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호의 과학 탐험 1 - 보다호의 탄생 보다호의 과학 탐험 1
임영제 지음, 윤현우 그림, 김범준 외 감수, 과학을 보다 원작 / 알파주니어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다호의 과학 탐험 1 : 보다호의 탄생> 임영제 / 과학을보다 / 김범준, 지웅배(우주먼지) / 알파주니어 (2025)

[My Review MMCCLVII / 알파주니어 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여섯 번째 리뷰는 인기 유튜브 <과학을 보다>를 어린이 학습만화로 재탄생시킨 <보다호의 과학탐험 1>이다. 학습만화는 장단점이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게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없애는 방법으로 독서를 시켜야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다. 특히나 '과학 학습만화'는 완전 필독서다. 집집마다 한 질 정도는 꼭 있을테지만, 없다면 반드시 구비하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의 미래에는 더더욱 '과학기술'이 첨단화될 것이기 때문에 과학상식이 전혀 없는 '문과형 아이'로 키우면 거의 절망적일 것이다. 반드시 과학을 공부시켜야 한다. 적어도 과학이 뭔지는 알 수 있게끔 해야 어른이 되었을 때 '필요'에 의해서 뒤늦게 과학공부를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은 키워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과학 학습만화'는 꼭 읽히시길 바란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보다호의 과학 탐험 1> 관점 포인트 : 학습만화계의 넘버 1은 여전히 <Why?>시리즈 일테지만, 눈길을 살짝 바꿔서 유튜브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판도가 달라질 것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라도 좋아하는 컨텐츠는 다름 아닌 <과학을 보다>이기 때문이다. 조회수가 많은 것은 둘째치고, 아예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딱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컨텐츠이고, 정말 재밌고 유익한 '과학컨텐츠'다. 한 편을 볼 때마다 40~60분 정도를 시청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건너뛰기'를 하지도 않고, 알고리즘이 멈출 때까지 계속 시청도 가능할 정도로 푹 빠져서 볼 수 있는 동영상이다. 이렇게 인기를 끌고 있기에 <과학을 보다>라는 같은 제목의 책도 나왔을 정도다. 이 책 <보다호의 과학 탐험>은 바로 그 유명 컨텐츠를 어린이도 쉽고 재미나게 볼 수 있는 '과학 학습만화'로 내놓은 책이 되겠다.

책의 구성은 '학습만화'답게 '초등교과 연계'를 확실히 했고, 초등생들의 눈높이에 딱 맞춘 주제와 컨셉에 눈높이 수준까지 맞췄기에 읽기에 수월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편집이 돋보이고, 무엇보다 재미를 보장하기 위해서 '어린이 주인공'이 등장해서 모험을 떠난다는 기본 틀로 꾸며져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최고의 학습만화'라 하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 무엇보다 인기절정의 교수님들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1권에서는 김범준 물리학교수님과 지웅배 천문학교수님이 등장해서 전체적인 학습코너를 '물리학'과 '천문학'으로 꾸며 놓았다. 교과연계로 본다면 '물리'와 '지구과학' 파트에 해당하고, 과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물리학'과 과학의 재미를 보장하는 '지구과학'으로 어린이 독자들의 시선집중을 확실히 보장하게 될 것이다.

보다 자세하게는 '태풍', '우주', '피사의 사탑', '공룡 멸종', 그리고 '연금술의 신비' 등 과학에 관심이 많은 초등생들이라면 엉덩이가 들썩이게 만들 주제가 담겨 있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어려운 공식'부터 달달 암기하고 이해시키려 들면 100% 싫어하게 된다. '수포자'가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무턱대고 '공식암기'부터 들이대면서 '문제풀이'만 강요하고 반복하다보면 금새 지겹게 되고,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싶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과학도 '수포자'를 양산하는 방법대로 공부하려 드는가?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 재미나게 공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래서 초등수학은 '스토리텔링'으로 배우고, 초등과학은 '호기심 자극'에 탁월한 눈요기를 확실히 할 수 있는 대상부터 배우고 익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나가는 글 : 이렇게나 좋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읽지 않는다면 반드시 손해를 볼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혹시나 학부모 여러분들이 어린 자녀에게 <학습만화>를 사주고서 '알아서' 읽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혹여 그런 방법이 잘 통했던 분들이 계시다면 댓글을 남겨주시면 고맙겠다. 왜냐면 십중팔구는 실패하기 딱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학습만화'를 제대로 뽕을 뽑을 정도로 제대로 읽는 아이가 있다면 '성적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수한 성적'인 학생이 <학습만화>도 제대로 읽고, '저조한 성적'인 학생은 <학습만화>조차 수박 겉핥기로 읽어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흔하다.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만 가봐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기똥차게도 '만화책이 꽂혀 있는 서가'를 단박에 찾아낸다. <학습만화>도 예외는 아니다. 억지로 부모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도서관 의자에 앉아 있다면 십중팔구는 '읽으라는 책'은 읽지 않고 '만화책'이 손에 들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눈치가 있는 학생이라면 '만화책'을 들고 있으면 혼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핑계라도 댈 수 있는 '학습만화'를 손에 들고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학교성적이 높아야 '학습만화에 대한 이해도'도 높기 마련이다. 이런 친구들은 따로 학습지도를 하지 않아도 '내용간파'에 탁월하고, '주제학습'도 수월하게 스스로 해낸다.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중요한 것을 알아서 습득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학교성적이 낮은 편이면 '학습만화'를 아무리 읽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면 <학습만화>의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그저 등장인물의 코믹한 내용만 머릿속에 저장하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내용에 해당하는 '지식/정보'에 해당하는 내용은 머릿속에 담지 못하고, 시험에 나오지도 않을 '웃긴 내용'만 읽어나가고 그 상태로 책을 덮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집안에 아무리 <학습만화>가 많더라도 다 무쓸모다. 그래서 비싸게 큰 돈을 들여서 <학습만화 100권>을 통째로 사다가 거실 책꽂이와 아이 공부방에 한가득 꽂아놨는데도, 도통 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하소연만 풍성한 집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학교성적이 그리 높지 않으면 <학습만화>에 거금을 투자하지 말라고 코칭하곤 한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학교 성적이 낮으니까 '만화책'으로 공부라도 하고, 이해를 쉽게하고, 낮은 성적이나마 올릴 목적으로 읽는 책이 <학습만화>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대답은 '아니오'다. <학습만화>를 결코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생각보다 수준 높고, 내용도 어렵고, 전문가의 도움이 없으면 이해조차 하기 어려운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 스스로 재미나게 읽으며 '학습성과'도 쑥쑥 올릴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성적 상위 10% 이내가 아니라면 <학습만화>는 읽어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 틀림 없다.

