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인코그니타 - 고고학자 강인욱이 들려주는 미지의 역사
강인욱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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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테라 인코그니타

작가 : 강인욱 

출판사 : 창비

읽은날 : 2021/04/15 - 2021/05/04


믿고 보는 강인욱 교수님의 고고학 책...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의 한국 버전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민족들과 문화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2부에 써있는 우리나라 과거 역사는 처음 알게 된 내용들이 많았다.

고조선 시대때 상투를 틀었다는 내용처럼...

과거의 유물, 유적, 책등을 통해 알게된 과거의 역사는 모두가 한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다. 때로는 모순되는 내용이 함께 출토되기도 하고, 시대적으로 잘 맞지 않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역사가는 겸손해야 한다.

자기에게 유리한 유물만 뽑아다가 마음대로 윤색하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대의 시각을 가진 우리가 과거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더 조심해야 한다. 

역사를 이용해 자기 민족을 고양하거나 다른 민족을 무시하는 건 절대 없어야겠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p5 서구 열강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면서 그 지역의 보물과 역사를 빼앗아 자국의 박물관에 가져다놓았고, 약탈한 문화재의 수를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능력을 보여주는 척도로 삼았습니다. 세계 4대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의 침략이 가장 일찍 시작된 곳에서 4대 문명이 비롯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p13 미지의 땅, 미개척 영역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테라 인코그니타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저서 지리학교정에서 처음 사용했다.

p22 최근 우리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여럿 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만5000년 전에 만들어진 대형 신전 괴베클리 테페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2만년 전의 토기가 대표적이다

p26 옥스퍼드대학의 로빈 던바 교수는 후기구석기시대에 현생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로 노래와 춤, 신화, 그리고 종교를 꼽았다

p38 이러한 유사과학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수준의 논의가 나온 데에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 땅을 차지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p52 서양의 중세를 초토화시킨 페스트도 사실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유목을 하던 사람들이 설치류로부터 옮았고 그것이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다

p53 홍산문화는 양쯔강 유역의 량주 문화와 함께 약 5000-6000년 전 동아시아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문명으로 꼽힌다. 홍산문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손꼽힐 만한 거대한 제단과 고도로 정제된 옥기를 만들어냈다

p55 홍산문화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전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명을 포기하고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해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p56 홍산문화의 제사를 담당했던 신관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옥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한 관상용이 아니라 옥에 담긴 치유의 힘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p61 지구온난화로 영구동결대가 급격히 해체되고 있다는 점이 또다른 변수다. 자칫하면 얼음이 녹아내려 자연스럽게 무덤이 드러나고 철새나 북극권의 동물들이 시신의 세균을 옮기는 숙주가 될 수 있다

p67 인간 역사에서 보이는 식인 풍습의 대부분은 적에 대한 증오심 표출이 아니라 산 사람이 먼저 간 사람의 육신 일부를 자기에게 체화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p74 흉노와 훈족은 비단 몽골,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저 멀리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등 유라시아 전역에서 다들 관심이 많다

p77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들은 공통적으로 화려한 보석을 박아 넣은 황금과 강력한 마구, 철제 무기를 갖고 있었다

p82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동안 전체 유목민의 구성은 현지인들로 다양하게 바뀌었지만 가장 첨단의 군사와 문화를 선도하던 선우와 그들을 보좌하던 세력은 부계를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p95 약 2700년 전 남한에서 쌀농사를 짓던 청동기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쌀농사에 유리한 규슈로 이동하면서 일본에 한반도계 청동기 문화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야요이문화라고 부른다

p109 사양과 일본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사를 동원하여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동이족에 대한 혼란은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p113 동이족의 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유로 불쌍한 광대들의 손발을 자른 공자의 행동에서 공자가 동이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한다

p122 기자조선은 실제 역사라기보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사대주의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는 신화에 가까웠다

p129 이러한 상상은 완전히 허구에 기초하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가지를 치면서 과장되고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면서 확대된다

p148 문맥상 상투머리와 오랑캐 옷은 고조선의 풍습을 따랐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p156 온돌은 기원전 4세기경 두만강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룬 옥저인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p159 초원에 성터를 건설한 것은 유목민족이었던 흉노가 초원의 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지혜의 발로였다

p161 흉노의 성터에서 극동 지역의 옥저인들이 사용했던 토기들도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꽤 많은 만주와 한반도 사람이 그 지역으로 건너갔던 것 같다

p164 온돌은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관련성을 밝히는 명명백백한 발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p169 최근 다양한 고고학 발굴을 통해 중국 만리장성 일대의 유목문화와 그 사람들이 머나먼 한반도 남쪽까지 내려온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p176 적석목곽분은 4세기경 신라가 국력을 키우는 과정에 불현듯 등장해 약 200여년간 만들어지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p189 아틀란티스를 찾는 노력이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던 게, 지중해 탐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알려진 크레타섬의 미노아 문명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p194 기원전 1274년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벌인 세계 최초의 대륙간 전쟁인 카데시 전투 역시 전차문화가 전파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p207 여러 매체에서 언급되는 1947년에 버드는 북극이 아니라 남극을 비행하는 중이었다. 음모론자들은 단순한 팩트체크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여전히 지구공동설의 유력한 증거로 사용한다

