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세계사 5 -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 처음 세계사 시리즈 5
초등역사교사모임 글, 한동훈.이희은 그림,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감수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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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 공부를 하다보면 '중간이 어렵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도 '처음'과 '끝'은 기억이 생생하기 마련인데, '가운데'에는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 가물가물하고, 순서도 헷갈리기 십상인 것처럼 세계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어서 '모든 것'을 다 씹어먹을 듯한 열정으로 달려왔다하더라도 '중세'를 넘어 '근대'로 넘어가는 이즈음의 역사가 아리까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모두 10권의 시리즈 가운데 5권에 해당하는 부분이 그렇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하지만 막상 정리해서 이야기하자면 떠듬떠듬 헷갈리고 마니 말이다. 더구나 요즘 세계사는 '서양(유럽)중심사'를 벗어나 '중동아시아사'와 '아메리카문명', 그리고 '이슬람문명'을 비롯해서 '인도사', '중국사', '한국사', '일본사'까지 아울러 소개하고 있기에 광범위한 세계사를 눈앞에 두고서도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감도 잡을 수 없게...아니 주눅이 들 정도로 방대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방대한 역사'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효율적인 방법은 없을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쿠르트 50병을 마시는 방법'으로 표현해보려 한다. 요쿠르트 한 병은 누구나 부담없이 단번에 쭉 들이킬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병조차 뚜껑을 까서 마시기보다 밑을 이빨로 뜯어서 쪽쪽 빨아먹거나 꽁꽁 얼려서 반으로 잘라 먹는 '기이한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역사공부를 해서는 결코 인류역사 오천년을 총망라하여 정리할 도리가 없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일 것이다. 그러니 그냥 '요쿠르트 한 병'을 가볍게 쭉 들이키는 상상을 하길 바란다. 이렇게 '한 병 마시기'가 너무나 수월한 관계로 '다섯 병'을 한 팩으로 포장된 상태에서 빨대를 하나씩 꽂아 쪽쪽 빨아먹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런 도전(?)의식이 샘 솟았나보다. 다섯 병도 손쉽게 들이키는데 '50병'을 마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요쿠르트 50병을 커다란 대접에 부어서 한 번에 들이키는 '무모한 시도'를 하는 사람도 봤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한 병에 50밀리리터라고 해도 열 병이면 500밀리리터이고, 그렇게 다섯 배를 하면 2500밀리리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 커다란 생수 1리터(1000밀리리터)를 2병 반을 원샷하는 셈이다. 이게 보통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역사공부가 그렇다. 단원 하나하나는 외울 것도 만만해보이고, 이해해야 할 것도 고만고만해보이지만 '역사책' 10권을 통째로 외우고 이해하려 들면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렇다면 요쿠르트 50병을 모두 마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시간적 여유'를 두고서 '한 번에 한 병씩' 꾸준히 마시면 50병은 물론, 100병도 거뜬히 마실 수 있게 된다. 역사공부는 무릇 이렇게 하는 것이다.

 

  <처음 세계사 5>에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를 다루고 있다. 르네상스의 시작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점차 퍼지게 되었는데, 한 가지 분야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다함께 성장발전한 것이 큰 특징 중 한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학문, 예술, 문화 등등' 다방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르네상스의 특징'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인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유럽의 중세 1000년 동안 '신학 중심'으로 발전을 해오면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눈 뜨게 한 것이 르네상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무너지고 고대의 그리스로마신화 때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종교개혁'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톨릭 교회'에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게 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종교개혁'은 루터의 반박문을 시작으로 스위스의 츠빙글리, 프랑스의 칼뱅, 그리고 영국의 국교회와 청교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유럽은 '구교'와 '신교'가 대립 아닌 대립을 하게 되고, 같은 신앙을 두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갈등으로 커지더니 급기야 '종교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이즈음 서유럽국가들은 '인도 항로'를 새로 개척하기에 열을 올린다. 지중해로부터 인도로 갈 수 있는 길목을 '이슬람세력'이 가로막고서 통행료(관세)를 거두며 막대한 이익을 챙기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면 이러한 부대비용을 절약하고서 인도의 향신료로 얻을 커다란 이득을 새로 챙길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부풀어올랐기 때문이다. 이 당시 과학사의 업적으로 '지구는 둥글다'는 증거가 유럽인들의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고 말이다. 그래서 용감한 모험가들은 지중해를 벗어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항로와 대서양을 건너 지구 한바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 가운데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데 성공했고,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젤란은 실제로 세계 일주에 성공(마젤란은 필리핀 원주민에게 살해)하는 위업을 달성하며 '신항로 개척'에 큰 공을 세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아메리카 문명'은 끔찍한 비극을 맞이하는데, 다행스럽게(?) 마야문명은 유럽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멸망했지만, 아스텍과 잉카 문명은 유럽인이 가지고 온 '총, 균'에 의해 원주민 대학살이 벌어지고 만다. 이렇게 아메리카의 자원을 강탈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은 '서구제국주의의 첫 번째 만행'을 저지르며 성장발전하게 된다.

