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의 배신 - 중독의 모든 것: 술, 도박, 스마트폰, 음식, 마약
강웅구.박선영.안유석 지음 / 포르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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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의 배신 : 중독의 모든 것 - 술, 도박, 스마트폰, 음식, 마약>  강웅구, 박선영, 안유석 / 포르체 (2025)

[My Review MMC / 포르체 1번째 리뷰] 행복한 느낌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은 욕구는 온 인류가 갈망하는 것이지만, 과거의 인류에 비해 현대인들은 그 행복감을 오래 유지하는데 많이 힘겨워하고 있다. 이는 인류진화적인 차원에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뇌'를 발달시키며 고도의 행복을 느끼지 않고서는 건강하게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뇌'를 풀가동시키며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뇌'로 만들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고 현대인들에게 마냥 '쉼'을 권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강제'하고 있는 현실인데 말이다. 그래서 '뇌과학'의 발달과 함께 여러 신경전달물질의 효능이 속속 밝혀지면서 그 연구성과에 각광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 '도파민'은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이 뇌에서 비롯된 것이며, '도파민'이 분비되고 있는 상황이 곧 행복한 순간이라는 공식을 끌어낼 수 있었다. 급기야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도파민'을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파민이 충만한 상태가 '행복'인줄 아는 것은 뇌를 속이는 행위라는 사실을 연구 결과 밝혀냈다. 물론 도파민이 분비되면 뇌는 행복한 느낌을 느끼도록 작용한다는 사실까지 거짓이란 얘기가 아니다. 이 연구 결과는 '중독의 매커니즘'을 밝혀낸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습관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는 현상을 '중독'이라고 한다면, 그 습관이 일종의 '강렬한 유혹'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 분비되어 행복감을 만끽하게 하는 습관이 생긴다면, 뇌는 그 습관을 '계속' 하도록 유혹하고, 결국 중독에 빠뜨리고,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게 의존적인 삶을 살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중독을 '의지의 문제'로 일축하는 사회적 경향을 어렵지 않게 경험한다. 이를 테면, 술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그리고 담배 중독 같은 일상적인 나쁜 습관이 생겼다면 각오를 단단히 해서 딱! 끊고 새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의지 박약'한 관계로 그걸 못하고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면서 중독 현상을 '나약한 사람들의 일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중독'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끊으려 노력하는 대도 그게 '마음(의지)' 먹은 대로 잘 안 되더라는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이다.

여기에 단단히 한 몫하고 있는 것이 '끊을 수 없는 환경'에 둘러 싸여 살고 있어 '중독'은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중독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눈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일과를 보내다가, 잠들기 직전까지 스마트폰을 보다가 겨우 잠든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눈을 뜨면 또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 이런 일상을 살면서 '중독'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만, 아무리 스마트폰과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더라도 '적절히 절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중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는 술, 담배, 게임, 그리고 마약까지 마찬가지다. 술도 적당히 즐기는 수준이라면 매일 마셔도 중독이라 부르지 않는다. 담배나 게임, 도박도 그렇다. 물론 마약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고, 단 한 번이라도 한다면 '범법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상황이 다르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법적인 제재에서 벗어나 '불법'이 아닌 마약류가 버젓이 유통(?)되는 상황에서 살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마약'인줄 모르고 과자나 음료처럼 무의식중에 접하게 되는 경우도 흔하게 되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마약 중독'에 빠져서 혼자만의 힘, 다시 말해, '의지의 문제'만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독에 빠지고 마는 슬픈 이야기도 종종 들리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독이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독은 '뇌'가 우리를 작동시키는 것이기에 결국 '뇌를 다루는 방법'을 깨달아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깨우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중독된 습관이 우리의 뇌를 '도파민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작동법을 근원적으로 차단하지 않으면 중독을 치유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독자는 나약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들에게 찍은 낙인과 강력한 처벌만으로는 중독자를 양산하는 사회를 막을 수 없음도 각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중독을 치유할 수 있는 효과적인 '뇌 속임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보상 체계'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술 중독자에게 술을 마셔야만 '도파민 분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주위에서 칭찬과 격려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다른 원인'으로 생성된 도파민 덕분에 점차 술을 멀리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원리다. 그렇게 도박 중독,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 등을 치유 단계까지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중독자가 이런 방식으로만 중독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담배나 마약 중독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너무 강력한 유혹'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니코틴 성분 같은 것들은 우리 몸속에서 어느 정도 이하의 수치로 떨어지면 '강렬한 유혹(이를 테면, 금단 증상)'으로 다시 니코틴 성분을 어느 수치 이상으로 되돌리려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금단 현상'은 결코 의지만으로 이겨내거나 건강한 상태로 회복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단순히 '뇌를 속이는 방법'만으로도 금단 증상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니코틴의 양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가다 완전히 끊게 만드는 방법이나, 니코틴을 대신할 '대체제'로 조절하면서 체계적으로 치유해나가는 방법을 써야만 한다. 그러나 이 방법에도 문제는 있다. 사람의 몸이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성공적인 방법'이 또 다른 사람에게도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누가 이런 방법으로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단순 모방'의 방식으로 모든 중독을 치유할 수는 없고, 반드시 의학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전문적인 치유 방법을 처방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마약류의 중독처럼 조금이라도 '투약의 양'이 달라지면 너무 적어서 효과가 없거나, 반대로 너무 많아서 중독 증세가 더 심해지는 악순환을 거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독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중독자가 저지르는 범죄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중독'에 쉽게 빠지게 만들고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지 깊은 고찰로 문제를 짚어갈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중독자'에 대한 적합한 치유방법을 제시해서 스스로 중독을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는 인식이 필요하며, 나아가 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과학적 해결책 마련에 서둘러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책은 전하고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독을 단순 도덕적인 판단으로 '죄악시'하고, '나쁘다'라고만 인식해서도 곤란하다. 현대인들은 쉽게 불안과 공허에 빠지고, 무엇보다 엄청난 강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가운데 일부를 '중독자'로 만들고, '범죄'에 저지르도록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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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6 - 통일 제국 진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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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6 : 통일 제국 진>  사마천 /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1)

[My Review MMXCIX / 휴머니스트 48번째 리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무조건 외치던 때가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맞닥뜨린 '분단'에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분단이 더욱 고착되자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던 '냉전체제' 속에서도 우리는 통일을 소원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목놓아 외쳐대곤 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일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면 좋을 듯 싶다가도 안 해도 그만일 듯 싶을 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그렇다. 일단, 전쟁을 종식 시킬 수 있으니 반드시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지만,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한 갈등이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될 것이 뻔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어떤 것으로도 쉽사리 '하나'로 뭉치기 힘들 듯 싶기 때문이다. 그럼 통일을 했을 때 본격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지 '통일 제국 진나라'를 살펴보자.

