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 인류가 잃어버린 25개의 오솔길
하랄트 하르만 지음, 이수영 옮김, 강인욱 해제 / 돌베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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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작가 : 하랄트 하르만

출판사 : 돌배게

읽은날 : 2021/04/11 - 2021/04/19


흥미로우면서도 재미있는 책..

제목이 좀 이상하다..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라고 물으면서 답은 안 알려준다.

강 옆에서 발원한 4대 문명과 그 이후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문명의 역사와는 달리 세계 이곳저곳에 후기 구석기 문화때부터 다양한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실제 유적발굴과 함께 이야기한다. 

최신의 발굴 사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처음 읽는 내용들이 많았다. 

도나우 문명처럼 전혀 뜻밖의 유적지에 대한 소개는 호기심을 많이 자극했다.

내가 알고 있는 고대사가 얼마나 편협하고 얕은 지식인지 깨닫는다.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어 역사가 바뀌고 있는데 아직도 옛날에 배웠던 세계사만 알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유목민 문명에 대한 내용도 유물등으로 내용이 보강되니 훨씬 더 풍부한 역사가 된 것 같다.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 문화와 문명은 더 알려져야 하고 연구되어져야한다. 

좋은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

나에겐 올해의 책에 오를만하다. 



p18 유럽에는 현생 인류가 이주하기 전에 세 종의 초기 인류가 살았다. 초기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후기 네안데르탈인이었다

p21 쇠닝겐과 빌칭슬레벤에서 발굴된 유물은 진화의 역사를 지금까지보다 훨신 더 깊이 있는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이델베르크인은 분명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행동할 줄 알았다.

p37 기존의 연대기에서 볼 때 인류는 약 1만 5000년 전에 북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했다. 이 말은 매머드를 뒤쫓아 베링 해협을 지나 알래스카로 이동한 빙하기 사냥꾼들이 첫 이주자였다는 뜻이다

p39 대칭적인 양면을 가진 돌날에서 특이한 점은 그런 특수한 제작 기술이 북아메리카 남서부에서 선행 단계도 없이 느닷없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척 이례적일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p51 베를린 독일 고고학 연구소 오리엔트 분과 담당자로서 1995년부터 2014년 사망할 때까지 괴베클리테페 발굴 작업을 이끈 클라우스 슈미트는 이곳 신전이 여러 지역의 사냥꾼과 채집인 집단이 모이는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p55 인간은 검은목두루미의 짝짓기 행동을 자신들의 사회적 행동인 춤과 동일한 표현 형태로 보았다. 춤 모티프는 네발리초리에서 출토된 부조 그림에서 발견되는데, 인간의 몸에 새의 머리를 한 존재가 춤을 추는 모습이 형상화되었다

p58 괴베클리테페 신전은 조금은 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신전은 파괴되지 않았고, 기원전 제8천년기초 언젠가 그냥 버려진 채 묻혀버렸다. 그렇게 묻히게 된 것도 오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퇴적 작용의 결과가 아니었다.

p75 고유럽 구상은 1990년대에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많은 회의론자에 의해 비난을 받으며 거의 잊혔다. 그러나 더 새로워진 문명 연구 방법을 통해서 고유럽 구상은 다시 살아났고, 오늘날에는 관련 학계 토론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p78 사람들은 청동기 시대를 최초의 유럽 문명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남동유럽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시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기술적 완성도와 예술적 창의성, 사회적 복합성 측면에서 일반적인 견해와 상충되는 수준에 도달했다

p85 도나우 문명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즉 위계질서에 딸라 조직되지 않은 공동체에서도 사회와 경제, 기술적 수준이 고도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91 페르시아만 국가들을 소개한 안내서에는 딜문에 관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기원전 약 4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까지는 딜문 문명이 아라비아의 동쪽 해안을 따라 약250마일까지 지배했는데, 오늘날의 쿠웨이트에서 바레인과 내륙으로 60마일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p103 딜문의 경우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받아들여 문자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인더스 문자는 다른 문명의 기호 체계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인더스 문자의 기호 체계는 지역 고유의 창조물이다

