.

  1권의 핵심은 '미국의 주인은 누구인가?'다. 물론 한나라의 국민이 '주인'이고, 주권을 누리는 이가 '주인'일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이며, 국민이 주권을 누린다. 하지만 미국의 국민은 '다인종'인 탓에 주인된 인종이 '따로'인 듯 싶고, 주권을 누리는 이도 '따로' 있는 듯 싶을 정도다. 그리고 그 주인은 바로 '백인'이고 말이다. 왜 미국은 이런 식이 되었을까? 솔직히 미국내 백인이 차지하는 수는 '소수'에 가깝다. 그런데도 미국 경제 '전체의 부' 대부분을 '백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은 거의 모두 '백인들의 입맛대로' 움직이고 있다. 전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히스페닉'을 비롯해서 유색인종들은 온갖 차별을 아직도 다 받고 있는 실정이다. 왜 미국이 이 모양이 되었는지 짐작케 하는 내용이 바로 1권에 담겨 있는 셈이다. 바로 '미국의 독립혁명'의 주체가 바로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건국의 아버지' 이야기는 2권에 나오니 잠시 묻어 두겠다.

  원래 미국이 위치한 '북아메리카'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이라 불려야 마땅하겠지만,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 땅을 '인도'라고 철떡같이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도착한 섬들(지금의 카리브해 섬들)을 '서인도제도'라 불렀고, 이곳의 원주민들을 '인디언(인도사람)'이라 부른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인해 유럽인들의 대대적인 이주가 곧바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기에 북미대륙 동부해안은 너무나도 척박하고 추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이주민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굶어죽기 딱 좋았다.

  하지만 초기 유럽인들은 '종교의 자유', '굶주림으로부터 탈출' 따위를 목적으로 한 자발적 이주도 있었지만, 영국에서처럼 '범죄자 국외추방지'로 미국이 낙점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삼삼오오 미대륙으로 건너온 '백인 이주민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그리고 인디언들에게 '농사법'도 배우고 익혀서 유럽에 생산물을 수출을 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백인 이주민들이 성공적으로 농사를 지어 무역으로 이득을 톡톡히 본 작물은 다름 아니라 '담배'였다. 그런데 담배농사에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백인들을 대신해서 농사를 지을 일손이 필요했는데, 그런 이유로 데리고 온 이들이 바로 '아프리카 흑인'이었다. 물론 처음엔 '인디언'에게 힘든 농사일을 시켰지만, 이들은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땅의 원 주인'이었다. 그런데 백인들이 자신들의 땅을 빼앗는 것으로도 모자라 노예로 삼는다는 정책에 고분고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흑인들이 낙점된 것이다. 그 흑인들의 일부는 '계약하인'으로 정해진 기간동안 노동을 하고 난 뒤에 '자유인'이 되었다고도 하지만, 더 많이 필요해진 노동력 때문에 '흑인노예' 시장이 활기를 띠자 애초에 머물던 흑인노동자들도 곧 '노예'처럼 부려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흑인을 노예로 삼는 것은 <성경>에도 적혀 있다는 근거를 내밀면서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했다. 인디언 대신 흑인이 노예가 되었다고 해서 '인디언의 삶'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더 많은 백인들이 미대륙으로 이주해오자 인디언들은 '살곳'조차 백인들에게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대륙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 했다. 그리고 '흑인노예 무역'과 '인디언 사냥'으로 백인들은 영토를 점점 늘려 나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기로 미국의 시작은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제임스 타운'에 정착한 백인들이 원주민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자, 이를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땡스 기빙데이(추수감사절)'를 제정해 기리고, 이후 더 많은 백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하게 되었고, 곧이어 영국의 압제에 당당히 자율적인 민병대를 조직해서 독립의 기치를 올리고, 정정당당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둬 '정의로운 독립국가'를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허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내용이다. 왜냐면 '선한 이미지'만 남기고 '나쁜 이미지'는 쏙 뺐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흑인 노예무역'과 '인디언 사냥'을 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역사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를 '두 얼굴의 역사'라고 평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고 '반미감정'을 부추기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미감정'이 아니라 '미국을 이길 수 있는 해법'이기 때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로울 일이 없다(지피지기 백전불태)'고 <손자병법>은 말한다. 그러니 아직 미국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대한민국이 '반미감정'만 앞세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미국의 노예'로 살 일도 아니기에 미국에 대해서 철저히 알아보잔 말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반미'고, '승미'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화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러니 미국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 것은 알고, 선한 이미지는 드러내고 칭찬을 아끼지 말고, 추한 이미지는 절대 잊지 말고, 되려 속는 일은 더더구나 없어야 한다. 이것이 '외교의 기본'이다.

