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나를 자유롭게 할 거야 - 벽을 깨고 스스로 빛이 된 예술가
이소영 지음 / 블랙피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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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림이 나를 자유롭게 할거야
작가 : 이소영
출판사 : 블랙피쉬
읽은기간 : 2026/10/18 -2026/10/21


언제나 읽는 즐거움을 주는 이소영님의 신작..

여성화가들의 이야기다.. 거의 대부분 처음 보는 작가들이었다.

역시 여성은 주류에서 벗어나있다..

우리나라 여성화가들로 시작해 전세계에 많은 여성 화가들을 담담하게, 그리고 담백한 필체로 소개하고 있다.

상당수의 화가들이 남편에게 가려지거나 주류의 화가들에게 가려져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

이런 작가들의 손을 통해 작가들이 발굴되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책을 읽어서 즐겁다..


p28 2023년 김윤신은 또 한 번 파격적인 선택을 한다. 88세의 나이에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레진던시에 지원한 것이다. 대부분 20-40대의 젊은 작가들이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그녀는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낱한시도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고 쓴 그녀의 지원서를 전시장에서 읽은 나는 몇 달가 이 자기소개서가 뇌를 떠나질 않았다.

p34 김윤신은 말한다. “나이 상관없이 그냥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녀에게 90이라는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오직 작품이고, 그 작품을 통해 전달되는 삶의 진실이다.

p43 1927년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재직 중이던 남편 김우영이 유럽 시찰 기회를 얻었다. 나해석은 아이들(당시 세 자녀)을부산 시댁에 맡기고 남편과 함께 세계 일주에 올랐다.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여행이었다

p47 나혜석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에게도 성욕이 있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뿐이라고 말하며 파격적 발언을 이어 나갔다.

p59 193년 풍차 집의 주인이 집을 팔면서 펠턴은 완전히 떠나야 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 헤매듯 서쪽으로 이동한 끝에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 근처의 커시드럴 시티라는 작은 사막 도시에 도착했다. 원래는 잠깐 머물 생각이었지만 펠턴은 결국 30년을 살았다. 도시 이름부터 대성당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에서 그녀는 평생 동안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p64 펠턴의 작품은 더 부드럽고 더 직관적이다. 다른 신비주의 화가들이 때로 격렬하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폭로했다면, 펠턴은 속삭이듯 그 세계로 안내했다. 빛과 색의 미묘한 조화로 내면의 풍경을 펼쳐 보이되, 설명하지 않았다.

p87 힐마가 꿈꾼 사원도 나선형이었다. 관람자가 나선 경로를 따라 걸으며 영적으로 변형되는 공간. 그녀가 상상한 건물은 결코 지어지지 않았지만, 100년 후 구겐하임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우연일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신비주의에 관심이 있었고, 구겐하임 최초의 관장 힐라 레비아도 신지학자였다. 추상미술의 영적 뿌리는 구겐하임의 건축 자체에 새겨져 있었다.

p103 베라의 대답은 간단했다. “컴퓨터보다 인간적인 것은 없습니다. 누가 이 기계를 만들었나요? 인간이에요. 누가 지금 이 알고리즘을 쓰고 있나요? 나에요. 누가 1%를 선택했나요? 나에요”

p109 2022년,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미술 축제인 베니스 베닝날레의 꿈의 우유 전시에 98세의 베라 몰나르가 초대되었는데, 전시 최고령 참가자였다. 그녀의 1970년대와 1980년 플로터 드로잉들이 전시장 벽에 걸렸고, 젋은 예술가들과 관람객들이 작품 앞에 서서 놀랐다. “이게 1970년대 작품이라고?” “플로터로 그렸다고?” “NFT보다 50년이나 앞선 거잖아?”

p121 당신의 그림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단어입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당신은 물감이 아닌 재료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렌틸콩, 분쇄된 레이온, 실, 풀반짝이, 거즈. 당신은 이 과정을 그림을 위한 일종의 의식행위라고 불렀습니다.

p139 놀라운 것은 스테판이 어머니의 연인인 모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스의 사진 대부분이 바로 1930년대에 스테판이 촬영한 것들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열린 가족 관계였다.

p162 무르나우에서 뮌터의 에술은 폭발적으로 꽃피웠다. 그녀는 하루에 다섯 점의 유화 습작을 완성하기도 했다. 동료 화가 야블렌스키, 마리 안네 베레프킨과 함께 야외에서 작업하며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고 영감을 주고받았다.