 

  한편, 이슬람 문명은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를 넘어 '중앙아시아'와 '인도'에까지 영향력을 뻗치는데, 각각 '오스만 제국', '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이다. 앞서 '칭기즈 칸의 정복전쟁'으로 헝가리까지 뻗어갔던 '몽골제국'은 칭기즈 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여러 개의 '칸국'으로 나뉘게 되었고, 몽골군에게 크게 놀라 휘청거렸던 이슬람세력은 '오스만 제국'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되고, 칸국으로 자리 잡았던 '몽골의 후예들'은 각각 중앙아시아를 발판삼아 '티무르 제국'으로, 인도로 뻗어나간 이들은 '무굴 제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티무르 제국은 한 세대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인도에 정착한 '무굴 제국'은 인도의 힌두교와 결합하면서 인도의 왕조로 자리잡게 된다.

 

  또한, 원나라를 세워 중국땅에 정착한 '몽골의 후예'는 한족의 저항에 밀려 '북원'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 자리에는 새로 '명나라'가 새워지게 된다. 그렇게 명태조 '주원장'은 강력한 통치력으로 자금성도 세우며 강력한 황권을 세우지만, 그가 죽자 '후계 문제'에 휩싸여 형제들이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왕권 다툼'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명나라의 기세는 날로 커지게 되고, 급기야 '정화 함대'가 아프리카까지 조공무역을 성사시키면서 전세계에 '화교'를 정착시키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즈음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새로 건국되었는데, 세종대에 이르러 나라기틀을 다잡더니 '과학기술, 문화예술'이 날로 성장하여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에는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큰 업적을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선조대에 이르러 '임진왜란'이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끝으로 일본은 혼란기를 맞이하는데, 이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군웅할거를 시작하더니 점차 '힘이 쎈 영주(다이묘)'를 중심으로 새 판이 짜여지더니 급기야 서로 뺏고 빼앗는 전쟁이 일상처럼 벌어지게 된다. 때마침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이 전해지면서 전쟁을 직업으로 삼는 '상비군'이 결성되는데, 이를 최초로 전쟁에 잘 활용하였던 이가 바로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도 통일의 위업을 앞에 두고서 '혼노지의 변(믿었던 부하에게 배신을 당함)'을 마지막으로 수명을 다하게 되고, 노부나가의 복수에 앞장 섰던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의 전국통일은 달성이 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상비군'을 적절히 해체하지 못한 히데요시는 '대륙정벌'이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는데, 그 첫 단추로 '정명가도(명나라를 치려하니 조선은 길을 내주어라)'를 핑계삼아 대대적인 조선침략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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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2만리 아셰트클래식 1
쥘 베른 지음, 쥘베르 모렐 그림,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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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정신>의 '아셰트클래식' 시리즈는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인 책이다. 한 눈에 보아도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고 클래식한 색감과 고풍스런 디자인이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빼놓은 수 없는 매력은 '도감'이다. 흡사 백과사전을 펼쳐보는 듯한 세세한 '그림'만으로도 오래된 고전속에서 캐내는 '지적 보물'이 듬뿍 담겨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나기에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여왔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책에 단 하나의 단점을 꼽자면 '값비싼 책값'이다. 멜빌의 <모비 딕>이나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같은 명작은 이 책 이외에도 수많은 책이 있었고, 읽었기 때문에 그만한 값을 치르고 사모으기에는, 솔직히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아셰트클래식'만의 장점을 또 하나 꼽자면 빼어난 '도감'과 더불어서 '원작, 그 잡채'의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명작의 값어치를 제대로 아는 독자들에게는 더할나위없는 훌륭한 시리즈가 될 것이다.

