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도시 - 역사, 예술, 문화, 미식을 넘나드는 인문 기행
김지윤.전은환 지음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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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가 사랑한 도시
작가 : 김지윤
출판사 : 북다
읽은기간 : 2026/05/24 -2026/05/28


제목 그대로 저자가 사랑한 도시이야기..

교토, 피렌체등등 이름만 들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도시들의 향연이다.

사람들의 눈이 다 거기서 거기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는 남들도 좋아한다.

한두번은 방문했던 도시들이 많다보니 책을 읽으며 내가 걸었던 분위가와 비교해보게 된다.

여행은 추억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p19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고 가장 먼저 감옥에 가둔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과거 세상은 지금 사라지고 있고, 새로운 세상은 아직 형태를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항상 괴물이 등장한다”

p26 피렌체 시민들이 메디치 가문의 편에 서며 파치 가문을 맹비난해서다. 하긴, 피렌체 최고의 미남을 잔혹하게 살해했으니 피렌체 여성들의 공분을 샀을 법하다. 결국 파치 가문은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고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p45 르네상스 당대의 미술가이자 메디치가의 행정가였던 조르지오 바사리는 그의 책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에서 “고시코 데 메디치는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 솜씨를 애착하여… 그리소 수난의 모든 과정을 그리도록 위촉하였다”라고 전하며 그의 생애가 진실로 천사라는 이름에 걸맞다고 칭송한다.

p54 794년 간무 천황이 교토로 천도를 감행하며 헤이안 시대가 열렸고, 일본 고유의 문화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틀이 잡혔다. 1185년 가마쿠라 막부가 정권을 잡은 이래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천황가는 점점 상징적인 존재가 됐지만, 일본의 수도라는 권위와 상징은 늘 쿄토만의 것이었다.

p55 금으로 된 누각이 연못 위에 떠 있는 모습은 가히 비현실적이다. 물에 비친 금빛 누각을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져들었던 기억도 있지만, 이제 금각사에서 그런 시간적 사치를 부리기는 어렵다. 금각사는 오버투어리즘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고 사람들에 떼밀려 사찰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허검지겁 다음 행선지를 찾아 떠나야 하는 곳이 되었다.

p65 스팀슨은 교토야말로 일본의 문화적 심장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도시를 파괴한다면 전쟁 이후 미국의 도덕성에 흠집이 생길 거라 여겼다 또한 전후 소련과의 경쟁이 시작될 대 교토 공습은 일본과의 관계 복구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고, 나아가 자칫 일본이 공산주의 진영으로 기울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교토가 폭격 대상에서 빠진 것은 문화적, 정치적 고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p86 뉴욕의 프릭 컬렉션처럼, 아름다운 주택 공간에 걸작들이 무심히 걸려 있는 풍경은 20세기 초 미국 산업 자본의 위상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p99 1561년 8월, 프랑스에서 남편 프랑수아 2세를 잃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 여왕이 풍요로운 프랑스와 달리 가난하고 척박한 고국의 풍경에 놀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때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싶다

p106 경제학의 ㄱ은 몰라도 이름은 들어봤을 보이지 않는 손의 애덤 스미스, 증기기관을 개발해 산업혁명을 이끈 제임스 와트, 아이반호의 저자이자 역사 소설의 거장 월터 스콧 모두 스코틀랜드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p110 많은 위스키 이름에 계곡을 뜻하는 글렌이 붙은 것은 과거 세관을 피해 깊은 계곡에 숨어 술을 빚어야 했던 고단한 역사와, 그곳의 맑고 깨끗한 물에 대한 자부심을 함께 품고 있다.

p132 카를 5세는 저지대 지역인 겐트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벨기에의 도시다. 그는 저지대 국가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이 지역의 자치권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앙집권적 통제는 버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의 아들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였다.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종교재판을 강화해 수많은 개신교도를 이단으로 몰아 처형했다.

p158 2010년, 약 6,400만 달러를 들인 대대적인 재건축을 통해 가장 화려했던 1930년대 상하이의 분위기를 되살린 피스 호텔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적지다.

p186 인상파 화가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을 후원했고 그들을 후원했고 그들의 그림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그중에서도 집중적으로 수집한 일곱 명의 화가, 일명 카유보트 세븐이 존재했다. 클로드 모네, 애드가 드가, 카미유 피사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에두아르 마네, 폴 세잔이 그들이다.

