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 명작 3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혜연 그림, 송윤섭 글 / 은하수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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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생 논술수업을 준비하다 발견한 책인데 초등학생들도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이었다. 특히 <베니스의 상인>의 줄거리와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이 창가에서 나눈 '유명한 대사'를 읊으며 따라하는 모습을 보며 흐믓해했다.

 

  그렇다면 초등학생들도 '사랑'을 안다는 것일까? 적어도 '연애'는 아는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면서 여자아이들이 책 속의 삽화를 보면서 '등장인물'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미오'보다 로미오의 친구인 '머큐쇼'에게 더 큰 호감을 보였다. 그러다 '머큐쇼'가 로미오를 대신한 결투에서 케풀렛가의 '티볼트'에게 칼을 맞아 죽는 장면에서 오열을 하는 장면도 보았다. 잘 생긴 남자가 죽는 장면에서 여자아이들은 한결 같이 대성통곡을 했더랬다.

 

 

  반면에 로미오의 외모순위는 상당히 낮아졌다. 그러면서 영화배우 '디카프리오'를 얘기했다. 얘네들이 태어나기도 전인 1996년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적도 없을 텐데, '검색'을 통해서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선생님이랑 디카프리오를 비교한다면 어떨 것 같냐면서 포즈를 취했더니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려줬다. 디키프리오랑 선생님이 호랑이띠 '동갑'이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실망실망 대실망을 하길래...하도 괘씸해서 디카프리오의 육덕진 사진을 보여줄까 하다가 말았다. 소녀 감성에 스크래치를 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암튼, 로미오의 인기순위는 생각보다 아래였는데, 그 까닭은 로미오가 처음 등장하면서 '줄리엣'이 아닌 '로잘린'에게 사랑고백을 했다가 차였다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줄리엣'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대실망을 하고 말았단다. 요즘 아이들도 '쉽사빠'는 매력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 불 같은 사랑에 타오르고, 결혼을 하며 사랑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가, 끝내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장면을 보면서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역시나 아이들 감성에는 '해피엔딩'이 제격인 셈이었다. 허나 아이들도 느끼고 있었다. 너무 뻔한 '해피엔딩'보다는 비극적 결말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더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아이들이 그걸 직접 표현하기에는 너무 어려울테지만 말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희곡'은 아니다. 다시 말해, '원작'이 아니라 원작에 가깝게 쓴 '소설'인 셈이다. 아직 초등학생들에게는 대사로만 구성된 '희곡'이 그닥 읽기 쉬운 책은 아닐 듯 싶어서 '줄거리'가 잘 드러난 책을 골라서 논술수업에 활용하였다. 이렇게 '줄거리'를 알고 나면, 언젠가는 원작 '희곡'도 즐길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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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와인의 역사 한빛비즈 교양툰 5
브누아 시마 지음, 다니엘 카사나브 그림, 이정은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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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양툰 시리즈>를 읽으면서 교양을 톡톡히 쌓아가고 있다. 이젠 '만화'를 읽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까닭이 전혀 없다는 것을 '교양툰'을 보면서 실제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여전히 '만화형식'이 갖고 있는 부족함은 지적할 만하다. 만화형식은 어쩔 수 없이 '컷'과 '말풍선'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가 그 '한계'를 벗어날 때, 만화만이 가진 장점이 더 없이 드러날 테지만, 아직까지는 '종이책'이 갖고 있는 한계점인 '수정'이 쉽지 않고, '첨가'하기 어려운 점과 함께 극복하게 된다면 우리가 꼭 가져야만 할 '교양'을 더욱 쉽고 재미나게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이라도 '만화 교양책'을 더 자주, 더 많이 읽길 바란다.

