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당신을 구할 철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18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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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I / 21세기북스 31번째 리뷰] 각설하고, '사는 게 고통의 연속이다. 오히려 죽는 게 축복이다'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말이 절로 공감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와 대판 싸웠기 때문이다. 정말 맘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대화는 통하지 않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싸움의 원인은 별 것도 아니다. 발단은 '잔소리'였고, 절정은 '잔소리, 듣기 싫다'였다. 그리고 결말은 '냉전'이다. 이와 같은 별 것 아닌 싸움이 왜 지속되는가? 그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다르고, '서툰 표현'으로 서로의 감정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엄마는 바닷가가 고향이라 '생선요리'를 좋아한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돼지고기요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난 '생선요리'가 싫다. 첫째 '비린내', '비린맛'이 나기 때문이다. 비위가 약한 나는 그런 요리가 너무 싫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생선요리'면 다 좋아한다. 대신 '고기요리'는 소화가 안 된다며 싫어하신다. 심지어 '소시지, 햄요리'도 건강에 좋지 않다며 싫어한다. 그런데 난 좋아한다. 어릴 적에 넉넉히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도 햄반찬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그런데 엄마는 일절 그런 음식을 해준 적이 없다. 이렇게 두 식구가 조촐하게 사는 집인데,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일조차 너무 다르다. 그러니 '반찬투정'조차 싸움의 원인이 된다. 다 늙어서 반찬투정을 하는 것도 그렇고, 식사를 간단하게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면, 집에서 밥을 먹고 다닌다고 '한 소리'를 하신다. 그래서 다음 날엔 집에서 식사를 하면, 내가 싫어하는 '생선요리'를 내놓는다. 싫다면서 '고기요리'를 해달라고 하면 엄마는 젓가락도 대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라고 하면 좋아서 만들어놓고, 정작 내가 먹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신다. 그래서 싫은 음식 좀 강요하지 말라고 하면, 그때부터 '잔소리' 시작이다. 평생을 이러고 산다. 오늘 아침도 이런 식으로 '했던 얘기' 또 하며 잔소리를 하다가 엄마가 자식한테 얘기하는 걸로 아들은 화만 낸다고 또 역정이다. 이렇게 또 당분간 '냉전'이다. 정말 사는 게 고통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다'라면서 엿 같은 세상을 살아주는 것도 황송할 따름인데, 고통을 주다가 권태(지겨움)까지 주니 더욱더 엿 같다고 말했다. 깊이 공감하는 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는 게 고통, 아니면 권태인 것인가? 그건 바로 인간이 지닌 '욕망'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통과 권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욕망이 발생하면,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해 고통이 생기고, 그 욕망을 충족시킨 순간의 잠시동안 '행복'했다가, 곧이어 지독한 '권태'를 느낀다고 지적한다. 그러다 새로운 욕망이 생기면 또다시 이루지 못해서 고통을 수반하고, 이루는 순간 잠시 잠깐의 행복을 누리다, 금세 영원할 것 같은 권태를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독한 가난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지만 일만 해서 부자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할 뿐이다. 그래서 매주 '로또'를 산다. 그리고 1등 당첨을 바라고 또 바란다. 이렇게 이 남자는 일상이 고통이다. 가난하기에 하고 싶을 것 다 하지 못한다. 세상은 가난한 그에게 더욱더 큰 고통과 시련을 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게 만든다. 그러다 운 좋게 1등에 당첨이 되었다. 10억 원이란 큰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그 남자는 가난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이 되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밥 한 끼 먹는 것도 아끼고 아끼던 나날을 걷어치우고 푸짐한 한 상을 차려서 넉넉하고 배불리 먹게 되니 분명 쫄쫄 굶던 과거보다 지금이 행복해진 것이 틀림없는데 그런 나날이 계속되자 금세 그 행복은 느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사치'와 '과소비'를 해댄 것도 아니다. 알뜰살뜰하게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에 흥청망청 돈을 쓰는 일도 없이 적당히 검소하게 살아갈 뿐이다. 통장잔고도 넉넉하기에 쪼들리게 살지는 않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운 욕망이 생겼다.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그 욕망은 다름 아닌 평소에 맘에 두고 있던 '예쁜 아가씨'다. 가난했던 과거에는 그 아가씨에게 말조차 건낼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 통장잔고가 두둑한 지금은 용기 백배해져서 커피를 사들고 우연을 가장해서 만남을 추진했다. 그리고 둘은 어느덧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남자는 행복했지만, 결혼을 승낙해줄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당장 10억이란 돈은 있지만, 그 돈으로 서울에서 집을 마련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을 벗어나 시골에서 시작한다면 조금은 여유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업 계획도 짰고, 전원주택도 마련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여자는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시골은커녕 도시 외곽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하고, 20억이 넘는 아파트에서 '신혼'을 꾸리고 싶어한다. 그게 자신의 꿈이란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 분명 과거보다 훨씬 넉넉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는데도 다시 '20억 아파트'를 구하지 못해 무능력자로 전락할 판이다. 예쁜 아가씨를 사랑하지만, 그 아가씨의 욕망을 충족시킬 능력이 안 되어서 이 남자는 또다시 고통의 늪에 빠졌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욕망'을 버리라고 말한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무욕'의 경지를 말하는 것과 같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가 없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여타의 서양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이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냉철한 이성보다 '욕망'이 인간을 더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쇼펜하우어는 그 해결방법을 '이성'에서 찾고 있다. 왜냐면 욕망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은 거의 통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성'밖에 없지 않느냐는 다른 철학자들의 충고를 쇼펜하우어도 어느 정도 수용한 셈이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이성'에 충실하라고 권고할 수 없던 쇼펜하우어는 이성을 살짝 비틀어 '의지'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하려고자 하는 '의지'만이 끔찍한 고통과 지긋한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의지'는 오히려 욕망에 충실한 노예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살려는 '의지', 부자가 되려는 '의지', 결혼을 성공시키려는 '의지' 따위는 각각 '생존욕구', '안정욕구', '성욕구' 등등 탐욕적인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선한 의지'를 표방해야 한다. 탐욕과 같은 '나쁜 의지'는 벗어던지고 세상이 주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착한 의지'를 앞세우는 냉철한 이성을 갈구해야만 진정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와도 참 닮았다. 불교에서는 '해탈하려는 욕구'마저 해탈해야 진정한 해탈에 이룰 수 있다고 더욱 경건한 자세를 요구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선한 의지'로 고통과 권태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도 능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니, 쇼펜하우어는 '실행 가능성'이 높은 방법을 제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나에게 쇼펜하우어의 지혜는 어떻게 완성해야 할 것인가? 내 고통의 원인은 '내가 싫은 것을 강요하는 엄마의 욕구'이고, 툭하면 나오는 '엄마의 잔소리'다. 정말 생각만해도 끔찍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쇼펜하우어적인 해법은 '내 욕망을 잠재우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생선요리를 군소리 없이 잡숴주는 것이고, 백만 번 했던 얘기라도 '백만 한 번'째를 더 들어주며 마음속으로 '참을 인'자를 새기는 것이다. 그렇게 내 욕망을 '엄마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겠다'는 선한 의지로 나를 '착한 아들'로 만드는 순간, 나에게 수반된 고통은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그렇게 '억누른 욕망'이 언제고 또 다시 박차고 나올 때라는 사실이다. 싫은 요리를 계속 먹을 수는 없지 않느냔 말이다. 또 '백만 한 번째'는 참을 수 있어도 '백만 서른한 번째'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릴 수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참고 또 참는 일'을 무한히 반복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건 진정한 해결방법이 아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쇼펜하우어는 '타고난 성격'을 극복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욕망에 충실한 상태에서 벗어나, 과연 '내 욕망'은 바람직한 것인지 진지한 고찰에 들어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고기반찬'만 먹고 '엄마 잔소리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엄마'가 없는 세상이라는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줄 뿐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도 먹을 수 있는 '생선요리'를 추천하고, '똑같은' 잔소리가 반복되지 않도록 나의 '라이프 스타일'에 변화를 주던가? '똑같은' 잔소리를 들어도 안 들리는 척, 못 들은 척, 딴짓을 해서 엄마의 주의를 돌리는 방법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노력을 '나' 뿐만이 아닌 '상대(엄마)'도 함께 해주면 좋으련만, 고령의 엄마가 그런 방법을 스스로 찾도록 강요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테니, 내가 2배 이상으로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딴에는 거의 '성자'와 같은 성스런 삶처럼 경건한 '욕망 제어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을 찾아내 '고통'을 벗겨내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시도해봄직하지 않은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고통보다 더한 시련이 주어졌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는 '서로의 욕망'을 이해해주고 '공통의 욕망'으로 함께 추구하며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대화와 타협'만이 대한민국 사회에 닥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다면 이런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이런 고통을 참아내며 그저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엿 같은 세상'이지만 조금이라도 '나의 욕망'에 딱맞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서 '대타협의 장'으로 뛰어들 것인가? 그 타협을 하는 동안 진정으로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과 상종을 할테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세상은 그런 악의 구렁텅이에 불과하다고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는데 말이다. 그런 악의 구렁텅이속에서도 진정 '선한 의지'를 발현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는 것,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우리가 마주한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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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5 : 말세편 - 완결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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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y Review MCMX / 엘릭시르 17번째 리뷰] <퇴마록>의 대단원이 막을 내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퇴마사들은 끝내 악을 물리쳤고, 세상을 말세로부터 구해냈다. 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고도 수많은 독자들은 눈시울을 훔쳤을 것이다. 왜냐면 퇴마사들의 '뒷이야기'를 더는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 '열린 결말'이지만, 세상을 구원한 댓가는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말세편'에서 보인 퇴마사들의 행보는 처절하기만 했다. 쉴 틈도 없었고 쉴 수도 없었다. 퇴마사들은 '단 한 명의 희생'도 그냥 손놓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결국 인간이기에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악의 무리들의 무분별한 횡포'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4명의 퇴마사들은 거의 자기 목숨을 내놓고 단 하나의 목숨도 헛되이 희생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희생'을 택했다.