p190 루브르의 소장 컬렉션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 인물은 나폴레옹이다. 정복 전쟁을 통해 쓸어온 수많은 예술 작품으로 치장한 루브르는 그야말로 황금기를 누렸다.

p198 사람들은 파리에 오면 시시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 안을 들여다본다. 쇼윈도를 넋놓고 바라보는 도시 산책의 즐거움이 어느새 200년을 훌쩍 넘겼다.

p216 이 공간의 개발 방식을 두고 수십 년간 수많은 논의가 오갔고, 그사이 많은 계획안이 좌절되고 폐기된 기록이 남아 있다.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오래된 건물의 골격을 그대로 살려 이처럼 완성도 높은 공간을 만들어낸 런던 사람들의 참을성이 조금 부럽게 느껴진다.

p228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하원에서는 의원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이 클라크인 의원을 미스터 클라크나 미세스 클라크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 의원의 지역구를 붙여 ‘The Honourable Member / Gentleman / Lady for 지역구 이름’과 같이 불러야 한다.

p230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웃음이 나올 법한 관례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여전히 지켜오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영국의 매력이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던 시기에 “우리는 저렇게 하지 말자”라고 경고했던 에드먼드 버크의 나라답다. 이 모든 것인 전통이자 역사이며, 영국이 자랑스러워하는 대영제국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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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삼킨 세계사 - 12척 난파선에서 발견한 3500년 세계사 대항해
데이비드 기빈스 지음, 이승훈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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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다가 삼킨 세계사
작가 : 데이비드 기번스
출판사 : 다산초당
읽은기간 : 2026/05/16 -2026/05/25


제목을 봤을때 머리를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난파선 세계사라니.. 정말 섹시한 주제 아닌가...

청동기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때 침몰한 배까지 다양한 시대의 난파선이 나온다.

난파선은 건져올린 배도 있지만 대부분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유물과 문서분석을 통해 난파선을 연구하게 된다.

물속에 있다보니 유물의 보관상태가 꽤 괜찮고 이로 인해 오래된 과거의 역사가 생생하게 밝혀지는 경우가 꽤 많다.

다만, 유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 연구가가 전문 다이버가 아니다보니 다이버에게 지시를 하고 발굴이 되어 제대로 연구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저자는 직적 다이빙을 배워 난파선에 접근하여 더 많은 연구와 성과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본인이 직접 탐사하거나 연구했던 배들을 중심으로 씌여졌다.

난파선에 대한 자료가 문서로 있는 경우도 많아 풍부한 배경과 공부가 되었다.

특히 청동기 시대의 난파선을 통해 오래된 과거의 유물과 뱃길을 추측하는 건 정말 아름답고 섹시하다.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 부럽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올해의 책 후보다.


p24 청동기 시대에 이미 인류가 바다로 항해했음을 알려주는 이 실험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교역과 통신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 볼 수 있게 되었다.

p32 이 연구가 갖는 함의는 엄청나다. 비커 민족이 브리튼 섬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판자 배인 페리비 보트에서 고도의 목재 접합기법이 사용되었다. 그 증거로 미루어 보아 이 보트 건조술은 청동기시대 브리튼섬 토착민이 발명한 것이라기보다 이민자들이 가져온 것 같다.

p44 청동기시대 교역을 브리튼섬이나 유럽대륙 항해자가 맡았는지를 토론하는 대시 ㄴ이들을 영불해협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문하 일부로 볼 수 있다. 교역의 기초를 제공한 사회 네트워크는 상품 수송 이외에도 선물교환, 지참금과 정치적 동맹 같은 다른 요소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p52 울루부룬 난파선은 청동기시대에 찬란한 빛을 비춰주는 두가지 기념비적 발굴과 어깨를 나란히 할 발굴이다. 다른 두 가지 발굴은 1876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진행한 그리스 미케네 성채 발굴과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진행한 투탕카멘의 무덤 개봉이다. 울루부룬 난파선에서 네페르티티의 금제 스카라베가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이 난파선의 연대는 네베르티티의 생전이나 그직후, 아마도 투탕카멘의 치세로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p71 대단히 흥미롭게도 이 책에서 다루는 인도네시아 연안 벨리통에서 발견된 2000년 후의 난파선에서도 비슷한 황금잔이 발견되었는데 이 잔도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런 잔은 외교 선물이나 교역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76 주석은 그 자체로 귀중한 상품이었을 뿐 아니라 주석을 수송하는 선박은 왕실끼리 교환하는 선물이나 다른 교역용 물품을 같이 수송하기도 했으므로 무역에 전반적 활기를 불어넣었다.

