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 사이언스 -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서가명강 시리즈 2
홍성욱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가명강 2] <크로스 사이언스 :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홍성욱 / 21세기북스 (2019)

[My Review MMLXXVII / 21세기북스 41번째 리뷰] 책 제목만 보고서 짐작하기로는 '이과'의 과학과 '문과'의 인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교과적 지식'을 다루는 과학이야기인줄 알았다. 나 어릴 적만 해도 '문과'는 사탐을, '이과'는 과탐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수능세대'가 아니라 '학력고사세대'인 탓에 사탐/과탐으로 불리는 '영역별' 분류가 아니라, '사회/과학' 등등의 '과목별' 분류로 대입시험을 치뤘던 탓에, 학과적인 분류는 더욱 그 '경계'가 뚜렷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라는 학문이 꽤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회가 과학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반대로 과학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단다.

이렇게 생소해 하는 나에게 '융합'이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많이 보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분야만 전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다른 하나'를 접목시키거나, 또는 '여럿의 서로 다른 분야'를 접목시켜서 우리에게 당면한 중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주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과학'과 '인문', '예술'을 융합시켜서 우리가 직면한 복합적인 '사회적 조건'을 충족시키거나, 거기에서 생겨난 여러가지 난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어렵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보자. 일찍이 왓슨과 크릭에 의해서 '유전자(DNA)의 구조'가 판명되었고, 그 유전자에서 원하는 부분을 잘라내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를 '유전자 가위'라고 하는데, 근래에는 '유전자 가위'로 특정 유전자를 잘라내기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잘라낸 유전자를 다른 생물의 유전자에 붙이는 기술도 '유전학'에서 연구중에 있긴 하지만, 유전자 가위만으로도 충분히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잘라서 제거함으로써 치료가 힘든 '난치병'이나 '불치병'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기술적으로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난치병'과 '불치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들이 상당히 줄어 들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장밋빛 미래가 그려지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과학기술학'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과연 이 '유전자 가위'라는 기술을 광범위하게 쓰게 될 경우에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고민과 비판이 시작되고, 문제가 예측되는 순간 '비난'이 쏟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전자 가위'라는 것이 자연상태에서는 극히 희박하게 발생(돌연변이)되는데 반해서, 인간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유전자 가위'로 특정 유전자를 잘라냈을 경우에, 그 이후, 어떤 일이 발생할지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혹여 되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돌연변이'를 촉진시켜 '또 다른 인류'가 발생하는 일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윤리도덕적 비난'으로 시작하여 '종교적인 차원'의 목소리까지 쏟아져 나와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과학기술학'인 셈이다.

한때 우리는 '과학만능주의'라 하여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근대 이후, 인류는 '신 중심 사상'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이성'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었다. 정작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신의 형상'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성경>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에 심취해서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여기는 오만이 가득했기에 그랬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학만능주의'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소리도 무색할 정도로 겸손(?)을 떨고 있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의 능력이 초라할 뿐이라는 사실도 더욱더 명백해졌으니까 말이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 사실이다. 아주 작은 '바이러스'조차 어쩌지 못하고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현장에서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아주 강렬하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백신'을 조속히 만들고 대량공급체계를 갖추면서 '엔데믹'을 맞이하긴 했지만, 또 어떤 바이러스가 창궐해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박멸해서 '엔데믹'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면역체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시일이 지나자 겨우 안심할 정도의 수준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환자가 나오고 있으며, 해마다 '백신'을 준비해서 전세계 사람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접종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 '유행'을 완화시키며 통제할 수 있는 정도로 심각성을 낮춘 것일 뿐이다.

