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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5 : 말세편 - 완결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CMX / 엘릭시르 17번째 리뷰] <퇴마록>의 대단원이 막을 내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퇴마사들은 끝내 악을 물리쳤고, 세상을 말세로부터 구해냈다. 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고도 수많은 독자들은 눈시울을 훔쳤을 것이다. 왜냐면 퇴마사들의 '뒷이야기'를 더는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 '열린 결말'이지만, 세상을 구원한 댓가는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말세편'에서 보인 퇴마사들의 행보는 처절하기만 했다. 쉴 틈도 없었고 쉴 수도 없었다. 퇴마사들은 '단 한 명의 희생'도 그냥 손놓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결국 인간이기에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악의 무리들의 무분별한 횡포'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4명의 퇴마사들은 거의 자기 목숨을 내놓고 단 하나의 목숨도 헛되이 희생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희생'을 택했다.
이렇게나 숭고한 자기 희생에서도 번번히 퇴마사들의 목숨을 건져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악마'들이었다. 세계편에서 등장했던 대악마 '아스타로트', 그리고 혼세편에서 등장했던 '블랙 엔젤'은 퇴마사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해서 자신들의 일을 훼방 놓는 퇴마사와 그 일행들을 번번히 구해주는 일을 반복한다. 왜일까? 그 까닭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예언서>들과 관련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메랄드 스톤(녹비)', '이집트의 토트의 서', 그리고 '치우천왕의 우사가 남긴 해동감결과 우사경', 이 모든 예언서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인류의 종말', 즉 '말세의 도래'는 징벌자(적그리스도)가 한 여인의 몸에서 잉태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징벌자가 태어남과 동시에 인류의 종말은 '결정'되어 있으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종말을 막을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징벌자의 탄생'을 막는 일일 것이다. 이는 오랜 옛날 이집트에서 벌어진 '갓난아기 집단 살해' 사건과 유사하다. 이집트의 노예인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가 탄생할 거란 예언이 나오자 이집트의 왕은 '그 해'에 태어난 유대인 아기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 메시아는 '이집트 왕자'라는 신분으로 자라났고, 끝내 자신들의 민족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성경>에 '출애굽기'에 나온 내용이다. <퇴마록>도 바로 이런 예언을 차용하여 '치우천왕기'와 결부시켜 말세에 관한 예언을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해동감결>이었다. 이 예언서는 4000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나 잃어버리고 말았으나 '혼세편'에서 일본 명왕교에 남아있던 <해동감결>을 준후가 얻게 되어 그 내용이 해독되었다. 그리고서 펼쳐지는 내용이 '말세편'의 줄거리인데, 이 예언서의 내용으로 인해 전세계의 능력자들이 총출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퇴마록>의 줄거리를 소상하게 밝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듯 싶다. 2000년대 초반에 완결이 되어 그 결말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이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새로 읽는 독자도 있을 터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소상히 '스포'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퇴마록>이 지닌 의미조차 분석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독자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되어, 줄거리는 과감히 생략한 채 <퇴마록>이 지닌 본래의 뜻만 나름대로 해석을 덧붙여보고자 한다.
당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세기말 현상'이 남아 있던 터라 <퇴마록>의 인기는 정말 초절정이었다. 더구나 '말세의 도래'를 소재로 삼고, 이를 '오컬트 장르'로 풀어놓으니 정말 신비감이 뿜뿜 뿜어져 나와 당시의 독자들을 열광케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면서 작금의 대한민국이 처한 '말세의 도래'를 비추어보면서 읽는 맛이 참으로 남달랐다. 바로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다. 개인적으론 아주 어릴 적에 79년 박정희 서거로 인한 '비상계엄'이 떠오르고 이듬해 '5·18민주화혁명'과 87년 '6월항쟁'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모두 10대 겪은 일들이라 생생하지는 않으나,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얼마나 억압적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늘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듯 조심조심하던 어른들의 모습,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묘사'는 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조각들'로 쪼개진 단서들을 애둘러서 표현하셨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야 '와~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라고 감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히 '예언서'를 해독하는 과정과 유사해보이지 않은가?
암튼, '말세편'에서는 바로 이런 '예언서'를 둘러싼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맛도 참으로 쏠쏠하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예언서'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그 '예언서'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의심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그 따위 '고문서'의 내용을 믿겠는가? 라면서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믿고 싶은 뉴스만 골라서 보다가 끝내는 '가짜'와 '진짜'도 구분하지 못하고 끝내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세상이 바로 지금 펼쳐지고 있단 말이다. 자, 고대의 '예언서'가 가짜로 증명되지 않는 한 결국은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믿고 안 믿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짜 문제는 그걸 곧대로 믿고서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 문제이니까 말이다.