 

  사실, 난 '쥘 베른'의 열렬한 팬이다. 어릴 적부터 과학자의 꿈을 꾸었기에 쥘의 책은 과학지식의 원천이었다. 실제로 쥘의 책은 '경이로운 여행'이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그 여행은 땅 위는 말할 것도 없고, 땅속, 바다, 하늘, 그리고 우주까지 19세기 당시에 '가본 적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말그대로 '경이로움'으로 가득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다. 21세기인 오늘날에는 당연한 일로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100여 년이나 앞서서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쳐내는 드라마틱한 모험담을 술술 써내려갈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현불가능한, 그런 막연한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조목조목 들이대며 '그럴 듯한 상상력'을 펼쳐냈기에 훗날의 과학자들은 '쥘의 소설'을 바탕삼아 그대로 재현하는 '쉬운 업적(?)'을 남긴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를 테면,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책에서 커다란 대포를 만들어서 '텅빈 대포알'을 우주선 삼아 달을 향해 발사하는 황당한 줄거리는 인류 최초로 달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의 궤적과 꼭 닮아 있다. 마치 쥘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살짝 엿보고 돌아온 뒤에 소설을 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쥘의 소설'은 단순한 '공상과학(SF)'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미래과학 교과서'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터다. 물론, 오늘날에는 쥘이 상상한 '미래'조차 과거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의 역사'라는 점에서 쥘의 소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을' 가치가 충분한 소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쥘의 소설'이 읽혀 마땅한 까닭은 수많은 '경이로운 여행'을 성공한 인류가 아직도 속시원히 들여다보지 못한 곳이 남았기 때문이다. 바로 '심해'다. 인류는 아직도 '깊은 바닷속'을 잘 모른다. 아무리 무인탐사정을 띄우는데 성공하고 가장 깊은 바다의 비밀을 들여다봤다고 해도 여전히 인류는 바다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왜냐면 인류는 '수심 200미터', 흔히 말하는 '대륙붕'에서만 놀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깊은 바다에 '엄청난 자원(망간단괴 등)'이 그냥 뿌려져서 주우면 임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도, 인류는 그 자원을 캐낼 방법조차 찾아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처럼 '지구환경파괴'를 일삼는 인류에겐 영영 손을 댈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냅두고 싶은 심정이지만...암튼 인류는 여전히 '바다'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엄청난 '수압' 때문이다. 바다 밑으로 10미터 내려갈 때마다 1킬로그램의 압력을 견뎌야 한다. 해녀들이 수심 100미터속의 전복과 해삼을 캐낸다면 들어갔다 나올때마다 10킬로그램의 압력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능력이며, 당연히 그런 어마무시한 '조업환경'에서 작업하는 해녀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수심 200미터 내외에서는 이런 악조건을 견디며 작업할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잠수복'이 바로 그 예인데, 이것도 그보다 더 깊은 바닷속에서는 무용지물에 가깝다. 왜냐면 그 아래부터는 햇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깜깜한 암흑속이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조명'에 의해 간신히 어둠을 밝힐 수는 있겠지만, 깜깜한 어둠속에서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서야 고작 한발한발 겨우 발을 내딛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래서야 어디 '정복'했다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쥘은 <해저 2만리>라는 소설을 19세기에 내놓았다. 인류가 고작 '증기기관'에 의지해서 '돛 없는 배'를 망망대해에 띄워을 뿐인 '그 시점'에 쥘은 비록 소설속 공상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나트륨 전지'로 해저 1만미터를 누비는 엄청난 잠수함을 탄생시킨 것이다. 지금으로치면 '원자력잠수함급'이며, 원자력으로 만들어낸 '전기'로 움직이는 잠수함을 탄생시킨 것이다. 물론, 쥘이 살던 시대에도 '잠수함'은 있었다. 하지만 겨우 한두 사람이 탑승해서 발로 패달을 밟아 스크류를 돌려 이동을 하고, 나무로 만든 배의 밑바닥을 '드릴'로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잡한 수준이었는데, '원자력급' 상상력을 발휘해서 바닷속을 누비는 괴물, '노틸러스'를 탄생시킨 것이다. 나 어릴 적에 읽을 때에도 그 기발한 상상력에 혀를 내둘렀는데,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기발함은 정말이지 놀라울 뿐이다.