p174 뮌터의 진정한 유산은 연애사가 아니다. 그녀는 청기사파의 창립멤버였고 바이에른 민속 예술을 현대 회화에 접목한 선구자였으며, 나치의 박해 속에서 20세기 초 가장 중요한 미술 운동의 유산을 지켜냈다. 무엇보다 60년이 넘는 그림 작업 동안 일관되게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발전시킨 독립적인 예술가였다.

p199 남동생 토비가 새로운 생활을 제안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 그의 캠브리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자는 것이었다. 하이드 파크의 어두운 응접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젊은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며 들어왔고, 여자들이 그들과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아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빅토리아 시대가 금지한 것,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지적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고든 스퀘어 46번지의 거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졌다.

p204 버네사는 그 위계를 거부했다. 의자에 앉는 것도, 컵을 드는 것도, 방에 들어서는 것도 미적 경험이 될 수 있다면… 왜 캔버스만 예술인가? 캔버스를 넘어 삶의 모든 표면으로 예술을 확장시키는 것. 이것은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버네사가 세계를 배치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

p233 약혼할 때 그가 내게 준 <약혼 정물>도 함께 기증했다. 이제 그 그림은 미술관에 걸려 있다. 내 작품은 기증하지 않았다. 기증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다.

p245 디에고는 끊임없이 외도했다. 여배우, 모델, 조수, 심지어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까지. 프리다는 복수하듯 자신도 연애를 했다. 남자와도, 여자와도. 망명한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부 노구치… 결국 1939년 두 사람은 이혼했다. 서로를 가장 깊은 사랑한 두사람은 서로를 가장 깊이 상처 입혔다.

p250 VIVA LA VIDA(삶이여 만세) 죽기 8일 전에 완성한 그림이었다.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던 여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삶이여 만세라니.

p264 1940년대에 전설적인 화상 다니엘 앙리 킨바일러는 이 사실을 증언했다. “비양심적인 자들이 마리아 블랑사르의 서명을 지우고 후안 그리스의 이름을 넣었다” 해서는 안 될 비도덕적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당시 미술 시장이 여성 화가를 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p304 헬렌의 자화상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독이 만든 걸작이라고 요약하기엔 그 말은 너무 매끈하다. 고독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네 살 때 계단에서 떨어져 평생 다리를 절뚝 거린 것,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것, 40년을 시골에서 어머니와 둘이 산 것,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것, 전쟁 때문에 타국의 호텔 방에서 혼자 죽어 간것. 모든 것은 선택한 고독이 아니라 주어진 고독이었다.

p313 에레라는 그림을 팔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시장에 맞출 필요도, 유행을 따를 필요도, 누군가를 기쁘게 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도 내 작품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있었습니다”

p320 무시당하는 것은 일종의 자유입니다. 105세에 그녀는 말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쁘게 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해방된 기분이었죠” 그보다 몇 해 앞서 그녀는 이렇게도 말한 적 있다 .”유명해지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같은 것을 다시 하고 싶어집니다. 아무도 내가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있었어요”

p336 1941년 출간된 첫 책 <클리 위크>는 원주민 마을에서의 경험을 담은 21편의 짧은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유클루릿에서 처음 만난 원주민들, 토템 폴을 그리러 다니던 여행들, 버려진 마을에서의 밤들, 책은 성공했고 그해 캐나다 총독 문학상을 수상했다. 69세의 나이에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작가로서도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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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 - 고궁에서 장인까지, 아주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
서헌강 지음 / 다산초당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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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늘도 나는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
작가 : 서헌강
출판사 : 다산초당
읽은기간 : 2026/10/14 -2026/10/18


유물사진작가가 있는줄 몰랐다.

당연히 전문분야기 때문에 유물이나 유적을 찍는 분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런 분의 책을 읽은건 이번이 처음이다.

얼마전에 악보위원의 책을 읽었었는데 전문분야에 계신 분들이 책을 내니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된다.

여러 이야기가 재미있었지만 세계에 흩어져있는 유물들을 사진찍는 이야기는 정말 감동이었다.

지금 보고 사진을 찍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물을 혼자 보며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가슴아픈 일인지 알게 됐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 잠들어있는 우리 유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돌아오게 하고 싶어도 누군가 서명과 날짜를 잘라버려서 출처를 알 수 없어 못오는 작품들도 꽤 있다고 한다. 유물을 훔쳐다 판 인간들이 꼭 고통속에 살기를 저주한다.

