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3 : 폭풍의 언덕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3
정윤채 그림, 권기희 글, 손영운 기획, 에밀리 브론테 원작 / 채우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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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인 에어>의 작가, 살럿 브론테의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단 하나뿐인 명작이 바로 <폭풍의 언덕>이다. 하지만 명작이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상당히 오랫동안 혹평을 받으며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했던 작품이었다. 그 까닭은 주인공인 히스클리프가 선보인 사랑과 미움, 그리고 처절한 복수극이 19세기 당시의 가치관과 사뭇 달랐던 탓이다. 영국 빅토리아시대를 시대배경으로 관통하는 <폭풍의 언덕>이 그 당시로서는 허용할 수 없던 '비윤리적'이고 '반기독교'적이라는 정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는 그런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가 소설속에 녹여낸 캐릭터는 '인간 본연의 감정'에 지극히 충실할 뿐이라는 이유를 들어 당시의 도덕적 가치관에 저항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시간적 배경인 18세기와 소설이 쓰여진 19세기 당시의 윤리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다. 그리고 주제는 두 남녀의 사랑이고 말이다. 지극히 뻔한 '여류작가의 애정소설'일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런 식으로 선보이길 거부했던 '브론테 자매들'이었으므로 등장인물의 성격(캐릭터)부터 파격적일 수밖에 없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남주 히스클리프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야생, 그 잡채'였다. 그리고 그런 '야생의 소년'을 사랑한 여주 캐서린도 '열정적으로 사랑에 올인하는 독립적인 당찬 여성'이었다. 이런 두 남녀의 만남이 순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 순탄치 못한 까닭이 고리타분하게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고, 또 '빈부의 차이' 때문에 주변의 반대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리라는 것도 '브론테 자매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명약관화할 따름이다.

 

  암튼, 당시의 시대상을 봤을 때 '캐서린의 사랑'은 조신한 여성이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보였으니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이 소설이 더욱 심한 비난을 받은 까닭은 '야생의 남자' 히스클리프의 처절한 복수극 때문이었다. 빈민층이었던 '집시 소년'을 기독교적인 선행으로 거두어주었으면 '감사의 뜻'으로라도 주인어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순종하고, 모진 고행을 겪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권위에 복종'하는 순한 양으로 길들여져야 마땅하거늘, 히스클리프는 고마움과는 사뭇 거리가 먼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주인집 도련님의 횡포를 하나하나 다 기억에 새겨두고 복수를 다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넘봐선 안 될 주인댁 아가씨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성공의 길'을 걷고 금의환향을 한 뒤에 자신을 폭행한 주인댁의 집과 영지를 빼앗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한 가문까지도 몰락하게 만들어 재산을 몰수하고, 엄연히 남편이 있는 캐서린과 정열적인 사랑의 감정을 나누며, 그들 모두의 2세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소행을 서슴지 않게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든 주인공을 다룬 소설에 '폭풍'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이런 내용의 소설인데도 오늘날에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악마와도 같은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결코 밉게 보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극단적'으로 비칠지언정 그 자신은 '감정'에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뭐랄까? 애둘러 돌아가는 법이 없는 '직진남'이라고나 할까? 히스클리프는 '순수, 그 자체'로 사랑과 복수에 정열을 다 쏟아버린다. 그런 순수함이 자신조차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그는 멈출 줄 모른다. 한마디로 끝장을 볼때까지, 갈 데까지 다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인 셈이다.

 

  이런 저돌적인 맹수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캐서린'이 유일했지만,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동가숙서가식'을 꿈꾸는 철부지였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히스클리프였지만,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에드거 린튼이었다. 왜냐면 그녀의 허영을 해소시킬 수 있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부도덕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만 '부당하게' 요구하는 정절에 반기를 들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왜 남성은 이 여자, 저 여자 맘에 내키는대로 '선택'하면서 여성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똑같이 저지른 부도덕한 행동에 대해 '사회적 관습'은 남성에게 너그럽고, 여성에겐 가혹하단 말인가.

