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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앙드레 모루아 지음, 신용석 옮김 / 김영사 / 2016년 6월
평점 :
제목 : 프랑스사
작가 : 앙드레 모루아
출판사 : 김영사
읽은기간 : 2026/01/11 -2026/02/16
미스테리한 것은 이 책을 내가 왜 샀을까다..
가격이 싸지도 않고, 책도 엄청 두껍고, 좋아하는 나라의 주제도 아닌데 덥석 이 책을 주문했다.
출판사가 김영사여서 산걸까? 어쨋든 책장에 장소만 차지하고 있던 책을 결국 꺼내 읽었다.
남의 나라 통사를 이렇게 열심히 읽다니... 나를 칭찬한다.
읽고난 소감..
어느 나라나 자기나라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나구나..
국뽕이 없는 국사책은 없다.. 그리고 자랑하고 싶은 건 열심히 자랑해야 한다 ^^
흥미로운 건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제2차 세계대전때까지 프랑스 정치는 제대로 굴러간 적이 거의 없어보이는데도 세계 각지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과학, 미술, 인문, 군사 영역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유지했는가다. 프랑스는 신기한 나라다.
최근에 주경철 선생님이 프랑스사를 냈는데 외국인이 보는 프랑스 통사는 어떤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그 책도 엄청 두껍다. 벽돌책에 다시 도전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p7 국가가 형성되고 백년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프랑스 국민은 정당한 일이라고 믿으면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이든 감수했다라고 국가가 형성된 후 프랑스 국민정신을 정의한다.
p21 세계에서 프랑스의 페리고르 지방을 흐르는 베제르 강 유역만큼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곳도 드물다.
p22 프랑스 인종이란 것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 현재 프랑스를 구성하는 지역은 유럽대륙의 서쪽 끝이라 침략을 마무리하거나 침략자가 정착하는 곳이다.
p23 고대 그리스 학자들은 북쪽 지방에 사는 야만족, 즉 알프스 산 너머에 있는 키가 크고 백색 피부에 금발인 종족을 통칭해 켈트인이라고 불렀다.
p24 프랑스인의 혈관에는 리구리아인과 이베리아인의 혈액에 켈트인, 로마인을 비롯한 기타 수많은 인종의 혈액이 혼합되어 흐르고 있다.
p28 골족 사회는 미개했지만 야만 상태는 아니었다. 총명하고 언어의 심미 감각이 예민하며 로마인의 생활에 호기심이 많던 골족은 재주 있는 장인과 용감한 군인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p30 카이사르는 로마에서도 감히 시행하지 않던 방법으로 골족을 가혹하게 다뤘다. 그는 부족 대표들을 체포해 재물을 몰수했고 수천명의 포로를 무자비하게 팔아치웠다.
p31 독립전쟁은 1,2 년간 계속되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참혹하게 진압했다. 100만 명이 넘는 포로가 형을 받거나 팔려 나갔고 수많은 사람이 오른팔을 잘렸다.
p37 근동에서 태베사막으로 간 사람들은 현세의 유혹을 피하고 홀로 준엄한 금욕생활에 몰입하기를 희망한 것이다. 골 지방에서는 수도원이 현세를 떠나 공동으로 영적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을 모았다.
p38 학문하는 수도사는 공부에 전력하고 일반 수도사는 여행하며 주서를 교환한 덕분에 로마제국은 멸망했어도 그리스도교는 생기를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p43 476년 기어코 서로마제국은 멸망했고 동로마 황제가 서유럽의 권위를 억지로 유지하려 했다. 황제는 서구의 권력을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크에게 위임했다. 일설에 따르면 로마 주교에게 위임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훗날 교황이 세습적 권리를 주장하는 법적 근거로 작용했다
p44 프랑크족의 수장 클로비스가 골 지방에 거주하던 모든 게르만족을 제압했고 이 지역에서 점차 카톨릭교회의 세력이 강해졌다.
p47 메로빙거 왕조는 발루아 왕조보다 긴 300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p55 페팽은 메로빙거 왕조 최후의 왕인 힐페리히 3세를 수도원에 유폐하고 그의 아내 베르트라다와 함게 성 보니파스 주관 아래 대관식을 치렀다. 이는 두 사람 사이에 탄생할 아들이 이중을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현명한 책략이었다.
