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7
고우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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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7> 고우영 / 문학동네 (2021)

[My Review MMCCXLV / 문학동네 38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흔네 번째 리뷰는 읽어도 읽어도 재미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 <고우영 삼국지 7>이다. <삼국지> 초반에는 용맹한 장수들이 등장해서 신나게 한 판 승부를 벌이지만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날고 기는 용맹한 장수들 위에 '지략'을 뽐내는 책사들의 한 판 승부가 펼쳐지며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게 된다. 특히 제갈량이 등장하면서부터는 그야말로 귀신 같은 솜씨로 적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장면이 펼쳐지면서 <삼국지>를 읽는 재미를 더하게 된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 vs 주유'가 그런 재미를 주었다면, 적벽대전 이후 바야흐로 '천하삼분지계'가 완성되기 직전에 방통이 대활약하는 장면이 펼쳐지게 된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고우영 삼국지 7> 관점 포인트 : 적벽대전에서 제갈량과 주유가 '완벽한 준비'를 마쳤다면, 그 준비에 걸맞게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게 해준 결정적 조력자를 꼽으라면 단연 '방통의 연환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황개가 용맹하게 화공작전을 펼치고,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어재꼈다고 하더라도, 조조의 대선단이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꽁꽁 묶어두는 계략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면 결코 대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통의 활약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을 손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방통이 일찌감치 조조의 책사가 되길 거부했고, 손권의 책사도 거절했다. 그리고 남은 한 세력, 유비와 손을 잡고자 한다. 일찍이 유비가 유표의 품에서 '책사'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낮출 시기에 양양 일대의 현자 사마휘가 일러준 말이 있다. "복룡과 봉추 가운데 하나만 얻을 수 있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복룡은 공명 제갈량을 이르는 말이었고, 봉추는 사원 방통을 이르는 말이었다. 엎드린 용을 '복룡'이라 부르고 어린 새끼 봉(수컷이 봉, 암컷이 황, 합쳐서 봉황)을 '봉추'라 불렀던 것이다. 책사들 가운데에도 젊은 축에 들었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으나 아직 정식 '출사'를 하지 않은 인재이기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런 용과 봉이 한꺼번에 유비세려게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유비는 천하를 얻게 되는 것일까?

초기에는 순탄하게 진행이 된다. 유기 공자의 사후에도 유비는 계속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형주 땅'에 머물러 있었고, 유비만의 영지를 마련하면 기꺼이 형주 땅을 손권에게 건내주겠다는 약조까지 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유비는 제갈량의 권유대로 '형주의 남쪽 지역'을 차지하러 원정을 떠난다. 궁극적으로 익주를 다스리는 유장에게서 파촉 땅을 얻어야 비로소 '천하삼분'이 이루어지게 되는 셈이다. 그 밑천으로 삼기 위해 형주의 나머지 지역을 공략에 나서게 되는데, 유비는 이곳에서 황충과 위연, 마량과 공지 등 여러 인재를 얻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서촉을 향해 진출을 노린다.

여기서 유비는 빈약한 세력이나마 둘로 나누게 된다. 제갈량과 관우, 장비가 형주에 남고, 방통과 조운, 황충 등이 서촉으로 원정을 떠나게 된다. 유비는 새로 얻은 인재들을 이끌고 '자기만의 영지'를 얻으러 떠난 것이다. 하지만 일이 순탄지 못했다. 출정 직전에 손권은 유비에게서 손상향을 데리고 옴과 동시에 유비의 하나 뿐인 아들인 '아두(훗날 유선)'를 꾀어내 납치하여 형주 땅을 뺏으려 들었고, 빈약한 원정대를 이끌던 부군사 방통은 위업을 서두르려다 그만 '낙봉파'에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비는 '천하삼분'의 한 축으로 홀로서기를 하려 했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다.

나가는 글 : 그럼 방통은 왜 조조나 손권이 아닌 유비를 택했던 것일까? 능력면에서 본다면 '제갈량'보다 못하지 않은 실력자였으니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실력을 뽐내며 출세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연의'에서 그 이유를 찾자면 방통이 엄청난 '추남'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못 생겨서 실력을 뽐내기도 전에 퇴자를 맞았던 것이다. 영화 <관상>을 봐도 얼굴 생김새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던 듯 싶다. 간추리면 '잘 생겨야' 출세에도 유리했고, '잘 생겨야' 실력을 뽐낼 기회를 주었던 모양이다. 오늘날에도 그런 면이 강하게 작용하는데 옛날에는 오죽했을까?

더구나 조조는 못난 유장을 대신해서 서촉을 갖다 바치려 찾아간 '장송'을 방자한 행동거지 탓을 하며 쫓아내지만, 결국엔 '못 생겨서' 푸대접을 하였다. 그러나 추남이었던 방통도 일찌감치 그런 푸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손권도 적벽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방통에게 후한 대접을 해줘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왠일인지 손권은 방통을 마뜩찮아 했다고 한다. '겉모습'만 보고서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핑계를 댔다는데, 암튼 방통은 이래저래 추한 외모 때문에 서러움을 당한다. 그렇다고 유비도 방통을 제대로 대접한 것은 아니었다. 손권에게 퇴자를 맞았을 때 노숙이 이를 안타까워하며 방통에게 유비에게 가보라며 '소개장'을 써주었고, 제갈량도 적벽대전 이후 순시를 떠나기 전에 방통을 만나 '추천서'를 건내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방통이 첫 대면에서 유비에게 그것들을 보여주었다면 서운한 대접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방통은 그것을 내놓지 않고서 유비를 시험에 들게 했다.