 

  <제인 에어>에서도 40대의 유부남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10대 가정교사와 사랑을 나누려 한다. 소설에서는 '유부남'이란 사실을 속였다는 사실만을 거론하며 '진실한 사랑'이라면 나이 차이쯤은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그려냈다. 헌데 <폭풍의 언덕>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유부녀가 '내연남'에게 버젓이 사랑고백을 하고, 남편에게까지 '문제' 삼지 말라고 단언한다. 더 나아가 둘의 사랑을 반대하는 난관이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파괴하겠다는 망발을 일삼고 실행에 옮겨버리고 만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모든 탓을 '여성'에게만 묻고, '남성'에겐 그럴 수도 있다며 너그럽다는 점이다. 유부남이 결혼한 사실을 숨기고 젊은 여성에게 이해를 강요하거나 부도덕한 사랑에 빠진 원인 제공을 여성에게 찾으며 여자가 어떻게 행실을 했길래 남자를 망치느냐는 식의 '일방적인 여성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단 말이다. 전쟁이 벌어져도 여자가 예쁜 탓(트로이전쟁)이고, 나라가 망해도 여자가 너무 예쁜 탓(경국지색)이라고 언제까지 편견을 허용할 것이냔 말이다.

 

  물론, 이 책은 '만화가 가진 한계' 때문에 '원작의 깊이'를 모두 감상할 수 없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배경지식'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오래된 시대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와 복잡한 인물구성과 이야기구조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읽기 힘든 고전소설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유용한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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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음...<까해만>에 등장하는 여왕들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그중에서 딱 하나만 고르라니...무척 곤란하고 어려운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뿌앵~T-T 다 고르면 안 되는거임!?!) 어쨌든 최애퀸을 골라야만 한다니, 고르긴 고릅니다.



  두구두구~ 제가 맘에 드는 여왕 후보는 1번 척추퀸, 2번 프린세스 레드, 7번 심장퀸 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여왕은 바로~~~ 6번 신경퀸!!! 빰빠라밤~ 제가 '신경퀸'을 최애퀸으로 선정한 까닭은 그녀의 예민한 성격 탓인데요. 안 뽑아주면 제 허리디스크의 신경을 콕콕 찔러서 아프게 한다능....쿨럭쿨럭



  <까해만 2>, 곧 출시됩니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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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2 아르테 오리지널 2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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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극로맨스에 미스터리추리기법을 섞어 버무렸다고 소개하는 것이 어울리려나? 어쨌든 이 책을 소개한다면 그쯤이 딱일 것이다. 혹시라도 아직 읽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구르미 그린 달빛>에 <명탐정 코난>을 접목시켰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 듯 하다. 왜냐면 '환관 탐정'이 등장하는데, 사실은 '남자'가 아닌 여인이 신분을 감추고 활약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시 여인'이 자신이 연루된 살인사건의 내막을 밝혀내기 위해 잠시 '대당 황제의 넷째 동생'인 기왕과 연을 맺고 알콩살벌한 로맨스살인사건을 해결하며 감춰진 진실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으로 보자면 '당제국의 멸망'과도 연관을 짓고 있어서 대체로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여 마냥 상큼발랄한 로맨스가 펼쳐지지만은 않는다. 그건 소설의 대단원에 장식될 내용이니 잠시 뒤로 미루어 두겠다.

 

  1권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왕 황후의 친딸에 얽힌 비극적인 서사가 주된 내용이었다면, 2권에서는 왕 황후를 대신해서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는 곽 숙비와 그의 딸 동창 공주가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1권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물과 얽힌 복잡한 줄거리를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사건과 진범을 찾기 위한 황재하와 이서백, 그리고 주자진의 치밀한 범죄수사가 핵심 줄거리를 제공하고 말이다. 또한, 1권에서는 '딸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2권에서는 '딸들을 향한 각색의 아버지의 사랑'이 더욱더 복잡하게 얽혀 독자로 하여금 숨막히는 서스펜스를 만끽하도록 배려하였다.

