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 파워 - 위대한 기업이 되는 7가지 전략
해밀턴 헬머 지음, 유지연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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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아이들에게 어릴 적부터 '경제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나 어릴 적에는 그런 교육을 아예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줄 알았고, 땀 흘린 댓가는 값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대한민국 경제는 고도성장을 하였고, 끝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들 대부분은 열심히 일만 했을 뿐 땀 흘린 댓가로 재벌이 된 친구는 없다. 한마디로 우리 세대에는 정주영, 이건희 처럼 '재벌신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가 되고 말았다.

 

  그 대신 '돈을 굴릴 줄 아는 사람'은 재벌은 못 되었어도 돈맛을 좀 보았다. 일찍부터 부동산에 투자할 줄 알고, 주식을 굴릴 줄 알며, 주택청약 같은 '경제지식'을 일찍 알아본 친구들은 대한민국이 경제성장을 할 때마다 '돈맛'을 제대로 맞긴 했다. 그러니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나고 자라는 세대 모두는 '경제교육'을 철저히 해야만 한다. 물론, 땀 흘려 일하는 보람도 배울 가치가 충분하지만, 곳간에서 인심 나듯 일단은 '경제력'을 탄탄하게 쌓아놓아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인성교육'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돈을 벌어서 고작 '갑질'밖에 할 줄 모른다면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테니 말이다. 돈은 고작해야 돈일 뿐이다. 사람이 우선인 것을 모르고 돈지랄부터 할 요량이면 '재산몰수'라는 사회적 매장을 한 뒤 철저히 짓밟아줘야 마땅하다. 부를 이루었으면 그 부를 '필요한 곳'에 쓰고, '필요한 사람'에게 노나주어야 돈의 역할을 다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렇지 못하고 쌓아두기만 하거나 저 혼자만을 위해서 쓰는 큰돈은 '나쁜 돈'에 불과할 뿐이다.

 

  허튼소리는 이쯤하고, 이 책은 '경제책'이다. 그 가운데 '전략적 경영'에 관한 책인 것 같은데, 경제와 경영을 구분 못하는 경제문외한에게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허나 기왕 하는 비즈니스(사업)라면 제대로 된 사업을 해서 회사(기업)를 번창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글쓴이가 주장하는 바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제목도 <세븐 파워>이니, 그 비법도 7가지로 정리되어 있는 책이기도 하다.

 

  먼저, 서문에서는 사업에 있어서 '전략'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파워'를 강조했는데, 이는 다시 '전략의 정역학'과 '전략의 동역학'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정역학에는 책 제목에서 말한 '세븐 파워'를 예로 들면서 설명하였고, 동역학에는 '파워의 활용'을 설명하고 있다. 부연설명을 하고 싶지만, 문외한이라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대략적인 감을 잡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왜냐면 글쓴이가 '경영의 역학'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수학공식'을 열거하고 있는데, 경영학을 배우지 않은 초보자가 보기에 당췌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차근차근 읽다보면 뭔가 감은 잡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 제대로 설명하기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으니 양해하시길 바란다.

 

  먼저, 세븐 파워다. '카운터 포지셔닝', '규모의 경제', '전환 비용', '네트워크 경제', '프로세스 파워', '브랜딩', '독점자원' 순서다. 하지만 딱히 순서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사업을 시작하는 초창기 회사라면 순서대로 밟아나가는 것도 바람직하겠지만, 이미 중견기업인 경우에는 '필요한 것'만 선별해서 적용시켜도 무방할 것이고, 잘 나가던 기업이었다면 휘청거리게 된 원인을 찾아 '전략적인 대처'를 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뭐, 경영학을 전공한 전문가라면 당연히 알만한 내용일테고 말이다.

 

  암튼, 카운터 포지셔닝이란 '매력적인 기업'으로 만들라는 얘기다. 기업 이미지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만들면 '대성공'이란 얘기다. 그러기 위해선 '폭발적'인 무엇이 필요하단다. 이를 테면, 넷플렉스의 '스트리밍 사업'처럼 기존에는 없었지만 만들고 나니 대박이 터지는 그런 아이템으로 승부를 걸라는 얘기다. 이런 대박이 확고부동한 자리매김이 되기 위해선 '규모의 경제'가 절실하다. 기왕하는 사업이라면 자잘한 이익을 추구해선 안 된다. 투자할 때는 확실하고 화끈하게 해야 이득도 커지는 법이다.

 

  다음은 '전환 비용'이다. 기존의 이익에 과감한 투자를 해서 '새 이익'을 뽑아내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투자해서 얻을 이익을 얼마큼이며, 투자비용과 유지, 보수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모든 것을 셈한 뒤에도 이득이 남는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전환 비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환 비용'을 막연히 미룰 수도 없는 일이다. 어차피 '해야만 할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망쳐버릴 수도 있으니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해야 한다. 어쩌면 '전환 비용'은 모든 기업이 망할 때까지 해야만 할 늪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특히, 선두기업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꾸준히 해야 할 일이도 하다.

