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 그림과 문장과 삶을 엮은 내 영혼의 미술관
이소영 지음 / 청림Life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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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읽는 

 :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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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6/01/04 -2026/01/08


믿고 읽는 큐레이터 이소영님의 신작. 

제목부터 확 끌린다.. 그림 읽는 밤이라니..

그림 한점과 그림에 대한 설명, 그리고 작가에 대한 설명과 본인의 수필 이렇게 한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 

48컷의 크림을 보면서 고요함과 외로움을 느껴보게 되어 있다.

그림의 상당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중반의 작품이니 후기 인상주의에서 현대그림들이다. 

그렇지만 어려운 그림은 없다. 보면 마음이 따듯해지고, 몰입하게 되고, 고요해지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을 모르는 내가 보고 읽어도 공감이 가는 책이다. 

올해 첫번째로 읽은 책인데 올해의 책 후보다. 올해는 운이 좋다. 

그림에 몰입하고 있는 나도 좋지만 올해는 사람에 몰입하는 내가 되면 더 좋겠다. 


p51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운율은 있다. 생각의 궤적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주기성이 마음의 경험을 지배한다.

p62 평생 파리를 떠나 본 적 없는 루소였지만, 그의 상상력은 전 세계를 여행했다. 그의 정글 연작들은 실제 경험이 아닌 파리의 식물원과 동물원, 자연사 박물관 등을 방문해 표본들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탄생한 것이다. 그의 이국적 취미와 리얼리즘의 독특한 결합을 보여 준 이 같은 접근법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p74 관찰을 넘어선 그의 애정 어린 응시는 욕실과 식탁 시리즈에서도 두드러진다. 곧장 “색은 감정의 언어다”라고 주장한 그답게 노랑, 주황, 분홍빛이 어우러진 색채는 삶의 온기를 찾아내는 그만의 감각적 언어이다.

p88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는 ‘예술에는 나이가 없다’라는 말을 가장 아름답게 증명한 화가로, 본명보다 모지스 할머니로 더 유명하다.

p93 마치 하루가 그곳에서 종말을 고하듯 저녁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만물이 거기서 탄생하듯이 아침을 바라보아라. 그대의 눈에 비친 것들이 모든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 -앙드레 지드

p123 삶의 평온이 꺼지는 순간, 인간이 느끼는 막막함과 초월의 감정이 이 배 안에 실려 있다. 뵈클린은 이 그림을 다섯 번이나 반복해 그렸는데, 유럽의 여러 수집가들과 황제들, 영화감독, 심지어는 프로이트와 히틀러 그리고 레닌까지 이 작품에 매혹되었다.

p143 이 작품이 그려진 1880년대의 프랑스는 표면적으로는 진보의 시대였다. 교육개혁이 이루어지고,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섬세한 눈은 이 진보의 빛 바깥에 남겨진 이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여성 화가로서 끊임없이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기에, 아마도 이 소녀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겹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p173 그림 속에서 인물들은 간격을 두고 서 있다. 가까이 있지만 서로를 움켜 쥐지 않는다. 그렇다고 멀리서 방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곁에서 각자의 빛을 지켜낸다. 이 절묘한 거리감은 인간관계의 비밀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살며시 어루만지는 것, 페리시가 그린 장면은 바로 이러한 태도의 시각적 은유처럼 보인다.

p179 내가 꿈꾸는 예술은 순수와 고요가 깃든 세계이다. 이러한 예술은 작가나 사업가 같은 모든 정신 노동자들의 지친 영혼에 편안한 안락의자와 같은 쉼을 준다. -앙리 마티스

p203 우리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인 것이었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의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져 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모순, 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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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교양과 상식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
유홍준 지음 / 눌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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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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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5/12/09 -2025/12/23


언제나 좋은 책을 쓰시는 유홍준 박물관장님의 새책을 읽었다. 

이번 책은 한국미술사다. 개론서로서 아주 좋다. 

꼭 국립박물관장님이 되셔서 앞으로 박물관에 오면 이런 작품들을 중심으로 감상하라고 쓴 책같다. 구석기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 건축, 회화, 공예를 총 망라해서 다양한 한국의 미술품들을 설명하고 도해해서 보여준다.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알아야 할 문화재들을 잘 공부했다. 

