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인문학 여행
남민 지음 / 믹스커피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방구석 인문학 여행

 : 남민

 : 믹스커피

 : 2021/07/11 - 2021/07/20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단순히 지역 방문에 대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 지역의 전설과 사람사는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지니 그 동네에 꼭 가보고 싶어진다. 

춘향전의 실제 모델이 있다는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다. 

퇴계의 사랑이야기도 퇴계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아 즐거웠다. 

유홍준 선생님이 그러셨나?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고...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곳마다 전설이 숨어있고, 사는 이야기가 담겨있고, 풍류가 흐른다.

이런 내용을 어찌 다 모았는지 신기하다.

읽는 내내 재미있었다.. 


5% 풍남문에서 한옥마을 방향으로 들어오면 오른쪽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나라 천주교 최초의 순교성지로 유명하다

16% 소수서원은 충효예학이 살아 숨 쉬는 선비정신의 산실이었다. 선례후학이라 해서 학업보다는 예를 우선시했다

17% 역사적 고증을 거쳐 지난 1965년에 1/3 수준으로 축소 복원해 현재에 이르렀다. 연못 가운데에는 무왕 탄생신화를 상징하는 포룡정이라는 정자도 세웠다. 그래서 방장선산의 신선 세계와 불교사상이 결합된 곳으로도 의미가 있다

18% 궁남지 여행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철마다 각기 다른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고,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비롯한 탄생신화의 배경지라는 점,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조경예술의 극치가 담긴 인공연못이라는 점들을 염두하고 여행한다면 이곳에서 느낄 즐거움이 배가 될 것이다

19% 이 정원은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면앙 송순과 송강 정철 등 조선 중기의 많은 문신들이 양산보를 찾아와 계곡에 술잔을 띄우고 흘러가는 구름과 달을 보며 풍류를 즐기며 가사문학을 꽃피웠기 때문이다

27% 베론성지는 황사영 백서 토굴과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고 국내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33% 홍쌍리 여사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매실을 우리 식탁에 올린 장본인이자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의 대명사다. 호남의 명산인 백운산 자락에 터를 잡고 섬진강 물줄기를 빨아들여 향기로운 매화꽃을 피운 뒤 봄바람에 날려 보냈다.

38% 퇴계는 평소 매화를 좋아해 이를 소재로 쓴 글만 해도, 1,180편이 넘는데 대부분이 두향과 함께한 이후 쓴 작품이다

39% 그 흔한 성들을 두고 굳이 춘향을 성씨로 한 것은 성이성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암시했던 것이다

42% 경춘전은 그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약 250년 전 강원도 영월에서 있었던 실화다

46% 무령왕릉은 웅진시대 백제의 건축과 예술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자 백제문화의 보고다

50% 삼강주막의 주모는 625때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키우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해 2005년 9월까지 약 60년간 이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일을 그만둔 지 한 달 후 8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조선시대 주막 풍경이 이곳에서 펼쳐졌다고 하니 역사는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53% 고창은 선운사와 복분자로 유명한 전라북도 서해안에 위찬 고장이다

57% 회룡포에 도달한 내성천은 정확히 350도 회전한 후 다시 반대로 180도를 돌아 하류 쪽 삼강주막으로 향한다

62% 흑두루미가 진갠인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볼 수 없는 새이기도 하지만 4천만 년 전부터 공룡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새이기 때문이다

63% 순천만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새가 11종이나 날아드는 곳으로 전 세계 습지 중 희귀조류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68% 물을 좋아하는 대나무숲에 비라도 간간이 내리는 날이면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70% 대나무꽃은 좀처럼 볼 수 없는데, 피었다 하면 대나무밭에서 일제히 핀 후 모두 고사해버린다

77%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60-1970년대에 가족과 헤어져 돈을 벌어야 했던 수많은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은 1만 8천 명에 달했다. 그들의 눈물겨운 송금액은 당시 우리나라 GDP의 2% 규모에 달했다고 하니, 그들의 노고를 빼놓고는 근대화나 경제대국을 논할 수 없을 정도다

