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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문명과 이스라엘 - 고대근동 3천 년
주원준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2년 7월
평점 :
제목 : 인류 최초의 문명과 이스라엘
작가 : 주원준
출판사 : 서울대학교 출판 문화원
읽은기간 : 2026/04/11 -2026/04/19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곳 메소포타미아..
세계사를 공부하면 항상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다.
그만큼 오래됐고, 역사적으로 꼭 알고 싶은 곳이다.
그런데 유적과 유물, 문자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인지 세계사책에서는 몇 페이지 흝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고대문명과 역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한국책이 나왔다.
책을 읽다보니 내가 왜 헷갈려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이름의 국가가 BC 3000년대에도, BC 2000년대에도, BC1000년대에도 있다보니 다 그나라가 그나라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편견과 달리 아시리아는 잔인하긴 하지만 상업의 나라였고, 금방 망한 나라가 아니라 오랫동안 영속했었다는 게 신기했다. 문화적으로 우월감을 가진 바빌로니아도 재미있었다.
수메르와 아카드의 땅이라는 별명도 멋졌다.
한국인이 쓴 책을 보니 정서가 맞아서 그런가 더 재미있었다.
올해의 책 후보다.
p19 고대근동학이 다루는 시대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제의 정복 이전, 곧 헬레니즘화 이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p22 스스로 더 세련되고 발전되었다고 생각하는 하이집트와 소박하고 전통적인 문화가 강했던 상이집트의 갈등과 협력은 7천년 이집트 역사를 관통한다. 고대 이집트는 하드웨어적인 면이나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 고대근동 세계의 전통적 강국이었다.
p23 태초의 시작은 남부였다. 기원전 3500년경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우르크를 중심으로 발생했고이들은 당시 북쪽의 아카드나 바빌론과 맞서 전쟁을 치렀다.
p24 다양한 민족과 교류를 맺었기에 북부의 문화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세속적이고 지취적인 반면, 남부는 전통적이고 더 종교적이다. 아시리아 제국은 무력과 혁신을 앞세워 세계 최초의 제국주의를 이루었고, 기원전 1천 년기에 300년이나 강성했지만 남부의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의 통치술을 이어받았음에도 88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종교적, 문화적 정통성은 언제나 남부가 더 강했다.
p50 기원전 4천 년대와 3천 년대를 다루는 대목에서 줄잡아 50여 개 정도의 지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당시 지명을 안다. 지명이 확인된 곳에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 큰 규모로 정착해 도시를 세우고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르크 이후에 또는 우르크와 함게 다른 도시들도 출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p54 최초의 도시 우르크에 이미 인류의 문명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 한번에 모두 출현했다. 그래서 도시의 출현은 사회의 근본적인 재창조라고 할 수 있다.
p58 청금석이 쓰인 물건에는 금과 은이 아낌없이 쓰였다. 그런데 청금석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나지 않고 현대의 아프카니스탄 지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 시기에 이미 먼 중앙아시아에서 나는 재료를 가져다 썼다는 말인데 그 수입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p59 에리두는 ‘세상에서 가자 ㅇ오래된 수도’였으며, 우르는 문화적 선진국이고, 아카드는 무력이 강한 도시였으며, 최고신 엘린을 주신으로 모신 닙푸르는 종교적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수메르의 로마 혹은 메카”로 인식되었다.
p61 사르곤이 등장했다. 기원전 24세기였다. 그는 아카드제국을 세워 뛰어난 무력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통일했다.
p65 사르곤의 손자 샤르-칼리-샤리가 대를 잇는다. 사르곤이 정복한 땅의 사람들은 사르곤이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 동서남북의 반란을 잠재우고 아카드 제국을 건사한 임금이 나람-신이다. 나람-신은 할아버지 사르곤처럼 정복왕의 면모가 뚜렷하다
p72 사실상 신바빌로니아어나 신아시리아어는 특정한 지역과 시대에서 사용된 아카드어일 뿐이다. 아카드어를 익히면 후대의 제국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원문에 접근할 수 있으니, 고대근동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카드어 공부는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아카드어를 공부하지 않고 고대근동학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p73 먼 경계지역에서 적들이 쳐들어와서 제국을 흔들어 놓거나 때로는 제국을무너뜨릴 것이다. 서쪽의 아무르인들, 서북쪽의 히타이트인들, 동쪽의 메대(페르시아)가 그 변방의 침입자 역할을 맡을 것이다.