학부모들에게 한 가지 귀띔을 드리자면, 댁의 자녀가 <학습만화>를 읽으면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 단언컨대 '상위 10% 이상'의 성적을 받는 학생일 것이다. 반면에 <학습만화>를 읽으면서도 몸을 베베 꼬며, 시선은 산만한데,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엄청 빠르고, 읽으면서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중하위권 학생'일 경우가 틀림없다. 후자의 학생들은 적절한 '코칭'을 받아야 <학습만화>를 제대로 읽게 될 것이다.

<학습만화> 코칭 방법도 소개해드린다. 책을 완독한 뒤에 '쪽지 시험'을 보는 것이다. 중하위권 학생이니 '서술형 답안'을 쓰기에는 너무 벅차므로 간단한 체크를 하기 위해서 '단답형 문제 5~10개'를 매 책마다 실시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독서감상문'을 반드시 쓰게 하는 것이다. 감상문의 내용은 <학습만화>를 펼치면 나오는 '지식컬럼'을 활용하면 좋다. 그 '지식컬럼'의 내용중에 '이미 알고 있던 지식정보'는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밝히고, '새롭게 알게 된 지식정보'는 무엇이고, 그 지식정보를 '어디에' 써먹으면 좋을지 정리해보고, '앞으로 알고 싶은 지식정보'가 있다면, '왜' 그 지식정보를 알고 싶은지 솔직한 내용을 짤막하게나마 써서 정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무수히 많은 코칭 방법이 있으니 다양하게 써먹어 보는 것도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한다고 말해요 - 나태주 시 그림책
나태주 지음, 심보영 그림 / 한솔수북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한다고 말해요 : 나태주 시 그림책> 나태주 / 심보영 / 한솔수북 (2026)