이렇게나 숭고한 자기 희생에서도 번번히 퇴마사들의 목숨을 건져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악마'들이었다. 세계편에서 등장했던 대악마 '아스타로트', 그리고 혼세편에서 등장했던 '블랙 엔젤'은 퇴마사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해서 자신들의 일을 훼방 놓는 퇴마사와 그 일행들을 번번히 구해주는 일을 반복한다. 왜일까? 그 까닭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예언서>들과 관련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메랄드 스톤(녹비)', '이집트의 토트의 서', 그리고 '치우천왕의 우사가 남긴 해동감결과 우사경', 이 모든 예언서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인류의 종말', 즉 '말세의 도래'는 징벌자(적그리스도)가 한 여인의 몸에서 잉태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징벌자가 태어남과 동시에 인류의 종말은 '결정'되어 있으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종말을 막을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징벌자의 탄생'을 막는 일일 것이다. 이는 오랜 옛날 이집트에서 벌어진 '갓난아기 집단 살해' 사건과 유사하다. 이집트의 노예인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가 탄생할 거란 예언이 나오자 이집트의 왕은 '그 해'에 태어난 유대인 아기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 메시아는 '이집트 왕자'라는 신분으로 자라났고, 끝내 자신들의 민족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성경>에 '출애굽기'에 나온 내용이다. <퇴마록>도 바로 이런 예언을 차용하여 '치우천왕기'와 결부시켜 말세에 관한 예언을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해동감결>이었다. 이 예언서는 4000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나 잃어버리고 말았으나 '혼세편'에서 일본 명왕교에 남아있던 <해동감결>을 준후가 얻게 되어 그 내용이 해독되었다. 그리고서 펼쳐지는 내용이 '말세편'의 줄거리인데, 이 예언서의 내용으로 인해 전세계의 능력자들이 총출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퇴마록>의 줄거리를 소상하게 밝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듯 싶다. 2000년대 초반에 완결이 되어 그 결말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이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새로 읽는 독자도 있을 터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소상히 '스포'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퇴마록>이 지닌 의미조차 분석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독자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되어, 줄거리는 과감히 생략한 채 <퇴마록>이 지닌 본래의 뜻만 나름대로 해석을 덧붙여보고자 한다.

