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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6 - 통일 제국 진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2월
평점 :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6 : 통일 제국 진> 사마천 /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1)
[My Review MMXCIX / 휴머니스트 48번째 리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무조건 외치던 때가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맞닥뜨린 '분단'에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분단이 더욱 고착되자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던 '냉전체제' 속에서도 우리는 통일을 소원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목놓아 외쳐대곤 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일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면 좋을 듯 싶다가도 안 해도 그만일 듯 싶을 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그렇다. 일단, 전쟁을 종식 시킬 수 있으니 반드시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지만,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한 갈등이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될 것이 뻔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어떤 것으로도 쉽사리 '하나'로 뭉치기 힘들 듯 싶기 때문이다. 그럼 통일을 했을 때 본격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지 '통일 제국 진나라'를 살펴보자.
기원전 221년 진왕 영정은 천하를 통일했다. 그는 가장 먼저 '시황제'라는 명칭부터 고쳐서 부르게 하고, 다음 황위부터는 '2세 황제', '3세 황제'라는 식으로 칭하라 했다. 시황제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지 11년 뒤에 죽고, 15년 만에 진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이나 했을까? 아니, 그에 앞서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토록 강대한 진나라는 왜 그렇게 일찍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말이다. 진나라보다 약했던 은나라와 주나라도 명백상만으로도 7~800년을 존속했는데, 강한 힘을 지녔던 진나라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자마자 쇠락해질 수밖에 없었느냔 말이다.
수많은 이들은 진시황의 폭정을 으뜸으로 꼽는다.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군현제를 실시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수했지만, 그러기엔 다스려야 할 영토가 너무 넓었다. 과거의 주나라가 봉건제를 실시해서 왕족의 친척에게 봉토를 나눠주고 알아서 다스리라고 했던 것도 사실은 너무 넓은 영토를 '천자' 홀로 모두 다스리기에 역부족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던 셈이다. 물론 주나라는 봉건제로 인해서 끝내 '춘추전국시대'의 대혼란을 야기하고 오랜 전란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진시황은 군현제를 실시하며 '1인 황제의 독재체제'를 공고히 했던 것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서 전국토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서 '분란의 씨앗'을 애초에 만들지 않겠다고 확고한 의지를 표방한 셈이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모든 업무를 직접 총괄하는 중책을 스스로 짊어지고 엄청난 '워커홀릭'처럼 일을 하는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중앙집권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 '군력의 분산'을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시황, 자신'이 영원한 삶을 누리는 불로장생의 비결을 얻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권력의 속성이 자신의 아들조차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때가 되면 물려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은 그 때가 오지 않았다고 부정하다가 끝내는 '폭정'을 일삼는 폭군이나 암군, 혼군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렇기에 권력이 '절대권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견제'할 수 있는 2인자가 반드시 존재하고 있어야 '건강한 권력행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진시황에게 그런 2인자가 있었을까? 승상을 지냈던 이사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사도 '권력'에 빌붙어서 단물만 빨다가 환관 조고의 계략에 동조하며, 진나라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고, 결국 자신도 조고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즉, '개인의 영달'만 충족되면 국가의 존망조차 어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가진 평범한 위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진시황도 살아생전에 이사를 크게 중용하면서도 끝내 '국정 파트너'로 신임받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혼자 다 해먹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시황은 어느 정도 선방했던 면이 없지 않다. 