[My Review MMCCLVI / 한솔수북 1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다섯 번째 리뷰는 따뜻한 마음과 다정한 말씨를 한껏 감상할 수 있는 나태주 시인의 시가 담긴 그림책 <사랑한다고 말해요>다. 동시는 어린이의 마음가짐으로 순수하게 써내려간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읽기에도 어렵지 않고, 어린이의 감성을 자극해서 가슴은 따뜻해지고 마음은 하늘만큼 땅만큼 넓어지는 것이 동시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런 동시를 어린이만 읽어야 할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동시가 '어린이를 위한 시'인 것은 맞지만 '어른이 직접 썼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간혹 '어린이 시인'이 쓴 동시도 있지만, 그런 어린이 동시를 책으로 엮어낸 것은 정말 찾기 힘들다. 그런 까닭에 <동시집>은 어린이만 읽어야 하는 게 절대 아니다. 반드시 어른인 '엄마아빠가 함께 읽어야 할 시집'인 것이다. 그래야 화룡점정과 같이 마지막 '마음의 점'을 함께 찍어 마침내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사랑한다고 말해요> 관점 포인트 : 먼저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작가가 '나태주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까닭에 시인의 글을 읽으면 '동시'를 읽는 듯 순수함이 함박 묻어나기 때문이다. 어른의 감성으로 쓴 시인데도 나태주 시인의 눈과 손과 마음을 거치고 난 글들은 '예쁜 글씨'로 새롭게 태어난 듯 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 [풀꽃1 전문] 읽기만 했는데도 눈앞에 풍경이 선해지지 않은가. 이런 시인이 시는 그저, 그냥 줍는 것이다 // 길거리나 사람들 사이에 / 버려진 채 빛나는 / 마음의 보석들 <사랑한다고 말해요> 중 [시 전문] 이라고 말한다. 어느 시인은 '시집' 한 권을 애써 펴내도 사람들이 사지 않아 빈털터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고 한탄을 해서 안쓰러웠는데, 나태주 시인은 '그냥 주웠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나태주 시인의 시집만 사달라는 건 아니다. 그냥 마음 따뜻해져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시인의 안타까운 사정은 전혀 다른 이야기고, 자신이 애써 쓴 시를 사람들은 '인터넷'에 선심 쓰듯 '공짜'로 올리지만, 정작 그 시를 쓰며 고생하고 노력한 시인은 굶주리다 못해 죽을 지경이라면 한탄을 해서 안쓰러웠다는 얘기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골라' 읽지만 말고 마음에 드는 시가 있다면 시집 한 권쯤 '사서' 읽어달라는 하소연 담긴 사연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도 나태주 시인은 '그냥 줍는 것'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그렇게 주운 시가 '마음을 빛나게 해주는 보석들 같다'고 노래했다. 시인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그냥 길거리에 뒹굴고 있을 돌에 불과했지만, 시인에 따뜻한 마음과 아름다운 눈에 꼭 들어와서 보석이 되었노라고 얘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런 수준의 시를 어린이들에게만 읽으라고 골라주기만 하는 엄마아빠라면 아무리 '보석같은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그냥 돌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으로도 충분히 '보석 같은 시'를 건져내는 능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천재적인 아이일지라도 처음에는 가르쳐줘야 한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돌이 아니라 보석이라고 말이다. 아이들 눈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그냥 신기해 보이겠는가? 수천만 원의 값어치를 가진 소중한 보석이라고 간파하겠는가? 그저 신기해서 쳐다볼 뿐일 것이다. '가치'는 가르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아이 혼자 보게 만들지 말고 엄마아빠가 함께 읽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책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보석같은 시그림'을 찾아내어 아이와 함께 '감상'을 해보라는 말이다. 그래야 아이도 나중에 홀로 그림책을 읽고, 시집을 읽으면서 길거리에 버려진 채 빛나는 마음의 보석을 찾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니 말이다.

나가는 글 : 요즘 어린이들은 어린이답지 않다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곤 한다. 심지어 초등학교 교사들조차 말이다. 비록 사교육이긴 하지만 나도 독서논술을 가르치는 선생이라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긴 하다. 그런데 40여 년이 넘도록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한 나태주 시인의 시를 보면, 그런 생각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그분도 어찌 그런 경험이 없었겠느냔 말이다. 버르장머리 없고, 못되 처먹은 심보를 가진 고약한 어린이들을 숱하게 경험하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나태주 시인은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써낸다. 옛말에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어른들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되새겨 보게 되었다.