p83 울루부룬 난파선은 무덤에 매장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 실제 사용되는 물건들의 모음이라는 점에서, 이 무덤에서 발견된 이집트 왕조의 엄청난 부가 파라오나 파라오의 영생만을 위한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p88 에게해와 동지중해 지역의 청동기시대 말기의 증거는 이 시대가 평화로운 이행이 아닌 폭력과 말살로 끝났음을 보여준다. 문화적 성취를 활짝 꽃피우며 평화롭게 번영하던 세상이 인간의 행위와 자연재해의 합작으로 너무나 금방 무너졌다.

p109 몇 개에는 로마의 표식이 있었고 포에니어 명문이 새겨진 것도 하나 있었다. 이 명문에는 카르타고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동지중해 지역에서 숭배되던 최고 신 바알이 등장한다. “바알의 분노를 담아 이 충각이 적선을 향하기를. 우리는 바알의 힘으로 일발필중할 것이며 가운데 있는 적의 방패를 타격할 것이다.

p122 기원전 6세기의 전 소크라테스 철학자들은 주로 자연계에 관심을 가졌지만, 페리클레스 시대에 들어 후대 철학자들은 정치와 국가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며 인간계로 초점을 바꿨다. 플라톤은 철학계에 일어난 이런 전환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p132 세베루스 황제의 치세에 최대로 확장한 로마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사하라부터 브리튼섬 북부까지, 그리고 로마인이 갈 수 있던 라인-다뉴브강 국경까지 수백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했다.

p145 실제 관찰보다 철학적 사고에 더 바탕을 둔 4대 체액이라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처럼 철학과 의학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p213 페르시아만의 바스라에서 시작해 중국 광저우를 잇는 항로는 바스쿠 다가마가 1498년에 인도에 도달해 유럽 선박과 동방을 연결하기 전까지 정기적으로 이용된 가장 긴 항로였다. 아랍에서 출발한 9세기 난파선이 인도네시아 벨리퉁섬에서 발견되면서 우리는 당시의 교역과 리처드 버턴이 그렇게 매료된 동방 세게를 아주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p214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난파선 중 하나인 벨리퉁 난파선은 해양 실크로드의 형성기 동안 아바스 왕조 페르시아와 중국 당 왕조 사이에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다.

p229 아랍 작가들의 스리위자야 묘사는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이야기처럼 약간 비현실적 분위기마저 풍긴다. 마치 이들도 자신이 쓰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믿지 못했던 것 같다.

p243 예술적 표현과 감성은 사람이 살고 직업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당시에 관리가 되려면 반드시 시 쓰기 능력을 갖춰야 했다. 시서화 삼절의 관계는 난파선에서 발견된 사발에도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p250 793년 그날 린디스판섬에서 일어난 일의 실체는 유적에서 발견된 이른바 둠즈데이 비라는 9세기의 묘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비석의 한 면에는 천상의 십자가 앞에 절하는 사람이, 다른 한 면에는 칼과 도끼를 휘두르는 전산 일곱 명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의 공포를 자아낸 것은 바로 피레네 드라칸, 즉 용머리 모양 선수에 핏빛의 붉은 줄무늬 돛을 올리고 바다에서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바이킹의 배였다.

p261 바이킹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흘수선이 낮은 롱십일 이용해 발트해, 흑해와 카스피해를 잇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볼가강, 돈강, 드네프르강, 드니에스트르강과 같은 여러 지류를 능숙하게 항해할 수 있었다는 증거가 되어진다.

p298 하갑판에 있던 사람들은 물이 들어차는 동안 통로로 빠져나오려 애쓰다가 그물 아래 갇혀버렸을 것이다. 이것은 중세 해전이 남긴 비극적인 잔재다. 근접전을 위해 바짝 붙은 적선에 대항하는 데 그물은 좋은 수단이었을 테지만, 장거리 포격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p307 잔해에서 발견된 식단 관련 증거를 통해 우리는 어떤 점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일상생활의 면면을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영국의 세력이 지리적으로 점점 확대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다음 세기의 식민지 개척과 제국 건설로 이어지는 전환점에 해당한다.