당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세기말 현상'이 남아 있던 터라 <퇴마록>의 인기는 정말 초절정이었다. 더구나 '말세의 도래'를 소재로 삼고, 이를 '오컬트 장르'로 풀어놓으니 정말 신비감이 뿜뿜 뿜어져 나와 당시의 독자들을 열광케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면서 작금의 대한민국이 처한 '말세의 도래'를 비추어보면서 읽는 맛이 참으로 남달랐다. 바로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다. 개인적으론 아주 어릴 적에 79년 박정희 서거로 인한 '비상계엄'이 떠오르고 이듬해 '5·18민주화혁명'과 87년 '6월항쟁'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모두 10대 겪은 일들이라 생생하지는 않으나,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얼마나 억압적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늘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듯 조심조심하던 어른들의 모습,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묘사'는 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조각들'로 쪼개진 단서들을 애둘러서 표현하셨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야 '와~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라고 감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히 '예언서'를 해독하는 과정과 유사해보이지 않은가?

암튼, '말세편'에서는 바로 이런 '예언서'를 둘러싼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맛도 참으로 쏠쏠하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예언서'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그 '예언서'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의심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그 따위 '고문서'의 내용을 믿겠는가? 라면서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믿고 싶은 뉴스만 골라서 보다가 끝내는 '가짜'와 '진짜'도 구분하지 못하고 끝내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세상이 바로 지금 펼쳐지고 있단 말이다. 자, 고대의 '예언서'가 가짜로 증명되지 않는 한 결국은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믿고 안 믿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짜 문제는 그걸 곧대로 믿고서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 문제이니까 말이다.

'말세편'에 등장하는 예언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3개였다. '우사경'은 <해동감결>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위한 '해설서'였기 때문에 결국엔 <해동감결>의 내용과 똑같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 예언서가 한결같이 '인류의 종말'을 말하면서 '징벌자의 탄생'을 예언했다. 이를 믿는 사람은 바로 그 '징벌자의 탄생'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퇴마사들은 다르다. '징벌자의 탄생'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예언서의 진위 파악'이 먼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퇴마사가 아닌 사람들은 왜 섣불리 '예언서'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을까? 그건 '욕심'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퇴마사들에게 없는 것이 바로 '욕심'이다. 그들의 '퇴마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밝혔던 포부이기도 하다. 그들을 목숨을 내던지는 위대한 일을 행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아니 그런 이익을 조금이라도 얻게 되면 무척이나 부끄러워했다. 이게 선한 사람들의 '선한 의지'다. 퇴마사들의 능력이 더 쎄지면 쎄질수록 그들의 '선한 의지'도 함께 드높아졌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퇴마록>에 푹 빠지게 된 까닭이 바로 이런 퇴마사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들의 순수한 의도가 청년 시절의 나에게 크나큰 감명으로 다가왔고, 나 또한 퇴마사들처럼 '선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퇴마록>은 소설책이 아닌 '경전'이기도 했다. 나에게 주어진 능력을 아낌없이 '모두의 행복'을 위해 쓰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책이 '경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냔 말이다. 이런 '선한 의지'는 말세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예언서'에 적힌 내용이 맞느냐? 틀리느냐? 가 아닌, 그 '예언서'가 인간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더 많은 염두를 두고서, 그 내용이 퇴마사 자신들의 '선한 의지'에 반한다면, 과감히 그 '예언'을 따르지 않겠다는 행보를 볼때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 '예언'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 예언의 내용은 반드시 이루어졌다. 하지만 퇴마사들은 그 예언대로 '인류의 종말'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징벌자의 죽음'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억울한 죽음'은 퇴마사들이 용납할 수 없고, 이는 '징벌자'일지라도 예외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왜냐면 징벌자의 탄생이라 했으니, 그 징벌자는 '아기의 모습'으로 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무슨 죄'가 있어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인가? 퇴마사들은 결코 그런 예언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능력자들은 달랐다. 예언의 내용은 엄숙하며, 반드시 따라야만 할 '정언명령'이기에 비록 '순진한 아기'의 모습일망정 이 세상을 멸하러 태어난 악마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맞선다.