p211 2000년 전부터 부여계의 사람들은 이곳에 살며 추운 겨울을 견디는 온돌을 만들고, 주변의 호전적인 말갈 세력을 막아내는 성터를 건설했다. 힘든 환경이었지만 세상 어디보다 비옥한 흑토지대에서 잡곡을 키우며 그들만의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p220 고대 귀족과 왕들은 자신들이 태양의 자손임을 내세우며 평민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특이한 머리 형태를 고집했다

p222 흉노의 영향을 받아 왕족들이 편두를 하는 나라들에는 또다른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금관이나 금동관을 쓴다는 점이다

p227 샤먼의 관도 그런 노력이 표현된 의식도구다. 샤먼의 관은 요즘말로 하면 신의 뜻을 받기 위한 일종의 와이파이 같은 것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요소로는 나무나 사슴뿐 이미지가 널리 사용되었다

p236 신화로만 전해지던 상웅국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가루다강의 은빛 성채라는 뜻의 궁륭은성이라 불리는 이 유적은 해발 4400미터의 산 정상에 약 10만 제곱미터 넓이에 120여기의 대형 건물을 세운, 글자 그대로 하늘에 지은 도시였다

p250 스키타이 문화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중국 만리장성 일대로 이어지는 넓은 지역의 사람들이 일군 문화를 통칭한다

p258 유목미들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할 때에 반드시 적의 무덤을 파괴하고 도굴했다. 전쟁에서 이겨도 정복해야 할 도시나 요새가 없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모이는 장소인 조상들의 무덤을 파괴했던 것이다

p262 약 200년이 지난 뒤에 고고학자들이 다시 마야의 유적을 발견했지만, 정작 그들이 남긴 글자를 해독할 수는 없었다. 스페인이 마야와 관련된 유적과 책들을 철저하게 파괴했기 대문이다. 마야 문명 당시에는 수천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야의 달력과 책들은 현재 고작 세권(또는 네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p266 구밀료프는 두번째 수용소 생활을 겪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어머니인 아흐마토바가 변절을 하고 스탈린과 당에 대한 찬양시를 쓴 덕분이었다. 이 일로 아흐마토바는 살아생전은 물론 죽어서까지도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p273 1990년이 되어서야 그는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크노로조프를 국민적 영웅으로 모시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직접 초청한 국빈급 방문이었다

p274 처음에는 복잡한 상형문자로 시작해 점차 변해갔을 것이라는 문자의 보편성이 마야의 문자에도 적용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발상 말이다

p284 만약 당시 서양인의 관심이 실크로드가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아마 고구려의 고분이 도굴되고 신라의 석굴암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p289 둔황 막고굴에는 워너 일행이 떼어낸 벽화의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서양인들이 실크로드 유물을 약탈한 대표적인 예로 전시되고 있다

p296 제국주의 고고학의 폐해는 그들이 성격 파탄자거나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을 암묵적으로 따라가는 연구 경향이 결국 수천만명을 고통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p309 가야에서 발견되는 판갑과 마구는 정복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p311 나라들이 서로 정복하여 통일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고 웬만한 나라 못지않은 거대한 고분도 만들었다

p314 흥산문화는 약 5500-5000년 전 지금의 네이멍구 츠펑시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신석기시대 문화다

p330 유목민이 만든 돌궐제국은 그들만의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한자와 함께 썼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p348 트로이의 황금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슐리만은 거의 무학에 가까웠지만 부도덕한 군수사업으로 부자가 된 뒤 고고학자로 전환해 자신의 신분을 극적으로 바꾼 사람이다

p352 문화를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참신하고 재미있어 보일 수 있지만 그 대상은 대부분 자신들이 침략했거나 국력이 떨어지는 나라들이다

p358 나는 고고학을 현재라는 렌즈를 끼워서 과거를 바라보는 카메라에 비유하곤 한다. 객관적인 과거를 지향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과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 땅의 모든 역사가 놀랍도록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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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 세계 문명을 단숨에 독파하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조 지무쇼 엮음, 최미숙 옮김, 진노 마사후미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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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

작가 : 조 지무쇼

출판사 : 다산초당

읽은날 : 2021/04/06 - 2021/04/20


세계사는 아닌것 같고 30개 도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인것 같다.

내용에 깊이는 없다. 가볍게 각 도시들의 역사를 터치하는 수준.

각 도시가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있으면 더 좋았을텐데 도시를 설명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챕터들이 엮이지가 않는다.

그냥 도시 역사 칼럼들을 묶어놓은듯한 느낌이다. 