 

  이 책은 <와인의 역사>란 책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포도주의 발효과정을 알기 쉽게 요점 정리한 지난한 역사책'이라고 소개할 수 있겠지만, 역시나 '만화형식'으로 그려내었기 때문에 조금은 어렵지 않고 술술 읽을 수 있도록 써내려갔다. 하지만 살짝 '와인'에 매료된 서술방식이 담겨 있기 때문에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가 담겨 있고, 서양사람들이 갖고 있는 '와인'에 대한 자부심(?) 또한 살짝 곁들여져 있는 탓에 '와인 홀릭'에 가까운 책이 아닐까 싶다. 허나 와인을 즐기고 좋아하는 독자분들이라면 '상식'적인 면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지식을 선사할 것이 분명하다.

 

  인류에게 '술의 역사'는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인류를 흠뻑 취하게 하고 몽롱하며 알딸딸하도록 기분 좋게 만드는 '술'을 오래 전부터 즐겼기 때문이다. 술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농업혁명'과 관련이 깊다. 곡물이나 과일을 오래도록 저장하다가 우연히 부패가 아닌 '발효'가 된 술을 맛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맛이란 한 번 경험하게 되면 자꾸 찾게 되는 '중독성'마저 있었기에 인류는 '술'을 직접 담가 마실 수 있는 과정을 찾기 위해 큰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중독성 얘기가 나왔으니 '마약'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마약, 역시 술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둔하게 만들거나 환각 상태를 경험할 수 있기에 인류와 함께 발달하였지만, 의료용 '마취제'로 사용하는 한으로만 마약을 제한한 것에 비해서 술은 지금도 널리 즐기고 있다. 허나 둘 다 '과하면' 옳지 않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자, 이제 '와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 서양에서 만든 술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와인'과 '맥주'다. 전세계 시장에서도 주류계에서는 여전히 '와인'과 '맥주'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도 즐기고, 의학적으로도 몸에 좋다고 알려진 '와인'이 더 사랑받고 있으며, 희귀한 와인의 경우에는 고가에 거래가 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점에서 왠지 '와인의 우세승'이 점쳐지곤 한다. 물론 '맥주'를 좋아하는 분들에겐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소식이겠지만 말이다. 한때 일본에서 출간한 <신의 물방울>이란 만화책 덕분에 우리 나라에서도 와인의 인기는 대단했으며, 지금도 와인 감별사인 '소물리에'는 고품격 전문가로 소개될 정도다.

 

  밝혀두지만, 개인적으로 건강상 '금주'를 하고 있으며 와인 특유의 텁텁하고 떪은맛 때문에 와인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다. 한창 술을 마실 때에도 와인은 주머니 사정상 늘 관심밖이었다는 것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래서 난 절대 '와인 예찬론'에 절대 찬성하지 않으며 동의하지도 않는다. 내 입에는 '막걸리'가 제격일 뿐이다. 암튼, 이 책은 '와인 예찬론자'에서 더 없이 즐거움을 전해줄 책이라는 것만 밝혀두려 한다.

 

