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온 인문학 - 사람과 세상이 담긴 공간, 집을 읽다 푸른들녘 인문교양 2
서윤영 지음 / 들녘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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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집에 들어온 인문학

저자 : 서윤영
옮긴이 : 
출판사 : 들녁
읽은날 : 2016/04/02 - 2016/04/06

 

제목을 보고 나 혼자 낚인 책.

집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라기보다는 집에 대한 수필정도로 보는게 맞을 듯 하다.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집안에 있는 다양한 공간에 대한 해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식 집이라는 양옥은 사실 영국과 프랑스가 동남아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 주택의 변형본이라든가, 다세대, 다가구등을 구분하는 방법등은 이 책을 통해서 알게된 유익한 내용들이었다.

재미있는 구분은 방과 간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전통주거는 방과 간을 구분합니다. 방은 신발을 벗고 앉아 생활하는 실내 공간이고, 간은 신발을 신은 채 일을 하는 노동 공간이자 실외공간입니다.(48 p)

이런 정의에서 보면 부엌은 부엌간이니 힘들에 일을 하는 곳이고, 사랑방은 안방과 멀리 떨어져있어도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역시 여성은 예전에도 집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이었나보다.

2부 집 밖ㅇ로 나가다에서는 건축에 대한 일반론이 펼쳐진다.

과거에 지어진 사찰이나 성당등을 통해 어떻게 세속적인 사람이 종교장소에 들어와서 거룩감과 경외감을 갖게 할 것인지에 대해 건축학적인 장치들을 알게 된다.

모델하우스 역시 피해가지 못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집을 더 넓게 보이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내가 생각했던 책의 내용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배울 수 있는 책이다.

다만,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이라는 말을 부쳤으면 그에 걸맞는 통찰이나 옛것과의 연결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은 좀 약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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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한국사 - 진실을 쫓는 역사 독립군 배기성의
배기성 지음 / 블랙피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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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편한 한국사

 : 배기성

 : 블랙피쉬

읽은기간 : 2024/11/02 -2024/11/09


제목과 다르게 불편하지 않았다.

불편하려면 자랑스럽던 우리나라의 역사가 사실은 거짓이라든가,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사실은 맞는 것이라든가 이래야 불편할텐데, 그런 내용은 사실 없었다.

대부분 조금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봤던 이야기들이라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제목에 속아서 별점을 좀 낮게 주었다. 

역사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엮어서 읽어도 좋고, 통사로 읽어도 좋다.

무언가 내 삶에 깨달음이 있는 영역이라 역사책을 읽는 게 좋은 것 같다..

즐거웠다. 


p29 수나라는 300만 명 이상 동원한 AD 612년의 대전쟁에서 무려라 하나를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얼핏 보면 매우 초라한 성적표지만, 길게 보면 다르다. 이는 고구려로부터 석탄 화력을 빼앗아 버림으로써 수나라 다음에 올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결국 패망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구려는 612년에 무려라를 빼앗긴 후, 56년 동안 무려 5번의 대전쟁을 겪을 후에 멸망한다.

p46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견원지간이었다. 앞서 고선지 장군 등 무예에 능한 사람들을 따로 1만 명이나 형성해 저 멀리 서역에 원정 보낸 것도, 또한 약 4만 명 정도 되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저 멀리 사천성이나 운남성에 내려보낸 것도, 모두 신흥국 발해, 즉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과 연합하지 못하게 하려는 당나라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p63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쯤인가? 9개의 군진을 설치했다면 어디 어디가 9성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우리 역사학계는 아직도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현재 동북 9성의 소재지 대부분이 우리의 적대 국가인 북한 땅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스스로의 자학 사관이다. 우리 역사를 항상 과소평가하고, 삼국 통일 이후의 우리 역사는 중국 땅을 조금이라도 침범해서는 안되며, 특히 근현대 이후로는 과거의 역사라 할지라도 한반도 안에서 조용하고 얌전하게 있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 때문이다.

p79 후일 19세기 초엽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은, 조선 땅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 흑산도에서 글공부한다는 사람조차 주자 성리학을 놓고 공부한다는 소리에 “주자는 정말 힘이 세구나”라고 자조 섞이 비평을 내놓을 정도로, 조선에서는 주자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관직에 나갈 수도 없었고, 사문난적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p90 선조가 즉위한 직후, 이이는 33세의 한창 젊은 청류 선배로서,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내놓는다. ‘정병 10만 양병설’이다. 군사를 양성하는 데 그 윤원형의 재산을 쓰자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전하, 윤원형의 재산이 왕실로 귀속되어야 한다. 신하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같은 논쟁은 지금 하등의 쓸모가 없는 논쟁이옵니다. 이로써 정병을 양성하여, 유사시를 대비한다 하면, 전국의 인구조사를 다시 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유랑민들을 다시 세금을 내게 하는 양민으로 돌릴 수 있사옵고, 또한 나라의 제조업을 무기로 만드는 공업으로 할 수 있어 조선의 문약함을 돌볼 수 있나이다.”

p102 1593년과 1594년의 머리글자를 딴 계갑 대기근. 1592년에 전쟁으로 전국의 농토가 황폐화되니 농사를 하나도 짓지 못하고,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유랑민이 되니 어찌 흉년이 들지 않겠는가! 도제찰사 오리 이원익의 불길한 예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져 1593-1594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최악의 대기근에 시달렸다.

p109 남해 바다를 지킬 수 있는 장수는 이순신 제독 말고는 없사옵니다. 원균은 빼고 말하시옵소서.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따. 2대 199의 대결이었다. 2는 오리 이원익과 좌찬성 정탁 그리고 나머지는 국왕을 포함한 문무백관 전체이다.

p122 이원익은 붕당을 정말 싫어했다. 그의 스승 율곡 이이와 비슷했따. 그렇지만 붕당으로 굳이 치자면, 남인에 속했다 한다. 실은 이원익 정승은 특정 붕당 모임에 나간 적도, 자신이 남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 싶다. 그런데, 자신의 필생의 업적인 대동법의 완수를 승계해야 한다는 목적의식하에 후계자를 찾을 때에, 그는 김육을 강력히 천거했다.

p146 이 영조라는 임금은 진정한 사이코패스였다. 이제부터 또다시 그의 광기가 시작된다. 약 60여 명의 소론 학자들이 참형을 당했다. 양명학자 이광사는 이에 연루되어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과 어리디어린 아기 딸을 남겨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p152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전통주의 종류는 영조의 뻘짓거리 한 방에 크게 줄었고, 추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1916년 조선총독부의 주세령에 따라 소규모 양조장은 모두 없어졌다.