우리는 '나쁜 어린이'라는 주홍글자를 새기기에 바빴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어린이까지 탓하지 말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굳이 종교적인 해석도 필요없다. 애초에 <성경>에도 없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출처조차 알 수 없지만, 이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까닭을 더욱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나태주 시인을 떠올릴 때마다 이런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그분의 시가 담긴 그림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어른이 되자고 말이다. 그렇게 바라보고, 더 자세히 바라보면, 그냥 돌멩이가 아니라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내 눈이 썩어서 보석을 알아보지 못한 주제에, 아직 다듬지도 않은 않은 '원석'같은 보석들을 휘황찬란하게 빛나지 않고 있다고 탓을 먼저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좋다. 너무 좋다. 부끄러운 마음가짐을 갖고 있던 나를 뉘우치고 따뜻한 마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해준 이 책이 고마울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 서양 철학 클래식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누리번역 옮김 / 루미너리북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미너리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누리번역 / 루미너리북스 (2026) [원제 : U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My Review MMCCLV / 루미너리북스 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네 번째 리뷰는 염세주의 철학으로 유명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박사논문작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 수없이 많은 '쇼펜하우어 자기계발서'도 거의 대부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중점적으로 여러 저작들에서 발췌를 할 정도로 그렇다. 그런데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는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기 전에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먼저 읽어야 한단다. 왜냐면 쇼펜하우어가 이 책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문'에 해당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먼저 읽고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쇼펜하우어 저작들' 가운데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제대로 뒤친(번역한) 책은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루미너리북스, 2026)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관점 포인트 : 솔직히 나는 '철학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사료에 해당하는 '철학 원전'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다시 말해 철학자 본인이 직접 쓴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철학자와의 대담'을 나누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부담스럽다. 철학자가 직접 쓴 글을 읽는 것은 철학책을 읽고 드는 '내 생각'을 철학자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 그에 대한 '답변'을 독자인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얼추 이해까지는 되지만, 이제는 '그 이해'가 제대로 된 것인지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서 자꾸 '다른 책'을 뒤적거리게 된다. 철학자의 '원전'을 2차적으로 '해석'을 가미해서 나름대로 저술을 한 책들을 즐겨 읽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해설서'를 읽을 때면 '삼자대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독자, 그리고 철학자의 논거를 풀어낸 해설가, 이렇게 3명이 나누는 대화이기에, 조금은 쉬이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철학자의 원전이었다. 약간의 '주석'이 달려 있긴 하지만, 오로지 원전의 내용을 충실히 뒤쳐낸 내용만을 읽고 쇼펜하우어의 깊이를 가늠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 책을 간략히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책을 그대로 읽고 감명을 받기에는 너무 어려운 글로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읽고 또 읽어야 겨우 실오라기 하나를 끄집어 낼 정도의 조잡한 실력을 소유한 '문외한'인 탓이다. 먼저 마주하는 핵심은 다름 아닌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다. 뭐, 사실 이것만 이해를 해도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어려운 말도 아니니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간다. 충족이유율이란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식의 체계' 차원에서 학문을 이해했기 때문에, 충족이유율은 '그 자체로 확실한 진리'라고 말을 바꾸어도 같은 말일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이미 많은 철학자들이 위의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선 철학자들은 '단편적으로'만 언급했을 뿐이고, 쇼펜하우어가 본격적으로 주장한 것이 사실이란다. 암튼 그 결과, 충족이유율의 본질은 바로 '왜?'라고 물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 여기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충족이유율이 중요한 까닭은 알았는데, 그 중요성에 대한 근거가 되는 내용들이 하나하나 열거될 때마다 '철학 비전공자'로서 무지함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까닭조차 간단히 설명하자면,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 '철학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먼저 '플라톤'의 이데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리스'의 형이상학을, '데카르트'의 자기원인을,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라이프니츠'의 근거율을, '볼프'를 스쳐지나가며 궁극적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뤘던 선험적 관념론까지 아울러 '상식'으로 갖추고 있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주워 들은 기억은 나지만 나에게 '철학'은 상식이 아니었던 탓에 쇼펜하우어의 '직접적인 설명'이 그리 와닿지 않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이후부터는 내 느낌대로 '이해'한 내용으로 최선을 다해 정리해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모두 같은 필요는 없다는 말로 귀결이 된다. 서양 철학에서 '사유'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데 반해서, '왜 사유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 적이 없었고,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사유는 엄밀하게 말해서 '진정한 사유'라고 볼 수 없다고 쇼펜하우어는 강조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헤겔 철학'을 크게 비판했는데, 그의 '유물론'이 바로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사유의 결과였기 때문에 헤겔의 주장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가짜'라는 극단적인 비판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유물론'이 그토록 엉망이었던가? 엉망인 것치고는 '유물론'이 등장하던 그 시대에 너무나도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헤겔이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쇼펜하우어는 시샘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왜냐면 헤겔과 '동시간'에 강의실을 열었는데, 헤겔 덕분에 쇼펜하우어는 강의를 들으러 들어오는 수강생이 거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인기가 없었기에 결국 쇼펜하우어는 대학에서도 쫓겨나고 말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헤겔 철학을 비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헤겔 철학은 근대철학을 완성하고 현대철학을 연 공로를 인정받으면서도, 오늘날 헤겔이 칸트 철학을 잘못 해석한 탓에 철학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비록 쇼펜하우어가 사망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로 인해 쇼펜하우어는 사후에 크게 인정 받으며 오늘날까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널리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나가는 글 : 사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 그 '의지'를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꼭 이해해야 한다고 앞서 말했다. 그럼 거꾸로 '표상'을 이야기하면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정리해보자. 사실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은 '칸트', '플라톤', 그리고 '불교(인도 베단타)'의 융합이라고 보아도 좋다. 쇼펜하우어의 '표상'을 이해하려면 칸트의 '현상(물자체)', 플라톤의 '가상(이데아)', 베단타의 '마야(삼신)'에 해당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표상'이 실재하기 위해서는 '의지'라는 관념적 결정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 상충하는 개념인 '실재론(표상)과 관념론(의지)'이 불교적 해석이 가미된 '물아일체(?)'의 경지를 선보여야 했던 것이다. 사실 '물아일체'는 장자가 말한 개념이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런 물아일체의 개념을 인도 불교 베단타를 통해서 개념이해를 한 모양이다. 암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에 다다를 때 비로소 '의지는 표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바로 '사유'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고, 그 사유는 바로 '확신할 수 있는 이유', '그 자체로 확실한 진리'의 결과인 것이다. 이제 다시 '충족이유율'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주요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먼저 읽으라고 확신한 것이다. 내가 이해한 것은 여기까지다. 나중에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비롯해서 다른 철학자들의 저작을 탐독하면서 이해한 내용이 있다면 다시 첨부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서양 철학의 오류를 '이유'에서 찾았던 것일까?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고, 원인이 발생하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게 되는 것처럼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서양 철학에서는 '그 이유'를 너무 가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관념적으로 따지고 들다보니 '실재하지 않은 근거'를 앞세워서 억지로 '이유'를 껴맞추려 했고, 그런 까닭에 '그 결과'조차 엉뚱하게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유독 비판했던 헤겔 철학도 '변증법'이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을 내세워서 '모든 것'에 억지로 껴맞추려 했고, 그 결과로 내놓은 것들에 오류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증명한 셈이다.