p87 그는 신앙심이 깊었으나 교회의 권리 주장에 맞서 국가의 권한을 유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교황 인토켄티우스 3세는 국왕들을 자기 신하처럼 여겼지만 필리프 2세는 거기에 승복하지 않았다.
p94 1270년에 사망한 루이 9세는 자신이 조상에게 상속받은 권위보다 훨씬 더 위대한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이때부터 카페 왕조의 왕은 세습군주로 인정받았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최고회의를 거치지 않고 무엇이든 집행할 수 있는 신의 대표자가 되었다.
p103 필리프 4세는 별세 후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댓 왜 그는 증오를 받았을까? 그는 왕의 절대권력을 강화했고 봉건권력과 교회권력에 맞섰으며 개인의 이익을 공중의 이익으로 전환했다. 이 모든 일은 그 자체로는 유용했지만 가의 신하인 법률가들이 부당한 수단을 행사하지 않고는 수행하기 어려웠다. 만약 루이 9세였다면 그처럼 고통스러운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도 같은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p113 당대의 대시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는 알리에노르의 딸 마리 백작부인이 살던 상파뉴 궁정에 머물렀는데, 백작부인은 그에게 사랑하는 귀부인에게 몸을 바치는 기사를 주제로 한 란슬롯 이야기를 기술하게 했다.
p125 이것은 두 나라의 왕관을 한 몸에 차지하려는 영국 왕의 욕심이 아니었다면 백년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한 비교적 정확한 견해다.
p132 샤를 5세는 허약하고 체구가 작았으나 경건하고 박식한 위대한 국왕이었다. 그는 냉정해 보였는데 이는 정력이 부족한 사람이 흔히 그렇듯 절제 때문이었다.
p143 영국인과 부르고뉴파의 눈에 잔은 마녀이자 이단자였다. 그녀의 몸에 악마가 붙어 있지 않고서야 어찌 무력도 없이 짧은 기간에 이런 승리를 거둘 수 있겠는가?
p144 선입관 없는 재판관이라면 법정 심문에서 나온 그녀의 존경할 만한 답변을 통해 잔 다르크의 숭고한 신념가 애국심을 확인했을 것이다. 교육도 받지 않은 어린 처녀가 고귀하고 순결한 답변을 하자 그 음흉한 법정도 여러 번 당혹스러워했다.
p175 이 회복 능력은 비옥한 토지와 근면한 농민을 비롯해 자신의 운명에 대한 본능적인 자신감과 프랑스인은 프랑스인일 수밖에 없다는 뿌리 깊은 신념에서 우러난 것이다
p181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도교적 도덕이 쇠퇴하고 있었다. 성생활 개방이 음탕할 정도였고 살인을 해도 살인자가 예술가인 경우 관대하게 처리했다. 피렌체의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경받을 만한 젊은이란 사람을 많이 살해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p184 문예부흥의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는 그 문화가 일부 특권계층의 수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반면 중세기 문명은 민중적이었다. 음유시인과 방랑 연예인은 거리의 광장에서 노래를 불렀고 대성당에서는 신비극을 상연했다. 성당도 도시 전체의 협력을 얻어 무명의 건축가가 건립했다.