아무래도 현대에 가까울수록 수록된 문화재가 점점 많아진다. 심지어 조선회화는 조선전기, 중기, 후기, 말기로 구분되어 써야할 만큼 방대한 문화재를 소개한다. 

내용이 많아지니 내가 한국사 시험을 볼 것도 아닌데 이런 문화재도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가, 이런 작품을 모르고 죽으면 또 억울할 것 같아 열심히 읽고 표시했다. 

결국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다. 박물관에 가서 유명한 작품도 봐야겠지만 스쳐 지나가지 않아야 하는 작품들도 잘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2026년도 박물관 방문이 기대된다. 


p16 신석기시대는 크게 여섯 가지 특징이 있다. 집, 농경, 목축, 옷, 간석기, 토기 등이다.

p23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알타이, 오르도스, 몽골과 밀접한 천연성을 지녔으며 중국과는 큰 연관이 없다. 그래서 인종, 언어, 유물 어느 것으로 보아도 한민족은 뿌리를 몽골, 알타이에 연원을 둔 북방 민족으로 생각되고 있다.

p50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기마인물모양도기는 무덤의 주인을 저승에 이르는 길로 안내하는 영혼의 동반자라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속이 비어 있는 용기로 말의 꼬리는 손잡이이고 등에는 깔때기가 달렸으며, 가슴 앞으로는 주구가 길게 나와 있다. 주인과 시종의 모습, 말의 형상과 말안장 모두가 정교하게 묘사된 하나의 조각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p58 3세기 무렵부터는 돌방흙무덤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현재 접안에 있는 1만 1300여 기의 고구려 무덤 중 반은 돌무지무덤, 반은 돌방흙무덤이다. 그리고 4세기 이후 돌방흙무덤에 벽화가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약 100기가 발견되었다. 벽화고분은 대개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으로 생각되고 있다.

p96 신라에서 금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으로도 확인된다. 특히 9세기 이슬람의 기행문인 이븐 크루다지바의 도로와 왕국 총람에는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와서 이슬람교도들이 영구 정착한 것은 그곳의 이런 이점 때문이라고 한다”라고 나와 있다. 이처럼 신라는 금이 풍부하고 기술이 뛰어났기 대문에 수많은 순금 공예품을 만들어, 일본의 기록에서 신라를 두고 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p126 이와 같은 뛰어난 비례 감각에 의해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은 고상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건축물로 탄생한 것이다. 늘씬하게 올라간 상승감과 적당한 기울기를 갖고 있는 추녀 끝 곡선은 백제의 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이다.

p148 통일신라의 문화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대에 활짝 꽃피웠다. 불국사, 석굴암, 석가탑 사리장엄구 등 우리나라 건축, 조각, 공예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p157 통일신라시대에는 3층석탑 정형의 완성과 동시에 이형탑이 탄생하였다. 70퍼센트의 전형에 30퍼센트의 변형이 이루어져 통일신라 석탑은 통일 속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p175 석굴암은 토함산 정상에 가까운 해발 565미터 되는 지점에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동남 30도 방향으로 세워졌다. 이 방향은 물리학자 남천우의 설명에 의하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연중 일조량이 가장 많다. 수학자 김용운은 석굴암에서 신라인들이 기하학을 응용한 예를 열가지 들면서,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인 root2의 전개를 기본으로 하여 석굴암 입구와 내부의 평면도는 정육각형의 한 변과 외접원의 관계이며, 본존불과 대좌의 구성은 정팔각형과 내접원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p202 발해는 기록뿐만 아니라 문화유산마저 남긴 것이 미미하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유물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빈약하다. 이런 경우 미술사는 유물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과 함께, 잃어버린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을 과제로 동반하게 된다.