 

  이처럼 2권의 매력은 '진범찾기'를 떠나 극중 등장하는 세 명의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에게 어떻게 사랑을 보여주는지가 진국인 셈이다. 그런 까닭에 책을 읽는 매력을 최대한 느끼기 위해선 결코 결말을 미리 까발리는 스포일러를 자제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리뷰의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결말'을 미리 공개하고, '세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의 차이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걱정하지 않는 까닭은 나도 이 책을 '두 번째' 읽었는데, 읽는 도중 '결말'을 전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사건 수사가 복잡하다는 점이다. 분명히 읽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과감히 스포일을 하더라도 이 책의 재미가 크게 반감될 거라 여기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권의 핵심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세 명의 아버지는 각각 '황제', '여지원', '전관색'이고, 각각의 딸도 '동창 공주', '여적취(아적)', '동창 공주의 시녀'다. 아버지의 직업과 신분도 각색으로 당나라 최고 권위자인 '황제', 밀랍으로 초를 만들고 화려한 채색을 넣을 줄 아는 예술가 겸 '장인',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 팔아 이윤을 남기거나 수로 정비 등 다양한 공사를 관리감독하며 돈벌이를 하는 '상인'이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딸'이 있었다는 점이며, 그 딸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해 딸들에게 불행을 선사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동창 공주는 황제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에도 어처구니 없게 연쇄살인사건의 희생양이 되며, 여적취도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천대와 구박만 받다 가장 더럽고 못난 '문둥이 노총각'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결을 시도했으며, 전관색의 딸도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릴 적에 궁궐로 팔려나가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간신히 살아남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이렇게 세 아버지와 세 명의 딸이 간직한 인생역전만 따져 물어도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겠지만, 가혹한 운명은 이들에게 '연쇄살인사건'이라는 비극까지 안겨주어 '딸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무색하게 만들고 말았다.

 

  보통의 아버지들은 딸과의 관계가 어떨까? 대부분의 아버지는 딸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기 일쑤다. 그 증거로 딸의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아버지들을 들 수 있다. 또한, 사위에 대한 적개심(?)을 감추지 않거나, 아빠 말고 모든 남자는 '늑대'라는 밑도 끝도 없는 억측을 딸에게 주입시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명쾌한 증거들이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물색없이 딸을 사랑한다는 빼박증거들이다. 그러나 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아버지의 사랑의 증거들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이 또한 명백한 증거로 거의 모든 딸들은 '중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아빠와 멀어지기 시작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어릴 적에는 아빠밖에 모르던 딸이었는데, 딸이 성숙해짐과 동시에 아빠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십상이다. 더 큰 문제는 딸이 아빠와 점점 멀어지는 이유가 '아빠'에게 있는데도, 정작 당사자인 아빠는 '그 이유'를 도통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아빠들이 모르는 것이 무엇일까?

 

  다시 소설속으로 들어가보면, 황제는 사랑하는 동창공주가 어릴 적에 우연히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도자기 파편'에 손을 다치는 일이 발생하자 공주가 머무는 '공간'에서 도자기로 만든 물건을 싹 '제거'해버리는 일을 감행한다. 한편, 여지원은 자신의 손재주와 가업을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슬하에 얻은 자식은 여적취라는 딸이 유일하다. 그래서 입만 열면 '아들타령'을 하면서 딸에게 모질고 쌀쌀맞게 대할 뿐이었다. 그런 딸이 불의의 사고로 '성폭행'을 당하고, 그 사실이 온동네에 퍼지자 집에서 내쫓고 새끼줄을 던져주며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자결을 하라는 무뚝뚝한 말만 할 뿐이다. 전관색도 다를 것이 없다. 온가족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자 맏딸을 팔아서 마련한 장사밑천으로 삼았고, 훗날 부유해지자 뻔뻔스럽게 내다 판 딸을 찾겠다며 궁궐에 소식통을 전했고, 그런 연줄로 또 다른 장사잇속을 챙기려 했던 인색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 아버지 모두 '딸의 의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방적'인 아버지의 사랑(?)만 전하려 했다. 그 결과가 각자의 딸들에게 '불행의 씨앗'을 심어줄 뿐이라는 걸 전혀 인지하지도 못하고, 애써 자신을 감싸는 '변명'만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아버지들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딸에게 무한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딸의 생각'은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빠가 우리딸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딸의 취향에도 관심이 없고, 성장하는 딸의 변화에도 관심이 없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선물만 퍼다 나를 뿐이고, 집을 떠나 '사회생활'을 하려는 딸이 겪는 고민과 아픔, 그리고 인생이 바뀔 사랑과 결혼, 그리고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걱정거리를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안식처'를 바라는 딸들의 소망을, '아버지의 권위'로 일축하며 헛발질을 해버리는 아빠의 사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딸들의 서운함을 말이다.