80% 약 1천 년 전 중국 산동성의 한 처녀가 이 마을로 시집오면서 산수유나무 한 그루를 갖고 와 지금의 산수유마을이 디었다고 한다. 산수유나무가 예물이었던 셈이다

84% 채석강은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에 취해 강물에 비치는 아름다운 달을 잡으려다 빠졌다는 채석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곳이 이태백이 놀던 채석강과 흡사하리 만큼 아름다워서 차용했다고 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해수면 아래 보이는 암반의 색이 영롱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84% 개양할머니는 지금도 전국의 무속인들을 수성당으로 불러모으고 있다 하니, 수성당은 우리나라 무속인의 성지나 다름없다

95% 동백은 꽃이 세 번 핀다고 한다. 나무에서 한 번, 땅에 떨어져서 한 번, 그리고 여인의 마음속에서 한 번. 그래서 여심화라고도 부른다

96% 섬으로 들어가는 768m의 방파제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꼽힐 만큼 아름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 한 잔 술에 담긴 인류 역사 이야기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정세환 옮김 / 탐나는책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 미와자키 마사카츠

 : 탐나는 책

 : 2021/06/28 - 2021/07/11


일본 작가와 나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간결하게 재미있게 쓰여진 책도 잘 읽히지 않는다.

주제는 참 좋았다. 

술을 매개로 하여 세계사를 엮어낼 생각을 하다니 참신했다.

그러나 내용은 크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다만 효모를 발효해서 술을 담그는 방법이 어려운 방법이 아니어서 술을 만들어 마시는 문화는 전세계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우리가 잘 모르는 마야, 잉카 문명에서도 술은 제사등에 중요하게 씌였다는 것도 배웠다. 

옛날 유물에서 발견된 흔적으로 어떤 술을 만들어 마셨는지 확인하는 것도 참 대단하고, 금주령이나 가혹한 세금을 피해 밀주나 새로운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우연이라는 게 역사에서 얼마나 큰 일을 하는지 보게 된다.

나하고는 잘 맞지 않는 책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을 것 같다. 


5% 중국에서도 술을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9% 사실 효모는 특정한 조건만 맞는다면 발효를 시작하기 때문에 양조가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10% 지중해 연안 각지의 포도 재배 기술은 페니키아인이 전해주었다고 한다

14% 와인이 보급됨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급격하게 곡물 밭에 포도원이 구축되어 곡물 부족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결국 로마인이 먹을 곡물을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에서 수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5% 서기800년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부여받은 프랑크 왕국의 카를루스 대제는 토지를 교회와 수도원에 기증하여 와인 생산을 장려하며, 서유럽에서 와인 문화의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17% 유라시아 대륙의 남쪽 끝에서 시작하는 바닷길은 10세기 이후에는 중국 도자기를 주요 상품으로 거래했기 때문에 도자기의 실로도 불린다

31% 그녀들은 아크라와시(처녀의 숙소)에서 집단 생활을 하고 술 양조, 실잣기, 직물 재배 등의 일을 했다. 치차는 그녀들이 옥수수를 씹어서 뱉은 타액으로 발효시킨 술이다

33% 전통적으로 점성술이 발달했던 서아시아에서는 실험 실패의 원인을 별의 운명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실패가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실험을 반복할 수 있었다

37% 코란이 요구하는 금주는 절도가 없는 음주를 벌한다는 의미일 뿐, 적당한 음주는 지장이 없다는 작의적인 해석이 터키 사회의 음주 규칙이기 때문이다

39% 증류란 알코올 성분을 함유한 액체를 가열하여 알코올 등의 휘발성 성분을 증발, 기화시킨 후 이것을 냉각기로 식혀 액체로 바꾸어 회수하는 과정이다

