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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연대기 (아카데미판)
존 줄리어스 노리치 지음, 남길영 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5년 5월
평점 :
제목 : 교황연대
작가 : 존 줄리어스 노리치
출판사 : 바다출판사
읽은기간 : 2026/06/18 -2026/07/22
올해의 책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그만큼 흥미로운 주제였고, 책도 재미있었다.
궁금했지만 누구도 연구하지 않았던 주제..
자칫 잘못하면 종교인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주제..
이런 주제를 심도있게 연구해서 책으로 내준 저자에게 박수.. 그리고 감사합니다.
책을 통해서 교황님들이 사실 좋은 대접을 받고 존경을 받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힘든 자리를 왜 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지 신기하다.
그리고 중간중간 하기 싫어서 억지로 교황에 임명된 것 같은 교황들도 계셨다.
과거의 여러 잘못들이 있지만 그 잘못보다 더 크게 사회적 약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신 교황들을 생각하게 된다.
신의 축복을 받기를. 그리고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와 인류를 위해 헌신해주시길 기원합니다.
p19 성 대 레오 교황은 흉노족과 고트족으로부터 로마를 지켰고,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웠고,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후계자들은 주로 즉위하는 황제들마다 맞서서 패권 다툼을 벌였다.
p71 테오도리쿠스가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는 라벤나 근교 북쪽 지역에 특별하고 웅장한 묘를 건축했다. 묘의 반은 그리스로마 양식을, 또 반은 이방인의 건축술 방식을 적용했다. 당대 두 개의 문명을 주름 잡던 거물이었음을 완벽히 상징하는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게르만의 그 어떤 통치자도 폐허가 된 서로마제국 위에 왕권을 세웠던 테오도리쿠스만큼 정치력이나 정책적 비전을 가졌던 이는 없었다. 526년 8월 30일 그의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샤를마뉴 대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초기 중세에 있어서 가장 위대했던 통치자를 한 명 잃게 된 것이었다.
p110 전체적으로 쇠락하는 가운데 위대한 그렉고리오의 존재는 어둠을 밝히는 횃불처럼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존재는 고결함과 질서, 더 나은 삶, 그릭 행복한 세상을 상징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자신의 영웅인 베네딕토 성인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등 내면만큼은 겸손한 수도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권력에 물들지 않은 사람으로이런 겸손한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은 듯하다.
p123 레오 교황은 황제의 왕관을 자신이 개인적으로 내리는 선물로 설정을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이 만들어 세운 황제에게 그 자신이 스스로 절대적 우월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p141 돌아오는 길에 인노첸시오 8세는 콜로세움 쪽 길로 둘러왔다. 쭉 뻗어있는 도로에는 여교황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자리가 교황 조안이 출산을 한 곳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 자리만큼은 교황들이 말을 타고 지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래서 플로렌스의 대주교가 나를 질책했다.
p167 955년 12월 교황 아가피토 2세가 선종하자, 옥타비안은 요한으로 이름을 바꾸고 적절한 절차를 거쳐 요한 12세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재앙을 초래하는 선택이었다. 그 나이 어린 교황은 종교적인 사안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야말로 교황청을 최악의 창부정치로 얼룩지게 만든 인물이었다.
p204 1054년 여름 콘스탄티노플에서 있었언 일련의 사건들은 동방과 서방 교회의 지속적인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양쪽 교회의 분열은 피할 수 없었다 해도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만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p215 황제는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교황애 대한 복종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관계는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p225 11세기의 위대한 세 명의 교황-레오 9세, 그레고리오 7세, 우르바노 2세- 가운데 그레고리오 7세는 한때 가장 매력 없는 교황인 반면 가장 주목을 끄는 교황이기도 했다.
p235 그레고리오 7세는 전쟁에서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과거에 영웅적인 교황들은 침략자들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이었다. 레오 1세는 훈족의 아틸라 왕으로부터, 그리고 같은 이름의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정복자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로마를 구해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여러모로 그 둘보다 더 훌륭했음엗 결국 로마를 파괴로 몰아넣고 말았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드 몰레이가 죽기 직전 클레멘스 5세와 필리프 4세 두 사람을 그해가 가기 전에 하느님의 심판대 앞으로 불러 세우겠노라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호언은 빗나가지 않았다. 클레멘스 5세는 그로부터 약 한 달 여 만에 선종했고, 필리프 4세는 11월 말 사냥 중 일어난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알렉산드로 3세는 결국 황제에게서 적법한 교황으로서뿐 아니라 로마시에 대한 교황의 모든 세속적인 권한도 함께 인정받은 것이었는데, 사실, 그 권한은 황제 자신이 대관식에서 거만하게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기도 하다.