p178 우리에게 알려진 판소리 여섯마당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는 1840년대에서 1850년대 사이에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신재효가 개작, 정리한 것이다. 창작한 것은 아니고,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판소리라는 장르를 네 가지 장르(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로 4대 법례를 마련한 음악 이론가라고 하면 맞겠다. 그러니까 이 판소리 장르는 서양 음악으로 치자면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보다도 훨씬 현대 음악이다

p191 조선의 19세기를 돌이킬 때 가장 아까운 3명이 있다. 최시형, 전봉준, 김대건이다. 앞의 2명은 동학의 인재이고, 뒤의 1명은 서학의 인재이다. 이 셋을 끌어안지 못해서 조선은 망했다. 조선의 세도 정치 및 후진 역사성은 이 셋의 번득이는 천재성을 끝끝내 포용하지 못하고 모두 교수형 아니면 참형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p196 탐보라 화산이 터졌다. 1812년부터 조금씩 인도네시아 숨바와섬에서 이상 조짐을 보이던 탐보라 화산이 드디어 터졌다. 1815년의 일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폭발 소리가 감지될 만큼 엄청난 분화였다. 발리섬과 그 옆의 룸복섬 그리고 그 옆에 숨바와섬에 있는 탐보라 화산이었다. 숨바와섬에 있던 1만 2,000명이 폭발 7일 만에 사망하고, 8만 명이 1년 안에 모두 죽었따. 무려 9만 2,000명이 직접적인 피해로 죽었다.

p201 정한론. 1870년을 전후해 우리나라에 전달되었던 일본의 대륙 침략 계획이다.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에 의해 처음 주창되었떤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쓰마 번과 함께 1868년 메이지 유신은 각 현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것을 일본이라고 하는 하나의 나라로 합친 것이다.

p208 바우덕이는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받는다. 벼슬을 받은 것이다. 정3품 이상은 당상관이다. 바우덕이가 얼마나 뛰어난 예능 실력으로, 당시 경복궁 중건 노역자들에게 노동 의지를 불태우게 해주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p214 이하영은 철도 노선을 놓기 위해서는 대규모 출자가 이루어져야 함을 계속 이야기했고, 이에 금융왕 JP 모건이 눈치 빠르게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느 ㄴ정동교회 바로 건너편에 한국 지점을 설치했다. 그리고 미국 자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전차부터 개설했다.

p217 태화관에 오지 않은 민족 대표 4명이 더 있다는 것을 손병희의 진술로 확보했다. 인감도장만 맡기고 오지 않은 것이다. 평안북도의 길선주 장로, 평안북도의 유여대 장로, 김병조 목사, 정춘수 목사 등은 모두 각자의 곳에서 더욱 열심히 만세를 부르고 그 현장에는 가지 않는 대신 인감도장을 보내, 독립선언서에 도장은 총 33개가 찍혔다.

p219 요리 만드는 사람이 그 요리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11월 18일 아침 소식을 듣고 까무러쳤다. 그 중명전 회의장이 바로 대한제국을 망하게 만든 을사늑약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만든 요리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순간 양 손목을 자르고 싶었다는 안순환의 회고. 그러니 1919년 3월 1일의 민족적 거사에 안순환은 손병희를 붙들고 그날의 오욕을 씻게 해 달라고, 민족지도자 대표 33인에게 제가 정성껏 만든 요리를 대접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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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미술관 - 그림 속 잠들어 있던 역사를 깨우다
김선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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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유하는 미술관

 : 김선지

 : 알에이치코리아

읽은기간 : 2024/10/26 -2024/11/01


이런 책이 참 좋다. 

특별한 주제를 따라 엮어나가는 책.. 역사에 따라 그림이 엮어나가는 책은 오랜만이다. 

단순한 화파나 작가가 아니라 역사를 중심으로 그 역사를 설명하는 그림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저자의 이름이 낯이 익어서 살펴보니 그림과 천문학을 엮어서 쓴 책이 있었다..

그 책도 재미있었는데 이 책도 재미있다.. 

이런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 해피해피.. 


p6 김선지 작가의 사유하는 미술관은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역사라는 스펙트럼을 펼쳐 보인다. 저자는 그림이 색채로 표현되고 눈으로 감상하는 역사책이라고 말한다.

p9 이 책은 역사를 핵심 주제로 하여 여섯 가지 키워드로 풀어본 그림 역사책이다. 왕정 시대 국가의 구심점이었던 왕과 비, 성과 사랑, 음식 문화, 신앙과 종교, 힘과 권력, 그리고 근대 사회 명암의 역사를 통해 우리 인간이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보았다.

p34 유럽인은 휘렘을 이런 오리엔탈리즘의 비틀린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이미지는 신비하고 이국적인 동방의 여왕, 하렘의 팜파탈로 고착되었다. 그녀가 지성과 의지, 인내와 결단력 덕분에 정치적 암투가 치열한 오스만 제국의 하렘에서 살아남과 종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은 간과했다.

p51 결국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낸 메리 1세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반은 비극과 불안, 종교적 독선으로 얼룩졌지만 적어도 반은 용기와 통찰력을 가졌던 지도자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p84 후에 책임 추궁당할 것을 염려한 나폴레옹은 연출된 드라마를 그림으로 그리게 한다. 고국으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이 성공했다고 거짓 선전했다. 사람들은 그가 군대의 절반과 함대 전체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믿었다.

p92 옥타비아누스는 정적 안토니우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를 로마 남성을 유혹하는 악마로 만들어야 했다. 그는 로마인들이 안토니우스를 이방인의 유혹에 빠져 조국을 배신한 사람,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인 아내에게서 남편을 빼앗아 간 사악한 요부로 생각하기를 바랐다.

p108 진실의 입은 간음, 위증과 같은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을 판결하기 위한 일종의 중세식 거짓말 탐지기였다. 이 관행은 아내의 간통을 확인하기 위해 종종 이루어졌을 뿐 남성이 이런 식으로 시험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p128 그녀는 위엄있는 여왕보다는 현대의 할리우드 셀럽에 가까웠다. 어머니인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가 서신을 통해 딸에게 끊임없이 잔소를 할 정도로 왕비답게 처신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p147 그녀는 시간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이 드는 일과 타협하지 못했따. 올도이니는 1900년 만국 박람회에서 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제목의 사진 전시회를 열어 자신의 사진들을 선보이는 꿈을 꾸었지만 이루지 못한 채 1899년 62살의 나이로 외롭게 죽었다. 살아 있을 때도 악명이 높았지만 죽었을 때도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좋지 않았따. 신문들은 그녀의 부고 기사에 허영심과 오만에 가득찬 나르시스트가 사망했다고 썼다.

p157 카트린은 프랑스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 패션, 요리를 소개했다. 그녀는 결혼할 때 궁정 하인, 예술가, 음악가, 무용수, 자수 장인, 드레스 제작자, 헤어 스타일리스트, 향수 제조업자, 요리사, 제빵사 등 많은 측근을 데리고 왔다. 그녀는 이들을 통해 화장술, 헤어피스 가발, 염료, 고급 속옷, 식탁보, 자수 및 고급 손수건 등을 전파했따. 발레를 들어오고 최초의 향수 판매점을 열기도 했다.

