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 상 -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3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임진왜란-상

 : 임용한

 : 레드리버

읽은기간 : 2024/11/30 -2024/12/06


믿고보는 작가님 가운데 한 분...

전쟁사 토크멘터리에서 봤는데 그 거대한 전쟁 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설명이 쉽다고 깊이가 없는게 아니다. 거대한 담론을 이렇게 정리해서 알기 쉽게 말하려면 얼마나 내공이 쌓여야 하는걸까?

이번에는 임진왜란이다..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조선의 수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선조가 나름 똑똑하고 능력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변방의 이순신을 수군으로 보내 장수가 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선조는 꽤 뛰어난 왕이었던 것 같다.

문제는 의심병..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다. 전쟁에 패한 왕과 싸우면 이기는 능력있는 장수가 있는데 백성들이 누구를 지지할까? 

더구나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인기있는 장군이니 당연히 견제를 했을것..

그런 악조건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이순신이라는 장군이 더 대단해보인다.

하권도 있는 것 같은데 기대가 되는 책이다. 


p29 1591년에 조선이 일본의 침공 의도를 몰랐거나 전쟁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도요토미가 에둘러 말했지만, 그는 서신으로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p37 편제를 마치면 사열과 활쏘기 훈련을 진행한다. 급박한 때에 무슨 사열이냐 싶지만, 병사들을 전선에 내보내 적과 죽음과 마주하게 하려면 먼저 지휘관, 동료, 군에 대한 신뢰가 확보되어야 한다.

p46 이때(후에도 또 이런 적이 있다) 이순신의 행동을 신중함으로만 해석하는 건 껍데기만 보는 것이다. 이순신을 이순신으로 만든 미덕은 맹목적인 신중함이 아니라, 전쟁의 생리와 병사의 심리에 대한 깊고도 정확한 이해였다.

p84 이때 각 배에 어떤 방법으로 신호를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목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이 붙어서 항해하면서 소리로 전달했을까? 현선을 전령처럼 사용했을까? 우리의 전사 기록은 이런 상세한 부분의 묘사가 너무 소홀해서 안타깝다.

p111 2층설과 3층설은 당대의 논쟁이 아니고 후대 학자들의 논쟁이다. 2층이든 3층이든 거북선은 성공적으로 운용되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진실은 무적의 거북선을 위해 거북선 승무원들은 마치 유보트 승무원들처럼 그 어떤 배보다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p138 조선군은 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당항포 전투는 조선 수군의 전술 능력이 교과서적으로 발휘된 전투였다. 거북선이 돌격해서 적을 동요시키고, 총탄을 맞으며 대응 사격을 한다. 그 뒤로 탄옥선이 들어가 팀별로 사냥감을 잡는다. 화포와 화살 공격으로 제압사격을 하며 적함에 접근한다. 화공으로 태우기도 하지만, 적병이 사격에 거의 쓰러지거나 배를 포기하고 도주하면 승선해서 나포한다. 승선해서 잔존병력을 죽이고, 포로를 구하고, 전리품을 거두고 불태운다.

p155 일본군의 위기는 승리의 정점을 찍은 것처럼 보이던 5월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핵심은 이순신의 보급로 차단으로 인한 군량 문제였다. 그렇다면 결론도 간단해지는데, 호남을 정복해야 안정적인 식량 생산지와 군량 수송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p195 안골포에서 매복하지 않은 것은 이런 신뢰를 위한 결단이다. 하지만 이런 전장의 리더십과 고뇌를 조정 관료들이 납득할 리 만무했다. 매복하지 않은 이유를 대면 비겁하다고 닦달을 해댈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의 장계는 상세한 설명을 생력하고 필요한 말만 남긴 것이다.

p231 자신들이 선발하고 녹봉을 주며 길러 낸 무장들이 얼마 안 되는 일본군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초야에서 일어난 의병이 일본군을 곧 섬멸할 수 있다는 황당한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이 인식은 조선의 문관들이 전쟁에 대해 얼마나 문외한이며 그동안 국방, 군사정책을 얼마나 엉망으로 짜 왔는지, 그들이 시행해 온 관리 등용책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지 자인하는 격이었지만, 또 그런 반성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p249 이순신은 기가 막혔다. 전쟁이 나기 전에는 제대로 된 도움은 안주고 훼방만 놓다가, 막상 전쟁이 터지자 아무것도 못 하던 인간들이 뭐가 좀 된다 싶으니 다시 입을 열어 쓸데없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선조의 자애로운 명령이 떨어지자 갑자기 병력의 반 이상이 사라졌다.

p251 유가의 정치사상은 훌륭한 내용도 많지만 유독 군비와 전쟁에서는 판타지를 만든다. 그 판타지의 정수가 도덕과 정의감으로 무장한 백성의 궐기다.

p286 그럼에도 선조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만의 하나의 가능성도 용납할 수 없었다. 리더의 자질로 보면 심각한 결격사유고, 한심하고 졸장부 같은 행동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평소에 선조는 똑똑하고 판단력 빠르고 상대를 배려할 줄도 아는 꽤 훌륭한 리더십을 보이는 군주였지만,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자신의 모든 장점을 잃고 돌변했다.

p361 362 뛰어난 관료이자 온화한 인품과 덕으로 유명했던 이원익은 인조, 광해군대에 영의정까지 역임한다. 조선시대에 명재상 리스트를 만든다면 반드시 들어갈 사람이 이원익이다

p377 난중잡록에는 가토가 섬에 갇혀 있다고 요시라가 이순신에게 직접 통지했는데, 이순신이 듣지 않아서 가토를 놓쳤다고 했다. 난중잡록은 요시라와 고니시도 혼동하고 있는데, 전쟁 중에 도는 가짜뉴스가 이렇게 무섭다.

p401 원균은 사퇴하지 않았고, 선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책임회피 근성이 발동한 선조는 승정원에 쪽지를 보내 원균의 보고서를 반드시 역사에 상세하게 기록해 두라는 명령만 내렸다. 책임감을 잃은 2명의 리더가 조선의 장병과 백성을 사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p424 18일 칠천량해전 소식이 전해지자 권율은 선조에게 이순신 복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선조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이순신에게 달려왔다. 난감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이순신은 명장다운 간결한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가서 직접 보고 대책을 구상하겠습니다”

p426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과도한 견제와 이기적인 고집은 조선 수군의 전멸만이 아니라 그동안 적의 침략을 면했던 경상우도 지역과 순천, 남원 등 전라남부 지역에 끔찍한 피해를 초래했다.

p442 더 신속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안위나 김응함은 훌륭한 전사였다. 아무튼 이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제일 먼저 대장곁으로 달려온 장수들이다. 그래도 이순신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장수를 꾸짖기보다는 병사들을 분발시키려는 어법이었을 것이다.

p479 장군의 후예들은 특별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모든 전쟁에서 승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기상과 명예, 충절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여행자를 위한 노르망디×역사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도시여행자를 위한 노르망디x역사

 : 주경철

 : 휴머니스트

읽은기간 : 2024/11/20 -2024/11/29


책이 나오면 꼭 읽게되는 주경철 선생님의 신작읽기...