 

  '브랜딩'은 특히 어렵다. 한 기업의 브랜드는 만들기는 어렵지만, 한 번 만들어진 브랜드는 쉽게 잊혀지지 않기 때문에 모든 기업은 '브랜딩'에 도전한다. 하지만 '브랜딩'의 핵심은 유지다. 브랜드의 가치가 흐려지면 '상품 판매'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은 브랜딩에 목을 메고, 가치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개발하고 홍보하면서 명성에 걸맞는 제품을 만들려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마진'을 셈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뽕을 뽑을 만큼 뽑아먹어야 '남는 장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브랜딩'에 성공하기만 하면 아주 오랫동안 울궈먹을 수도 있으니 '선두기업'의 브랜딩을 늘 눈여겨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은 '독점자원'이다. 모든 기업이 꿈꾸는 '무한대의 마진'은 독점을 했을 때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경제에서 독점은 불공정하다며 제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독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선 '픽사'의 애니메이션 사업을 예로 들었다. <토이스토리>가 가져다준 영업이익은 여타의 애니메이션을 다 합친 것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토이스토리>는 지금도 수익을 내는 '독점 애니메이션'이다. 이처럼 애니메이션 시장은 넓지만 '수익'을 내는 작품은 몇몇 대작이 전부이다. 이를 해낼 수 있다는 '독점자원'을 갖게 되는 셈이다. 이젠 '아이디어'가 수익을 가져다준다. '아이디어'로 독점을 해도 절대 제재대상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나라가 <토이스토리>에 독점이라며 상영금지를 내릴 것이냔 말이다.

 

  '네트워크 경제'는 사용자 기반이 늘어남에 따라 고객이 증가하여 가치가 실현되는 사업을 말하는데, 여기서 수학공식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네트워크에 고객 한 명이 늘어날 때마다 기존 사용자에게 발생하는 이익이 잉여 마진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 있는데, 솔직히 뭔소린지는 모르겠다. 이를 테면, 페이스북을 똑같이 이용하더라도 미국 대학생이 몽골 대학생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예를 드는데, 그 이득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략적으로는 '다수의 사용자'가 이용하는 커뮤니티의 경우, 다수의 사용자가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문화, 생활팁 같은 것들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반면, 소수의 사용자는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생활권 등이라는 이유로 컨텐츠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뭐, 그런 내용 같다.

 

  마지막으로 '프로세스 파워'는 매우 드문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한 기업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 기업이 어떤 프로세스를 갈고 닦느냐는 '기업의 효율'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프로세스는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바꾸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며, 급작스런 프로세스 변화는 폭망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으니 매우 주의를 요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프로세스 파워에 성공한다면 비용을 낮추거나 우수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에 내제된 조직과 활동 따위를 장기간의 노력과 헌신을 해야 마땅하다고도 했다.

 

  이렇게 '정역학적 파워 전략'을 세웠다면 이제 '동역학적 파워'를 키우는 일만 남았다. 파워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것처럼 '타이밍'이 중요하다. 기업의 활력적인 요소를 몰아세웠다면 기세를 몰아 몰아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기껏 활력을 키워놓고서 멈칫거려서는 죽도 밥도 안 되는 법이다. 한편, 파워에도 '기승전결'처럼 '도약-시계-발생-안정'라는 패턴이 돌고 도는데, 이 때에 알맞는 '세븐 파워 전략'을 다시 점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도 말했다.

 

  어떤가? <세븐 파워>의 핵심이 잘 이해되는가. 경영학의 기본도 모르는 이가 읽기에는 버거운 책이긴 했지만, 조기 경제교육이 꼭 필요한 까닭을 새삼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을 '경영학 박사'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만 '경제의 기초'만 알아도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는 배경지식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무엇을 하겠느냔 말이다. 빌 게이츠도 어려서부터 '억만장자 수업'을 받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 우연한 계기도 세계적인 기업을 이끄는 사업가가 되었다. 마크 주크버그도 마찬가지다. 그저 여학생들의 얼평(얼굴평가)을 하려는 호기심에서 시작한 '페이스북'이 거대기업으로 성장해서 어엿한 사업주가 되어 활동하고 있다. 적어도 '경제의 기본'을 더 심화된 경영도 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직접 경영할 필요는 없다. 경영 전문가에게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최종결정'은 사업주의 몫이다. 그러니 '기본'은 알아야 한다. 경제의 문외한이 경영학 책을 읽다가 '앗! 뜨거'하면서 늦깎이 경제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몇 자 적어 보았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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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해서 찾아왔습니다
한덕현.이성우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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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심리학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가장 먼저 착각하고 있었던 점은 심리학은 '과학'이었다는 점이었다.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점술'과 비슷하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차이점이었다. 알고 보니,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의 한 갈래였고,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던 것이다. 이후에 융과 라캉에게 이어졌으니, 정리하면,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은 '심리학'이고, 그 가운데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행동을 내적인 개별욕구와 외적인 사회요구가 서로 조화를 근거로 분석한 심리학 연구의 한 갈래로 이해하면 틀림 없겠다. 물론, 오늘날에는 프로이트의 '성욕구'에 근거한 심리학 연구가 너무 원초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암튼, 이 책은 사회적 문제아로 정평이 난 록커 이성우와 정신분석학자 한덕현의 대화(일문일답 형식)를 통해서 코로나로 인해 우리 모두가 불편하고 답답한 이들의 공통의 고민거리를 의학적으로 풀어낸 내용이 담겼다. 그리고 쉽게 오해하고 있는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린다면, '정신병원'에 들락거린다고 모두 미친 사람이거나 심약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병자'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록밴드 <노브레인>으로 유명한 이성우도 정신병자는 절대 아니다. 그가 아무리 무대 위에서 '미친XX'처럼 발광을 떨고, 거친 욕설로 넘쳐나는 가사를 입으로 뿜어낸다고 해도, 그건 예술가의 '예술행위'일 뿐, 평상시에는 우리와 똑같은..아니, 정상인보다 더 정상인처럼 평범하고 현대인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 대한민국 시민일 뿐이다. 그러니 이 책에서도 이성우의 고민이 '특별'하다거나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40대 중년 남자가 가질 법한 고민을 '스포츠건강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자에게 내담하여 상담한 대목을 열거하였을 뿐이다.