다시,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계엄군'은 포고령 1호에 따라 국회로 달려갔고 국회의원의 정당활동을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지 않는 잘못된 명령이다. 헌법 어디에도 '계엄시 국회의원의 활동을 불허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에는 긴급한 상황이라 그 내용의 적법성을 몰랐다하더라도 '현직 국회의원의 정상적인 활동'을 총칼로 위협하고 막아서지 않은 계엄군의 행동은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예언서'의 내용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며 무고한 목숨을 해치려 한 능력자들의 모습인가? 아니면 아무리 '예언서'에 적힌 내용일지라도 온당하지 않은 내용이라면 결코 따르지 않는 퇴마사들의 모습인가? 당시 계엄군들의 모습은 '선한 의지'가 발동된 퇴마사들의 행보와 일맥상통한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12·3 비상계엄날 큰 불상사는 없었던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난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기서 찾아보려 한다. 낡은 이념에 찌들고, 뻔한 프레임으로 쉴드치고, 치졸한 선전선동으로 지지자들의 난동을 불러일으키더라도 퇴마사들이 보여준 '선한 의지'를 따르는 현명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훨씬 더 많이 있음을 믿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점쳐본다. 이렇게 우리에게 닥친 '말세의 도래'는 극복되고, 저들의 뻔뻔한 수작들은 남김없이 밝혀져서 두 번 다시 대한민국에 발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국민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그 어떤 어려움에도 끄떡 없을 것이라고 외치는 바다. 비록 <퇴마록>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나는 언제고 다시 <퇴마록>을 꺼내 읽을 것이다.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무리들은 '선한 의지'의 빈틈을 뚫고 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현명한 국민들의 '퇴마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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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언규 기획, 박종호 그림, 달콤팩토리 글 / 아울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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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IX / 아울북 26번째 리뷰] 호야와 친구들이 유튜브로 '업사이클 의류 사업'을 시작하더니, 사업에 이어 '주식투자'에 도전하고, 결국 TV 출연에 확정되면서 '어린이 주식대회'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어린이가 '의류사업'을 시작하고, 유튜브 채널로 '사업홍보'도 하며, 사업과 홍보에 동시에 성공하니, 결국 TV프로그램에 출연까지 하게 되는 스토리가 전개되었다. 어쨌든 '어린이경제 학습만화'를 표방하고 있는데,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하고, 배우고, 따라할 수 있는 컨셉이면 좋으련만, 쉽게 이해하고 배우는 것까지는 가능한데, 어린이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사업과 채널, 그리고 주식투자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어 보인다.