유비는 방통을 아주 내치지는 않았지만 아주 작은 고을(계양군 뇌양현)의 현령으로 삼았다. 방통도 서운했을 법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현령으로 부임을 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의 친구(?)인 제갈량에 못지 않은 실력을 뽐내고 싶었던 것 같다. 명성이야 이미 날릴 정도였고, 적벽대전에서는 이미 그 실력을 보여줬지만, 유비와는 첫 대면이었기 때문에 유비도 내심 '외모' 때문에 놀란 듯 싶다. 그래서 마뜩찮지만 명성이 높으니 '실력 검증'에 나선 것일테다. 방통은 실망을 감추고 유비에게 본때를 보여주게 된다. 작은 고을에서 보여줄 수 있는 능력치가 한정되었겠지만, 아주 깜짝 놀라게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유비는 그런 방통의 실력을 보고 제갈량과 '동급 대우'를 약속하며 서촉 정벌에 함께 나선 것이다.

헌데 삼고초려까지 하면서 모셔온 제갈량과 실력 검증을 마치고 발탁한 방통은 '유비가 지닌 신뢰도' 면에서 차원을 달리하게 되었다. 유비와 방통이 사사건건 의견이 맞지 않은 것이다. 유비가 서촉에 도착해서 곧바로 유장을 밀어내고 서촉을 차지하는 '가장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은 것에 방통은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유비는 서주를 얻을 때도, 형주를 얻을 때도, 도덕을 따지고 명분을 내세우며 극구 사양하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런 유비를 답답하게 여겼지만 그런 주군의 방식에 따라서 '그에 걸맞는 계책'을 내어 유비와 타협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방통은 제갈량보다 불같은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달리 말하자면 화끈한 성격이었다. 목적이 분명하면 달성을 위한 지름길을 찾아내고도 질주를 하는 급한 성격처럼 말이다. 그 때문에 못난 유장의 곁을 맴돌면서 느긋하게 '서촉을 공략하는 유비'를 답답하게 여긴다.

딴에는 제갈량과 '동급 대우'를 해준 주군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성과를 서둘렀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조조에게도, 손권에게도 내쳐지고 출세길이 꽉 막힌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만 보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준 고마움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공을 세우길 서둘렀던 것이다. 그 탓에 '완벽한 계책'을 내어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방법이 아니라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더 큰 이익'을 내어 손실을 만회하는 모험적인 방법을 즐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런 작은 욕심이 방통의 명을 재촉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만일, 서촉 공략에서 유비가 방통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제갈량은 형주에서 손권을 상대하고, 방통은 한중에서 조조를 상대하며 '양동작전'도 써가면서 천하통일을 노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통이 제 명을 다하지 못하는 불운 때문에 형주를 지키던 관우를 어이없게 잃어버리고, 곧이어 장비도 따라가고, 유비마저 명을 재촉하는 불운이 잇따른 탓에 '천하삼분지계'는 실속 없는 빈 강정마냥 스러지고 말았다. 천하를 도모하기에는 인재와 물자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삼국지>를 매번 읽을 때마다 안타까운 까닭이 바로 이 대목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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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6
고우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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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6> 고우영 / 문학동네 (2021)

[My Review MMCCXLIV / 문학동네 37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흔세 번째 리뷰는 구태한 세태에 대한 비판과 풍자에 에로티시즘을 더한 수작 <고우영 삼국지 6>다. 1980년대는 그야말로 '애로영화의 전성시대'였다. 해방 직후 사회고위층의 불륜을 소재로 한 <자유부인>(정비석)에서 사교댄스에 빠져 외갓남자와 포옹하는 장면만으로도 '외설'을 논하던 때에 비하면 1980년대에는 '여배우의 노출'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두고 벌이던 외설논란은 차치하고 '미성년자(여고생, 여중생)'를 신인여배우로 등장시켜서 배드신과 키스신을 강요(?)하던 시기였기에 그랬다. 이는 '군사독재정권의 3S 정책'의 일환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회에 불만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시선돌리기' 용도로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일반 대중에게 무한제공한 것이다. 그리하야 80년대에 프로야구 출범, 애로영화 개봉허용, 성풍속 개방이 가능해졌고, 이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짜릿함을 만끽한 국민들은 새삼스레 '자유대한민국'을 즐겼으나 이러한 '국민을 우롱하는' 우매화 정책을 간파한 지식인들은 이를 역으로 찌르는 통쾌한 비판과 비평을 마음껏 누렸다. 바로 '3S 정책'을 역이용해서 정권비판에 앞장선 것이다. <고우영 삼국지>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것 하나 놓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고우영 삼국지 6> 관점 포인트 : 적벽대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손권군과 유비군은 각자 논공행상을 실시해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손권군은 딱히 얻은 것이 없었다. 왜냐면 손권측이 가장 원했던 '형주 땅'을 유비가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에서 가장 큰 결전을 치룬 쪽은 '조조군과 손권군'이 수상에서 격돌한 것이다. 유비군은 마땅한 수상전력이 없는 형편이라 조조가 후퇴하는 길목에서 퇴각하는 조조군을 토벌하는 육상병력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래가지고는 논공행상을 따질 계재조차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유비는 '형주 땅'을 넙죽 차지했다. 그 까닭으로 유표가 살아있을 때 자신에게 후사를 맡기고자 했던 것을 내세웠다. 물론 손권측도 따졌다. 그때 유표의 호의를 거절한 것은 유비 당신이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유표의 친아들 유기가 살아남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땅히 형주 땅은 '유기의 것'이고, 유비 자신은 유기의 후견인으로 보필할 따름이었던 것이라 변명을 한 것이다.