40% 1347년부터 70년 동안 페스트가 크게 창궐하여 유럽 총인구의 거의 1/3에 해당하는 2,500만명에서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47% 말하자면 몽골인과 이슬람 상인이 손을 잡고 중화 세계를 지배했던 것이다. 참고로 베네치아 상인인 마르코 폴로도 중국에서는 색목인으로 간주되었다

52% 마데이라 와인은 호박색 또는 적갈색을 띤 와인의 색이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도 셰리주, 포트 와인에 버금가는 3대 주정 강화 와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56% 데킬라 마시는 방법은 그야말로 유쾌하다. 레몬 도는 라임을 동그랗게 썰어 엄지와 검지로 집고 두 손가락 사이 밑동 부분에 소금을 올린다. 레몬이 내는 신맛을 입 안에 머금고 소금을 핥은 후 원샷으로 데킬라를 마신다

61% 확실한 것은 18세기, 유럽에 서인도제도산 설탕이 대량으로 공급되며 설탁 혁명이 일어나자, 설탕을 정제한 뒤에 남은 당밀을 이용하여 영국령 자메이카섬을 중심으로 럼주를 만든 것이다

63% 고래의 보고였던 일본 근해를 주유하는 고래를 쫓아가려면 일본 열도에도 식량과 음료수 보급지가 필요했다. 미국의 포경업자가 오가사와라를 거점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페리 제곧을 파견하여 개국을 요구한 것은 그 때문이다.

70% 샴페인은 1차 발효를 끝낸 와인에 당분과 효모를 첨가하여 병에 포장하고, 다시 알코올 발효를 시켜 탄산가스를 병 안에 머금은 상태로 숙성시킨다

73% 무색인 데다 다른 음료와 궁합이 잘 맞는 진은 칵테일의 기본이 되기에 적합했다. 진은 이렇게 미국에서 새로운 생을 찾았다. "진은 네델란드인이 만들고, 영군인이 발전시켰으며, 미국인이 영광을 돌렸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82% 몰트위스키는 스코틀랜드 북부 하이랜드에서, 블렌드용 그레인위스키는 스코틀랜드 남부 로우랜드의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를 연결하는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95%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다리가 달린 칵테일글라스에 술을 따른 뒤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바로 마시는 쇼트칵테일(쇼트 드링크)과 대형 글라스에 따른 술에 얼음을 넣어 오랫동안 차가운 상태를 지속시키거나 따뜻함을 유지하는 롱 칵테일(롱 드링크)이다

98% 맨해튼이 칵테일의 여왕으로 불리는 데 반해 칵테일의 왕은 마티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트워크 세계사 - 인류는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하는가, 교육청 책장 장학사 추천도서
민유기 외 지음 / 자유의길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네트워크 세계사

 : 민유기

 : 자유의 길

 : 2021/07/05 - 2021/07/11


제목을 보면서 예상했다.

이 책은 교역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풀어내는 책일거야..

동서양의 실크로드, 초원로드, 바닷길 등으로 문명이 어떻게 교류하고, 물품과 사람이 이동하는지를 풀어내겠지.

그러나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세계사책이다. 그것도 개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과서 세계사를 다시 읽기는 싫고, 짧게 다이제스트된 세계사책을 원하는 사람에게 좋은 책이다. 

책이 두껍지도 않고, 간결해서 세계사를 쭉 흝어 보려고 하는 사람은 만족할 것이다.

그렇지만 제목만 보고 낚여서 문물, 사람, 전염병의 교류를 생각했던 사람은 실망할 것같다. 



p21 수렵,채집사회에서 농업사회로의 전환은 단선적이기보다는 복합적이었다는 점을, 나아가 대규모 문명 건설은 농업에 종사하는 정주민과 수렵,채집인의 협업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p22 기원전 5천 년경부터 시작된 수메르의 도시화는 기원전 4천 년경에 이르러 우르나 우루크와 같은 대규모 도시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p24 수메르 북부의 아카드인은 기원전 2350년경 사르곤 왕을 중심으로 이 지역을 통일했으나 기원전 2100년경에는 우르 제3왕조가 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다.