특히나, 자연재해는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완벽히 막아낼 수는 없다. 물론 아무리 큰 재앙이 닥쳤고, 큰 피해를 입었더라도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고 '피해복구'에 뛰어들어서 빠르게 원상회복을 할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자연재해가 재앙을 불러오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크로스 사이언스> 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최신 정보를 접하고 완벽히 이해한 뒤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는 없다. 과학이 결코 쉬운 학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학기술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접했다 하더라도, 그 정보의 '사실과 가치'를 빠삭하게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도 절대로 많지 않다. 왜냐면 과학기술이 상당히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큰 어려움은 새로 나온 '과학기술'을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까지 학문의 수준을 높였다하더라도, '과학기술의 발전속도'가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그 노력이 헛수고가 되버리기 일쑤다. 그러니 언제 공부해서 얼마나 도움을 얻을 수 있겠냔 말이다. 그러므로 공부에 전념해야 할 사람은 '전문가'의 범주로 한정되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그 전문가가 쉽게 풀어서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만 되어도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이 전하는 사회문제 해법에 대한 '사실과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바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크로스 사이언스'에 대한 관심이 꽤나 높은 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찬반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놓으며 참여하기도 했다. 바로 '과학소설'을 통해서 말이다. 이를 테면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수많은 영화속에서도 관심과 참여를 할 수 있었다. <가타카>, <로보캅>, <메트릭스>, <옥자>, <AI> 등등 이 책에 거론한 소설과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전부 다는 아니어도 한두 작품은 이미 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어떤 내용이었고, 어느 점이 문제였으며,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그로 인해서 생긴 문제점은 무엇이었고, 그 문제점을 해결했거나, 그 반대일 경우에 우리 인류가 당면한 미래는 '유토피아'였는지, '디스토피아'였는지,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 다음에는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그 정도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크로스 사이언스'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어떤 '사실'에, 어떤 '가치'를 교차시키는 일은 서로 다른 '두 문화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일이라고 저자인 홍성욱 교수는 지적한다. 우리가 이해한 '과학적 사실'에, 우리가 생각하여 내린 '인문학적 가치'를 접목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뭐,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아무 문제도 없이 살기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싹다 바뀐 세상에서 '도태'되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참여조차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삶'을 연명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햄버거 하나 '주문'하고 싶을 뿐인데, 매장 내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키오스크'만 나란히 나열되어 있는 공간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 같이 말이다. 세상은 참으로 빠르게 변해간다. AI가 가져올 변화는 더욱 극심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과학기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할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부의 배신 -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
윌리엄 데레저위츠 지음, 김선희 옮김 / 다른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공부의 배신 :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  윌리엄 데레저위츠 / 김선희 / 다른 (2015) [원제 : Excellent Sheep (2014)]

[My Review MMLXXVI / 다른 2번째 리뷰] 어쩌다보니 근래에 쓰는 리뷰들이 죄다 '절판'인 책이다. 애초에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뭐 그렇다고 '최신판'의 책을 리뷰한다고 주목 받을 일도 없을 테니, 딱히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좋은책'은 언제고 다시 꺼내 읽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 책 <공부의 배신>은 부제가 더 인상적이다. 최고 명문대학으로 손꼽히는 '하버드생'을 바보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 책은 '교육'에 대한 비평이 담겼다. 그리고 우리는 '교육의 미래'를 걱정하는 만큼 이 책에 주목해야 할 의무도 있다는 의미다.

이미 2002년에 출간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다치바나 다카시, 청어람미디어)에도 비슷한 제목이 적혀 있어서 내용도 비슷할 것 같았지만, 크게 달랐다. 다카시는 일본 최고의 성적을 자랑하는 동경대생이 '현대교양'의 태부족으로 인해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상식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헛똑똑이가 된 현실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최고의 성적을 자랑하는 뛰어난 인재이지만, 실상은 '시험문제 잘 푸는 기계'에 불과하고, 기본적인 상식 수준에서는 초등학생보다 못한 비인간적(?)인 실태를 고발한 책이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당시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서 공부하던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교양의 차원'에서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통섭적인 교양을 쌓아나가는 것을 당부했다.

이에 반해 <공부의 배신 :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에서는 '명문대'를 졸업해서 '엘리트 집단'에 소속되어 '사회 권력층(기득권층)'을 형성해서 자기들 '소속 집단'의 무한 이기주의를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실태를 고발하면서, 오늘날 미국사회가 민주사회에서 퇴보하고 되려 '귀족사회(?)'로 회기하려는 사회분위기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잘난 사람이 저들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명문대'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한 것에 대해서 비난할 것은 없다. '경쟁 사회'에서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경쟁 사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쟁에 패배한 약자'들의 하소연(?)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도 상당 부분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니 경쟁에서 패배하고 징징거리는 찌질이가 되지 말고, 실력을 발휘해서 '승자'가 되어 당당히 '승자의 권리'를 누리며 살 생각을 하라는 이야기가 더 솔깃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애초에 그 '경쟁'이라는 것이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방법에 근거하고 있다면 어떨까? 소위 '명문대 교육'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중추 역할을 하지 못하고 '계급적 사회'를 지향하고, '계급 사회'를 고착화 시키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면, 과연 '공정한 경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명문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그 치열한 경쟁 시스템을 이겨내고 사회 지도층에서 활약을 하면서 '학창 시절'에 배웠던 내용이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끼고, 실상 '명문대 교육'이라는 것이 너무도 공허한데, 학생 때에는 왜 그토록 죽어라 공부를 강요(?) 받았는지 알 수 없다고 소감을 쏟아내고 있다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명문대'를 졸업하고 난 뒤에야, 그 '과도한 경쟁'과 '치열한 교육'을 강요받은 사실이 '특권의식'을 갖게 만들고, 그 '특권을 세습하려는 엘리트 집단의 무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우리 교육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좌절감마저 들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는 '똑똑한 양(Excellent Sheep)'이다. 무려 '하버드'를 졸업한 출중한 인재들을 순종적인(?) 양떼에 비유하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명문대'에서 뭘 배웠기에 그들은 불의에 저항하길 포기한 '순종적인 양'이 되고 만 것일까? 사실 엘리트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다. 똑똑해서 능력이 출중한 것 같은데 '사회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저들만의 특권을 지키는데에만 그 똑똑함을 허비하는 멍청이(!)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비단 이런 문제는 미국 사회에서만 드러나는 현상도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 일컫는 나라의 상류계층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던 비리(!)였기 때문이다. 아니, 비단 '선진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후진국'에서는 더 심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들은 '똑똑한 양'이 되어 할 줄 아는 일이 '특권계층'끼리 교잡을 통해서 자신들의 자식들도 '명문대'에 입학해서 똑똑하지만 순종적인 양이 되길 기꺼워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쌓은 부와 명예(?)를 대대손손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문대'에서 특별한 것을 배울 필요도 없고, 가르칠 이유는 더더군다나 없게 되었다. 저들이 원하는 바는 '아무나' 입학할 수 없는 '명문대'를 유지해서, 그곳을 졸업한 것만으로도 부와 명예를 손쉽게(?) 거머쥘 수 있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문대'를 졸업한 똘똘이(!)들 치고 제대로 된 인재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런 '저항정신'으로 가득 찬 학생을 졸업 시킬 의도조차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 교육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셈이다.