p314 이 궁수의 존재는 헨리 8세의 군대에 먼곳에서 온 용병도 포함되어 있었고, 아프리카 계통의 사람이 튜더시대 잉글랜드에 도착하고 있었음을 일깨워준다.

p328 수천 개의 반짝이는 청동 옷핀. 그것이 바로 이 난파선에 멀리언 핀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였다. 이 핀들은 1667년 가을에 암스테르담에서 선적되어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향하던 어마어마한 화물 중 일부였다. 나는 산토 크리스토 디 카스텔로호를 제대로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p362 램브란트의 만년 걸작이자 그가 1669년에 사망하기 얼마 전에 완성한 2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이 있다. 이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겨진 것의 의미에 대해 수많은 추측이 이어졌다.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과 그림은 이들이 미완성으로 남을 때, 완성되었을 때보다 더 큰 찬사를 받는다”라는 로마 시대의 대 플리니우스의 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의 이탈리아 미술사가 바사리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많은 화가는 일종의 불타오르는 영감에 인도받기라도 한 것처럼, 상당한 대담함을 발휘하며 자신의 첫 스케치를 훌륭하게 완성한다. 그러나 마무리 과정에서 이 대담함은 사라진다”

p377 로열 앤 갤리호의 이야기는 대중을 매료시켰다. 항해사가 배의 운명을 걸고 벌이는 도박, 바람의 방향과 함께 변하는 변덕스러운 운명, 지휘고하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 죽음… 질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하루아침에 일고 운명의 장난이 변덕스럽고 잔인하게 느껴지던 그 시절, 언론은 이 난파 사고를 몇 년 동안 열심히 보도했다.

p404 노예 무역상과 해적은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보였을 것이고, 린호와 로열 앤 갤리호의 장병은 자신들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어준 기독교적 가치에 반하는 무역을 보호하고 있다는 데 환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p412 노예무역과 이단심문의 공포를 보면서 우리는 계몽시대가 철학적, 창조적 꽃이 피어난 시대였지만 극단적 인종차별과 종교적 편견의 시대이기도 했다는 점을 다시 깨닫는다. 프란시스코 가족은 포르투갈 유대인도 이단심문의 마수에서 벗어나 살 수 있던 해양 세계는 고향인 유럽대륙보다 포용적이며 관대했다.

p417 유니카는 남편뿐 아니라 해군 자원병인 아들 존까지 “리저드 암초에서 익사”로 잃었다. 해군성에 낸 청원에 따르면 “생계 수단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가장 불행한 환경에 처하게 된” 유니카는 국왕에게 연금을 신청했지만 각하당했다. 적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의 유족만 연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p424 1984년에 연구를 위해 시신일 발굴되면서,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는 곳에 보존되었던 이들의 얼굴이 공개되었고, 그 이미지는 곧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탐험대가 그해 겨울에 버린 깡통 수백 개가 아직도 현장에 있었다.

p430 테러호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난파선 중에서 침몰 전의 모습을 설명할 때 고고학적 증거보다 문헌 증거를 더 많이 이용하는 첫번째 배이자 기술 도면 및 적재 목록이 남은 첫 번째 배이기도 하다. 테러혼 잔해의 발견은 고고학이 새로운 사실을 찾는 근원으로서뿐 아니라 상상력과 감정 발현의 촉진제로도 기능한다는 것을다시 생각하게 한다.

p433 미국의 농제는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으니 프랭클린 원정대가 구려졌던 시대에 영국이 쌓은 상당부분의 자본은 노예착취를 통한 것이었다. 영국 선박으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를 수송했던 18세기의 악명 높은 삼각무역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생계를 의지하고 있었다.