  다시 돌아와서, '와인 예찬론자'가 아닌 나로서는 와인이 그리스도교의 비호 아래 '중세시대'에도 꾸준히 제조되어 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흔히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분들은 '금주'를 권하기 마련인데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는 '와인 제조법'을 교회가 지켜왔던 것일까? 오히려 황제가 다스리던 지역에서는 '제조법'을 잊어버려서 교황의 덕(?)이 아니었다면 오늘날까지 '와인'이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으며, 지금도 유명한 '고급 품종'이 일찍이 개발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그저 '와인의 맛'이 대단히 좋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심지어 <성경>에서도 예수가 맹물을 와인으로 바꾸는 기적(!)을 선보였기 때문에 교회가 그토록 독실하게 '포도의 재배'와 '와인 숙성'에 열심이었다고 불경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유럽과 인근 지역이었던 '아랍권'에서도 <꾸란(말씀)>에 적혀 있길, "매일매일 마셔도 좋지만, 과하게만 마시지 말라"고 했다며 '와인'을 마시는 것을 금기시 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곡주(청주)'가 보편화 되었고, 역시나 술을 멀리 하라는 가르침 덕분에 포도는 싱싱할 때 먹는 '제철 과일'로 여겼던 터라 '와인'이 일찍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가 깜빡 잊고 적지 않은 것이 있는데, 동양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오히려 덕담에 가까울 정도로 '술에 관대한 성향'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과실주'보다 '곡주'가 더 널리 애용된 까닭을 '술맛'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살짝 몰아가는(?)는 것은 저자의 인식 부족으로 보일 뿐이다. 아니면 '와인 예찬'을 하다보니 와인을 대접으로 마시는 한국인을 무식의 소치로 여기는 오만함이거나 말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와인'에 관한한 한국을 언급한 내용이 전혀 없다. 중국과 일본까지만 살짝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암튼, 오늘날까지 대단한 '와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유럽인(특히 프랑스인)에 대한 집중적인 설명이 무척 아쉬울 따름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이 '친환경적 와인 생산 방식'이었다.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유럽에서는 다시금 '포도재배'와 '와인 생산'에 열을 올렸는데, 이때 빨리 생육하기 위해서 '화학비료'를 첨가한 것이 문제되었단다. '화학비료' 덕분에 더 빠르고 더 많은 포도 생산을 할 수 있었지만 '와인의 맛'은 물론, 건강에도 해로운 성분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충을 잡기 위해 'DDT(살충제)'를 뿌린 결과는 상상 이상의 해악을 끼쳤을 뿐이었단다. 그로 인해 '유기농 재배'와 함께 '유기농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노력을 한 덕분에 오늘날에는 더 맛좋은, 더 건강한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단다.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더욱 좋아질 예상이며, '기후변화'에도 끄떡 없는 '포도재배'와 '와인 생산'을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할 예정이란다.

 

  하지만 이 책을 덮을 즈음에는 '와인'에 대한 생각보다는 우리 나라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이 들었다. 술에 관한 한 우리는 그 어떤 나라나 그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까닭에서다. 우리도 '한국식 와인'인 <복분자주>를 전세계 시장에 퍼뜨릴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전통 청주(맑은 술)와 탁주(거른 술)가 좀 많으냔 말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음주량'도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절대 빠질 수 없는 '막걸리' 역시, 세계화를 거치면 세계인들의 사랑을 흠뻑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짜 막걸리는 '만든 지 사흘만'에 다 비워야 하니 얼마나 유니크하냔 말이다. 이런 술맛을 세계에 맛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막걸리의 역사>가 출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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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쫌 아는 10대 - 까칠한 백수 삼촌의 최저임금 명강의 사회 쫌 아는 십대 1
하승우 지음, 방상호 그림 / 풀빛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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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저임금제는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선진국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제도이다. 시행목적은 노동자의 삶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사용자로부터 '최소한의 임금'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고임금'으로 적용되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큰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건강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있는 법'이라도 제대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현 정부 들어서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2017년 대선 당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모든 후보들이 '최저임금 1만 원으로 인상 안'을 만장일치로 공약했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에 와서는 '1만 원'은 줄 수 없으니 8350원(2019년 기준)으로 인상폭을 대폭 낮춰서 결정하였다. 이유는 우리 나라의 경제력으로는 '1만 원 이상'을 주면 기업이 죄다 망하기 때문이라나...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저지하였다.

 

  대기업이 '최저임금 1만 원' 때문에 망한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주장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암튼 대기업도 어렵다고 핑계를 대니 중소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정작 시끄러운 곳은 '자영업자들'이 되었다. 단기 알바생에게도 '시급 1만 원'을 줄 수 없다고 말이다. 이유는 대기업과 같다. 경영상 도저히 불가하다는 점이다.