이번에는 노르망디다..

노르망디하면 역시 몽생미셀.. 책은 몽생미셀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노르망디의 역사가 나온다.. 

그저 바이킹들이 내려오고 프랑스 왕이 땅을 주고 봉신으로 삼았다는 정도만 알고있는 나에게 재미있는 역사이야기가 쏟아졌다. 

노르망디에 가본 곳은 몇 곳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이 생겼다..

다시 놀러가야지. 그때는 렌트해서 다녀야지.. 

주경철 선생님 책은 가보고 싶게 만든다.. 

빨리 다시 가봐야지.. 



p18 이 가운데 지금껏 남은 가장 유명한 곳이 몽생미쉘 수도원이다. 이곳이야말로 세상과 동떨어져 기도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수동원이 되기에 알맞은 세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으니, 성스러운 섬이면서 사람을 피하는 동굴이면서 하늘과 가까운 산이 그것이다.

p26 큰 변화가 시작된 계기는 966년 루앙 백작 라사르 1세의 주도로 이곳이 베네딕트 수도원이 된 것이다. 이후 수도사 약 50명이 거주하는 제법 큰 규모가 되었다. 이시기에 처음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물을 축조했다.

p28 메르베유는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 크고 작은 공간들이 미로를 이룬다. 이곳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서, 동쪽 부분에는 예배당, 손님맞이 방, 수도사들이 모두 모여 식사하던 대식당이 있고, 서쪽 부분에는 포도주 창고, 백년전쟁 당시 기사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 기사의 방 그리고 회랑이 있다.

p35 이 섬의 DNA에는 사람을 잡아 가두는 형질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수도사든 학자든 혹은 범죄자든.

p46 역상의 풍상을 겪으며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지만, 그 뼈대 자체가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그래서 보통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로 알려져 있다. 유홍준 선생은 역사 답사의 백미는 원래의 건물이 사라진 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p50 1795년에 피에르 레퀴에, 1802년에 장바티스트 르포르라는 사업가가 수도원을 구입한 다음 건물을 허물고 목재와 석재를 채취하여 팔아넘겼다. 말하자면 수도원 전체가 채석장으로 변한 것이다.

p73 현재는 행정적으로 노르망디에 속해 있지도 않고 거의 아무런 역사 유적도 남아 있지 않은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마을이 역사적으로 노르망디의 탄생지가 된 것은 911년 이곳에서 프랑크 왕국의 국왕과 바이킹 무리의 수장 사이에 맺어진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 때문이다.

p77 이 기록에 따르면 원래 신하가 될 사람, 즉 롤롱이 국왕의 발에 키스를 해야 했다. 바이킹 전사가 다른 사람 발에 키스를? 그런 일을 하면 바이킹이 아니지! 롤롱이 부하에게 대신 하라고 지시하자 부하는 국왕의 발을 번쩍 들어 넘어뜨린 다음 키스를 했고, 모든 사람이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바이킹 전사라 할만하지 않겠는가

p93 노르만 정복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자료 중 하나가 <방디와 태피스트리>다.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에 소장된 이 유물은 노르만 정복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프랑스사와 영국사에서 워낙 중요한 사료이므로 이 박물관은 늘 많은 방문객들로 붐빈다.

p115 대표적으로 런던탑은 윌리엄이 1070년대 지시하여 캉의 석재를 들여와 지었다. 그 외에 캔터베리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등도 부분적으로 캉의 석재를 써서 건축했다. 일단 이 돌로 지은 이상 후대에 보수할 때도 같은 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색상과 질감이 달라 보기가 안좋다. 그래서 이후 시기에 보수할 때도 캉의 석재를 들여와야 했다. 19세기에도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시계탑 빅벤을 다시 캉 석재로 지었다.

p123 이 성은 중세 군사용 성채의 걸작이며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 요새였다. 성 앞에는 삼각형 모양의 외보가 있고, 그 둘레는 폭 20미터, 깊이 10미터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다시 말해 본성 바로 가깥에 보호 장치를 하나 더 설치하고, 주변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p136 사형을 선고받은 잔 다르크는 루앙 시내 비와마르세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5월 30일 아침 8시, 그녀를 끌고 나와 형 집행 의식을 행했다.

p144 중후한 고딕 건물인 법원 건물은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장대하고도 멋진 외관은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잘생긴 얼굴에 흉한 자국들이 가득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져 건물 벽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많이 생겼는데, 시 당국은 이 또한 역사의 일부라 판단하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p152 모네가 우리가 아는 그런 화가가 된 데는 1856년에 만난 외젠 부댕의 역할이 크다. 모네 자신도 화가가 된 것은 부댕 덕분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자연에서 그려라. 이것이 부댕이 모네에게 해준 말이다. 후일 한 기자가 모네에게 화실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센강을 가리키며 이곳이 나의 화실이오 하고 말했다고 한다.

p162 저녁이 오면 마치 모네가 처음 집을 보러 왔던 그날처럼 본래의 조용한 시골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은 사실 몇 집 안 된다.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큰기을 따라 가면 곧 마을 전체를 볼 수 있다. 저녁 혹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산보하면 신선한 노르망디 마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그 범용한 시골 마을이 어떻게 모네의 눈과 손을 거쳐 아름다운 그림으로 화했는지 느껴볼 수 있다.

p168 장례식에 온 클레망소의 이야기가 전한다. 장례식에서 관 위에 검은 천이 덮혀 있는 것을 보고 클레망소가 그것을 치워버리며 ‘모네에게 검은색은 안 돼’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p177 인상파 화가들을 사회 현실에서 유리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인상파의 효시를 알린 모네의 그림 <인상, 인출>만 해도 그렇다. 그냥 수평선이 아니라 르아브르 산업 단지의 공장 굴뚝들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사회 변화에 완전히 눈감고 순수하게 미학적 태도만 견지하는 화가란 없다.