 

  그러니 부디 이 책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읽어주면 좋겠다. 하릴없는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서 이 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록커로 살더니 대중들에게 욕도 많이 먹고 스트레스도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지...라면서 책을 읽어 갔는데, 그의 고민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평범했고, 어느 정도 '나의 고민'과 상통하는 면도 없지 않았기에 깜짝 놀랐었다. 더구나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며 상담까지 나눌 정도면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단단히 오해했는데, 그래서 그 심각한 병을 '치료(!)'한 대단한 명의와 나눈 쌈빡한 대담집으로 착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그저 그런 평범한 수다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에 놀라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대단한 '편견쟁이'였구나..라면서 자책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저러나 여러분들은 살면서 고민이 없었던가 묻고 싶어집니다. 마흔 살이 넘어 반백살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나는 인생이 답답하고 고민도 참 많기 때문입니다. 아직 결혼도 못했고, 사랑도 변변히 못했으며, 당연히 아이도 없고, 늙으신 부모님은 하루가 다르게 편찮으시고, 돈벌이는 시원치 않은데, 몸은 벌써 삐걱거리며 직장생활이 버거워지고 있으며, 친구들과도 연락이 뜸해지면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무력감이 밀려오는 날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답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 재미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혼자 참으로 재미없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올 때면, 어느 동굴속 깊이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듯한 막막함이 들곤 한답니다. 한마디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때 '정신병원'을 찾아가 의사와 상담을 나누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을 읽어보니 록커 이성우씨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렇게 상담을 나누면서 어느 정도 고민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다시 삻의 활력을 되찾아서 기쁘다는 내용도 적혀 있는데...나의 경우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나는 '잡다한 지식'이 참으로 박학한 관계로 의사선생님이 하실 말씀을 '이미' 어느 정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 닉네임이 '또 다른 나'인데,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페르소나(가면)'의 또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닉네임을 쓰기까지가 또 한 편의 드라마인데, 이는 '내 블로그'에 이미 장문의 글로 소개하였기에, 간략하게만 쓰련다.

 