그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완벽한 이유'를 제대로 분석하며 '확실한 결과'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거짓'을 앞세워서 '혐오와 차별'을 일삼는 행태는 근절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심지어 잔혹한 전쟁조차 '정확한 이유'를 들어서 벌이는 것이 아닌 현실은 정말 참혹할 수밖에 없다. 이따위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해서 벌어지는 것인지 명명백백히 밝혀내야 할 것이다. 여러 모로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눈이 떠진 것 같다. 읽기 힘든 책이었지만 나름 보람을 느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 국내 최초 출간! 페르시아와 로마보다 먼저 세계 제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최초의 제국 더숲히스토리
야마다 시게오 지음, 박재영 옮김, 이희철 감수 / 더숲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숲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 국내 최초 출간! 페르시아와 로마보다 먼저 세계 제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최초의 제국> 야마다 시게오 / 박재영 / 이희철 / 더숲 (2026) [원제 : アッシリア_人類最古の帝国_トンボなし]

[My Review MMCCLIV / 더숲 1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세 번째 리뷰는 더숲히스토리 다섯 번째이자 국내 최초로 출간되는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다. '더숲히스토리' 시리즈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던 세계사가 아닌 잘 알지 못했던 세계사를 조명한 시리즈로, 지금까지 나온 책은 <바빌론의 역사>(2021), <비잔티움의 역사>(2023), <히타이트 제국의 역사>(2024), <무굴 제국의 역사>(2025), 그리고 이 책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가 올해 출간되었다. 그동안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 역사를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갈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나라에는 이 들의 역사를 집중조명할 전문가가 거의 없는 형편이고, 있다손 치더라도 책을 내어줄 출판사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어렵사리 출간할 역사책을 읽어줄 독자가 그닥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적은 '역사에 관심이 생긴 독자들'조차 유명하고 낯익은 역사책을 찾아 읽지, 이름도 낯선 역사책을 굳이 찾아서 읽을 까닭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출간하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름도 생소한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를 읽어야 할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관점 포인트 : 여러분은 <길가메시 이야기>를 알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전설로 전해지는 영웅이야기인데 어떤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지 아는가? 바로 '아카드 어'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길가메시'를 수메르인이 지어낸 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그 이야기가 어떤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바로 '아카드 어'라고 한다. 그리고 '아카드 어'를 쓰는 민족이 바로 '아시리아 인'이다. 그들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길가메시 이야기>를 '쐐기문자'로 점토판에 '기록'을 남겼고, 이 '점토판 기록'이 오늘날 가장 최초로 <길가메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고 전해진 것이다. 만약 아시리아 인이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구전은 언젠가 끊겼을 것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길가메시 이야기>를 몰랐을 것이다.