 

  물론, <해저 2만리>에서 '과학적 관점'으로 팩트체크를 하다보면 수많은 오류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최신잠수함도 겨우 내려보내는데 성공했을 수심 몇 천미터에 꼴랑 잠수복을 입고서 수 킬로미터를 산책(?)하며 바다목장(?)에서 길러낸 참치를 수족관에서 꺼내먹듯 하는 장면이나, 오래전에 수몰되었다는 '아틀린티스'를 굳이 걸어서 탐사하고, 잠수함으로 남극대륙 한복판에서 부상(?)해서 남극점에 도달했다는 묘사, 남극점을 찍고 되돌아오던 중에 '거대한 빙하'에 갇혀 잠수복을 입고 빙하속을 곡괭이로 깨어서 탈출하는 극적인 장면들은 아주 오래된 '깔깔 유머집'에나 나올 법한 웃기지도 않는 대목이긴 하지만, 수천 년전 인류의 유적과 유물을 보면서 '조잡함'보다는 '위대함'을 떠올리는 것을 감안한다면, 비록 '과학적 팩트'에는 위배된 사실일지라도 충분히 감탄할 수 있는 대목으로 미소지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라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독자들이 <해저 2만리>를 읽는다면, '과학적 사실'을 꼼꼼히 따지는 것보다는 '과학에 준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며 가까운 미래의 인류에게 '바다' 또는 '심해'라는 곳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곳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도 좋을 듯 싶다. 특히, 과학의 흥미에 이제 막 눈을 뜬 어린 독자라면 그러한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려주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이고 말이다. 분명 인류는 머지 않은 미래에 '땅'에서보다 더 많은 인류가 '바다'에서 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땅위'가 아닌 '바다위' 또는 '바닷속'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말한다기보다는 '생명의 원천'이 땅이 아닌 바다라는 인식을 더 많이 갖게 될 거란 의미다. 지금도 이미 많은 인류가 '바다'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계 곳곳의 인구 1천만이 넘게 사는 도시들은 바다를 인접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인류의 먹거리 또한 이미 땅보다 바다에서 더 많이 얻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아직도 바다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바다에 대한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살짝 아끼고 싶다. <해저 2만리>의 줄거리와 '네모 선장의 비밀'은 <신비의 섬>에서 따로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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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엔 11권의 리뷰쓰기로 마무리하였다.

10권을 넘긴 소소한 성적이지만, 마지막주에 '출판사 교정작업'을 하느라

막판 스퍼트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그로 인해 밀린 리뷰는 9월에 써낼 예정이다.

 

11편의 리뷰를 쓴 것으로도 '분석 데이타'에 큰 변동은 없다.

다만, '읽은책 100%'가 99%로 하락했는데,

이는 '읽은책'만 데이타에 반영하던 것을

앞으로 '읽는책'과 '읽을책'에도 입력한 값으로 인한 변화다.

각각 6권씩 '읽고 있는 책'과 '읽을 예정인 책'을 선별해서 데이타값에 변화를 주었는데,

계획적인 독서와 리뷰쓰기를 하기 위해서다.

이로써 매달 10권 이상의 리뷰쓰기가 목표달성을 이룰 것으로 기대한다.

 

아쉬운 것은 지금 기록하고 있는 '독서앱'으로는

'출판사 집계'와 '글쓴이 집계'가 통계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일이 헤아리는 방법도 있으나, 매번 주먹구구식으로 세기에는 너무 방대하다.

그래서 따로 블로그에 '집계'를 할 방법을 모색중이다.