역사 초보자들이 킬링타임용으로 읽으면 좋을듯한 책.



p16 기원전 16세기에 철제 무기를 다루는 히타이트인이 북서쪽에서 침략하여 바빌론 1왕조를 무너뜨렸다. 이후 동방에서 침입한 카시트인 등 여러 세력이 흥망성쇠를 되풀이했고, 기원전 8세기에 히타이트의 제철기술을 흡수한 아시리아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이집트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p31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예루살렘은 동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는 5-6세기에 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됐지만, 614년에 사산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으로 그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p38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세계에서는 발칸반도 남부의 미케네문명이 기원전 1600년부터 발전을 이루었다가 기원전 1200년경에 갑작스럽게 붕괴했다

p72 아우구스투스는 "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이어받아 대리석의 도시로 남긴다"라고 말했다

p75 이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대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293년에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눠 각각 정,부 황제를 두는 사두정치 체제를 시작했다

p77 로마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교황 니콜라오 5세는 비르고 수도를, 교황 식스토 4세는 시스토 다리를 재정비했다.

p79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이탈리아는 문화재 보호를 주목적으로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세 도시를 교전의 의도가 없다는 무방비도시로 선언했다. 이 덕분에 로마는 독일군에 점령당했지만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p110 티그리스강을 따라 펼쳐진 이라크 평원의 중앙에 위치한 바그다드는 고대 바빌로니아왕국의 수도 바빌론에서 북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p114 중세의 바그다드는 서양의 동로마 제국과 동양의 당나라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이 도시는 이른바 세계의 십자로라 불리며 수많은 상인과 물자가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했다.

p132 751년에는 아바스왕조와 당나라 군대가 충돌하는 탈라스전투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당나라의 제지법이 서역으로 전해졌고, 이후부터 19세기까지 사마르칸트는 이슬람문화권에서 대표적인 종이산지로 손꼽히게 되었다

p136 티무르의 또 다른 손자 울루그 벡은 왕위에 오른 뒤 천문대를 건설하여 15세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일 년의 길이를 측정했다

p152 카르타고는 439년에 게르만계 반달족에게 점령당해 반달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여러 차례 로마인가 전투를 치르며 전화에 휩싸였다. 6세기에는 동로마제국이 반달왕국을 무너뜨리고 카르타고를 지배했다.

p183 이반 3세는 동로마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인 조이 팔레올로기나를 아내로 맞이하고 동로마 황제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이런 이유로 이반 3세와 신하들은 모스크바를 고대 로마,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이은 제3의 로마로 칭했다

p187 황제의 대관식도 모스크바에서 거행되었다. 유럽풍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비해 모스크바는 러시아 전통의 분위기가 강했다.

p194 7세기에 이슬람교가 성립하기 전에는 서아시아 대부분이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천하였다. 같은 중동지역이어도 이란의 페르시아인은 아라비아반도의 아랍인과 언어나 문화가 크게 다르다

p201 라구나는 수심이 얕고 물길이 미로처럼 뒤얽혀서 외부의 침입이 어렵다. 그래서 5세기 무렵 이탈리아 본토가 훈족의 습격이나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혼란을 겪을 때 피난민이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p205 4차 십자군은 아드리아해의 동쪽에 위치한 자라를 먼저 공략한 후, 콘스탄티노플과 주변 섬들을 점령하여 라틴제국을 건국했다. 베네치아는 라틴제국을 발판 삼아 상업과 관련한 특권을 독접했다. 현재 산마르코대성당에 있는 네 마리의 청동말은 이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것이다

p213 일곱 개의 왕조가 각각 다른 시대에 델리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도시개발을 했기 때문에 델리는 다면적인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델리는 일곱 개의 도시 혹은 열다섯 개의 마을로도 불린다

p228 1715년부터 시내의 서부에 페테르고프궁전(여름궁전)을 건설했고, 1754년에는 겨울궁전을 완공했다

p236 21세기인 현재 모스크바는 초고층빌딩이 들어선 현대적인 상업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8-19세기의 풍경과 정취가 감도는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서 전세계 관광객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p240 갈리아에는 게르만계 세력이 뒤섞여 들어왔고, 프랑크인을 이끌던 클로비스가 481년에 메로빙거왕조 프랑크왕국을 건국했다

p259 암스테르담의 상공업도 규모가 확대되었는데, 그 계기는 15세기 후반 스페인에서 발생한 유대인 박해 때문이었다. 박해를 받은 유대인은 프로테스탄트가 많이 거주하고 비교적 종교에 관용적인 암스테르담으로 앞다퉈 이주했고, 정착 후에는 다이아몬드 가공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했다

p267 5세기, 본국의 내분으로 로마인이 철수하자 게르만계인 앵글로색슨족이 바다를 건너왔다.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 섬 중부와 남부를 지배하며 일곱 개의 왕국을 건설했다. 이부렵부터 론디니움은 런던으로 불리게 되었다

p342 아랍에미리트연합국은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지만, 푸자이라, 움알카이와인, 라스알카이마 등 일곱 개의 토후국으로 이루어진 연방제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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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 인류가 잃어버린 25개의 오솔길
하랄트 하르만 지음, 이수영 옮김, 강인욱 해제 / 돌베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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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작가 : 하랄트 하르만

출판사 : 돌배게

읽은날 : 2021/04/11 - 2021/04/19


흥미로우면서도 재미있는 책..