p79 함무라피 법전이라면 흔히 동태복수법의 원리를 더올리기 마련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이 원칙은 다소 원시적인 것으로서,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점차 돈으로 보상하는 원칙으로 진화했다는 지식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이와 다르다. 함무라피 법전보다 더 오래된 신수메르 시대 법전에서는 본디 돈으로 보상하는 원칙이었다.
p80 아카드가 무력을 앞세운 호전적 제국이었다면, 우르 제3왕조는 외교를 중심으로 통치했다는 인상을 준다. 임금이 원정한 기록은 훨씬 적다. 이런 우르 3왕조의 통치술을 확립한 임금은 슐기라고 전한다.
p87 실제로 상,하 이집트의 갈등과 대결은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나일강 삼각주에 자리잡은 하이집트는 모든 것이 넉넉하다. 반면에 상이집트는 나일강 주변의 도시들에만 사람들이 산다.
p102 고왕국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임금의 역할이 확립되었다. 파라오는 이집트 전체에서 가장 높은 존재였다. 파라오는 수도에 좌정했고, 내치와 외치는 물론 온 백성의 삶을 책임졌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성립되어 세금을 걷고 교역을 장려했으며 홍수를 측정했다. 그리고 이미 이 시기에 크고 평평한 벽돌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p107 마스타바 건축은 고왕국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까지 주욱 이어졌지만 고왕국과 중왕국에서 특히 활발했다(신왕국부터는 분묘가 널리 쓰였다) 그러므로 피라미드만 보지 말고 피라미드와 마스타바를 함께 보는 눈이 필요하다.
p118 피라미드 건설사업에 참여한 일꾼들은 봉급도 좋았고 사회적 지위도 낫지 않았다. 때때로 거대한 피라미드 건설사업은 농한기에 경제적 수입을 보장하는 일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거대 피라미드가 노예들의 강제노동의 결과라는 견해는 과거의 것으로 현대 학자들에게 거의 수용되지 않는다. 사실 채찍에 맞고 굶주리는 노예들의 강제노동으로 그렇게 크고 정교한 작품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p123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아카드 문명이 탄생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기원전 3천 년대에는 직접 충돌하지 않았다. 아나톨리아 반도나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기록들이 나오지 않는다.
p131 팔레스티나 지역이 역사에 등장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구약성경에는 이 시기의 도시국가, 임금의 이름, 그들의 경쟁 역사적 주요 사건 등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이 시기 고대근동의 중요한 사건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구약성경만 읽은 사람들에게 이 시대는 매우 막연하거나낯선 느낌을 줄 것이다.
p138 앗슈르라는 도시의 영역이 끼치는 넓은 지역을 아시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학문적 용어는 중요한다. 앗슈르는 도시의 이름이고 아시리아는 영역국가의 이름이다. 학자들이 이때의 아시리아를 고아시리아라고 하고, 그 이전의 아시리아를 초기 아시리아라고 부른다. 샴쉬-아다드 1세가 죽자 세상은 다시 어지러워졌다.
p143 앗슈르의 샴쉬-아다드 1세를 이어 바빌론의 함무라피는 기원전 2천 년대 전반기의 메소포타미아를 평정했다. 사유화가 시작되고 희년이 선포되었다. 바빌론의 안정기에 수메르-아카드 문학은 황금기를 누렸다.
p155 기원전 2천 년대 메소포타미아 문화권의 사람들은 가장 높은 신 엔릴과 그의 명을 받아 실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다드를 섬겼을 것이다. 최종결정권은 엔릴에게 있지만 평범한 인간사의 길흉화복은 하다드로 체험되었다. 그가 비와 바람을 통제하는 신이었기 대문이다.