p177 오스만 제국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에 이르기까지 커피하우스는 새로운 정신의 물결에 영감을 주는 장소, 뛰어난 지성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따. 사람들은 갓 내린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담소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냈다.

p200 대항해 이후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몰두한 유럽 국가들은 아메리카에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건설했다. 이때부터 설탕을 생산하기 위한 노예 노동의 참혹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p211 네델란드 정물화와 먹스타그램 간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들 정물화는 입맛을 당기는 음식들을 자랑하는 동시에 독특한 삶의 철학을 내포하고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인 것이다.

p222 전염병은 중세 예술에도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회화, 목판화, 조각 등은 이전보다 더욱 사실적인 표현으로 향했고, 거의 한결같이 죽음에 초점을 맞췄다.

p236 그의 접시 위의 뱀이나 개구리, 물고기 등의 생물들은 마치 살아 있는 실물처럼 피부 조직이 세밀하고 정교하다. 이렇게 세세한 피부 조직까지 캐스트를 떠내려면 엄청난 인내와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팔리시의 양식은 그의 사후에도 많은 추종자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졌다.

p246 이들의 금식은 거룩한 거식증으로 높이 추앙받았으며, 일부는 성녀로 추대되었다. 육체적 쾌락의 포기가 남녀 모두에게 요구되긴 했지만 특히 죄의 무게가 더 무거운 여성의 경우 몸을 혹사하는 금식 고행까지 하도록 내몰렸다.

p261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문맹의 평신도가 아니라 박식한 엘리트층을 위해 설계되었다. 지식층 관중만이 그가 의도한 인문학적 은유와 암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카론과 미노스에 대한 언급이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 근육질 그리스도의 모습이 헬레니즘 시대 조각품 아폴로 벨베데레를 인용했다는 점을 이해했다.

p263 중세 유럽은 흔히 야만의 시대, 문명의 암흑기로 간주된다. 많은 사람들이 마녀 사냥 혹은 마녀 재판도 중세의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마녀사냥은 중세 말기인 14-15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중세보다는 과학 혁명의 시대라는 17세기경 가장 극심하게 일어났다.

p292 17세기 정물화에서 노예가 다른 물건과 함께 주인의 소유물로 그려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p304 후원자 앙리 2세가 마상창시합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사망한 후 그는 와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소유물이 된다. 그녀는 페트루스를 다시 동물의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

p309 미녀와 야수 이야기는 겉모습을 보고 누군가를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 아이들에게 정신의 추함과 육체의 추함을 분별하고 마음과 영혼의 광채를 보도록 가르친다. 현실에서는 이 교훈이 얼마나 공허하고 위선적인가

p317 인디언 공주를 쓴 제임스 넬슨 바커 같은 극작가들은 미국인이 공유하는 신화를 만들어 초라한 식민지 개척자들의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연극을 통해 감동적이 위대한 미국의 서사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싸우는 영웅적인 식민지 개척자들의 이야기나 식민지 정복자를 포용하고 돕는 포카혼타스의 고귀한 야만인 신화가 그것이다.

p339 르누아르의 보트놀이 일행의 오찬은 목가적인 야외 식사의 매력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이 늘 그렇듯이 생생하고 채도가 높은 색채가 도드라지며, 사람들 사이의 따뜻하고 친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p357 산업 혁명 시대의 대기 오염이 없었다면 터너와 모네의 그림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현대 추상화로 가는 첫 단추를 끼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산업 혁명이 미술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자못 크다. 물론 대기 오염이 전적으로 미술사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건 아니지만 화가들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p373 화가들은 덩치를 부각하기 위해 몸통은 과장된 크기로 그렸고, 다리는 작고 가늘게 표현했는데 결과적으로 약하고 왜소한 다리가 어마어마한 몸집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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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8 - 바로크 문명과 미술 : 시선의 대축제, 막이 오르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8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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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처한 미술이야기8

 : 양정무

 : 사회평론

읽은기간 : 2024/10/18 -2024/10/26


무척 오랜만에 시리즈가 업데이트되었다. 

쓰기가 어려웠을까? 아니면 바빴을까?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바로 주문해서 읽었다. 이번 시리즈는 바로크시대다.

보통 르네상스를 많이 보고, 그 다음으로는 인상주의를 보곤 했는데, 바로크의 화려한 모습을 보니 또 새롭다. 

내가 알고있던 카라바조나 고야.. 이런 화가들이 다 바로크시대 화가들이었구나..

역시 미술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런 기초적인 내용도 잘 몰랐다. 

바로크의 화려한 미술을 이탈리아, 북유럽, 스페인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앞으로는 르네상스에서 바로 인상주의로 가지 않고 바로크의 화려함도 느끼게 될 것 같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결국 아는만큼 보게되는 것 같다. 

누군가 더 자세하게 잘 설명해주면 남은 내 인생에서 미술을 보는 눈도 높아지고 삶도 풍성해질 것 같다.. 좋다.. 


p7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함께 유럽 근대 미술의 양대 산맥입니다. 르네상스가 고전적 균형과 안정적 조화를 강조했다면 바로크는 탈고전적 화려함과 빠른 움직임을 강조합니다

p21 그럴 수 있습니다. 너무 높은 톤으로 다가가면 도리어 상대방이 당황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크 미술이 그렇습니다. 좋게 보면 환상적이지만, 자칫하면 표현이 너무 과도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로크 미술을 절제를 모르는 과장된 미술이라고 비판하거나, 심지어 조롱하는 학자도 꽤 많습니다.

p58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고, 정확히 10년 뒤인 1527년에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로마의 약탈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1년 넘게 점령하며 도시를 잔인하게 약탈한 사건이죠. 고대부터 로마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몇 차례 함락된 적이 있지만, 이때 입은 피해는 너무나 크고 광범위했습니다. 로마 주민 대부분이 죽거나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로마는 한동안 유령 도시나 다름없었습니다

p68 하루를 48시간처럼 바쁘게 살았던 성 카를로는 무너진 카톨릭의 위상을 바로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 카를로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p100 카라바조는 이 그림에서도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들의 표현에 집중합니다. 무엇보다 탁자 위의 카펫, 모자의 깃털, 옷의 질감 표현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고급스러워 인상적입니다. 더욱이 왼쪽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이런 디테일을 강하게 비추면서 그림자가 돋보입니다. 덕분에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명확하게 다가오죠

p120 지금까지의 미술에서 성인들은 높은 신분의 위인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종교화의 공식을 뒤집고 성경 속 인물을 평범하게 그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p125 카라바조가 성인을 빈민의 모습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 점은 성경의 맥락과 같죠. 예수 그리스도도 평생 가난하게 살며 백성들과 함께했으니까요. 카라바조의 그림을 좋아했던 후원자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이 가장 낮은 자의 자세로 빈민들의 세계를 존중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p151 진격의 미술학교는 도메니키노, 귀도 레니, 구에르치노 같은 뛰어난 화가를 배출했습니다. 제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이른보 볼로냐 화파가 탄생합니다. 결과적으로 카라치 형제의 아카데미는 당대 최고의 화가 양성소이자 미술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나아가 이탈리아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학교였습니다.