 

  소설속 황재하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명령에 어린 딸은 고집으로 맞서고, 급기하 '단식농성'에 들어가자 그런 딸을 아버지는 굶기라 했고, 그런 딸을 어머니는 안타까워서 아버지 몰래 음식을 챙겨주자 황재하는 울먹이며 받아먹다가, 저 멀리 나무 뒤에 숨어서 딸이 음식을 먹는지 확인하다 그 장면을 딸에게 들켜 머슥하게 뒤돌아가는 기억을 말이다. 이미 아버지는 독살을 당해 죽고, 다 커버린 황재하는 그런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의 아버지가 최고였다고 읊조린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에게도 그런 여린 갬성(?)이 감춰져 있다고 황재하는 말하는 것일테다.

 

  하지만 아버지들도 고충은 있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 길들여져(?) 눈물조차 흘려선 안 되는 모진 존재로 강요만 당하다 풍부한 갬성의 소유자인 딸을 만나면서 무장해제를 넘어 '무장해체'가 되어 버리는 아버지가 겪는 당혹감이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정작 딸이 바라는 아버지는 강인함 속에 부드러움을 갖추고, 시크(차가움)하면서도 따뜻하길 바라고,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 딸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매니지먼트가 되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딸이 바라는 행복을 위해서 무한헌신을 하길 바란다. 굉장히 비현실적이지만 '딸의 마음'은 그렇다는 말이다. 그걸 아빠는 결코 모른다는 점이 '최고의 고민'이다. 왜냐면 아빠들은 '비현실'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풍파에 쩔어버려서 말이다.

 

  어쩌면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결코 풀 수 없는 숙제와 같을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는 아버지와 비현실세계를 오가는 딸 사이를 이어줄 '연결고리'가 없다면 말이다. 그 연결고리는 마법의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거 알지?"라는 말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꿈 많은 소녀에게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이루고 싶은 것은 많은데, 그 많은 것중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딸이 맞닥뜨리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딸들도 스스로 그 경계를 조율할 줄 알게 된다. 성장과 성숙이라는 드라마는 딸들에게 그 경계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할 거면 하고, 말거면 말라고 타이르기 때문이다. 이때 아버지의 역할을 딸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는 것이다. 딸이 스스로 해야할 것조차 아버지가 '대신' 해주라는 말이 아니다. 옆에서 응원해주고, 성공하면 최고로 기뻐해주고, 실패해도 곁에서 위로해주는 역할이면 충분하다. 비단 딸에게만 해당하는 해법은 아니지만, 이 세상 모든 딸들이 바라는 가장 멋진 아빠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2권에서 보여준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새삼 관심집중이 된 까닭은 내게도 자식이 있다면 딸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 딸이 무럭무럭 자라고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고 성공과 행복의 기쁨을 최고로 만끽할 때, 그 옆에 있어주는 아빠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번 생에는 할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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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단편선 1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권희정.김은경 옮김, 이일선 그림 / 인디북(인디아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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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예능프로그램 <느낌표>에선 굵직한 '교양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25권의 책을 선정해서 온국민들에게 '독서열풍'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2003년 당시, MC 김용만이 불미스런 일로 방송계 하차를 했었고, 좋은 취지였음에도 '특정 출판사', '특정 도서'만의 판매고를 올려준다는 부작용도 낳았으며, 예능방송에 재미를 주기 위해 '팩트체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방송을 내보내 구설수에도 많이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스마트폰도 출시되기 전인데도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온국민 독서인구도 최저, 1인당 독서량도 최저였던 관계로 '독서교양예능'이 선보이자 온국민의 관심이 쏠리면서 '독서'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던 뜻깊은 방송이었다.