p198 독일과 플랑드르의 자본이 승리해 카를 5세가 당선되었고 프랑스는 치명적 위기를 맞았다. 프랑스는 플랑드르 지방의 출입구에 독일군이 진주하는 것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플랑스와 게르만인 사이에는 최근의 전쟁이 무색할 만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p208 현명한 사람들은 이를 승인했다. 드디어 프랑스는 정복자, 침략자, 점령자 등 원한의 대상만 될 뿐 아무런 이득도 없던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프랑스 국토의 안전보장에 기여할 메츠, 투르, 베르됭을 수비하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p225 스페인 식민지에서 유입된 막대한 금은으로 인해 물가가 급격히 상승했던 것이다. 물가 상승기에는 국가 전체적으로는 번영하지만 고정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농지를 임대하는 지주는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기 때문에 무산계급과 귀족계급 양측에서 이중의 불만이 생긴다. 경제는 정신에 영향을 주고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쉽게 이단을 받아들인다
p256 토지 경작과 목축은 프랑스의 두 개의 젖줄이며 이느 ㄴ페루의 금광 및 보물과도 같다
p261 그 후 10세대에 걸쳐 모든 사람이 이단을 시인했고 앙리 4세는 샤를마뉴 황제, 잔 다르크, 성 루이 왕과 함께 프랑스의 영웅 반열에 올라 있다. 그는 프랑스의 신비적인 면은 물론 용기, 양식, 즐거움 같은 위대성도 대표한다
p270 상류 부르주아계급은 모피로 몸을 휘감고 백합꽃 문장이 붙은 모든 좌석에 홍색 또는흑색의 관복을 펼쳤다. 과거에는 귀족이 되려면 전쟁이란 수단을 택했는데 이제 부르주아 계급은 행정가 사법 분야를 이용해 귀족이 되었다. 이들 부르주아계급은 그들 특유의 질서와 재산을 모으는 열의, 해박한 지식, 때로 카톨릭동맹에 도전한 고등법원장 아를리의 경우처럼 용기를 귀족사회에 도입했다.
p283 당연한 일이지만 성직자는 공무를 집행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더러운 짓을 하지 않습니다. 독신생활을 하는 성직자들은 세상에 영혼 외에 남길 것이 없으므로 지상에서 국왕과 조국을 위한 봉사에 전념한 뒤 멀리 천국에서 영예롭고 완전한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p287 사형을 고집한 것은 국왕이지 추기경이 아니었다. 가능하면 사면하려 하는 리슐리외에게 국왕은 아래의 칙서를 보냈다. “사건과 관련된 제후들은 주인의 은혜를 망각한 자들이다. 짐은 경에게 자비심으로 그들을 동정하거나 관대하게 처리하지 않도록 명령한다”
p289 리슐리외는 늘 자신이 기존 계획을 따를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에게 원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단지 방법만 있었을 뿐이다. “정치는 미리 계획한 의사보다 사태의 진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움직인다” 이것은 거의 모든 행동가가 말하는 최고의 예지다.
p296 그는 실제로 프랑스 국민에게 사고에서는 명철한 논리를, 실천에서는 확고한 신념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프랑스 국민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동시에 성급하고 우둔해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p300 독일은 자주적인 군비와 외교정책을 보유한 350개의 독립연방국가로 분할되었다. 게르만이 자유를 회복하는 동시에 프랑스의 안전도 보장된 것이다. 그토록 많은 연방국가가 결속해 프랑스에 도전할 수도 없고 설령 도전할지라도 프랑스가 그중에서 동맹국을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제국의회는 잔존했으나 만장일치 채택제라 이는 앞으로 아무것도 결의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307 시청에서 마자랭을 당대에 제일 더러운 인물이라고 욕설을 퍼붓던 이자생활자조합은 추기경 겸 재상인 마자랭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실각했을 때 가장 먼저 지독한 욕설을 퍼부은 사람들이 그가 다시 득세하자 제일 빨리 머리를 숙였다.
p324 스페인의 왕위 계승 전쟁은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를 고난으로 빠드리면서 1713년까지 이어졌다.
p336 1685년 10월 17일 국왕은 낭트 칙령을 취소하고 신교도의 공개예배를 금지했다. 여기에는 거국적인 찬동이 있었으나 만장일치란 언제나 강압의 상징이다. 개혁파 중에서 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영국, 네델란드, 독일 그리고 아메리카로 탈출해 그곳에서 사실상 존경을 받은 위그노파 공동체를 건설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유능한 육군, 해군, 법관, 상공업자를 약 40만 명이나 잃었다. 이것은 루이 14세 치세에 가장 중대한 실정이었다.