p30 황허강 유역의 양사오 문화나 얼리터우 문화 외에도 랴오허강 유역의 홍산문화, 창장강 유역의 량주문화 등이 대표적인 유적지를 자랑하고 있다.

p39 기원전 4세기경 이들이 꽃피운 황금문화는 살아남아 유라시아 스텝지역의 다른 유목민들에게도 전파되었고 한반도의 신라까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신라금관은 황금이라는 재료는 물론, 장식 모양에 있어서도 스키타이 금관과 많은 유사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p48 파르티아는 로마에서 한에 이르는 동서교역로 상에 위치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헬레니즘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가 어우러진 다신교 사회를 이루었다.

p50 이오니아 학파로 대변되는 철학은 만물의 기원과 원리를 찾고자 했고 헤로도토스로 대표되는 역사서술은 인간사에서 신화를 걷어내고 모두가 납득할만한 설명을 추구했다.

p54 견융족의 침략을 받아 주 왕조는 관중으 호경에서 중원의 뤄양으로 천도했는데, 호경 시대를 서주, 뤄양 시대를 동주라고 한다.

p60 흉노를 기원전 4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 존재한 유목제국이다. 훈족과 같은 민족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p61 흉노 정벌을 위해 추진된 장건의 서역 원정은 동서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p62 서진은 사마염 사후 팔왕의 난이 발발해 혼란에 휩싸이는데 그 틈을 타고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 선비, 저, 강, 갈족 등 오호가 세력을 확대해서 뤄양을 점령했다. 이후 화북은 크고 작은 나라가 흥망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를 오호십육국이라고 한다.

p74 몽골은 1231년부터 30여 년간 일곱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이 대몽항쟁 시기에 황룡사의 구층탑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는데, 당시 최씨 무인정권은 불심에 의지해서 난국을 타개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조판했으나, 제5대 쿠빌라이칸 시기 복속되어 부마국이 되었다.

p86 제4대 할리파 알리와 무함마드 일족은 종교공동체의 성격을 고수하고자 했지만 제2대 할리파 우마르가 속했던 우마이야 가문과 추종자들은 제국으로 변모를 시도했다. 이 투쟁에서 승리한 우마이야 가문은 우마이야 제국을 개창했고, 이슬람교는 우마이야 제국을 받아들인 수니파와 알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시아파로 분열되었다.

p100 오토1세는 마자르족을 완전히 격퇴하고 동프랑키아와 이탈리아의 혼란한 상황을 수습했다. 이 과정에서 지역 세력에 위협을 받던 교황권을 안정화시킴으로써 962년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황제로 추대되었다.

p105 10세기 서아시아는 계속되는 튀르크인의 팽창으로 커다란 격변을 맞이했다. 이제 이슬람의 주도권은 아랍인에서 페르시아인을 거쳐 튀르크인에게 계승되었다.

p115 1375년 아라곤에서 제작된 카탈루냐 지도나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유라시아 양 극단에서 유라시아 전 세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p142 일본의 다이묘 사이에서는 다도가 유행해서 차를 마실 다기가 필요했지만,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조선에 비해 훨씬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조선의 도공에 의해 사쓰마 자기와 아리타 자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아리타의 도잔신사에는 당시 일본으로 끌려와 도자기 기술을 전수해준 이삼평을 도자기의 시조로 받을어 모시고 있다.

p150 부르고뉴-합스부르크 세력과 에스파냐의 결혼 동맹으로 태어난 카를 5세는 신성로마 제국과 이탈리아 남부, 에스파냐는 물론 신항로 개척으로 에스파냐가 장악한 남아메리카 식민지를 모두 상속받아 강력한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p169 정부에 의해 연이은 해외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은 영국 함대에 의해 고립된 이집트를 몰래 빠져나와 1799년 11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1789년부터 10년에 걸친 프랑스 대혁명도 끝이 났다.