 

  물론, '자영업자들'의 주장은 공감이 간다. 각종 프렌차이즈 본사가 떼어가고,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리는 통에 자신들도 '영세'하기는 마찬가진데, 알바생들에게는 '최저임금'을 보장해주면서, 왜 자신들과 같은 '영세업자'들의 '최저임금'은 보장해주지 않느냐는 목소리에는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근데, 정작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에 대기업은 빠졌느냔 말이다. 갑 중의 갑인 대기업이 최저임금 인상안에 가장 확실한 저항을 했으면서, 왜 애꿎은 '자영업자'들이 희생양이 되었느냔 말이다. 그리고서는 '정부탓'만 늘어놓는다. 문재인 정부가 애초에 무리한 '인상안'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났다고 말이다. 과연 다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어도 '정부탓'으로 돌릴지는 의문이지만, 암튼 '최저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일단, '최저임금'을 인상하도록 정부는 강력히 밀어붙어야 한다. 왜냐면 '최저임금'은 노동자의 마지막 보루다. 노동자의 삶이 안정되어야 경제도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번 소득은 곧바로 '소비자'가 되어 소비로 이어진다. 그때문에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 위해서라도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주어야 하는 것이 순리다. 반대로 '최저임금'을 동결해버리면 물가상승을 감당하지 못한 소비자가 지갑을 닫고 허리띠를 꽁꽁 묵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면 '경제의 악순환'이 벌어지며 자영업자, 중소기업, 그리고 대기업 순으로 연쇄도산을 하는 대공황을 맞이하게 될 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기업이 공황을 맞이할 리가 없다고? 그러니까 문제라는 것이다. 왜 불공정하게 불황속에서도 대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느냔 말이다. 과거 97년 '한보사태'가 일어났을 때 수많은 계열사는 다 죽었는데도 온갖 비리를 저지른 '사업주'는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이러한 비리를 지금도 눈 감아 줄 것인가? 정부는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사업주에게 엄벌을 가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건전해지고 튼튼해질 수 있다.

 

  다음으로 '최저임금'을 갖고 을끼리 싸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 지금도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자영업자'와 '알바생' 들 간의 최저임금에 대한 다툼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일단 '알바생'들에게는 '노동자의 권리'인 정당한 임금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학생이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공짜로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다. '근로계약서'에 근거한 정당한 임금을 반드시 지급해야만 한다. 또한 '주휴수당'과 같은 법이 보장하는 임금도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 '주휴수당'은 일도 하지 않고 공짜로 받는 돈이 아니라 노동자의 인권과 생명을 보장하는 '정당한 임금'이다. 5일간 40시간의 노동을 했으면 하루에 해당하는 8시간 만큼의 임금을 주휴수당으로 지급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의 삶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알바라도 당연히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다.

 

  물론, 영세한 자영업자가 '프렌차이즈'에 뜯기고, '건물주'에게 떼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알바생에게까지 챙겨주느냐는 하소연이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가장 힘이 없는 '알바생'에게 생트집을 잡느냔 말이다. 왜 더 많이 뜯어가는 '프렌차이즈'와 '건물주'에게는 한 소리도 못하고 애꿎은 알바생 탓을 하느냔 말이다. '정부 탓'을 하는 것까지는 나름 의미가 있으니 어쩔 수 없더라도 '쓰레기 언론'의 더러운 언론 플레이에 홀랑 넘어가 '거대한 갑'들인 프렌차이즈와 건물주에게 해야할 푸념을 힘 없는 알바생에게 풀지는 말잔 말이다.

 

  물론, 갑들이 무섭긴 하다. 괜히 '갑질'이란 말이 나왔겠냔 말이다. 그러니 영세한 '을들'까지 싸우지 말고 힘을 모아서 갑들에게 한방 먹이잔 말이다. 정부 탓을 하려면 이런 갑질을 하는 놈들을 혼내달라고 청원을 넣잔 말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최저임금의 해법'을 탐사보도하면서 '을'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머리를 써야 할 것이다.