 

  그때 열다섯 번째로 선정되었던 책이 바로 이 책 <톨스토이 단편선>이었다. 물론 이 책은 '개정판'으로 나와 처음 선정된 책과는 '목차'가 다소 다르긴 하지만, 그 시절에 읽었던 추억과 감동은 여전할 수밖에 없었다. 온국민이 '같은 책'을 읽는다는 느낌은 그런 추억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감동을 주었다. 2002년 월드컵4강 신화와 더불어 온국민들의 마음속에 뜨겁게 남겨진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책을 20여 년만에 다시 꺼내 제자들과 함께 읽으니 색다른 추억거리를 만들게 되기도 했지만, 그 시절과 사뭇 다른 느낌이 느껴져서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소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숙이 깔려 있다. 어느 단편소설이고 그 밑바탕에는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하늘엔 영광이 있을 것이고, 땅에는 평화가 복음과 함께 널리 퍼질 것이라는 믿음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짙은 '종교색' 덕분에 읽으면 마음 따뜻해지는 감동만 어렴풋이 느꼈을 따름이었다. 헌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톨스토이의 소설에는 진한 '사회주의 사상'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노동의 가치'를 최고로 치고, '노동으로 얻은 대가'를 모두와 함께 골고루 나누어 갖는다는 골자가 아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러시아혁명'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아닌지 검색을 해보니, 단편소설이 쓰여지던 시기가 1885년즈음이었던데 반해, 혁명은 1917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사회주의 사상가'가 아니었던 것일까? 먼저, 그의 문학이 '러시아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러시아 귀족들이 농민들을 수탈하며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의 작품에서도 부유한 자산가는 '악'으로 그리고, 가난한 민중은 '선'으로 보여주며 당시 귀족들의 만행을 작품속에 그대로 투영시켜 폭로하는 '사실주의 작가'였다. 동시에 톨스토이는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비판의식을 가지고 글로 쓰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사상가의 모습도 곧잘 보이곤 했다. 특히,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되기도 했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널리 퍼뜨리는 소설가가 어찌해서 파문이라는 불명예를 받았는고 하니, 당시 정교회가 민중을 탄압하는 귀족세력(기득권세력)을 옹호하자 이를 비판하는 저서를 출판했었고, 귀족과 정교회는 이런 책들을 '판매 금지' 시켰으나 민중들이 '필사본'과 '등사본'을 만들어 유통시켰고, 다른 나라 출판사들이 출간하여 인기를 끄는 등 적극적인 행동도 불사했었다.

 