  고민 많던 20대 후반에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논술쌤'으로 변신할 무렵이었는데, 때마침 '독서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모임에서 쓰거나 채팅을 할 때 쓰려고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마침맞게 '나르키소스'에 얽힌 신화 가운데 수선화와 후리지아 꽃에 관한 전설을 알게 되었고, 나르키소스를 몰래 짝사랑하던 님프 후리지아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나르키소스를 따라 죽었다가 '후리지아'로 환생했다는 이야기가 아름답게 들려 '후리지아'란 아이디를 쓰다가 그 많던 고민을 '후~'하고 날려버리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리지아'만 남겨놓았고, 두음법칙을 활용하여 '이지아'로 쓰다가, 뭔가 의미를 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한자'로 써서 '異之我'로 썼고, 다른이들이 뜻을 모를까봐 '異之我...또 다른 나'라는 닉네임으로 완성하고,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가면, 아닌 가면 같은 닉네임으로 20년 넘게 살다보니, 난 어느새 '심리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고서도 어느 정도 '심리학적인 내용'을 얼추 실천하며 살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정신분석학자의 상담이 그렇게까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상당히 도움이 될테지만,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아무 때고 연락해서 진지한 수다를 떨어도 마다하지 않을 편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뱉고 나면, 그닥 '정신병원'이 필요치 않고 '수다쟁이 친구'가 절실하다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상대가 '말(대화)'이 잘 통했으면 좋겠고,  '이성'이면 더 좋겠고, '예뻤으면' 더 좋겠고, 평생 '내편'이 되어주면 더 좋겠으니, 얼릉 결혼이나 해버리면 좋겠는데, 다른 건 둘째치고, '말'이 통하는 여성이 내 주위에 없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현대인의 고민거리는 이렇듯 심각한 것은 없다. 심심풀이 땅콩을 주워먹고 술 한 잔을 기울이면서 떨 수 있을 정도의 '수다'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할만 하니 말이다. 이 책에서 고민을 말하는 록커 이성우도 딱 고만한 고민거리로 상담을 하고 있으며, 정신분석학자 한덕현도 고만한 고민을 해결할 '심리학이론'을 풀어서 설명해주면서 내담자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책은 '록커와 의사쌤의 평범한 수다'가 전부다. 어려운 내용도 전혀 없다. 읽다가 '내 고민'과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면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구나'라면서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이라는 것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욕구불만'이 적절히 해소되지 않아서 몸과 마음이 아픈 것이었구나..라면서 고민을 털어낼 용기가 불끈불끈 샘솟게 만들 것이다. <심리학책>은 원래 그런 용도로 읽기 마련이고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말 한마디를 할 용기가 없어서 끙끙 앓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세 가지 말은 꼭 하면서 살면 좋겠다. 그 세 가지 말은 바로 '미안해,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다.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지는 용감한 말이 바로 '미안해'다.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별일도 아닌 것을 큰일로 만들고 뒷감당을 하지 못해 더 큰 봉변을 당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또, 누구나 어떤이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인 까닭에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살아야 한다. 사소하더라도 더욱 진지하게 말해야 하는 말이 '고맙다'다. 그 사소한 도움을 '당연시'하는 이들이 고마움도 모르고 '갑질'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얼마만큼의 큰 도움을 주어야 겨우 '고맙다'고 말할 것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맙다'고 말을 하는 순간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 행복해질 수 있다. 이래도 '고맙다'는 말을 아낄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해야할 말이 '사랑해'다. 흔히, '타이밍'이 중요한 말이라고도 하는데, 맞는 말이지만, 너무 재고 아끼다보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늘 타이밍을 놓치고서 후회하고 말 것이다. 그럴 바에야 '아무 때'고 사랑해라고 진심을 밝혀라. 설령 헤프고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을지언정 때를 놓치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 지금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사랑해'라고 말해보라. 차마 그럴 용기가 없다면 '눈'으로라도 진심을 표현하길 바란다. 두 눈에 하트를 뿅뿅 심어놓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봐주지 않고 홀로 쓸쓸하고 외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분에게 <심리학책>인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그렇게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분들에게 용기내어 한 마디 해주면 좋겠다. 언제고 답답할 때 연락하라면서 말이다. 수다 정도는 언제든 들어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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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동물의 역사 - 인류 문명을 이끈 놀랍고 신비로운 동물 이야기 한빛비즈 교양툰 18
카린루 마티뇽 지음, 올리비에 마르탱 그림, 이정은 옮김, 장이권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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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도 동물이라는 것에 의아해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도 인간처럼 '복지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에 찬성할 수 있는가? 또는 동물과 인간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가? 이런 질문이 낯설기만 한 분들이 아직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애완견'이라는 표현 대신에 '반려견'이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더 많은 실정이다. 개에 불과한데도 사람 팔자보다 더 늘어지게 사는 요즘에는 '동물'인데도 불구하고 '가족'과 같이 여기고, 심지어 가족보다 더 한 존재로 느끼고 있다. 그럼 다시 묻겠다. 당신이 '개'를 사랑하는 만큼 소나 돼지, 닭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육식'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요즘엔 '비건(채식주의자)'이 참 많아졌다고 한다. 그런 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동물의 권리'가 인간과 동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동물을 살육해서 얻은 모든 것'을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육식'을 비롯해서, 밀렵이나 밀집사육 등의 '동물학대'를 통해서 얻은 물건이나, 더 나아가 '동물실험'을 거쳐 만들어진 물건들까지도 쓰지 않겠다고 당당히 선언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선택'은 존중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비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 받는 것에 '동의'하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건이 존중받는 만큼 '육식'을 사랑하고 즐기는 이들도 '자기 선택'을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선택'의 문제뿐일까?

 

  인류가 '육식'을 즐겨온 역사를 보면 참으로 길다. 초기 인류는 동물보다 별다른 능력이 없었기에 '포식자'들에게 사냥 당하는 '피식자'였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검치호랑이의 이빨 자국'이 선명한 두개골이 종종 발견된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발 하라리도 지적했지만, 인류(호모 사피엔스)는 개별적으론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뭉치면 '최상위 포식자'조차 학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모여 살기 시작했고, 정착을 하며 농사를 짓고 살아갔다. 그리고 '가축화'를 진행시켰다. 소, 돼지, 양, 말, 닭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인간이 동물과 가깝게 지내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인간보다 뛰어난 '동물의 능력'을 숭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기도 했고, 뛰어난 능력을 흠모해서 '신'으로 섬기는 종교로 발전시키는가 하면, 그 뛰어난 능력을 '모방'하면서 새로운 기술발전의 거울로 삼기도 했다. 물론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말이다. 그와 함께 '인수공통 감염병'이 발생하기도 했다. 원래는 서로를 감염시키지 않았는데, 가깝게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발생한 질병이었다. 이는 '가축화 과정'을 통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초기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전체 동물 가운데 인간과 접촉하는 동물이 1%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야생의 생태계는 건재했고, 동물의 다양성은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징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7세기 이후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구에서 시작된 '과학혁명'은 동물의 생태만이 아닌 '생리학적 모든 것'을 탐구하여 지식을 쌓는 일에 맹목적이 되었다. 다시 말해, 동물을 산 채로 해부하면서 '인간'과 닮은점을 찾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다른점..아니 '틀린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동물-기계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한마디로 동물은 인간과 달리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동물은 인간과 달리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으니, '고통'을 느낄 수도 없다. 그러하니 인간이 동물을 어떻게 하든 아무런 상관도 없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왜냐면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동물을 함부로 해도 상관 없다는 얘기다. 마치 자신의 종교와 다른 '이교도'를 대하듯 인간은 동물을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성서>의 사례까지 들면서 정당화시키고 말았다. 그에 대한 결과는 끔찍할 뿐이었다. 동물의 멸종이 시작된 것이다. 먼 옛날 사피엔스가 매머드를 대량학살해서 멸종시켰듯이 말이다. 동물처럼 '하등한 존재'는 그래도 상관없다면서 말이다.