좋다.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은 <길가메시 이야기>를 몰라도 된다. 모를 수도 있다.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에 무관심하게 살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길가메시 이야기>를 전했던 '아시리아 인'에 대한 오늘날의 이미지는 매우 포악하고 잔혹한 짓을 많이 한 민족으로 정해져 버렸다. 왜냐하면 <성경>속에 아시리아에 대한 표현이 남아 있는데, 딱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속에 아시리아 인은 북이스라엘 국가를 침략해서 멸망시켰고, 남유대 국가를 침공했다가 오랜 시일이 지나 전염병이 퍼져서 결국 패배해서 돌아갔다고 적혀 있다. 그럼 <구양성경>은 누가 썼는가? 바로 유대인이 쓴 '기록'이다. '구약'은 유대인의 역사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후 아시리아는 멸망하고 사라진 뒤, 후세 사람들은 무엇으로 아시리아 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기억할까? 다름 아닌 <성경>속 '구약 이야기'를 통해서 아시리아 인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을 침략해서 멸망시키고 해코지한 민족을 '위대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남겼다'고 기록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잔인하고 난폭했으며 야만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적어 놓았을 것이다. 왜냐면 역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 갈라진 그리스도교를 믿는 서구인들은 <성경>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아시리아 인'에 대한 이미지가 굳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단다.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고대 유적을 발굴하는 유적탐사팀이 '아시리아 인'들이 남긴 '점토판'을 분석한 결과, 아시리아 제국이 로마제국처럼 초기에는 '공화정 체제'를 만들어 민주적인 제도로 집정관을 뽑아 지도자로 삼아 정치를 이어나갔고, 훗날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자 자연스레 왕이 등장해서 한껏 넓어진 국토를 다스리는 제국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이를 지탱하는 경제체제도 갖추고, 시민들은 다양한 문화예술을 즐기면서 '문명인'과 다를 바 없는 풍요로운 문화를 누리며 살았다는 기록이 생생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유대인이 살던 지역은 초라한 변방에 불과했고, 강대국이 주변국을 정복하며 제국의 역량을 어김없이 발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자연스러웠기에 '아시리아 제국'을 한낱 야만인처럼 취급하기에는 너무나 적절치 못했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역사를 '기록'을 통해서 들여다 본다. 물론 그 '기록'이 완벽할 수는 없고, 때로는 너무 빈약해서 진면목을 살펴보기에 너무 부족할 수도 있고, 때로는 '승자의 일방적인 기록'이나 '패자의 악의적인 왜곡'으로 잘못된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역사는 팩트체크를 위해서 '교차검증'을 하고 있으며 '하나의 사료'나 '한쪽의 사료'만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라고 섣불리 평가내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여러 기록이 '한 목소리'로 공명을 이룰 때, 비로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역사책을 읽으며 다양한 해석을 하며 '역사의 필요성'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객관적 사실'만을 역사라고 부르지 않는 까닭이다. 그 사실을 토대로 '역사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 진정 역사책을 읽는 까닭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성경>만이 유일하게 남은 기록이었다면 현재까지도 '아시리아'는 어두운 이미지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 남긴 기록이 온전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왜곡'이 심한 기록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질문한 것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말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은 <성경>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종교적 권위를 가진 '기록'이고, 그 기록에 의해서 '왜곡된 거짓'을 진실인냥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름 아닌 '힘이 센 강자의 의도'대로 그냥 믿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물론 내가 '강자에 속한 집단'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약자 집단'이고, 멸망한 줄 알았던 '아시리아인의 후손'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짜뉴스에 의한 혐오와 차별을 쏟아지듯 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더구나 '역사'에 관심도 없으니 제대로 된 항변도 할 수 없고, 그저 당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반대로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자도 '역사적 진실'을 바로 알고 '가짜뉴스'를 판별하고, '혐오와 차별'을 일삼는 부끄러운 짓을 멈출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정의로운 일'에 앞장 서게 될 것이다. 또한, 약자도 '역사적 진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는 옳지 못하고 부당한 억압과 차별, 그리고 폭력 앞에서도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이런 부끄러운 행동을 저지르지 않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옳지 못한 일을 바로 잡을 수도 있다.

나가는 글 : 대한민국은 지난 100여 년간 엄청난 격동의 역사를 보냈다. 망국의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식민지 백성의 고난이 시작되었고,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독립을 이뤘지만, 곧이어 터진 전쟁의 아픔을 겪으며 완벽한 굶주림을 겪어야 했고,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겨우 굶주림을 면했구나 싶더니, 민주주의가 탄압당한 군사독재가 펼쳐졌고, 그 어둡고 처절했던 시절을 민주화항쟁으로 극복하고 이뤄낸 대한민국이 드디어 선진국이 되고, 진정한 강대국으로 성장해서 전세계 인류의 공영과 평화를 이룩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부강한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얼마나 '약소국의 설움'을 당했던가 말이다. 그때마다 고개 숙인 대한민국 국민들을 일어서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랑스런 우리 역사'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정복활동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외적의 침략에는 분연히 맞서서 이겨내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우리 역사의 끝에 전세계를 호령하는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히 힘을 과시하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란 말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자랑스러워 해야 하고 세계 만방에 널리 알려야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역사를 잘못 배운 이들이 부끄러운 짓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자국의 역사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다른 강대국들의 비위를 맞추어 '자국의 역사'마저 먹칠을 하고야 마는 멍충이들이 너무 많다. 우리끼리는 얼마든지 싸워도 좋다. 그것이 실리를 두고 싸우는 것이든, 명분을 두고 의견을 다투는 것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어이 없게도 우리땅에서 '다른 나라 국기'를 들고서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자국 정부'를 흔들고, '자국민을 헐뜯는' 멍충이를 어떻게 봐줘야 한단 말인가? 이들은 역사를 잘못 배운 이들이다.

한국사든, 세계사든, '역사'라는 한 울타리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래야 세계속에서 한국이 맥을 같이 할 수 있고, 한국사를 배우는 것으로 세계사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사는 '위대한 역사'로 가치를 높여 다루고, 그런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간 몇몇 강대국들 위주의 '편협한 세계사'를 배운다면 잘못된 역사관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관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면 심각한 왜곡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세계사'를 서양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절대 아니다. 비록 세계사가 유럽과 미국 등 서구 중심적인 서술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예시'일 뿐이지, 서양의 역사만이 바르고 옳은 것이고, 서양 이외의 역사는 비주류이고,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기에 세계사와 한국사는 '더불어'서 같은 맥락으로 역사적 흐름을 비교분석하고, 어디에서든 딱 들어맞는 '보편타당한 역사관'을 갖춰야 한다.