이런 분들 덕에 유물과 유적의 보지 못하던 부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고마운 분들이 참 많고 읽어야 할 책도 참 많다..


p5 일일시호일(날마다 좋은 날). 운문이 말한 일일시호일의 의미는 폭풍우가 몰아치면 그 비바람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볕이 들면 그 따스함을 만끽하는 절대적 긍정이다. 과거의 실패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일상의 고통을 껴안으면서도 그 안에 깃든 평온과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삶속에서 비로소 좋은 날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p36 조선 왕조가 경복궁을 창건한 해는 1395년이다. 자금성이 완공된 1420년보다 한 세대는 더 앞서서 지어졌다. 게다가 궁궐의 정원으로서 북악산, 인왕산과 조화를 이루며 오늘날에도 도심 속 현대인과 정서를 교감하는 경복궁과 달리 자금성은 오로지 건축물만 있어 현대에도 지극히 배타적인 공간이다.

p86 횃불을 피워 올린 듯한 거대한 붉은빛 하늘이 봉수대 위로 펼쳐지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을 만한 일출은 1년에 고작 열 번 남짓이다. 게다가 전날 비가 내려 공기에 어느 정도 습기가 있는 상태여야 다음 날 이른 새벽 일출 때 유난히 붉게 물든 하늘을 마주할 수 있다.

p125 제사 준비를 마친 종갓집 어르신들은 대청에 모여 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으로 이동한다. 사당에서 제청(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지 옆에 마련한 대청)으로 신주를 모셔 오는 출주와 참배하는 참신 사이에 제사의 주요 절차들이 마무리된다. 이후 신주를 보내 드리는 사신과 가장 마지막 절차인 음복(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는 것)에 이르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이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

p213 그동안 국외 조사를 위해 출장을 떠날 때마다 아내는 일하기 위해 해외로 떠나는 나를 보고 또 징용 가느냐며 우스갯소리로 놀리고는 했지만, 아마 이 정도로 강도 높은 작업이었을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고달픈 일을 20년 넘게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해외에서 만나는 모든 유물과의 만남은 대부분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기 때문이다.

p229 사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시선이다. 그렇다면 시선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삶의 경험과 감정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고유한 관점과 철학이다. 시선은 그 사람의 삶 전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라 본다.

p239 나는 문화유산의 고루하고 빛바랜 느낌만 전하고 싶지 않다. 디테일에 숨은 화려함을 강조하거나 때로는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했을 생동감과 재미를 부각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문화유산이 지닌 숨은 이야기를 끄집어내 재탄생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나는 시선이 지닌 이 힘을 포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p273 나는 벗어날 수 없을 이 아름다운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한창기 사장님의 창간사는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나라를 남에게 빼앗긴 시절에도 이 땅의 흙 내음과 겨레의 얼을 잊지 않았던 예술이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고서 오늘에 이르는 사이에 속된 바깥바람이 일고 상업주의가 번졌을망정 이 땅과 이 시대의 아들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어엿한 예술인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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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수록 아름다운 우리 불화 - 망자를 위로하고 산 자를 다독인 불교 회화 이야기
김소연 지음 / 미술문화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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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볼수록 아름다운 우리불화
작가 : 김소연
출판사 : 미술문화
읽은기간 : 2026/10/10 -2026/10/13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불화를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설명해주는 좋은 책이다.

종교가 다르다보니 설명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특히 많은 부처님이 나오는 불화는 설명을 해줘도 부처님과 매치시키기도 사실 쉽지 않았다.

글보다는 말과 핀포인터로 설명을 해주면 더 좋았을텐데 그럴 수 없으니 이렇게 글로 읽으면서 띄엄띄엄 하나하나 맞춰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시간이 되어 사찰을 방문하고 직접 보면 더 느낌이 살지 않을까 싶다.

그럴때는 이 책을 들고 가야지..

성당을 방문할 때도 성당에 대한 소개책을 가지고 가면 훨씬 재미있고 머물고 싶게 된다.