p206 게르만계 오스트리아가 1908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세르비아와 러시아가 반발하면서 범게르만주의 대 벌슬라브주의 세력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p208 제1차 세계대전은 장기전, 참호전이었고 후방의 국민도 군수품 생산에 동원되고 전시경제의 통제를 받으며 전쟁에 참여한 총력전이었다.

p214 루즈벨트 대통령이 1936년 재선에 성공해 뉴딜 정책은 계속되었으나 경제회복은 쉽지 않았다. 대공황은 1939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과잉생산이 해소되고 군수산업이 활성화되며 극복되었다.

p216 나치는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고 언론과 교육을 통제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억압을 강화했으나, 주택과 고속도로 건설 같은 공공사업 확대와 베르사유조약 파기 선언에 이은 군수공장 재가동 등으로 독일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p225 문화대혁명은 홍위병과 노동자 등 수많은 인민대중을 끌어들인 새로운 양상의 권력투쟁이자 사상, 문화, 풍속, 습관 등 4분야의 옛것에 대한 타파를 목표로 하는 정치, 사회, 문화의 일대 변혁 운동으로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p227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연대회의 이른바 반둥회의에 참가한 29개국은 냉전질서 아래에서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며 비동맹운동을 탄생시키겨, 아시아, 아프리카 상호협력 네트워크 구축을 시도했다.

p230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러셀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 등 세계 각자의 지식인과 평화운동가들을 모아 베트남에서의 미군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로셀시민법정을 1967년에 개최했다.

p231 세계 각지에서의 68운동은 당장의 정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기에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사회, 문화적으로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68세대들이 이후 일상생활에서 민주주의를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p237 국가의 시장에 대한 작은 규제나 개입도 점차 확대되어 경제적 자유를 억누르는 굴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한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영국 보수당의 경제정책에, 케인즈주의를 비판하고 시장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중시한 시카고학파의 경제이론은 미국 공화당의 경제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옥저와 읍루 - 숨겨진 우리 역사 속의 북방민족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0
강인욱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옥저와 읍루

 : 강인욱

 : 동북아 역사재단

 : 2021/06/20 - 2021/06/27


올해 읽은 책중 가장 흥미있게 읽었다.

한국의 고대사라고 하면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 메인이고 여기에 가야가 좀 더해지는게 일반적이다.

3한에 있던 목지국이나 동해안에 있던 옥저, 동예, 북쪽에 있는 우리민족이라고 얘기하기에도 애매한 읍루에 대한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옥저와 읍루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문헌과 유물을 통해 이야기한 책은 처음이다. 

대부분 모르고 있겠지만 우리의 온돌문화는 옥저에서 개발되었다.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고구려에 시달리다 고구려에 복속된 작은 나라라고만 생각했는데, 옥저는 북옥저와 동옥저로 구분될 만큼 상당한 규모에서 정착생활을 했고, 농사와 교역등 나름 괜찮은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왕이 없을 뿐 좋은 사회구조를 가진 곳이다.

기록이 없다고 해서 후진 문화는 아니란 걸 깨닫는다.

옥저는 한반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읍루를?

읍루야 말로 나에겐 생소한 민족이다. 숙신, 물길, 말갈로 불리는 나라라고 알고는 있지만 한 번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연관지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고구려에도 읍루 민족이 있었고, 발해는 백성들 중 많은 비율이 말갈족이었고, 심지어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여진족이 우리나라에 기여한 모습을 보면 우리 민족의 역사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좋은 연구가이자 저자를 통해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

책을 읽다보니 어릴적 꿈이 생각이 나서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고고학자 되고 싶은 생각 없니?"

"아빠.. 저에게 왜 이러세요.."

음... 역시 아이와 아빠의 꿈은 다르구나.. 