p362 군의 장군과 애첩들도 모두 전쟁을 희망했고 모두가 국왕에게 영국이 강대해져 프랑스에 위험한 존재가 되었으니 자유주의적인 프로이센 왕을 도와 오스트리아를 격파해야 영국이 손해를 본다고 진언했다. 드디어 국왕이 양보했다. 이 전쟁은 범죄 이상으로 커다란 과오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영국에 재해권을 프로이센에 독일 지배권을 상납했다
p372 고등법원은 국가에 해독을 끼쳤고 과세를 방해했으며 편견에 치우쳐 고문을 자행했다. 파리 고등법원은 전국의 고등법원을 통합해 국왕의 명령에 반대했다. 볼테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처럼 극심한 무정부 상태가 지속될수는 없다. 왕정이 권위를 회복하든 고등법원이 이기든 결론이 나야 한다”
p378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고난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면 이러하다. 옛적에 한 자연인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인위적인 인간을 끌어들였더니 그때부터 동굴 안에 내란이 발생해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그 인위적인 인간, 즉 전통과 미신을 고수하는 인간을 제거하면 동굴 안에 평화를 재건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p385 프랑스는 사교적 회합이 역사적 전환기로 작용한 유일한 국가다. 궁정에서 남녀의 정사가 성행한 이후부터 프랑스인은 여성과의 교제와 대화를 즐겼다. 18세기에는 몇 개의 저택이 사상의 증권거래소처럼 유명해졌고 철학가들은 그곳에서 국내의 남녀 유지를 비롯해 외국의 저명인사들을 만났다
p397 그러나 국가의 채무가 10억 리브르에 달했고 당시 이것은 너무 막대한 금액이었다. 미슐레는 이렇게 말했다. “아메리카는 자유를 얻고 스페인은 미시시피와 플로리다를 획득했는데 프랑스는 영예와 파산을 짊어졌다”
p399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판의 희생자가 되었고 간소한 생활을 좋아하는 그녀가 모든 국민과 함께 즐기려고 오페라와 무도회까지 참석하는 미덕을 발휘해도 그것은 오히려 비난의 소재가 되고 말았다. 다른 왕비였다면 이런 행동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을 테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반대파는 이것을 죄악으로 내몰았다.
p409 진보적인 소수파는 어떤 혁명이든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이 시작한 혁명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절제력을 갖춘 워싱턴의 사례는 역사상 대단히 희귀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p426 공격자 측의 손해가 상당한 것을 보면 영웅이 많았고 점령이 끝난 후 사령관과 수비병이 무저항 상태에 있었는데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을 보면 몰상식한 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p439 각 연대는 군대와 국가의 통솔관게를 재건하기 위해 파리의 샹 드마르 연병장에서 거행할 바스티유 점령 혁명기념일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했다. 당시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연방이란 개념이 유행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전국에서 대표를 보내겠다고 약속했고 파리에서는 조국의 제단 앞에 잔디 계단을 구축하기 위해 궁정신하, 수도사, 석공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p447 당통은 사랑할 만한 것은 모조리 사랑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자기 자신만 사랑했다. 당통은 투쟁을 선호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아첨을 선호했다.
p472 당시에는 밀고가 시민의 의무였고 단두대는 미덕의 제단이었다. 혁명재판소는 14개월 동안 쉼 없이 열렸고 핏기 없는 입술에 이마가 좁은 냉혈적인 검사 앙투안 캉탱 푸키에-탕빌의 말 한마디면 피를 뿜으며 목이 잘렸다.
p484 부유해진 농민과 이득을 얻은 자코뱅 당원들은 정부가 현 상태를 유지하길 기대했다. 그들은 혁명을 끝내고 싶어 하는 동시에 혁명의 이득만큼은 보장받기를 바란 것이다. 즉, 그들은 기득권 포기와 반혁명의 보복은 원치 않았다.
p500 공화제란 국민이 열중하는 하나의 공상에 불과하다. 이것도 다른 공상들처럼 스스로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들은 허영심을 만족시켜줄 명예를 바랄 뿐 자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p519 그는 도처에서 질시와 반감의 먹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는 누구보다 이런 사정을 잘 알았고 자신이 구축한 체제가 허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여러 왕국을 분여한 자기 가족의 자격이 불충분하다는 것도 분명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끌고 갔다.
p536 사자가 쇠사슬에 묶였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은 이때까지 향을 태우며 숭상하던 사람을 저주하는 데 필요한 욕설을 찾느라 분주했다. 사람들은 외국인을 영접하러 나가면서 마치 코블렌츠에서 돌아온 망명자처럼 행세했다. 백기로 손수건, 속옷을 흔들었고 청홍색기는 발로 짓밟아버렸다. 더욱이 가장 열과적으로 날뛴 사람들은 이때까지 보나파르트를 가장 내세우던 이들이었다.
