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5 - 일통으로 가는 길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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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5 : 일통으로 가는 길>  사마천 / 이희재 / 휴머니스트 (2020)

[My Review MMXCVIII / 휴머니스트 47번째 리뷰] 기원전 221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이 탄생한다. 하, 은, 주 이후 '춘추전국'으로 뿔뿔히 흩어졌던 제국을 다시 하나로 일통한 최초의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진왕 영정은 '최초의 황제'라는 뜻으로 '시황제'라 불렀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진시황제'가 바로 그다. 하지만 통일의 업적을 '진시황제'에게서만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그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기틀을 닦아 놓은 '진왕'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진 효공은 '상앙'을 등용해 변법을 시행해서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진 혜문왕은 '장의'로 하여금 연횡책으로 '소진'이 추진한 6국의 합종책을 차례차례 무너뜨렸다. 그리고 진 소왕은 '범저'를 기용해 '원교근공 정책'을 추진했고, 이를 기회로 삼아 '장평대전'에서 조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서 사실상 진나라가 일통을 하기 위한 기선제압을 다 이루었다. 이런 역대 왕들의 업적이 없었다면 시황제의 발빠른 '통일 업적' 또한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나라가 중국 최고의 통일 제국을 완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뛰어난 인재'를 바로 등용하고, '좋은 정책'이라면 바로 써먹을 수 있었던 '실용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전국칠웅들이 시도 때도 없이 야욕을 충당하기 위해 '전쟁'을 일삼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가장 절실했던 것이 바로 '뛰어난 인재'였다. 그 중에서도 진나라는 '상앙', '장의', '범저', 그리고 '이사' 등 역대 재상을 지낸 인물만 거론해도 얼마나 제대로 영입했고, 곧바로 정책추진을 실행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외국인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능력'을 펼 수 있는 곳이면, 그곳이 '조국'이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최고의 능력을 펼쳐냈었다. 그만큼 각국 간의 경쟁이 심화된 탓도 있었지만, '최고의 능력'을 선보이지 않으면 바로 죽임을 당하던 엄혹한 시절이기도 했다. 앞서 열거했던 상앙도, 장의도, 그리고 이사마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겨우 범저 한 명만이 '물러날 때'를 알고 천수를 누리다 병들어 죽었을 뿐이다. 단지 그들의 운수가 사납고 시절이 하수상한 탓에 그랬다기보다는, 그 시절에는 능력 있는 인재끼리의 경쟁도 심했고, 그 덕분에 나에겐 쓸모가 없더라도 남에게 좋은 일을 시켜줄 수 없다는 논리가 강하게 작용한 덕분에, 권력에서 내쳐지는 순간 그냥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 국가로서도 최고의 이득이라는 계산(?)이 나름 섰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비자>의 주인공 '한비'다. 그는 순자의 문하에서 이사와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학업경쟁에서는 이사보다 한비가 늘 우수했더란다. 그가 쓴 <한비자>는 상앙이 내세운 '법가사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우수하다고 정평이 났던 터라 진시황도 일찍이 '한비'와 만나 도움을 얻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비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 심한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수려한 '글발'에 비해서 어눌한 '말발'을 사용하는 모습에 실망한 진시황의 마음의 빈틈을 파고들어, 당시 재상으로 있던 이사는 한비를 향한 시샘을 감추고, '한나라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둬버리고 만다. 하지만 영민한 임금이었던 진시황이 한비를 첩자로 내몬 정황의 수상함을 눈치챌 것을 우려해서, 이사는 친구였던 한비에게 '독약'을 슬그머니 건네준다. 한비는 감옥에서 독약을 받아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잠깐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독약을 먹고 자결하고 만다. 이사는 친구였던 한비의 '꼿꼿한 성격'까지 간파하고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만이 자신이 살 길이라 여겼던 살풍경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중국인들이 고대사를 자랑하면서 대놓고 드러내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협'이다. 진시황이 통일의 위업을 발빠르게 달성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의협의 대명사'로 불리는 형가의 진시황 암살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형가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 장예모 감독의 중국영화 <영웅>을 이야기하며 자세히 풀어놓았기에 이번엔 패스하겠다. 형가 이야기를 빼놓고도 '의협'을 논할 수 있는 대목은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도 소개된 '위 신릉군'과 '초 춘신군'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나라를 구하고자 원군을 보내 '조, 위, 초 연합군'이 진나라가 자랑하는 무적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일은 사마천도 <사기>에서 매우 극찬한 대목이기도 하다. 