기원전 221년 진왕 영정은 천하를 통일했다. 그는 가장 먼저 '시황제'라는 명칭부터 고쳐서 부르게 하고, 다음 황위부터는 '2세 황제', '3세 황제'라는 식으로 칭하라 했다. 시황제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지 11년 뒤에 죽고, 15년 만에 진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이나 했을까? 아니, 그에 앞서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토록 강대한 진나라는 왜 그렇게 일찍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말이다. 진나라보다 약했던 은나라와 주나라도 명백상만으로도 7~800년을 존속했는데, 강한 힘을 지녔던 진나라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자마자 쇠락해질 수밖에 없었느냔 말이다.

수많은 이들은 진시황의 폭정을 으뜸으로 꼽는다.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군현제를 실시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수했지만, 그러기엔 다스려야 할 영토가 너무 넓었다. 과거의 주나라가 봉건제를 실시해서 왕족의 친척에게 봉토를 나눠주고 알아서 다스리라고 했던 것도 사실은 너무 넓은 영토를 '천자' 홀로 모두 다스리기에 역부족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던 셈이다. 물론 주나라는 봉건제로 인해서 끝내 '춘추전국시대'의 대혼란을 야기하고 오랜 전란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진시황은 군현제를 실시하며 '1인 황제의 독재체제'를 공고히 했던 것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서 전국토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서 '분란의 씨앗'을 애초에 만들지 않겠다고 확고한 의지를 표방한 셈이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모든 업무를 직접 총괄하는 중책을 스스로 짊어지고 엄청난 '워커홀릭'처럼 일을 하는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중앙집권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 '군력의 분산'을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시황, 자신'이 영원한 삶을 누리는 불로장생의 비결을 얻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권력의 속성이 자신의 아들조차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때가 되면 물려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은 그 때가 오지 않았다고 부정하다가 끝내는 '폭정'을 일삼는 폭군이나 암군, 혼군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렇기에 권력이 '절대권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견제'할 수 있는 2인자가 반드시 존재하고 있어야 '건강한 권력행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진시황에게 그런 2인자가 있었을까? 승상을 지냈던 이사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사도 '권력'에 빌붙어서 단물만 빨다가 환관 조고의 계략에 동조하며, 진나라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고, 결국 자신도 조고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즉, '개인의 영달'만 충족되면 국가의 존망조차 어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가진 평범한 위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진시황도 살아생전에 이사를 크게 중용하면서도 끝내 '국정 파트너'로 신임받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혼자 다 해먹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시황은 어느 정도 선방했던 면이 없지 않다. 엄청난 워커홀릭으로 국가의 대소사를 홀로 도맡아 처리할 정도로 능력도 있었으며, 실제로도 살아 생전에는 '최초의 통일 제국'을 효율적으로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다스리는 것만으로 욕구충족을 할 수 없었던 진시황은 더 큰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불로장생'에 지대한 관심을 쏟으며 서복, 노생 등과 같은 방술사들의 언사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 신선이 되거나 진인이 되고자 엄청 노력(?)을 한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다. 영생을 살고 싶은 욕구가 '개인의 영달'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통일제국'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투철한 것이라고 좋게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방술사들에게 속임을 당한 뒤에, 이에 대한 분풀이를 애꿎은 '서적과 유생'을 향한 것이 탈을 부르기 시작했다. 바로 '분서갱유'다. 처음엔 허튼소리를 하는 방술사들을 혼쭐낼 목적으로 시작한 사안이 '이사의 농간(?)'이 더해지면서, 국정에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억누르는 폭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고작 '유언비어'를 막는 정도면 충분했을텐데, '사상검증'으로 확장시키고, '언론통제'까지 강행을 하니, 엄한 법만으로도 주눅이 들어있던 백성들에게 '산 사람'을 생매장시켜버리는 끔찍한 일까지 자행해버리는 실책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흉노의 침략'을 막는다며 시작한 '만리장성 축조'와 '여산릉 공사'로 인해 백성들이 고역에 시달리며, 원망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는 점에서 진나라는 일찌감치 망조가 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처럼 '평민들의 일자리'를 확충하는 차원에서 대대적인 공사를 했던 것이라면 아무리 고된 노역에 시달렸더라도 원망하는 목소리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백성들의 노동력이 '세금(역)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답이 없었다. 워낙 엄청난 대공사였기 때문에 엄청난 '노동력 확보'가 관건이었는데, 발빠르게 통일을 하느라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터를 누비며 다니다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다시 공사하러 끌려온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동력 착취는 심한 '반작용'을 부르기 마련인데, 진시황은 이를 무리하게 밀어붙였고, 역을 기피하는 백성들에게는 '사형'이라는 준엄한 법시행을 강행했으니, 백성들은 만리장성과 여산릉을 짓다가 죽던지, 짓지 않으려 도망가다 붙잡혀 죽던지, 이래저래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런 까닭에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진승과 오광도 만리장성 축조를 하기 위해서 차출된 백성들이었다. 그렇게 공사장에 정해진 시일내에 도착을 해야 하는데, 마침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불어서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일을 지체하게 되자 비가 그친 뒤에 아무리 빠르게 강행을 한다고 해도 '약조한 날짜'에 도착하기는 글러버리게 된다. 진나라 법에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도망을 가면 모두 사형을 시키고, '정해진 약조'를 어겨도 사형에 처하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죽을 처지에 놓인 진승과 오광은 다른 백성들을 부추겨서 함께 도망가자고 했고, 감독을 하던 인솔자를 죽이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는 기치를 내걸고, 스스로 '초왕'이라 칭하고 진나라에 반기를 높이 들었다. 하지만 진승과 오광은 오랫동안 저항하지는 못한다. 반란군 토벌대에 의해서 빠르게 진압 당했고, 모인 백성들도 '구심점'이 되어야 할 진승과 오광의 역량부족을 깨닫고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승,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진나라에 멸망했던 '여섯 나라의 백성들'이 들불처럼 일어나며 반란군을 조직하기 이르렀기에 중요한 시발점으로 인지하게 된다. 그 반란군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이가 바로 '역발산 기개세'로 유명한 항우이고, 그 항우에 힘을 보탠 세력이 바로 유방이었다. 이들은 '초나라의 왕족'을 수소문해서 찾아내 왕으로 추대했으니, 그가 바로 '초 회왕'이다. 이렇게 확실한 '구심점'을 갖추자 옛 초나라 지역의 백성들은 반란군에 합류했으며, 그 결과 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최초의 통일 제국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정리해보면, 춘추전국이라는 혼란한 시기를 맞아 백성들은 오랜 기간동안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위인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잘남'을 내세워 백성들의 평안을 보장하고,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겠다고 나섰으나 모두 실패하고 만다. 그 잘난 인물들이 바로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 가운데 성공한 이는 딱 한 명이다. 바로 '진왕 영정(훗날 진시황제)'이다. 그가 바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태평하게 만들 진정한 위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엄청난 대업을 달성한 것이고, 그의 업적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게 진시황을 칭송하는 까닭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그러나 이런 칭송은 오래 가지 못했다. 왜냐면 진시황이 연이어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먼저 너무 가혹한 '법집행'으로 인해 백성들은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다. 사소한 잘못으로도 사형을 당하기 일쑤였고,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연좌제'에 걸려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심한 것이 '오가작통법' 같은 것이다. 다섯 집을 한데 엮어 '연대책임'을 물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감시하는 살벌한 세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앙과 이사 같은 '법가사상'이 진나라를 빠르게 개혁시키고 성장시켜서 강대국으로 만드는데 큰 일조를 한 면도 없지 않지만, 가혹한 통치는 백성들의 삶을 다시 불안하게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그래서 진승, 오광의 난을 시발점으로 엄청난 반란군이 삽시간에 퍼져 나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 백성들의 삶을 옥죄던 것이 무리한 대공사였다. 진왕 영정이 열세 살에 등극할 때부터 만들기 시작한 '여산릉 공사'가 통일이 된 이후에도 계속 진행중이었고, 연이은 흉노의 침략으로 국력이 낭비된다는 지적에 오래 전부터 실시되고 있던 '만리장성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며 공사를 강행하면서 부작용도 크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로 만리장성 자체가 커다란 무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맹강녀 전설'에서 그 진실을 엿볼 수 있다. 남편이 만리장성 공사를 하러 간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자 여인의 몸으로 남편을 찾아나선 것이다. 그러나 맹강녀의 남편은 이미 힘든 공사를 버티지 못하고 죽었고, 관리들은 만리장성의 높고 두터운 성벽을 채울 재료가 마땅치 않자 죽은 백성들을 장벽 속에 파묻는 방법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맹강녀가 찾아왔고 밤낮으로 남편을 찾는 소리를 지르며 울먹이다 남편이 매장된 장벽 근처를 아내가 지나가자 장벽이 커다란 굉음을 내며 열리더니 맹강녀를 그대로 삼켜버리고 저절로 장벽이 원상태로 되돌아갔더라는 전설이다. 이런 일을 지켜보던 백성들은 모두 울음을 참지 못했고, 백성들의 통곡소리에 합창을 하듯 장벽속에 매장된 주검들도 일제히 한맺힌 통곡소리를 내니 그 끔찍한 광경에 공사를 더 진행할 수 없었더란다. 그래서 진나라 관료들은 백성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서 맹강과 맹강녀가 함께 매장이 된 장소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내며 원혼을 달래니, 밤마다 울리던 귀곡소리는 잠잠해졌단다. 그러나 해마다 그 날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귀곡소리가 울려퍼졌고, 그때마다 제사를 지내 백성들의 원혼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비단 맹강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결정타는 초나라 사람 항우의 거병이다. 역발산 기개세, 산을 뽑을 힘을 지녔고, 세상을 덮어버릴 기운을 지녔다는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한나라 사람 유방도 힘을 가세한다. 유방의 재능은 '난봉질'이다. 하지만 밉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여색을 밝히면 밝힐수록 온동네 사람들이 유쾌했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마다 그는 '인기절정'이었다. 이를 두고 유방의 관상이 최고라는 평을 하는 모양이다. 그런 그가 '진승, 오광'처럼 난을 일으키는 주동자가 된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구름 같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항우에게 끌리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유방에게 끌리는 마음은 아리송하다. 그에게 무슨 매력이 있기에 번쾌와 장량 같은 인물이 목숨을 걸고, 끝내 그를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건 마지막 7권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총정리해보자.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진시황의 통일 위업은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통일을 달성했기 때문에 향후 중국은 '통일과 분열'이라는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분열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금 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목표'를 심어준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를 하나로 묶었을 때 수많은 문제점도 함께 발현된다는 점을 계속 반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통일을 목표로 삼고, 수많은 문제해결을 시도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도 '통일 대박'을 실현할 수 있겠느냔 진지한 물음에 현명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면, '통일'은 우리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갈등과 숙제를 안겨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진시황처럼 통일을 강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통일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고, 산적한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고 권력독점을 시도하게 되면, 끝내 좋은 결말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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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5 - 일통으로 가는 길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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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5 : 일통으로 가는 길>  사마천 /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0)