p109 하투샤 폐허는 처음 발견되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히타이트 문명에 속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당시에는 히타이트인이 원래 누구였고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p118 고고학자들은 일찍이 하투사에 있던 많은 건물이 화재로 파괴되었다고 단언했고, 오랫동안 흑해 북쪽의 초원 지대에서 온 카스칸 유목민이 도시를 정복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카스칸 유목민이 하투샤에 침입했을 당시 그곳은 이미 버려진 도시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p123 그사이 수백 구의 미라가 더 발굴되었다. 발굴지는 타림 분지 주변으로 분포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타림 분지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발굴지는 실크로드의 북쪽 루트 구간에 있고, 남쪽에 있는 발굴지는 실크로드 남쪽 루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p143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선주민에게서 배웠다. 따라서 그리스어에서 배의 각 부분을 이르는 표현들 중 어느 하나도 셈어에서 파생된 것은 없다라는 사실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p147 펠라스고이인 문화의 전성기는 청동기 시대(기원전 제3천년기~기원전제2천년기)였다. 이들은 에게해의 다른 문명, 그러니까 키클라데스 제도 사람들과 크레타섬의 미노아인과 교역활동을 했다

p151 세상 사람들은 에번스 덕분에 오래전 크레타섬에서 번성한 미노아 문명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청동기 시대의 이 고도 문명도 그보다 더 오래된 도나우 문명에 접목해 있을 거라고 추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57 미노아 문명이 후세에 남긴 불가사의한 유산중에서 이 원반만이 비밀에 쌓여 있는 것은 아니다. 뛰어오르는 황소 한 마리와 세 명의 인물을 묘사한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도 유명하다

p162 고대 역사는 그리스-에트루리아-로마라는 삼각관계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감춰져 있던 중요한 상호 의존성이 비로소 드러난다

p174 공법이나 민법이나 로마법에 끼친 에트루리아의 영향은 광범위하다. 라틴어 법률 용어에 포함된 수많은 에트루리아 차용어가 그 점을 증명하며, 그러한 차용어는 현대 유럽의 법률 용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p176 문화의식이 높았던 에트루리아인 마이케나스는 그런 방식으로 불멸이 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시대나 지금이나 한 사회의 문화적 삶은 이상적인 생각을 가진 부유한 후원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후원 활동을 이르는 메세나라는 말이 바로 그의 이름 마이케나스에서 유래했다

p180 발굴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파지리크의 구릉 무덤을 열었을 때(첫 쿠르간은 1929년, 또 다른 쿠르간들은 1940년대와 1990년대), 그들 앞에는 모두를 놀라게 한 광경이 펼쳐졌다. "우선 재갈이 물린 채로 쌓여 있는 말들과 사람의 몸은 미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다음에는 얼음이 더해져 그들의 살과 몸에 새긴 문신, 개별적인 얼굴 모습까지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189 아마조네스 여전사와 스키타이 남성은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결합에서 태어난 후손이 사우로마타이인이었고, 그중 한 종족이 사르마트였다.

p210 테오티우아칸은 멕시코 고원에 건설된 첫 도시였고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발전했다.

p214 피라미드의 위치는 1년 중 두 날짜의 일몰 지점에 맞춰져 있다. 종교력에서 1년 주기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8월 12일과 4월 29일이다.

p217 테오티우아칸 사회에는 개별 왕의 숭배 대신 일반적인 조상 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죽은 자의 길을 따라 들어선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깃털 달린 뱀 신전과 제단이 있는 다른 건물들 모두 조상을 숭배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p226 모아이를 둘러싼 전설에는 영혼이 깃든 석상 스스로 똑바로 서서 정해진 장소로 움직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p237 악숨 왕국의 세력에 대한 소식은 3세기에 이미 아프리카 너머까지 멀리 퍼져나갔다. 그 때문에 페르시아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마니는 악숨을 페르시아, 로마, 중국과 함께 당시의 강대국으로 꼽았다고 한다

p249 카파도키아에는 적어도 36개의 지하도시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카이마클리, 네브세히르, 데린쿠유, 외즈코나크, 마지코이, 위르귀프의 지하 주거시설이 중요하다

p256 팔미라가 21세기 역사의 가장 어두운 장의 한 곳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015년 5월과 2017년 1월 사이 수많은 기념물이 이슬람 과격 단체인 IS에 의해 파괴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p259 제노비아의 뛰어난 지적 능력과 자신의 왕국에서 이뤄낸 문화적 성취는 그녀를 야심적이면서도 현명한 통치자로 만들었고, 후세의 통치자에게는 본보기로 삼고 싶은 인물이 되게 했다

p268 인도 힌두교와 인도 불교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토착민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캄보디아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p277 당시 백인 식민지 지배자들은 짐바브웨 폐허가 아프리카 흑인 문명의 명백한 표현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p288 최근에 밝혀진 연구결과에 따르면 에스파냐 정복자의 침입 시기에 아마존강 남쪽 지역의 주민 수는 10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 마을과 도시적 기반 시설을 갖춘 주거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사냥꾼과 채집꾼이 아니라 정착 생활을 한 농경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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