제목이 좀 이상하다..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라고 물으면서 답은 안 알려준다.

강 옆에서 발원한 4대 문명과 그 이후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문명의 역사와는 달리 세계 이곳저곳에 후기 구석기 문화때부터 다양한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실제 유적발굴과 함께 이야기한다. 

최신의 발굴 사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처음 읽는 내용들이 많았다. 

도나우 문명처럼 전혀 뜻밖의 유적지에 대한 소개는 호기심을 많이 자극했다.

내가 알고 있는 고대사가 얼마나 편협하고 얕은 지식인지 깨닫는다.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어 역사가 바뀌고 있는데 아직도 옛날에 배웠던 세계사만 알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유목민 문명에 대한 내용도 유물등으로 내용이 보강되니 훨씬 더 풍부한 역사가 된 것 같다.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 문화와 문명은 더 알려져야 하고 연구되어져야한다. 

좋은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

나에겐 올해의 책에 오를만하다. 



p18 유럽에는 현생 인류가 이주하기 전에 세 종의 초기 인류가 살았다. 초기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후기 네안데르탈인이었다

p21 쇠닝겐과 빌칭슬레벤에서 발굴된 유물은 진화의 역사를 지금까지보다 훨신 더 깊이 있는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이델베르크인은 분명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행동할 줄 알았다.

p37 기존의 연대기에서 볼 때 인류는 약 1만 5000년 전에 북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했다. 이 말은 매머드를 뒤쫓아 베링 해협을 지나 알래스카로 이동한 빙하기 사냥꾼들이 첫 이주자였다는 뜻이다

p39 대칭적인 양면을 가진 돌날에서 특이한 점은 그런 특수한 제작 기술이 북아메리카 남서부에서 선행 단계도 없이 느닷없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척 이례적일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p51 베를린 독일 고고학 연구소 오리엔트 분과 담당자로서 1995년부터 2014년 사망할 때까지 괴베클리테페 발굴 작업을 이끈 클라우스 슈미트는 이곳 신전이 여러 지역의 사냥꾼과 채집인 집단이 모이는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p55 인간은 검은목두루미의 짝짓기 행동을 자신들의 사회적 행동인 춤과 동일한 표현 형태로 보았다. 춤 모티프는 네발리초리에서 출토된 부조 그림에서 발견되는데, 인간의 몸에 새의 머리를 한 존재가 춤을 추는 모습이 형상화되었다

p58 괴베클리테페 신전은 조금은 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신전은 파괴되지 않았고, 기원전 제8천년기초 언젠가 그냥 버려진 채 묻혀버렸다. 그렇게 묻히게 된 것도 오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퇴적 작용의 결과가 아니었다.

p75 고유럽 구상은 1990년대에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많은 회의론자에 의해 비난을 받으며 거의 잊혔다. 그러나 더 새로워진 문명 연구 방법을 통해서 고유럽 구상은 다시 살아났고, 오늘날에는 관련 학계 토론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p78 사람들은 청동기 시대를 최초의 유럽 문명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남동유럽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시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기술적 완성도와 예술적 창의성, 사회적 복합성 측면에서 일반적인 견해와 상충되는 수준에 도달했다

p85 도나우 문명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즉 위계질서에 딸라 조직되지 않은 공동체에서도 사회와 경제, 기술적 수준이 고도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91 페르시아만 국가들을 소개한 안내서에는 딜문에 관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기원전 약 4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까지는 딜문 문명이 아라비아의 동쪽 해안을 따라 약250마일까지 지배했는데, 오늘날의 쿠웨이트에서 바레인과 내륙으로 60마일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p103 딜문의 경우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받아들여 문자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인더스 문자는 다른 문명의 기호 체계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인더스 문자의 기호 체계는 지역 고유의 창조물이다

p109 하투샤 폐허는 처음 발견되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히타이트 문명에 속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당시에는 히타이트인이 원래 누구였고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p118 고고학자들은 일찍이 하투사에 있던 많은 건물이 화재로 파괴되었다고 단언했고, 오랫동안 흑해 북쪽의 초원 지대에서 온 카스칸 유목민이 도시를 정복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카스칸 유목민이 하투샤에 침입했을 당시 그곳은 이미 버려진 도시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p123 그사이 수백 구의 미라가 더 발굴되었다. 발굴지는 타림 분지 주변으로 분포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타림 분지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발굴지는 실크로드의 북쪽 루트 구간에 있고, 남쪽에 있는 발굴지는 실크로드 남쪽 루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p143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선주민에게서 배웠다. 따라서 그리스어에서 배의 각 부분을 이르는 표현들 중 어느 하나도 셈어에서 파생된 것은 없다라는 사실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p147 펠라스고이인 문화의 전성기는 청동기 시대(기원전 제3천년기~기원전제2천년기)였다. 이들은 에게해의 다른 문명, 그러니까 키클라데스 제도 사람들과 크레타섬의 미노아인과 교역활동을 했다