이런 '명문대'가 천지빼깔이라는게 이 책이 강조하는 바다. 이런 실상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학생들이 자신들이 배우고 있는 '고강도의 학업'을 수행하고서 얻는 것이 고작해야 공허감과 허무함이라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도대체 졸업한 뒤에 써먹지도 못할 지식을 머릿속에 억지로 집어 넣는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해야만 하는가? 왜 학교는 학생들에게 '순한 양'이 되길 원하고, '과도한 장애물'을 설치해서 딴 생각(!)조차 할 여유를 주지 않는가 말이다. 마치 '1등급 목장'처럼 순종적인 양떼를 대량생산해내기 위해서 대학 당국은 최선을 다하고 있고, 학생들은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공부와 성적에만 내몰려 씨름하게 만들 뿐인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 길들여진 '순한 양'을 우수한 졸업생으로 명문대생을 배출해낸 뒤에 '엘리트 집단'에 소속된 일원으로 잘 적응하게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일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나라의 '엘리트'라고 불리는 집단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보란 말이다.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비상계엄'조차 함부로 선포하고, 그런 무도한 비리를 덮기 위해서 모든 '국가 시스템'을 총동원해서 비리를 감추려 한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국가와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저들만의 세상'을 만들려 했고, 국가가 파탄이 나서 전쟁이 벌어지고 온 국민들의 안정적인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어 버려도, 저들 집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들만 살 궁리'를 하고 있었지 않느냔 말이다. 지금의 미국사회도, 일본사회도 마찬가지다. 아니, 전세계가 이런 '헛똑똑이'들을 엘리트라고 철떡 같이 믿고 있고, 그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비인간적인 행태를 일삼는 '엘리트 집단'을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 정상화'를 어떻게 해야 이런 비인간적인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고도로 발달된 사회일수록 '엘리트 집단'에 의지하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도덕적 해이'에 빠져들지 않고, '몰상식한 짓'을 부끄럽다고 여기게 만드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테지만, 과연 그런 교육을 어떻게 시킬 수 있단 말인가? 부와 권력을 다 가지고 있는 그들인데 말이다. 그저 그들의 양심에만 맡기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적어도 '민주사회'의 건전한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다면 결코 그런 지식인들을 방치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리더 교육'이 아닌 '시민 교육'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시민 교육'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학벌 사회'가 심화되면서 이런 '시민 교육'은 퇴색하고, 저들만의 세상을 구축할 수 있는 '리더 교육'에 매진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특권의식을 교묘하게 심어주기까지 한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확실한 경험이 바로 '명문대' 입학과 졸업이다. 대학에 서열을 매기고, 그 서열 순위에서 가장 높은 '탑클래스'에 올라서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환상(?)을 당연하게 여기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자행하는 꼴이다. 이것부터 타파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경쟁'을 혁파의 대상으로 삼고, '평준화' 시키는 것으로는 발전은 고사하고 퇴행하게 만들 뿐이다. 경쟁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경쟁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모든 것을 누릴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시민 교육'이다. 아무리 잘났어도 '시민이 누리는 권리'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얻은 성과도 인정하고 맘껏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주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혜택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결격사유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일체의 것을 허락치 않고, 만약 부도덕적인 것을 특권처럼 누리려 한다면 뭇매를 달게 맞아야 함을 각인시켜주는 '도덕 교육'을 더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의 선진국들이 동양사상 가운데 '유교'에 관심을 두는 까닭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유교사상에서 저들이 겪고 있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으려 하고 있는 셈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언급은 전혀 하고 있지 않지만, '엘리트주의'가 몰고 오는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럴해저드'를 혁파할 수 있는 사상적 대안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는 데에는 공감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의 교육 문제에 깊이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훌륭한 교수와 현명한 학생들이 아직 많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힘들게 한 '양심고백'이 헛되지 않았다는 응원이라도 해주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쾌자풍 1 - 쾌자 입은 포졸이 대륙에 불러일으킨 거대한 바람 쾌자풍 1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쾌자풍 1 : 쾌자 입은 포졸이 대륙에 불러일으킨 거대한 바람>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V / 해냄 3번째 리뷰] 리뷰가 많이 늦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근래에 지독한 '슬럼프(?)'를 겪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더위'를 먹은 탓인지 좀처럼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닌데, 읽는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기도 했고, 암튼 그랬다. 덕분에 한 일주일 가량 'K-POP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만 줄기차게 보고 또 보았다. 헌트릭스의 '골든'과 '테이크 다운', 사자보이즈의 '소다팝'과 '유어아이돌'만 온종일 흥얼거리며 멍 때리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벌써 한 달 내내 그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이우혁의 역사소설(?) <쾌자풍>이다.