손권측으로서는 따질 이유가 마땅치 않았다. 애초에 유비, 손권 동맹으로 조조군과 맞서 싸웠으니 '동맹'을 깰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애초의 형주의 주인이 유표였기 때문에 유기가 뒤를 이은 것이 자연스러웠으며, 당장 조조와 결판을 낸 직후라 형주를 힘으로 차지할 병력 또한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건재했다. 신묘한 재주로 '바람의 방향'마저 바꾸는 신통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결전을 벌였을 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권측은 유기가 죽은 뒤에는 '형주 땅'은 손권측으로 귀속된다는 약조를 받아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손권은 만족할 수 없었다. 아직 젊은 유기가 언제 죽을 지 아느냔 말이다. 비록 유기가 현재 강건하지 못하고 비실대고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주유가 꾀를 낸다. 손권의 여동생 손상향을 베필로 삼을 테니 유비가 직접 신랑이 되어 강동으로 넘어오라고 말이다. 물론 화촉을 밝힐 경사스러운 일이니 불경스런 군사와 무기는 일체 내려놓고 '알몸'으로 오라고 말이다. 그런 뒤에 유비를 포박한 뒤에 '형주 땅'과 맞바꾸자는 계책은 누가 보더라도 훌륭했다. 허나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다. 제갈량은 유비가 손권의 혼사 권유에 목숨줄이 날아갈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흔쾌히 혼사를 치르라고 등을 떠민다. 그리고서는 강동 땅에 도착하는 즉시 교국로를 찾아가 자신이 손권의 여동생과 혼사를 치루러 왔다고 소문을 퍼뜨리라고 지혜를 빌려준다. 그렇게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를 만들고 나면 혼사도 무사히 치르고 새신부도 얻을 수 있으며 형주 땅도 굳건히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제갈량이 이른대로 계획은 순순히 진행되는데...문제는 강동 땅에서 무사히 벗어날 뾰족한 수가 안 보이는 것이다. 과연 유비는 살아서 형주 땅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리고 애써 혼인에 성공한 새 신부도 데리고서 말이다. 두둥~

나가는 글 : 이 대목은 <삼국지>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다름 아닌 '주인공'이 치른 혼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대목만큼 찐하게 묘사한 러브스토리도 <삼국지>에서는 찾기 힘들다. 대부분 역사책에서는 사랑을 '치정극(불륜)'으로 묘사하고 있고, 이는 <삼국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유비와 손상향의 혼인식은 목숨줄이 오가는 순간에도 남녀간의 화기애애한 러브스토리가 찐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화제를 몰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손상향의 나이가 18세였고, 유비는 자그마치 48세였기 때문이다. 대충 반올림해도 20대 처녀가 50대 할애비와 신방을 꾸미는 셈이다. 다행히 불륜은 아니고 정식 혼인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욕을 바가지로 먹기 딱 좋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무려 30살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물론 지금 시대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요즘 50대는 젊은 축에 끼고 아직 청춘이라 부른다지만, 2000여 년에는 10대에 혼인을 하고 20대에 자수성가해서 30대에 노후를 준비하던 시절이라 40대만 넘어도 손주의 재롱을 보며 노년의 삶을 살기 일쑤였는데, 50대 새신랑이라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냔 말이다.

허나 여기에는 유비가 '영웅의 반열'에 오른 덕을 크게 봤다. 한마디로 '능력자'였기에 괜찮다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신부 당사자인 손상향도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서른 살의 차이를 넘어 유비와의 신혼살림에 대만족을 했고, 그 증거로 유비가 강동 땅을 떠날 때에 손상향도 '같이' 떠날 것으로 그 사랑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만족한 것이 있었다면 고향을 등지고, 자신의 친족과 영영 이별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신랑을 도울 수 있었을까? 정녕 찐 사랑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에 무슨 날카로운 비평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당시 세태가 말초신경의 만족...다시 말해, '쾌락의 절정'을 맞이한 시절이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숨막힐 듯한 억압을 경험했는데, 또 다른 군사정권에서는 하염없이 풀어재끼며 '자유'를 만끽했던 것이다. 물론 진정한 자유는 아니었다. 여전히 민주화운동은 억압받았고 정권비판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 억압속에서 '탈출구'가 보인 것이다. '섹스의 자유'가 해금된 것이다. 그렇다고 '성풍속'이 하루 아침에 바뀔 리는 없으니 대놓고 '성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한 편에서는 '성욕을 풀 수 있는 해방구'가 생겼으니 다름 아닌 '매춘(윤락)업의 성행'이었다. 여기에 불을 지를 것이 흔히 '호스티스(hostess)'라고 불리던 '술집여자'가 생겼던 것이다. 술집여자는 먼 옛날에도 '기생'이란 이름으로 있긴 했지만 기생은 차원이 더 높았다. 오늘날로 치면 '아이돌 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히 '술시중'을 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과 예능 전문인'으로 기생은 높은 인기를 끌었던데 비해서 '호스티스'는 그야말로 천한 신분으로 취급받으며 '함부로 해도 되는 여자' 취급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젊은 여성이 술시중을 드는 것을 선호했고, 자연스레 '성욕을 풀어버리는 해방구' 역할을 도맡게 되어 버렸다.