p151 세상 사람들은 에번스 덕분에 오래전 크레타섬에서 번성한 미노아 문명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청동기 시대의 이 고도 문명도 그보다 더 오래된 도나우 문명에 접목해 있을 거라고 추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57 미노아 문명이 후세에 남긴 불가사의한 유산중에서 이 원반만이 비밀에 쌓여 있는 것은 아니다. 뛰어오르는 황소 한 마리와 세 명의 인물을 묘사한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도 유명하다

p162 고대 역사는 그리스-에트루리아-로마라는 삼각관계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감춰져 있던 중요한 상호 의존성이 비로소 드러난다

p174 공법이나 민법이나 로마법에 끼친 에트루리아의 영향은 광범위하다. 라틴어 법률 용어에 포함된 수많은 에트루리아 차용어가 그 점을 증명하며, 그러한 차용어는 현대 유럽의 법률 용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p176 문화의식이 높았던 에트루리아인 마이케나스는 그런 방식으로 불멸이 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시대나 지금이나 한 사회의 문화적 삶은 이상적인 생각을 가진 부유한 후원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후원 활동을 이르는 메세나라는 말이 바로 그의 이름 마이케나스에서 유래했다

p180 발굴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파지리크의 구릉 무덤을 열었을 때(첫 쿠르간은 1929년, 또 다른 쿠르간들은 1940년대와 1990년대), 그들 앞에는 모두를 놀라게 한 광경이 펼쳐졌다. "우선 재갈이 물린 채로 쌓여 있는 말들과 사람의 몸은 미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다음에는 얼음이 더해져 그들의 살과 몸에 새긴 문신, 개별적인 얼굴 모습까지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189 아마조네스 여전사와 스키타이 남성은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결합에서 태어난 후손이 사우로마타이인이었고, 그중 한 종족이 사르마트였다.

p210 테오티우아칸은 멕시코 고원에 건설된 첫 도시였고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발전했다.

p214 피라미드의 위치는 1년 중 두 날짜의 일몰 지점에 맞춰져 있다. 종교력에서 1년 주기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8월 12일과 4월 29일이다.

p217 테오티우아칸 사회에는 개별 왕의 숭배 대신 일반적인 조상 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죽은 자의 길을 따라 들어선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깃털 달린 뱀 신전과 제단이 있는 다른 건물들 모두 조상을 숭배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p226 모아이를 둘러싼 전설에는 영혼이 깃든 석상 스스로 똑바로 서서 정해진 장소로 움직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p237 악숨 왕국의 세력에 대한 소식은 3세기에 이미 아프리카 너머까지 멀리 퍼져나갔다. 그 때문에 페르시아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마니는 악숨을 페르시아, 로마, 중국과 함께 당시의 강대국으로 꼽았다고 한다

p249 카파도키아에는 적어도 36개의 지하도시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카이마클리, 네브세히르, 데린쿠유, 외즈코나크, 마지코이, 위르귀프의 지하 주거시설이 중요하다

p256 팔미라가 21세기 역사의 가장 어두운 장의 한 곳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015년 5월과 2017년 1월 사이 수많은 기념물이 이슬람 과격 단체인 IS에 의해 파괴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p259 제노비아의 뛰어난 지적 능력과 자신의 왕국에서 이뤄낸 문화적 성취는 그녀를 야심적이면서도 현명한 통치자로 만들었고, 후세의 통치자에게는 본보기로 삼고 싶은 인물이 되게 했다

p268 인도 힌두교와 인도 불교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토착민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캄보디아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p277 당시 백인 식민지 지배자들은 짐바브웨 폐허가 아프리카 흑인 문명의 명백한 표현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p288 최근에 밝혀진 연구결과에 따르면 에스파냐 정복자의 침입 시기에 아마존강 남쪽 지역의 주민 수는 10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 마을과 도시적 기반 시설을 갖춘 주거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사냥꾼과 채집꾼이 아니라 정착 생활을 한 농경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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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휴휴명당 - 도시인이 꼭 가봐야 할 기운 솟는 명당 22곳
조용헌 지음 / 불광출판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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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용헌의 휴휴명당

작가 : 조용헌

출판사 : 고유서가

읽은날 : 2021/03/29 - 2021/04/13


사찰기행이라는 책을 통해서 알게된 작가..

불교신자인줄 알았더니 이 책을 보니 도사과이신것 같다.

우리 나라 전역에서 풍수에 따라 기가 흐르는 곳을 찾아가 그 기에 대해서 알려주는 책..

도사님들은 이런 기를 느끼며 수행을 하시나보다.

나같은 범생이 그분들의 뜻을 어찌 알겠느냐만, 나에겐 풍광좋고 나를 편안하게 해줄만한 곳들을 많이 소개해줘서 좋았다. 

