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자 한빛비즈 문학툰
SunNeKo Lee 그림, 정이립 옮김, 너새니얼 호손 원작, Crystal S. Cha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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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툰> 두 번째 책은 '주홍 글자'다. 주인공의 가슴팍에 선명히 새겨진 '선홍빛 글자(The Scarlet Letter)'의 원래 의미는 '간통(Adultery)'였다. 헤스터 프린은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는데도 남편이 아닌 남자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으니 '죄를 지은 여인'이란 것을 일깨워서 뭇사람들에게 경계와 금기로 삼기 위해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가슴 한복판에 선명한 글자를 새겨놓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독실한 청교도 신도였던 헤스터는 그 부끄러운 글자를 더욱 밝고 선명하게 '선홍빛'으로 새겨 넣는 것으로 속죄하려 했다. 자신이 지은 죄가 무겁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마음 깊이 부정한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 결의는 조금 있다 다시 언급하련다)

 

  그래서 헤스터는 자신의 딸을 '펄(진주)'이라는 보석으로 불렀다. 진주는 서양에선 '인어의 눈물'이라고도 불리지만 천연에서 얻은 진귀한 보물이란 뜻도 있다. 헤스터는 펄의 아버지를 밝힐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동정녀 마리아'처럼 순결한 상태에서 얻은 보석같은 아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가 담긴 '주홍 글자'는 헤스터 프린의 경건한 삶 속에서 점점 'Able(능력)'과 'Angel(천사)'라는 의미로 바뀌게 된다. 그녀가 청교도적인 경건한 삶을 살아나감에 따라 죄 지은 여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아서 딤스데일은 17세기 메사추세츠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목사다. 그러나 그도 헤스터와 마찬가지로 '죄인'이었다. 펄의 아버지가 사실은 딤스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녀가 '어떻게' 만나 '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지는 줄거리 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작가인 호손이 이 부분을 쏙 빼버린 까닭은 자칫 '통속적인 내용'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암튼, 그와 그녀는 성경에서 금기하는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번 째 계명을 어기는 죄악을 저지른 사이였다. 간음을 저지르면 '사형'이라는 형벌을 면하기 어려웠기에 목사 신분인 딤스데일에게 '밝힐 수 없는 죄악'은 크나큰 형벌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왜 그는 자신의 죄를 떳떳하게 밝히고 헤스터처럼 당당히 벌을 받지 않았던 것일까? 감추면 감출수록 '자신의 행위'가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스스로' 내리고 '스스로' 견디며 더욱더 무겁고 달게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 형벌을 달게 받지 못하고 '헤스터와 펄과 새로운 삶'을 꿈꾸려는 희망을 품으면서 죄를 면하려...아니 고통을 면하려 했다. 차라리 헤스터처럼 죄인임을 밝히면 그런 고통도 없었으련만, 딤스데일은 죄를 밝히지 못한 채 속으로 곪아가는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된다. 얼핏 보면, 헤스터를 더욱 곤경에 빠지게 만들지 않기 위해 '펄의 아버지'임을 밝히지 않은 배려심 돋는 행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17세기 사회에서 여인이 설 자리는 송곳 꽂을 만큼도 없는데도 뭇사람들의 비난을 나눠 받기는커녕 '외면'해버린 비겁한 핑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헤스터와 함께 비난을 받고 헤스터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갔더라면 더 훌륭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그녀보다 더 못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헤스터의 본 남편인 로저 칠링워스다. 그는 '학자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지식을 탐구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로 인해 어여쁜 신부였던 헤스터를 홀로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방치해버린 무책임한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방치된 신부는 살기 위해(?)서 딤스데일의 사랑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암튼, 무책임한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사생아를 안고서 뭇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와중에 등장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헤스터의 남편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생아를 품고 있는 아내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단지 '복수심'만을 키웠을 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복수하겠단 말인가? 지식을 탐구한 학자란 사람이 이리 쫌생이가 되어 버렸단 말인가? 차라리 그럴 바에야 아내의 곁을 지켜주는 무던한 남편이라도 되었으면 족하련만, 그는 못나게도 '복수하는 삶'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드디어 복수할 대상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복수라는 것이 '딤스데일의 파멸'이라니...차라리 단숨에 숨을 끊어버리는 방법이라면 덜 치졸했을터인데, 지식을 탐구하여 '인류의 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갈고 닦는 학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저 '한 사람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일에 매진하는 삶이라니, 추악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칠링워스는 성치 않은 몸이었는데 복수하는 삶을 살면서 더욱더 추악한 꼴로 변해갔다.