이게 사실상 도덕윤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군사정권의 독재로 사회는 어두운 시절을 겪어야 했는데, 그로 인한 억압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젊은 여성'을 해소용으로 취급하다니 말이다. 이는 과거 일본제국이 '여성 성노예'를 유린할 때 써먹던 방법이었고, 패망한 뒤에도 일본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 자국의 여성을 '미군의 성욕 해소'를 위해 매춘부로 만들어놓고 '애국자' 운운했던 것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당시 전두환이 독재를 하려는데 '광주민주화운동' 등 국민적 저항이 너무 강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의 방식에서 해결법을 차용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딱히 틀린 소문 같지는 않다.

암튼, 유비와 손상향의 세대를 초월한 사랑이야기는 감동을 주지만, 48세의 노땅들이 18살의 젊은 몸을 탐하는 추태를 비판한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이런 기본적인 도덕윤리와 인권인식을 갖지 못한 이들이 남아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유비는 목숨을 걸고 장가 들러 갔고, 유비나 되는 '영웅'이니까 가능했던 일이라는 예외사항을 강조 또 강조해야 할 대목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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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5
고우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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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5> 고우영 / 문학동네 (2021)

[My Review MMCCXLIII / 문학동네 3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흔두 번째 리뷰는 유머와 위트가 살아있는 <고우영 삼국지 5>다. 물론 이 만화를 신문에 연재하던 1980년대의 흘러간 유머다. 그래서 21세기 최첨단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그닥 유쾌하지도 날카롭지도 않은 그저 그런 '옛날 개그'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절대적 진리를 앞세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왜냐면 오늘날에도 그 시절의 '독재정권'을 흉내낸 나쁜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대통령 임기 내내 정적 암살밖에 하지 않다가 여의치 않자 비상계엄을 저지른 윤석열 말이다. 80년대에는 윤석열이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았다던 '전두환'이 있었다. 이 두 명은 '비상계엄'이라는 공통점도 있지만 각각 '군사세력'과 '검사세력'을 사적으로 키워서 저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영원히 집권하려는 욕심으로 가득 찬 점에서 그야말로 빼다 박았다. 이런 엄혹한 시국에 '유머와 위트'는 자칫 정권 비판으로 오해를 받아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작두를 타는 듯한' 위험천만함을 감수한 것이었다. 윤석열 때도 '정치비판' 성격의 유머는 금기시 되었고, 감히 정권을 풍자를 하면 '검사세력'이 가만 있질 않던 걸 기억할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윤석열차'(2022)라는 풍자그림이 수상되었는데, 바로 정치권력이 움직여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활동제약까지 받은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고우영 삼국지>는 바로 그런 시대에 나온 수작이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고우영 삼국지 5> 관점 포인트 : 지난 4권에서 유비가 '삼고초려'를 해서 제갈량을 모셔왔다. 그리고 이번 5권에서는 조조가 드디어 '관도대전'에서 큰 승리로 승기를 잡은 조조가 원소 세력을 물리치고 북쪽을 평정한 것으로 시작한다. 등 뒤를 깔끔하게 정리한 조조가 눈을 돌린 것은 바로 남쪽에 도사리고 있는 '동오 세력'이었다. 그리고 장강(양쯔강)을 넘어 강동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최우선적으로 정리해야 할 세력이 하나 남았다. 바로 '형주 땅'이고, 그 땅에 바로 '유비'가 머물고 있었다. 조조는 곧바로 유비를 치고, 손권까지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려 한다.

하지만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다. 가히 '천재'라고 불릴만한 책사가 유비에게 있는 한 호락할 순 없었다. 그래서 조조의 초반 공격을 제갈량은 가뿐하게 물리친다. 바로 '박망파 전투'다. 그러나 세력의 차이가 너무 큰 까닭에 유비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비는 홀몸이 아니다. 유비가 잠시 다스리던 '신야 백성들'이 조조의 침략에 벌벌 떨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비와 함께 가길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행진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얼마 있지 않은 유비군은 뒤쫓는 조조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조조군의 야만적인 폭력에 의해 무고한 백성들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제갈량의 계책으로 유비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고, 제갈량은 동오의 세력과 손을 잡고 조조군에 맞서고자 손권 진영으로 넘어간다. 이른바 '적벽대전'의 시작이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은 늘 하이라이트다. 그도 그럴 것이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 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주연급'이기 때문이다. 유비, 조조, 손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군대를 지휘하는 책사들인 제갈량과 주유가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조측에는 곽가의 사후에 별다른 책사가 등장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조조측에 신통치 못한 책사들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가 '북방 출신'이라 물 위에서 싸우는 수전에 별다른 계책을 내세우지 못했고, 머나먼 남쪽의 지리에도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측에서는 그나마 서서와 방통이 나서서 지략을 뽐내지만, 서서는 애초에 조조에게 속아 어머니가 죽임을 당한 것과 다를 바 없어서 돕지 않으려 했고, 방통은 오히려 '스파이'로 연환계를 꾸미는 활약을 보여줬던 것이다. 그 바람에 조조군은 궤멸 당할 수밖에 없었고, 사실상 '적벽대전'은 제갈량과 주유의 지략 대결로 봐야 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흘러 간다.

물론, 적벽대전의 승리에는 손권군의 장수 '황개의 고육계'가 한 몫 단단히 했다. 조조군의 100만 대군을 싣고 있는 대선단을 '화공'으로 격파하려 했던 아이디어도 황개의 작품이었으며, 이를 몸소 실행에 옮긴 용장도 다름 아닌 늙은 황개였던 것이다. 꾀 많은 조조를 속이기 위해서 늙은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여기저기 튀기는 잔혹한 형벌의 고통도 오직 '조조'를 속이겠다는 계략의 일부였던 것이다. 거기다 마지막 화룡점정조차 황개가 타고 간 배의 앞에 엄청난 '유황불'을 짊어지고 조조의 대선단에 꼬라 박아버리는 선봉을 선 것도 황개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황개는 '적벽대전'에서만큼은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대활약을 벌인다.