p541 백색테러는 프랑스를 바르게 통치하려면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하지만 앙리 4세의 전통을 답습하려던 루이 18세는 살롱의 초과격파 여성을 다루기엔 너무 연로했고 더구나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p566 루이 18세는 구체제의 온건파로 18세기의 자유사상가였고 샤를 10세는 철저한 망명자로 경건한 고집쟁이였다.
p594 군사적 영예가 없던 7월 왕정은 그대로 무너졌다. 대혁명과 제정시대의 영예에 젖어 있는 프랑스는 타국의 비위를 맞출 정도로 평화주의를 추종한 왕정을 너절한 정권으로 여긴 것이다.
p601 카톨릭교도로 와정주의자였던 발자크는 인간의 열정을 그대로 방치하면 얼마나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가를 묘사해 도덕적, 정치적 전통의 필요성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p605 중용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에게만 유리했으면 노동게급은 아사 직전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1789년보다 더 비참했던 노동계급은 더욱 단결했고 자신들의 실력을 인식하고 있어서 혁명을 조성하는 데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p625 1830년에는 부르주아계급이 실세였고 1848년에는 민중이, 1851년에는 군대가 실세였다. 이것을 믿고 승리에 도취한 도당들은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
p631 그의 정부는 값싼 식량과 대규모 토목사업, 축전, 휴가를 베풀었다. 그는 진심으로 선량하고 유능한 독재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에 선량한 독재자란 없는 법이다
p626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계급의 사업가와 농민이 1848년 6월 이후 사회주의와 별안간 강력하게 성장한 노동자에게 공포를 느낀 나머지 무력을 선호하고 제정에 찬성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불만과 실망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포기했다.
p649 1866년 프로이센은 몇 주 만에 오스트리아군에 대승함으로써 처음으로 근대전의 과학적, 공학적, 우월성을 확인했는데 동원의 신속성, 무기의 우월성, 철도의 조직적 이용 등이 프로이센에 전격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p660 황제의 사상은 때로 광채와 관용에 빛났고 또 때로는 무정견과 환상에 사로잡혀 유럽을 프로이센에 넘겨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p665 표면적으로는 근엄한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영국인은 황색 표지의 프랑스 소설을 숨어서 탐독했다. 영국인은 바람을 피우려 파리로 건너왔고 쾌락을 즐기면서도 그 쾌락 때문에 파리를 비난했다.
p668 제정 몰락은 정신적 퇴폐를 낳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다. 1815년의 패전은 세기의 청년과 도피문학을 낳았으나 1871년의 패전은 반대로 선량하 사람들에게 활기를 주고 그들을 현실 활동으로 이끌었다.
p683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는 리슣리외를 이겼고 베스트팔렌 조약은 폐기되었다.
p709 수개월 후 44세의 강베타는 사고와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창조하고 구제하고 강화한 공화국으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은 셈이었다. 정치가로서 그의 민첩하고 현명한 자질은 언제나 정세가 혼란에 빠질 위기에서나 그 가치를 발휘하는 난국 돌파형이었다. 사람들은 모든 죄악 중에서도 우수한 재능이란 것을 가장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p717 언론인 카롤린 세베린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느 ㄴ카이사르처럼 출발해 카틸리나처럼 살다가 로미오처럼 죽었다”
p723 그의 무고함을 확신한 가족이 계속 조사해 각서의 필자로 페르낭 에스테라지를 고발했다. 정보부의 조르주 피카르 대령도 드레퓌스가 무지라는 확증을 잡고 상관에게 진상을 발표하도록 진언했다. 하지만 완고, 오만, 편견이 정의뿐 아니라 신중성을 제압했다.
p734 대혁명 이래 프랑스는 정치적 균형 상태와 확고한 합법성을 가진 정치체제를 꾸준히 추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국내는 극도로 분열되어 있지만 1871년 이후에는 독일에 대한 불신과 복수심 그리고 영예를 회복할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려는 요망에 모든 당파가 집결했다.