전염병이 좀 잦아들면 성당 순례를 하려고 했는데, 성당 순례에 더하여 명당순례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도사님들을 만날 생각은 없지만 좋은 풍광을 보며 호연지기를 키워보고 싶다. 



p20 봉정암이 산의 기운이라면 남해 보리암은 바다에서 나오는 수기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영지이다

p30 남해는 이러한 지리적 이점과, 물을 건너야 도달하는 종교적 이점, 그리고 금산이라는 영적 기운이 강한 산이 있는 영지였다

p36 한국의 4대 관음성지가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 여수 항일암, 그리고 남해의 보리암이다

p42 역사적으로 볼 때 대둔산은 인생의 막바지에 몰린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산이기도 하다

p46 계백 장군과 백제 결사대가 신라군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한 장소가 바로 대둔산이요, 수락계곡과 군지계곡이라고 추측된다

p56 원래 의미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살아 있는 대풍수는 현재 우리나라가 종주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p78 산 정상 부위 암반에 오목하게 나 있는 이런 구멍들은 사람이 인공적으로 판 것이다

p81 원래 의상대가 연주대로 바뀐 것은 효령대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p87 육지의 들판과 해안가의 뻘밭은 보유하면서, 중국대륙이라는 세계의 제국으로 통하는 해로를 아울러 지니고 있는 곳이 호남이다

p107 신라 축대는 돌과 돌의 배치가 불규칙해서 엉성한 것처럼 보인다. 작은 돌, 큰 돌을 삐뚤빼뚤 배치한 형태이다. 그 돌 틈 사이사이를 작은 돌로 메워 놓았다. 그러나 튼튼하다

p118 밤에 산속에 앉아서 앞산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본다는 것이 행복이다

p120 호수의 달은 바다의 달과 강물의 달과 다른 고요함이 있다

p148 설악산 봉정암은 한국 산신 신앙의 메카이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 자장 율사에 의해 창건된 봉정암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도처이다

p159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도 아미타불을 모시는 도량이라는 점에서 서산 부석사와 주존불이 같다

p176 해가 수평선에 거의 다다를 무렵, 바다 밑에서 하늘을 향해 붉은 노을을 반사시킨다. 이때 노을이 붉은 물감처럼 하늘의 구름들을 물들인다

p205 닭과 용을 합했다는 것은 때가 오면 힘을 쓴다는 의미이다

p230 우리나라에는 6대 악산이 있다. 설악산, 서울의 관악산, 원주의 치악산, 북한 개성의 송악산, 충북에 월악산, 그리고 전북 모악산이다

p270 머리를 많이 쓰는 정신노동자에게는 물이 좋지만, 내성적이고 너무 소극적인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

p304 유학에서 언급하지 않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죽은 부모에 대한 효, 명당에 산소를 쓰면 후손이 발복한다는 주술적 측면. 이 3가지가 모두 풍수에 담겨 있다

p316 수선결사에 참석했던 멤버들이 귀족적이었다고 한다면 백련결사는 좀 더 서민적이었다

p318 처음 유배를 왔을 때는 정신없이 몇 년간 술만 마셨던 다산이 마음을 추스리고 공부에 정진하던 곳이 다산초당이다

p322 조선 후기 다산에서 초의에 이르는 지적 전통은 대단한 전통입니다. 네 사람을 같이 묶어서 봐야만 당대 지성사의 흐름이 포착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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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 코드로 읽는 유럽 도시 - 돌·물·피·돈·불·발·꿈으로 풀어낸 독특한 시선의 인문 기행, 2021 세종도서 교양부문
윤혜준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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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7개 코드로 읽는 유럽도시

작가 : 윤혜준

출판사 : 아날로그(글담)

읽은날 : 2021/03/29 - 2021/04/07


7개 코드별로 7개도시를 선정해서 유럽도시를 설명했다.

7개 코드라고 하지만 약간은 억지같아 보인다. 돌이라는 코드에 걸린 도시들이 피에 걸려도 해석이 될 것 같다. 

유럽도시라는게 전쟁때문에 피도 흘리고, 돈도 많이 쓰고, 돌로 지은 건물이 많은데 이를 코드별로 분류하다 보니 생각에 차이가 있어서인것 같다. 

세계사라는 게 통사로 읽는 것도 재미있고, 국가별로 읽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런 테마를 주제로 읽는 것도 흥미롭다. 

학교때 공부했던 방식이라서 그런지 시간순으로 읽으면 공부하는 느낌도 있는데, 테마별로 역사를 읽으면 쉬는시간에 만화책 보는 느낌이다.