p183 루앙에는 좋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은데, 루앙 미술관은 반드시 가볼 곳이다. 인상파 작품들이 많을 뿐 아니라 푸생, 다비드, 들라크루아, 제리코, 코로 등 프랑스의 대가들, 그리고 베로네제, 벨라스케스, 카라바조, 루벤스 등 외국 대가들의 작품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입장료가 화끈하게 무료다.

p196 밀레 생가를 찾아 이 먼 땅끝 마을까지 일부러 찾아갔다면 간김에 코당탱반도의 경관을 둘러볼 만하다. 매우 높은 절벽들, 작은 모래사장, 매력적인 소항구들이 이어지는 곳이어서 드라이브를 해도 좋고 차에서 내려 해변 모래언덕을 올라가 보는 것도 멋진 일이다.

p208 거의 무한의 느낌을 줄 정도로 반복되는 작은 네모 모양의 빛의 조각들이 공중에 그득하다. 오직 그뿐, 성당 내부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와 성 요셉 동상만 있고 그 외 다른 장식, 조각, 그림 같은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깔끔하다.

p258 말하자면 바이킹 선조들의 배 만드는 기술이 전수되어 온 것인데, 이들이 배를 건조하는 방식을 원용해서 목조 성당을 지은 것이다. 과연 성당 내부에서 보면 선체를 거꾸로 뒤집은 듯한 모양이 확연하다.

p266 보들레르의 의부는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에게는 그런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따. 아들로부터 정녕 시인의 길을 가고자 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의 반응이 애처롭다. “가슴 아픈 일이야. 샤를이 아버지 뜻을 따랐다면 경력이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그러면 문학사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겠지만 우리 모두 훨씬 더 행복했을걸”

p273 청중들에게 부담 없이 자유롭게 듣기를 권하는 그의 음악은 간결하고 쉽고 감미로우며, 반복되는 동기의 연주로 현대 미니멀리즘의 선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의 음악이 오늘날 더욱 사랑받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말대로 ‘너무 늙은 시대에 너무 젋게 세상에 온 사람’인지 모른다

p291 쿠튀리에의 직업을 건축가 및 화가의 직업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드레스를 만들 때 구조와 건축의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식의 설명도 듣고 보니 수긍이 된다. 하여튼 내가 H라인, 뉴룩혁명 같은 내용을 유심히 살펴볼 줄은 몰랐다. 여행하다 보면 몰랐던 내용을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이 있다. 늙은 개도 새로운 재주를 배울 수 있고, 중늙은이도 패션에 눈뜰 수 있다.

p308 푸홀은 어찌나 연기를 잘했는지 1944년 히틀러에게 알라릭 요원으로서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몇 달 후에는 영국 정부가 가르보요원에게 연합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영제국 기사훈장을 수여했다. 이중간첩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나치와 연합군 양측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극소수 인물 중 한 명이다.

p328 이 지역 전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말해 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군 90보병사단이 코탕탱에 도착하고 6주가 지났을 때 중대마다 100-400퍼센트의 손실을 입었다. 400퍼센트의 손실은 중대원이 전부 죽어 새로 갱신하고 그 중대원들이 또 모두 죽어 다시 갱신하는 식의 일이 네 번 있었다는 의미다.

p335 이 영화는 코르시카 해안에서 촬영했다. 촬영을 시작하려는 데 웬 이타리아 남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해변을 이용하려면 1만 5,000달러를 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만일 돈을 주지 않으면 자동차를 몰고 촬영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겠다고 협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전쟁 영화인데 1960년대 자동차가 왔다 갔다 하면 큰일 아닌가. 별수 없이 돈을 주고 영화를 찍었는데, 코르시카 해변에는 개인 사유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기꾼에 걸려든 것이다.

p343 사실 할머니 집은 창녀 집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에디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집에 기거하는 창녀 언니들만이 그녀를 귀여워했다. 그러던 중 심한 각막염으로 거의 실명 위기에 빠지자, 할머니와 언니들이 아이를 데리고 리지외 성당으레 찾아가서 기도하고 테레즈 무덤의 흙을 가져다가 매일 밤 눈에 그 흙을 대주었다. 기도가 통한 걸까. 에디트는 눈을 번쩍 떴다. 기적을 경험한 그녀는 평생 테레즈 성녀에게 기도하고 특히 공연 전에는 꼭 성녀의 메달을 걸고 지냈다.

p353 개인적 경험의 소산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바는 뵈브롱앙오주(오주 지방의 뵈브롱이라는 의미) 마을이 특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캉과 리지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노르망디에서 아름다운 마을로 손꼽히는 것은 물론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p356 프랑스인들은 사는 법을 압니다. 이들은 즐거움에 정통합니다. 나도 그 의견에 공감한다. 프랑스인들은 요리도 맛있게 하고 진정 즐거움을 위해 살아간다.

p365 프랑스인들은 하여튼 먹는 데에는 진심이어서, 온갖 방법을 만들어 낸다. 혹시 소맥처럼 칼바도스+시드로 같은 것은 없을까? 물론 있다. 이름하여 포모 드 노르망디. 사전적 정의와 설명은 이렇다. “오크통에서 최소 14개월 이상 숙성한 시드르용 사과즙과 칼바도스를 블렌딩한 혼합주인 포모는 대개 식전주로 차게 마시며 푸아그라, 멜론 및 몇몇 디저트에 결들이기도 한다.

p368 병을 개봉해서 조앙에게 한 잔 따라주자, 조앙이 조금 마시더니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는 여태까지 이런 것을 마셔본 적이 없어요. 이건 마시는 게 아니라… 그냥 숨만 쉬면 되는군요” 라비크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낭만주의자가 될 거요. 칼바도스적 낭만주의자”

p379 비무티에에는 카망베르 기념관도 있다. 건물자체가 카망베르 통 모양이라고 주장하는 데, 솔직히 그렇게 이상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기념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이곳을 찾아가니 직원 세 사람이 모여서 밥을 먹고 있다가 ‘손님 왔다’ 하면서 밥 먹다 말고 카운터로 가서 표를 파는 식이다.

p395 프랑스 속담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나라만 보고 산다면 이 세상은 첫 장만 읽은 책과 같다” 잠시 우리 사는 세상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 사는 세상은 어떤지 보고 오도록 하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이면 우리 마음의 공간이 조금 더 커지고 우리 생각이 조금 더 지혜로워져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전쟁 - 성스러운 폭력의 역사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신의전쟁

 : 카렌 암스트롱

 : 교양인

읽은기간 : 2024/09/24 -2024/11/27


책의 제목이나 표지를 보면 무척 흥미롭고 끌리는 책이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동안 읽었다. 그러다보니 읽는 호흡이 자꾸 끊기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역시 책은 짧은 시간동안 집중해서 읽어야 하나보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역사를 풀어나가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그런데 그냥 역사책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신이나 종교에 대한 내용보다는 역사에다 중간중간 종교가 끼어드는 느낌이었다.

