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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로마를 만들었고, 로마는 역사가 되었다 - 카이사르에서 콘스탄티누스까지, 제국의 운명을 바꾼 리더들 ㅣ 서가명강 시리즈 20
김덕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11월
평점 :
[My Review MCMLXXXI / 21세기북스 35번째 리뷰] 서양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라고들 한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로마사'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확실할 것이다. 왜냐면 로마사에는 '정치'를 비롯해서, '경제', '종교', '철학', 그리고 '전쟁사'까지 서양 문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은 통틀어서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로마사에서 '리더(황제)'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였다. 단 한 명의 통치자일 뿐이지만, 단 한 명의 통치자로 인해서 나라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로마사'를 통해서 너무나도 잘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이 책에선 네 명의 황제를 주축으로 다루고 있다. 순서대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디오틀레티아누스', 마지막으로 '콘스탄티누스'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공화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즉, 다수의 '원로원'이 두 명의 '집정관(임기 1년)'의 통치행위를 쥐락펴락하면서 로마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데 주력한 덕분이다. 나중에 '호민관'이 더해지면서 '평민들의 요구'도 통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로마'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제시하는데 역점을 두어 점점 강대해지는 모습을 갖춰나갔다. 물론 '독재관'이 등장해서 로마가 뒤흔들리는 때도 있었다. '포에니 전쟁' 때에는 한니발의 공격에 의해 로마의 '동맹시'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가며 최대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한때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으로 위기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는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했으며, 오히려 그런 위기를 계기로 삼아서 더욱더 나은 제도를 보완하는 기회로 삼을 정도로 건전했다.
허나, 로마의 영토가 점점 커지게 되자 '임기 1년'의 짧은 집정관 제도만으로는 팽배해진 로마를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다. 로마에게 가장 먼 지역인 '히스페니아(오늘날 스페인(에스파냐)) 영지'로 왕복은 고사하고 편도로만 가는데에도 1년이 소요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먼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 '집정관'이 직접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도착하자마자 승리하고 돌아올 즈음에는 로마에서는 '새로운 집정관'이 임기를 시작하고 있고, '옛 집정관'은 승전보를 알리기도 전에 퇴임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더는 짧은 임기를 가진 '공화정 체제'로는 거대해진 로마를 통치하기에 힘에 부쳤던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권력욕'을 뿜뿜했던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다. 그도 '갈리아 평정'을 하고 되돌아오는 과정에 10년이 훌쩍 지나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오래 전장을 누비도 로마로 되돌아가면 그저 '승리한 장군'에 불과할 뿐, 로마는 원로원을 차지한 의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던 실정이다. 고생은 자기가 했는데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원로원 의원들었던 것이다. 이에 참지 못한 '카이사르'는 그 유명한 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며 자신과 동거동락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깜짝 놀랐지만 누구도 카이사르와 대놓고 대적할 이는 없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꼬드겨서 '삼두정치'를 시작했고, 원로원을 단숨에 제압하고 로마를 '분할통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곧 '1인 체제'를 구축하며 '종신독재관'에 취임하게 된다. 크라수스는 동방으로 전쟁을 나섰다가 전사했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서 이집트까지 쫓겨난 뒤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남아 '로마의 공화정'을 대신해 '황제정의 서막'을 열려고 했으나 '공화정파의 암살 실행'에 의해서 카이사르는 그만 죽고 만다. 카이사르가 '왕'에 오를 것을 우려한 '공화정파'가 카이사르를 죽이고 로마 공화정을 유지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암살을 시행했고, 성공했지만 로마는 '공화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미 로마시민들은 '강력한 통치자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마시민은 '강력한 통치자'를 잃은 슬픔을 원로원과 공화정파에게 쏟아부었고, 이를 통해서 카이사르의 측근이었던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차가 그러했듯 2차 삼두정치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카이사르가 남긴 유서가 공개되면서 '10대 소년'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카이사르의 부하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군단을 이끌고 옥타비아누스와 대결을 벌인다. 