 

  단지,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멸종시킨 것만은 아니다. 차마 인간을 상대로 실험할 수 없는 끔찍한 실험을 날마다 시행했다. 뱀의 피부를 한꺼풀 벗겨내 '새로운 제품의 독성'을 실험한다. 인간의 피부에 닿아도 무해한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토끼의 눈꺼풀을 붙들어매고 '신상품'을 한 방울 넣는다. 이때 토끼가 발버둥을 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동물학대'가 아니라 '임상실험'일 뿐이며, 인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이런 '동물실험'을 거쳐서 안전하게(!) 만들어진 생필품들이 날마다 쏟아진다. 인간에게는 안전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물건 뿐만 아니다. 양계장 같은 곳에선 또 다른 동물학대가 펼쳐진다. 먼저 양계장에는 '암탉'만 존재한다. 현대식 부화기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들은 '감별사'들에 의해 수컷과 암컷으로 나뉘게 된다. 더욱 발전 방식으로는 달걀 상태에서 빛을 쪼여서 미리 선별하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양계장'으로 보내지는 것은 암평아리 뿐이다. 수평아리는 태어난 뒤에나 태어나기 전이나 '폐기처분'을 면할 수 없다. 깨어지거나 갈려나가거나 말이다. 암평아리들은 사료를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좁디좁은 '배터리(밀집사육장)' 안에서 말이다. 층층이 쌓인 그곳에서 자란 암탉들은 잠잘 시간도 없이 24시간 사료를 먹고 알만 낳는 일을 한다. 양계장 주인은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사정없이 행한다. 암탉이 '해 뜨는 아침'에 달걀을 낳는다면, 한밤중이라도 '강렬한 전등'을 밝혀서 아침이 온 것처럼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하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달걀을 얻을 수 있다.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한 암탉이 죽으면, 새로운 암탉으로 '대체'하면 그뿐이다. 양계장 주인은 '신선한 달걀'만 얻을 수 있다면 수천 마리가 죽은들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익성'이니 말이다.

 

  이처럼 인간이 동물을 멸시하게 된 주된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본주의'였다. 돈이 된다면 '동물학대'는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당연한 일이어야만 했고, '동물학살'이 벌어진다고 한들 수지타산만 맞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동물은 인간보다 못한 처우를 받으며 '인간을 위해 개량'되어야만 했고, 인간에게 불필요하다고 '낙인'이 찍힌 동물은 폐기처분을 감수해야만 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라면, 미국이 철도를 깔 무렵 '아메리카 들소(버팔로)'는 기차를 타면서 사냥을 당하는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미국 기병대에 의해 널리 행해졌고, '버팔로 사냥'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을 내쫓고 땅을 빼앗기 위해서 '인디언 학살'로 자행되곤 했다.

 

  이런 모든 만행은 '문명화'라는 미명으로 행해졌다. 서구 열강들이 식민개척을 하면서 지껄였던 말이기도 했다. 미개한 것에서 탈피시켜주기 위해 '위대한 백인'이 기꺼이 나서주니 고맙게 여기라고 말이다. 그나마 식민지인들은 '문명화 작업(?)'을 거치면 인간대접이라도 받았지만, 동물은 그럴 가능성조차 박탈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인류가 '가축화'를 시행했을 당시에 '가축화 된 동물'이 1%에 불과하던 수치가 21세기 오늘날에는 66%가 '가축화된 동물'이고 33%는 '인간'이며, 나머지 1%가 '야생동물'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단다. 이는 지구상의 동물 생태계가 망가져버렸다는 증거다. 더구나 현재 77억 인구는 2100년 즈음에는 100억이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 생태계가 망가져버린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제2의 지구'를 찾아 우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해 인간의 신체와 뇌를 '기계화'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발전한 과학기술로 '멸종한 동물'을 복원하거나 '동물로봇'으로 대체해서 생태계를 유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곤 한다. 정말 그 '호언장담'이 안전하고 건강한 생태계를 복원시킬 수 있을지 '허언'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제 인류에게 남은 미래는 '두 가지' 뿐이란다. 하나는 '동물 생태계'가 이대로 무너져서 '인간조차' 살 수 없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인간과 동물이 평등한 관계'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생태계를 보전하고 사이좋게,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란다.