올해 안에 그 방법을 실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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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4 - 거문도 Crisis와 방곡령 본격 한중일 세계사 14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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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리뷰에서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리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였다. 딱히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만 탓할 것은 못 된다. 왜냐면 당시 '개화세력'이 너무나도 소수였고, 그나마도 다수 백성들의 지지도 없이 걍 '소수의 엘리트(지식인)들'만으로 시도 되었고, 급조한 정변이었기에 '외부세력(일본)'에 크게 의지한 모양새도 '플랜B'를 마련하며 실패할 확률을 줄여나가는 현명함도 없었으며, 당시 정권의 핵심이었던 '고종과 민씨세력'이 개화세력의 의견을 받아들일 정도로 개화되거나 국력도 뒷받침이 되지 않았으니, '실패한 정변'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렇게 얻을 것도 없는 정변을 왜 무리하게 시도했느냐는 역사적 논란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무모한 정변의 실패로 인해, 이땅에 건전한 개화세력까지 깡끄리 사라지면서 남은 것은 훗날 '친일개화파(매국파)'만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고종을 위시한 '수구보수의 꼴통'만 득실거리는 정국에 '방곡령'과 '동학농민혁명'이란 굵직한 사건이 터지게 되니 이에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헛발만 일삼다. 끝내 일제의 침략만 수월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14권의 내용이 바로 '갑신정변'과 '청일전쟁' 사이에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이며, 한중일 삼국 사이에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역사현장'이 세계사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그 시작은 '거문도 점령'이다. 조선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이 그 원인인 사건인데, 단순히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영국의 조치로 흘러가지 않고, '청국의 개입'이 눈에 띄게 펼쳐지면서 끝내 '거문도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지만, 종국에는 '청의 간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사건으로 결말을 짓게 되었다. 까닭인 즉슨, 영국과 러시아 양국에게 '조선'은 머나먼 극동의 나라였던 탓이 컸고, 그로 인해 '전면전'을 벌이기에도 부담스러웠으며, 조선의 영토를 무단점령하였는데도 영국과 러시아 각국은 '조선정부'와 외교협상을 벌이는 것으로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청의 조선에 대한 종속권'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 까닭 역시, 영국과 러시아 양국 모두 '조선정부'를 개무시하고, 청의 눈치만 살폈다는 점이다. 이렇게 조선은 아무런 '외교력'을 발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조선개입불가'만 확인하는 게기가 되었고, 청의 종속국이란 점만 다시 한 번 재확인하고 말았다. 이로써 고종의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청나라로부터 벗어나자'는 정책은 실패로 끝맺고 말았다.

 

  한편, 조선에서 버라이어티한 일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일본은 잠잠했는데, 그 까닭은 '내부문제'를 해결하고, '실력행사'를 할 수 있을만큼 근대적 개혁을 마무리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천황제를 골자로 하는 일본의 입헌정치(헌정)가 완성되고, 초대 총리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올라서는 일이 착착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등박문의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끝내 일제가 '군국주의국가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준 꼴이 되었다. 서구열강처럼 '민주주의국가'로 발돋움하려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모양새'만 그럴싸하게 탈바꿈하였을 뿐, 일본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틀인 의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정치의 요람이 '바로 이때' 시작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일본의 군사력 강화에 깊이 올인하다보니 '군부의 핵심'인 육군의 장성이 천황의 명령 하나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천황제 군국주의국가'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회의 총리'조차 일본시민들의 투표가 아닌 천황의 임명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되어 버린 일본은 입헌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지 못하는 기형적인 형태의 근대국가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를 흉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런 기형적인 '군국주의국가' 일본제국이 가장 먼저 탐욕의 본색을 드러낸 국가가 '조선'이었다는 점이다. 또다시 내부문제 '일본의 연이은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는 판국에 이웃나라 조선에도 흉년이 들었는데도 일본내부의 '쌀부족 문제'를 조선의 쌀을 싹쓸이(!)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들었던 것이 '방곡령 사건'의 시작이었다. 조선 안의 쌀이 일본상인들의 싹쓸이 수매로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우려한 조선의 고을 수령들이 '방곡령'을 선포해 조선밖으로 쌀을 내보내지 못하게 하는 지극히 정당하고 합법적인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는 '조선 백성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로 인해 일본의 쌀부족을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일본정부'는 실력행사를 통해서라도 조선정부를 압박해서 쌀부족사태를 해결하려 든 것이다. 이에 한 발 물러선 조선정부는 '방곡령'을 해제하고, 쌀 수출(?)을 허가하며 무마하려 들었지만, 그 사이 일본상인들의 손실을 빌미로 삼아 조선정부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모양새로 일관하는 '일본정부의 무도함'을 아주 잘 드러내고 말았다. 이제 조선에 무슨 빌미만 생기면 바로 힘으로 제압해 해결하려는 못된 실력행사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농민군에게 호되게 당한 고종과 민씨세력은 청의 종속국임을 스스로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청군'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제 조선에 '일본군'이 들어올 수 있는 빌미가 제공되었는데, 과연 합법적으로 조선에 출병할 수 있게 된 일본군의 행보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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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3년 8월
평점 :
품절