p160 액자뿐 아니라 주변 건축 구조물과 장식까지 전부 그려 넣은 겁니다. 이렇게 건축 요소를 그림으로 구현해 관람자의 시선을 속이는 기법은 ‘과드라투라’라고 부릅니다.

p171 체라시 예배당은 1600년 교황의 재무관이었던 티베리오 체라시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체라시는 자신이 묻힐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당시 잘 나가던 두 화가, 안니발레와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주문합니다. 이렇게 예배당 중앙 제대 위에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그림이, 양옆에는 카라바조의 그림이 자리하게 됩니다.

p179 안니발레의 파르네세 갤러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라파엘로의 스탄차와 함께 로마에서 반드시 봐야 할 3대 프레스코와로 손꼽힙니다. 그러나 천장화가 있는 팔라초 파르네세가 현재 프랑스 대사관으로 쓰이고 있어서 막상 관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p186 화면 네 귀퉁이에는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진 포교 활동을 새겼습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에서의 포교 활동을 카톨릭 복장을 한 여인의 모습으로 의인화한 겁니다.

p189 당시에는 돔이 있어야 제대로 된 성당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당을 지으려는데 돔을 지을 만큼의 건축비는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돔을 그려 넣은 거죠. 돔은 성당 옆 건물의 채광을 막으면서 주변의 민원을 받기도 했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단 가짜 돔을 그려 놓고 후에 제대로 된 진짜 돔을 지으려 했지만, 계획이 흐지부지되면서 지금까지 가짜 돔이 자리 잡은 겁니다.

p210 왼쪽의 시피오네 추기경은 멍한 표정입니다. 어디를 응시하는지 분명하지 않아요. 반면 오른쪽은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압권인데요. 무슨 이야기를 막 하려는 듯 입을 살짝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당시 사람들은 스피킹 라이크니스, 즉 말을 거는 듯하다고 평가하는데 곧 베르니니의 초상 조각의 특징입니다.

p213 베르니니는 두 개의 어마어마한 종탑을 대성당에 세우려고 했어요. 그러나 지반이 약하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채 거대한 구조물을 짓다 보니 왼쪽 종탑에 균열이 가고 말았습니다. 대성당 전체가 모조리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1646년 종탑을 자체 철거했습니다.

p230 사실 바로크를 연극적 예술이라고 하는데, 이 수식어와 아주 잘 어울리는 작품이 성테레사의 황홀입니다. 베르니니는 예배당 중심에 있는 제대를 무대로 여기고 여기에 성 테레사가 영적 체험을 겪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p243 보로미니의 경우 타원형을 사용하면서도 실험을 통해 그 모양을 독창적인 형태로 변형시켜 움직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베르니니는 순수한 타원형의 형태를 고수해 정적이며 담백한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p288 정물화의 발전 과정에서 아르트센이 그린 푸줏간은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다뤄집니다. 사물들이 화면 전면에 당당하게 배치되어 초기 정물화로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림 크기도 상당히 커서 높이 1.15미터, 폭 1.68미터입니다.

p308 무엇보다 이런 그림과 드링이 그려질 무렵 아트베르펜은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루벤스가 한군인을 직접 마주치지 않았더라도 각종 기록을 통해 한국과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었따고 짐작할 수 있죠

p326 이 결정은 네델란드의 경제 번영에 신의 한수가 됩니다. 유럽 곳곳에서 신아을 억압받던 이들이 종교적 관용을 허용한 네델란드 공화국으로 모여들었으니까요. 이렇게 네델란드로 모여든 종교적 난민의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렀습니다

p334 빌럼 1세는 최강을 자랑하던 스페인 군대에 맞서 싸워 북부7주를 독립의 길로 인도합니다. 오늘날 그는 네델란드 국가에 나올 정도로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습니다. 빌럼 1세의 가문 오라너는 영어로 하면 오렌지입니다. 네델란드를 상징하는 오렌지색이 바로 오라너 가문에서 비롯한 겁니다.

p345 3차 영란전쟁에서 네델란드는 바다에서 영국, 육지에서는 프랑스를 상대로 치열하게 싸웁니다. 최종적으로 네델란드가 승리했지만 계속된 대규모 전쟁으로 네델란드의 국력은 점점 기울게 됩니다. 결국 18세기 들어 해상 권력을 영국에 넘기면서 네델란드의 황금기도 끝을 맞이합니다.

p358 그림의 대상이 일상적인 소재에서 점점 사치품으로 바뀝니다. 이처럼 16세기에는 소시민의 소박한 삶을 나타내는 정물화가 대부분이었다면 17세기에 들어서 정물화는 부유층의 고급스러운 삶을 우아하게 보여줍니다.

p365 만개한 해바라기 사이로 병들어 시든 꽃이 눈에 띕니다. 삶을 예찬하는 동시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네델란드 정물화의 전통이 반 고흐같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에까지 이어진 셈이죠. 반 고흐 역시 네델란드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찍부터 전통적인 네델란드 정물화의 특성을 알았을 겁니다.

p393 두 그림이 보여주는 직업 화가의 양면은 오늘날 미술계에서도 낯선 일이 아닙니다. 성공 혹은 실패에 따라 화가가 겪는 삶의 명암이 달라지니까요. 이 시기는 미술시장 성행부터 직업 화가의 숙명까지, 오늘날 미술계의 예고편인 셈입니다.

p405 학교풍경을 담은 얀 스테인은 한국에서 특이한 별명으로 불립니다. 바로 네델란드의 김홍도인데요. 얀 스테인이 그린 또 다른 마을 학교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으 거에요

p429 루벤스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웅적인 신체로 잡아냈다면 렘브란트는 한 인간의 고결한 희생으로 표현했습니다. 두 그림은 크기도 꽤 차이가 납니다. 루벤스의 원래 그림은 높이 4.2미터, 폭 3.2미터로 웅장하지만, 렘브란트의 종교화는 개인의 묵상이나 교육자료로 그려 그리 크지 않아요. 높이 90센티미터, 폭 60센티미터로 아담하죠

p461 페르메이르는 거창한 사건이나 유명한 장소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잔잔히 담아냈습니다.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평화로운 일상은 네델란드의 군사적, 경제적 번영 덕분이었는데요.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정지된 고요함은 조국의 번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p469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미술은 진리의 영속성을 추구하고, 바로크 미술은 진리의 순간성에 주목한다고 합니다. 두 그림 속에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대조적 세계관이 잘 배어있다고 할까요

p496 아래의 톨레도 제대화는 화려하지만 복잡해 보이고, 엘 에스코리알 제대화는 잘 정돈된 느낌입니다. 엘 에스코리알 제대화 중앙에는 로렌스 성인의 순교 장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펠레그리노 티발디라는 화가의 작품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티치아노의 작품이 걸릴 예정이었습니다.