사실 이 연합군이 탄생하기까지 진나라와 조나라 간에 벌인 '장평대전'은 너무나도 참혹한 역사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진나라의 장수는 '백기'였는데, 조나라 군대 40만 명을 산 채로 포로로 잡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승이었다. 이런 참패를 겪기까지의 과정도 참으로 긴 사연이 있지만, 여기선 결론만 얘기해서, 대승을 거둔 '백기' 장군은 수많은 포로를 재우고 먹이며 진나라로 돌아가는 길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여기고, 조나라 포로 40만 명을 산 채로 땅에 매장을 시켜버리는 잔혹한 짓을 벌였기 때문이다. 전쟁에 나서서 맞서 싸우다 죽이고 죽었다면 그저 치열했고, 힘겨운 승리였다고 평가하고 말았을 것을, 패배를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포로가 된 조나라 장병들을 저항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생매장'을 해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조나라 사람들의 원한이 어느 정도였겠느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진 소왕이 범저를 앞세워서 '원교근공책'을 밀어붙이며 6국을 차례차례 압박을 가하다 '장평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뒤에 조나라는 그야말로 허약해져서 후하고 불면 바로 꺼져버릴 것 같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가려린 목숨줄을 끊어버리기 위해 진 소왕은 조나라를 침공했는데, 조나라 군대는 무기가 떨어지자 나무를 깎아 창을 만들고, 화살이 떨어지자 돌을 손에 들고서 진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다. 또한 조나라 백성들은 성 안의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자 서로의 아이를 바꾸어서 배고픔을 달래며 처절하게 버티고 또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위나라의 '신릉군'과 초나라의 '춘신군'은 조나라와 합종 약속을 맺은 것을 주장하며 속히 '원군'을 보내자고 주장하지만, 강대국 진나라의 눈치를 보던 위나라와 초나라의 '친진파 세력'에 의해서 원군 보내는 일을 망설이게 된다. 그러자 신릉군과 춘신군은 '의협'을 내세우며 자국의 군대가 아닌 '개인적인 식객들'을 동원하여 이른바 '의로운 군대'를 조직해서 위나라와 초나라의 임금과 반대세력을 적으로 만들면서까지 도우려 한다. 그렇게 '조, 위, 초 연합군'이 조성되자 낙승을 거둘 것으로 여겼던 진나라 군대는 거듭 패배를 당하며 물러나게 된다. 이렇게 조나라는 신릉군과 춘신군의 '의협'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다.

그런데 이게 정녕 위나라와 초나라에 도움이 되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조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한 진나라 군대는 방향을 틀어서 초나라를 향했고, 그로 인해 초나라는 엄청난 영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진왕 영정(훗날 진시황제)이 13살에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 10여 년 뒤인 기원전 230년 한나라, 기원전 225년 위나라, 기원전 223년 초나라, 기원전 222년 조나라와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차례차례 멸망하고 만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인물열전'을 통해서 의협을 높이 사고, 의로운 일에 대해 호평을 남기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렇게 높이 샀던 '의협의 결과'는 결국, 조국의 멸망만 앞당겼을 뿐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분석하는 도구로 '현미경'과 '망원경'을 예시로 드는 까닭이 있다. '부분'을 강조할 때와 '전체'를 아우를 때 '같은 역사'일지라도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형가도 칭찬하고, 진시황도 칭찬하는 대목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형가의 의협도 좋아보이고, 시황제의 일통 위업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원경으로 전체를 살펴보면, 형가는 암살자로 시황제를 죽이려 들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옳은 것이냔 말이다. 양쪽 모두를 극찬한 사마천의 관점에서 보면, 좋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을 암살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훌륭한 사람이 좋은 사람에게 죄를 물어서 죽여버리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평가 기준은 다르다. 그때 그때 달라지는 기준을 기준이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이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랬다 저랬다 헷갈리게 서술하긴 했지만, 이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 사마천에게 웬지 더 많은 정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뭐, 나중에 서술되겠지만 '이릉전투'에서 항복을 한 장수를 편들다 죽음보다 치욕스런 '궁형'을 받게 된 사마천이 그 '항복한 장수의 아버지'도 편들면서 엄청 훌륭한 인물이라고 서술한 내용을 읽다보면, 사마천, 자신이 억울한 형벌을 받았다는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특정 인물에게 도에 넘치는 과찬을 하는 느낌마저 들곤 한다. 그렇게 뛰어난 업적 같지는 않은데도 칭찬에 칭찬을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 책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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