[My Review MMXCVIII / 휴머니스트 47번째 리뷰] 기원전 221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이 탄생한다. 하, 은, 주 이후 '춘추전국'으로 뿔뿔히 흩어졌던 제국을 다시 하나로 일통한 최초의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진왕 영정은 '최초의 황제'라는 뜻으로 '시황제'라 불렀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진시황제'가 바로 그다. 하지만 통일의 업적을 '진시황제'에게서만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그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기틀을 닦아 놓은 '진왕'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진 효공은 '상앙'을 등용해 변법을 시행해서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진 혜문왕은 '장의'로 하여금 연횡책으로 '소진'이 추진한 6국의 합종책을 차례차례 무너뜨렸다. 그리고 진 소왕은 '범저'를 기용해 '원교근공 정책'을 추진했고, 이를 기회로 삼아 '장평대전'에서 조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서 사실상 진나라가 일통을 하기 위한 기선제압을 다 이루었다. 이런 역대 왕들의 업적이 없었다면 시황제의 발빠른 '통일 업적' 또한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나라가 중국 최고의 통일 제국을 완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뛰어난 인재'를 바로 등용하고, '좋은 정책'이라면 바로 써먹을 수 있었던 '실용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전국칠웅들이 시도 때도 없이 야욕을 충당하기 위해 '전쟁'을 일삼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가장 절실했던 것이 바로 '뛰어난 인재'였다. 그 중에서도 진나라는 '상앙', '장의', '범저', 그리고 '이사' 등 역대 재상을 지낸 인물만 거론해도 얼마나 제대로 영입했고, 곧바로 정책추진을 실행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외국인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능력'을 펼 수 있는 곳이면, 그곳이 '조국'이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최고의 능력을 펼쳐냈었다. 그만큼 각국 간의 경쟁이 심화된 탓도 있었지만, '최고의 능력'을 선보이지 않으면 바로 죽임을 당하던 엄혹한 시절이기도 했다. 앞서 열거했던 상앙도, 장의도, 그리고 이사마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겨우 범저 한 명만이 '물러날 때'를 알고 천수를 누리다 병들어 죽었을 뿐이다. 단지 그들의 운수가 사납고 시절이 하수상한 탓에 그랬다기보다는, 그 시절에는 능력 있는 인재끼리의 경쟁도 심했고, 그 덕분에 나에겐 쓸모가 없더라도 남에게 좋은 일을 시켜줄 수 없다는 논리가 강하게 작용한 덕분에, 권력에서 내쳐지는 순간 그냥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 국가로서도 최고의 이득이라는 계산(?)이 나름 섰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비자>의 주인공 '한비'다. 그는 순자의 문하에서 이사와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학업경쟁에서는 이사보다 한비가 늘 우수했더란다. 그가 쓴 <한비자>는 상앙이 내세운 '법가사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우수하다고 정평이 났던 터라 진시황도 일찍이 '한비'와 만나 도움을 얻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비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 심한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수려한 '글발'에 비해서 어눌한 '말발'을 사용하는 모습에 실망한 진시황의 마음의 빈틈을 파고들어, 당시 재상으로 있던 이사는 한비를 향한 시샘을 감추고, '한나라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둬버리고 만다. 하지만 영민한 임금이었던 진시황이 한비를 첩자로 내몬 정황의 수상함을 눈치챌 것을 우려해서, 이사는 친구였던 한비에게 '독약'을 슬그머니 건네준다. 한비는 감옥에서 독약을 받아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잠깐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독약을 먹고 자결하고 만다. 이사는 친구였던 한비의 '꼿꼿한 성격'까지 간파하고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만이 자신이 살 길이라 여겼던 살풍경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중국인들이 고대사를 자랑하면서 대놓고 드러내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협'이다. 진시황이 통일의 위업을 발빠르게 달성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의협의 대명사'로 불리는 형가의 진시황 암살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형가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 장예모 감독의 중국영화 <영웅>을 이야기하며 자세히 풀어놓았기에 이번엔 패스하겠다. 형가 이야기를 빼놓고도 '의협'을 논할 수 있는 대목은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도 소개된 '위 신릉군'과 '초 춘신군'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나라를 구하고자 원군을 보내 '조, 위, 초 연합군'이 진나라가 자랑하는 무적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일은 사마천도 <사기>에서 매우 극찬한 대목이기도 하다. 사실 이 연합군이 탄생하기까지 진나라와 조나라 간에 벌인 '장평대전'은 너무나도 참혹한 역사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진나라의 장수는 '백기'였는데, 조나라 군대 40만 명을 산 채로 포로로 잡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승이었다. 이런 참패를 겪기까지의 과정도 참으로 긴 사연이 있지만, 여기선 결론만 얘기해서, 대승을 거둔 '백기' 장군은 수많은 포로를 재우고 먹이며 진나라로 돌아가는 길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여기고, 조나라 포로 40만 명을 산 채로 땅에 매장을 시켜버리는 잔혹한 짓을 벌였기 때문이다. 전쟁에 나서서 맞서 싸우다 죽이고 죽었다면 그저 치열했고, 힘겨운 승리였다고 평가하고 말았을 것을, 패배를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포로가 된 조나라 장병들을 저항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생매장'을 해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조나라 사람들의 원한이 어느 정도였겠느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진 소왕이 범저를 앞세워서 '원교근공책'을 밀어붙이며 6국을 차례차례 압박을 가하다 '장평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뒤에 조나라는 그야말로 허약해져서 후하고 불면 바로 꺼져버릴 것 같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가려린 목숨줄을 끊어버리기 위해 진 소왕은 조나라를 침공했는데, 조나라 군대는 무기가 떨어지자 나무를 깎아 창을 만들고, 화살이 떨어지자 돌을 손에 들고서 진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다. 또한 조나라 백성들은 성 안의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자 서로의 아이를 바꾸어서 배고픔을 달래며 처절하게 버티고 또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위나라의 '신릉군'과 초나라의 '춘신군'은 조나라와 합종 약속을 맺은 것을 주장하며 속히 '원군'을 보내자고 주장하지만, 강대국 진나라의 눈치를 보던 위나라와 초나라의 '친진파 세력'에 의해서 원군 보내는 일을 망설이게 된다. 그러자 신릉군과 춘신군은 '의협'을 내세우며 자국의 군대가 아닌 '개인적인 식객들'을 동원하여 이른바 '의로운 군대'를 조직해서 위나라와 초나라의 임금과 반대세력을 적으로 만들면서까지 도우려 한다. 그렇게 '조, 위, 초 연합군'이 조성되자 낙승을 거둘 것으로 여겼던 진나라 군대는 거듭 패배를 당하며 물러나게 된다. 이렇게 조나라는 신릉군과 춘신군의 '의협'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다.