나가는 글 : 그럼 <고우영 삼국지>에서 눈여겨 볼 것은 무엇일까? 만화의 성격상 '세세한 심리묘사나 정황설명'을 다 담을 수는 없다. 그래서 줄거리도 대략 띄엄띄엄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만화답지 않게 '사건 하나하나'는 대체로 세세하게 진행하며 '사건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개하였다. 거기다 앞서 이야기한 '유머와 위트'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독자에게 '말풍선' 하나도 놓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사람의 인지 집중력은 고작해야 5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를 뛰어넘어 10분, 20분도 지치지 않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집중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다름 아닌 '에로티시즘'이다. 한마디로 '야한 장면'이 독자들을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는 것이다. 비록 대놓고 야하지는 않지만 원래 홀딱 다 벗은 알몸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야함을 자극하는 법이다.

한편, 신야의 백성들은 원래 주인도 아니고 잠시 머물며 다스렸을 뿐인 유비가 조조군을 피해 퇴각하는데 따라 나선 것일까?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를 유비가 백성들에게 '선정(좋은 정치)'을 베풀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감흥을 받은 백성들이 유비를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것으로 묘사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정답'이다. 유비는 유표의 죽음으로 형주를 낼름할 수 있었는데도 그리하지 않는 도덕군자처럼 행동하지만, 그것이 백성들이 자신이 살던 고향과 터전을 모두 팽개치고 유비를 따라나서게 만든 원인으로 보기에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큰 원인은 바로 '공포심'이다. 유비군을 따라가지 않으면 싹다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공포심 말이다.

어디에서 기인하는 공포심이었을까? 조조는 앞서 서주자사였던 도겸을 공격했다가 유비에게 가로막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러자 조조는 서주에 남아있던 백성들을 싸그리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른바 '서주대학살'이다. 조조의 아버지를 죽인 '황건적 출신 장개'에게 복수를 해야 옳을텐데, 도겸에게 책임을 물었고, 그 도겸을 직접 죽일 수 없게 되자 서주의 백성을 학살하며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런 조조였다는 걸 전해 들었던 '신야의 백성들'은 조조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를 직접 경험한 유비도 조조군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야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조조의 대군 앞에서 '중과부적'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유비는 어쩔 수 없이 퇴각을 하지만, 차마 백성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제갈량 vs 주유'의 지략 대결이다. 이 대결에서 진 주유는 "하늘은 주유를 낳고 어찌하여 제갈량을 두었느냐"면서 한탄을 했다지만, 이는 그야말로 '패배선언'이나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은 세상을 놀라게 할 천재인데, 나보다 더 뛰어난 천재의 등장을 시기하는 듯한 말로 포장했지만, 결국 주유는 단 한 번도 제갈량을 이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완벽한 패배를 당하고도 담담히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주유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이는 그가 진정한 영웅이 될 그릇이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그렇다면 실제로도 주유는 이처럼 용렬하고 불운한 천재였을까? 그건 아닌 듯 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의 활약이 제대로 나오지 않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손권의 형 '손책의 의형제'로 나서서 손책이 원술의 휘하에서 벗어나 '강동 땅'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며 '소패왕'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게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주유의 활약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를 휘뚜루마뚜루 넘겨버리고 만다. 왜 그랬을까? 애초에 '동오 세력'은 <삼국지연의>에서 주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유비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의 한 축을 담당하기 위해서 '조연'으로 구색을 맞춘 덕분이다. 그런 까닭에 희대의 천재였던 '주유'조차 엑스트라 취급을 하고만 셈이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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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소녀 유채화 - 제3회 한솔수북 선생님 동화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초등 읽기대장
송광용 지음, 무디 그림 / 한솔수북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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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소녀 유채화 : 제3회 한솔수북 선생님 동화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송광용 / 한솔수북 (2026)

[My Review MMCCXLII / 한솔수북 13번째 리뷰] 고품격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흔한 번째 리뷰는 한솔수북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체육소녀 유채화>다. 한솔수북 출판사의 브랜드지수는 '애니메이션'과 '그림책' 부분에서 돋보인다. 아무래도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이 '그림책'과 '애니메이션'에서 모두 큰 인기를 얻은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한솔수북은 그림책과 애니메이션을 넘어 '동화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구름빵>에서 보였던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선정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체육소녀 유채화>는 초등학생 주인공의 꿈과 열정을 응원하는 한편, '잘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점을 명확히 구분했을 때 진정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고, 그 결과의 차이도 명백하게 느낄 수 있다는 교훈을 더불어 전달해준다. 그렇다고 동화책이 '교훈 전달'에만 치우친다면 정작 동화책을 읽어야 할 어린이들에게 외면받기 십상일 것이다. 그럼 이 책이 얼마큼 재미있는지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체육소녀 유채화> 관점 포인트 : 우리 학부모들은 '체육'에 소질을 갖고 있는 자녀가 있다면 기뻐할까? 운동선수로 대한민국 원탑이 된 박찬호, 박세리, 박지성, 안정환, 김연아, 박태환, 이상화, 이대호, 손흥민, 안세영 등과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에 비해서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은 뼈를 깎고 살이 애이는 고통스런 훈련만 하다가 몸이 상하고 그에 맞는 보상도 받지 못한채 스러져가는 대한민국 체육계의 현실에 비춰 자신의 소중한 자녀는 '그런 험한 길'을 제발 걷지 않길 바랄 것이다. 그래서 운동을 배운다면 겨우 '키 성장'이나 '몸매관리' 정도로 만족하고, 나머지 시간은 모조리 '국영수 성적'에 올인하는 안정적(?)인 길을 바랄 것이다. 더구나 올림픽 정식 종목도 아닌 '피구 대회'에 나가기 위해서 열을 올리는 자녀를 본다면 응원해주기는커녕 그 시간에 다른 학원이나 가라며 뜯어 말릴 것이 틀림 없다.