p741 프랑스에서는 문학자와 과학자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존경을 받았다. 연극 초연, 서적 출판, 아카데미 프랑세즈 선거, 때론 문법 토론까지도 대단한 사회 사건으로 취급했다. 이러한 사회적 관심이 흥미 본위의 화제에 불과하거나 천박한 호기심일 때도 있었으나 정신 분야의 노력에 대한 존경은 프랑스의 항국적이고 고귀한 특징 중 하나로 남았다
p743 베르그송은 철학가 특히 예술가에게 언어라는 부호를 떼어내고 언어적 인식 밑에 깔려 있는 실체를 추구하라고 강조했다.
p748 마른의 승리는 프랑스가 전 역사를 통해 과시해온 탁월한 반격전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독일의 전격적인 승리를 불가능하게 했으나 프랑스의 국토를 해방하지는 못했다.
p754 개전 초기 러시아가 독일의 60개 사단을 동부전선으로 유도하지 않았다면 마른의 승리는 없었을 테고, 영국의 육해군이 아니었으면 전쟁을 4년이나 지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의 사단이 없었다면 승리는 했을지 몰라도 오랫동안 사투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미국의 생산 능력 역시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p759 정권은 1914년 이전처럼 급진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신교도이며 급진파인 가스통 두메르그가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루르 지방에서 철병했고 소득세 창설자인 카요가 재무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금전의 장벽에 부딪쳐 쓰러지고 말았다.
p761 그는 국제연맹을 위해 온갖 수완과 열변을 토했으나 이 제네바 기구는 미국의 불참과 영국의 무관심으로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p765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최종 목적은 프랑스 파멸이고 그 수단은 영국과의 친선이라고 선언했다. 프랑스의 통치게급은 확실한 동맹국이 없었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1933년 무솔리니가 로카르노 조약에서 폴란드를 제외한 새로운 4대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조약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불안을 느낀 폴란드는 프랑스에서 이탈했다.
p767 히틀러는 영국 못지않게 강렬한 프랑스의 평화에 대한 욕구를 철저히 이용했다. 독일은 어떠한 정복도 원치 않는다고 누차에 걸쳐 언명했다.
p775 27일 벨기에 국왕이 항복했고 28일에는 고트 장군이 됭케르크에서 영국군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베이강 장군은 자신의 작전대로 전투를 진행할 수 없자 됭케르크 교두보에 수비를 명령해 구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로를 통해 구출하도록 했다.
p780 제3공화국은 이렇게 숨을 거두었다. 패전과 함께 운명하긴 했으나 제3공화국은 존속한 전 기간을 통해 행운과 영예에 가득 찬 정치체제였다. 1875~1914년 동안제3공화국이 프랑스의 국력을 강화했기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프랑스 장군에게 최고지휘권을 주고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를 클레망소가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p792 많은 고난을 겪은 국민은 그 고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희망했다. 무엇보다 런던과 알제 도는 국내 레지스탕스파에서 위험한 여건을 무릅쓰고 투쟁해온 사람들이 그 지도권을 계속 보유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프랑스공화국은 임시정부가 관리하고 제헌의회를 선출해 여기서 제정한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인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p806 이 모든 원주민에게 개혁을 약속한 프랑스는 국내 문제에 정신을 빼앗겨 폭발적인 사태가 발생하기까지 식민지의 애로사항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p809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는 망데스-프랑스 정부의 방식은 매우 인기가 좋았다. 이 불안정한 시기에도 여전히 진부한 자세를 버리지 못한 의회는 비판을 받았다.
p813 드 골은 국가에 봉사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으나 헌법 절차에 따르지 않고는 정권을 인수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코티 대통령은 즉각 이 목적을 위해 합법적인 절차를 취하기로 했다.
p824 1066년의 정복으로 수립된 영국 왕정은 곧 지방권력의 자유를 허용할 만한 실력을 갖췄다. 프랑스 왕정은 초창기부터 몹시 물안정했기에 국가를 단계적으로 건설하면서 한편을는 지방의 전제 권력과 투쟁해야 했다.
p826 프랑스인은 영국인, 독일인, 미국인보다 행정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대신 어떤 완전한 이상이 하나의 지상 명령으로 부과되면 설령 성문화하지 않은 법이라도 준수한다.
p828 프랑스 국민은 과거의 전통 때문에 분수 이상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의 영향을 전적으로 군사력만으로 평가한다면 이 말은 타당한 견해라고 할 수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은 사실 지적이고 정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