절에 갔을 때도 이런 책을 들고 가면 더 머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재미있었다.


p60 동해의 거친 파도가 부서지는 강원도 양양의 사찰 낙산사는 보타락가산의 이름을 빌려온 한반도의 관음 성지이다. 바다와 맞닿은 절벽,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낙산사의 풍경은 경전에 묘사된 보타락가산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낙산사는 점차 한국 관음 신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p61 오늘날 전해지는 대다수의 고려 수월관음도에서는 기암괴석 뒤로 두 그루의 대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묘사된다. 이처럼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대나무 두 그루는 다른 지역의 수월관음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p69 고려사 속 매미 날개 같은 모시에 대한 기록은 어쩌면 여러 수월관음도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반투명한 베일이 화가의 상상 속에만 있던 것은 아닐 가능성을 보여준다.

p79 치성광불강림도와 같이 부처가 마치 도교의 신처럼 수레를 타고 강림하는 도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려 왕실의 유연하고 실용적인 종교적 태도 덕분이었다.

p89 향을 피우고 꽃을 뿌리며 범패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작업 공간으로 들어가, 삼보에 귀의하고 절을 올린 뒤에야 비로소 자리에 앉아 한 글자씩 옮겨 적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글자는 부처를 향한 공양이 되고, 종이는 진리의 말씀이 현현하는 신성한 공간이 되었다.

p107 회암사 불화 400점(약사불 삼존도 100점, 아미타불삼존도 100점, 석가모니 불삼존도 100점, 미륵불삼존도 100점)과 이 사불회도의 도상 구성이 유사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한다. 결국 사불회도는 이종린의 효심이라는 소프트웨어와 왕실 인프라라는 하드웨어가 결합하여 탄생한 작품인 셈이다.

p115 훗날 이 비극의 주인공들은 신성한 존재로 거듭난다. 묵묵히 수행했던 사라수왕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 원앙부인은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상징 관음보살이, 부모를 향한 지극한 효심을 보여준 아들 안락국은 지혜의 상징 대세지보살이 된 것이다.

p139 조상의 젃을 기리며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우란분재와 모든 외로운 영혼을 구제하는 수륙재는 공통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들에게 자비의 음식을 베푸는 시식 절차가 핵심이다.

p167 탑은 그 주위를 돌며 바라보는 동안 서서히 의미를 드러내고, 벽화는 시선을 따라가며 읽히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처럼 불교 미술은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과 형식을 바꾸어가며 반복하고 변주한다.

p227 안타깝게는 현황도는 화면 하단에 적혀 있어야 할 화기가 누군가에 의해 예리하게 잘려나가고 없었다. 불화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느 사찰에 봉안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고의로 훼손된 것이다. 이는 마티엘리의 손에 들어가기 전, 이 그림을 어느 사찰에서 도난한 뒤 출처를 세탁하기 위해 훼손시켰음을 암시한다. 결국 원래 있던 자리를 알 수 없게 된 이 불화는 반환되지 못한 채 여전히 미국 오리건주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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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로 보는 한국사 - 기후가 바꾼 5천 년, 새롭게 읽는 우리 역사
박정재 지음 / 바다출판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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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후로 보는 한국사
작가 : 박정재
출판사 : 바다출판사
읽은기간 : 2026/09/28 -2026/10/03


박정재 교수님의 책을 여러권 읽었다.

지리학과 교수님이라 그런지 책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Long term으로 기후가 계속 변하고 있고, 그 변화에 따라 사람들이 대응을 했고, 그로 인해 문명과 문화가 바뀌어왔다는 것.

빅히스토리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라 낯설지는 않다.

역사학자들이나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의 소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빅히스토리라는게 큰 변동 사이에 있는 작은 변동은 무시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장기적으로는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이야기했던 케인즈의 말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빙기나 온난화 기간동안 역사와 문화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해석하는 부분은 흥미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난 학자가 아니니까 빅히스토리에도 공감하고, 미시적 추동이론에도 공감한다.