그런데 이게 정녕 위나라와 초나라에 도움이 되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조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한 진나라 군대는 방향을 틀어서 초나라를 향했고, 그로 인해 초나라는 엄청난 영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진왕 영정(훗날 진시황제)이 13살에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 10여 년 뒤인 기원전 230년 한나라, 기원전 225년 위나라, 기원전 223년 초나라, 기원전 222년 조나라와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차례차례 멸망하고 만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인물열전'을 통해서 의협을 높이 사고, 의로운 일에 대해 호평을 남기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렇게 높이 샀던 '의협의 결과'는 결국, 조국의 멸망만 앞당겼을 뿐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분석하는 도구로 '현미경'과 '망원경'을 예시로 드는 까닭이 있다. '부분'을 강조할 때와 '전체'를 아우를 때 '같은 역사'일지라도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형가도 칭찬하고, 진시황도 칭찬하는 대목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형가의 의협도 좋아보이고, 시황제의 일통 위업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원경으로 전체를 살펴보면, 형가는 암살자로 시황제를 죽이려 들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옳은 것이냔 말이다. 양쪽 모두를 극찬한 사마천의 관점에서 보면, 좋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을 암살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훌륭한 사람이 좋은 사람에게 죄를 물어서 죽여버리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평가 기준은 다르다. 그때 그때 달라지는 기준을 기준이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이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랬다 저랬다 헷갈리게 서술하긴 했지만, 이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 사마천에게 웬지 더 많은 정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뭐, 나중에 서술되겠지만 '이릉전투'에서 항복을 한 장수를 편들다 죽음보다 치욕스런 '궁형'을 받게 된 사마천이 그 '항복한 장수의 아버지'도 편들면서 엄청 훌륭한 인물이라고 서술한 내용을 읽다보면, 사마천, 자신이 억울한 형벌을 받았다는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특정 인물에게 도에 넘치는 과찬을 하는 느낌마저 들곤 한다. 그렇게 뛰어난 업적 같지는 않은데도 칭찬에 칭찬을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 책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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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4 - 난세의 인걸들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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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4 : 난세의 인걸들>  사마천 /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0)