  분명 '미국의 독립혁명'은 배울 점이 많다. 부당한 일에 당당히 맞서 싸워 꼭 지켜야 할 '도리'를 스스로 쟁취해냈기 때문이다. 허나 미국의 독립으로 인해 더 큰 피해를 본 '피해자'가 발생했는데도, 미국의 정책은 이들을 더욱더 궁지로 내몰고, 오직 '백인들만의 나라'로 만들고 말았다. 이런 나라를 '종교 박해'로부터 탈출해 '종교의 자유', '인권의 보장', 그리고 '독립의 기치'로 우뚝 세운 자랑스런 나라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물론, 모든 역사가 승자를 돋보이게 하고, 패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을 관행처럼 저지르곤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린 그런 나쁜 관행으로 당해본 '피해의 역사'를 겪어보았다. 그러니 이런 추악한 면모를 외면만 하지 말고 냉철하게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양의 위대함'만 늘어놓는 역사에 대해 경계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낱낱이 분석한 뒤에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반성'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잘못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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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꿈이 사라진 날 초등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임광희 그림 / 한솔수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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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솔수북 7번째 리뷰] 어린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권장해야만 하는 걸까? 물론 어린이들 스스로 꿈을 키워나가고 어른들이 그 꿈을 이루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어린이들에게 마음껏 꿈을 가지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 '꿈'을 빙자해서 '장래의 직업선택'에 관한 암묵적인 강요를 하고, 자유를 박탈하고, 무한 간섭을 할 요량이라면 '꿈' 이야기조차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어린이들에게 '직업'을 강제하느냔 말이다. 그로 인한 부작용이 더 크니 그냥 냅두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다.

  더 큰 문제는 채 '스무살'도 안 된 나이에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서게 만드는 대한민국 사회다. 그 어린 나이에 '평생직업'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을 강요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어쩌면 가장 중요한 '선택'을 강제하느냔 말이다. 그렇게 무한경쟁으로 내몰면서 무슨 '꿈타령'을 하느냔 말이다. 그냥 솔직하게 "네 인생은 '인 서울'에 달렸으니, '인 서울'이라도 해서 정규직의 발끝이라도 잡고 싶으면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하고, 공부로 성공할 것 같지 않으면 '재능'이라도 살려서 돈벌이에라도 일찍 뛰어 들고, 이도 저도 안 되면 결국 비참한 '비정규직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테니, 한 번 사는 인생 개고생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살아봐. 그게 싫으면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햇!!!"라고 '현실'을 말해 주길 바란다. 괜한 '장래의 꿈 이야기'를 꺼내서 돌려까기 하지 말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어른들도 어릴 적에 꿈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어릴 땐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데, 살아보니 '그 말씀'이 맞더라는 생각뿐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어릴 적 꿈'은 매우 소중하다는 것에 부정하는 어른들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만큼 꿈은 소중한 것이다. 아무리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가 만연하다고 하더라도 '꿈'만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데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책 <꿈이 사라진 날>은 의미가 깊다. 또다시 '외계인'이 등장해서 이야기의 본질을 흐려놓는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소중한 꿈을 지키고 이루겠다는 어린이들의 마음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두 말 하면 입 아플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엉뚱하다고 느껴지는 점은 지구인에게서 '꿈'을 사라지게 만들어서 외계인의 노예로 만드는 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그 외계인들의 침공에 차질을 주어 지구인에게 꿈을 되찾아주는 영웅들에게는 정작 '꿈이 없었다'는 설정이 어리둥절했다. 꿈을 갖고 열심히 잘 살던 '모범 지구인'들은 외계인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꿈을 갖는 걸 귀찮게 여긴 '불량(?) 지구어린이'가 영웅으로 설정된 것이 의아스러웠다. 이런 구성을 읽은 '초등저학년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외계인이 침공할 걱정(?)에 꿈을 갖지 않노라고 핑계를 대지는 않을까?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초등생은 없을 테니 걱정을 붙들어 매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놓고 싶은 심정이다.

  어린이들은 '모방심리'가 꽤나 발달했다. 그래서 '좋은 말과 행동'을 들려주고 보여주면 '좋은 말과 행동'을 따라하고, 그 반대의 상황도 똑같은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그래서 '애들 앞에서 냉수도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는 속담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교육에 앞서서 '밥상머리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고, 심지어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를 위해서도 '태교'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왜 동화책의 줄거리는 소중한 우리 아이들이 읽고, 더 나아가 전세계 어린이들이 읽을 텐데, 함부로 쓰느냔 말이다. 아무리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딴에는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교훈적인 내용'만을 강조하다보면 <어린이책>이 갖춰야 할 '재미'라는 가장 중요한 특장점을 놓쳐서 훌륭하지만 지루한 책이 되어 어린 독자들이 외면하는 책이 되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줄거리'를 살짝 바꾸는 것은 어떨까? 꿈 많은 '모범 지구인'이 외계인의 침공에 더 취약해서 꿈도 없는 '불량 지구인'조차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데, '모범 지구인' 가운데 외계인들의 침공 방식에 '특별한 면역력'을 가지 어린이가 있어서, 외계인의 야욕을 물리칠 방법을 찾아내고 '불량 지구인'과 함께 힘을 합쳐 외계인을 소탕한 뒤에, 꿈의 소중함을 인식한 '불량 지구인'들이 각성해서 온세계 지구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부풀게 만드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면 말이다. 교훈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격이 되지 않았을까.