 

  이제는 팬데믹을 넘어 '위드 코로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야생에 살아 마땅한 동물들을 '서식지 파괴'를 일삼으며 인간이 사는 곳과 경계를 나누지 못했기에 벌어진 현실이다. 다시는 옛날처럼 마스크를 벗고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후변화는 인간이 벌인 끔찍한 재앙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막아야만 한다. 애꿎은 동물들은 그런 변화를 '맨몸'으로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도 인간은 '육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식 '대형양식장'이 제공하는 '무한 육식의 제공'은 더 많은 동물의 학살을 부르고, 더 많은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며, 그로 인한 기후변화를 겪어야 하며,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문명화'된 인간의 터전마저 빼앗을 것이며, 끝내 '인수공통 감염병'은 코로나보다 지독하게 창궐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이제 다시 묻고 싶다. '비건'은 선택인가? 아니 '육식'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동물복지'나 '동물평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가? 이제는 '선택'할 수 있는 항목조차 삭제되었다. 왜냐면 '인간의 절멸'이란 새로운 항목이 '그 자리'에 대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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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한빛비즈 문학툰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쿠마 찬 그림, 양지윤 옮김, 크리스털 챈 각색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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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툰> 세 번째 책은 '빨강머리 앤'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안 읽어본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MZ세대'들에겐 낯선 작품인 모양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에 '빨강머리 앤'을 아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 아는 아이들조차 '엄마가 좋아하는 책'이라고만 할뿐, 자신들의 취향은 아니라고 말할 정도다. 그럼에도 팬층은 대단히 두터운 편이다. 아마도 그 팬층이 호주머니가 든든한 4~50대이기 때문일 것이고, 이들이 어릴 적에 보았던 '애니메이션'이 추억을 돋우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한다. 하긴 그 당시 남자아이들은 '미래소년 코난'에 열광했고, 여자아이들은 '앤'과 '캔디'에게 푹 빠졌더랬다. 그러고 보니 '들장미소녀 캔디'도 비슷한 설정이었다. 고아소녀였던 것이 말이다. 하지만 캔디는 외로워도 쓸퍼도 울지 않는 씩씩함이 매력이었던 반면에 앤은 '다른 면모'로 사랑을 받았다.

 

  '빨강머리 앤'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같이 있는 사람'에게 무한한 생동감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상상력을 뿜어낸다. 남들에겐 평범해 보이는 것들에 '매력적인 이름'을 붙여주어 상상력을 공유하는 독특한 능력을 앤은 갖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Ann'으로 밋밋하게 부르지 말고, 꼭 'e'자를 붙여 'Anne'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다. 더 좋은 이름은 '코딜리아'라는 낭만적인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어째서 낭만적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앤이 '그렇다'고 하니, 그 순간부터 낭만적일 따름이다. 이토록 쉼없이 쫑알거리는 소녀가 우리 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분명할 것이다.

 

  물론, 앤에게도 결점이 많다. 빨강머리에 대한 편견이 지나쳐서 '자격지심'으로까지 심화되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에, 덜렁거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소녀라고는 하지만 '허영심'이 너무 많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점조차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의 장점이 너무 커질 때 앤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낳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결점은 커가면서 점점 작아지고 철이 들면서 자중할 줄 아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점이 줄어드는 대신에 '상상력'은 수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는 능력으로 극대화 되어서 '시 낭송'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아주 탁월한 능력으로 발휘되곤 한다.

 

  이런 앤 같은 친구가 우리 주위에 한 명쯤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매슈와 마릴라의 삶의 변화가 바로 그 증거일 것이다. 무뚝뚝하고 고집이 센 두 남매의 집에 앤이 함께 살게 되면서 '사람 사는 집'처럼 바뀌었기 때문이다. 친구인 다이애나는 어땠는가. 평생을 함께 할 소중한 또래 친구를 얻음과 동시에 삶의 활력을 얻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은 가장 아름답게 보낼 수 있었다. 이는 앤과 함께 다니던 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요즘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앤과 같은 친구가 꼭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점점 꿈을 꾸는 친구들이 줄어들고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 어릴 적만해도 '문학소녀'들이 잔디밭에 모여앉아 예쁜 꿈들을 쫑알거리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우리 세대가 기억하는 '여고시절'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물론 그 내용이 시집 잘 가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현모양처의 꿈'이었을지언정, 그 시절에는 그런 꿈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 힘겨운 시절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현모양처'를 꿈꾸던 소녀가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딸들이 또다시 꿈꾸는 시절이 도래했건만, 그 꿈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저 명문고, 명문대, 그리고 대기업 사모님을 꿈꾸는 것으로 바뀔 뿐이란 말인가? 이젠 여성들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역할'을 맡아 더 큰 꿈을 꿀 수도 있는 시절이 왔는데 말이다.

 