현대사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좀 흥미진진했다. 특히, 이슬람, 힌두교와 정치와의 관계는 새롭게 배운게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종교가 전쟁을 지배하고 이끌어왔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차분하게 다시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휴가때 가지고 가서 읽고싶은 벽돌책이다. 



p17 파충류에게서 물려받은 핵심 뇌 위에 형성된 변연계는 새끼보호나 양육과 더불어 다른 개체와의 동맹 형성-생존 투쟁에서 매우 유용한 것이다-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새로운 행동을 자극했다

p21 우리가 오늘날 종교라고 부르는 것 대부분은 본래 우리 인간의 삶이 다른 생물을 죽이는 일에 의존한다는 비극적 사실을 인정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p39 주민 대다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런 잔인한 구조가 없었다면 인간은 진보를 가능하게 해준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문명 자체가 계발되기 위해서는 유한계급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가장 훌륭한 성취는 수천 년 동안 착취당한 농민의 등 위에 세워진 셈이다. 수메르인이 문자를 발명한 목적이 사회 통제였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p43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귀족은 대중을 최저 생활 수준에서 살도록 강제함으로써 인구 성장을 억제하여 인간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p50 그들은 곧 사라진 동물을 메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근처 마을이나 경쟁 부족의 가축을 훔치는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싸움은 목축 경제에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p51 “아니, 사실 그들은 피로 얻을 수도 있는 것을 힘든 노동의 땀으로 얻는 것이 비굴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도시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경멸하여, 노동이 열등함의 표지이고 고귀한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

p63 종교에서나 정치에서나 충성을 바친다는 표시였다. 이들이 다 참석하지 않으면 축제는 거행될 수 없었고 영토는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전례는 요새만큼이나 도시의 안전에 중요했는데, 왕을 모욕하는 의식이 거행되기 바로 전날 민중은 전례를 통해 도시가 얼마나 악한지 상기하는 경험을 했다.

p68 종교적 신화는 구조적이고 군사적인 폭력을 승인해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계속 문제 제기도 했다. 실제로 메소포타미아 문헌에는 회의주의의 흐름이 강하게 나타난다

p78 아리아인은 그 정도로 정착생활의 권태와 시시함을 증오하여 오직 약탈에서만 완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p83 이런 식으로 찬가들은 새롭게 계층화된 사회가 평등한 과거와의 위험한 결별이 아니라 우주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아 사회는 이제 네 개의 사회 계급으로 나뉘었고, 이것이 훗날 발전하는 정교한 카스트 체제의 씨앗이 되었다. 각 계급에는 그 나름의 신성한 의무가 있었다

p96 아리아인은 늘 자신이 남보다 본래 우월하다고 생각해 왔다. 제의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뿌리 깊은 특권 의식을 길렀고, 이것이 침략과 정복을 부추겼다. 그러나 우파니샤드는 모든 피조물의 본질인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동일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똑같은 신성한 본성을 공유한다고 가르쳤다.

p99 요가는 자아를 체계적으로 공격하여 수행자의 정신에서 나를 지우고 “나는 최강이다! 나는 최고다!” 하는 전사의 당당한 자기주장을 무가치하게 만들었다

p106 더욱이 불교도와 자이나교는 실용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였다. 그들은 모두가 수도승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가 제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침을 따르라고 권했다. 이렇게 해서 이런 영성들은 주류에 진입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지배 계급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p107 기원전 321년 역시 수드라 출신인 또 다른 젊은 모험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난다의 왕좌를 찬탈하여 마가다 왕국은 마우리아 제국이 되었다

p110 아소카의 딜레마는 문명 자체의 딜레마다. 사회가 발전하여 무기가 치명적이 될수록 폭력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제국은 역설적으로 평화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제국의 폭력과 착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날 번영하는 민주주의의 표시를 찾듯이 간절하게 절대적 제국주의 군주제를 찾았다

p113 여기에는 제국-시의 용어로 말하자면 세계통치-이 평화에 필수적이라는 암묵적 가정이 있다. 시는 제국의 만행에는 용서가 없지만, 폭력적 세계에서 비폭력은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 힘사(’해’)를 깨칠수도 있다는 통렬한 인식을 드러낸다

p118 그러나 바가바드기타든 마하바라타든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는 쉬운 답이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탐욕과 전쟁을 자주 찬양한 것도 사실이지만, 인도의 신화와 제의는 동시에 사람들이 그 비극에 직면하는 것을 돕고, 심지어 정신에서 폭력성을 근절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사람들이 전혀 폭력 없이 함께 살 길을 개척하기도 했다

p128 이렇게 해서 중국이라는 현실 국가의 체계적 폭력이 출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천명은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발전이었다. 비록 이론적이더라도 통치자가 백성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지고 백성에게 책무를 다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천명은 중국에서 계속 중요한 이상으로 남게 된다

p147 선한 사람을 이용하여 악한 사람을 다스리는 국가는 무질서에 오염되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상앙은 그렇게 주장했다. “악한 사람을 이용하여 선한 사람을 다스리는 국가는 늘 평화를 누리며 강해질 것이다”

p154 그들은 덕 있는 유가의 대안이 살아 있도록 유지하고 그것을 정부의 핵심에 자리 잡게 했지만,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일 위력이 늘 부족했다

p159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은 이 이야기를 확인해주지 않는다. 여호수아에 묘사된 대량 파괴의 증거도 없고, 강력한 외적의 침략을 보여주는 흔적도 없다. 그러나 이 서사는 현대 역사학자들을 만족시켜주려고 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웃들과 구별되는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돕는 민족 서사시다

p181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새로운 일이어서 개혁가들은 이런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 그대로 역사를 새로 써야만 했따. 그들은 장차 언젠가 히브리 성경이 될 왕립 문서보관서의 텍스트들을 엄청나게 편집하고 수정하기 시작했다

p185 키루스는 이전의 아시리아 사람들이나 바빌론 사람들과는 달리 새로운 신민을 모욕하거나 추방하는 대신, 그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신상을 모독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있는 키루스 실린더에 보존되어 있다

p186 기원전 522년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가 죽은 뒤 페르시아 왕좌에 오른 다리우스 1세의 비문에서 우리는 모든 성공한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되풀이해 나타날 세 가지 주제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제국의 선과 그것에 반대하는 악한 자들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세계관, 통치자를 신의 대리자로 보는 선민 사상, 세상을 구한다는 사명.

