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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7 : 일리아드.오디세이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7
김준배 글, 문성호 그림, 손영운 기획, 호메로스 원작 / 채우리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만화가 아닌 '원전'으로 읽는다면 무척이나 힘든 여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 까닭은 첫째, 1500쪽이 훌쩍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에 압도 당하기 때문이고, 둘째, 오래된 말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낯설다 못해 그 내용마저 지루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며, 끝으로 대서사시에 걸맞는 수많은 영웅과 신들의 등장만으로도 헷갈려 죽을 지경인데 그런 영웅과 신들이 연출하는 장면과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진즉에 통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청소년이 읽기에는 '만화형식'이 옳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토록 방대한 원작을 '만화'로 옮기는 작업 또한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일단은 방대한 내용을 '덜어내는 일'이 만만치 않고, 축약한 내용만으로도 '원전의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청소년에게 꼭 필요한 지식(교훈)을 적절히 가미하고 드러나게 하는 작업까지 마치고 나면, 애초의 '원작'과는 완전히 새로운 '각색'으로 재탄생이 되기 일쑤다. 그나마 '윤색'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원전'을 훼손하기 십상인데, 그러한 문제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감수'라는 작업이 뒷받침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쨌든, 내가 하고픈 말은 이 책은 그런 문제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원전의 맛'을 최대한으로 살려내서 좋은 책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라는 원전이 그만큼 읽기 힘드니, 꼭 읽어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미리 경험을 쌓는다는 차원에서 이 책을 먼저 접해도 좋겠다는 말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원전'을 먼저 접하긴 했지만, 막상 완독하고 난 뒤에도 무엇에 감동을 먹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숨에 읽기 힘든 방대한 분량이었던만큼 한 달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틈틈이 읽었던 탓에 줄거리조차 정리하기에도 벅찼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조금 찌끄려보았다.
그렇다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주제파악'이다. 그리고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그 주인공의 '행동'과 '말'을 꼼꼼히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이고, <오뒷세이아>의 주인공은 오디세우스이다. 그리고 두 원전의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이고, '오디세우스의 모험'일 것이다. 그럼 두 원전의 주제에 대해서 좀 더 풀이를 해보자.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원치 않는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꼬여내었다는 것도 아킬레우스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그리스 연합이 트로이 동맹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에도 아킬레우스는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킬레우스는 신탁조차 전쟁에 참가하면 명예를 얻지만 단명할 것이고, 전쟁에 불참하면 오명이 따르겠지만 수명을 다할 것이라고 하였기에 전쟁에 참가하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명예일지라도 고작 명예를 얻기 위해 하나 뿐인 명예를 버릴 멍청이는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아킬레우스는 오디세우스의 꾀에 속아넘어가 '불사의 몸'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되었다.
이런 아킬레우스가 무려 10년이나 이어진 전쟁에서 얻은 명예가 얼마나 많았겠나. 그런데 마지막 50여 일을 남겨둔 전쟁의 끝자락에서 아킬레우스는 돌연 전투에 더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바로 그리스 연합의 또 다른 영웅이자 총대장이기도 했던 '아가멤논'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지리하게 이어져온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리스 연합은 여러 곳에서 불협화음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바로 '전리품 배분'에 있어서 쌓였던 불만이 속속 드러나게 되면서 저마다 제 잇속을 챙기기에 급급해진 와중에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이었던 브리세이스(아폴론신전의 여사제, 아킬레우스의 연인)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원치 않은 전쟁에 더는 미련도 남지 않아 불참을 선언하고 만 것이다. 그 때문에 그리스 연합은 트로이 동맹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지만 어느 누구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만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며 수많은 영웅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갈 뿐이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원전에서는 '신들의 불화'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애초에 불멸의 존재인 탓에 신들의 다툼은 결말을 맺지 못하고, 그 다툼의 '대리전'으로써의 트로이 전쟁이 펼쳐졌던 것이다. 여기에도 불화의 신 에리스가 던져둔 '황금사과'로 이어지는 기나긴 스토리가 전해지지만 <일리아스>에서는 애초부터 신들이 편을 갈라 서로 다투며 애꿎은 영웅들의 희생만을 강요할 따름이다. 자신들의 성질머리를 고칠 생각은 않고 말이다. 그렇게 그리스와 트로이의 영웅들은 신들의 싸움을 '대신'해서 싸우다 죽어나갔고, 끝내는 아킬레우스의 절친이었던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대신 입고 나가 싸우다 헥토르에게 일격을 당해 그만 죽고 만다. 이로 인해 아킬레우스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무엇인가 느꼈던 모양이다. 명예도 아니고, 전리품(이익)도 탐내지 않고, 조국의 승리를 위해서도 아닌 오직 '친구의 죽음'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복수의 화신이 되어 자신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고 분노를 극으로 치닫게 하는 아킬레우스에게 열렬히 환호했던 셈이다. 이게 고대 그리스인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리아스>에 열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핵심이다. 오직 친구(우정)만을 위해서 펄떡펄떡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에 감동했던 것이다. 비록 그 분노의 끝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만들었다하더라도 하더라도 그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마는 '용기'에 아낌없이 박수를 치면서 말이다. 당신에게도 그렇게 심장을 뛰게 만드는 친구가 있는가? 아니, 당신을 위해 기꺼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어줄 친구가 있느냔 말이다.
한편,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각자 고향으로 되돌아간 그리스 영웅들 중에 아주 오랜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는 모험가를 그려냈다. 전쟁이 10년 동안이나 이어졌는데, 고향 이타카에 도착하기까지 또다시 10년이란 세월을 속절없이 보낸 모험가 말이다. 바로 '오디세우스'다. 무려 20년 만의 귀환이다. 이런 오랜 기간의 방랑을 원해서 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런 방랑을 누가 바랄 수 있단 말인가? 30세에 떠난 여행이었다면 50세에 이르러 겨우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되돌아 온 셈이다. 그런데 우리네 삶이 그렇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마치 오디세우스가 떠난 20여 년의 모험 또는 방랑과 무척이나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겪은 10년의 모험담을 읽으며 수없이 겪게 되는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마침내 고향땅을 밟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뜻깊은 경험을 겪으며 어마무시한 삶의 지혜를 얻게 되는 축복(?)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리아스>를 읽고 '친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무엇보다 값진 '삶의 지혜'를 얻게 되는 경험담에 귀기울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리아스>는 20대에 꼭 읽어보길 권하고, <오뒷세이아>는 40대에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다른 나이대에 읽었을 때와 사뭇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서양문화의 이해'를 얻기 위해 읽거나 '그리스로마 신화의 연장선'으로 읽어도 나름 뜻깊은 일이 될 것이고 말이다. 나의 해석은 이렇다. 당신의 견해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