  그런 탓에 그의 작품에서는 '사상가의 느낌'이 물씬 풍기곤 한다. 이 책에 수록된 <바보 이반>에는 그런 내용이 담뿍 담겨 있다. 첫째는 군인이었고, 둘째는 상인이었지만, 셋째인 이반은 농부의 삶으로 만족한다. 이에 악마가 등장해서 첫째와 둘째를 패가망신시켰지만,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아가는 이반은 어찌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반이 잘 먹고 잘 사는데 밑거름(?)이 되고 마는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따뜻한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인 톨스토이가 지배층에 해당하는 '부유한 권세가'에 대해 얼마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파멸해나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과정'을 낱낱이 거론하며 가난하지만 거룩한 민중들의 삶에 아낌없는 찬사를 늘어놓는다. 이는 여타의 소설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구도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톨스토이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이 '사랑'이고, '평화'이며, 누구나 욕심을 버리고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삶이 가장 위대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러시아의 대문호를 두고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과 푸틴과 같은 '독재자의 등장'을 막지 못했던 것일까? 모두들 '하나님의 사랑'을 등한시하고, 가난하지만 복된 삶을 마다하고 제 욕심을 챙기기 위해 이웃을 해치는 나쁜 짓을 일삼는 것일까? 비단 러시아 사람에게만 던질 질문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말하는 입술로, 남을 해치는 결단을 이리도 쉬이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호의'를 베풀면 '호구'로 취급하는 못된 습성을 갖게 되었다. 개인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남을 짓밟고서라도 '나만' 성공하는 것이 최우선순위가 되어버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비양심적으로 살면서도 주둥이만 살아서 '도덕적인 말본새'를 주어섬기며 저혼자 착한 척은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는데, 제 곳간을 그득히 채우고서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 세태에 정나미가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 도대체 착한 사람은 살 수 없을 정도로 '오염수' 가득한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만 셈이다. 하긴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도 '착하게 살라'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가난하게 사는 것'은 몸서리치게 싫다고 '양심고백(?)'을 하기도 한다. 얘들이 말하는 가난이란 것이 '똥꼬' 찢어지는 정도는 물론 아니고, 부족할 것 없이 처묵고 잘 살면서도 '남들보다 부티나지 않게 사는 찌질함'이 정말정말 싫다는 것이었다.

 

  얼마전에 '유명일타강사'가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며 불행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한 동영상이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켰다고 하던데, 이런 세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 싶다. 남들이 올린 사진을 보며 '왜 나는 이렇게 살지 못하지?'라는 불행을 곱씹는 일을 날마다 반복하는 짓은 정말 어리석기 그지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리뷰를 쓰면서도 '사진'을 올리지 않는...쿨럭쿨럭

 

  암튼, 톨스토이의 책을 오랜만에 펼쳐보고서 새삼스럽게 '사랑'을 실천하고, '욕심'을 버리는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정말로 시급해진 이때, 톨스토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어이 우리 모두가 소중히 여겨야 할 바다에 '방사능 수도꼭지'를 기어이 틀고야 말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결국 자신들의 터전이자 우리 모두의 고향을 망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걸 어찌하여 '모른척'하는 것일까? 앞으로 10년, 100년 뒤에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인걸까? 망가진 원자로 핵연료봉에서는 끊임없이 방사능을 뿜어낼 것이고, 아무리 걸러내고 희석시킨다고 해도 단기간에 없어지지 않을 방사능일진데, 온지구가 방사능 피폭을 당하고 난 뒤에 무슨 수로 회복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결국은 '지구적인 문제'다. 전세계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반드시 해결해내야만 할 문젯거리다. 그럼 결론은 딱 하나다. 전세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해법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해야 한다. 당연한 일 아닌가? 이런 와중에 돈 몇 푼 더 손에 쥔들 무엇이 더 나을 것이며, 얼마나 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느냔 말이다. 오염수 배출도 안 되고, 너네가 감당하라고 강요해도 안 된다. 모두가 함께 뛰어들어 해결해야만 한다. 바보 이반의 지혜가 절실한 때다. 욕심 따윈 버리고 무엇이든 베플면 모두가 넉넉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진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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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이 이렇게나 재밌을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는 책이다.

그동안 '인체의 해부'는 의학실험실에서 은밀히 벌이는 의사들만의 전유물처럼 여기곤 했다.

그렇기에 비밀스럽고 신비한 '해부의 세계'는

코를 막아야만 했고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속 장기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끔찍한 일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그토록 공포스런 해부학이 유쾌하다 못해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대폭소를 터뜨리는

만화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면 어떻겠는가?


아직 <해부학 만화>의 1권을 읽지 않았다면, 당장 읽어보시고

이미 읽으셨다면, 2권 또한 망설이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예막구매자들엑 주어지는 빵빵한 선물도 가득하다니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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