뭐, 이우혁 소설을 리뷰하면서 <넷플릭스>에서 대박을 터뜨린 '케데헌'을 이야기하는가 싶지만, 묘하게 '연관성'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직접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직접 언급하기도 했지만, 한국인과 중국인의 '정서(?)'가 비슷하면서도 확연하게(!) 구분되는 무엇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충(忠)'과 '의(義)'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는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뭔가 감이 오시는 분들이라면, 국가 차원의 문제가 발생하고 '국가 위기'에 당면했을 때,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충'을 앞세워서 개인적인 희생이 따르더라도 일단 '국가의 위기', 달리 말해 '모두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서 일치단결 하는데 반해서, 중국인들은 국가적인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그것이 '개인적인 의리'와 연관이 없으면 일단 '나몰라'라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면하고 난 뒤에야, 홀연히 등장한 '영웅(?)'이 있어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맞서 싸우는 희생적인 모습을 재확인(!)하고 나면, 그때서야 '의리'를 내세우며 단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런 미묘한 차이가 '제삼자(특히,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국인'과 '중국인'은 명백하게 그 차이점을 알아채고, 서로를 구분할 수 있고, 그 미묘한 차이점 때문에 한국인과 중국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도대체 '충성'과 '의리'의 차이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충신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변치 않고', '흔들림 없는' 꼿꼿한 성정을 떠올린다. 이는 동아시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잘 보여주듯 죽으면 죽었지 '불충'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한다. 허나 중국인들은 왕조가 짧고 자주 바뀌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처럼 꼿꼿한 성정의 충신 이미지를 찾기가 힘들다. 그보다는 '실리'를 따지고 '개인적인 의리'를 따지면서 그때, 그때에 따라서 '다른 말(?)'을 내세우는 등, 우리가 보기에는 충신치고는 변덕이 죽 끓듯 하다 싶은 사람조차 '충신'이라고 하는 등 쫌 그렇다. 대신에 '의리'를 앞세우다보니 누군가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펴며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런 의리(?) 지켜야 중국인답다는 것인지 모를 엉뚱한 모양새를 보이기도 한다. 뭐, 극단적이긴 하지만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만물중국기원설' 같은 것들이다.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막무가내 식의 '억지주장'을 곧이 믿을 사람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어떤 중국인이 그게 맞다!'고 억지주장을 한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맞다!'고 동조하는 것이 최고(?)의 '의리'라고 여겨서 13억 중국인이 한 목소리도 '헛소리'를 주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걸 보는 중국인들은 대다수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조금만 생각을 하면 '틀린 주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일단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중에 '수정'을 하든, '사과'를 하든, 그건 나중일이고, 일단은 중국인끼리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틀린 것을 알면서도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싶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팩트폭격'을 날리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틀린 건 틀린 거고, 맞는 건 맞다고 '옳은 소리'를 곧잘 한다. 그리고 이런 한국 사람들의 성향은 '충성'에 충실한 모양새를 잘 보여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절대 '충성'을 다하고, 옳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 성정이야말로 '한국인답다'고 할 수 있다.

암튼, 요즘 '케데헌'이 인기몰이를 하며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다. 무슨 일에서건 '충성'을 다하는 한국인의 문화가 전세계인들의 눈에 보이게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에 반해서 '의리'에 따르며 경우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스런(?) 중국인의 문화에는 공감하기 힘들어하고, 더 나아가 '억지주장'을 하면서까지 한국문화를 깎아내리려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한국문화'가 원래는 '중국의 것'이었다면서 은근슬쩍 숟가락 얹으려는 속셈을 뻔히 드러내고, 심지어 '중국의 것'을 빼앗아(?) 갔으면서도 중국에 고마워하지도 않는 '한국사람들'이 너무 뻔뻔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고 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도 당한 서양인들조차 중국인들의 뻔뻔스러움과 억지주장에 두손 두발을 다 들고 만 모양이다.