 

  세 사람 가운데 온전한 삶을 살아간 이는 오직 '헤스터 프린'뿐이다. 목사인 딤스데일과 의사인 칠링워스는 뭇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고매하신 분들이었으나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었다. 그들은 '겉보기'에 치욕스런 삶을 살아가는 헤스터보다 더 부끄러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라는 사람이 신도들에게 그럴 듯한 설교를 하면서도 늘 한 손을 가슴팍에 올려놓고 통증을 참아야만 했다. 그가 '그럴 듯한 설교'를 하면 할수록 죄가 더욱 무거워짐을 정작 본인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정작 고해성사는 자신이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더욱 뜨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사인 칠링워스는 어떤가. 사람을 살리고 고통을 없애야 할 본분도 망각한 채, 그는 '한 사람'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구렁텅이로 내몰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버린 악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차라리 '헤스터의 결의'처럼 속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비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날아가버린 덧없는 삶처럼 느껴질지라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는 이로 살아가는 것이 '더 청교도'스럽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처럼 여겨지곤 한다. 최초의 여성인 이브가 아담의 갈빗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 '원죄'를 저지른 이도 이브인 탓에 여성은 '출산의 고통'을 비롯해서 온갖 더럽고 모욕적인 처분을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하느님을 향한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청교도'인들에게 더욱더 그렇다. 그렇기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헤스터의 삶은 더욱 치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주홍글자'에선 오직 헤스터만이 온전한 삶을 살아간다. 한 여인의 삶이 이토록 숭고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녀는 간통한 여인에서 '성모 마리아'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말이다.

 

  반면에 딤스데일과 칠링워스로 대표되는 '남자들의 삶'은 떳떳하지 못하다. 이는 '청교도의 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는 장치로 보이기도 한다. 겉으론 경건한 척하면서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속물적인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부도덕한 이들의 이중성 말이다. 그래서 <주홍글자>는 여성의 삶이 더욱 진솔하고 숭고하다는 내용으로 읽히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하지만 그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징표'로 삼는다면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경건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을 헤스터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딤스데일과 칠링워스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의식'은 찾아볼 수 없는 부도덕한 인물의 대표주자가 되고 말았다. 어찌 이들에게서 본 받을 것이 있단 말인가.

 

  이처럼 사람은 겪어봐야 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알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죄인이라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겪어보아야' 할 것이다. 겪어보지 않았다면 '함부로'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 해선 안 된다. 우리는 목사님과 의사선생님이라는 '사회적 지위'만 보고 존경어린 시선을 담기에 바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 이하' 취급을 받아도 시원찮을 분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말이다. 주위의 평판 따위는 '참고'만 하면 된다. 직접 겪어보고 '말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직접 평가를 내려야 실수를 덜 수 있다. 우리 주위에 '헤스터 프린'과 같은 인물이 참 많을 것이다.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더라도 '철저히 반성하는 삶'을 살아가는 진짜배기 인생 말이다. 이런 분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계시기에 아직은 살만한 세상일 것이 틀림없다. 비록 뉴스에는 인간 형상을 한 쓰레기들만이 가득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난 <주홍글자>를 다시 읽고 또 다시 읽고 싶어진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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