p219 유대교는 바리새인의 지도자 요하난 벤자카이가 읶는 학자 덕분에 살아남았는데, 그는 성전 예배에 기초한 신앙을 책의 종교로 바꾸어놓았다

p224 북아프리카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불평했다. “티베르강이 담에까지 올라오면, 나일강이 범람하여 들판을 덮지 않으면,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으면, 지진이나 기근이나 역병이 발생하면, 바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기독교인을 사자에게’

p236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했지만 기독교인 황제는 엄청난 부를 누렸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같은 식탁에 앉는다고 했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예외적인 고귀한 상태에서 살았다

p242 주교들은 대부분 콘스탄티누스의 비위를 거스릴까 걱정하여 아타나시우스의 교의를 형식적으로 지지했지만 계속 전과 다름없이 설교했다. 니케아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아리우스 논쟁은 그 뒤로 60년을 더 끌었다

p256 그는 이교도 신전을 파괴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황후 아일리아 플라킬라는 이미 로마에서 귀족 여자 무리를 이끌고 이교도 성지를 공격하여 이름을 날렸다. 388년 테오도시우스는 수사들에게 공격 허가를 내렸고, 수사들은 시리아의 마을 성지들을 역병처럼 공격했다. 또 현지 주교와 공모하여 유프라데스강변 칼리니쿰의 회당도 파괴했다

p269 7세기 초에 이르면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모두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한 전쟁 때문에 망하게 된다. 참담한 역병 때문에 이미 허약해진 시리아는 궁핍해졌고 페르시아는 무정부 상태로 변해 변경 지대는 돌이킬 수 없이 훼손당했다.

p273 가주는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물자가 충분하지 않을 지역에서 부를 재분배하는 잔인하지만 단순한 방법이었다

p277 큰 아랍인 부족은 둘이었고-아우스족과 카즈라즈족- 유대인 부족이 스물이었으며, 이들 모두가 늘 서로 싸웠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적 외부작인 무함마드는 중재자가 되었고, 돕는 자들과 이주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적과 싸우는 하나의 거대 부족-개별적인 사람들은 사라지는 하나의 공동체-으로 통합하는 합의를 만들어낸다

p281 이슬람의 내어줌은 우리의 내재적 이기심에 맞선 끊임없는 지하드를 요구한다. 이것은 때로는 싸움을 포함하지만 시련을 용감하게 견디고 곤경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 또한 지하드로 묘사된다.

p304 무하람(이슬람력 첫째 달)의 10일(아슈라), 이맘 후사인의 죽음을 추도하는 날에 시아파는 공개적으로 그의 피살을 애도하며 거리를 행진했고, 주류 무슬림 생활의 부패에 영원히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울며 가슴을 쳤다

p309 카롤링거 왕조의 전쟁은 하느님의 승인을 받은 성전으로 제시되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왕조를 신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그들의 군사 원정에는 분명히 종교적 차원이 있었지만 물질적 이익이 그것만큼 중요했다. 732년 카롤루스 마르텔은 투르를 약탈하러 가던 무슬림 군대를 물리쳤지만, 승리를 거둔 뒤 즉시 프랑키아 남부의 기독교 공동체들을 무슬림이 그랬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철저하게 약탈했다

p312 기도로 악마의 권세와 싸우는 수사들은 이 세계의 안보에 필수적이었다. 귀족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싸움과 기도였다

p314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가 설명한 대로, 전쟁은 기사에게 명예와 영웅주의적 태도를 가져다주는 것 외에 “어쩌면 가장 큰 이윤의 원천으로서 귀족의 주요 산업”이었으며, 따라서 자산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위신의 비참한 상실만이 아니라 경제적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p321 한 유대인 연대기 기록자는 십자군끼리 하는 말을 들었다. “보라, 여기에 메시아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유대인이 있는데, 우리는 이스마엘의 자손에게 복수를 하러 가고 있다. 먼저 유대인에게 복수를 하자”

p326 더 죽일 사람이 남지 않자 십자군은 ‘부활의 교회’로 행진하며 찬송가를 불렀다. 그들의 뺨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스도의 무덤’ 옆에서는 부활절 전례문을 노래했다

p333 살라딘은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다는 말이 자신의 적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살라딘이 군사적 성공을 거둔 것은 프랑크족 내부의 만성적인 다툼과 서쪽에서 새로 온 사람들이 지역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세우는 매파 정책 덕분이었다.

p349 이런 기사도 규약을 지키는 왕들은 자신들도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하느님과 직접 연결된다고 믿었으며, 13세기에 이르면 그들 가운데 일부는 교황의 우위에 도전할 만큼 힘을 키웠다고 믿었다.

p350 그들은 교황 군주제가 내세운 십자군 원정이라는 이상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사라져야 했다. 수사들은 남색, 식인, 악마 숭배를 인정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다수는 이런 자백을 거부하고 화형대에 섰다. 필리프의 무자비함을 보면 왕권이 인노켄티우스 3세의 교황 군주제보다 평화로운 것이 되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p361 신학자인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는 콩키스타도르에게는 “적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은 식민지 기획에 깊이 공감했다.

p371 근대 이전의 신앙이 공동체의 신성함-상가, 움마, 그리스도의 몸-을 강조한 반면 루터에게 종교란 완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였다

p375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모두 카톨릭교도를 배교자가 아니라 국가의 반역자로 보고 박해했다.

p382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몰수한 카톨릭회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후 유럽에서는 지역 통치자의 종교적 충성이 신민의 신앙을 결정했다. 훗날 이 원칙은 “영토에 속한 자는 종교도 영토에 따라야 한다”는 격언에 담겼다.

p392 스웨덴이 30년 전쟁에 참여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는 스웨덴 추밀원을 상대로 이 전쟁은 “종교의 전쟁이라기보다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문제로서 여기에 종교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p371 근대 이전의 신앙이 공동체의 신성함-상가, 움마, 그리스도의 몸-을 강조한 반면 루터에게 종교란 완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였다.

p375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모두 카톨릭교도를 배교자가 아니라 국가의 반역자로 보고 박해했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대법관이었을 때 정치적으로 위험한 이교도에게 가혹한 판결을 내렸지만, 그 자신도 헨리를 성공회 수장으로 섬기는 지상권 승인 선서를 거부하여 처형되고 만다

p382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몰수한 카톨릭교회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이후 유럽에서는 지역 통치자의 종교적 충성이 신민의 신앙을 결정했다. 훗날 이 원칙은 영토에 속한 자는 종교도 영토에 따라야 한다라는 격언에 담겼다.