p487 게어소파호의 잔해에는 마지막 순간의 충격과 공포가 그대로 남아있는 듯했으나 침몰까지 고작 몇 분 전의 모습이 사진처럼 생생히 보존되어서 격침되기 전의 모습을 떠올리는 데 상상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p501 갑판원 27명 중 18명이 산드윕섬, 그중 여덟 명이 만트방가 마을 출신이었다. 그리고 기관원 29명 중 27명이 파틱차리에서 왔고 그중 16명이 박타푸르와 이웃 마을 다르마푸르 출신이었다. 배 한 척이 침몰하면 작은 공동체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p510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영국 선적 선박 3500척, 그리스 선적 선박 930척, 미국 선적 730척, 노르웨이 선적 690척, 네델란드 선적 260척뿐 아니라 이들을 호위하던 수많은 연합군 함선이 격침되었다. 반면에 독일은 유보트 785척을 잃었고 이 중 다스는 승조원 전원과 같이 침몰했다. 이 숫자는 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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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는 밤 - 그림과 문장과 삶을 엮은 내 영혼의 미술관
이소영 지음 / 청림Life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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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림읽는 밤
작가 : 이소영
출판사 : 청림라이프
읽은기간 : 2026/05/07 -2026/05/15


믿고보는 큐레이터 이소영님의 책..

이소영님은 르네상스처럼 옛날 그림대신 인상파 이후의 작가들의 그림을 많이 소개한다.

그 이야기는 나는 잘 모르는 그림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림이 편안하게 말을 걸어오게 한다.

작가들을 잘 모르고, 그림도 잘 모르지만, 그림이 정겹고 편안하다.

그림읽는 밤은 그중에서도 더 편안한 그림들이 많다.

책을 안살 수가 없다.

잠들기 전 또는 커피 한잔 마시면서 한장씩 넘기며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그림을 잘 모르는 나에게 이소영님의 책이 한권 두권 늘어나고 있다.

그림을 좋아하는 건지 이소영님을 좋아하는 건지 헷갈린다. ^^

올해의 책 후보다.



p21 그의 편안한 자세가 말해 주듯, 진정한 자유는 목적지가 아닌 흘러감 그 자체를 즐기는 데서 온다. 불확실함 속에서도 순간의 부유를 만끾하는 것, 그것이 이 그림이 보여주는 자유의 진짜 모습이다.

p27 사람들이 가 보지 않은 세상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시작이든 시작은 언제나 늦지 않다.

p43 자유로운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배움을 찾고, 어려운 순간에도 에너지를 잃지 않는다. 자유로운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이나 증오에 휩쓸리지 않고, 마치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아이처럼 무너져도 다시 쌓고 그 과정을 즐길 줄 안다. 중요한 것은 무너졌다가도 다시쌓아올리는 바로 그 경험이다.

p61 본래 파리의 세관원이었던 앙리 루소는 직장이 쉬는 일요일에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의 화가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곤 했다. 또한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으므로 루브르 박물관에 가 작품을 모사해 가며 실력을 쌓았고, 그 뒤로는 자신의 순수한 직관을 바탕으로 인상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했다.

p73 이모티콘 하나로 감정을 표현하는 시대에 단어 하나하나를 고민하며 편지를 쓰는 이 여인의 모습은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때로는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그 망설임의 시간 자체가 사랑이 아닐까?

p87 7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붓을 든 모지스 할머니는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나이와 무관함을 몸소 증명했다. 관절염으로 자수를 놓기 어려워지자 여동생의 제안으로 그림을 시작했다는 일화는 역경이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음을 보여준다.

p93 마치 하루가 그곳에서 종말을 고하듯 저녁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만물이 거기서 탄생하듯이 아침을 바라보아라. 그대의 눈에 비친 것들이 모든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

p104 그는 풍경화를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영혼의 거울로 승화기키는 데 성공했으며, 특히 일몰 연작에서는 빛의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에 따른 심리적 경험을 섬세하게 그려 냈다. 아미에트의 방식은 격정적 붓질로 대표되는 독일 표현주의와 달리, 명상적 정적과 사색 속에서 감정의 깊이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p115 미칼로유스 치율리오니스의 천사의 서곡은 한 천재가 광기의 문턱에서 목격한 계시다. 리투아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이 청년은 작곡을 공부하다가 갑자기 붓을 들었다. “음악만으로는 내가 본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었다.