p323 베네치아 조약은 알렉산데르 3세에게는 교황으로서 정점이자 절경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18년의 분립 기간에 10번이나 추방당하며 갖은 고통과 모욕을 참아낸 끝에, 그 어느 황제 못지않은 대단한 인물로 끊임없이 적대감을 드러냈던 프리드리히 1세가 드디어 그의 xxx
p451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해적 행위, 살인, 강간, 남색 행위 그리고 근친상간까지 저질렀는데 단지 기소만 되다니, 가장 가증스럽고 추악한 스캔들이 은폐된 것이다.
p485 그 시대에 가장 재능 있는 교황 중 한 사람이었던 비오 2세에게는 실로 아쉬움 가득한 결말이었다. 비록 그는 친족등용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교황청을 자신의 고향 시에나 출신의 사람들로 채웠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과 지적 재능, 행정가로서의 역량, 예술에 대한 안목 오랜 세월의 외교적 경험 등은 당대에는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p496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 시점에서 만약 추기경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하지 ㅇ낳았더라면, 온 세상이 더 좋아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은 언제나 옳은 선택을 통해 좋은 교황을 선출했을 것이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도 지켜졌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부연했다.
p544 율리오 2세는 1513년 2월 21일 고열 증세로 선종했는데 수년간 앓아오던 매독의 결과로 보인다. 복장이나 교황명을 제외하고는 그에게서 사제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의 재임기간은 정치와 전쟁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율리오 2세는, 헨리 8세가 그의 형 아서의 부인이었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할 수 있도록 면책특권을 부여한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그의 교회 활동은 일상사에만 국한되었다.
p591 트렌트 공의회는 서방의 전 그리스도교 세계가 그토록 바라고 염원하던 하나 된 그리스도교의 세게적인 공의회는 결코 되지 못했고, 필요하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다시 한 번 유럽을 카톨릭화하겠다는 목적을 염두에 둔, 단지 반종교개혁의 자조적인 공의회였을 뿐이다. 그러니 그 결과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었다.
p612 식스토 5세의 재임기간은 5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로마의 반종교개혁운동을 통해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의 극치를 선사해준 교황이었다. 로마시를 그토록 아름답게 만든 식스토 5세는 그에 걸맞은 치사를 받아 마땅하겠으나, 오만함과 성마른 성품 탓에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p623 바오로 5세 교황과 교황청은 이제는 외면할 수 없는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성구집행금지령이 더 이상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황군이 갖고 있던 가장 두려운 무기였던 성무집행금지령-중세 시대에는 왕과 황제들의 무릎을 꿇게 만들었으나-이 이제 그 힘을 잃고 말았다.
p705 비오 6세는 진정한 순교자였다. 역사상 그처럼 불필요한 고통을 많이 겪은 교황은 없었다. 그리고 고난을 견뎌낸 불굴의 용기는 변명의 여지가 많았던 그의 평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가 혁명의 비정한 분노로부터 프랑스 카톨릭교회를 구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p773 1903년 4월 19일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모든 수도자가 총검을 꽂은 총을 지닌 기마병 2대대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다. 1904년 말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1만 개가 넘는 카톨릭 학교가 문을 닫았다. 수천 명에 달하는 사제와 수도자, 수녀가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떠났고 나폴레옹과 비오 7세가 1801년에 맺었던 정교협약이 1905년 12월에공식적으로 폐지되며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p774 레오 13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1891년 5월에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일 것이다. 이 회칙은 사실 부끄럽지만 자본과 사회주의자 선언에 대한 교황의 뒤늦은 대답이었고, 훗날 교황 요한 23세에게서 카톨릭의 사회적 교리에 있어 마그나카르타라는 평가를 받았다.
p779 신학 분야에서 비오 10세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1908년 메시나에 대지진이 강타하자 그는 이탈리아 정부가 손을 까딱하기 훨씬전부터 집 잃은 피난민들을 바티칸에 가득 불러들였다.
p795 파첼리와 비오 11세는 나치에 결코 혹하지 않았으며 나치가 폭력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훨씬 더 큰 적으로 판단하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데 국가 사회주의가 굳센 요새 역할을 하리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 결과 1933년 7월 20일 로마에서는 교황 비오 11세를 대신한 파첼리와 아돌프 히틀러를 대신한 독일제국 부수상 프란츠 폰 파펜이 독일 정교협약에 서명했다.
p802 임기 초반 비오 11세는 공산주의를 혐오했기 때문에-그가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와 직접 대면했다는 사실을 절대 인지 말아야 한다- 파시스트당에 더 관대했고 처음에는 나치당에도 유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굽히지 않고 두 정권을 공개적으로 적대시해 자유 진영의 존경과 감탄을 얻었다.
p824 그의 후임자가 내린 명령에 따라 비오 12세를 시성하는 절차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니 안타깝다. 그저 관습에 따라 모든 교황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시성이 되고, 앞으로도 그런 관행이 계속된다면, 진정한 성인들을 우롱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