자, 그럼 이제 이 소설의 내용을 소개하겠다. 저자가 밝혔듯이 이 소설은 '무협소설'이 아니라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역사적인 사실(팩트)에 허구적인 '픽션'을 가미한 '팩션 소설'이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시대배경'은 15세기 명나라에서 벌어진 '탈문의 변'을 주요 사건으로 삼았다. '탈문지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벌어진 '토목의 변'을 알아야 할 것이다. 1449년 명과 몽골(오이라트)이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명 황제였던 '정통제'가 간신 왕진의 말에 속아 전투에 참전했다가 50만 대군이 몰살을 당하고 황제인 '정통제'마저 포로로 잡혀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 일을 '토목보'에서 벌어진 사건이라하여 '토목보의 변', 줄여서 '토목의 변'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황제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 명나라는 몽골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정통제를 앞세우고 몽골군대가 북경으로 밀고 온다면 명나라 군대가 아무리 많더라도 '황제의 목숨'을 두고 어찌 반격이라도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명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그런데 이때 충신이 등장해서 사태를 수습했으니, 다름 아니라 '새 황제'를 내세워서 포로로 잡힌 정통제를 대신하게 한 뒤에,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새 황제가 바로 정통제의 이복동생인 '경태제'다. 몽골군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굳건히 북경을 수비하는 명나라 군대에 막혀서 더이상 진군하지 못하자, 쓸모가 없어진 '정통제'를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명나라로 되돌려 보낸 뒤 철군하고 만다. 그래서 명나라는 졸지에 '황제'가 두 명이 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경태제를 옹립한 충신은 정통제를 '상황'으로 삼고 폐궁시켜 버리지만, 병약했던 경태제가 제위 8년만에 큰 병에 걸리자, 이를 기회로 삼은 정통제가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황제에 자리에 등극해버리고 만다. 이때가 1457년이었고, 이 사건을 '탈문의 변'이라고, 새로 연호를 '천순'으로 내거니, 그가 바로 '천순제'다. 한 명의 황제가 '정통제'와 '천순제' 두 차례나 황제의 자리를 앉게 된 셈이다. 이런 사태를 맞아서 명나라의 조정에는 어떤 파문이 일었겠는가? 누가 '충신'이고, 누가 '역모'를 한 것인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고변하는 일대 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암튼, 이때 명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충신이 바로 '우겸'이란 인물이다. 허나 천순제는 '우겸의 공'을 높이 사기에 앞서서 자신에게 '의리'를 져버렸다고 하여 황제에 재등극하고 난 뒤에 바로 처형시켜 버린다. 만약 천순제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우겸을 높이 평가하고, 청렴결백하고 사심 없었던 신하의 충심을 높이 평가하기만 했더라도 명나라는 큰 혼란을 겪었음에도 큰 어려움 없이 기강을 바로 잡아 태평성대를 누릴 수도 있었겠지만, 간신에게 놀아나던(?) 똑똑치 못한 임금이었던 '정통제'였기에, '천순제'도 변변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왕조시대에 '두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것을 곱게(?) 봐줄 수는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요는 이런 역사적 관점을 두고도 한국인과 중국인의 '인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통제와 경태제라는 '두 명의 임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명'이라는 나라가 맞이한 어려움을 해결한 것에 초점을 맞춰서 '국난극복'의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를 불충이라 여겨서 우겸을 충신 중의 충신으로 평가하겠지만, 중국에서는 아무리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불충'인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고, '의리'적인 관점에서도 정통제를 버리고, 경태제를 내세운 행위의 부당함을 내세워 처형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평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정난과 반정의 역사'를 봤을 때, 두 임금을 섬긴 이를 '충신'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다. 허나 계유정난의 공신들이나 인조반정의 공신들 가운데 '국가에 끼친 손익 평가'를 거쳐서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이런 평가에 있어서 '개인적인 의리'를 당연히 고려사항이 아니다. 오직 '국가를 위한 우국충정'만을 평가의 잣대로 삼을 뿐이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에는 이게 좀 애매한 예가 많은 모양이다. 뭐, 중국에서는 그런 '잣대(기준)'가 일반적일 수는 있겠지만, 한국인의 기본 잣대로 보면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고평가되고나, 정반대로 저평가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모양이다.