p501 1556년 카를로스 1세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 머물며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고, 엘 에스코리알까지 기획합니다. 따라서 스페인 미술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려면 펠리페 2세를 기준으로 삼는 게 맞을 겁니다.

p524 지상과 천상을 극적으로 표현하면서도 하늘로 올라가는 영혼을 통해 그림의 중심까지 잘 잡은 덕분입니다. 당시 스페인이 요구했던 카톨릭 신비주의 가치관과 회화적 효과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낸 결과입니다.

p547 펠리페 3세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1605년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출판입니다. 소설이 상징하는 부조리함과 엉뚱함이야말로 당시 스페인의 시대적 분위기였습니다.

p562 이 그림을 볼 때 채색도 눈여겨봐야 해요.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대상의 윤곽선을 정확히 그린 뒤 색을 칠합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가까이 들여다보면 붓으로 대충 물감을 뭉갠 듯 보입니다. 자유로우면서도 거친 붓놀림으로 형태를 대략적으로 그린 겁니다. 그런데 뒤로 두세 걸음 물러나서 보면 화려한 레이스 소매와 빛나는 금발이 눈에 들어옵니다. 춤추는 듯한 터치로 그림 곳곳에 정교하게 빛과 색을 녹인 선이 아닌 색채와 빛으로 형태를 만든 겁니다.

p574 다른 화가들은 몰라도 무리요만큼은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앞의 왼쪽 작품에서 보듯이 성모를 흰색과 파란색 옷으로 표현하고, 천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성모를 파체코의 가이드라인을 적절히 참고해 그렸죠.

p582 스페인 제대화 설계의 기본은 바닥에서부터 위까지 가득 채우는 겁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 울트라 바로크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왕들의 제대화의 폭은 13미터, 높이는 25미터입니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건축가 헤로니모 데 발바스가 설계해서 1718년~1737년 사이에 제작됩니다.

p591 포도주 석 잔을 내왔는데 지난번에 마신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나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많이 취하였다. 입에 들어갈 때는 상쾌하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부드러워 그 맛을 형언할 수 없었다. 선인의 음료라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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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세계사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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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스포드 세계사

 :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

 : 고유서가

읽은기간 : 2024/09/18 -2024/10/28


책의 두께가 있어서인지 오랜 시간을 들여 다 읽었다.

옥스포드라는 브랜드에 혹해서 책을 샀는데 책의 전개가 내가 읽던 내용과 달라 한참을 헤매면서 읽었다.

세계사 책은 맞는데 세계사의 구분을 꽤 큰 덩어리로 구분해서 진행되다보니 읽다가 보면 어느 시대 이야기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중단원이 나눠질 때마다 기후에 대한 챕터가 있다. 기후가 변함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와 인류가 어떻게 적응하고 이동하고,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알려줘서 꽤 흥미있었다.

한번에 이해할 수는 없는 책이다.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아마추어로서 평소에 읽던 방식과 내용이 다른 책이라 몇 번은 더 읽어야 그 의미와 깊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나오는 세계사책은 전통적으로 왕조와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이 아닌 책들이 많아 읽기가 쉽지 않다. 여러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재미는 있다. 

지식의 부족과 머리나쁨을 탓하게 된다.

좋은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다. 


p11 지구사 역사가의 문제는 ‘우주의 망대에 올라선 은하계 관찰자에게는 역사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것이다

p12 발산은 우리 종이 고고학적 기록에 처음 출연했을 무렵 호모 사피엔스의 한정되고 안정된 문화가 흩어지고 스스로를 변형하여 오늘날 우리가 서로 놀랄 만큼 엄청나게 다양한 삶의 방식들로 갈라진 과정, 지구상에 거주 가능한 모든 환경을 빠짐없이 채운 과정을 나타낸다

p14 유사 이래 대체로 발산이 수렴을 앞질렀다. 다시 말해 문화들은 상호 조우와 학습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다양해졌다(점점 더 서로 달라졌다)

p18 기술은 우리가 자초한 문제들로부터 번번히 우리를 구했지만, 그 결과는 더 크고 더 위험하고 더 값비싼 해결책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들뿐이다

p22 역사학은 변화에 관한 연구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연대기순으로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분에서는 우선 환경사 전문가인 한 저자가 환경 배경을 짚으면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 작용을 스케치한 다음 역시 자기 분양의 전문가인 다른 저자들이 해당 기간의 문화를 다룬다

p38 빙하시대의 인류는 건장했고 보통 몸집이 컸다. 더 호리호리하고 약한 골격은 한참 후에, 홀로세에 기후가 더 온난해지고 곡물과 녹말, 탄수화물을 소화하기 쉽도록 삶아 먹는 쪽으로 식단이 변한 무렵에 나타났다

p41 기근의 위험을 줄이고 지역의 선택압에 대응하는 데는 두 가지 전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동과 공유다. 시공간 속 인간 집단은 이동함으로써 식량 자원의 변동에 적응한다

p43 지구의 공전궤도, 자전, 자전축 기울기의 변화가 기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졌다. 세 변화를 각각 이심률, 세차 운동, 지구 자전축 경사각이라고 한다. 천문학 데이터를 이용해 서로 맞물리는 세 운동의 주기를 알아낼 수 있는데, 공전 궤도(이심률)의 주기는 10만년, 자전축 경사각의 주기는 4만 1000년, 세차 운동의 주기는 2만 3000년이다

p44 초기 연구에서 지난 80만년 동안 간빙기-빙하기 순환이 지질학계의 주장처럼 네 번 완료된 것이 아니라 여덟 번 완료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p64 방사성탄소 연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알타이부터 알래스카까지 거의 7000킬로미터 거리를 인간이 빠름-느림-빠름 템포로 확산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반적인 이주 속도는 연간 0.22킬로미터였다. 이 정착 경로에서 나오는 인공물들은 뚜렷한 단일 기준 집합을 이루지 않는다

p67 700만 명은 친족 관계, 사회적 집단화, 재료 저장에 힘입어, 그리고 자원 통제 방식을, 따라서 자원 재분배 방식을 바꾼 남성 간 협력에 힘입어 지구 전역에 당도했다

p71 쇼베 동굴-발견한 세 사람이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이 세계에서 빙하 시대 예술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자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이 살았던 곳(그중 일부는 3만 년도 더 전에 살았다) 중 하나라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p74 사냥감과 야생 식물 작물이 풍부했고, 에너지원이 풍족했으며, 대부분의 농경 사회보다 여가 시간이 많았고, 자연을 관찰하고 그 관찰에 관해 생각하고 그 결과를 예술로 기록할 시간이 충분했다

p92 호모 사피엔스는 친척 네안데르탈인과 언제나 모호한 관계였으며, 서로 공유하던 환경에서 우리 조상들은 살아남고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한 사실은 이론가들에게 곤혹스러운 문제였다