p392 스웨덴이 30년 전쟁에 참여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는 스웨덴 추밀원을 상대로 이 전쟁은 “종교의 문제라기보다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문제로서 여기에 종교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p400 하느님이 텅 빈 세상을 식민지로 만드 ㄴ아담과 노아의 자손에게 원래의 주민에게 사거나 허가를 구하지 않고도 비어 있는 자리에 들어가 살 자유를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 뒤 바로 다음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갔다. 비어 있는 땅에서는 그 땅을 소유하는 자, 그곳에 문화와 농업을 전해주는 자가 곧 그 땅의 권리를 가지는 것이 자연의 원리다

p410 1730년대와 1740년대 대각성운동은 미국의 첫 대중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역사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 전국적인 사건에 참여하는 첫 경험을 안겨주었다. 많은 미국인이 이후 독립 혁명 지도자들의 세속적 경향에서는 쉽게 자신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지만, 무아경에 빠지게 되는 부흥회는 그들이 자유라고 부르는 행복한 상태의 기억을 남겨주었다.

p429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실패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긴 과정의 폭발적 출발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수천 년의 전제 정치를 뒤집은 그런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변화는 하룻밤 새에 이루어질 수 없다.

p446 남부의 설교자 제임스 헨리손힐은 노예제가 노동을 조직하는 선하고 자비로운 방법이라고 주장한 반면, 뉴욕의 헨리 위드 비처는 노예제가 나라가 저지른 죄의 가장 놀랍고 가장 비옥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p458 내가 연구한 운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 뿌리에 공포가 있었는데, 바로 현대 사회가 자신의 신앙을 파괴하려 한다는 확신이다.

p466 간디의 영혼의 힘이 실제로 세상에서 유효한 현실이 되기 전에는 개인이나 민족 양쪽에 내재한 타고난 공격성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짓밟고 부수고 학살하고 태우고 오염시킨다. 간디는 자신이 폭력을 버림으로써 싸움에 의지한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생명의 파괴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p477 그는 프랑스 기술자들에게 수에즈 운하 건설을 위탁했고, 철로를 약 1,450킬로미터 깔았고, 이제까지 경작되지 않던 땅 약 4,050제곱킬로미터 이상에 관개를 했고, 남녀 아이를 위한 근대적 학교를 세웠고, 카이로를 우아한 근대도시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나라는 파산하여 결국 1882년에 영국인이 필요로 하던 구실을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주주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 이집트를 점령했다

p479 세속주의는 그들의 국민에게 해방이나 평화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속화를 추진하는 지배자들이 익숙한 제도를 파괴하여 알아볼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아 결과적으로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p482 서양에서는 종교의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세속 민족 국가가 세워졌다. 중동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속적 민족주의는 그들의 닺줄이었던 영적 지원을 박탈하는 피에 굶주린 파괴적 힘이었다

p485 형제단은 완벽하지 않았다. 이들은 반지성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고, 그들의 발언은 종종 방어적이고 독선적이었으며, 서양관은 식민지 경험으로 왜곡되어 있었고, 지도자들은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곳에서 테러리스트 분파가 발전해 나왔다는 것이다.

p491 국제법이 전쟁 중에 정복한 땅의 영구 점유를 금지했는데도 이스라엘의 유엔 대표 압바 에반은 예루살렘이 “모든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고려를 넘어 그 위에, 그 앞과 두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

p493 고대 이스라엘은 맨 처음부터 국가 폭력을 수상쩍게 보았다. 그런데 이제 쿠크주의자들은 그것에 최고의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민족 국가가 일단 지고의 가치가 되면 액턴 경이 예측했듯이,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 가능하다

p498 서양인은 외향적이고 군중의 비위를 맞추는 정치가에게 익숙하기에 호메이니의 호소력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란인은 그의 과묵한 태도, 내면을 바라보는듯한 눈길, 단조로운 연설이 감각을 완전히 통제한 정신 맑은 신비주의자의 표시라고 인정했다

p504 그날 저녁 카터는 캠프데이비드에서 샤에게 전화를 하여 지지를 약속했고, 백악관은 인명 손실을 유감으로 여기면서도 이란과의 특별한 관계를 재확인했다. 미국 혁명가들이 쟁취한 자유와 독립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p520 그런 과점을 지닌 다수는,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스스로 비합리성의 전형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종교가 폭력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저명한 예가 리처드 도킨스인데, 그는 “오직 종교적 믿음만이 다른 때에는 멀쩡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완전한 광기를 일으킬 만한 강한 힘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위험하고 과도한 단순화는 종교와 테러리즘 양쪽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p527 테러리즘은 이슬람 세계에서 식민지 권력이 국가로 설정해놓은 경계가 민족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을 때 자주 발생했다

p539 유대주의에는 여러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 가지뿐이다. 하느님은 그저 유대인이 “이 땅에 와서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모든 나라와 분리되어 거룩한 나라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하느님은 우리가 고립되어 우리끼리 이 땅에 살면서 이질적인 것과 가능한한 접촉하지 ㅇ낳기를 바란다”

p569 이슬람에 대한 상투적 관점과 유럽의 입구에 이슬람 국가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당연히 서양이 개입을 머뭇거리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방어벽이라는 세르비아의 수사는 일부 유럽인과 미국인에게 그리 나쁘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1995년 8월 북대서양조약기구가 마침내 개입을 하여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거점들에 연달아 공습을 감행했으며, 이 곳읍으로 마침내 이 비극적 갈등은 끝이 났다

p589 니얼 퍼거슨 같은 신제국주의 지식인들의 응원을 받은 부시 정권은 해방을 목적으로 삼아 식민주의적 침공과 점령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은 강제로 이라크를 자유 세계 경제에 편입하려 하고,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친서방 아랍 국가, 즉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시장 자본주의를 포용하는 동시에 미국에 군사 기지와 방대한 유전에 접근할 권한을 제공하는 국가를 창조하여 중동의 정치를 바꾸려 한다

p593 일부 자원자들은 신임을 얻고 중요한 작전 무대로 파견도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알카에다 지도부를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파키스탄의 훈련자들은 그들을 고향으로 보내 서양 국가들의 불안정을 유도하는 쪽을 더 좋아하는 듯하다

p595 미국 정부는 공격 이후에 철저한 평가를 수행한다고 주장하지만,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고 피해 가족에게 보상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일어난 일을 자국민 앞에서 인정하지도 않았다

p59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날씨와 마찬가지로 아주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보았다. 종교에 단일하고 변함없는 고유의 폭력적 본질이 있다는 주장은 부정확하다. 똑같은 종교적 믿음과 관행이 완전히 정반대의 행동 경로의 영감이 되기도 했다

p598 사람들이 종교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많은 전쟁과 억압과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무엇보다 많은가?