그런데도 자녀가 운동에 '소질'을 보이고 제대로 된 체육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싶다고 말을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달갑지는 않지만 자녀가 '좋아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할 것이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니까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 '유채화'가 그런 캐ㅣ릭터다. 스케이팅 선수였던 아버지를 닮아 어릴 적부터 각종 운동에 소질을 보여줬고, 채화도 가장 잘하는 과목이 '체육'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주 '잘하기'까지 한다. 어떤 종목의 운동이든 여 보라는 듯이 소질을 뽐냈고, 자신의 장기를 최고로 선보이며 엄청난 활약을 한다. 그런 유채화였기에 채화는 여자 아이들 뿐아니라 남자 아이들과 곧잘 어울리며 각종 체육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마디로 '운동천재'였다.

이런 유채화가 어느날 '배드민턴'에 꽂혀서 학원에 보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채화가 '잘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내주어도 좋다고 생각해 찬성했지만, 정작 운동선수 출신이었던 아빠는 채화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래서 채화는 학교 체육시간에 하는 운동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채화는 분명히 '잘 할 수 있을 자신'도 있었는데 아빠가 반대하는 것에 놀랐던 것이다. 도대체 왜 반대하신 걸까?

그러는 한편, 운동 학원에 다니지 못한 채화는 체육시간에 '반 대항 피구경기'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선전'에서 번번히 패배하고 말았다. 경기 때마다 늘 참여 선수가 상대편보다 적었기 때문에 불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편보다 참여 선수가 적은 까닭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경기에 늘 빠지는 세 명의 친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얄미운 변명을 늘어놓는 '주동자'가 바로 차현욱이란 학생이었다. 채화는 '숫자만' 채우면 절대로 질리가 없다며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현욱이에게 '피구 경기 참여'를 부탁했지만, 현욱이와 쌍둥이 친구들은 여전히 아프다는 변명만 늘어놓으며 참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채화는 더욱더 속상했다. 운동천재인 자신이 아무리 잘 한다고 하더라도 '피구 경기'는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편의 평범한 공격도 피하지 못하고 아웃 당하고 마는 선수들을 더욱 닥달하며 '잘 하자!'고 응원을 보냈고, 때론 어이없는 상황에서 아웃 당하는 선수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신경질도 내곤 했다. 채화네 반은 이렇게 '반 대항 피구 경기'에서 예선 탈락하고 마는 것일까?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동네의 외진 공터를 지나고 있을 때 차현욱과 쌍둥이 친구가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피구 경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늘 아프다는 핑계를 대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즐거운 표정이었다. 더구나 경기 실력도 상당했다. 도대체 왜? 이런 실력을 감추고 학교에서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열외'를 자처했을까? 채화는 의문투성이였다. 그런데 차현욱과 즐겁게 피구 경기를 하던 친구들 뒤로 덩치가 더 큰 학생들이 둘러싸더니 서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까닭인 즉슨, 하나 뿐인 공터를 두고 서로 '피구 경기'를 할 수 있는 우선권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그 우선권 결정권을 두고 '한 판 승부'를 약속했던 모양이다. 그 승부에서 진 팀이 공터를 떠날 것을 약속하면서 말이다. 현욱이는 분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이 공터에서 먼저 피구를 시작한 쪽은 '현욱이네 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덩치와 힘에서 밀리는 상황이라 어쩌지 못하고 '저쪽이 정한 룰'을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 그런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육소녀 유채화'가 등장할 적당한 타이밍이었을 것이다.

현욱이도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운동실력이 남다른 채화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아주 작기는 하지만 '이길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현욱이는 채화의 참여를 망설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피구'를 운동실력이 좋고 심지어 피구 경기를 '잘하기'까지 하는 채화의 참여를 망설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하지만 현욱이와 채화는 결국 '한 팀'이 되어 공터의 진정한 주인을 두고 한 판 승부를 벌이기로 한다. 그리고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피구 경기'를 준비한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피구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현욱이가 학교 예선전에는 왜 참가하지 않았던 걸까? 이런 채화의 의문들까지 모두 파헤칠 수 있을까?