재미있게 읽었다.


p16 주기적으로 한랭한 기후가 찾아올 때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며 환경에 적응하고자 했고, 여의치 않을 때는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결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약 5000년 전 이후 지속된 한랭화와 대략 500년을 주기로 반복된 급격한 저온 현상은 홀로세 후반 한반도인들을 추위에 강한 집단으로 단련시켰다.

p25 요하(랴오허) 문명은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사 문명 가운데 하나로 홀로세 중기에 황하 문명 못지않은 문화수준을 자랑했다.

p32 우리 모두 적도 서태평양에서 비롯된 기후 변화가 요하 유역과 한반도, 두 지역 사회의 성쇠를 결정했다고 보는 것이다. 요하 지역과 한반도가 가까이 있고 양 지역 집단의 문화가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 할 것이다.

p40 3200년 전 즈음에 한반도로 진입한 송국리형 문화 집단과 철기 저온기(2800-2300년 전)의 중반부터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 들어온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은 다른 생활양식을 기반으로 한다.

p58 흔리 로마 온난기라 불리는 시대다. 유럽에서는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기원전 27년)이 꽃을 피웠고, 동아시아에서는 전한(기원전 202-기원후 8년)이 한무제의 위업을 발판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위만조선(기원전 194년-기원전 108년) 또한 비록 90년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국의 반열에 올랐고 한반도 남부 사회는 이주 물결이 잦아듦에 따라 비교적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p94 훈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 당시에 강력함을 풍기던 민족 집단이 모두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반까지 활발하게 움직였다. 훈족의 이동은 374년에 시작되어 468년까지 이어졌으며, 서고트족의 이동은 376년에서 416년까지 이어졌다. 반달족의 이동은 406년부터 439년까지 계속되었다. 모두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던 시기와 엇비슷하다. 이때의 기후 변화가 북반기 전역에 영향을 미치며, 동아시아와 서유라시아 양 지역 사회에 비슷한 파장을 불러왔음을 알 수 있다.

p113 후환융선은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의 헤이허시에서 남서부 원난성의 텅충시를 잇는 대각선으로 이 선의 서쪽에는 인구가 적은 반면, 동쪽에는 인구가 밀집해 있다.

p127 3-4세기에 다수의 부여민이 정치적 망명과 생계형 이주를 감행한 것 그리고 수단에서 격렬한 내전이 발생하면서 난민이 급증한 것은 모두 엘리트의 리더십이 부실하여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다. 기후 위기에 리더의 정치력 부재까지 겹칠 때 사회의 갈등과 혼란이 얼마나 커질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p161 1168년 이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현령을 쫓아내고야 마는데, 이 난을 양수라는 인물이 주도했다고 하여 양수의 난이라고 한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섬 주민의 반란이 이어졌다. 1374년 목호의 난부터 1862년과 1898년 제주 민란, 1901년 이재수의 난, 1948년 제주 4.3 사건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민란이 끊이질 않았다.

p173 정말로 큰 폭발은 30년 후 1257년 인도네시아 롬복섬에서 있었다. 이 섬의 사말라스 화산에서 거대한 분출이 일어 최고 50미터 두께의 화산 새설물이 섬의 절반가량을 덮었다. 이 폭발로 적도 태평양에서 무역풍이 약해지고 장주기 엘니뇨가 강화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다.

p192 세차 운동이 이렇게 소빙기의 도래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맞다. 하지만 소빙기의 저온 현상을 가져온 주된 요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태양과 화산이다. 태양 활동이 저조하여 흑점 수가 줄어들 때, 화산 활동이 활발하여 폭발이 잦았을 때, 북반구의 기온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 결과 곤경에 처했던 인간 사회의 사례를 우리는 유물이나 문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p211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으로 조선은 큰 피해를 본 반면, 같은 시기 강희제가 통치하던 청나라는 오히려 번성했다. 양국 간에 이러한 차이를 가져온 이유를 곱씹으면서 정조는 무엇이 왕으로서 추구해야 할 통치방식인지 깨우치지 않았을까? 정조는 재해 예방과 재난 관리를 통해 백성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고자 했다.

p235 1809년 폭발은 가뭄을, 1815년 폭발은 홍수를 불러왔다. 같은 공간임에도 ㅎㅘ산 폭발의 여파는 확연히 달랐다. 폭발한 화산의 위치 혹은 폭발의 ㄱㅠ모가 물 순환의 차이를 가져왔을 것으로 예상은 되지만 그 정확한 인과관계를 알기란 어렵다.