p97 일찍이 4만 년 전부터 현지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품목은 분명 먼 거리를 통해 거래되었다. 기원전 3500년 무렵 카스텔 메를의 장인들이 100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서 상아를 공급받았는가 하면, 해안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이 조개껍데기로 치장을 하기도 했다

p119 앞서 간단히 말했듯이, 호미니드 계통의 대다수 종들은 전 세계의 더욱 다양한 생태계들을 향해 대담한 여행길에 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호모속 중 적어도 다섯 종은 어느 시점에 아프리카 밖으로 분포 범위를 넓혔으며, 다수의 개체가 유라시아 북부 냉대선에 도달해 동물을 사냥했고, 무엇보다 콩과식물과 외떡잎식물을 비롯한 다른 음식과 고기를 섞어 식단의 균형을 맞추었다

p127 바빌로프의 분석 이래 현장 조사에 나선 고고학자들은 여러 방법으로 농경 기원지의 폭을 넓혀왔다. 바빌로프는 중심지 여덟 곳을 제시했는데,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어 중심지가 적어도 열두 곳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이 확산되고 적용됨에 따라 중심지들의 연대가 분산되고 변화의 속도가 또다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p133 세계의 기후가 홀로세 중 가장 온난한 단계로, 대략 9000년 전부터 5000년 전까지 최적 기후로 이행함에 따라 구세계와 신세계의 농경 기원 중심지 몇 곳에서 촌락, 타운, 도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정교하고 빽빽하게 들어찬 건축된 공간이 출현했다.

p151 집약농업 단계에는 몇 가지 되풀이되는 테마가 있다. 우선 농민이 특정한 농지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물의 흐름, 토양, 동물, 몇몇 작물에도 지속적으로 헌신하게 되었다. 아울러 앞날을 내다보는 투자가 그 관계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에너지의 측면에서 투자는 주로 생산적인 토양에 집중되었고, 축력 및 금속 기술과도 여러모로 관련이 있었다

p155 공동체들의 이동을 추동한 주요인은 작물이나 재화보다 가축에게 풀을 먹일 필요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이동은 내륙 아시아 산악 회랑지대(알타이산맥부터 힌두쿠시산맥까지)를 따라 이루어졌는데, 이 지대에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이후 다양한 재화와 물품을 수송하는 데 쓰였고 결국 실크로드의 전신이 되었다. 이 네트워크의 여러 단계를 바탕으로 동물과 작물, 인공물의 확산을 추적할 수 있다. 또한 방랑자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p169 문명 확산론을 믿는 사람들은 올메크를 아메리카의 모체 문명으로 찬양해왔다. 확산론의 요지는, 문명이란 재능을 타고난 소수의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비범한 성취이며 모체 문명이 덜 창의적인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거나 가르치는 방법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확산론은 거의 확실히 틀렸다. 그럼에도 올메크의 영향은 메소아메리카에서 널리 퍼지고 어쩌면 그 너머까지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p176 현존하는 메소포타미아 법전과 중국 문헌에 근거해 판단하지면, 여성은 갈수록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p188 아카드의 정복왕 사르곤은 고대의 위대한 제국 건설자 중 한 명이었다. 사르곤의 군대는 강 하류 지역으로 쳐들어가 그를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으로 추대했다. 현존하는 연대기 파편에서 사르곤은 “장대한 산맥을 나는 청동 도끼로 정복했다”고 선언하고 자신을 계승할 왕들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권했다. 그의 군대는 시리아와 이란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p191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와, 메소포타미아는 하라파와 접촉을 유지했다. 중국의 상대적 고립은 (신세계 여러 문명의 극단적인 고립과 비슷하게) 큰 강 유역 사회들이 모두 경험한 변화의 과정들 중 일부를 중국이 뒤늦게 시작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p201 당시 위기의 원인은 쇠퇴하거나 실패한 국가들이 공유한 구조적 문제, 즉 생태적 취약성과 불안정하고 경쟁적인 정치에 있었다. 이 측면에서 당시 위기는 바다 민족이 이리저리 돌아다닌 지중해 동부의 문명들에 국한되지 않은 더욱 폭넓은 위기였다

p203 하라파 문명의 몰락은 기원전 제2천년기의 대규모 실패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경우였다. 그렇지만 넓게 보면 하라파 문명은 히타이트나 지중해 동부 문명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운명을 맞았다. 다시 말해 식량 부내 체계가 자원 기반을 넘어섰다. 그리고 권력 네트워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침입자들이 들이닥쳤다

p213 앞서 말했듯이, 인류의 조건은 기후 최적기와 위기(청동기 시대 오랜 이후 최적기 이후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가 번갈아 나타나는 대순환을 경험했다. 앞서 언급한 사회들은 모두 기원전 12000년경 전 지구적 위기로 고통받았을 것이다.

p217 기원전 800년경부터 흑해 북쪽 스텝 지대에서 중앙아시아와 깊은 연관이 있엇던 듯한 새로운 전사 문화인 스키타이 문화가 출현했다. 스키타이 전사는 기존의 장궁과 달리 말을 탄 채로 쓸 수 있는 짧은 복합궁을 휴대했다. 스키타이 문화는 유라시아 스텝에서 최초로 출현한 전사단의 문화였으며, 훗날 훈족과 튀르크족, 몽골족이 스키타이족의 뒤를 따를 터였다

p225 성장하는 교역은 포식성 제국이 다시 등장하도록 자극했다. 철과 강으로 만든 새로운 무기와 스텝 지대로부터 구입한 기마용 복합궁으로 군대를 무장시키고 키워간 신흥 세력들은 작은 교역국들에 공물 납부를 강요했다

p236 이 전염병은 수백 년간 창구러하고 잦아들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9세기에 사그라졌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홍해 교역도 덮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는 이 역병이 가래톳 페스트였으며 중동부 아시아 스텝 지대에서 유전적으로 기원한 뒤 인도나 이란을 지나는 비단 교역로를 따라 전파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p237 한왕조는 계절풍이 급격히 반전된 단기간에 속하는 기원후 9년부터 23년까지 잠시 전복되었지만 이내 천명을 되찾아 중국을 통치했고, 더 오래 지속된 또다른 기후 반전에 시달린 끝에 220년 결국 멸망하여 향후 400년간 이어질 전쟁과 분열의 시대를 열었다

p242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군대를 이끌었고, 그의 손자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에 교황에게 대관을 받았다. 카롤루스 왕조는 사법 개혁과 카톨릭교회 지원을 통해 이후 수백 년간 이어질 중요한 발전의 토대를 놓았지만, 그 배경에는 고대 후기에 마지막으로 격렬해진 기후 변화가 있었다

p244 겨울 편서풍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지중해 지역 대부분이 훨씬 더 건조해졌으며, 중앙아시아도 마찬가지로 건조해져 14세기초까지 심각한 가뭄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한때 중세 온난기라고 불렀던 이기간을 지금은 중세 기후 이상기라는 더 중립적인 용어로 부르고 있다