허나 이집트 왕조의 클레오파트라까지 동원한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를 하면서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최종승리를 거두었다. 실력 차이도 있긴 했으나 '외국군(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군대)'까지 끌여들여 '로마군단'과 맞서 싸우는 것에서 명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옥타비아누스는 대승을 거두고 로마로 개선을 하였고, 정식으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아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고 '첫 번째 황제(프린켑스)'로 등극하게 된다. 이후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이 아우구스투스가 집권을 하던 시기가 '로마에 의한 평화(팍스 로마나)'가 이루어지던 시기다. 그만큼 제국은 평온했고, 영토확장을 위해 싸우는 족족 승전을 거두는 등 로마는 거칠 것이 없을 정도였다. 허나 '최고의 정점'을 찍었을 때 내리막을 타는 것은 진리다. 팍스 로마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제국 곳곳에서 삐거덕거리는 일이 비일비재로 터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실패는 '안정적인 제국'을 물려줄 만한 뛰어난 자질을 갖춘 휴계자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10대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옥타비아누스는 77살까지 살며 장수했지만, 정작 '아들'을 낳지는 못했다. 그래서 '양자'를 들이게 되는데, 하필 그 양자들마저 요절하더니, 결국 가장 망나니여서 절대로 '황위'를 넘겨주지 않겠다고 내쳤던 티베리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카이사르의 후계'는 네로 황제를 마지막으로 끝나고, 그 뒤에는 '속주(이탈리아 반도 밖) 출신'의 황제들이 뒤를 잇게 된다. 그나마 속주 출신이더라도 능력과 자질이 뛰어난 '오현제 시대'에는 팍스 로마나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현제 가운데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겐 콤모두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어릴 때에는 로마군단의 귀염을 한 몸에 받았던 모양이지만, 커가면서 애물단지로 변했고,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로마를 '개판 5분전'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제국 통치는 나몰라라하고 '암살' 당할 뻔한 위기 뒤에 아주 그냥 미쳐버려서 온갖 악행이란 악행은 다 저지르다 근위대장에게 암살 당하고 만다. 이를 영화화한 것이 <글래디에이터>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도 '검투사'를 즐기다가 죽임을 당하는 줄거리인데, 실제 삶도 꼭 그랬다고 한다.
그 뒤로 50년간의 군인황제 시대가 펼쳐지면서 제국은 더욱더 엉망이 된다. 무려 18명의 황제가 바뀌었고, 임기가 2년도 안 되는 황제로 여럿이었다. 제국은 늘 '군인들의 쿠데타'의 연속이었고, 막강한 군대의 개입으로 정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여기에 북쪽에선 게르만족이, 동쪽에서는 페르시아인들의 '이민족 침입'이 잦아지니 제국은 더욱더 약해지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하층민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태어났다. 그는 어릴 시절 '군인들이 실력을 키워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 그 자신도 '군인'이 되길 희망했다. 그러다 283년, 40살이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많은 전공을 세워 '콘술(공화정 시대의 최고 정무관)'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는데, 근위기병대장 시절부터 병사들로부터 추앙을 받으며 인기를 모은 탓에 전폭적인 지지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동방의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서방의 황제, 카리누스'와 내전을 일으켰고, 끝내 최종적으로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강력한 황제권을 휘두르며 로마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도미나투스(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다), 전제정'를 창시하며, 자신을 신격화하고 원로원을 무시하며 '절대적 전제군주의 통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군대를 키워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고, 정부의 행정기구도 마찬가지로 강화시켜 '황제권 체제'를 유지시켰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1인 통치'를 하기에 너무 광대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4제 통치체제'다. 먼저 막시미아누스를 양자 겸 '부황제'로 임명해 서방 황제로 임명하고, 자신은 동방 황제를 자처했다. 그리고도 부족해서 두 황제 밑에 '부황제'를 한 명씩 두기로 한다. 그렇게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부황제는 '카이사르'로 칭하며, 동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와 '갈레리우스 카이사르'가 통치했고, 서로마는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우스 카이사르'가 통치했다.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버지다. 암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의 '구원투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의 통치기간 동안만큼은 국정이 안정되는 모양새를 취하긴 했다.