 

  사실, 기업총수들에게 '최저임금'은 그닥 큰 문젯거리도 아니다. 자신들이 해마다 챙기는 '배당금'만 제대로 분배해도 웬만한 중소기업을 먹여살리는데 어려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삼성에서 해마다 정관계에 로비를 하기 위해 책정한 금액이 '1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총액이 아니라 '매년 1조 씩' 챙긴다. 그 돈이면 '구멍가게(자영업자)'가 최저임금으로 손해보는 손실을 다 막고도 남을 돈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최저임금'으로 생긴 논란의 화살을 제대로 쏘아보잔 말이다. 없는 사람들끼리 치고 받고 싸워봐야 코피 터지기밖에 더 하겠나.

 

  애초부터 기업의 불공정거래는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왔다. 최저임금도 '정치권'에서 먼저 시작을 했으니 '해법'도 정치권에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놀랍게도 박정희 정권 때에도 '최저임금'은 법에 명시되어 있었단다. 그런데도 기업들이 노동자들 삥 뜯기(?) 너무 힘들어진다면서 미루고 미뤘던 것이다. 물론, 그 정치인들이 기업들에게 뒷돈(!)을 받아먹으면서 그랬겠지만 말이다. 이제 '촛불혁명'으로 바른 정치를 하고자 하는데, 기업들에게 뒷돈을 받아가며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을 챙기면서 노동자들이 불성실한 탓이라고 몰아댈 수 있겠느냔 말이다. 비리 정치인들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대한민국은 다시 시작하는 셈이다. 어렵고 복잡하겠지만 해나가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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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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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 출간된 해가 2007년이었다. 그 당시에 읽었을 때도 큰 충격을 받았더랬다. 그리고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여러 나라들의 가난을 해결하겠다는 노력도 참 많이 했다는 소식도 종종 들었다. 반기문 총장도 유엔사무총장에 취임하면서 '어젠다 2030'이라는 목표를 발표하면서 '기아로 인한 대량학살을 완전히 멈추자'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세계에는 아직도 가난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과연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아님 해결할 의지조차 없는 건 아닌가?

 

  세계적으로 가난은 '현재진행형'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빈곤인구는 13억 명(2018년 기준)이고, 그중에서 아시아가 가장 많고, 아프리카, 중남미 순을 기록하고 있단다. 10년 전에는 빈곤인구가 22억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줄어든 숫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빈곤 수준'은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더욱 심각해진 상황이다. 다시 말해, 빈곤인구가 처한 상황이 더욱 열악해졌다는 말이다. 극빈자들은 하루에 약 2달라(약 2300원)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라면값으로 생각하면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라면만 먹고 살면 '영양실조'에 걸리기 십상이고, 쌀밥이라도 챙겨먹으려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반찬은 무엇으로 마련하려는가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복지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최빈국에서는 그마저도 기대하기 힘들다. 심지어 이런 나라에 원조를 하러 가던 비행기가 정부군이나 반군의 공격으로 피격되는 일도 다반사라서 도움을 주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굶주림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전쟁'과 '사막화' 때문이다. 굶주리는 원인을 분석하면 '경제적 굶주림'과 '구조적 굶주림'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천재지변이나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굶주림은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식량도 구하기 힘든 굶주림이고, 구조적 굶주림은 가난한 국가의 '경제 수준'이 턱없이 낮아서 국민들의 굶주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해결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아서 만성적인 굶주림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 나라에서 굶주림을 해결이 어려운 이유는 '국제기구의 자금 부족'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분석이 나온다. 여러 경로를 거쳐서 후원금이 지원되고 있지만, 가난한 나라들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풍복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결국 '선별적 지원'이라는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여기에는 굶주림도 문제지만 '의료 부족'으로 이어져서 당장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환자는 의사도 만나보지 못하고 문앞에서 출입을 제한받는 처지라고 한다. 이들을 내치는 간호사의 심적 스트레스도 상당하지만 현실적으로 의사를 만난다고 해도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는 당연히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일 '곡물 부족'으로 이어진다. 현재에도 전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지만, 이 농산물을 가난한 나라까지 '운반'할 방도가 마땅하지 않아서 그대로 버려지거나 썩어버린다고 한다. 심지어 선진국의 가축들이 먹는 '사료(옥수수)'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주식'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곡물을 가축에게 먹이면서도 사람은 먹을 수 없어 굶어죽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여기에는 각 나라마다 농산물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저장하고 운반하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곡식이 썩어나가도 '무상'이나 '헐값'에 곡물을 넘기면 농산물 경제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문제기 때문에 곤란하고 복잡한 문제이긴 하다.