p252 중국 전체 인구는 1200년 최고치인 1억 2800만 명에서 1400년 7000만명으로 급감했다. 여진족과 몽골족 모두 특별한 기후 전환기에, 즉 중국에 한랭 건조한 겨울이, 북쪽 스텝 지대에 온난 다우한 여름이 찾아온 시기에 중국을 침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p254 페스트는 1331년 중국을 강타했을 것이고, 1338~1339년 키르기스스탄의 도시 이식쿨을 덮쳤을 것이다. 오늘날 유전학적 연구에 따르면 페스트는 실크로드 네트워크 동단의 중심지에서, 즉 키르기스스탄과 황해의 중간쯤에 있는 칭하이-티베트 고원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p259 논리적인 윤리 체계들은 초자연적 존재를 언급했고, 초자연적 계시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계시를 합리적 사고와 조화시키려 했으며, 과학적 탐구를 하는 사람들은 마술적이거나 신화적인 설명을 배제하지 않았다. 예컨대 연금술은 화학의 어머니였으며, 점성술은 천체의 운행을 추적하려는 노력을 뒷받침했다

p261 이 여덟 가지 길은 서로 다르고 조금씩 겹치는 세 범주 또는 기둥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첫째 기둥은 물질적 가치를 단념하고 자애롭고 비폭력적인 태도를 받아들이는 지혜와 관련이 있다. 윤리적인 둘째 기둥은 폭력, 거짓말, 도둑질, 성적 비행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셋째 기둥은 지혜와 통찰을 주고 궁극적으로 지각과 감정 너머의 상태로 인도하는 수행으 ㄹ요구한다.

p270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북방 침입군에 맞선 로마 군단의 활약이 변변치 않은 이유가 기독교도 군단원이 전통적인 제물을 바치는 대신 성호를 그을 수 있도록 허락받아 로마의 신들이 노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 뒤 한층 가혹한 박해에 나섰다

p278 전반적으로 이슬람은 바른 교리보다 바른 실천을 더 강조했다. 훌륭한 무슬림이라면 알라의 명대로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고, 신성한 달인 라마단 기간에 금식하고, 술을 삼가고, 옷을 수수하게 입고, 가능하다면 메카로 순례를 다녀와야 했다

p286 후원자로서 북위와 그 밖에 많은 개인들은 5세기 후반에 운강(현재의 산시성 소재)에서 주요 석굴 53개를 비롯한 수많은 석굴들의 벽을 5만 개 이상의 불상으로 장식하는 대업을 지원했다. 북위는 493년 수도를 남쪽 낙양으로 옮긴 직후 앞으로 400년간 이어질 또다른 기념비적 사업인 용문석굴 조성을 시작했다.

p301 다른 비전들은 전통에서 더 극적으로 벗어났는데, 그중 제일은 서유럽의 새로운 고딕 대성당일 것이다. 프랑스의 일부 건축가들은 반원형 아치와 궁륭을 석벽으로 지탱해야 하는 로마네스크 양식 대신 이슬람권 중동에서 몇몇 건축물에 적용된 적이 있는 첨두 아치를 채택했다. 이 선택으로 건축물의 나머지 형태도 크게 바뀌었는데, 건축물의 횡압력을 흡수하는 부벽의 버팀도리가 추가되었고, 그 덕에 반짝인 스테인드글라스를 측벽에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p319 다이아몬드는 빙하시대 말에 순화될 가능성이 있는 동식물이 매우 불균등하게 분포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지적한다. 그런 동식물 중 절대다수는 운 좋은 위도대에서 진화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어디서든 고만고만했음을 고려하면, 운 좋은 위도대의 사람들이 십중팔구 다른 장소의 사람들보다 동식물을 더 일찍 순화시켰을 것이다. 그저 운 좋은 위도대라서 그렇게 하기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p330 성서의 이야기에는 여러 문제, 특히 그것이 예루살렘에서 밝혀낸 고고학적 세부 사실들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모든 세부 사실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긴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솔로몬 시대로부터 수백 년 후에 성서를 쓴 저자들이 기원전 9세기와 8세기의 상황을 10세기에 투영하여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역략을 과장했다고 의심한다.

p339 유라시아 제국들은 각기 다르 ㄴ정도로 고가 모델을 향해 나아갔다. 고가모델은 귀족층을 효과적으로 우회하여 정부와 농민층 사이에 직접적인 연계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저가 모델과 구별되었다. 이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간 국가일수록(로마와 중국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갔고 파르티아 제국과 쿠샨 제국이 가장 적게 나아갔다) 엘리트층과 농민층을 가르는 구분선을 없애는 한편 농민들에게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소작인으로서 대지주의 토지를 보유할 권리가 아니라)을 주고 그 대가로 왕에게 납부하는 세금과 징집 의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p349 수나라 문제는 성공하고 유스티니아누스, 카롤루스, 알마문은 실패한 이유는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문제가 거둔 성공의 결과는 분명하다. 바로 세계 조직의 중심축이 유라시아 서부에서 동부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700년경 장안에는 100만 명이, 낙양에는 또다른 50만 명이 살고 있었다

p378 스와힐리 해안의 중심부를 지배하던 두 경쟁 항구 가운데 몸바사는 앞서 말했듯이 바스쿠 다가마의 선단을 멀리한 반면, 더 작은 항구 말린디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다가마의 선단을 말라바르 해안까지 안내할 도선사를 제공했다. 이때 베푼 호의는 7년 후에 보답을 받았는데, 강력하게 무장한 포르투갈 함대가 스와힐리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중 몸바사만 포격하고 말린디는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p393 아프리카인 노예를 대규모로 사용한 것은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입해 실어오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플랜테이션 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노예의 값은 올라갔는데, 어느 정도는 식민지에서 노예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고, 어느 정도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구입하는 비용 역시 증가했기 때문이다.

p399 선박 의사의 보살핌, 최소한의 위생 준수, 충분한 식사 제공 등은 친절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노예를 살려서 수송하려는 노력이었다

p401 노예선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겪은 고통이야 전혀 과장이 아니지만, 노예 무역이 아프리카에서 초래한 피해는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p413 통치자들의 권력 증대는 그 과정의 일부, 즉 한 가지 원인이자 결과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군주들은 신성한 목표를 선호했지만 어디까지나 속권과 경쟁하지 않거나 속권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였다. 위협을 느낄 경우 국가들은 카톨리교든 개신교든 교회를 상대로 인정사정없이 한껏 권력을 휘둘렀다.

p431 과학과 종교가 서로 독립적이라는 관념은(비록 종종 주장되긴 했지만) 19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전에는 대담한 의문이 제기될 경우 이성과 실험으로 도출한 데이터와 계시를 받아 선포한 진리 사이의 대화가 서서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p434 영국 왕립학회는 1660년 건축가이자 천문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렌 경이 의장을 맡은 모임에서 저명한 학자 열두 명이 물리-수학적 실험 지식을 증진하기 위해 발족했다. 그들이 모토로 채택한 호라타우스의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마라’라는 경구는 교권보다 경험의 신뢰도가 더 높다는 생각을 암시했다.