p265 병자년 가뭄(1876년)으로 조선이 힘겨워할 때 산동, 산시, 허난, 허베이 등 중국 북부 지역에서도 1876년에서 1879년까지 최악의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 기근을 정무기황이라 부르는데 1000만 명 이상 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1876년부터 1878년까지 가뭄과 기근이 이어졌다. 남인도 대기근이라 불리는 이때의 식량난으로 굶어 죽은 사람 수만 500만에서 800만 명에 달했다. 중국가 인도의 기근 모두 엘니뇨가 주된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p293 여전히 역사학계에서는 여기서 소개한 딥히스토리, 진보 사관, ㅎㅘㄴ경결정론, 인류세 등의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지나치게 ㄷㅏㄴ순화된 거대 서사에 경계심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 식물, 미생물, 강, 산, 기후, 바다, 돌, 기계 등 이른바 비인간 요소를 인간만큼 비중있게 다뤄야 한다는 방법론적 부담 역시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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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하는 고고학자 - 고대 인류 문명의 모습과 소리, 냄새, 맛을 재현하는 과학자들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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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실험하는 고고학자
작가 : 샘 킨
출판사 : 해나무
읽은기간 : 2026/09/08 -2026/09/22


최근 읽은 책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책중의 한권..

고고학을 실험한다니.. 고고학이 실험이 가능한가?

관찰과 발견이 주요 과학적 도구아닌가?

그런데 진짜 실험을 한다. 그것도 꽤 과학적으로...

그리고 그 실험이 진지하게 실시된다. 최대한 동시대와 비슷하게 경험될 수 있도록 당시의 도구와 물질들을 사용한다.

실험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만든 유물의 정밀성과 사용 용도를 더 다양하게 상상하고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아직까지 실험 고고학은 학계에 공인을 받고 있지는 않은듯 하다.

그러나 좀더 과학적 엄밀함이 쌓이고 경험이 축적되면 충분히 고고학의 한 분야가 될 것 같다.

새로운 내용을 알게 되어 즐거웠다..


p12 고대 이집트의 빵이나 수백만 년 전의 도구를 정말로 재현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 답은 갈수록 가까워진다.

p29 실험고고학은 이렇나 부담을 안고있다. 이 분야는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실질적이고 풍부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카이테와 그의 가족이 잠을 자는 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겼었는지 생생하게 알려줌으로써. 하지만 어떤 과학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p100 윌라마야 파타에서 특히 하스를 들뜨게 한 바견-표토에서 1m 아래에 묻혀 있던 뼈와 치아들-이 있었는데, 사냥꾼에게 필요한 도구 전체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물을 죽이고 처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라고 설명했는데, 처트, 창끝, 돌로 만든 긁개와 칼, 가죽 무두질에 사용하는 석간주(산화철을 많이 함유해 붉은 색을 띤 흙)가 포함돼 있었다

p107 나무가 부족한 알티플라노 같은 곳에서는 나무 자루가 특히 소중하다. 그런데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 분해되어 발굴 현장에 남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나무 자루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에렌은 사색에 잠겨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예컨대 나무-이 옛날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긴 것일 수 있어요. 어쩌면 석기 시대가 아니라 목기 시대라고불러야 할지도 몰라요. 이것은 정말로 참신한 통찰인데 고고학 교과서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통찰이다.

p127 아사나가 숨을 몰아쉬는 수컷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암컷이 필사적으로 속도를 높이며 뒤에서 돌진했다. 모하가 또다시 비명을 질렀지만, 고개를 돌린 아사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방어 자세로 겨우 팔을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모하가 고향에서 수없이 겪은 비극적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암컷의 앞발이 아사나의 머리뼈를 강타하는 순간,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p148 오늘날 이 지역은 건조하고 먼지가 자욱하며, 여름의 태영은 여느 사막에 못지않게 혹독한 열기를 내뿜는다. 하지만 수천 년 전에는 이곳은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습지대였고, 진흙탕 강이 그 사이로 구불구불 흘렀다. 고고학자들은 발굴 현장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다가 식품의 풍부성에 경탄했다.

p171 가죽 표면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그동안 일어난 변화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내장이 범벅되어 상한 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가죽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이제는 아기 피부보다 부드러운 의복을 손에 들고 있었다.

p205 고고학자들이 5000년의 이집트 역사에서 확인한 빵의 종류는 비스킷에서 바게트, 피타를 비롯해 약 40가지에 이른다. 어떤 제빵사들은 꽃, 남근, 오벨리스크, 새, 소, 악어, 가젤, 물고기처럼 재미있는 모양의 빵을 만드리고 했다.