[My Review MMXCVII / 휴머니스트 46번째 리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한마디로 '어지러운 시대'다. 흔히 말하는 '난세'를 이르는 말이다. 특히, 전국시대로 불리던 시절에는 매년 전란이 이어지다시피해서 수많은 재물이 파괴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농사를 지을 젊은이들이 전쟁통에 동원되는 바람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 흉작이 되어 한 마을 통째가 굶어 죽는 일이 다반사라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제자백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재'를 소중히 여기던 시절이기도 했다. 군웅할거가 일상처럼 여겨지던 때라 한 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끌고, 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라면, 비록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통치권을 맡기고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서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들 하는 것이다.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누구라도 능력에 걸맞은 출세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에는 단연코 '진(秦)나라'가 가장 강성했다. 그래서 진 나라를 뺀 나머지 여섯 나라가 '합종책'을 마련하여 진 나라의 강한 힘에 대항하여 여섯 나라가 힘을 합치는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이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가 바로 지난 3권에서 소개했던 '소진'이다. 이에 맞서 진 나라는 여섯 나라가 합종하는 것을 막고, 한 나라씩 각개격파를 하기 위한 계책을 내세웠는데, 그게 바로 '연횡책'이다. 바로 '장의'가 주장했던 방법인데, '연, 제, 조, 위, 한, 초'를 따로 개별적으로 연합을 맺어서 다른 나라와의 결속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여섯 나라 중에서도 진 나라와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국력을 가진 나라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초 나라'와 '제 나라'였다. 이 두 나라는 드넓은 영토와 비옥한 곡창지대를 갖고 있었기에 탄탄하였고, 특히나 걸출한 '인재'가 참 많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절에는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스카우트(영입)'를 할 수 있던 때였기에 '자국의 인재풀'만으로 국력을 논할 수는 없었지만, 초 나라와 제 나라는 인구 면에서도 풍요로운 지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진 나라는 초와 제를 공략하기 위해서 주변 국가였던 조, 위, 한, 연 나라를 자주 구워 삶게 되는데...

가장 먼저 제 나라의 맹상군 전문이란 인물을 소개한다. 맹상군이 유명한 까닭은 바로 3000여 명이 넘는 식객을 거느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고대의 '한 집안'에 3000명의 여행객이 투숙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만 해도 놀랄 일인데, 그들이 한 데 모인 까닭은 바로 '맹상군'을 진심으로 존경하기 때문이란다. 그렇기에 맹상군은 제 나라의 왕족도 아니지만 왕족보다 더 높은 위세를 떨치는 귀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제 나라 임금이 맹상군을 좋아할 수 있었을까? 임금인 자신보다 더 인기도 많고, 재산은 더욱더 많은 것처럼 보일 정도인데 말이다. 