p443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도 유럽 소비자들에게 이국적인 이미지와 유럽 방식의 대안을 제공했다. 예컨대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나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은 전제정에 대한 비판과 동양의 관대함 및 명민함에 대한 찬사를 결합함으로써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을 예고했다.

p454 이븐바투타의 생애는 근대 초에 아프리카-유라시아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보여주는 실례다.

p457 20세기 말에 이르러 역사가들은 유럽 중심주의를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유럽 중심주의에 따르면 근대 서양의 부상은 근대 초에 이상적인 모델 또는 기적이었고, 나머지 세계는 그 모델에 순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학자들은 서양의 부상을 아시아가 중심에 있는 이야기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현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p474 유럽부터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하나의 공통된 가닥이 근대 초 제국들을 연결했다. 이 제국들은 모두 역사가들이 말하는 군사 혁명. 가볍고 다루기 쉬운 화기의 도입을 계기로 일어나 혁명을 겪었다. 이런 화기의 사용법을 남자들에게 훈련시켜야 했으므로 군대를 유지하는 제도가 발전했다.

p476 발타자르 헤르비르와 앤서니 셜리 같은 사람들은 값을 치르기만 하면 어떤 후견인에게든 충성했다. 출생지, 문화적 정체성, 종교, 언어 등에 구속받지 않은 그들의 변화하는 충성은 정치적 대리인 또는 중개인이라는 직업의 직접적인 소산이었다.

p485 순교 열의와 제국에 앞서 영적 정복을 추구하려는 욕구는 십중팔구 카톨릭교도의 포부였다. 카톨릭적 맥락 밖에서 토착민이 질병으로 절멸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종교적 수사가 질병의 역할을 대신했다. 극단적이되 전형적인 사례로는, 하버드에서 교육받은 역사가이자 종교 지도자로서 인디언 절멸을 지지하는 주장을 편 코튼 매더가 있다.

p493 카톨릭교와 개신교가 투쟁하는 가운데 유럽의 평범한 가정에서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가정 일과의 수호자-이 새로이 중시되었다. 어머니는 소박한 신앙과 경건한 관행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주는 난롯가의 복음 전도자였다.

p505 2000년 어느 학회에서 참석자들이 끊임없이 홀로세를 언급하는 데 짜증이 난데다 현대 사회들이 초래한 엄청난 변화를 잘 알고 있던 크뤼천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만합시다! 우리는 더이상 홀로세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세에 있습니다”

p518 일자리는 조혼을 부추기고 출산율을 끌어올렸다. 에너지 부족, 캐내기 쉬운 석탄, 역동적이고 빠르게 성장하는 인구와 경제는 더 효율적인 석탄 채굴과 사용 방법 개발을 자극하는 강력한 유인이 되어 석탄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냈다.

p526 19세기 후반에 화석 연료 기술은 세계 각지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농업이 지구 구석구석까지 도달하는 데 거의 1만 년이 걸렸던 반면에 화석 연료 혁명은 두 세기 만에 세계를 일주했고, 부와 권력의 전 세계적 분포를 바꾸어 놓았다

p539 하버-보슈 공법은 공기 중 질소를 고정해 (비료의 원료인) 암모니아를 합성하는데, 질소가 워낙 안정적인 물질이라 반응을 일으키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석 연료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실행할 수 있게 된 방법이다. 사실상 화석 연료(대부분 석유)를 음식으로 바꾸는 공법인 셈이다

p545 우리는 특히 다른 유기체들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인류가 지구의 자원을 사용하면 할수록 다른 종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생물의 멸종률은 지난 500만 년의 멸종률보다 1000배나 높게 나타나고 있다.

p551 프랑스 혁명이 무신론을 정치적 유행으로 만든 지 한 세기가 조금 더 지난 시점에 미래파는 신이 제거되었다며 축배를 들었다. 인간을 강력하게 그리는 이미지에서 신은 주변화된 반면, 기계는 세속화된 세계의 천사가 되었다

p556 메리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개인 과학자의 혼란한 정신에서 태어난 생명체를 묘사했으며, 근대 픽션은 대중을 마치 낭만주의적 프로메테우스의 해로운 버전처럼 구속에서 풀려나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괴물로 그렸다.

p567 대중과 국가, 기술과 무신론. 이 네 기둥은 근대 후기를 지탱하는 동시에 한정해왔다. 신을 빼앗긴 세계. 비관주의와 니힐리즘을 포함하는 온갖 가능성에 열려 있는 듯한 세계라고 해서 부정적인 결과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신론과 유물론은 긍정적이고 즐거운, 진정으로 에피쿠로스적인 철학을 증진할 수 있다.

p576 적어도 세계의 몇몇 큰 지역에서는 과거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열렬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희망처럼 미래를 지향하는 개념들이 예컨대 버락 오바마의 2008년 대통령 선거 운동 등에서 이따금 다시 부각되긴 하지만, 미래를 통제할 힘은, 적어도 서구 세계와 서구화된 세계에서는 과학과 자유민주주의에 맡겨져 있다.

p586 움베르토 에코가 언젠가 말했듯이 묵시론적 인물들은 실은 체제에 가장 잘 융화되는 부류로 드러났다. 그들은 돈을 많이 벌었을 뿐 아니라 겉보기에 체제에 도전함으로써 체제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기까지 했다.

p599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이 위험 요인을 감안하더라도, 중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물질문화를 바탕으로 그 문화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p619 소련에서 젊은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새로 집권한 1985년부터 긴장이 완화되었따. 공산권을 강화하려던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의 몰락과 1991년 소련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p629 이 확산은 세계 도처에서 종족, 종교 분쟁이 부활하면서 급속이 허물어졌다. 1990년대에 정체성과 분쟁을 형성하고 표현한 것은 냉전기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아니라 지역 수준의 종족성이었다. 이 상황은 2000년대 들어 이슬람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제동을 거는 새로운 국제주의를 제시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p632 적어도 수렴이 발산을 밀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고, 세계화의 외피 아래서 발산은 계속될 것이다. 설령 언젠가 단일한 세계 문화가 출현한다 해도 그것은 기존의 다채로운 문화들에 추가된 또하나의 문화일 것이다.

p636 현실 세계에서 구현한 유토피아적 비전에 가장 가까운 사례는 20세기에 볼셰비키와 나치가 건설한 국가다. 대다수 사람들의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적이 없는 세계이며, 그 세계를 구현하는 가장 빠른 길은 적을 몰살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사회를 찾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환상이 깨지기 마련이므로 희망을 품고 여행을 이어 가는 편이 더 낫다

p638 간단히 말해 과거의 특징을 이루어온 테마들의 전개 양상을 미래에 투영해보면, 암울한 미래가 다가올 것으로 예측된다. 미래학의 수정 구슬은 울적하리마치 뿌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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