더구나 '투기'와 '투자'의 차이점을 소개하면서 기업의 재무재표까지 조사하고 분석해서 올바른 투자를 익히는 방법을 소개한 것은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린이들이 '각 기업의 정보'를 직접 조사하고 투자할 수 있는 귀띔이라도 좀 해주는 것도 없이 '어른들의 투자 정석'을 고대로 '베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나마 '어린이 주식대회'에서 호야가 보여준 '가치 투자'와 '장기 투자'의 방법을 소상히 소개한 것은 아주 적절했다고 본다. 어린이들만이 할 수 있는 투자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장기 투자'다. 요즘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기에 어른들처럼 '주식창'을 온 종일 들여다보며 '투자정보'를 종합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적절한 투자시기'에 주식을 매입하고 매수하는 일을 간단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어린이들도 얼마든지 '주식 투자'를 공부한다면 핸드폰 어플을 통해서 간단히 주식매입과 매수를 직접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문가적인 방식이 아닌, 평범한 어린이들이 '장기 주식투자'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투자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펀드 투자' 방식이나, '분산 투자(ETF, 상장지수펀드)'를 하며 워렌 버핏처럼 장기 투자를 통해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이 주식투자의 가장 큰 매력은 5년, 10년, 20년 이상의 '장기 투자'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럴 때 '수익성'이 높은 주식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수 있지만, 그렇게 '투자의 기본개념'도 얻지 못하고 단순히 '높은 수익률'만 따지는 투자 방식으론, 결국 '투기 방식'만 배울 뿐일게다. 이렇게 아무런 노력도 없이 '성공'을 해서 엄청난 수익을 거머쥔들 그 돈을 결국 허투루 쓰고 말 것이다. 마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은 '공짜돈'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가치 투자'를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어린이들의 꿈을 반영해서 '자기 꿈'과 관련이 있는 회사에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럼 '자기 꿈'을 키우는 즐거움과 함께 '꿈의 회사'도 함께 성장하고 번창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를 테면, 패션디자이너가 꿈인 어린이는 '패션의류회사'에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럼 자신이 투자한 '패션회사'의 성장과 함께 자신의 자산도 함께 늘어날 것이니 더욱 뜻 깊은 투자방식이 될 것이다. 더구나 어린이 투자이므로 기본적인 '장기 투자'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투자를 했기에 자기 꿈과 관련된 회사의 '주인의식'도 더불어서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투자방식은 어린이들에게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어린이들의 꿈도 투자회사의 성장과 함께 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호야와 친구들은 '응원주'라고 명칭을 붙였다. 이런 '가치 투자'는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교육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계점'도 있다. 투자는 황소처럼 오를 때도 있지만 곰처럼 내릴 때도 있다는 점 말이다. 더구나 어린이가 투자한 회사가 10년도 안 되서 '폐업'이나 '상장폐지'가 될 경우엔 큰 손실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응원주 투자방식'은 꾸준한 점검과 관리가 함께 해야 한다. '장기 투자'랍시고 그냥 묻어두고 관심을 두지 않다가 막심한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금융투자 공부'는 꾸준한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희일비'하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투자의 기본은 '오르막내리막'을 잘 견디는 것이다. 그리고 잘 판단해야 한다. 투자에서 본 손실은 그 누구도 온전히 보상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투자를 잘 하는 사람은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투자의 세계에선 어린이라고해서 예외는 없다. 꾸준하고 꼼꼼한 경제공부만이 유일한 성공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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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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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VIII / 이야기장수 1번째 리뷰] 대학생 시절에 나는 한 살 많은 누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너는 남자니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고 말이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을 살리자는 취지의 운동이 '페미니즘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나에게 '넌 남자니까' 본질적으로 페미니스트는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하는 누나의 말투가 '네 뜻은 가상하다만'으로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남자인데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도 전혀 없이, "감히 남자 주제에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라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자반장'을 지지했던 나인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도 아니다. 지금도 논술쌤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인권'을 향상시키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녀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거나 열성당원처럼 광적인 집회, 시위에 참여해 강성한 의사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지지를 보내고, 약간의 후원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의 이런 모습에 여성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고, 남성들은 '역차별' 받는 게 억울하지도 않냐면서 툴툴거린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왜 '사람'이 '사람'을 차별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를 차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왜냐면 '남자'도, '여자'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차별'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고서는 '차별'을 정당화시킨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그런 차별을 하겠냐면서 나보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긴다. 안 그럴 것 같다고?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여성이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찌찌가 그대로 존재감을 뿜뿜하는 의상을 입고 있다면 어떻게 반응하는지 물어보라. 대한민국 사람들 가운데 십중팔구는 '여성의 찌찌노출은 안 된다'면서 공공장소에서는 모든 여성들은 '브래지어'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법안까지 만들어야 하며, 이를 어기는 여성에게는 '경범죄'를 적용해서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높이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보수적인 남성들의 목소리만은 아니다. 보수적인 여성들도 똑같은 목소리를 낸다. 그럼 진보적인 남성들은 '괜찮다'고 말할까? 아니다. 자기와 상관이 없는 여성이 찌찌를 노출한다면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다가 '자기 엄마'가, '자기 아내'가, '자기 애인'이, '자기 딸'이 찌찌를 드러내는 '노브라 의상'을 입으면 질색팔색을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진보적인 여성들은 '브래지어 착용'으로 인한 불편을 호소하며 그나마 논리적인 찬반의견을 내놓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브래지어'는 왜 꼭 착용해야만 하는가? 일일이 이유를 다 밝히기에 지면이 부족할 정도지만,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노브라는 너무 야해서', '성범죄를 유발시키므로', '그냥 부끄러워서', 그리고 '그냥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라는 답변이 많았고, 그 다음으로 많은 이유는 '어릴 적부터 착용을 해서 안하면 오히려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런데 '브래지어 착용'에 논란이 되는 부분은 또 다른 이유다. 남자의 찌찌는 부끄럽지 않은데, 왜 유독 여성의 찌찌만 부끄러워해야 하느냐로 시끄럽기 때문이다. 남자는 찌찌가 돌출되는 의상을 입든, 그냥 벗고 노출하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 편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남성이 찌찌 노출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남성들 가운데에도 '여성형 유방'을 갖고 있는 분들은 찌찌 노출 뿐만 아니라 상의 탈의조차 꺼리는 분들도 많다. 이들조차 '남자답지 못한 가슴'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여성스런 가슴'을 가졌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왜 '가슴(찌찌)'에 대해 이런 차별이 생겼냔 말이다.