p605 서양에서 세속주의는 이제 우리 정체성의 일부다. 이것은 그동안 유익했다. 특히 종교가 정부와 긴밀하게 결합하면 신앙 전통이 심하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속주의에도 그 나름의 폭력이 있었다. 혁명 프랑스는 강요 강압 유혈에 의해 세속화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역사의 쓸모 - 합리적이고 품위 있는 선택을 위한 20가지 지혜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다시, 역사의 쓸모

 : 최태성

 : 프런트페이지

읽은기간 : 2024/11/09 -2024/11/15


역사의 쓸모 2탄이다. 워낙 유명한 한국사 강사이기에 저자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한국사가 뉴라이트로 인해 수난을 겪고 있는 이때에 이런 책들이 우리가 왜 역사를 알아야하고,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간서치 김득신으로 시작해 우리나라를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사랑했던 미국인 서서평에 이르기까지 역사속에서 두드러졌던, 또는 숨겨졌던 사람들을 통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도전에 반응할 나를 응원해준다.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만드는 자들에게서 우리의 역사를 바로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다. 

자랑스런 역사에서는 긍지를, 부끄러운 역사에서는 반면교사를 삼으며 오늘 나에게 던져지는 시대의 물음에 응답하려고 한다.

좋은 책이다. 


p19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과제가 있었듯 우리 시대에는 우리 시대의 과제가 있어요. 우리는 이 과제를 풀어나가면 됩니다.

p38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이었어요. 우연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일어날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입니다. 사라예보에서의 총성은 하나의 명분이었을 뿐이에요

p61 저는 이런 것이 일종의 지적 유희라고 생각해요. 역사적 배경 지식을 알게 되면 더욱더 몰입하게 되잖아요. 창작자의 의도도 이해되고 감동도 깊어지죠.

p84 김득신은 머리가 그렇게 나빳지만 시는 잘 썼다고 합니다. 당시 왕이었던 효종은 김득신이 쓴 시를 볼 때마다 극찬했어요. 자연을 노래한 시를 읽다 보면 자기가 마치 그 자연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고 평했어요.

p85 나보다 머리 나쁜 사람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조선의 노둔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스스로에게 너는 못 해라고 한계를 정한 적이 없다. 혹시 당신이 살다가 재주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처럼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다해보아라. 내 시대에 나보다 시를 빨리 쓰는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시험에 빨리 합격한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글을 빨리 배운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나와 같이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p97 제7폭 환어행렬도는 화성을 출발한 행렬이 시흥 행궁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그렸는데 정조가 직접 혜경궁 홍씨에게 차와 음식을 올리기 위해서 행렬을 멈춘 순간을 담았어요. 정조가 어머니를 얼마나 정성껏 모셨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p114 매천야록은 정치와 경제 상황은 물론이고, 저잣거리의 소문까지 담은 중요한 자료에요. 이 책의 마지막에 담긴 사건은 경술국치였습니다. 망국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뒤 황현이 술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p145 임사홍과 막내아들 임승재는 연산군을 위해 무엇이든 합니다. 연산군의 사냥에 방해되는 민가는 몽땅 철거하고, 전국 방방곡곡의 미인을 왕에게 바쳤어요. 두 사람이 나타나면 다들 벌벌 떨었다고 해요. 그토록 연산군을 따른 이유는 연산군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p189 그가 펼친 정책들은 16세기라는 시대와 조선이라는 공간을 벗어나서 고민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생각들이거든요. 만적이 노비의 한계를 벗어나 우리도 장상이 될 수 있다고 외쳤다면, 이지함은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던 성리학의 시대에 양반으로서의 체면을 다 내려놓았어요.

p194 박노해 시인이 쓴 글귀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p215 성공신화를 만드느라 그 뒤에 숨겨진 아픔은 감춰져 버렸죠. 하지만 사실 인간 안중근은 실패와 실수를 거듭했습니다. 계획한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았고, 자신이 옳다고 믿은 결정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엄청난 비판과 비난을 받았고 극한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죠.

p247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미국의 여성운동가 캐롤 허니쉬가 한 말입니다. 사랑과 결혼, 가정 문제 같은 개인적인 것이 사실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뜻이에요. 모두 개인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p259 최홍종 목사도 아주 대단한 분이에요. 한국의 한센병 환자 이야기를 하려면 이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빈민운동가인데. 한국나병예방협회를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p262 쉴 새 없이 일하던 서서평은 1934년 여름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광주는 물론, 제주도까지 돌면서 봉상에 매진한 나머지 지나치게 쇠약해진 거에요. 매일 최소한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남은 생활비는 모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던 서서평의 사인은 안타깝게도 영양실조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편한 한국사 - 진실을 쫓는 역사 독립군 배기성의
배기성 지음 / 블랙피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불편한 한국사

 : 배기성

 : 블랙피쉬

읽은기간 : 2024/11/02 -2024/11/09


제목과 다르게 불편하지 않았다.

불편하려면 자랑스럽던 우리나라의 역사가 사실은 거짓이라든가,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사실은 맞는 것이라든가 이래야 불편할텐데, 그런 내용은 사실 없었다.

대부분 조금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봤던 이야기들이라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제목에 속아서 별점을 좀 낮게 주었다. 

역사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엮어서 읽어도 좋고, 통사로 읽어도 좋다.

무언가 내 삶에 깨달음이 있는 영역이라 역사책을 읽는 게 좋은 것 같다..