p147 1066년 헤이스팅스전투나 1456년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무렵에도 혜성이 관측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페르스위어는 이 같은 시대의 감각을 과장하지 않고 밤하늘을 바라보는 여러 표정으로 담아냈다

p153 그 순간, 나는 공기가 걸러 낸 멜로디를 들었고, 숲의 모든 잎들이 대화를 나누는 선율이 흘렀다. 메아리, 그것은 숲의 목소리였다(월든)

p182 1918년 큼림트는 스페인 독감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의 죽음은 에곤 실레, 콜로만 모저 등의 연이은 사망과 더불어 빈분리파 전성기의 종료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p191 아무도 다시 젊어지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탐구와 관찰의 정신을 유지함으로써 의식을 풍요롭게 채울 수는 있다.

p204 글과 그림이 모두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것에서 비롯된다면, 이 작품은 이 ‘사로잡힘’ 자체를 그린 메타회화다. 호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인간의 본능. 부재 속에서 더 강렬해지는 존재감. 감춰진 것일수록 더 간절해지는 마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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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조선여행 : 전국 편 - 지식 가이드와 떠나는 팔도강산 역사 투어 한국사 여행 2
트래블레이블 외 지음, 이도남 감수 / 노트앤노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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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당일치기 조선여행 : 전국편
작가 : 트래블레이블
출판사 : 노트앤노트
읽은기간 : 2026/05/09 -2026/05/12


예전에 서울편을 읽고 재미있어서 전국편을 추가로 읽었다.

결과는? 역시 재미있었다.

테마가 있는 여행이라 더 재미있다. 다만, 책에서 스토리로 읽는 여행지와 실제 추천하는 여행지가 약간 다르다. 아마 유적이나 유물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전국편이라 전국의 이곳저곳을 보여주는데 경주나 수원처럼 잘 알려진 곳도 있지만 대전이나 제주처럼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지역도 있었다.

새로운 곳을 배우니 배우는 기쁨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의 모진 역사를 알게 되니 마음이 아리고 슬프다.

식민지 역사는 읽어도 읽어도 힘들다.. 그당시를 살아내신 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모두가 고생이다. 그런일 없기를...

전국편을 봐서는 좀 더 많은 지역을 다루는 후속편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p28 방화수류정은 용두바위 위에 지은 각루입니다 정조는 각루 아래 용연과 용두바위를 보고 상서로운 바위의 모습이 우연은 아닐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는 용머리를 한 용두바위에 뿔을 선물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용의 뿔과 비슷한 형태인 십자각 지붕이 탄생했지요.

p44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겪을 때는 영혼 숭배자이다.

p48 광희문은 저승길의 첫 번째 관문이자 이승과 작별하는 마지막 장소였습니다. 먼 길 떠나는 망자의 평안을 바라는 유가족은 하늘과 인간을 잇는 무녀를 불러 노제를 치르곤 했습니다.

p58 세습무는 자신이 속한 고을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사제이자 굿을 책임지는 일종의 행사 전문가였는데요. 고을의 사당, 신당 등을 관리한다는 의미로 고을(골)과 당이 더해진 당골, 당골네, 단골 등으로 불렀습니다. 지역 사회에 굿이 필요할 때면 사람들은 지역 행사 전문가인 단골집을 찾아갔겠죠? 때마다 세습무를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단골손님이라는 표현이 파생되었습니다.

p76 기대승이 사단과 칠정은 각각 이와 기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며 이황의 주장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며 일단락되었으니까요. 8년간 두 수취인 사이를 부단히 오간 편지는 그 시절을 살았던 선비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p104 허초희는 어릴 적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에 재능을 보였는데, 오빠 하곡 허봉은 그의 시가 더욱 깊어질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소개해주고, 명나라를 다녀올 때 귀한 시집을 구해다 선물하기도 했지요.

p115 1957년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 공예에 공예적 회화란 글을 기고하는데,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하여 그려지고 민중에게 구전되는 그림이라 정의하여 민화라 명명했죠

p157 1888년 개항장에는 국내 최초로 영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약식 호텔, 대불 호텔이 그랜드 오픈을 맞이합니다. 일본인 거류지에 위치한 대불 호텔은 일본인 사업가가 건립해 외국인 선교사, 외교관, 상인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았지요.

p180 친일 인사들이 서촌에 터를 잡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서촌을 두르고 있는 인왕산은 기세가 강하고 양의 기운이 넘쳐 엎드려 수도를 지키는 호랑이 형상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왕기가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권력자들도 탐내던 땅이었지요.