허나 똑똑한 임금이라면 이런 맹상군을 신하로 거느릴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탄탄하게 만들어서, 감히 적국이 제 나라를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만드는데 힘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 소왕이 어질기로 유명한 맹상군의 소식을 듣고서 맹상군을 굳이 보고 싶다고 초청장을 보낸다. 강대국인 진 나라가 하는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전쟁'이 틀림 없다. 그렇다고 맹상군을 순순히 보낸다면 진 나라는 맹상군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어서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야 진 나라에 위협이 될 소지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는 계산에서 말이다. 그걸 아는 제 민왕이지만, 그 말을 따르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따르지 않자니 보복이 두렵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약소국의 설움에 고민에 빠지고 만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맹상군은 자청하여 진 소왕의 초청을 받겠다고 나선다. 분명 강대국의 횡포일 게 뻔하고, 간다면 거의 죽은 목숨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직접 가지 않는다면 일을 해결할 수 없으니 직접 나선 것이다. 그렇게 진 나라에 도착한 맹상군은 진 소왕의 눈치밥을 먹으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결국엔 진 소왕과 진 나라 신하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어질기만 하고 지혜가 부족했던 맹상군은 진 나라를 온전히 탈출할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속수무책에 빠진 것은 맹상군과 동행했던 식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계명구도'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계명'은 닭 울음소리를 잘 내던 식객이었고, '구도'는 개소리를 잘 내던 도둑 출신 식객을 일컫는다. 맹상군은 이런 비천한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먹는 밥과 똑같은 음식을 내어주며 극진히 대접했기에 어질다는 명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럼 맹상군이 위기에 처하자 이처럼 비천한 신분의 두 사람에게 목숨을 살릴 방도를 찾게 되었던 것일까? 그건 바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하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할 때 잡은 지푸라기가 때로는 큰 힘을 발휘하는 일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맹상군이 진 소왕의 명령에 의해 억류되자 맹상군은 진 소왕의 애첩에게 달려가 살려달라 애원을 하게 된다. 그때 애첩은 맹상군이 가져왔다는 '여우 가죽 외투(호백구)'를 입어 보고 싶다면서 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그 선물은 진 소왕에게 받친 뒤였기에 난감했던 것이다. 똑똑하다는 인재들이 골머리를 썩히고 있을 때, 도둑 출신이었던 '구도'가 나서며 호백구를 다시 훔쳐서 가져오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중궁궐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서 호백구를 들고서 유유히 빠져나온다. 그렇게 애첩에게 선물공세를 하고 나서야 간신히 억류 상태에서 벗어난다. 애첩이 진 소왕의 침실에 들어서 맹상군을 살리라고 애원한 덕분이다. 간신히 억류된 몸에서 벗어난 맹상군은 그 길로 한밤중에 진 나라 국경관문인 '함곡관'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지만 진 나라의 법에는 '첫 닭이 울기 전'에는 성문을 절대 열 수 없다고 한다. 진 나라 법은 사소한 것이라도 어기면 죽음이었기에 맹상군이 아무리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어도 요지부동이었던 것이다. 그때 '계명'이 나서며 닭 울음소리를 내자 온 동네 닭이 깨어나 함께 울었다고 한다. 그러자 문지기도 아침이 온 줄 알고 관문을 열어주었고, 그 길로 맹상군은 국경을 넘어 제 나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진 소왕도 뒤늦게 맹상군을 풀어준 일을 후회하고 급히 군대를 보내 다시 잡아들이라고 보냈는데, 굳게 닫혀 있어야 할 함곡관이 활짝 열려 있어서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맹상군은 어떤 인물인 것 같은가?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오늘날에도 권력과 재물을 엄청나게 가진 이들이 많은데, 이들이 맹상군 같이 수많은 '인재풀'을 가동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맹상군이 뛰어난 인물인 까닭은 수많은 식객을 대접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했을 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맹상군이 뛰어난 인걸인 까닭은 다름 아니라 인재를 가리지 않고 소중하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바로 '계명'과 '구도'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까지 소홀히 하지 않고 두터운 '투자(!)'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도 모면할 수 있는 길을 제공받게 된 셈이다. 넷플릭스가 '케데헌'에 투자한 것도 이와 비슷한 면모가 있다. '케데헌'의 제작기간은 무려 7년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이면 2018년으로 '팬데믹 이전'이었고, 그때에는 '케데헌의 성공 가능성'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넷플릭스가 직접 제작한 것도 아니고 '소니'라는 외주업체에서 기획투자를 제안받고 제작비의 일부만 지원했다고 한다. 그러다 팬데믹을 겪으며 제작은 난항을 겪게 되고, '일본회사'의 '중국계 임원들'은 한국의 케이팝과 한국 문화가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케데헌의 내용에 딴죽을 걸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고, 이를 견디지 못한 몇몇 인사들은 퇴사를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흥행을 예측하지 못한 '소니'는 판권의 대부분을 넷플릭스에 넘기는 조건으로 재계약을 하게 되고, 넷플릭스는 퇴사한 인재들을 다시 불러들여서 '케데헌'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25년 6월에 첫방송을 한 지 두 달 동안 전세계에서 대흥행을 거두며 어마어마한 수익창출을 해낸 것이다. 어떤가? 넷플릭스가 오늘날의 맹상군의 기지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진 나라는 초 나라에도 야심을 뻗치게 된다. 이에 맞서 초 나라는 제 나라와 '합종 맹약'을 맺고 진 나라와 맞서게 되는데, 이 동맹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서 진 나라를 계략을 짜게 되고 초 나라 내부에서는 '친진파'와 '친제파'로 갈라져서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때 청산리 벽계수처럼 청렴결백한 인걸이 등장하는데, 바로 '굴원'이다. 굴원은 친진파들이 내세우는 '강대국의 논리'에 맞서서 초 나라도 진 나라에 못지 않은 강대국인데 어찌하여 당당히 맞설 생각은 하지 않고 진 나라와 굴욕적인 외교를 해야 하느냐며 반박을 하면서 끝까지 주장했다. 허나 초 나라의 임금 회왕은 '장의'가 나불거리는 세 치 혀에 속아넘어가 '작은 이익'을 탐하다 끝내 맹약을 맺었던 제 나라와 싸우게 되고, 진 나라에 굴종한 끝에 얻은 것도 없이 전쟁에서 참패까지 하며 수많은 영토를 진 나라에 빼앗기고 만다. 이렇게 굴원의 충정 어린 마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소탐대실한 상황속에서 굴원은 자신의 충정을 믿지 못하고 도리어 욕을 하는 왕과 신하들에게 보란 듯이 '멱라수'에 몸을 던지며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한다. 초 회왕과 친진파 신하들은 진 나라에게 휘둘릴대로 휘둘리다 전쟁에서도 지고, 땅도 빼앗긴 채, 뒤늦게 굴원이 했던 말이 모두 진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부끄러워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깨끗한 굴원은 참 인재였을까? '독야청청'이란 말이 있다. 혼자 깨끗한 척 해봐야 별 소용 없다는 뜻으로 곧잘 쓰이지만, 한결 같이 푸르고 깨끗하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 것 같은가? 물론 '전지적 시점'에서 모두의 속마음을 알 수만 있다면 굴원 같은 사람은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을 어찌 훤히 꿰뚫어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자신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더라도 제 잇속만 챙기는 속 시커먼 쓰레기 같은 놈들 때문에 '결백한 사람'마저 구렁텅이에 허우적거리다 개망신을 당하기 일쑤다. 분명 굴원의 청렴결백은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것을 만인 앞에 증명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해봐야 통할 리가 없다. 이익을 쫓는 사람에게는 더 큰 이익을 보여주어야 겨우 마음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굴원이 '친진파'들에게 제 나라와 맹약을 유지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점을 더욱더 적극적으로 어필했다면 초 나라가 겪은 참극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굴원은 그리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겨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 뿐인 목숨'을 아낌 없이 버리는 것으로 증명하려 했다. 이게 굴원이 대단한 점이면서 동시에 '깜냥 부족'이었다는 점이다.

만약 굴원이 좀 덜 깨끗한 사람이었다면, '친진파'가 저들의 잇속을 챙기려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매국 행위'를 하려는 것을 더욱더 적극적으로 파헤쳤을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이 더럽고 치사한 방법이었을지언정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더 앞섰다면 모든 능력을 발휘해서라도 '매국노'들의 저열한 비리를 밝혀내고 막아내는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굴원의 능력을 더욱더 출중하다고 칭송했을 것이다. 이는 뒤에 소개할 '인상여'와 '범저'의 활약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인상여는 조 나라의 충신이었고, 범저는 위 나라 신하였다. 하지만 인상여는 죽을 때까지 조 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진 나라가 감히 조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업적을 남겼지만, 범저는 위 나라 조국에서 헌신하기도 전에 능욕을 당한 뒤에 진 나라의 재상이 되어 위 나라 멸망에 앞장 선 인걸이었다. 허나 둘의 공통점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목적한 바'를 달성했으며, 죽어서도 치욕을 당하지 않고 존경받는 위인으로 남았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할 수 있다. 단지, '세 치 혀'의 재주만을 믿고 설레발을 치다가 최고의 영광을 누렸으나 비참한 말로를 겪었던 인재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더욱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굴원도 칭송받아 마땅한 인재일까?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본다. 개인적으론 존경받아 마땅하였기에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의 조국인 초 나라는 '굴원의 죽음'과는 별개로 엄청난 치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굴원의 뛰어난 능력으로 거의 완벽할 정도로 정확한 '예측'을 했음에도, 초 나라는 치욕을 당했다. 물론 굴원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굴원이 지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죄를 지은 것은 '매국노'들이다. 그러나 죄를 묻지 않으니 굴원을 칭송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굴원의 능력이 부족해서 매국 행위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굴원은 '동정의 대명사'가 되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으나 비극을 막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그래서 위인으로 손꼽기엔 살짝 아쉬울 따름이다. 그나마 '굴원처럼 청렴결백한 사람이 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권할 수는 있겠으나, '깨끗함'을 증명할 길도 없는데, 누가 굴원의 됨됨이를 본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개인적 성찰' 정도에서 권할 따름이다. 또다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말이다. 그걸 아름답다고 포장하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니 말이다.

