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앤 한빛비즈 문학툰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쿠마 찬 그림, 양지윤 옮김, 크리스털 챈 각색 / 한빛비즈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툰> 세 번째 책은 '빨강머리 앤'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안 읽어본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MZ세대'들에겐 낯선 작품인 모양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에 '빨강머리 앤'을 아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 아는 아이들조차 '엄마가 좋아하는 책'이라고만 할뿐, 자신들의 취향은 아니라고 말할 정도다. 그럼에도 팬층은 대단히 두터운 편이다. 아마도 그 팬층이 호주머니가 든든한 4~50대이기 때문일 것이고, 이들이 어릴 적에 보았던 '애니메이션'이 추억을 돋우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한다. 하긴 그 당시 남자아이들은 '미래소년 코난'에 열광했고, 여자아이들은 '앤'과 '캔디'에게 푹 빠졌더랬다. 그러고 보니 '들장미소녀 캔디'도 비슷한 설정이었다. 고아소녀였던 것이 말이다. 하지만 캔디는 외로워도 쓸퍼도 울지 않는 씩씩함이 매력이었던 반면에 앤은 '다른 면모'로 사랑을 받았다.

 

  '빨강머리 앤'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같이 있는 사람'에게 무한한 생동감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상상력을 뿜어낸다. 남들에겐 평범해 보이는 것들에 '매력적인 이름'을 붙여주어 상상력을 공유하는 독특한 능력을 앤은 갖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Ann'으로 밋밋하게 부르지 말고, 꼭 'e'자를 붙여 'Anne'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다. 더 좋은 이름은 '코딜리아'라는 낭만적인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어째서 낭만적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앤이 '그렇다'고 하니, 그 순간부터 낭만적일 따름이다. 이토록 쉼없이 쫑알거리는 소녀가 우리 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분명할 것이다.

 

  물론, 앤에게도 결점이 많다. 빨강머리에 대한 편견이 지나쳐서 '자격지심'으로까지 심화되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에, 덜렁거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소녀라고는 하지만 '허영심'이 너무 많은 편이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점조차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의 장점이 너무 커질 때 앤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낳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결점은 커가면서 점점 작아지고 철이 들면서 자중할 줄 아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점이 줄어드는 대신에 '상상력'은 수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는 능력으로 극대화 되어서 '시 낭송'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아주 탁월한 능력으로 발휘되곤 한다.

 

  이런 앤 같은 친구가 우리 주위에 한 명쯤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매슈와 마릴라의 삶의 변화가 바로 그 증거일 것이다. 무뚝뚝하고 고집이 센 두 남매의 집에 앤이 함께 살게 되면서 '사람 사는 집'처럼 바뀌었기 때문이다. 친구인 다이애나는 어땠는가. 평생을 함께 할 소중한 또래 친구를 얻음과 동시에 삶의 활력을 얻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은 가장 아름답게 보낼 수 있었다. 이는 앤과 함께 다니던 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요즘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앤과 같은 친구가 꼭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점점 꿈을 꾸는 친구들이 줄어들고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 어릴 적만해도 '문학소녀'들이 잔디밭에 모여앉아 예쁜 꿈들을 쫑알거리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우리 세대가 기억하는 '여고시절'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물론 그 내용이 시집 잘 가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현모양처의 꿈'이었을지언정, 그 시절에는 그런 꿈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 힘겨운 시절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현모양처'를 꿈꾸던 소녀가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딸들이 또다시 꿈꾸는 시절이 도래했건만, 그 꿈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저 명문고, 명문대, 그리고 대기업 사모님을 꿈꾸는 것으로 바뀔 뿐이란 말인가? 이젠 여성들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역할'을 맡아 더 큰 꿈을 꿀 수도 있는 시절이 왔는데 말이다.

 

  만약, 앤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친구가 오늘의 대한민국에 살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능력을 맘껏 뽐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공감력을 발휘하여 '멋진 꿈'을 함께 꾸게 만드는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뛰어난 위인이 아니어도 좋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언제 어디서라도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그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생동감 넘치는 삶의 영감을 받게 되어 살맛 나는 시절을 함께 할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고아소녀'로 살아간다면 운명은 좀 달라질 것이다. 왜냐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고아수출국'으로 손꼽히는 나라인 탓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긴 한데, '핏줄'이 아니면 사랑받을 자격도 행복할 권리도 모두 빼앗긴 것마냥 '고아'에게 냉담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빨강머리 앤'처럼 상상력이 뛰어나고 무엇이든 생기를 불어넣는 초월적인 힘의 소유자라고 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로 입양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위대한 인물로 성장해 고국을 그리워하는 엉뚱한 헤프닝이나 벌일 것이고 말이다. 그도 아니면 만 18세가 되어 고아원에서 내쫓기고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안타까운 생을 마감할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현실'에 대입하는 실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지 않으면 절대로 달라질 수 없다. 우리 나라보다 경제적 후진국인 동남아 국가들조차 '고아'에 대한 처우가 이렇게까지 박하지는 않다. 자국의 고아를 '다른 나라'에 보내는 비율도 적고,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훌륭한 인재로 키워 나라에 보탬이 되는 멋진 일원으로 품에 안아주는 정책을 실행한다. 그러면서 놀라워 한다. 대한민국처럼 멋진 선진국에서 '고아에 대한 정책'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말해주면 믿지 않을 정도로 놀라곤 한단다. 이젠 우리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선거철만 되면 양로원에는 문턱이 닳도록 정치인들이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찾아가지만, '고아원'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한다. 연말에나 겨우 찾아가 '사진찍기'만 하고서 하릴없는 훈계나 늘어놓고 돈 몇 푼 쥐어주는 게 고작이다. 이제는 정신 좀 차릴 때가 되지 않았으려나.

 

  그동안 살펴본 <제인 에어>, <주홍 글자>, 그리고 <빨강머리 앤>까지 모두 여성이 주인공인 문학이었다. 비록 만화형식이지만 '원작의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게 각색을 한 덕분에 '원작의 맛'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기에 모두 훌륭한 책이었다. 그리고 '문학툰'이라는 새로운 장르였기에 여성이 극복해야 할 '시대적 한계'를 더욱 뚜렷하게 엿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 탓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어린 친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시대적 배경'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홍 글자>는 17세기 미국 메사추세츠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제인 에어>는 19세기 영국을, 그리고 <빨강머리 앤>은 19세기 캐나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종교적 박해'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에게 종속된 삶을 살도록 억압받는 것이 당연시되던 암울한 시대였다. 당연히 여성에겐 '선거권'도 없었고, 사회적 활동을 일절 금하던 시절이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의 여성들은 하나 같이 '진취적인 사상'을 품고 있다. 여성이 '할 수 없는 일'을 거뜬히 해내면서 말이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우리 사회는 완전한 '양성평등 사회'로 탈바꿈한 것일까? 그러기엔 아직도 미흡한 점이 너무도 많다. 심지어 꼴통대통령이 등장해 '실력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여성인권을 박탈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장모와 마누라 말씀을 잘 듣는 강아지처럼 굴면서 말이다. 여성은 굴레에 종속되어야 마땅하고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기에 당당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려 애쓴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시대적 배경 이해가 힘들다면 <문학툰>을 먼저 읽으며 이해를 돋우고 상상력을 키워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문학툰>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