  만약, 앤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친구가 오늘의 대한민국에 살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능력을 맘껏 뽐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공감력을 발휘하여 '멋진 꿈'을 함께 꾸게 만드는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뛰어난 위인이 아니어도 좋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언제 어디서라도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그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생동감 넘치는 삶의 영감을 받게 되어 살맛 나는 시절을 함께 할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고아소녀'로 살아간다면 운명은 좀 달라질 것이다. 왜냐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고아수출국'으로 손꼽히는 나라인 탓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긴 한데, '핏줄'이 아니면 사랑받을 자격도 행복할 권리도 모두 빼앗긴 것마냥 '고아'에게 냉담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빨강머리 앤'처럼 상상력이 뛰어나고 무엇이든 생기를 불어넣는 초월적인 힘의 소유자라고 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로 입양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위대한 인물로 성장해 고국을 그리워하는 엉뚱한 헤프닝이나 벌일 것이고 말이다. 그도 아니면 만 18세가 되어 고아원에서 내쫓기고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안타까운 생을 마감할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현실'에 대입하는 실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지 않으면 절대로 달라질 수 없다. 우리 나라보다 경제적 후진국인 동남아 국가들조차 '고아'에 대한 처우가 이렇게까지 박하지는 않다. 자국의 고아를 '다른 나라'에 보내는 비율도 적고,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훌륭한 인재로 키워 나라에 보탬이 되는 멋진 일원으로 품에 안아주는 정책을 실행한다. 그러면서 놀라워 한다. 대한민국처럼 멋진 선진국에서 '고아에 대한 정책'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말해주면 믿지 않을 정도로 놀라곤 한단다. 이젠 우리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선거철만 되면 양로원에는 문턱이 닳도록 정치인들이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찾아가지만, '고아원'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한다. 연말에나 겨우 찾아가 '사진찍기'만 하고서 하릴없는 훈계나 늘어놓고 돈 몇 푼 쥐어주는 게 고작이다. 이제는 정신 좀 차릴 때가 되지 않았으려나.

 

  그동안 살펴본 <제인 에어>, <주홍 글자>, 그리고 <빨강머리 앤>까지 모두 여성이 주인공인 문학이었다. 비록 만화형식이지만 '원작의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게 각색을 한 덕분에 '원작의 맛'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기에 모두 훌륭한 책이었다. 그리고 '문학툰'이라는 새로운 장르였기에 여성이 극복해야 할 '시대적 한계'를 더욱 뚜렷하게 엿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 탓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어린 친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시대적 배경'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홍 글자>는 17세기 미국 메사추세츠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제인 에어>는 19세기 영국을, 그리고 <빨강머리 앤>은 19세기 캐나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종교적 박해'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에게 종속된 삶을 살도록 억압받는 것이 당연시되던 암울한 시대였다. 당연히 여성에겐 '선거권'도 없었고, 사회적 활동을 일절 금하던 시절이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의 여성들은 하나 같이 '진취적인 사상'을 품고 있다. 여성이 '할 수 없는 일'을 거뜬히 해내면서 말이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우리 사회는 완전한 '양성평등 사회'로 탈바꿈한 것일까? 그러기엔 아직도 미흡한 점이 너무도 많다. 심지어 꼴통대통령이 등장해 '실력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여성인권을 박탈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장모와 마누라 말씀을 잘 듣는 강아지처럼 굴면서 말이다. 여성은 굴레에 종속되어야 마땅하고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에 당당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려 애쓴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시대적 배경 이해가 힘들다면 <문학툰>을 먼저 읽으며 이해를 돋우고 상상력을 키워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문학툰>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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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한빛비즈 문학툰
SunNeKo Lee 그림, 정이립 옮김, 너새니얼 호손 원작, Crystal S. Cha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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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툰> 두 번째 책은 '주홍 글자'다. 주인공의 가슴팍에 선명히 새겨진 '선홍빛 글자(The Scarlet Letter)'의 원래 의미는 '간통(Adultery)'였다. 헤스터 프린은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는데도 남편이 아닌 남자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으니 '죄를 지은 여인'이란 것을 일깨워서 뭇사람들에게 경계와 금기로 삼기 위해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가슴 한복판에 선명한 글자를 새겨놓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독실한 청교도 신도였던 헤스터는 그 부끄러운 글자를 더욱 밝고 선명하게 '선홍빛'으로 새겨 넣는 것으로 속죄하려 했다. 자신이 지은 죄가 무겁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마음 깊이 부정한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 결의는 조금 있다 다시 언급하련다)

 