이는 아무 역사책 어느 곳을 펼쳐도 다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이 책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를 보아도 '아시리아의 흥망성쇠'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사의 흐름을 따르고 있고, 흥한 이유와 망한 이유가 한 눈에 보인다. 그 까닭은 다름 아닌 '똑같은 인간'이 벌여놓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넘나들어도 '인간이 사는 모습'은 매한가지다. 아시리아 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대한민국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유별나게 달라보일 것이 없다. 물론 기원전 23세기와 서기 21세기라는 반만년이라는 '세월의 차이'는 보일 수 있어도,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작게는 '오늘날 중동 국가의 현안'을 파악하기 위한 교양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미-이란 전쟁이 휴전을 꾀하는 와중에도 '이스라엘'이 전쟁을 확전시키려는 까닭을 '아시리아 제국 내의 민족적 갈등과 해결 방법'을 엿보면서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크게 보길 바란다. 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흥하는 원인과 망하는 원인이 오늘날의 한 국가에서도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할 때의 모습에서 현 미국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도 머지 않아 멸망할 징조를 보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원인을 해결하고 막으면 '망국의 길'을 걷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처참한 말로가 오늘날 미국이 처한 상황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아시리아 제국이 위축되는 시점에서 부상한 '메디아 부족'과 미국의 위세가 꺾이고 있는 시점에서 부상하고 있는 '대한민국'도 묘하게 겹쳐 보인다. 물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한낱 '메디아 부족'과 견주기엔 적당하지 않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분명 위협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이런 흐름을 잘 파악하고 미국이 나름 대처를 잘 한다면 미래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세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역사는 늘 그런 '페이지'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모로 아주 흥미로운 역사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0 - 완결
고우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0> 고우영 / 문학동네 (2026)

[My Review MMCCLIII / 문학동네 4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두 번째 리뷰는 대한민국 만화삼국지의 원조 <고우영 삼국지 10>다. 해마다 읽고 있는 <삼국지>인데 올해는 '만화 삼국지'로 골랐고 가장 먼저 '고우영 화백의 작품'을 골랐다. 현재 '이희재 <만화삼국지>''무적핑크 <삼국지톡>'도 함께 읽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어린이/청소년 만화삼국지'도 읽어볼 참이다. 이런저런 삼국지를 검색하다보니 정말 다양하고 여러 작가의 <삼국지>가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작년에는 '한중일 삼국지'를 비교했는데, 중국과 일본은 나름의 '정통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재미를 추구한 것에 비해서 한국은 <삼국지>에 진심인 것이 큰 특색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은 <삼국지연의>를 '소설'로 읽는 것이 아니라 '역사책'으로 대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정사 삼국지>와 비교분석한 내용이 첨부된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었다. 이는 '만화 삼국지'에서도 비슷했다. 하지만 <고우영 삼국지>는 군사독재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탓인지 풍자와 해학이 담뿍 들어 있는 것이 특색이었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고우영 삼국지 10> 관점 포인트 : 마지막 10권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보통의 <삼국지>가 제갈량이 죽은 '오장원'을 대서사의 마지막으로 삼지만, 진정한 '삼국지의 대단원'은 사마염의 진(晉) 통일(280)로 보기 때문에 제갈량 사후(234)에도 무려 40여 년이나 더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나오는 등장인물도 매우 생소해서 분명 <삼국지>인데, '삼국지'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최후까지 남은 촉의 장수 '강유'가 위나라에 거짓항복을 했다가 반기를 드는 장면을 읽으며 추억을 더듬을 정도다. 그만큼 <삼국지>에서 초반에 등장하는 유관장 삼형제, 조조, 제갈량 등의 인물들의 비중이 큰 탓이다.

그래서일까. 10권의 시작은 이미 지난 편에서 죽은 관우와 장비의 혼령이 '이릉대전'에서 참패를 한 유비에게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공인 '제갈량'에게 한 황실의 회복이란 숙제를 남겨주며 세상을 등지고 만다. 이렇게 10권은 온통 '제갈량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렇게 이야기가 편중되어 흐르는 것이 민망했는지 조비가 헌제를 겁박해서 황제자리를 찬탈하고, 황제에 오르자 친형제마저 죽이는 비정한 모습을 강조하며 '위나라'에 정통성 따위는 없다고 강변하며, 다시 한 황실을 재건하는데 온힘을 다하는 제갈량의 충의로운 모습에 집중 재조명 한다. 헌데 스토리 전개가 너무 빠르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낸 것이 5번(6번이란 주장도 있다)인데, 그렇게 오랜 북벌의 과정을 거의 한 번으로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마초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못했고, 위연조차 마지막 장면에서 겨우 한 컷을 장식할 따름이다. 만약 지면을 조금 더 할애 받고, 연재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껏 그려냈다면 더욱 뜻깊은 수작이 탄생했을 것이나 그건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만화'를 천대하는 사회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열악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나마 'K-웹툰'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한국 만화의 명맥을 새롭게 일구어 가고 있는 형편이지만, 여전히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 부분에서는 뒤쳐져 있다. 세계적인 흥행을 끌고 있는 <K-POP 데몬 헌터스>와 <나 혼자만 레벨업> 등이 우리 나라에서 제작되지 못하고 있는지만 봐도 단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은가. 암튼, <고우영 삼국지>는 10권으로 완간이 되었다. 이렇게 '완간'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고, '올컬러 완전판'으로 다시 재탄생하게 된 것도 엄청난 일인 셈이다.