마무리하며, 전국시대의 끝은 진시황의 천하통일이다. 그리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결정적으로 이룬 것은 바로 '인재영입'이었다. 진 나라가 빠르게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인재등용'에 어느 나라보다 앞장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재활용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임금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사기>를 읽으면서 수많은 인물들의 활약상을 엿보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뛰어난 인재는 '고귀한 신분', '엘리트 코스', '부유한 재물'에서 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춘추전국시대'였다. 또한, 뛰어난 인재는 '타고난 실력'보다 '끈질긴 노력'이 더 중요하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갈고 닦은 실력'보다 '그 실력에 걸맞은 훌륭한 인품'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하나라도 부족한 인재는 한결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도 꼭 명심해야 할 점이다. 고전적인 역사서에는 늘 이런 교훈이 담겨 있기에 유념하며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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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3 - 전국 칠웅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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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3 : 전국칠웅>  사마천 /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0)

[My Review MMXCVI / 휴머니스트 45번째 리뷰] 역사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수많은 이들이 묻는 질문이고, 그에 대한 해답도 제각각이지만, 꼭 하나로 귀결되는 의견은 있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쓰는 것이기에 완벽하게 주관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뒤이어 나오는 반박이다. 그래서 역사책은 될 수 있으면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게 쓰이지만,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역사관'을 고려하면서 되도록 객관적으로 읽으려 수고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역사책이 다 그렇기 때문이다.