나가는 글 :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잘 하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말이다. 이 말에 담겨 있는 뜻은 제 실력 좋은 것만 믿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하는 '노력형'에게 결국 뒤쳐질 수밖에 없고, 아무리 노력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들 좋아하는 것을 넘어 미친듯이 '즐기는 사람'에게는 끝내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미쳐야 미친다'는 말로 줄일 수 있고,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것을 넘어 정신줄을 잃은 상태(다시 말해, 본능적으로)에서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경지에 다다라야 비로소 완벽해진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를 전문용어로 '천재'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읽을 때 채화의 아빠가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려는 채화에게 '반대'하던 모습을 떠올려야 한다. 분명 자신을 닮아 운동에 소질을 보이고 있고, 시키면 분명 '잘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에서도 반대를 하셨다. 왜 그랬을까? 당신께서 미리 '경험'을 했고, 운동이란 '소질'과 '재능'만으로 크게 빛을 볼 수 있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잘 하는 것'을 불의의 사고로 한 순간에 잃어버리게 된다면 '천재'라 불리는 이들에게 더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운동 말고 '다른 것'에도 더 많은 경험을 쌓아보라는 아빠의 현명한 조언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아무리 천재라도 결국은 사람이기 때문에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는 아무리 훌륭한 교육자라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협력'이라는 것은 단순히 '내것 반', '네것 반'이 모여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1+1=2가 되는 것으로 '협력'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내서 '1+1=무한대'가 되지 않고서야 '협력의 필요성'을 깨닫지도 못하고, '협력의 중요성'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1+1=2'가 될 것이라면 그냥 각자 잘 하면 되지 굳이 '한 팀'이 되려고 불편을 감수하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1+1=3' 정도만 되어도 남는 장사가 아니겠느냐 싶지만, 그럴 바에 각자 조금 더 분발해서 '1.5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훨씬 더 쉽지, 굳이 남에게 비위를 맞춰가며 '0.5의 보너스'를 받으려 애쓸 까닭이 있겠냔 말이다. 그러니 '협력'이란 무한대의 성과를 낼 수 없다면 애초에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협력을 어떻게 하면 잘 이끌 수 있을까? 사람마다 경우가 다를 수 있겠지만, 먼저 '잘 하는 수준'을 넘어 '즐기는 수준'이 노멀(평범)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협력할 마음이 된다. 여기에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내려놓아야 한다. 이기적인 마음을 비우고 이타적인 마음을 채우지 않으면 '협력'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상대를 나 자신보다 먼저 위하는 마음이 노멀이 되어야 비로소 '협력의 성과'가 무한대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피구 경기'로 돌아가보자. 여럿이 함께 호흡을 맞춰야 '작전'도 짤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무작정 공을 던지면서 '개인적인 기량'으로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하는 것으로 승패의 결과를 맡기면 승률이 높아질 턱이 없다. 그건 그냥 '개인 경기'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팀 경기'에서는 철저히 자신을 내려 놓고 '팀 승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그에 맞는 '작전'을 짤 수 있고, 그 작전의 효과도 더욱더 올라갈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현욱이와 채화가 함께 참여한 피구 경기'에서 볼 수 있는 진면목이다.

그리고 이런 완벽히 협력이 이루어지는 경기를 치루고 난 뒤에는 '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겼다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고, 반대로 졌다고 해도 '멋진 한 판'을 치룰 수 있었다는 즐거움에 '다음 경기'를 더 잘하겠다는 다짐으로 힘든 훈련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운동경기에서만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협력을 잘 이끌어내는 리더의 역할이 빛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잘 하는 것'과 '즐기는 것'의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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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프로메테우스 - 미래가 현실이 된 지금 우리는?
장우경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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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프로메테우스 : 미래가 현실이 된 지금 우리는?> 장우경 / 매일경제신문사 (2026)

[My Review MMCCXLI / 매일경제신문사 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흔 번째 리뷰는 훌쩍 다가와버린 미래 AI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AI 프로메테우스>다. AI의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버린다는 '특이점(싱귤레리티)'이 2045년 즈음에 찾아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했지만, 최근 들어 AI 기술의 발달이 눈부시고 개발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앞당겨지는 것을 보면서 10년 정도 당겨진 2035년, 아니 2030년이면 충분히 AI의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단다. 더 놀라운 사실은 '특이점'이 지난 뒤에 AI의 능력은 '평균적인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천재적인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알파고가 천재바둑기사인 이세돌과 대결을 해서 4:1로 완승을 거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평범한 아마추어 바둑기사를 이긴 것이었으면 기사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특이점'은 정말이지 특별한 사건인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천재적인 인간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은 AI 기술을 갖춘 기계나 로봇이 일상이 된 미래 사회를 그린 SF영화를 심층분석하면서, 그런 가상 현실이나 증강 현실 같은 미래 사회가 '현실'이 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담은 책이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AI 프로메테우스> 관점 포인트 : 나는 SF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를 즐기는 편이다. 내가 어렸을 적인 80년대와 90년대만해도 21세기는 '로봇'이 일상인 사회로 그려졌고, 로봇이 움직일 때 내는 효과음인 '삐리삐리리릿!'은 미래사회를 묘사할 때 빼놓지 않았기에 서기 2000년이 넘어서면 우리의 일상은 완전히 그런 사회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심취했었다. 하지만 막상 21세기가 되고 나이가 서른 살을 훌쩍 넘기니 우리의 일상이 어릴 적 상상하던 '공상과학'에는 미치지 못했다. <백 투더 퓨처 2>에서처럼 날아다니는 '호버 버드'도 없고, 자동으로 사이즈 조절이 되는 '옷'도, '홀로그램' 광고와 '화상전화'가 일상이 될 거라는 예상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많이 비슷한 것들이 나오긴 했다. '드론'이 그렇고, 실감나는 '입체 광고판'이 그렇고, 사람들 손에 하나씩 들려있는 '스마트폰' 등이 얼추 비슷하게 상상하던 미래 사회처럼 '일상'으로 안착했던 것이다.