'말세편'에 등장하는 예언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3개였다. '우사경'은 <해동감결>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위한 '해설서'였기 때문에 결국엔 <해동감결>의 내용과 똑같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 예언서가 한결같이 '인류의 종말'을 말하면서 '징벌자의 탄생'을 예언했다. 이를 믿는 사람은 바로 그 '징벌자의 탄생'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퇴마사들은 다르다. '징벌자의 탄생'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예언서의 진위 파악'이 먼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퇴마사가 아닌 사람들은 왜 섣불리 '예언서'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을까? 그건 '욕심'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퇴마사들에게 없는 것이 바로 '욕심'이다. 그들의 '퇴마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밝혔던 포부이기도 하다. 그들을 목숨을 내던지는 위대한 일을 행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아니 그런 이익을 조금이라도 얻게 되면 무척이나 부끄러워했다. 이게 선한 사람들의 '선한 의지'다. 퇴마사들의 능력이 더 쎄지면 쎄질수록 그들의 '선한 의지'도 함께 드높아졌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퇴마록>에 푹 빠지게 된 까닭이 바로 이런 퇴마사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들의 순수한 의도가 청년 시절의 나에게 크나큰 감명으로 다가왔고, 나 또한 퇴마사들처럼 '선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퇴마록>은 소설책이 아닌 '경전'이기도 했다. 나에게 주어진 능력을 아낌없이 '모두의 행복'을 위해 쓰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책이 '경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냔 말이다. 이런 '선한 의지'는 말세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예언서'에 적힌 내용이 맞느냐? 틀리느냐? 가 아닌, 그 '예언서'가 인간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더 많은 염두를 두고서, 그 내용이 퇴마사 자신들의 '선한 의지'에 반한다면, 과감히 그 '예언'을 따르지 않겠다는 행보를 볼때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 '예언'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자, 예언의 내용은 반드시 이루어졌다. 하지만 퇴마사들은 그 예언대로 '인류의 종말'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징벌자의 죽음'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억울한 죽음'은 퇴마사들이 용납할 수 없고, 이는 '징벌자'일지라도 예외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왜냐면 징벌자의 탄생이라 했으니, 그 징벌자는 '아기의 모습'으로 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무슨 죄'가 있어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인가? 퇴마사들은 결코 그런 예언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능력자들은 달랐다. 예언의 내용은 엄숙하며, 반드시 따라야만 할 '정언명령'이기에 비록 '순진한 아기'의 모습일망정 이 세상을 멸하러 태어난 악마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맞선다.
다시,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계엄군'은 포고령 1호에 따라 국회로 달려갔고 국회의원의 정당활동을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지 않는 잘못된 명령이다. 헌법 어디에도 '계엄시 국회의원의 활동을 불허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에는 긴급한 상황이라 그 내용의 적법성을 몰랐다하더라도 '현직 국회의원의 정상적인 활동'을 총칼로 위협하고 막아서지 않은 계엄군의 행동은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예언서'의 내용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며 무고한 목숨을 해치려 한 능력자들의 모습인가? 아니면 아무리 '예언서'에 적힌 내용일지라도 온당하지 않은 내용이라면 결코 따르지 않는 퇴마사들의 모습인가? 당시 계엄군들의 모습은 '선한 의지'가 발동된 퇴마사들의 행보와 일맥상통한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12·3 비상계엄날 큰 불상사는 없었던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난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기서 찾아보려 한다. 낡은 이념에 찌들고, 뻔한 프레임으로 쉴드치고, 치졸한 선전선동으로 지지자들의 난동을 불러일으키더라도 퇴마사들이 보여준 '선한 의지'를 따르는 현명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훨씬 더 많이 있음을 믿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점쳐본다. 이렇게 우리에게 닥친 '말세의 도래'는 극복되고, 저들의 뻔뻔한 수작들은 남김없이 밝혀져서 두 번 다시 대한민국에 발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국민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그 어떤 어려움에도 끄떡 없을 것이라고 외치는 바다. 비록 <퇴마록>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나는 언제고 다시 <퇴마록>을 꺼내 읽을 것이다.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무리들은 '선한 의지'의 빈틈을 뚫고 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현명한 국민들의 '퇴마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