그러나 '경제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그의 치세 동안 '군사력'은 강력했고, 그로 인해 '정치력'도 막강해서 제국은 안정화시켰지만, 그의 통치시기에 물가가 급속도로 올라가면서(인플레이션) 경제위기가 심각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별의별 수를 다 써보지만 효과가 미미하자 '그리스도교 탄압'을 자행하는데, 이로 인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가들의 빌미를 제공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강력한 황제권을 구사하기 위해서 자신을 '신성화(최고신 유피테르(주피터)의 현신)'시켰는데, 제국내에 10%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문제였다. 경제를 부양시키고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황제가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데 '그리스도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이유로 참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황제는 그리스도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는데, 이 당시에 순교한 이들도 많았지만 '배교'한 이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로 잔혹하게 박해를 가했다.
그렇게 20년간 통치를 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서 '퇴임 선언'을 한다. 4제 통치의 원칙에 따라 '아우구스투스'가 퇴임을 하면, 그 자리를 '카이사르(부황제)'가 이어받는다고 했으니, 동로마는 '갈레리우스 아우구스투스'가 서로마는 '콘스탄티우스 아우구스투스'가 이어받는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황제의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서로마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서로마 황제로 등극하자 '군사훈련'을 빌미로 아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순순히 응한 갈레리우스 아우구스투스는 33살의 콘스탄티누스를 서로마로 보내줬고, 1년 뒤에 콘스탄티우스가 갑작스럽게 전사하자, 콘스탄티누스가 군대를 발판 삼아 빈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을리 없다. 군대의 힘으로 서로마 황제(아우구스투스)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억울하게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왜냐면 막센티우스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는 '서로마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어서 내려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퇴임 선언'으로 강제로 퇴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콘스탄티우스의 죽음으로 빈 황제자리를 콘스탄티누스가 날름 차지하는 것에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은 로마 북쪽 '밀비우스 다리'에서 충돌했고, 콘스탄티누스 군대가 승리했다. 이 전투는 '그리스도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기도 하는데, 이 전투에서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군대에 '십자가를 그리라'는 계시를 받고 전투에 임했더니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는 '하느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논리를 설파하기 위해서다. 암튼, 이를 계기로 콘스탄티누스는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고, 이는 그리스도교가 성장하는데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후에 '밀리노 칙령'과 '니케아 공의회'로 삼위일체론 이외의 모든 교파는 '이단'으로 삼고, 로마의 국교는 명실상부하게 '그리스도교'로 공인 된다.
그렇지만 이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가 심했고, 이 과정에서 '순교'하길 거부하고 '배교(교리를 배신함, 즉, 오직 단 한 분만이 유일한 신임을 부정하고 그리스로마의 신들께 올리는 제사에 참석하여 목숨을 구한 사람들)를 한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처럼 제국의 안정이 찾아왔는데, 이를 한순간에 허물어뜨릴 수 있는 숙청을 콘스탄티누스 1세는 하지 않고서 '관용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1천년 가까이 '황제'가 신격화되었고, 그런 신들을 모셔왔던 로마시민들이 하루 아침에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콘스탄티누스는 '살아있는 신'으로 존재하기도 했으며, 로마는 '종교의 자유화'를 누리며 더이상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없었던 것이다.
자, 여기까지 카이사르부터 콘스탄티누스까지의 로마사를 간추렸다. 그리고 어떤 '리더'가 로마라는 '대제국'을 흥하게 하고, 또 망하게 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 또 흥하게 하기 위해서 '정치의 힘', '군대의 힘', '종교의 힘'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를 안정시키는 모습을 엿볼 수도 있었고, 공통적으로 '경제의 힘'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아무리 막강한 제국일지라도 한순간에 파멸로 귀결할 수 있음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국제사회가 돌아가는 모습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각국이 '경제 무능력'을 보이는 순간,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결국엔 '정국 불안정'이 되자 여러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강대한 로마제국도 한순간에 망가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경제위기는 왜 찾아오는가? 이걸 잘 짐작하면 얼마든지 해결방법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역사공부를 하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과거의 사실'만 눈여겨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속에서 '오늘날에도 써먹을 수 있는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배우고 또 익히는 것이다.
이 책에선 '리더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건 '그리스도교의 승리'라는 좁은 시선에서 바라본 결과여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넓혀서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고심하면 '단 한 명 때문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니 리더를 잘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더가 엉망진창일 때 바로 대체할 수 있는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점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