 

  이보다는 더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교육'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틀림없다. 당장은 배가 고프더라도 더 나은 삶이 '보장'된다면, 그것이 '교육'을 통한 것이라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라도 열심히 살 것이다. 과거의 우리 나라가 그러지 않았는가 말이다. 식민지 수탈과 전쟁의 폐허속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궈낸 경험은 이들 나라에게 큰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높은 교육열이 결국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지 않았냔 말이다. 그러니 가난한 나라일수록 '교육'을 통해서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하는 까닭은 '정치지도자들의 낡은 관념' 때문이다. 이런 나라들이 오래도록 가난한 국민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까닭은 정치적으로 쉽게 다스리려는 목적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도 '독재시절'을 겪지 않았던가. 그래서 경제적 성장이 있었음에도 '부의 균형'을 잃어버렸고, '부정한 세력들'에게 부가 쏠리는 현상을 낳았고, 더 심각한 것은 '부정한 정권'에게 권력을 쥐어주어서 오래도록 민주투쟁을 해야만 하는 혼란을 겪기도 했으며, 지금에도 그 혼란이 잔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극빈국에서 겪는 '정치적 혼란'을 짐작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인가? 지금으로써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효율적인 인도적 지원'이 큰 효과를 낼 것이다. 비록 적은 돈으로 운영을 허덕이고 있다지만 그래도 도와줄 나라는 도와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각 나라의 현황에 맞게' 지원하는 것이다. 왜냐면 각 나라의 사정을 돌보지도 않고 '손쉬운 방법'으로 지원을 하다가는 자칫 '부정한 세력'에게 돈이 흘러들어가 도움은커녕 애초에 의도한대로 지원하지도 못할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반군쪽에 억류되어 있는 난민들을 도와주기 위해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항공지원'으로 편리하게 지원하려다가 '공항'이 정부군 소속일 경우에는 지원품이 난민들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정부군'에게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원을 할 때에는 확실하게 지원하기 위해서 철저한 조사와 현장을 오가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혁명적 개혁'이 가장 효율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상카라 개혁'이다. 사하라 사막 남쪽에 위치한 '부르키나파코'라는 나라에서는 정치적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며 불과 4년 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혁명적 성과를 냈었다. 이 나라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다가 1960년에 독립을 했지만 가난과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허나 상카라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 고집스럽게 개혁정책을 밀어붙이자 놀라운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이웃 나라들의 부패한 권력자들과 프랑스 정부의 일부 정치가들이 못마땅하게 여긴 탓에 자기 동지였던 사람에게 살해당했고, 부르키나파소는 다시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부패와 굶주림, 수탈의 일상이 되돌아고 말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계적인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효율적 인도적 지원'과 '혁명적인 개혁'이 절실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는 오랫동안 기아 문제 연구가이자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약했던 장 지글러의 결론이기도 하다. 전세계 식량 생산량이 온 인구를 다 먹여살리고도 남을 정도로 넘쳐나게 되었는데도 아직도 가난과 굶주림을 해결 못한 까닭은 단언컨대, 세계적 빈곤과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극빈국에서도 스스로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할 수 있는 인프라 설치가 절실한데도 그러한 노력이 미흡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체계적인 지원'을 한다해도 결국엔 '밑 빠진 독'을 채울 순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는 것에도 다각도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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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킷리스트 - 21세기 지식인들이 선택한 인생 책 12
홍지해 외 지음 / 한빛비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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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은 참 많았다. 책을 쓴 저자를 초대해서 '대담'을 하거나, 책에 대한 식견이 높은 저명한 인사를 모셔와 '토크쇼'를 열거나, 유명 연예인이 나와서 '책홍보'를 하거나, 분야별 전문가가 '책강독'을 하는 등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곤 하였다. 하지만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tVN)처럼 열광했던 적은 없었다.