  그래서 헤스터는 자신의 딸을 '펄(진주)'이라는 보석으로 불렀다. 진주는 서양에선 '인어의 눈물'이라고도 불리지만 천연에서 얻은 진귀한 보물이란 뜻도 있다. 헤스터는 펄의 아버지를 밝힐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동정녀 마리아'처럼 순결한 상태에서 얻은 보석같은 아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가 담긴 '주홍 글자'는 헤스터 프린의 경건한 삶 속에서 점점 'Able(능력)'과 'Angel(천사)'라는 의미로 바뀌게 된다. 그녀가 청교도적인 경건한 삶을 살아나감에 따라 죄 지은 여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아서 딤스데일은 17세기 메사추세츠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목사다. 그러나 그도 헤스터와 마찬가지로 '죄인'이었다. 펄의 아버지가 사실은 딤스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녀가 '어떻게' 만나 '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지는 줄거리 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작가인 호손이 이 부분을 쏙 빼버린 까닭은 자칫 '통속적인 내용'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암튼, 그와 그녀는 성경에서 금기하는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번 째 계명을 어기는 죄악을 저지른 사이였다. 간음을 저지르면 '사형'이라는 형벌을 면하기 어려웠기에 목사 신분인 딤스데일에게 '밝힐 수 없는 죄악'은 크나큰 형벌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왜 그는 자신의 죄를 떳떳하게 밝히고 헤스터처럼 당당히 벌을 받지 않았던 것일까? 감추면 감출수록 '자신의 행위'가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스스로' 내리고 '스스로' 견디며 더욱더 무겁고 달게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 형벌을 달게 받지 못하고 '헤스터와 펄과 새로운 삶'을 꿈꾸려는 희망을 품으면서 죄를 면하려...아니 고통을 면하려 했다. 차라리 헤스터처럼 죄인임을 밝히면 그런 고통도 없었으련만, 딤스데일은 죄를 밝히지 못한 채 속으로 곪아가는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된다. 얼핏 보면, 헤스터를 더욱 곤경에 빠지게 만들지 않기 위해 '펄의 아버지'임을 밝히지 않은 배려심 돋는 행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17세기 사회에서 여인이 설 자리는 송곳 꽂을 만큼도 없는데도 뭇사람들의 비난을 나눠 받기는커녕 '외면'해버린 비겁한 핑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헤스터와 함께 비난을 받고 헤스터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갔더라면 더 훌륭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그녀보다 더 못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헤스터의 본 남편인 로저 칠링워스다. 그는 '학자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지식을 탐구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로 인해 어여쁜 신부였던 헤스터를 홀로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방치해버린 무책임한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방치된 신부는 살기 위해(?)서 딤스데일의 사랑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암튼, 무책임한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사생아를 안고서 뭇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와중에 등장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헤스터의 남편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생아를 품고 있는 아내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단지 '복수심'만을 키웠을 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복수하겠단 말인가? 지식을 탐구한 학자란 사람이 이리 쫌생이가 되어 버렸단 말인가? 차라리 그럴 바에야 아내의 곁을 지켜주는 무던한 남편이라도 되었으면 족하련만, 그는 못나게도 '복수하는 삶'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드디어 복수할 대상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복수라는 것이 '딤스데일의 파멸'이라니...차라리 단숨에 숨을 끊어버리는 방법이라면 덜 치졸했을터인데, 지식을 탐구하여 '인류의 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갈고 닦는 학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저 '한 사람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일에 매진하는 삶이라니, 추악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칠링워스는 성치 않은 몸이었는데 복수하는 삶을 살면서 더욱더 추악한 꼴로 변해갔다.

 

  세 사람 가운데 온전한 삶을 살아간 이는 오직 '헤스터 프린'뿐이다. 목사인 딤스데일과 의사인 칠링워스는 뭇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고매하신 분들이었으나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었다. 그들은 '겉보기'에 치욕스런 삶을 살아가는 헤스터보다 더 부끄러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라는 사람이 신도들에게 그럴 듯한 설교를 하면서도 늘 한 손을 가슴팍에 올려놓고 통증을 참아야만 했다. 그가 '그럴 듯한 설교'를 하면 할수록 죄가 더욱 무거워짐을 정작 본인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정작 고해성사는 자신이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더욱 뜨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사인 칠링워스는 어떤가. 사람을 살리고 고통을 없애야 할 본분도 망각한 채, 그는 '한 사람'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구렁텅이로 내몰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버린 악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차라리 '헤스터의 결의'처럼 속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비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날아가버린 덧없는 삶처럼 느껴질지라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는 이로 살아가는 것이 '더 청교도'스럽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처럼 여겨지곤 한다. 최초의 여성인 이브가 아담의 갈빗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 '원죄'를 저지른 이도 이브인 탓에 여성은 '출산의 고통'을 비롯해서 온갖 더럽고 모욕적인 처분을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하느님을 향한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청교도'인들에게 더욱더 그렇다. 그렇기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헤스터의 삶은 더욱 치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주홍글자'에선 오직 헤스터만이 온전한 삶을 살아간다. 한 여인의 삶이 이토록 숭고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녀는 간통한 여인에서 '성모 마리아'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말이다.

 

  반면에 딤스데일과 칠링워스로 대표되는 '남자들의 삶'은 떳떳하지 못하다. 이는 '청교도의 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는 장치로 보이기도 한다. 겉으론 경건한 척하면서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속물적인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부도덕한 이들의 이중성 말이다. 그래서 <주홍글자>는 여성의 삶이 더욱 진솔하고 숭고하다는 내용으로 읽히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하지만 그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징표'로 삼는다면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경건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을 헤스터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딤스데일과 칠링워스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의식'은 찾아볼 수 없는 부도덕한 인물의 대표주자가 되고 말았다. 어찌 이들에게서 본 받을 것이 있단 말인가.

 

  이처럼 사람은 겪어봐야 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알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죄인이라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겪어보아야' 할 것이다. 겪어보지 않았다면 '함부로'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 해선 안 된다. 우리는 목사님과 의사선생님이라는 '사회적 지위'만 보고 존경어린 시선을 담기에 바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 이하' 취급을 받아도 시원찮을 분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말이다. 주위의 평판 따위는 '참고'만 하면 된다. 직접 겪어보고 '말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직접 평가를 내려야 실수를 덜 수 있다. 우리 주위에 '헤스터 프린'과 같은 인물이 참 많을 것이다.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더라도 '철저히 반성하는 삶'을 살아가는 진짜배기 인생 말이다. 이런 분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계시기에 아직은 살만한 세상일 것이 틀림없다. 비록 뉴스에는 인간 형상을 한 쓰레기들만이 가득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난 <주홍글자>를 다시 읽고 또 다시 읽고 싶어진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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