큰 줄기가 아니라 에피소드나 뒷이야기도 읽을 수 있어서 즐겁게 읽었다.



p18 섹스와 시는 서로 궁합이 잘 맞았다. 괴테는 남근의 신 프리아포스를 찬미하는 시도 한 수 바친다

p22 비너스를 비롯한 판테온의 신들은 4세기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모조리 쫓겨갔기 때문이다

p33 중북부 이탈리아의 진영 대결은 황제파와 교황파의 대립으로 구현됐다. 독일인 신성로마 제국 황제들은 로마의 교황과 사이가 대체로 좋지 않았다.

p37 시에나가 피렌체를 꺾은 '몬타페르티 전투'를 기념하여 그때부터 지금까지 성당 안에 성물처럼 보존해오고 있다

p44 종교개혁에서 헨리가 가장 관심을 둔 부분은 수도원 재산 몰수였다. 수도원이 갖고 있던 건물과 토지를 모두 빼앗아, 나도 좀 쓰고 나의 이혼과 종교개혁을 지지한 충신들에게도 나눠준다

p52 이 위압적인 요새와 방벽의 검은 돌들은 한 세기 반 동안 바르셀로나인들의 자존심과 자주적 민족의식을 조롱했다

p59 노트르담에 고트족 뺨치는 야만이 도래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진보를 추구하는 프랑스 혁명 세력은 노트르담 대성당을 유린하고 파괴했다

p66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철저한 차별과 배제과 맞물려 있었다

p69 민주주의라는 말로 번역된 데모크라티아를 말 그대로 옮기면 군중의 지배다. 고대 아테네의 데모크라티아는 토종 남성 군중의 지배였다

p74 나의 이 신성한 시가 내 적들인 늑대들을 누른다면 내가 어린 양처럼 잠자던 그곳으로 내가 세례 받은 그곳에 나는 시인으로 돌아가 월계관을 쓰리라

p77 라벤나에 묻힌 그의 시신은 700년이 넘도록 아직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마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산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와 함께 이 도시의 소중한 관광자원인 단테의 시신을 라벤나가 피렌체에 내어줄 리 없을 테니까

p79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돌 벽에 물감을 먹이는 프레스코보다 훨씬 더 수월할 뿐더러 다이내믹한 색채를 표현하기에도 용이하다.

p89 1580년대에 식스토 5세는 고대 로마의 세베루스 수로를 고쳐 청정지역 팔레스트리나에서 지하 파이프로 물을 끌어왔다. 그 덕에 27개 로마의 분수들에서 물이 풍성히 흘러나왔다

p96 사과주는 프랑크푸르트의 가난한 서민들이 마시던 술이었다. 있는 사람들이 즐기는 와인을 흠모하며 자기들도 향기로운 과실주를 먹어보려는 모방 심리가 사과주 문화를 제법 견고하게 민중들 사이에 심어놓았다.

p100 프라하가 중심도시인 보헤미아 지방은 늘 신성로마 제국의 일부였고, 신성로마 제국 황제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식하기 시작한 15세기부터 황제들은 프라하를 빈 다음으로, 아니 어떤 때는 빈보다 더 사랑했다

p107 1966년 11월 4일 대홍수의 공격 대상은 피렌체 도시 그 자체였다. 마침 공휴일이라 방심하고 있던 살아 있는 시민들과 죽은 조상들의 기록물과 걸작들을 아르노는 노렸다

p117 아테네를 무력으로 누르고 지중해 지역 문명세계의 지배자로 등극한 로마. 제국의 수도 및 기타 로마의 주요 도시들에도 아테네 극장을 모방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공연 내용은 너무나 달랐다. 로마인들은 무대에서 배우가 실제 피를 흘려야 열광했다. 어차피 죽을 죄수를 끌고 와 무대에서 죽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p124 시체 쓰레기장은 카르나리움이라고 불렸다. 수시로 시체들을 버려야 했기에 웅덩이를 흙으로 덮지도 않았다. 1890년대에 고대 로마 유적을 발굴한 이탈리아 고고학자 로돌포 란치아니는 이런 카르나리움을 무려 75개나 발견했다

p128 루이 16세도 폭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성과 진보의 정신에 따라 인민들을 구속하던 족쇄들을 풀어주려 노력했던 계몽군주였다

p130 이 혁명 광장에서 수행하는 혁명 과업은 주로 단두대를 갖다 놓고 사람 목을 치는 것이었다

p149 화염병과 소총을 들고 맞선 남녀노소 부다페스트 시민들을 향해 소련 탱크는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리고 무차별 포격했다. 민가와 상가, 학교와 병원, 교회와 고아원, 모든 건물이 표적이었다. 1956년 11월 4일, 하루 동안 탱크가 죽인 부다페스트 시민의 수는 1,569명이었다. 무너진 콘크리트와 철근 사이마다 시민들의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p156 브루넬레스키나 미켈란젤로의 예수를 직접 보면, 그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2,000년 전 예루살렘 인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있던 나사렛 예수의 모습이 그러했을 것이다

p163 이래저래 돈 쓸 데가 많은 귀족들은 상인들과 합작해서 무역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축적한 재산으로 공동체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소수의 귀족 가문들은 베네치아의 집단 통치계급으로서의 정통성을 지켜냈다

p165 외벽 파사드는 정작 실내에서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파사드에 온갖 공을 들인 콘타리니,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베네치아 도시를 위한 집을 지은 셈이다

p169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 수태고지는 프라도 미술관이건 어디건, 그 어떤 다른 공간으로도 옮길 수 없다. 벽째 뜯어가서 전시하려면 건물을 망가뜨려야 할 것이고, 벽화 자체가 훼손될 것이다. 이 프레스코 벽화는 오직 그 장소, 그 분위기에서만 볼 수 있는, 또 그렇게 봐야만 하는 작품이다