4% 옥저와 읍루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전적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근거한다. 그런데 원문에서도 옥저는 710자, 읍루는 270자에 불과하다

7% 우리 역사에서 북방민족의 역사라 함은 단순히 한반도의 북쪽과 만주라는 지리적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지리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화를 의미한다

8% 북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고고학적인 자료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고고학 용어로는 생계경제)과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이들은 크게 예맥계, 흉노계, 말갈계 등으로 나뉜다

9% 수렵과 채집에 주로 종사하던 읍루계는 숙신, 물길, 말갈, 여진으로 이어졌고 청나라 때의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연해주와 송화강 일대에 사는 나나이, 3 니브흐, 울치 등은 바로 이 읍루계 주민들의 후예이다

11% 고고학 자료와 문헌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은 어느 한쪽의 연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다. 고고학과 역사학은 서로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14% 기원전 4세기경부터 잡곡농사를 짓고 집에 온돌을 놓았던 옥저계의 문화인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가 등장하면서 환동해 지역에도 본격적인 마을이 등장하게 되었다

16% 대체로 학자들은 이름만 바뀔 뿐 숙신에 대한 내용은 대체로 읍루와 유사하기 때문에 숙신과 읍루를 같은 사람들로 간주한다

18% 이후 아무르강 유역에서 읍루에 해당하는 플체 유적이 발견되었고, 1980년대가 되어서야 챠피고우 문화는 연해주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북옥저인들의 문화로 인정되었다

22% 옥저는 이제 북방 지역의 잊힌 역사에서 한러 공동연구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25% 옥저인들은 장방형으로 구덩이를 깊게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얹은 초가집에 살았다

27% 이런 수목장(나무 위에 관을 두는 풍습)은 시간이 지나면 거의 남지 않는다. 한반도와 같은 세형동검을 썼던 족장이나 샤먼들을 제외한 일반 사람들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이런 무덤을 만드는 전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28% 기후의 한랭화라는 위기는 옥저인들에게는 큰 도전이었지만, 그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사회를 더욱 발달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적응 과정과 사회 발전은 중국 사서에 옥저 또는 북옥저라는 이름을 기록하게 했다

29% 온돌 시설은 옥저에서 처음 시작되어 철기 문화의 전파와 함께 기원전 3세기부터 한반도 전역에 퍼진 것으로 보인다

30% 온돌은 옥저계와 읍루계라는 이 지역의 커다란 두 줄기 주민집단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34% 옥저계 문화의 사람들은 추위라는 단점이 있었지만 대신에 농업 생산력이 높은 이 지역이 한랜화되는 시점에 농경지를 개척했고, 그들의 전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36% 봉림 문화와 말갈 문화인들은 서로 경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기후가 바뀌면서 이 지역의 문화도 서로 교대하듯이 바뀐 것이었다

37% 옥저가 고구려의 속민으로만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구려 이전에 위만조선, 현도군, 낙랑군 등이 시대를 달리하여 옥저를 복속하려 했다. 그리고 그전에는 극동 지역에서 중원과 단독으로 교역할 정도로 큰 세력이었음이 바로 이 유물로 증명되었다

40% 위만조선이 활동한 시기인 기원전 2세기 전반에 이미 옥저는 무역의 주도권을 위만조선에게 빼앗겼다는 뜻이다

42% 옥저인들이 세형동검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즈웨스토프카에서 발견된 세형동검은 주석성문이 극히 적고 납 성분이 많아서 한반도의 청동기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43% 옥저인들은 역사 기록에 일관되게 다른 세력들에 복속된 것으로 나온다. 수백 년 동안 복속되었다면 옥저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옥저는 수백 년 이상 그 실체가 계속 유지되었다. 대외적인 정치판도와는 별도로 옥저인들의 교역네트워크가 생존 비결이었다

45%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관구검의 침략으로 8천여 인이 희생되었으며 옥저의 읍락이 모두 파괴되었다고 나온다

52% 벌판은 러시아 말로 플레인데 서쪽 러시아 사람들은 플체(작은 벌판 정도의 의미)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렇게 읍루 유적에 플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53% 플체인들은 옥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퍼져 살았다

58% 연해주의 철기는 제철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원시적인 제련시설에서 그들만의 노하우로 도끼의 날만을 강철화키셨다는 것이다