한편, 앞서 2부의 주인공으로 '제갈량'을 꼽았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숙적 사마의는 어떨까? 아쉽게도 이 부분도 너무 빠른 전개로 인해 제대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숙명의 라이벌로 그려내어 제갈량과 사마의가 무려 5차례나 공방전을 벌이는 장면을 보여주어도 좋고, 오나라의 육손까지 합류해서 서로 치고 받는 지략대결이 정말 볼만 했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걸 휘뚜루마뚜루 단 한 권 분량으로 스쳐지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끝까지 충의를 다하는 제갈량의 참모습을 잘 그래내었기에 제갈량이 마지막으로 '오장원'에서 죽는 장면은 참으로 클라이막스다웠다. 온 힘을 다해 죽는 그 순간까지 한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모습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올바른 일'이었기에 그럴 것이다. 힘의 균형이 위나라로 기울어졌으나, 위나라는 그 힘을 올바른 일에 쓰기는커녕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해 썼을 뿐, 도덕적명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밑에 있던 신하들도 충성을 바치되 '제 잇속'을 챙길 수 있을 때만 충성했을 뿐, 더 큰 잇속을 챙길 기회를 포착하자 서슴없이 '조씨 왕조'를 끝장내고 '사마씨 왕조'를 새로 개창한 것이다. 어찌 혼란한 세상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반면에 '촉나라'는 비록 힘은 없지만 도덕적 명분을 쌓고 '대의'를 빛내면서 권토중래를 꿈꾼 인물들로 가득하다. 유비가 그랬고, 관우가 그랬고, 제갈량도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국지>를 읽으며 유관장 삼형제의 고난을 '감정이입'하며 보고 또 보는 까닭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렇지 않았는가 말이다. 약소국의 비애로 얼룩진 '지난 100여 년의 역사'는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고난의 역사였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결코 약소국으로 머물러 있지 않으려 했다.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라는 세계 초강대국 틈바구니에서도 기죽지 않고, 언젠간 하늘 높이 비상하는 꿈을 꾸며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던 것이다. 거기에 군사독재와 민주주의 탄압이라는 시련까지 더했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고우영 삼국지>를 읽으니 지금 '선진국'이자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면서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나가는 글 : 우리도 한때는 '실리'를 따지며 조조의 편에 서고자 했던 적도 있다. 비록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고, 자기 한 몸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기 사람'마저 죽이거나 짓밟고 올라서려 했던 그야말로 '패왕'이었다. 오직 힘으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내세울 뿐이었고, 그 힘을 넘보는 자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잔혹한 짓을 일삼았던 조조다. 그래서 오직 '힘의 원리'만으로 움직이던 국제관계에서 늘 약소국의 설움을 받던 대한민국도 '조조'처럼 힘 있는 위치에 서고 싶어 동경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조조처럼 행동하기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조조처럼 '실리'를 추구하던 박정희, 전두환 같은 인물들이 '내부의 폭군'으로 군림하는데에만 성공하고, 대외적으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한채 한껏 위축된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해서 '내부의 반대자'를 척결하는데에는 그토록 패왕처럼 군림했던 이들이었건만 다른 강대국들 앞에서는 힘도 써보지 못하고 쪼다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조조는 인기가 없고, 실리도 챙기지 못하는 캐릭터로 남았을 뿐이다. 반면에 유비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퍼줬다. 비록 이리 치이고 저리 밟히는 '힘 없는 지도자'에 불과했지만, 더 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도덕적 명분'을 쌓고 또 쌓는 소신 정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은 자원 빈국이지만 인재를 양성해서 '기술강국'으로 거듭났고, 다른 나라를 함부로 침략한 역사가 없어서 '도덕적 명분'까지 함께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에서 만든 무기체계는 전세계 어디에 내다 팔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한 위력을 갖췄으면서도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대외적으로 표방해도 전세계는 전적으로 신뢰를 보낼 정도가 되었다. 역사상 이렇게 '도덕적으로 강한 힘을 과시한 나라'가 있었느냔 말이다. 19세기 서구열강은 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저들의 힘을 과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힘으로 전세계 약소국들을 식민지로 삼아 억압과 수탈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과거의 그 약탈제국들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함부로 써서 상대를 굴복시키려 들지 않고 있다. 이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약소국들에게 '함께 잘 살자'고 손을 내미는 나라가 어디 있었더란 말인가. 단언컨대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것이 '유비가 꿈꾸던 나라' 아니었을까? 그리고 제갈량이 그 꿈을 이루려 그리 노력했던 것 아닐까? <고우영 삼국지>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어릴 적부터 유독 '유비'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까닭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