p178 유태인 베드로가 처형당한 바로 그 자리에다 그의 순교를 기념한다며 로마 신전을 연상시키는 원형 돔을 만들어놓은 르네상스 지식인, 브라만테는 그런 인물이었다

p187 몬테가 매기는 이자는 유태인 업자들처럼 빌려준 돈의 값이 아니라 기관을 운영하는 서비스 비용이라고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은 설명했다

p192 스페인군의 무지막지한 폭력을 생생히 기억하는 이 도시의 상인과 사업가들은 돈을 모조리 챙겨 대거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도시의 두뇌와 밑천이 일거에 빠져나가자 안트베르펜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p197 길드의 특권은 도시의 자치정부가 보장해주었고, 그 자치정부에는 길드 대표들이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탄탄한 정경유착은 길드들이 시장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해도 각 도시의 시장지배권을 유지하는 데는 적지 않게 기여했다

p198 길드 회원들은 도움이 필요할 경우 수당을 주고 다른 화가를 불렀다. 인물화 전문 화가가 배경에 강아지나 고양이를 넣어달라고 고객이 요청하면, 그 방면 전문 화가를 작업장으로 부르는 식이었다

p204 런던의 감옥에 갇힌 채무자들의 형편은 서비스 구매력에 따라 달랐을 뿐 아니라, 채무자 감옥 간에도 서비스에 차이가 있었다. 플리트 형무소에서는 돈만 적당히 지불하면, 감옥 밖의 지정한 거처에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p213 오늘날 프라하에서 만나볼 수 있는 단아한 성당, 수도원, 기타 공공건물의 상당수는 합스부르크 왕실과 가톨릭교회가 17세기 이후로 다시 세운 건물들이다. 후스주의자들이 옛 프라하를 사정없이 불태워버린 덕에 낡은 건물 철거비용은 별로 들지 않았다

p223 동상의 "참회하라"와 돈 조반니의 "싫다"가 반복되다가 마침내 동상은 "시간이 더는 없구나"라며 사내의 손을 놔주고 돌아선다. 바로 그 순간, 여기저기 바닥에서 불꽃이 솟아오른다. 진동하는 땅. 사내의 몸은 땅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지옥문이 열린 것이다. 밑에서 훨훨 타오르는 지옥 불이 돈 조반니를 산 채로삼키려 입을 딱 벌리고 기다린다

p226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1741년에 지었다. 그러니 이 극장에서 수십 년째 주로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점잖게 즐겨온 빈 상류사회가 오페라의 규범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돈 조반니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당연하다

p233 석탄재가 벽돌 제조 공정과정에 기여하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석탄재를 섞어 단단하고 색감 좋은 벽돌로 지은 런던의 유명 건물들은 블룸스버리 동네에 잘 보존되어 있다

p238 철도 덕에 파리에서 노르망디 해안이나 프랑스 남부 해변으로 휴가를 떠나는 바탕스가 생겨났다. 또한 기차를 타고 전국에서 파리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p239 수도원과 그리스도 교회를 혐오하는 혁명 세력은 그리스도 사랑을 실천하던 나병환자 요양원을 혁명의 이념을 거슬린 자들을 가둬두는 형무소로 바꿔놓았다

p243 작전의 주역인 영국 공군은 군사실만 골라내는 번거로움을 간편히 해결했다. 영국이 1945년부터 선택한 옵션은 한 동네씩 화염 폭탄을 떨구어 완전히 뭉개버리는 지역 폭격이었다

p251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를 맛보기에 제격인 곳은 이 요리의 탄생 설화와 관계 있는 피렌체 산로렌초 동네다. 산로렌초 중앙 시장 안에 있는 식당도 좋고, 근처 골목 여기저기에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비스테카를 제공하는 식당이 많이 있다

p257 바리 고틱, 즉 고딕 동네에서 만나는 고딕 양식은 14세기 카탈루냐 고딕이다.

p288 로마의 소나무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4악장,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들로, 고대 로마 군대가 아피아 가도를 행진해 시내로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한다

p304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보는 피렌체 풍경도 근사하지만, 산미니아토 알 몬테 앞의 자그마한 광장에서는 더 넓은 시야에 도시를 담을 수 있다

p310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도할 무렵 로마의 교황은 메디치 가문 출신 레오 10세였다. 하느님이 교황을 시켜주셨으니, 한번 잘 즐겨보세. 교황에 선출되자마자 한 말이다. 메디치 교황답게 레오 10세는 최고급 예술품을 수집하며 삶을 즐겼다

p315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 자리에 들어선 값비싼 5성급 호텔 자허. 이곳을 이용하는 부유한 여행객들 중 귀 먹은 작곡가의 예술 투혼을 떠올리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p323 경영에서 손을 떼고 수익금만 챙기는 편안한 위치에서, 그는 공산주의 꿈을 피력한 저서를 쓰고, 고급 와인을 즐기며, 사뭇 행복한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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