물론 부끄러워하는 것도 '개인의 성향'일 뿐이다.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의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브래지어 착용'을 사회적으로 강요할 까닭이 전혀 없다. 그냥 '개인의 성향, 자유의지'에 맡겨두면 된다. 오히려 '여성의 찌찌'만 보면 거시기가 꼴려서 성적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야만성'에 대해 사회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이런 논의를 공론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성의 몸'을 옭아매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인식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진정한 '양성평등'을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인식의 문제로 접근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남녀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여성의 몸'을 속박하는 방향, 즉 '브래지어 착용'을 의무화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심지어 '남성의 성욕'은 원래 인간의 본능이라면서 두둔하며 성범죄에 대해서도 '여성에게만 강제적인' 대처방안들을 내놓는 사회가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페미니즘 논쟁'이 이 책 <가녀장의 시대>와 무슨 상관이냐고? 이슬아 작가의 경험담에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남의 찌찌에 상관 마'라는 소제목이 나와 있기에 화두를 던져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부장'이 아닌 '가녀장'이라고 표현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한 집안에서 '가장'의 역할을 보통은 아빠가 담당하기 마련인데, 이슬아의 집에서는 '엄마'도 아니고, 딸인 이슬아가 '가장의 역할'을 도맡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상당부분이 '허구'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지만, 어쨌든 '실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가 직접 겪은 경험에 비춰서 쓰였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슬아 작가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기에 '팩트체크'도 할 겸 이 책에서 나오는 [낮잠출판사]도 검색해보았다. 하지만 찾을 순 없었다. 아마도 이슬아 가족이 직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가 있긴 할텐데, 그게 '낮잠'은 아닐 거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소설을 '그 잡채'로 즐기기 위해서 더 자세한 검색과 체크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가족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마무리 했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뭐가 중요한 것이냐? 이 소설에서 나오는 모든 상황이 그저 자연스럽게 읽히면 된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자가 사장이자 가장으로 등장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가 되면 된다. 이런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면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근거이고, 이러면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아직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독자' 스스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문제'를 발견한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 정작 '문제'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하게 되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게 되는 것이 진정 문제이고, 이것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니,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인식을 빨리 바로 잡지 못하면 크나큰 사회 갈등을 유발할 수 있으니, 이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녀장의 시대>를 아직도 '문제작'으로 인식하는 독자가 있다면 딴죽을 걸어주시길 바란다. 내가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뜯어고쳐 주겠다. 대한민국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문제로 삼았던 <82년생 김지영>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이 책도 그런 식의 비난을 하며 문제를 삼는 독자분들이 있다면..아니, 없을 것으로 믿는다.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대전제를 이해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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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통 만화 삼국지 2 - 간웅의 시대가 열리다
나관중 원작, 천웨이동.량샤오롱 글.그림 / WISDOM(위즈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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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VII / 위즈덤 2번째 리뷰] 동탁이 낙양을 불지르고 헌제를 볼모로 삼아 장안으로 천도하자, 각지의 군웅들은 허겁지겁 자신의 영지로 되돌아가 저들만의 세력을 규합하기에 급급해진다.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분명 한나라 황제가 건재한 상태지만 '임금이 임금답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니, 과거 '춘추전국시대'처럼 군웅들이 일어나 각축전을 벌이게 된 셈이다. 한편, 동탁은 중원땅에서 벗어나 서쪽에 치우친 장안땅에서 웅크리고 있으니 동쪽땅에선 여러 군웅들이 저들의 야심을 채우려 싸움을 벌인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원소 vs 공손찬'의 대결이다. 사실 이 대결의 승부는 원소가 싱겁게 승리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게 되지만, 주요 인물이 부각되는 장이기에 중요하게 다뤄지곤 한다. 바로 '상산 출신 조자룡의 등장'이다.

조운은 원소 휘하의 장수였지만 원소가 '출신성분'을 따지는 경향이 강한 터라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그러다 원소와 대결을 벌이는 공손찬 진영에 합류해서 대활약을 벌이지만, 공손찬 역시 동탁이 내리는 조칙을 받고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유비 진영에 합류하길 원했다. 허나 유비는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왜냐면 유비와 공손찬의 관계가 선후배 관계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을 빼낸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비는 아직 이렇다 할 세력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인데, 원소와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온 사람을 덜컥 받아버리면 훗날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는 우려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직 조운 자룡의 인품 또한 확연히 알 수 없는 처지에 '유관장 삼형제'의 무리로 받아들이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더구나 아직 젊은 장수이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유비 처지에서는 '한 사람'이 아쉬울 때였으니 자신에게 달려온 젊은 장수를 내치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비는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믿음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람이라면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훗날 '촉한'을 건설할 때에 조자룡의 역할이 막중했음은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한편, 원술도 세력확장을 위해 화려한 비상을 준비중이었다. 먼저 원소와 유표에게 말과 곡식을 지원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손견에게 밀서를 보낸다.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면 자신이 원소를 쳐서 원수를 갚자는 내용이었다. 손견은 옥새를 뺏으려 했던 원소와 유표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에 응답을 하고서 형주로 원정을 떠난다. 그럼 원술은? 원소와 형아우 하던 사이 아니었던가? 사실 둘 사이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러니 한 가족과 같은 친밀함 따위는 없었다고 한다. 왜냐면 '원소의 그릇'이 작았기 때문이다. 이는 여자만 보면 사고를 치는 조조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혈연과 부하 들'을 보는 것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게 원술은 원소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언제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나 손견에겐 이 원정이 '황천길'이었다. 그렇게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영웅 하나가 스러져 갔다.