즐거웠다. 


p29 수나라는 300만 명 이상 동원한 AD 612년의 대전쟁에서 무려라 하나를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얼핏 보면 매우 초라한 성적표지만, 길게 보면 다르다. 이는 고구려로부터 석탄 화력을 빼앗아 버림으로써 수나라 다음에 올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결국 패망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구려는 612년에 무려라를 빼앗긴 후, 56년 동안 무려 5번의 대전쟁을 겪을 후에 멸망한다.

p46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견원지간이었다. 앞서 고선지 장군 등 무예에 능한 사람들을 따로 1만 명이나 형성해 저 멀리 서역에 원정 보낸 것도, 또한 약 4만 명 정도 되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저 멀리 사천성이나 운남성에 내려보낸 것도, 모두 신흥국 발해, 즉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과 연합하지 못하게 하려는 당나라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p63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쯤인가? 9개의 군진을 설치했다면 어디 어디가 9성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우리 역사학계는 아직도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현재 동북 9성의 소재지 대부분이 우리의 적대 국가인 북한 땅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스스로의 자학 사관이다. 우리 역사를 항상 과소평가하고, 삼국 통일 이후의 우리 역사는 중국 땅을 조금이라도 침범해서는 안되며, 특히 근현대 이후로는 과거의 역사라 할지라도 한반도 안에서 조용하고 얌전하게 있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 때문이다.

p79 후일 19세기 초엽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은, 조선 땅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 흑산도에서 글공부한다는 사람조차 주자 성리학을 놓고 공부한다는 소리에 “주자는 정말 힘이 세구나”라고 자조 섞이 비평을 내놓을 정도로, 조선에서는 주자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관직에 나갈 수도 없었고, 사문난적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p90 선조가 즉위한 직후, 이이는 33세의 한창 젊은 청류 선배로서,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내놓는다. ‘정병 10만 양병설’이다. 군사를 양성하는 데 그 윤원형의 재산을 쓰자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전하, 윤원형의 재산이 왕실로 귀속되어야 한다. 신하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같은 논쟁은 지금 하등의 쓸모가 없는 논쟁이옵니다. 이로써 정병을 양성하여, 유사시를 대비한다 하면, 전국의 인구조사를 다시 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유랑민들을 다시 세금을 내게 하는 양민으로 돌릴 수 있사옵고, 또한 나라의 제조업을 무기로 만드는 공업으로 할 수 있어 조선의 문약함을 돌볼 수 있나이다.”

p102 1593년과 1594년의 머리글자를 딴 계갑 대기근. 1592년에 전쟁으로 전국의 농토가 황폐화되니 농사를 하나도 짓지 못하고,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유랑민이 되니 어찌 흉년이 들지 않겠는가! 도제찰사 오리 이원익의 불길한 예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져 1593-1594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최악의 대기근에 시달렸다.

p109 남해 바다를 지킬 수 있는 장수는 이순신 제독 말고는 없사옵니다. 원균은 빼고 말하시옵소서.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따. 2대 199의 대결이었다. 2는 오리 이원익과 좌찬성 정탁 그리고 나머지는 국왕을 포함한 문무백관 전체이다.

p122 이원익은 붕당을 정말 싫어했다. 그의 스승 율곡 이이와 비슷했따. 그렇지만 붕당으로 굳이 치자면, 남인에 속했다 한다. 실은 이원익 정승은 특정 붕당 모임에 나간 적도, 자신이 남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 싶다. 그런데, 자신의 필생의 업적인 대동법의 완수를 승계해야 한다는 목적의식하에 후계자를 찾을 때에, 그는 김육을 강력히 천거했다.

p146 이 영조라는 임금은 진정한 사이코패스였다. 이제부터 또다시 그의 광기가 시작된다. 약 60여 명의 소론 학자들이 참형을 당했다. 양명학자 이광사는 이에 연루되어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과 어리디어린 아기 딸을 남겨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p152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전통주의 종류는 영조의 뻘짓거리 한 방에 크게 줄었고, 추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1916년 조선총독부의 주세령에 따라 소규모 양조장은 모두 없어졌다.

p178 우리에게 알려진 판소리 여섯마당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는 1840년대에서 1850년대 사이에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신재효가 개작, 정리한 것이다. 창작한 것은 아니고,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판소리라는 장르를 네 가지 장르(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로 4대 법례를 마련한 음악 이론가라고 하면 맞겠다. 그러니까 이 판소리 장르는 서양 음악으로 치자면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보다도 훨씬 현대 음악이다

p191 조선의 19세기를 돌이킬 때 가장 아까운 3명이 있다. 최시형, 전봉준, 김대건이다. 앞의 2명은 동학의 인재이고, 뒤의 1명은 서학의 인재이다. 이 셋을 끌어안지 못해서 조선은 망했다. 조선의 세도 정치 및 후진 역사성은 이 셋의 번득이는 천재성을 끝끝내 포용하지 못하고 모두 교수형 아니면 참형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p196 탐보라 화산이 터졌다. 1812년부터 조금씩 인도네시아 숨바와섬에서 이상 조짐을 보이던 탐보라 화산이 드디어 터졌다. 1815년의 일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폭발 소리가 감지될 만큼 엄청난 분화였다. 발리섬과 그 옆의 룸복섬 그리고 그 옆에 숨바와섬에 있는 탐보라 화산이었다. 숨바와섬에 있던 1만 2,000명이 폭발 7일 만에 사망하고, 8만 명이 1년 안에 모두 죽었따. 무려 9만 2,000명이 직접적인 피해로 죽었다.

p201 정한론. 1870년을 전후해 우리나라에 전달되었던 일본의 대륙 침략 계획이다.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에 의해 처음 주창되었떤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쓰마 번과 함께 1868년 메이지 유신은 각 현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것을 일본이라고 하는 하나의 나라로 합친 것이다.

p208 바우덕이는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받는다. 벼슬을 받은 것이다. 정3품 이상은 당상관이다. 바우덕이가 얼마나 뛰어난 예능 실력으로, 당시 경복궁 중건 노역자들에게 노동 의지를 불태우게 해주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p214 이하영은 철도 노선을 놓기 위해서는 대규모 출자가 이루어져야 함을 계속 이야기했고, 이에 금융왕 JP 모건이 눈치 빠르게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느 ㄴ정동교회 바로 건너편에 한국 지점을 설치했다. 그리고 미국 자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전차부터 개설했다.

p217 태화관에 오지 않은 민족 대표 4명이 더 있다는 것을 손병희의 진술로 확보했다. 인감도장만 맡기고 오지 않은 것이다. 평안북도의 길선주 장로, 평안북도의 유여대 장로, 김병조 목사, 정춘수 목사 등은 모두 각자의 곳에서 더욱 열심히 만세를 부르고 그 현장에는 가지 않는 대신 인감도장을 보내, 독립선언서에 도장은 총 33개가 찍혔다.

p219 요리 만드는 사람이 그 요리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11월 18일 아침 소식을 듣고 까무러쳤다. 그 중명전 회의장이 바로 대한제국을 망하게 만든 을사늑약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만든 요리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순간 양 손목을 자르고 싶었다는 안순환의 회고. 그러니 1919년 3월 1일의 민족적 거사에 안순환은 손병희를 붙들고 그날의 오욕을 씻게 해 달라고, 민족지도자 대표 33인에게 제가 정성껏 만든 요리를 대접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