그럼 사마천이 쓴 <사기>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고대에 쓰여진 역사책은 대부분 '국가기관'의 주도로 쓰여지기 마련인데, 사마천은 '국가기관'에서 쫓겨난(?) 처지에 있을 때 '개인적인 명예회복(?)'을 위해서 <사기>를 편찬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역사책과 비교해봤을 때에도 사마천의 개인적인 주관이 상당히 많이 서술되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비교분석을 하기 위해선 '동시대의 역사서술'을 여러 책을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요즘에는 웬만한 책의 주석에 그러한 비교분석이 수록되어 있는 책들이 많이 있기에 덜 수고스럽게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챌 수 있다. 다만, 주의할 점은 그런 '주석'조차 각각의 역사책을 읽고 분석한 저자들의 '주관'이 담겨 있을 수 있으니, 책에 쓰여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그러면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기>를 읽어야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으로 쓰여진 역사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수없이 읽고 검토하고, 비판하면서 얻을 수 있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의견을 살짝 어필해본다면, 같은 <사기>라도 적어도 3명의 다른 저자가 풀어쓴 역사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까닭은 공자가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三人行이면 必有我師라'고 말이다. 이는 세 사람이 있다면, 그 가운데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보다 못난 사람도 있을 것인데, 잘난 사람에게는 좋은 점을 본받고, 못난 사람에게는 나쁜 점을 경계한다면,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를 책에 적용하면, 첫 번째로 읽은 책은 '기준점'이 될 것이고, 나머지 책들은 그 기준점으로 인해 '상중하'로 평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훗날 자기만의 잣대가 될 지혜로 삼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최적의 독서법은 아닐 것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데, 언제 그 정보의 옥석을 일일이 가리며 살아가느냔 말이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실제로 그럴 시간도 없다는데, 딱히 반박한 답은 없다. 매우 옳은 지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학문을 하면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오픈AI 시대를 넘어 '자율형 인공지능(AGI) 시대'가 곧 도래한다고 하는데, 모든 판단을 인공지능에게 맡겨버리고 말 것이냔 말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똑똑해지더라도 '최종 판단'은 인간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더욱더 정교하고 완벽하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사회가 될수록 더 많은 옥석을 가릴 수 있는 혜안을 가지도록 요구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기왕 학업을 한다면 진심을 담아서 올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난 번에 '대만작가 장자화'가 집필한 <사기>를 읽었으니, 이번엔 '한국작가 이희재'가 쓴 <사기>를 살펴보려 한다. 두 책 모두 '청소년'을 독자로 상정하고 출간한 책이니 비교하기에도 딱 좋을 것이다. 먼저 대략적인 총평을 한다면, 사마천의 <사기>를 '이해'하기 쉬운 기준으로 책을 고른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무릇 역사책을 읽은 뒤에 감흥을 논하기에 앞서서 '내용이해'가 절대적으로 중요할텐데, 고대 역사의 내용을 읽고 난 뒤에 '무슨 뜻'으로 쓰인 것인지 이해조차 난해하기 십상인데 반해,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전7권)는 만화형식으로 쓰여져 있고, 주요 줄거리에서 바로 '주제'를 뽑아내어서 이해하기에 아주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챕터마다 맨 마지막에 '사마천의 평가'에 관한 내용이 짤막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사마천의 <사기>'에 담긴 대략적인 '편찬의도'가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고서 <사기>에 담긴 교훈과 더불어 사마천의 집필의도까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장자화의 사기>(전5권)는 중국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기>에 대한 감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고, '3분 키워드' 같은 토막내용을 통해서 '잘못 수록' 되거나 '잘못된 상식' 등의 오류를 바로 잡아주고 있기 때문에 사마천의 <사기>뿐 아니라 다른 역사책도 함께 읽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단지 아쉬운 점은 '대만작가'인 까닭에 중국청소년의 상식선만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때때로 '낯설게만' 느껴지는 대목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뜬금 없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런 '낯섦' 또한 다수의 정보가 쌓이면 깨알 정보가 되어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만, 이제 막 독서를 시작하는 청소년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런 군더더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 작가의 책을 읽을 땐 이런 점을 고려하며 읽으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자, 서론이 길었다.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3>의 내용이다. 중국의 고대사는 '하, 은, 주'로 시작해서 주 나라를 중심으로 한 봉건체제가 쭉 이어지면서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다가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로 통일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 이전에 삼황오제 시절부터 거론하고 있지만, 그조차 그냥 '하은주'로 퉁쳐도 무방하다. 암튼 대략적으로 기원전 11세기에 주나라가 건국되고, 도읍을 호경에서 낙양으로 옮긴 때부터 '동주시대'라 불리며, 이때를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기원전 770년 경이다. 이때는 수많은 제후국이 등장하는데, 그 중심에는 주나라 천자를 으뜸으로 모시긴 하지만, 일종의 허수아비 왕으로 여길 뿐이었고, 실질적인 권한은 '패자'라고 하는 강성한 제후가 실질적 권한 행세를 하던 시절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 뒤를 잇는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인데, 실질적으로 주나라도 사라지고, 전국칠웅이라는 일곱나라의 왕이 서로 패권다툼을 본격적으로 하던 시대라고 이해하면 좋다. 전국칠웅에는 '연, 제, 조, 위, 한, 초, 그리고 진' 있다. 이 시절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3권에는 크게 '병가', '법가', '종횡가'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병가로는 '무패의 전략가, 오기'와 '다리를 잃은 지략가, 손빈'을 다루고 있다. 오기와 손빈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는 패배할 줄 모르는 무서운 지략과 싸웠다 하면 승리를 꿰차는 용맹함까지 갖추고 있는 무장이었지만, 오기는 출세하기 위해서 부모도 모른 척하는 불효를 저질렀고, 심지어 헌신하는 아내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던 '냉혈한'이었다. 그런 그가 전쟁에 나가서는 장군의 몸으로 졸병과 한데잠을 자고, 거친 식사를 하며, 병든 병사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 병졸들의 신임을 한몸에 사서 오기 장군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는 강병을 조련하는데 능수능란한 재능을 선보인 인물이다. 한편, 손빈은 동문수학을 했던 친구 방연에게 속임을 당해 '두 무릎'을 도려내는 욕을 당하고, 불구의 몸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돼지똥까지 먹으며 미치광이 짓을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뒤에는 방연을 향한 처절한 복수를 해내는 처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인가? 완벽한 승리를 위한 완전한 계책을 엿보며 '전략적인 지혜'를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완전무결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하여 '자신의 신변'을 소중히 하는 데에는 써먹지 못하고, 최소한의 인간관계조차 어그러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병가의 사상이 승패에는 크게 효용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별다른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법가 사상가로 '상앙'을 선보였다. 법치주의를 내세워서 진 나라를 짧은 기간에 다른 제후국보다 월등히 앞선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데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런 상앙이 '자신이 만든 법' 때문에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다는 결말을 마주하면서 법치주의라는 것이 '실용'을 앞세우다보니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대원칙을 고수하다보면, 피치 못하게 '적'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음 왕위'를 이을 태자의 죄까지 공정하게 형벌을 내려서 법의 엄중함을 내세운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 상앙을 어찌 대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조량이란 인물은 상앙에게 조언하길, 덕을 행하고 힘을 멀리하라는 옛말을 들먹이며 상앙의 처지가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다고 귀띔해주지만, 상앙은 이조차 무시하고 '법치주의'만 고집하다가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법의 엄정함을 누가 탓하겠는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대원칙이 지켜지길 바라마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법이 '공정함'을 잃고, 더 나아가 '도덕'과 '인륜'마저 저버리는 상황을 만든다면 차라리 지켜지지 않는 것만 못한 경우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법을 악용해서 '소수'가 다수를 군림하는 악법을 자행하게 된다면, 그 나라는 필멸하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론 '종횡가'의 최후를 아주 잘 보여주었다. 바로 '합종연횡'의 대가로 잘 알려진 소진과 장의다. 사실 '종횡가'라는 이름도 소진이 주장한 '합종'과 장의가 펼친 '연횡'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든 이름이다. 이처럼 종횡무진하며 입을 놀려서 권세를 한 몸에 다 가지게 된 부류를 통틀어서 모두 '종횡가'라고 명명한다. 이들을 흔히 '유세객'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털털이 주제에 각국을 떠돌며 그럴 듯한 '입'만 놀려서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일례로 소진은 여섯 나라의 재상에 오르기 이전에 오랜 유학생활(귀곡자에게 수학했다고 함)을 한 뒤에 무일푼으로 고향에 돌아오니 부모도 실망하고, 형수는 백수라며 놀렸다고 한다. 그 덕분에 온 동네사람들이 소진이 가족친지에게까지 개무시를 당한다며 놀려대곤 했단다. 장의도 귀곡자에게 수학을 한 뒤에 고향에 돌아와 똑똑함을 자랑하다가 한 재상의 잔치에 참가했다가 도둑으로 몰려 죽기 직전까지 몰매를 맞았다고 한다.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뒤에 집에 도착해서 부인에게 '혀'가 온전한지 묻고서 '혀만 말짱하다'는 대답을 듣고서는 '좋다'를 연발했다고 한다. 소진과 장의는 이런 무시를 절치부심 삼아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는데 반석으로 삼았으니, 종횡가의 수완이 정말 좋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수완이 좋은 것과 그들의 최후가 일치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재주가 좋다면 운수도 좋아야 할 것을, 종횡가들은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그랬을까? 많은 역사가들은 그들의 신분이 비천한데서 원인을 찾곤 한다. 낮은 신분이었다가 졸지에 '벼락 출세'를 하니 기고만장하고, 그로 인해 주위에 적을 많이 만들어서 권력의 자리에서 내몰리는 순간, 참극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말재주가 좋은 사람의 최후가 모두 그러하다면, '좋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행복한 여생을 살기도 한다는 점을 보면 반박하기 쉽다. 그러니 종횡가들이 끔살을 곧잘 당하는 까닭으로 '말재주' 탓만 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그 좋은 '말재주'로 벼락 출세를 했다면, 자기 주위에 '자기 편'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음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결정적 원인이었을 것이다. 무릇 말재주가 좋은 사람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말재주를 끊임없이 써먹으며 말로써 설득하길 즐기곤 한다. 그로 인해 '권력자의 이익'을 챙겨주는 공을 세운다면 권력자는 종횡가를 중히 쓰곤 하지만, 반면에 그 종횡가와 '말씨름'을 했다가 패배한 이들은 어찌 했을까? 속으로 부글부글 하면서 복수를 다짐하거나, 때로는 종횡가의 주둥이에 휘둘려서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면 국가적 망신을 당하기 때문에, 그 원한 또한 결코 작지 않다. 그렇게 크고 작은 원한들이 쌓이고 나면 결국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종횡가의 사상'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다.

다음 책에는 '난세의 인걸들'을 소개한단다. 어지러운 세상에 걸출한 인물들은 과연 누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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