  '무의식의 저널 Umbr(a)' 시리즈는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의 '낯선 글모음집'의 성격을 띤 책이다. 이름만 들어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등등 세계 명문대학의 교수들이 집필진(?)으로 활약하기에 이 시리즈는 읽어봄직한 책이기도 하다. 거기에 'umbra'라는 단어가 지닌 뜻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통은 '천문학'에서 일식이나 월식 때 지구, 또는 달의 '본그림자'를 뜻할 때 쓰는 단어이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동반자'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함께 한다'는 뜻의 환영받는 뜻이 아니라 '초대객이 데리고 온 손님'이란 뜻으로, 한마디로 '불청객'이란 뜻이다.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손님에게 묻어서, 또는 묻혀서 딸려왔으니 얼마나 불편하겠냔 말이다. 그래서 난 이 시리즈의 본래 의도가 바로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라고 짐작한다.

 

  딴에는 '무의식'이 그렇다. 정신분석학에서도 '무의식'은 의식세계의 저편에 있어서 우리의 '의도'에 관여받지도 않고 받을 수도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저변에 깊숙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초대한 적은 없지만 불현듯 찾아와 어느새 함께 자리하고 있는 '불청객'처럼 말이다. 이 책, '무의식의 저널'이 바로 딱 그렇다. 우리의 깊은 관심 '밖'에 있는 책임에 분명하지만 우연히라도 '읽는 순간', 손에서 책을 땔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갖고 있는 책으로 소개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이 책 <유토피아>도 그랬으니, 다른 'Umbr(a)'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김에 '무의식의 저널' 시리즈를 탐독해보려 한다. 시간이 좀 걸려도 해보려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쓴 책일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기에 가장 완벽히 이상적인 곳을 모어는 '유토피아'라고 표현했다. 허나 '유토피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가장 완벽한 곳인데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런 곳'이 유토피아라니 말이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상상하는 가장 암울한 곳인데도 현실속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의 진정한 뜻은 '없는 곳'이 확실하다. 그 반대말인 디스토피아가 확실히 '있는 곳'이니 말이다. 아니 너무 흔해서 굳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앞에 펼쳐지는 까닭에 더욱 짜증날 따름이다.

 

  이렇게 짜증이 나는 '디스토피아' 말고 우리가 찾고 싶어하는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을지 정신분석학적으로 나름 분석한 책이 바로 이 책의 골자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를 보여줄 생각은 저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세상에 없음직한 '유토피아'가 왜 확실히 '없는지'만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유명 대학의 교수님들이 짜고서 그런 글들만 써낸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까닭인 즉슨, 학문적 관점에서 '유토피아'에 관한 내용을 써내려가다보니 꽤나 '형이상학적인 내용'의 글잔치를 펼쳐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각의 저자들은 이 책에서 '유토피아'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 세상에 '없는 곳'을 지향하는 '무엇'에 대한 주제를 담론으로 삼아,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없을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진솔하게 나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딴에는 당연한 소리를 뭘 그렇게 어렵게 꺼내서 어렵게 마무리하시나 싶지만, 원체 교수님들이 하는 말발이 원래 그런 식이니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식적인 선'에서 유토피아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역자 서문'에도 영화 <아일랜드>의 예를 들어 이 책 '유토피아'를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굳이 라캉, 파스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언급된 '유토피아'에 심취하고 싶다면 이 책을 탐독하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난, 나만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꼭 존재했으면 더 바랄나위가 없는 그런 '유토피아' 말이다.

 

  내게 그런 유토피아의 이름은 바로 '대한민국'이다. 현실속의 대한민국은 많이 해묵어서 낡아빠진 이데올로기를 애써 끄집어내서 나라를 통째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미국의 노예'로 만들고도 자신이 한 짓을 자랑삼아 떠벌리는 반푼이 30% 국민과 함께 '동반자(umbra)'로 품고 살아가야 하는 후진국 지향국가지만, 내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선진국을 훨씬 넘어서서 이 세상 모든 국가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선도국가'이다. 우리는 잠시나마 그런 대한민국을 경험해봤었다. 다들 알지 않은가.

