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VIII / 이야기장수 1번째 리뷰] 대학생 시절에 나는 한 살 많은 누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너는 남자니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라고 말이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을 살리자는 취지의 운동이 '페미니즘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나에게 '넌 남자니까' 본질적으로 페미니스트는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하는 누나의 말투가 '네 뜻은 가상하다만'으로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남자인데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도 전혀 없이, "감히 남자 주제에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라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자반장'을 지지했던 나인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도 아니다. 지금도 논술쌤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인권'을 향상시키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녀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거나 열성당원처럼 광적인 집회, 시위에 참여해 강성한 의사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지지를 보내고, 약간의 후원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의 이런 모습에 여성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고, 남성들은 '역차별' 받는 게 억울하지도 않냐면서 툴툴거린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왜 '사람'이 '사람'을 차별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를 차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왜냐면 '남자'도, '여자'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차별'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고서는 '차별'을 정당화시킨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그런 차별을 하겠냐면서 나보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긴다. 안 그럴 것 같다고?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여성이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찌찌가 그대로 존재감을 뿜뿜하는 의상을 입고 있다면 어떻게 반응하는지 물어보라. 대한민국 사람들 가운데 십중팔구는 '여성의 찌찌노출은 안 된다'면서 공공장소에서는 모든 여성들은 '브래지어'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법안까지 만들어야 하며, 이를 어기는 여성에게는 '경범죄'를 적용해서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높이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보수적인 남성들의 목소리만은 아니다. 보수적인 여성들도 똑같은 목소리를 낸다. 그럼 진보적인 남성들은 '괜찮다'고 말할까? 아니다. 자기와 상관이 없는 여성이 찌찌를 노출한다면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다가 '자기 엄마'가, '자기 아내'가, '자기 애인'이, '자기 딸'이 찌찌를 드러내는 '노브라 의상'을 입으면 질색팔색을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진보적인 여성들은 '브래지어 착용'으로 인한 불편을 호소하며 그나마 논리적인 찬반의견을 내놓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브래지어'는 왜 꼭 착용해야만 하는가? 일일이 이유를 다 밝히기에 지면이 부족할 정도지만,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노브라는 너무 야해서', '성범죄를 유발시키므로', '그냥 부끄러워서', 그리고 '그냥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라는 답변이 많았고, 그 다음으로 많은 이유는 '어릴 적부터 착용을 해서 안하면 오히려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런데 '브래지어 착용'에 논란이 되는 부분은 또 다른 이유다. 남자의 찌찌는 부끄럽지 않은데, 왜 유독 여성의 찌찌만 부끄러워해야 하느냐로 시끄럽기 때문이다. 남자는 찌찌가 돌출되는 의상을 입든, 그냥 벗고 노출하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는 편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남성이 찌찌 노출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남성들 가운데에도 '여성형 유방'을 갖고 있는 분들은 찌찌 노출 뿐만 아니라 상의 탈의조차 꺼리는 분들도 많다. 이들조차 '남자답지 못한 가슴'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여성스런 가슴'을 가졌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왜 '가슴(찌찌)'에 대해 이런 차별이 생겼냔 말이다.

물론 부끄러워하는 것도 '개인의 성향'일 뿐이다.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개인의 자유의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브래지어 착용'을 사회적으로 강요할 까닭이 전혀 없다. 그냥 '개인의 성향, 자유의지'에 맡겨두면 된다. 오히려 '여성의 찌찌'만 보면 거시기가 꼴려서 성적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야만성'에 대해 사회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이런 논의를 공론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성의 몸'을 옭아매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인식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진정한 '양성평등'을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인식의 문제로 접근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남녀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여성의 몸'을 속박하는 방향, 즉 '브래지어 착용'을 의무화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심지어 '남성의 성욕'은 원래 인간의 본능이라면서 두둔하며 성범죄에 대해서도 '여성에게만 강제적인' 대처방안들을 내놓는 사회가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페미니즘 논쟁'이 이 책 <가녀장의 시대>와 무슨 상관이냐고? 이슬아 작가의 경험담에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남의 찌찌에 상관 마'라는 소제목이 나와 있기에 화두를 던져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부장'이 아닌 '가녀장'이라고 표현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한 집안에서 '가장'의 역할을 보통은 아빠가 담당하기 마련인데, 이슬아의 집에서는 '엄마'도 아니고, 딸인 이슬아가 '가장의 역할'을 도맡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상당부분이 '허구'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지만, 어쨌든 '실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가 직접 겪은 경험에 비춰서 쓰였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슬아 작가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기에 '팩트체크'도 할 겸 이 책에서 나오는 [낮잠출판사]도 검색해보았다. 하지만 찾을 순 없었다. 아마도 이슬아 가족이 직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가 있긴 할텐데, 그게 '낮잠'은 아닐 거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소설을 '그 잡채'로 즐기기 위해서 더 자세한 검색과 체크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가족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마무리 했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뭐가 중요한 것이냐? 이 소설에서 나오는 모든 상황이 그저 자연스럽게 읽히면 된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자가 사장이자 가장으로 등장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가 되면 된다. 이런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면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근거이고, 이러면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아직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독자' 스스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문제'를 발견한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 정작 '문제'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하게 되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게 되는 것이 진정 문제이고, 이것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니,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인식을 빨리 바로 잡지 못하면 크나큰 사회 갈등을 유발할 수 있으니, 이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녀장의 시대>를 아직도 '문제작'으로 인식하는 독자가 있다면 딴죽을 걸어주시길 바란다. 내가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조목조목 뜯어고쳐 주겠다. 대한민국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문제로 삼았던 <82년생 김지영>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이 책도 그런 식의 비난을 하며 문제를 삼는 독자분들이 있다면..아니, 없을 것으로 믿는다.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대전제를 이해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