저자 이우혁은 이를 <쾌자풍>의 소재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포졸 복장인 '쾌자'를 입고서 대륙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이다. 뭐, 1권의 내용에서는 아직 '대륙'으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상황이고 '변죽'만 잔뜩 늘어놓은 지루한(?) 장황설로만 가득했다. 특히 조선 평안도 위화 고을의 포졸 '지종희'의 성격 묘사가 이야기의 2/3를 차지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특별한 능력이 있지는 않지만 중국의 무술 고수를 단 한 번의 몽둥이질로 제압해버리는 실력(?)을 선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자도 익히지 못하고 <소학>을 겨우 땐 까막눈(?)이지만 모국어인 조선말을 비롯해서 '북경어', '여진말', '몽골말' 등등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천재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이렇게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지 포졸'이 벌이는 일대 사건들마다 일사천리로 풀어내는 '해결사'의 면모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종 잡을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착한 성정을 지닌 캐릭터다. 그렇다고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냐 싶으면, 하는 말마다 '쌍욕'을 달고 살고, '품행' 또한 날건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도 않는다. 쉽게 말해 '말'보다 '주먹'이 먼저인 대책 없는 왈패 기질을 타고 났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망나니 같은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지만, 절대로 '국익'을 해치는 범죄나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는 짓을 저지르는 일은 극도로 조심하고 다닌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선'을 넘지 않는 아슬아슬한 맛이 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아니라 '그 이하'의 행동을 일삼는 천덕꾸러기라고 보면 딱 좋을 인물이다. 암튼, 그가 벌인 말썽 때문에 '지 포졸'은 조선을 떠나 중국 명나라에서 막중한 임무를 띠고 활약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2권에서부터 본격적인 '대륙적 활약'을 선보여줄텐데, 크게 기대는 안 하련다. 하는 짓거리가 대략 난감할 것이 뻔해서 말이다. 그래도 결코 부끄러운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선'을 분명히 지키면서도 '묘수와 꼼수'를 오가며 대대적인 활약을 펼쳐보일 것이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권으로 뚝딱 누구나 쉽게 읽는 역사이야기 - 선생님이 쓴 누구나 쉽게 배우는 우리 역사와 문화
권혁운 지음 / 가온누리(도서출판)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권으로 뚝딱 누구나 쉽게 읽는 우리 역사이야기 : 선생님이 쓴 누구나 쉽게 배우는 우리 역사와 문화>  권혁운 / 가온누리 (2024)

[My Review MMLXXIV / 가온누리 1번째 리뷰] 이 책의 글쓴이는 '지적장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이른바 특수학교에서 장애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셈인데, 일반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학습이 느리고 힘겨워 하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나도 논술수업을 진행하면서 종종 '역사책 수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역사의 개념은커녕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시켜주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역사수업'은 그저 외우기만 잘 하면 되는 '암기과목'이라고 여기기 십상이라,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단순 암기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접하게 되면,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구한 전통을 어찌 다 외울 수 있겠냐고 반문도 하지만, 그걸 제대로 이해하는 학생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 힘든 일을 하시는구나 하고 거듭 존경스러워 할 따름이다.