 

  그런데 그랬던 나라가 불과 1~2년 만에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고, 정치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외교는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는지 '국익'을 외치면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런데도 잘했다고 스스로 성적을 매겨버리는 요상한 일들이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국외순방을 나갈 때마다 온국민들이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소원을 빌지경이다. 나갔다하면 사고를 치고 돌아와서는 천연덕스럽게 '또 다른 사고'를 저질러 덮어버리려고만 하니 정말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또 사고를 쳤다. 이웃나라에서 '오염수'를 대놓고 바다에 방류하겠다는데 반대는커녕 '잘 버리는지, 과학적 감시'만 하겠단다. 핵폐기물을 그냥 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 '잘 처리해서' 버리는지, '허용기준치'를 넘어서면 방류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버려달라, 요청'하는 말만 하겠다면서도 어찌나 당당한지 말이 안 나올 정도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바다에 '오염수'를 버려서 오염을 시켜서 발생한 '일본어민들의 피해보상'을 비롯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비용처리'를 한국정부가 대신 부담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아니, 바다오염의 '가해자'는 일본인데, 그 피해당사국인 '한국정부'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단 말인가? 이게 '호구짓'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거기다 대한민국 총리라는 작자가 '오염수'를 '오염 처리수'라고 명칭을 바꿔 '괴담(?)'에 맞서 대한민국 어업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앞장서겠다고 한다. 이건 또 뭔 짓거리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팩트는 간단하다. '방사능에 피폭되면 뒈진다'는 것이 가장 과학적인 진실이다. 알프슨지 히말라얀지 현대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아무리 '핵오염수'를 걸러도 '방사능물질'을 모두 다 거를 순 없다는 것도 '과학적 팩트'다. 이걸 아무리 희석한다고 해도 '방사능 수치'가 내려갈 뿐, '방사능 물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적은 양이라해도 '방사능 물질'은 방사능을 뿜어내며 이 방사능에 '피폭'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는 일본에 투하된 '원폭피해자들의 데이타'가 거의 전부다. 그렇게 피폭된 생존자들의 2세, 3세, 그리고 4세들까지 '방사능피폭'에 따른 원인모를 희귀질환에 시달리는 것을 일본정부는 생생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도 기시다 일본정권은 전세계가 공분할 '오염수방류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향후 30년간 오염수를 버린 다음, 완벽히 '핵폐기'를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온다는 가정이 따라야 하겠지만, 그 다음에 오염수 수도꼭지를 잠글지는 미지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하루에 500톤 이상을 방류하고, 30년 동안 방류하면 오염된 바다는 어찌 될 것이냔 말이다. 바다에 '검은 잉크 500톤'을 뿌려댄다고 상상해보잔 말이다. 아무리 '희석'을 한들, '검은 잉크'는 30년 이상 계속 버려지고 바다생태계 모두에 '검은 잉크'가 축적되고, 해양지층에 퇴적되고, 더 나아가 갯벌을 비롯해서 육지생태계까지 '검은 잉크'는 침범해서 결국 온지구가 '검은 잉크'로 얼룩지고 말 것이라는 '디스토피아'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시다 정권'의 유토피아를 짐작할 수 있다. 당장에 처리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니 가장 값싼 방법으로 '핵오염수의 부담'을 걷어내고, 넓고 넓은 바다에 아주 적은 양으로 희석시켜서 버릴 뿐이니 바다생태계가 견뎌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일본수산물'을 날것 그대로 먹어도 안전...아니 별탈은 일어나지 않겠...그래도 행여 안심이 되지 않으니, "기시다는 쬐끔 불안하니까. 노르웨이산 연어스테이크를 먹어줄꺼예요. 서민들은 안심하고 후쿠시마 앞바다 생선 많이 먹어서 삼중수소 박멸할 때까지 흡입해주세요. 그래야 기시다 베이비들은 미래에도 안심하고 스시 먹을 수 있을테니까. 다이죠~부"라고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를 상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 윤석열정부의 '유토피아'는 궁금하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얘들이 상상한 '유토피아'는 상상불가다. 당췌 '국익'이라는 것이 없는 '핵오염수 방류사건'으로 대한민국이 얻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들의 빵빵한 호주머니 정도일까? 고작 그딴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면 정말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는 알든 모르든 '무조건' 반복(?)된다면서 '120년 주기설'을 내세웠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120년 전을 살펴보니, '친일개화세력'이 나라를 팔아먹기 일보직전이었다. 윤석열정권이 2022년에 집권했으니 120년 전은 1902년이었다. 곧 러일전쟁이 벌어질 참이었고,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걍 내주고, 나라를 통째로 일제에 넘겨버린 주역들이 한창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단 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딱 그 꼴인듯 싶어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어난 일도 아니고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우리고 꿈꾸는 '유토피아'가 불확실 할수록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디스토피아'가 닥쳐올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다시 '일제의 식민지', '미국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최선도 우리는 익히 경험했다. 이명박 정권때도 물대포를 맞아가며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 정권때도 엄동설한에 어묵국물로 추위를 달래며 '촛불'을 들었다. 윤석열 정권이라고 다를 건 없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위해 촛불을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시들하다. 촛불의 주역들이 촛불을 들 생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시들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걸까?