63% 숙신이라는 이름은 읍루가 이후 말갈과 여진으로 나아가는 국가의 발달 과정에서 잠깐 일어난 사건이었다

64% 이렇게 고고학적 유물과 명백히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현대 중국의 가장 동북쪽인 삼강평원의 역사를 중원과 연결시키기 위해서이다

68% 고고학 자료는 하루가 다르게 급증한다. 그러니 지금은 부합하는 것 같지만 새로운 자료가 더 많이 나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70% 구한말부터 연해주에 고려인이 정착한 마을의 근처에는 거의 빠짐없이 옥저 유적이 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입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옥저, 발해, 그리고 고려인에 이르기까지 같은 지역에 살게 되는 것이다

74% 옥저의 무덤으로 묘사된 것은 오늘날 시베리아 원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수목장을 말한다

80% 중국인들은 주변의 이방민족들을 기록할 때에는 이 받침 토기의 존재 유무를 반드시 기록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플체 문화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82% 퉁구스-고아시아족이라는 애매한 개념보다는 예맥계(옥저)와 읍루계로 나누어서 극동 환동해 지역의 역사를 보는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편하고, 우리 역사의 틀에서 바라보기도 좋다

84% 환동해 지역이라고 하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공존했다는 뜻이다

86%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는 한반도 최초의 청동기가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시베리아의 청동기 기술이 전래된 것이다

88% 환동해의 옥저와 읍루가 우리 역사에서 소외된 이유는 우리조차 부지불식간에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 젖어 있기 대문이다

88% 우리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옥저와 읍루뿐만이 아니다. 북방의 추운 지역에서 부여와 같은 거대한 성터와 집단을 이루었던 두막루, 함경남도의 동예, 700년 넘게 나라를 이루었지만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신비의 나라 부여, 그리고 강원도에 존재했던 예맥과 말갈(연해주와 송화강 유역의 예맥 및 말갈과의 관계는 정확하지 않은 도 다른 집단이다) 등 너무나 많은 북방민족의 역사가 소외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배한철

 : 매일 경제 신문사

 : 2021/06/07 - 2021/06/19


직업이 기자라는데 이정도로 조예가 깊고 다양한 국보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데 놀랐다.

부럽다. 

우리나라 수많은 유물중에서 나름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국보...

국보를 통해 역사를 바라본다니, 나름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나온 금관을 통해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유추하는 방법을 보니 유물과 역사가 어떻게 대화하는 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 연구가들에 의해 제멋대로 파헤쳐지고 왜곡되어온 우리 역사와 유물들.. 아직 제자리를 찾기엔 멀었지만 훌륭한 연구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올바르게 유물과 역사가 해석되기를 기대해본다. 

누군가는 우리나라 전 국토가 순례할만한 유적지라고 하고, 어떤이는 국보를 찾아 순례하는데, 난 이나이 먹도록 아직도 초보수준이니... 

나도 좀 열심히 살자.. 올해의 책 후보다. 



2% 필자에게 문화재를 찾아가 관람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행위이다

5% 여러 달이 걸려야 하는 세심한 작업을 10시간여 만에 후딱 해치우고 말았던 것이다

5%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3,000여 점에 달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유물은 왕과 왕비 신분을 알려주는 지석 두 점이다

9% 이후 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93년 12월, 부여시 능산리 고분군에서 주차장을 건설하던 중 놀라운 유물이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걸작 국보 중 하나인 백제 금동대향로다

14% 신라가 나뭇가지와 사슴뿔 형상으로 금관을 장식했다면, 가야에서는 풀잎이나 꽃잎 모양으로 금관을 꾸몄다

18% 고려는 한국사의 황금기이자 문화의 절정기였다. 삼국시대 불교가 탑과 불상 등 건출, 조형물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고려의 불교는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유행으로 회화가 발달했다