잘 아시겠지만, 한국의 역사는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고대 4대문명이라고 일컫는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고작 4000년 전에 불과하고, 이집트 문명은 3500년 전, 인더스와 황허 문명은 고작해야 2500년 전 문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도 역사 시대별 구분은 고작해야 7개 밖에 되지 않는다. 고조선으로 시작하여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그리고 대한민국이다.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일본은 섬나라여서 특수한 경우라고 치고, 가까운 중국조차 왕조국가만 27개인데 말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한국 역사의 자긍심'을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서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수난의 역사'만을 강조하곤 한다. 외부의 침략도 많았지만, 내부의 혼란도 참으로 많아서 백성들이 참 살기 힘들었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실 '천년 왕국'으로 널리 알려진 통일신라만 해도 '나당전쟁(670~676)' 이후 후삼국으로 갈라지기 전(9세기 말)까지 200년 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별다른 외세의 침략이 없었고,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며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런 혼란은 세계 어느 왕조시대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커다란 수난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니 이런 시기를 '평화롭다'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략(11세기)과 몽골의 침략(13세기) 사이 200여 년간의 평화가 있었고, 조선이 건국(1392년)된 뒤부터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기까지도 역시 200년 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또한 '병자호란(1637년)' 이후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도 200여 년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한 번 왕조가 들어서면 기본적으로 5~600년 정도는 유지한 것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가까운 중국만 해도 200년도 채우지 못하고 망해버린 왕조가 얼마나 많으냔 말이다. 그러니 '한국의 역사'를 마냥 '수난의 역사'라고만 퉁치고 넘길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 평화로운 기간 동안에 이룬 '역사적 업적'에 대한 평가도 우리가 새롭게 조명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은 'K-컬처(한류열풍)'로 전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음식이나 상품, 문화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앞에 'K-'만 붙이면 아주 좋은 것으로 인식될 정도를 넘어서 '고급'이라는 인상마저 심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좋았던 것을 우리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얼떨떨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역사를 다시금 되돌아보면 '과거'에도 분명 그런 '멋진 역사'를 가졌던 때가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옛날 '왜나라'는 백제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제의 모든 것을 숭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로 인해 '한반도'에서 왜로 넘어간 사람들을 '도래인'이라 부르며 환대를 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더구나 통일신라의 '울산항'에는 아라비아(인도 등지) 상인이 직접 찾아와서 무역을 하러 왔고, 실크로드의 '종착지'는 황금의 나라 신라였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고려의 제일 무역항 '벽란도'는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널리 알려져서 '코리아'라는 이름도 그 당시에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었냐 말이다. 이쯤 되면 우리 역사에서도 자랑할 것 투성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한국인은 '위기'에 강하다는 사실도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한민족'은 똘똘 뭉쳐서 어려움을 이겨냈으며, 나라가 망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되살려서, 결코 다른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고유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해내는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전세계 어디에도 이토록 오랫동안 '고유한 문화'를 지켜내고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널리 알려진 역사가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서양의 그리스로마 문화, 동양의 중국 문화를 빼고는 '한국의 문화'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일본처럼 '섬나라'가 아니라 '반도'의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지도 않았고, 정말 많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침략도 당하고, 교류도 정말 빈번했는데도, '한국의 문화'는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도리어 외국인조차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한국인'이 되길 원했다는 사실이다.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사실이다. 오늘날의 'K-컬쳐'가 괜히 붐을 일으킬 정도의 매력을 뿜뿜하고 있는 것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낭설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런 '위대한 역사'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수난의 역사'라고 자조적인 자세를 취했던 까닭은 지난 100여 년간 참으로 끔찍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경제위기 등등 말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그걸 다 이겨내고 오늘날의 영광을 맞이했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걸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왜냐면 '한국의 역사'가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숱한 어려움도 겪었지만, 그 위기를 겪을 때마다 우리는 똘똘 뭉쳤고, 결국엔 극복을 해낸 뒤에 전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화려하고 강력한 '문화의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자, 서론이 길었다. 이 책 <한 권으로 뚝딱 누구나 쉽게 읽는 역사이야기>는 이런 '문화의 힘'을 지니고 있는 우리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역사책이다. 지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집필한 역사책이기에 어렵지 않게 핵심만 쏙쏙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기도 하다. 물론 초등학생들이 '처음으로 읽는 역사책'으로 삼기에도 딱 좋다. 자녀에게 '한국사'를 직접 가르치고 싶은 학부모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각 챕터마다 '우리 역사'를 잘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생생한 역사체험'을 경험시켜주고 싶다면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역사를 '암기'하는 것에 집중하는데 그치지 말고, 자랑스럽고 위대한 우리 역사를 가르칠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가르치길 바란다. 한국사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런 역사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개정증보판
홍세화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 창비 (1995) [개정판 2006년 / 개정증보판 2025년]

[My Review MMLXXIII / 창비 10번째 리뷰]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조직'에 가담한 것이 이유가 되어서 귀국하지 못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저자 홍세화는 그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서 빠리에 정착하게 되었단다. 대한민국만 안 되고, 어느 나라에나 거주할 수 있는 특이한 여권을 들고서 말이다. 홍세화는 그렇게 프랑스에 '난민 신청'을 하게 되었고, 택시 운전사가 되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빠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서 훗날 1995년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저자를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독재 세력'이 온갖 부정부패로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던 그때가 되어서 말이다. 그리고 '똘레랑스(굳이 따지자면 '관용 정신')'라는 개념으로 당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만들었고,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진지한 성찰을 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책'이기도 하다. 한국사람들은 '정(情)'이란 감정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프랑스사람들은 '똘레랑스'란 독특한 이성으로 무장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홍세화를, 프랑스 사회는 기꺼이 받아주더라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2025년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과연 '똘레랑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저출생 문제로 인해서 '인구절벽'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초고령화 문제로 인해서 우리 사회의 '경제성장의 동력'이 점차 둔화될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인구가 절감하게 된다면 2050년 무렵이면 한국사회에서 '한국인'은 멸종할 수도 있다는 빨간등이 번쩍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심각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한국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출생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법이다. 무작정 한국여성에게만 아이를 둘 이상 낳으라고 강요하는 방법이 아닌,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젊은 나이에 연애와 결혼,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돌아서고, 이를 위해서 정부는 젊은이들이 자녀를 낳고 기르는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정책에 올인을 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방법이 그동안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닥 희망이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한국사회의 인구를 늘리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솔직히 이 방법 말고 다른 대안은 거의 없다. 딴에는 '통일 한국'을 이루어서 북녘에 있는 25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 방법에는 '통일 비용'이라는 또 다른 천문학적인 비용이 별도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저출생과 초고령화에 드는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부담'만 더욱더 가중시키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이민'을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민'에 대해서 긍정적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민'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이민자'에 대한 시선 또한 결코 곱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 나라보다 '선진국'이고 '강대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이민'을 오고 싶어하고, '귀화'를 하려는 모습을 볼 때에는 그닥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있긴 하지만, 무슬림과 같은 '특정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나, 화교와 같은 '특이한 사상'에 물든 집단에 대한 혐오 따위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려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이질적인 문화'로 인한 불편 내지 불쾌함 때문에 절대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연 우리가 '똘레랑스'를 발휘하여 이를 극복해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홍세화는 왜 똘레랑스를 강조했던 것일까? 30년 전에 프랑스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무엇 때문에 홍세화는 그렇게 감개무량했던 것일까? 이건 거꾸로 생각을 해봐야 이야기를 수월하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99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난민'을 신청한 외국인이 있었다면,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그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일단 프랑스사회에서는 그게 가능했었다. 귀국을 허락치 않아서 오도가도 못하던 홍세화를 기꺼이 받아주고, '택시 운전사'라는 일자리도 제공했으며, 프랑스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수많은 프랑스사람들이 '외국인'이었던 홍세화를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며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는 이게 가능했을까? 외국인은 차치하고 '홍세화'라는 이질적(?)인 정치사상조차 받아들이지 못해 내쫓은 사회였는데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25년의 대한민국도 그리 달리진 것은 없다. 지금도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대기하고 있는 '난민'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그나마 몇몇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난민신청'을 통과했더라도 한국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위해서 '자국의 문화'를 완전히 버리고 '한국 문화'를 완벽하게 받아들일 각오(!)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하기 힘들다고 한다. 난민신청보다는 조금 수월한 '귀화신청'조차 녹록치 않다. 한국인과 결혼을 한 '배우자 특별전형'이 아니고서는 결코 쉽지 않은 귀화인데, 그조차 '취업'을 목적으로 한 사기행태가 만연하자, 단순히 '결혼한 사실'만 증빙해서는 허락치 않는 쪽으로 선회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과연 이런 한국사회에서 '똘레랑스'가 온전히 받아 들여졌다고 볼 수 있을까?