 

  이명박 때의 촛불들은 '광우병'으로부터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를 꿈꿨다. 박근혜 때의 촛불들은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을 선동하는 부정한 세력을 내몰고 깨끗한 국정을 꿈꿨다. 그런데 윤석열 때로 접어들자, 국민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진실은커녕 온갖 거짓선동만 퍼나르며 '과학'이라고 우기는 거짓선동꾼들만 가득한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참에 바른소리, 옳은소리, 뼈아픈소리를 외치던 지사들마저 두문동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냔 말이다.

 

  총선 때를 기다려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방식은 가장 소극적인 방식으로 큰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도 '여소야대의 정국'인데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할 때다. 한동훈 장관은 '사형집행' 운운하며 칼부림을 참지(?) 않을 것이라 겁박하는 형국이다. 이럴 때 무엇을 기다리냔 말이다.

 

  우리는 3·1만세혁명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4·19혁명으로 부정선거를 용납치 않았으며, 5·18혁명으로 부당한 정권을 하나 뿐인 생명을 내놓고 부정해봤고, 6월혁명으로 그 정권을 작살냈었다. 그 이후에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서 우리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를 꿈꿨었다. 당신은 그때 꿈꿨던 우리의 유토피아를 잊었단 말인가? 그건 아니 된다. 비록 우리가 꿈꿨던 '유토피아'가 실제로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지언정 '유토피아'를 꿈꾸길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꿈꾸길 포기하냔 말이다. 어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120여 년전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다는 '매국노들의 후예'가 지금 본색을 드러내고 저들의 세상이 온것마냥 나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들을 소통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경일에 '일장기'를 내걸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저들을 싹쓸이할 기회가 '바로 지금'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이 땅의 매국노들을 싹 쓸어버린 '뒤'의 대한민국을 말이다. 또다시 흐지부지 끝날 '그날 이후'를 미리 걱정할 필요따윈 없다. 그래서 난 즐겁다. 날이면 날마다 '망국의 앞잡이들'이 목을 길게 늘이고 나불대고 있는 지금이 말이다. 얼마나 좋으냔 말이다.

 

  이렇듯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비-존재의 대상'으로 삼아 무궁한 고찰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 <유토피아>가 얘기하고 있는 골자로 생각한다. 각각의 저자들이 나름의 '전문분야'에서 나름의 '유토피아의 개념'을 풀어냈지만 말이다. 정신분석학에 걸맞게 '유토피아'와 '정신병'에 유사한 점을 분석한 저자도 있었다. 따라서 과거의 '광기어린 인물'들이 종종 '천재성'을 발휘하여 모든 인류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도 말한다. 꽤나 신선한 풀이가 아닐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도 광기어린 천재들(장승업 등)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예가 있어 솔깃한 내용이었다. 허나 나는 한 술 더 떠서 '한 사람의 정신병자'가 나라를 거덜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의식의 저널'은 무한한 상상의 재미를 선사하는 책이라 마음에 흡족했다. 다음 책도 무진 기대가 된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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