 

  이 프로그램에 많은 독자들이 열광한 까닭은 무엇일까? 전현무의 입담 덕분이었을까? 설민석의 명강의 때문이었을까? 패널로 나온 전문가들의 '일타강의'가 맘에 쏙들었을까? 어쨌든 이 프로그램은 열화와 같은 독자들의 박수를 받으며 현재 '시즌 1'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조만간 '시즌 2'로 돌아오길 고대하는 프로그램 중에 으뜸일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프로그램의 매력은 바로 읽고는 싶었지만 차마 읽을 수 없었던 '어려운 책'을 대신 읽어주는 형식이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왜냐면 너무나도 유명한 책이라서 읽고는 싶은데 너무 어렵고 두꺼운 탓에 읽지 못하다가 '1시간 남짓의 시청'만으로 책에 대한 정보를 전문가 못지 않게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평소에 책에 대해 관심이 없는 시청자가 보더라도 시청하기만 하면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샘솟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던 것도 한 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이 책 <북킷리스트>는 바로 그 프로그램에서 다루거나 '여러 가지 사정상' 다루지 못했던 책들의 목록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한 내용'과 함께 실어놓은 책이다. 총 12권의 책 목록을 수록했는데, 그 가운데 1권인 <지리의 힘>을 뺀 나머지 목록들은 TV에서 살짝 언급했으나 깊이 다루지 못한 책들이거나 시청자들이 방영을 요청한 목록 가운데 '도서선정 단계'에서 아쉽게 탈락한 책들이 수록하였다. 그 때문일까? 책을 읽는 내내 설민석의 강독과 전현무와 전문가 패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책은 정말 술술 잘 읽혔다. 그리고 수록된 '목록'의 책들을 읽고 싶은 욕구도 샘솟았다. 물론 이미 읽은 책 목록도 있었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그리고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진즉에 읽은 책들이었다. 하지만 혼자 읽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분명 '문자'를 읽었는데 '동영상'에 재생되는 듯한 경험을 한 것이다. 이는 TV프로그램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덕분일 것이다. 덕분에 나는 '책을 읽었을 뿐인데 TV를 시청한 것' 같은 색다른 경험을 하였다.

 

  어서 '시즌 2'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종영한 지 반 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지만 말이다. 그 때문에 <북킷리스트>가 더 반가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참에 '시즌 2'가 돌아오기 전까지 <북킷리스트> 시리즈라도 꾸준히 발간되었으면 좋겠다.

 

  추신...그래서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궁금해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난 '책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애초에 이 책의 기획이 [망설이던 책의 문 앞까지 길을 깔아주는 책]인 탓에 이 책의 내용을 모조리 언급한다면, 이 책의 재미는 읽어서 얻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을 '건너 띄고' 해당 책을 구매해서 그 책을 읽는 사례도 일어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책 목록을 수록한 책'인 탓에 '원래의 책'이 더 많이 읽힌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러면 이 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짜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엄두도 내지 못할 어렵고 두꺼운 책을 '훌륭한 안내자'도 없이 도전하다가 제 풀에 쓰러지는 일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는 뛰어난 등산가라 하더라도 '셰르파'의 도움 없이는 절대 산행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르파'는 '짐꾼'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산행'을 하다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훌륭한 조언을 해줌으로써 끝까지 안전한 등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독서가라도 '안내자' 없이 독서를 무계획적으로 하다보면 도중에 중단하거나 제자리에서 맴도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훌륭한 안내자'로서도 충실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원래의 책을 읽다 헤맬 때에도 이 책에서 요약한 내용을 참고 삼아 읽으면 '바른 길잡이' 역할도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참 매력적인 책이다. <북킷리스트>의 또 다른 시리즈를 고대한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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