자, 이제 동쪽의 분란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고, 다시 장안을 둘러볼 때다. 사도 왕윤의 '연환계'가 동탁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수양딸처럼 기르던 기생 '초선'을 희생시켜서 폭정을 일삼는 동탁을 일거에 처단하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스토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과감히 생략하겠다. 일단 초선을 여포에게 시집 보내겠다는 약조를 한 뒤에 동탁에게 바친 뒤에, '초선의 미모'를 이용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서게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포는 동탁의 목을 베고 왕윤은 잠시나마 헌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상적인 국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럼 동탁의 죽음으로 '한 황실의 부흥'은 이루어졌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왕윤의 착각이었다. 문제는 동탁만이 아니었는데, 왕윤은 역적의 우두머리만 처단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정상화될 것이라 순진하게 믿었던 모양이다.

사실 동탁의 폭정은 왕조시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십상시의 난'도 그렇고 '하진의 집권'도 동탁의 폭정 못지 않게 한 황실의 혼란을 부추겼던 것이 사실이다. 그때에도 사도 왕윤은 건재했고,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동탁이 집권을 하니 문제라 여겼던 것일까? 사도 왕윤에게는 동탁이 '외부세력'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환관들이나 하진 등은 '내부세력'이었기에 자신들이 잘 알고 심지어 어느 정도 '컨트롤'이 되던 세력의 집권이었는데, 동탁은 왕윤, 자신들의 세력을 인정하지도 않고 도저히 컨트롤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왕윤은 '동탁'이라는 커다란 짐만 보고 동탁의 수하들이 장악하고 있던 '시스템'까지는 돌아볼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낙양'이 아니라 '장안'이지 않았던가. 동탁이란 폭정의 수괴가 사라지자 '이각과 곽사'라는 이두(두 명의 수괴)정치가 불거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 왕윤은 수괴는 처단했으나 '시스템'까지 제대로 되돌리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헌제는 동탁을 대신해서 '이각과 곽사'의 볼모가 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한편, 초선이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왕윤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을 잘 했다고만 나와 있고, 이 과정에서 여포가 동탁의 시중을 드는 여인과 정을 통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여인을 <삼국지연의>에서는 '초선'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그것도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한 명으로 말이다. 서시, 왕소군, 초선, 그리고 양귀비가 그 미녀들이다. 하나같이 '경국지색'을 가지고 있다는데, 왜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나라가 망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부시키는 것일까? 그나마 초선은 망할 나라(동탁의 폭정)를 망하게 한 긍정적인 면이 있기라도 하지만, 여인의 아름다움이 '남자'를 홀려서 큰 일을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표현이 너무도 많은 '중국문학'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지만, 고전작품에서 '시대적 한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어디 <삼국지>뿐이겠는가. 부족한 점이 있으면 '고쳐 읽는 능력'을 키우면 될 일이라고 생각을 고쳐 하기로 했다.

동탁이 죽고 한 황실은 '이각과 곽사의 체제' 아래 놓이게 되자, 반 동탁을 외치던 군웅들은 이제 호시탐탐 '헌제'를 노리게(?) 되었다. 헌제를 볼모로 잡으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원소 진영'이었다. 원소 휘하에 곽가, 순욱 등 훗날 조조의 세력하에서 크게 활약을 했던 모사들이 발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허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원소의 그릇'은 너무 작았다. 그는 한복과 공손찬의 세력을 차지하고서 한껏 만족하고 있었기에 '헌제'를 잡아야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는 책략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조조가 '세력확립'을 하지 못하고 서주의 도겸을 공격하고, 여포에게 뒤통수를 맞아 연주땅을 빼앗기고, 그 틈을 노려 유비는 서주를 취하는 등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기에 바빴던 터라 원소에게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조조는 여포를 복양땅으로 밀어내고, 유비와 원술 등으로 여포를 견제하게 만든 뒤에 '이각과 곽사'의 품에서 벗어난 헌제를 '허도'로 모시는 쾌거를 거둔다. 이로써 '조조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한편, 유비는 겨우 서주땅에서 거점을 만들고, 여포와 원술의 틈바구니에서 '균형점'을 찾으려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문제는 '조조'였다. 유비의 세력은 아직 안정을 이루지 못했는데, 불안정한 여포와 불안한 '동거'를 하면서 조조의 세력을 견제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야심 많은 원술도 호시탐탐 서주의 풍족한 곡창지대를 노리고 있었기에 유비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판국에 조조가 헌제의 명령을 빌미삼아 원술을 공격하라하니 유비는 조조의 뻔한 수작이라는 걸 알면서도 '천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한 황실의 충신 코스프레를 충실히 해낸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여포에게 서주성을 빼앗기고 유비는 소패로 이사(?)를 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왜냐면 조조도 완성에 도사리고 있는 '장수 세력' 때문에 뒤통수가 근질근질 했기에 유비를 직접 손보지 않고 여포와 원술을 통해서 자중지란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이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조조는 사방으로 적들이 즐비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슬기롭게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내고 있었다. 그 비결은 바로 '조조 휘하'에 맹장과 모사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백가쟁명'을 부르짖는 사상가들이 등장한 것처럼 후한말은 혼란의 시기였고, 이런 난세에 영웅의 등장은 필연이었는데, 그런 영웅들이 가장 선호한 '군웅'이 바로 조조였던 것이다. 그럼 왜 조조에게 몰려 들었을까?