엄청난 워커홀릭으로 국가의 대소사를 홀로 도맡아 처리할 정도로 능력도 있었으며, 실제로도 살아 생전에는 '최초의 통일 제국'을 효율적으로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다스리는 것만으로 욕구충족을 할 수 없었던 진시황은 더 큰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불로장생'에 지대한 관심을 쏟으며 서복, 노생 등과 같은 방술사들의 언사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 신선이 되거나 진인이 되고자 엄청 노력(?)을 한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다. 영생을 살고 싶은 욕구가 '개인의 영달'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통일제국'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투철한 것이라고 좋게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방술사들에게 속임을 당한 뒤에, 이에 대한 분풀이를 애꿎은 '서적과 유생'을 향한 것이 탈을 부르기 시작했다. 바로 '분서갱유'다. 처음엔 허튼소리를 하는 방술사들을 혼쭐낼 목적으로 시작한 사안이 '이사의 농간(?)'이 더해지면서, 국정에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억누르는 폭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고작 '유언비어'를 막는 정도면 충분했을텐데, '사상검증'으로 확장시키고, '언론통제'까지 강행을 하니, 엄한 법만으로도 주눅이 들어있던 백성들에게 '산 사람'을 생매장시켜버리는 끔찍한 일까지 자행해버리는 실책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흉노의 침략'을 막는다며 시작한 '만리장성 축조'와 '여산릉 공사'로 인해 백성들이 고역에 시달리며, 원망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는 점에서 진나라는 일찌감치 망조가 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처럼 '평민들의 일자리'를 확충하는 차원에서 대대적인 공사를 했던 것이라면 아무리 고된 노역에 시달렸더라도 원망하는 목소리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백성들의 노동력이 '세금(역)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답이 없었다. 워낙 엄청난 대공사였기 때문에 엄청난 '노동력 확보'가 관건이었는데, 발빠르게 통일을 하느라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터를 누비며 다니다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다시 공사하러 끌려온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동력 착취는 심한 '반작용'을 부르기 마련인데, 진시황은 이를 무리하게 밀어붙였고, 역을 기피하는 백성들에게는 '사형'이라는 준엄한 법시행을 강행했으니, 백성들은 만리장성과 여산릉을 짓다가 죽던지, 짓지 않으려 도망가다 붙잡혀 죽던지, 이래저래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런 까닭에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진승과 오광도 만리장성 축조를 하기 위해서 차출된 백성들이었다. 그렇게 공사장에 정해진 시일내에 도착을 해야 하는데, 마침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불어서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일을 지체하게 되자 비가 그친 뒤에 아무리 빠르게 강행을 한다고 해도 '약조한 날짜'에 도착하기는 글러버리게 된다. 진나라 법에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도망을 가면 모두 사형을 시키고, '정해진 약조'를 어겨도 사형에 처하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죽을 처지에 놓인 진승과 오광은 다른 백성들을 부추겨서 함께 도망가자고 했고, 감독을 하던 인솔자를 죽이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는 기치를 내걸고, 스스로 '초왕'이라 칭하고 진나라에 반기를 높이 들었다. 하지만 진승과 오광은 오랫동안 저항하지는 못한다. 반란군 토벌대에 의해서 빠르게 진압 당했고, 모인 백성들도 '구심점'이 되어야 할 진승과 오광의 역량부족을 깨닫고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승,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진나라에 멸망했던 '여섯 나라의 백성들'이 들불처럼 일어나며 반란군을 조직하기 이르렀기에 중요한 시발점으로 인지하게 된다. 그 반란군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이가 바로 '역발산 기개세'로 유명한 항우이고, 그 항우에 힘을 보탠 세력이 바로 유방이었다. 이들은 '초나라의 왕족'을 수소문해서 찾아내 왕으로 추대했으니, 그가 바로 '초 회왕'이다. 이렇게 확실한 '구심점'을 갖추자 옛 초나라 지역의 백성들은 반란군에 합류했으며, 그 결과 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최초의 통일 제국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정리해보면, 춘추전국이라는 혼란한 시기를 맞아 백성들은 오랜 기간동안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위인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잘남'을 내세워 백성들의 평안을 보장하고,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겠다고 나섰으나 모두 실패하고 만다. 그 잘난 인물들이 바로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 가운데 성공한 이는 딱 한 명이다. 바로 '진왕 영정(훗날 진시황제)'이다. 그가 바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태평하게 만들 진정한 위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엄청난 대업을 달성한 것이고, 그의 업적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게 진시황을 칭송하는 까닭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그러나 이런 칭송은 오래 가지 못했다. 