비단 한국사회만 탓할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경기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프랑스사회'에서도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극심해지고 있고, 특히 '이민자'에 대한 거부감과 피로감까지 서슴없이 내비치고 있기에 홍세화가 말하던 '똘레랑스' 가득한 프랑스사회는 현재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극우정당의 우세'를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죽하면 '이민자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조차 '불법이민 단속'에 나서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이민자라 할지라도 '백인이 아닌 인종'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추방조치를 취하고 있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태는 정말이지 볼썽사납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과연 이런대로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요구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딴에는 그렇다. 우리 속담에도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홍세화도 과거 30년 전에 풍요로운 프랑스 사회였기 때문에 '난민'으로 환영받을 수 있었지, 오늘날과 같은 혹독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프랑스 사회였다면, '아시아계 이민자'라는 딱지로 인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하기 딱 좋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대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문화조차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땐 나몰라라 하고 말 것인가?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로 작정한 이상, 인간은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야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건 '똘레랑스'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이상향'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고자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살만한 세상인 셈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착한 사람이 훨씬 더 많기에 살만한 세상인 것이다. 만약 이런 믿음마저 사라져버린다면 그땐 정말 인간 멸종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을 한 '짐승'들만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을테니 말이다.

솔직히 홍세화가 이 책에서 말한 '똘레랑스'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홍세화도 언급했듯이 '우리말'로 적절히 뒤쳐낼 문화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굳이 따져서 '한국인의 정 문화'에 빗대어 놓기도 했지만, 그것과 '프랑스사람들의 똘레랑스'는 또 다른 결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뭉뚱그려서 '관용 정신'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너그럽게 대하는 자세만으로 보기에 모자른 감이 없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서야 비로소 '너그러운 자세'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위치에 있을 때에는 '너그러울 수 없'지만, 똘레랑스는 높낮이와는 아무 상관없이 펼쳐 보일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이를, 한국인의 감정적인 자세와 프랑스인의 이성적인 자세를 비교하면서 풀이하기도 했지만, 이성적인 한국인도 '똘레랑스'를 구현하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점이 분명히 있긴 하다. 암튼 '똘레랑스의 본질'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더라도 상관은 없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한국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 나가면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꼭 '프랑스식 원조 똘레랑스'여야만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국식에 걸맞는 '똘레랑스'로 만들어서 대한민국을 아름답게 만들고, 그걸 또다시 한국식으로 포장해서 '역수출'하면 그뿐이다. 오늘날의 '한류열풍'처럼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를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 선진국이 되었다. 비록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네 인심'을 전세계에 널리 나눠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더구나 전세계가 '한국 문화'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럴 때 보여주면 된다. 잘난 척이 아니라 '진정한 멋'을 보여주면 그뿐이다. 30년 전에 홍세화가 겪은 '똘레랑스, 그 멋짐'을 우리에게 소개해줬듯이, 이제는 '한국 문화의 멋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해야 할 때다. 그리고 여전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똘레랑스, 그 이상'을 발휘해서 차근차근 해결해가려는 노력이 절실한 요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