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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인문학 수업 : 연결 - 오늘의 지식을 내일의 변화로 이어가기 ㅣ 퇴근길 인문학 수업
이종관 외 지음, 백상경제연구원 엮음 / 한빛비즈 / 2019년 9월
평점 :
[My Review MDCCCLXXVI / 한빛비즈 160번째 리뷰] <퇴근길 인문학 수업> 다섯 번째 책 '연결'편이다. 시즌 1에 해당하는 '멈춤, 전환, 전진'에서는 인문학의 '방향성'을 집중 조명해보았다면, 시즌 2에서는 '관계, 연결, 뉴노멀'로 인문학이 우리 삶에 어떻게 연관짓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 가운데 '연결'편에서 다뤄볼 내용은 5강 <세종의 원칙>(인문학자 박영규)과 8강 <인물로 이해하는 춘추전국시대>(역사인류학자 공원국)이다.
미치광이의 폭거로 시작된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국민불안감은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중'이고, 이번주 토요일 5시에 '대통령 탄핵소추 안건'이 국회에서 표결에 붙여질 예정이다. 하야를 해도 모자라고 급박한 시국에 몇 명 남지도 않은 극소수의 지지자를 '선동'시켜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보려 애를 쓰고 있지만, 국민들이 바보는 아니다. 미치광이는 국민들이 폭동이라도 일으켜서 '내란의 혼란'속에서 영구집권을 노리는 망동을 선택한 모양이지만,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국민은 없다는 사실만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지금 이 시점에 '폭동'을 주장하는 시민이 있다면, 그가 바로 '내란수괴의 동조범'이 확실하다. 폭력시위는 미치광이가 최후의 발악을 할 때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차분히 '미치광이'를 헌법절차에 맞게 탄핵시키고, 그에 따른 죗값을 달게 받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이제와서 다시 '세종'인가?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대한민국에 '왕조시대'의 성군이 바람직한 리더일리도 없는데 말이다. 더구나 '제왕적인 군주'처럼 굴던 대통령은 하나 같이 비극적인 결말로 임기를 마친 대한민국의 슬픈 정치역사에서 세종의 리더십을 다시 목소리 높이는 까닭이 무엇일까? '인문학자 박영규'는 세종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걸맞는 '무위(無爲)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한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그런 권한을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어떻게 물려준 '왕권'이란 말인가? 제 형제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충신을 자처하는 신하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쟁취한 왕권이다. 그런 왕권을 세종은 가볍게 내려놓았다. 그건 취임하자마자 신하들에게 토론을 제안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과인과 함께 국사에 대하 논하자. 그대들의 의견을 듣겠다"라는 대목이다. 아버지 태종과는 사뭇 다른 국정운영을 하겠다는 발언이었다. 더구나 겸손하기까지 하다. 초짜 임금이니 업무에 서투를 수밖에 없고, 아는 것도 많지 않은 젊은 군주이니 '당신들의 지혜'를 빌려달라는 취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발언이다.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상호 협의를 내세운 임금 앞에서 신하들은 반신반의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세종의 아버지, 태종 때에는 신하들이 '소신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세종은 진심이었다.
그런 임금의 진심은 오래가지 않아 '진실'로 증명되었다. 토론 과정에서 나온 발언을 두고 세종은 누구의 발언이든, 어떤 내용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실리와 효용'만을 따져서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파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실력 검증'만으로 관직을 내리니 허조, 황희, 김종서, 박연, 장영실 같은 큰 인물이 세종의 주변에서 제대로 실력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무위의 리더십'은 조선 초기 강성한 국력을 마련하는데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우게 만들었다. 뭔가 감이 오지 않는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절실하고, 국민들이 가장 바라마지 않는 '리더의 덕목'일 것이다.
왜 윤석열은 이런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던가? 애초에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감이었다는 지적이 가장 적절한 근거일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 보수는 '박근혜 탄핵'을 맞아 괴멸 수준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보수 진영에서 내세운 '새로운 대표'가 바로 윤석열 카드였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을 지내며 진보 진영과 대립각을 세웠던 선두주자였던 것이 얼떨결에 '대선출마'까지 하게 되었고, 보수 진영에서는 마땅히 내세울 대표가 없자 문재인과 싸웠던(?) 투사, 윤석열을 '대타'로 내보내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맞는 듯 싶었다. 일단은 '정권 재창출'을 해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윤석열'을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봤지만, 보수 지지자들에겐 '구원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윤석열은 그런 보수 지지자들의 바람대로 움직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윤석열은 '집권'을 하자마자 독자적인 행보를 했다. 그것도 아주 이상하게 말이다. 상식적으론 할 수 없는 일조차 윤석열은 '할 수 있는 일'처럼 밀어붙였다. 대통령 후보시절에 손바닥에 '王'이란 글자를 새겼을 때부터 이미 징조는 보였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설마설마 싶었다. 그러나 윤석열은 그런 국민의 열망마저 무참히 짓밟았다. 자신의 의지와 결단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위법자'로 내몰았다. 국민들은 민생경제가 파탄나며 생계를 걱정하며 대책마련을 호소했지만, 윤석열은 그런 소리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단결된 목소리를 내고자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불법'을 말하며 파업에 나선 이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다. 이에 비판적인 언론의 목소리가 나오자 '언론장악'에 나서서 비판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제 식구들을 요직에 앉혀놓고 '여론조작'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런 대통령이 2024년에 다시 등장할 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세종대왕의 리더십이 다시 조명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단 한 명의 미치광이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는지 온 국민이, 아니 전 세계가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세종의 리더십을 지닌 '대통령'이 다시 나오길 바라는 것은 비단 한국인 뿐만 아니다. 