p186 김가진이 떠난 후 백운장은 요정이 되었다가 광복 후 부통령 관저로 쓰였고, 1962년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매입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각석과 석조물이 전부지만, 이곳에 맑은 삶을 살았던 이가 있었음은 바위에 남은 그의 글씨처럼 선명히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p206 400여 명의 환자와 함께 경성에 나타난 최홍종을 본 일제 총독은 크게 놀랍니다. 그제야 지금껏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꾸어 나병 환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일본군의 휴양지였던 소록도가 한센병, 즉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알려지게 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p226 박태준은 1924년 자신의 모교인 계성학교로 돌아오 ㅏ합창부와 악대부를 지도했습니다. 또한 어릴 때 함게했던 대구제일교회 합창단의 지휘자로 활동하며 그곳에서 일곱 살어린 후배 윤복진을 만납니다. 음악을 매개로 친구가 된 그들은 첫 동요곡집인 중중떼떼중을 시작으로 양양범버궁, 도라오는 배까지 총 3권의 책을 무영당을 통해 발간합니다.

p233 이상화는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격렬한 울분과 저항을 시에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개벽 70호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억눌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이를 본 일제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개벽은 작두로 썰리고 강제 폐간되었습니다.

p271 눈부신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이나 최상위 계층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한껏 공들여 만든 금관이었으니 얼마나 화려했을까요. 이 고분은 사상 최초로 금관이출토되면서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p283 고려시대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경주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사성장 탑탑안해”, 절과 절이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과 탑이 기러기처럼 줄을 잇는다는 뜻입니다. 신라는 이 땅이 곧 부처가 계신 곳이라는 불국토 사상을 믿으며 경주 일대에만 100여 개의 사찰을 지었다고 합니다.

p310 대전근현대사전시관은 대전에서 보기 드물게 원형이 잘 보존된 근대 건축물로, 1930년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관공서 건축 양식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혹자는 시즈오카현 청사 본관과 외형이 유사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p319 대전 골령골 산골짜기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리는 가로 30m에 달하는 집단 매장지가 조성된 것입니다. 1950년 6월과 7월 사이, 20여 일 동안 수감자들은 골령골로 줄줄이 끌려갔습니다. 미결수부터 정치사범, 과거 좌익에 뜻을 뒀다가 전향한 이들까지 최소 1800여 명의 비명이 그 골짜기를 휘감았습니다. 좌우의 이념이 대립하던 시대, 학살자는 다름 아닌 정부와 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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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 진경산수를 개척한 우리나라 화성 새로 쓰는 화인열전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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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겸재 정선
작가 : 유홍준
출판사 : 창비
읽은기간 : 2026/04/28 -2026/05/07


취화선같은 영화로 보고, 간송미술관이나 역사책에서 미술작품으로만 봤던 겸재 정선에 대한 평전이다.

양반이었고, 꽤 많은 벼슬을 했고, 말년에는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역시 아는 듯 하지만 전문가들의 책을 보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된다.

정선의 그림을 여러 점 봤었지만 책에서 시대별로 설명해주니 훨씬 이해가 잘 됐다.

이해가 잘 됐다고 해서 그림을 잘 알게 됐다는 건 아니다.

유홍준 작가님의 설명중 상당수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그림을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아는게 없으니 설명을 들어도 마음에 확 와 닿으면서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그게 내 한계이긴 하지만 그림을 볼 때 봐야하는 방법을 하나 더 알게 됐다는 것으로도 만족한다.

다음책도 기대된다.


p25 금강전도는 이처럼 수직과 수평, 선과 점, 흰색과 검은색, 밝음과 어둠, 큰 것과 작으 ㄴ것 등이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상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변형과 과장, 필법의 강약, 광선의 대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보는 이의 눈과 가슴을 압도하는 화면을 창출해냈다.