p211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가설을 모든 고고학자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실제로 취향이 더 고상한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말도 안 되는 가설로 여기는데, 세상의 위대한 문화들이 남긴 모든 예술과 시, 감동적인 건축물이 맥주를 꿀꺽 꿀꺽 들이켜던 평민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개념을 끔찍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p225 이 실험이 과학적 가치가 없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 실험은 우리가 이전에 몰랐던 고대 이집트인의 미라 제작과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미라 제작자들이 어떤 칼날을 사용했고, 뇌는 어떻게 적출했고, 나트론은 얼마나 사용했고, 그 당시 미라 제작 작업대의 폭이 1.2m에 이를 정도로 왜 그토록 넓었는지(시신을 건조시키는 데 필요한 나트론을 잔뜩 쌓아야 했기 때문에) 등의 질문에 답을 제공했다.

p234 고고학자들은 노동자들이 피라미드의 돌에 새긴 낙서를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자신들을 힘이 넘치는 무리, 불굴의 무리, 쿠푸의 사람들이라고 선언하는 문구였다.

p288 하와이 설화에서 카누의 수호 여신인 레아는 종종 이 새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나무를 쪼는 행동은 불승인으로 간주되었다. 더 세속적으로 해석하면, 엘레파이오는 벌레를 잡기 위해 나무를 쪼는 습성이 있고, 벌레가 먹은 나무는 선체로 쓰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배 만드는 사람들이 알아챘을 가능성이 크다.

p290 어떤 별이 북동쪽에서 떠올랐다 하더라도 그 방향을 유지하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에 불과하다. 그래서 항해사는 밤이 깊어짐에 따라 방향의 기준점으로 삼는 별을 바통 터치하듯이 한 별에서 다른 별로 바꿔야 했다. 그들은 실제로 5개 별 항해나 7개 별 항해라는 표현을 썼고, 여러 밤에 걸친 항해도 흔했다.

p352 결정적인 깨달음은 2005년에 찾아왔다. 라틴어 사전에서 acus라는 단어를 찾다가 그것이 “옷 수선공과 미용사가 사용하는 바늘”이라는 풀이를 읽었을 때였다. 그 순간, 모든 게 이해되었다. 수세기 동안 학자들은 오르나트릭스가 핀으로 머리카락을 고정해 땋아올렸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은 머리를 꿰매고 있었던 것이다.

p374 밤이 깊어 만찬이 끝날 무렵, 그레인저의 남편 크리스가 토가를 한 병 꺼내어 누군가에게 입히는 법을 시연해 내게 기쁨을 더해주었다. 그 과정은 들었던 대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위로 두르고 아래로 감고 이리저리 교차시키는 것이 마치 미라에 붕대를 감는 것 같았다.

p405 무엇보다도 문신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선언했는데, “우리는 저쪽 집단이 아니라 이쪽 집단에 속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p420 일부 부족이 화살로 적을 괴롭혔지만, 근접전에서 곤봉으로 상대를 죽이는 행위는 더 큰 용기가 필요했고, 따라서 전사에게 더 큰 명예가 돌아갔다. 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죽이는 행위에는 뭔가 원초적인 요소가 있다.

p476 고고학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충격 무기로 인해 생긴 상처와 마찬가지로 천공술의 흔적이 대부분 머리뼈 왼쪽-오른손잡이 전사가 무기로 상대를 내리쳤을 때 생기는 바로 그 위치-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천공술은 뇌출혈, 뇌부종, 감염, 낭종, 종양을 치료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p511 해양 포유류의 장기에는 비타민 C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근육 고기에도 약간 들어 있다. 단 조리를 하지 않은 경우에만 비타민 C를 섭취할 수 있는데 열을 가하면 비타민 C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날고기 섭취는 북극 지방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적응이었다.

p623 내가 울라말리츠틀리를 직접 해보고 나서 내린 결론은 아즈텍족이 정말로 강인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경기가 하루 종일 지속되거나 심지어 며칠 동안 이어지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경기는 한쪽 팀이 충분한점수를 얻거나 아니면 탈진해 쓰러져야 끝났다. 전쟁의 고난에 대비하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훈련이었을 것이다.

p646 받침대 주변의 잔디는 군데군데 새까맣게 그을렸고, 사방에 돌과 모래가 흩어져 있었다. 초록색 울타리 말뚝들은 담배 파이프 청소 도구처럼 마구 휘어져 폐품 처리장으로 보내야 할 지경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여름철에 정원에 전시한 공구점 용품들을 누군가 폭격한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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