왜냐면 진시황이 연이어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먼저 너무 가혹한 '법집행'으로 인해 백성들은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다. 사소한 잘못으로도 사형을 당하기 일쑤였고,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연좌제'에 걸려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심한 것이 '오가작통법' 같은 것이다. 다섯 집을 한데 엮어 '연대책임'을 물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감시하는 살벌한 세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앙과 이사 같은 '법가사상'이 진나라를 빠르게 개혁시키고 성장시켜서 강대국으로 만드는데 큰 일조를 한 면도 없지 않지만, 가혹한 통치는 백성들의 삶을 다시 불안하게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그래서 진승, 오광의 난을 시발점으로 엄청난 반란군이 삽시간에 퍼져 나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 백성들의 삶을 옥죄던 것이 무리한 대공사였다. 진왕 영정이 열세 살에 등극할 때부터 만들기 시작한 '여산릉 공사'가 통일이 된 이후에도 계속 진행중이었고, 연이은 흉노의 침략으로 국력이 낭비된다는 지적에 오래 전부터 실시되고 있던 '만리장성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며 공사를 강행하면서 부작용도 크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로 만리장성 자체가 커다란 무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맹강녀 전설'에서 그 진실을 엿볼 수 있다. 남편이 만리장성 공사를 하러 간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자 여인의 몸으로 남편을 찾아나선 것이다. 그러나 맹강녀의 남편은 이미 힘든 공사를 버티지 못하고 죽었고, 관리들은 만리장성의 높고 두터운 성벽을 채울 재료가 마땅치 않자 죽은 백성들을 장벽 속에 파묻는 방법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맹강녀가 찾아왔고 밤낮으로 남편을 찾는 소리를 지르며 울먹이다 남편이 매장된 장벽 근처를 아내가 지나가자 장벽이 커다란 굉음을 내며 열리더니 맹강녀를 그대로 삼켜버리고 저절로 장벽이 원상태로 되돌아갔더라는 전설이다. 이런 일을 지켜보던 백성들은 모두 울음을 참지 못했고, 백성들의 통곡소리에 합창을 하듯 장벽속에 매장된 주검들도 일제히 한맺힌 통곡소리를 내니 그 끔찍한 광경에 공사를 더 진행할 수 없었더란다. 그래서 진나라 관료들은 백성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서 맹강과 맹강녀가 함께 매장이 된 장소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내며 원혼을 달래니, 밤마다 울리던 귀곡소리는 잠잠해졌단다. 그러나 해마다 그 날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귀곡소리가 울려퍼졌고, 그때마다 제사를 지내 백성들의 원혼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비단 맹강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결정타는 초나라 사람 항우의 거병이다. 역발산 기개세, 산을 뽑을 힘을 지녔고, 세상을 덮어버릴 기운을 지녔다는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한나라 사람 유방도 힘을 가세한다. 유방의 재능은 '난봉질'이다. 하지만 밉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여색을 밝히면 밝힐수록 온동네 사람들이 유쾌했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마다 그는 '인기절정'이었다. 이를 두고 유방의 관상이 최고라는 평을 하는 모양이다. 그런 그가 '진승, 오광'처럼 난을 일으키는 주동자가 된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구름 같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항우에게 끌리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유방에게 끌리는 마음은 아리송하다. 그에게 무슨 매력이 있기에 번쾌와 장량 같은 인물이 목숨을 걸고, 끝내 그를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건 마지막 7권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총정리해보자.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진시황의 통일 위업은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통일을 달성했기 때문에 향후 중국은 '통일과 분열'이라는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분열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금 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목표'를 심어준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를 하나로 묶었을 때 수많은 문제점도 함께 발현된다는 점을 계속 반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통일을 목표로 삼고, 수많은 문제해결을 시도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도 '통일 대박'을 실현할 수 있겠느냔 진지한 물음에 현명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면, '통일'은 우리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갈등과 숙제를 안겨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진시황처럼 통일을 강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통일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고, 산적한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고 권력독점을 시도하게 되면, 끝내 좋은 결말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