이처럼 SF공상과학은 더는 '공상'이 아니라 멀지 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SF영화속에서 등장한 'AI 기술'을 탑재한 기계나 로봇이 활개를 치는 상상도 현실이 될까? 현실이 될 것 같다면, 본격적인 AI 시대가 펼쳐진 사회속에서 과연 인간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거두절미하고 이 질문부터 던져야 할 것이다. AI 시대를 사는 인간은 '디스토피아'를 살고 있을까? 아님 나름 '유토피아'를 살고 있을까? 라는 질문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답'은 없다. 왜냐면 AI 시대는 결국 인간이 '상상하는대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AI는 '도구'에 불과하다. 적어도 인간이 '통제' 가능한 AI까지만 만든다면 궁극적으로 그렇다. 허나 AGI(일반인공지능, 강 인공지능)를 넘어 ASI(초인공지능)까지 만들어지게 된다면 인간은 '인공지능'을 신으로 섬기며 살고 있을 거라는 전망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인간은 ASI에 길들여져서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거라는 우려섞인 목소리가 지배적이기도 하다. 허나 이쯤 되면 이미 '되돌릴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일종의 '컴퓨터 전원 끄기'처럼 인공지능을 아예 꺼버리는 방법으로 '제어'가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제어하는 것을 넘어 '강제종료'할 거라는 위험인지를 하는 순간, ASI는 인간에게 '통제권'을 넘기지 않고,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인류말살 프로그램을 은밀하게 시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대놓고 해도 고작 '인간따위'가 초인공지능의 '선택'을 막을 순 없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이런 고민들이 무척 많이 담겨 있다. 간단하게는 영화 <아이언맨>에서부터 복잡하게는 영화 <1984>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운 '고민'들을 하면서 AI 시대를 맞이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끔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디스토피아'적인 것들도 있지만, '유토피아'스러운 것들도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에 기대려는 수동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AI 시대에 '인간답게' 살아가고 싶다면 능동적인 질문을 던지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AI의 노예로 전락할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AI를 잘 다루는 능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훌륭한 비서를 둔 것처럼 'AI를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AI에게 묻고, 생각지도 않고 AI가 제공한 '선택사항' 중에 고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AI의 노예'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AI 시대에는 비단 이런 문제만이 아니라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자기 몸의 90% 기계로 대체한 인간을 '로봇'이라 불러야 할까? '인간'으로 불러야 할까? 이쯤 되면 '기계'와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모호해지게 될 것이다. 더구나 '네트워크' 속의 아바타를 현실의 나와 '동일시'하는 문제는 어떨까? 물론 둘 다 '나'라고 인식하지만, '초연결 사회'가 펼쳐지면 '그 안에 있는 나'가 '현실의 나'와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현실과 가상'이 혼재가 될 것이고, 가상 속의 '데이터'가 만든 실재에서 일상 활동을 하는 '나'가 존재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무엇이 현실이고 가상인지, 다시 말해, 무엇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 이런 모호한 현실을 살다 보면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게 될 우려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윤리도덕적 문제'가 가상과 증강 현실속에서도 '실체적 문제'로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과거에는 '꿈속에서 벌인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므로 무죄가 성립하지만, 꿈속의 상상조차 '실재'처럼 느끼는 AI 시대에는 '상상'만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쉽게 연상되는 '노동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냐는 물음에도 결코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심각성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AI가 '권력'을 갖게 되는 시대속에서 '감시와 거버넌스' 문제는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마저 보장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해킹 기술'까지 더해지면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이 완전히 붕괴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AI에 의해 완전하게 발가벗겨진 '무방비' 상태로 살게 될 것이다. 괜찮은가? 이 정도는 살만 하다고 생각되어지는가?

나가는 글 : 이 책을 읽으며 이미 봤던 수많은 SF 영화를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아서 개인적으로는 '추억 여행'을 간 것만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맞아, 그땐 그런 생각을 했었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로 마주하고, 머지 않아 '현실'로 마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가 쭈뼛해지는 긴장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명언(?)도 잊지 않고 떠올리기도 했다. 그 결과 무서움과 공포가 다가왔다. 내가 AI 기술을 더는 발전시키기 않았으면 생각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AI 발달이 가져올 미래가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인간이 만든 무수한 '도구'들로 인해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지만, 긍정적인 면을 최대한 살려서 더 편리하고,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AI 기술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도 불안감은 떨칠 수가 없다. 왜냐면 과거의 도구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통제 아래' 놓여 있는 얌전한 도구들이었으나 미래의 AI는 '스스로 생각'하는 도구로 애초에 만들어졌고, 심지어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생각(판단)'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첨단 도구가 스스로 '폭주'하지 않고 '얌전한 도구'로 만족(?)하며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영원히 갖고 있을까? 이 궁극적인 질문에 확고하게 'Yes!'라고 답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만약 아이작 아시모프가 제안했던 '로봇 3원칙'처럼 오직 인간만을 위해서 '얌전한 도구'가 될 거라는 확신만 선다면 좋을텐데, 그조차 호언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힘의 균형'은 점점 더 AI쪽으로 기울어가는 삶을 미래의 인간은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적어도 '특이점 이후'에는 그런 삶을 인간의 '의지'대로 피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도 AI 못지 않게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 상상을 하고, 질문을 하고, 판단을 내려 AI를 '얌전한 도구'로 만족하도록 길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에 실패한다면...상상도 하기 싫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처럼 AI를 이용해서 '패권 국가'로 거듭나려는 욕심을 부리는 이가 등장한다면 전 인류는 절멸하거나 큰 위기를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하다. AI가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힘을 모든 인류와 하나 뿐인 지구를 위해서 헌신하고 평화롭게 이용하기 위해서 '선한 의도', '착한 마음'을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쁜 마음은커녕 '나쁜 상상'조차 금지시켜야 하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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