21% 고려청자 특유의 비색은 11세기를 거쳐 12세기 전반에 정점을 맞는다. 광택이 매우 우아하며 가마에서 구을 때 생기는 자기 표면의 미세 균열도 거의 없는 고품질 순청자가 쏟아졌다

31% 인쇄물이 아닌 목판이 온전한 채로 남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이 유일하다. 1251년(고려 고종 380 완성된 이후 800년이라는 오랜 세월 속에서도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38% 국보 제24호 경주 석굴암 석굴은 우리 문화사에서 독보적 금자탑인 동시에 동양 전체의 건축, 조각 예술을 대표하는 불멸의 업적으로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43% 알타이, 시베리아 등에서 나무와 사슴은 성스러운 상징이다. 나무는 하늘로 통하는 길이며 사슴은 하늘로 인도하는 전령사였다

43% 왕은 금관을 부장하는 전통이 채 자리 잡기 전에 사망해 무덤에 금동관을 묻었지만, 왕이 세상을 뜬 뒤 본격적인 금관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의 왕비는 금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황남대총 남분에 묻힌 왕은 바로 첫 번째 마립간, 즉 내물왕이 되는 셈이다

44% 통일신라는 한발 더 나아가 국토 중앙의 수도라는 뜻의 중원경으로 그 명칭을 바꾼다

47% 첨성대 위에 정자 등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문헌은 설씨 세헌편 외에도 다수 발견된다

48% 한 번도 발굴 조사된 바 없는 첨성대 지하와 그 주변을 파보면 첨성대를 둘러싼 수많은 의문점도 풀릴까

49% 봉영기는 가람을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사택왕후이고 그 해가 639년(무왕 40)이라고 전한다. 639년은 무왕 사망 2년 전이다. 사택씨는 성왕의 사비(부여) 천도를 도운 백제 말기 최고 귀족 가문이다

51% 일제강점기에 수리하면서 타설한 185톤의 시멘트를 제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탑은 이제 안전해졌겠지만 탑이 갖고 있던 고색의 정취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쉽다

52% 고유섭은 석탑과 불교 조각 등 불교 미술을 연구해 시대별 양식의 변화와 특징을 처음으로 정리했다. 한국 회화사를 학술적으로 집대성했으며,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이론도 체계화했다

54% 형상과 층수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국보 제 40호),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등이 여기에 속한다

56% 의상의 사당인 조사당은 1377년 재건됐고,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는 무량수전의 해체수리 공사가 진행됐다. 따라서 현재 무량수전은 고려 말 우왕 때의 건물이다

58% 불국사는 전 국민의 수학여행지이자, 경주를 넘어 우리나라 제일의 명소이다. 토함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불국사는 "불국정토를 속세에 건설하겠다"는 통일신라인들의 야심찬 꿈이 드러난 절이다. 국내 사찰 중 치밀한 구성과 미적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절이기도 하다

60% 83호는 남산 어귀의 사찰 또는 무덤에서 수습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72% 종합적으로 현재 정족산본 1,181책(완질본),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흩어져 있는 것을 묶은 것) 21책 등 총 2,124책이 남아있다

82% 그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논평했다

83% 돌 다루는 기술이 앞섰던 백제는 전탑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목탑에서 바로 석탑으로 옮겨갔다. 목탑 형식으로 쌓은 돌탑인 익사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 11호)이 그 증거로 언급된다

91% 풍속도 화첩은 단오풍정, 월하정인, 주유청강, 청금상련, 상춘야홍 등 신윤복의 명작이 총집결된 화첩이다

93% 안견이 북종화(기술적 연습과 수련을 중시)를 수용해 높은 경지의 이상적 산수화를 구현했다면, 정선은 남종화(작가의 교양과 정신을 강조)를 받아들여 독보적인 진경산수화를 창조했다

95% 정선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행세하는 거의 모든 집안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의 그림은 한양의 좋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조선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화가였던 것이다

96% 에밀레종 전설은 근대 이후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서야 등장하며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 유림의 세력이 강했던 경주에서 불교를 폄훼하고자 의도적으로 가공됐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