사실 조조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세력은 '원소'였을 것이다. 허나 원소는 신분이 높고 확실한 인재만을 골라 받는 '엘리트주의자'였다. 그런데 난세에 엘리트들은 야심가는 있을지언정 실력자는 드물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조'는 달랐다.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실력'이 있으면 누구라도 환영했다. 심지어 다른 군웅일지라도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후하게 대접할 정도로 통이 컸다. 장수 세력의 책사였던 '가후'는 조조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무서운 계략을 짰던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후의 실력을 인정했기에 자신에게 항복한 뒤로는 크게 중요하여 큰 업적을 남기는데 유용하게 써먹었다. 여포의 휘하 장수였던 '장료'는 어떤가? 비록 적장이었지만 '실력'대로 인정하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업무환경(?)을 만들어주는 조조에게 귀의하여 죽는날까지 충성을 바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처럼 어지러운 시대에는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지도자가 인기가 많은 법이다.

그에 반해 유비는 어떤가? 그가 쌓은 명분은 '도덕'이었다. 한 황실의 종친이라는 '당위성'을 갖췄지만, 그의 세력은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 관우와 장비 같은 걸출한 인재가 있고, '도덕적 명분'에 있어 타의추종의 불허할 정도로 명성과 인망을 두루 갖췄지만, 정작 '책사'는 변변치 못했다. 서서와 제갈량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록 '간옹', '손건', 그리고 '미축' 같은 책사들이 곁에 있긴 했지만, 조조 곁에 있는 곽가, 순욱, 순유, 정욱 등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하다 못해 여포에게도 '진궁'이라는 책사가 있었을 정도인데, 왜 유비 세력에는 유독 책사가 꼬이지 않았던 것일까? 그건 유비가 내비친 캐치프레이즈가 별볼일 없는 것이라는 평가였다고 짐작된다. 유비는 겸손을 떠는 것인지 좀처럼 '자기 세력'을 굳건히 지키는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관우와 장비, 간옹, 손건, 미축 등은 유비를 따라서 이곳저곳을 떠돌이처럼 유랑해야만 했다. 한때 서주성에 머물 때 뛰어난 모사꾼이었던 '진규, 진등 부자'가 유비를 도와주기도 했지만, 이들조차 유비가 서주를 떠나면서 빠빠이하고 조조의 품으로 가버렸다. 이런 떠돌이 유랑집단에 합류하고 싶은 책사는 없을 것이다. 전장을 누비는 장수들이야 '방랑 생활'이 별일 아닐 수 있지만, 모략을 짜내는 책사들에겐 '평안하게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없는 것은 그야말로 생고생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다. 여포 곁에 있던 '진궁'이 바로 그런 경우 아니던가. 그나마 진궁은 역적 조조를 처단하기 위한 일념으로 그런 생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랬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고 말이다.

한편, 손견의 죽음으로 인한 '강동의 세력'은 어떤 상황이었나? 손견이 불귀의 객이 되자 손견 진영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몇몇 충신들이 손견의 아들 '손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지만 과거의 세를 자랑할 수는 없을 정도로 세력이 쪼그라들었다. 이는 손책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책은 부득이하게도 아버지의 원수인 '원술의 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전국옥새'를 담보로 군사 3천과 말 5백을 빌어 정보, 황개, 한당 등과 함께 강동을 평정하러 떠난다. 그리고 의형제를 맺었던 주유와 합류하여 장소, 장굉 등의 인재도 함께 등용한다. 그리고 유요와 엄백호, 그리고 왕랑을 물리치고 '강동땅'을 평정하게 된다. 이로써 손책은 '소패왕'이라 불리며 아버지가 못다한 위업을 이루게 된다.

그러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도리어 원술쪽이었다. 이에 원술은 손책이 더 크기 전에 견제를 하려 했으나, 원술의 뒤를 노리고 있는 조조, 여포, 유비가 눈엣가시다. 이에 원술은 여포와 유비를 이간질 시키려 기령을 보내지만 도리어 여포 옆에 있는 진궁의 꾀에 놀아나 10만 군사를 되돌릴 수밖에 없게 되고, 여기에 굴하지 않고 원술은 여포의 딸과 혼담을 나누며 유비를 공략하니 유비는 여포의 공격에 패주하여 '조조의 품'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조는 유비와 손을 잡고 여포를 궁지로 내몰아 끝내 여포의 숨통을 끊어버리게 된다.

여기까지 정리를 하자면, 조조는 '헌제'를 붙잡아 천하를 호령하려 들었고, 이를 못마땅해하는 원소는 조조를 위협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저멀리 강동에선 손책이 대세를 잡고 '소패왕'으로 명성을 쌓게 된다. 불쌍한 유비는 아직도 마땅한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고, 여포와 원술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자존심도 버리고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는 처지가 된다. 그 와중에 조조는 '장수'를 처단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 하나를 제거해버리고, 또 하나의 걸림돌이었던 여포까지 처단하게 된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도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는 세력은 '형주의 유표'였다. 유표는 젊은 시절을 그렇게 평온하게 보내다 나이가 들자 건강상의 문제로 자신에게 찾아오는 위기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나약한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그러나저러나 이제 여포와 유비, 그리고 원술까지 대충 정리한 조조는 '하북지역의 패권자, 원소'와 한판 대결을 준비한다. 그 유명한 '관도대전'이다. 3권에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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