p51 겸재가 섵불리 자기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고전을 차근차근 방작하는 중년의 겸손과 성실성을 거쳤기 때문에 훗날 자신의 개성에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p54 겸재의 득의산수에서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소가 한 화면 속에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면 상단의 암봉과 먼 산은 인조,숙종 연간의 전통 산수화풍이고, 하단의 초가집과 안개 표현은 남종문인 화풍이며 버드나무, 전나무의 수지법과 냇가 암석의 표현에는 겸재가 진경산수에서 사용한 조선 산천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p64 겸재 그림을 기년작 중심으로 볼 때 겸재다운 필치가 구사되는 것은 환갑 이후이다. 특히 64세때 그린 청풍계도와 65세 대 그린 서원소정도, 그리고 이 즈음 그린 경교명습첩에 이르러야 겸재다운 멋이 흔연히배어나며, 그의 노숙한 필치는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에서 구사되었으니 그는 확실히 대기만성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p67 본래 정통 산수화론에 의하면 산수화를 그리면서 기피해야 할 점 16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길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으니, 이를 모를 리 없는 겸재가 이와 같이 그렸다는 것은 지도의 구도를 참고하여 그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p77 신묘년 풍악도첩은 금강산을 사생한 첫 작품인 만큼 화가의 시각이 대상의 성격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여 붓끝이 아직 풀리지 않은 인상을 준다. 이에 반하여 해악전신첩은 대상의 포착보다 회화적 재구성에 더욱 힘쓴 것을 확연히 볼 수 있다.

p81 정양사 앞에 일만이천 봉을 배치했다면 한 폭의 분경도에 불과했을 것이나 구름안개로 가려진 모습을 그려서 도리어 공계(허공의 세계)와 다르게 하였다.

p95 이 북원수회도는 훗날 단원 김홍도가 개성의 60세 이상 어른의 경로잔치를 그린 기로세련계도(일명 만월대계회도)의 선구로 삼을 만한 기념비적인 계회도이다

p108 조유수가 시중호만은 꼭 그려달라고 한 것으 ㄴ시중호가 흡곡현에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겸제는 결국 삼부연, 불정대, 삼일호, 시중대 4폭을 그려서 조유수에게 보내주었고, 이듬해 조유수는 흡곡현령을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이 그림을 받고는 너무도 기뻐서 그림마다 시를 지어 부친 것이 그의 문집 후계집에 전해지고 있다.

p128 겸재는 훗날 60대 때 인곡유거도를 그렸는데, 이 그림을 보면 초가 대문 안 마당에 고목이 두 그루 있고 겸재가 사랑채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이 있다.

p196 겸재의 진경산수는 인왕제색도에서 보이듯 짙은 먹을 사용한 웅혼한 필치의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의 한강 그림들은 은은한 담채를 사용한 아주 부드러운 그림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겸재는 산을 그릴 땐 남성적, 강을 그릴 땐 여성적인 필치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p214 능숙한 필묵법을 구사하여 60대와는 또 다른 화풍으로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니 겸재느 ㄴ그야말로 대기만성의 화가였다.

p224 겸재의 취성도는 화견이 극상품이어서 조금도 변색되지 않고 마치 엊그제 그린 것처럼 선명하고 영롱하다.

p240 이처럼 앞 시기와는 확연히 다른 겸재의 70대 이후 필법의 중요한 특징을 이동주는 우리나라의 옛그림에서 강한 필세, 겹쳐진 먹빛의 묵직한 중묵, 바위의 양감이라고 하였다. 이느 ㄴ겸재가 즐겨 그린 장동8경에 잘 나타나 있다.

p260 관아재 조영석은 겸재의 진정한 예술적 동반자이고, 예리한 비평가이고,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p293 영조는 이날 승지들을 입시시깉 가운데 인사 발령 명단을 본 뒤 특별히 배려해야 될 사람이나 관심이 가는 인사들에 대해 궁금한 점을 점검하다가 겸재의 이름을 보고 몹시 반가웠던지 “정선이 아직도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부승지 한광조가 “나이가 거의 80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영조가 “요즈음도 아직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물으니, 우부승지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p301 영조는 이렇게 겸재를 중용한 것이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 일은 영조의 비호 속에 겸재는 살아나고 오히려 정술조는 다른 사건과 연계되어 파직되고 끝났다.

p315 이 말년작 장동8경첩은 앞의 두 화첩과는 필치가 완연히 다르다. 대상을 소략하게 표현했고, 필치는 스스럼없이 그어간 스케치풍으로 노필이 주는 간명함이 역력하다

p322 겸재가 이룩한 진경산수의 세계는 진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적 산수화를 창시하고 완성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성숙에 힘입어 이를자신의 숙명적 과업으로 알고 신분을 떨쳐버리고, 남들이 천하다고 비웃는 소리에 괘념치않고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화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이와 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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