  딴 이야기이긴 하지만...출판시장을 주욱 살펴보면, '외국작가'들의 책시리즈는 수십 편이 넘는 반면에 '국내작가'들의 책시리즈는 열 편을 넘기기도 힘든 모양이다. 물론 공전의 히트를 한 <마법천자문>을 비롯한 '교양학습만화'는 꽤 성공적인 양상으로 안착을 하며 계속 펴내고 있지만, 유독 <동화책>만큼은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해리포터>나 <전천당> 등의 사례를 보아도 잘 만든 세계관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기왕에 '사라진 날' 시리즈를 만들었으면, 지구어린이와 외계인 침공이라는 '세계관'을 구축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작가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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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돈이 사라진 날 저학년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김다정 그림 / 한솔수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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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솔수북 6번째 리뷰] 고정욱 작가의 '사라진 날'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이번에는 '돈'이 사라졌고, 역시 나쁜 '외계인 침공'이 원인이었고, 마무리는 착한 '외계인의 도움'으로 지구가 구원되는 전개였다. 물론 초등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위해서 외계인이 등장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에 매달리지 않고 단번에 해결하는 구성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조기 '경제교육'의 필요성에 늘 찬성하는 쪽이었기에 이른 나이의 독자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교훈적인 이야기에 박수를 보내는 바다. 그런데도 완독한 뒤에 영 개운치가 않다. 뭔가 껄끄럽기까지 하다. 앞선 책들에서 '책'이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고, '엄마'가 사라지는 내용과는 달리 '돈'이 사라지는 배경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먼저 통용되던 '화폐'가 사라져서 원시경제인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리고 '물물교환'이 꽤나 불편해서 새로운 '통화'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바코드(인식표)'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렇게 '화폐'를 대신한 새로운 통화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전에 '외계인'이 등장해서 지구정복을 위해서 돈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점부터 껄끄럽기 시작했다. 그러다 외계인의 지구정복 야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상화폐'로 대응하며 지구인들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고, 외계인들의 정복욕을 무너뜨린 것까진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외계인들이 물러난 뒤에 '가상화폐' 사용으로 인해서 투명한 쓰임새로 인해서 '부정부패'가 싹 사라져버렸다는 설정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과연 '가상화폐'만이 투명한 돈 씀씀이를 보장하는 것일까? '가상화폐'로 발생할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제점은 없을까? 그리고 '가상화폐'의 사용으로 정말 부정부패를 척결할 수 있을까? 이런 '팩트체크' 없이 <어린이책>에 가상화폐의 순기능만 선보이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어린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걸까? 라는 의문에 빠져들자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이책>이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수많은 '동화책의 결말'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맺음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왕자와 공주의 결혼을 '행복공식'으로 삼고, 바람직한 가족구성을 '권선징악'의 일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식의 결말을 마냥 '좋다'라고만 평가하지 않는다. 왕자와 공주의 결혼이 무조건 '행복한 결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종이봉지 공주>처럼 왕자가 공주를 구하지 않고 '역발상'으로 용감하고 씩씩한 공주가 사악한 용에게 잡혀간 왕자를 구해주지만, 왕자는 용과의 결투 도중에 옷이 불타버리고 초라한 '종이봉지'로 몸을 가린 허름한 공주의 모습에 실망하고 투정하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는 결말을 시도한 동화책도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돈이 사라진 날>의 주제와 목적이 '어린이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저축의 필요성과 합리적인 소비를 가르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통화인 '인식표'와 '가상화폐'의 등장이 적절한 대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용하던 통화가 사라져서 '불편한 물물교환'을 보여주고, '아나바다 운동(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운동)'까지만 보여줬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중한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꼭 필요한 곳'에 요긴하게 쓰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더 뿌듯한 결말이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 민지가 200만 원을 스스로 모아서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는 꿈'을 실현시키는 결말로 말이다. 굳이 '외계인의 지구정복'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서 괜한 '충격요법'을 써서 '돈의 소중함'을 강요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은 것이다. 내가 완독 후에 껄끄럽게 생각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한편, 시리즈의 '일관성'을 갖추려는 작가의 고민은 이해하는 바다. 하지만 조금 더 고민을 한 뒤에 '결과'를 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 이번 책은 좀 뭔가에 쫓기듯이 급하게 썼다는 느낌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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