p196 제국이 된 히타이트는 문명을 가르쳐준 상인의 나라에 무역봉쇄로 맞선 것이다. 상인의 나라 아시리아를 상대로 경제재제가 얼마나 유효한 전략인지 히타이트는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 같다.
p203 밋탄과 아시리아는 숙적이었다. 양자 모두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위치했기에 밋탄이 강성할 당시에 아시리아는 밋탄에 조공을 바쳐야 했고 아시리아가 흥하면 밋탄은 위축되어야 했다.
p206 히타이트, 밋탄, 이집트가 기원전 2천 년대 후반기를 지배한 3대 강대국이다. 그런데 이 3대국이 교차하는 지역, 곧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 자리잡은 소국들이 있다.
p209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소국들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에서 완충지대의 역할을 했기에 충서을 과장해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으며, 그래서 이 편지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안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문서에서 진의를 해독해 내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p227 권력을 휘두른 여성 가운데 으뜸은 핫셉수트다(기원전 1473-1458년경). 그녀는 공주로 태어나 왕비가 되었고 섭저의 대비에 올랐고 결국 파라오가 되었다.
p230 후대의 왕명록에서도 그녀는 삭제된다. 후대의 이집트 지식인들그녀를 너무 예외적 현상으로 이해한 듯하다. 재위 시절 그녀는 성공적인 임금이었다. 내치와 원정을 모두 잘 했고 비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왕권도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신의 딸도 역사의 편견까지는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p251 새로 등장하는 아시리아를 견제하고 불안한 왕위르 ㄹ안정화하기 위해 이집트와의 외교에 힘썼다. 그리하여 두 대국은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를 흔히 카데쉬 조약 또는 이집트-히타이트 평화조약으로 일컫는다.
p262 이 지역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인들의 건국서사는 이드리미와 비슷하지만 실제 국가 운영에서는 우가릿을 깊이 참조했던 것 같다. 독자적 글자와 언어를 사용하고 경제와 문화의 수준이 높았던 우가릿은 충분히 후대의 모범이 될 만한 나라였다.
p269 기원전 1천 년대는 순서대로 신아시리아-신바빌로니아-페르시아-그리스의 시대였다. 신아시리아는 고대근동 전역을 통일하며 첫 장을 열었다.
p271 경제적 목적을 위해 제국은 상상의 공간을 실현했다. 이미 기원전 2천 년대부터 아시리아인들은 세계를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인식했다. 첫째는 앗슈르 본토, 곧 앗슈르의 땅이고 나머지느 ㄴ앗슈르의 멍에 아래 있는 땅이었다.
p273 이런 기록들과 주변 민족의 기록을 대조해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910년에서 649년에 이르는 기간의 모든 연호와 사건을 알고 있다. 게다가 기원전 763년 6월 15일에 발생한 일식을 기준으로 절대연도를 정확히 환산할 수 있다. 그리하여 기원전 1천 년대의 사건은 예루살렘 할락 사건처럼 해와 달과 날짜마저 정확히 계산될 수 있다.
p296 역사의 가정법은 소용없다지만, 만일 요시야의 시도가 성공했다면 남유다는 유배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시야는 훗날 신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임금이다. 여러모로 판단력과 기백이 남다른 임금이었지만 현실을 냉혹했다.
p300 바빌론 문학의 수준은 드높았다. 에누마 엘리쉬, 에라 이야기, 길가메쉬 이야기 그리고 바빌론 신정론 등은 바빌론 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다. 네 편 모두 장편의 서사를 갖추고 있고 그 짜임새와 표현과 성찰이 인류 문학사의 높은 성취로서 손색이 없다.
p310 페르시아는 가장 혁신적일 뿐 아니라 유연하게 다양성을 보장하는 제국이었다. 고대근동의 가장 큰 영토를 다스린 “페르시아 제국은 다양한 언어, 문화, 경제, 사회조직들을 성공적으로 융화시켰을 뿐 아니라 근동에서 처음으로 백성들 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다.
p321 이스라엘의 이런 태도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 당시 소국들은 대개 페르시아의 지배자들을 관대하게 모사했다. 이런 면에서도 구약성경은 소국의 인식을 반영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