온 세계가 대한민국에 기대하는 바가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그간 대한민국의 위상은 그저 '선진국'이라는 수식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더 큰 가치를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바로 '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운 유일한 나라였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그간 '한강의 기적'으로 대한민국의 빠른 경제성장에만 주목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민주주의의 완성형'을 전 세계가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을 두고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춘추전국시대'를 다시 주목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 <춘추전국이야기>의 저자이기도 한 역사인류학자 공원국은 '인문학에서 다루는 통치권은 다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백가쟁명의 시대인 춘추전국을 관통하는 '통치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정당한 통치권 행사'에 대한 고찰을 이야기한다. 먼저 인문학은 '강자에 의한 약자 지배'를 강자의 우월성으로 읽지 않고, 비정상적 통치'로 읽는단다. 이에 따르면 윤석열은 인문학에 털 끝만큼도 아는 것이 없는 무식쟁이가 틀림없다. 또한 인문학에서는 바람직한 통치권의 척도는 '인류 전체의 복지'라고 지적했다. 이 척도에 의하면 윤석열은 '자기만의 천국'을 지향했으므로 복지 또한 알지 못하는 상또라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윤석열이 내세우는 카드는 '대한민국 제1호 세일즈맨'이라면서 나름 경제학적 리더십에서만큼은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는 듯 싶다. 그러나 '물질적 복지'를 내세우거나 '어떤 집단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것으로 인문학적으로 바람직한 통치를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중산층' 이하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의 경제가 파탄 직전으로 내몰리지 않았느냔 말이다. 도대체 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 미치광이의 '대화법'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
자, 긴 말 할 것도 없이 예를 들어보자. 책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을 소개하겠다. 한밤중 골목길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패거리가 동급생으로 보이는 한 명의 학생에게 집단 폭행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당장 달려들어 주먹을 날리는 방법이 있다. '묵가의 사상가'가 할 법한 행동이다. 묵가의 첫 번째 원칙은 '비공(非攻)'이기 때문이다. 힘 있는 다수가 힘 없는 이를 먼저 공격한다면 이를 막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상황을 지켜보며 주판알을 튕기거나, 혹시나 폭행 당하고 있는 학생이 먼저 잘못한 것은 아닌가 따위를 생각하며 머뭇거리다 그 학생이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경찰에게 전화를 거는 방법도 있다. '법가의 사상가'일 가능성이 높다. 만인에게 적용되는 공정한 법이 바로 '사적으로 구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법치주의에 입각한 행동준칙들은 궁극적으로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저자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나도 공감한다. 하지만 나쁜 짓을 한 이들에게 처벌을 할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경찰 신고'를 한 뒤에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 바람직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고 싶다. 한편, 달려가 맞고 있는 학생을 온몸으로 감싼다면 '도가나 유가 사상가'일 가능성이 크다. 도가에서는 '비폭력주의'가 몸에 벤 탓일게고, 유가에서는 '측은지심'이 발현하여 그런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 일이 아니야'라고 여기거나, '내 힘으론 어쩔 수 없어'라고 포기하는 사람은 정당한 통치권을 포기한 사람이고, 사상이 없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리더가 될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럼 윤석열은 어떤 사상에 입각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었을까? 윤석열이라면 당장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을까? 꽤나 그럴 법한 상상이 되긴 하지만, 결코 매 맞고 있는 학생을 구하기 위해서 '정의의 주먹'을 날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과 한 편을 먹고 짓밟지나 않으면 다행일테고 말이다. 법조인 출신이니 '경찰'에 전화를 걸었을 것이란 생각이 앞선다. 하지만 진상조사를 밝히거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힘의 과시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이다. 애초에 폭력사건이 일어난 까닭이나 배경, 피해자를 위한 초동조치..이따위는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저 '엄정한 수사', 그로 인해 '내릴 수 있는 법적조치'가 얼마나 거창할지에만 관심을 둔 상또라이일테니 말이다. 달려가서 매맞는 학생을 온몸으로 감싸는 일 따위는 할 리도 없다. 또하 '내 힘'이 얼마나 센데 어쩔 수 없다니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정답은 '그건 내 일이 아니야'라고 여길 것이다. 조무래기들이 벌이는 폭력사건 따위를 대통령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며 그냥 스쳐지나 가며 애초에 '못 본 척'할 것이 틀림없다. 인문학적으로 절대 '리더'가 되어선 안 될 사람인게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수많은 통치자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리더가 우리를 이끌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통치자가 누구였는지 따지기도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거때마다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간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행동조차 소홀히 했다.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하기도 하고, 내가 찍는 한 표가 '어떤' 정치인에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되는대로 '아무나' 찍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름 소신을 갖고 한 표를 행사한다는 이들도 '보수냐, 진보냐'라는 진영논리만을 따질 뿐, 내가 행사한 한 표가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짙게 드러난다. 모두 바람직한 투표는 아니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투표란 무엇인가? 물론 '모범답안'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찍은 후보'의 통치행위에 책임을 통감하는 무게감을 느껴야 한다고 본다. 행여 내가 찍은 후보가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면 심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국정운영을 엉망진창으로 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따끔한 질책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행사한 소중한 한 표'가 아깝지 않게 된다. 아닌데, 내가 보기에 '간첩' 때려잡기 위한 최고의 조치였고, 국정운영을 방해하는 '야당'을 견제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책이었으며,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윤석열이 잘 했다고 지지하고 있다면, 당신도 '사상이 없는 사람'에 해당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윤석열처럼 행동하면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인 것이고, 제 욕심만 가득한 미치광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천만에 하나, 만만에 하나라도 행여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제발 철학공부 좀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