p209 발해 도기에는 유약을 바른 삼채가 등장한다. 삼채는 자기로 가는 앞 단계에 나타난 기법이다. 납으로 만든 연유에 철, 구리 등을 섞어 가마에서 구워내면 초록, 노랑, 갈색 등 세 가지 색깔이 자연스럽게 번지는, 당시로서는 고급 도예 기술이다. 이 기법은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여 당삼채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p233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에서 볼 수 있듯이 본래 보살상은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고려불상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p305 나전칠기는 나무로 기물을 만든 다음 굵은 삼베를 바르고 그 위에 자개를 붙인 후 옻칠을 덧입혀 반반하게 만든 것이다. 대체로 헝겁 바르기 —> 칠하기 —> 나전 시문 —> 칠하기 —> 나전무늬의 칠 벗겨내기 —> 광내기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칠기를 목심저피칠기라고도 부른다

p318 이러한 조선시대의 건축은 동양미술사 내지 세계미술사의 시각에서도 독특한 문화적 위상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창덕궁, 종묘, 수원 화성, 한국의 서원, 산사,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남한산성, 조선왕릉 등 모두 8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p328 조선시대 서원의 최고 명작은 희재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서애 류성룡을 모신 안동 병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은 아름다운 계곡가에 위치해 있고 병산서원은 낙동강 변의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병산을 마주한 언덕자락에 세워져 있다.

p350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초기 미술사가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어 왔다. 고유섭은 비정제성이 주는 구수한 큰 맛, 최순우는 어진 선 맛에서 일어나는 너그러움, 김원용은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화가 김환기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에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p366 조선 전기 백자의 상징이 매죽무늬 항아리이고, 조선 후기 금사리 가마 백자의 상징이 달항아리라면 조선 중기 백자의 상징은 철화백자 운룡무늬 항아리, 화룡준이다. 용준이라고도 불린 이 항아리는 본래 의례 때 사용하는 술항아리이다.

p379 백자 달항아리의 이런 아름다움은 후대에 거의 전설이 되어 무수한 찬미를 낳았다. 김환기는 백자 달항아리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고 했고, 최순우는 잘생긴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넉넉함이 있다고 했고, 이동주는 서민들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사대부의 지성미가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고 했다.

p425 소상팔경도는 북송의 송적이 처음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 사계절 산수의 대명사가 되어 뭇 화가와 시인들이 이를 그리고 시로 읊었다. 초봄 산시청람 : 푸른 기운 감도는 산마을, 늦봄 연사만종 : 안개 낀 절의 저녁 종소리, 초여름 어촌석조 : 어촌의 저녁노을, 늦여름 원포귀범 : 멀리 포구로 돌아오는 배, 초가을 소상야우 :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늦가을 동정추월 : 동정호의 가을 달, 초겨울 평사낙안 :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 늦겨울 강천모설 : 저녁 무렵 산야에 내리는 눈

p468 이 속화첩은 사제첩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사제는 사향노루의 배꼽으로 이는 향기가 짙어 암수 사랑의 계기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사냥꾼의 표적이 된다는 뜻이다. 표제 오른쪽에는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엄중한 경고문이 쓰여 있다. 이는 조영석이 환쟁이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p486 정조 시대는 앞 시기인 영조 연간의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등이 개척한 속화, 진경산수, 문인화풍들이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긍재 김득신 등 화원들에 의해 결실을 맺는 시기였다. 즉 진보적 지식인(문인화가)이 개척한 화풍을 테크노크라트라 할 전문인(화원)이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교량 역할을 한 인물이 표암 강세황이다.

p501 그가 그린 속화와 미인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풍류와 낭만은 물론이고 당시의 아름다운 색감을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하기로 혜원은 춘화를 그려 도화소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실제로 혜원이 그린 춘화가 여러 폭 전한다.

p519 조희룡은 추사의 충실한 지지자로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 갈 때 그의 측근으로 연좌되어 임자도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조희룡의 글씨는 추사의 글씨를 빼닮았는데 추사의 글씨는 강하고 조희룡의 글씨는 예쁘다는 인상을 준다. 조희룡은 난초, 매화, 산수 모두에서 기량이 뛰어나 추사가 추구한 문인화를 가장 잘 구현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p531 석파 이항은이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1849년 추사 나이 64세. 이하응 나이 30세 때이다. 이때부터 그는 추사의 난보를 보고 익혀 추사로부터 “압록강 이동에 이런 난초 그림은 없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p604 임진왜란을 계기로 불교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의승군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었지만 조선 후기 불교가 크게 부활한 것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p617 영산재는 석가모니가 영취선에서 법화경을 강의했던 장면을 재구성한 의식이었기에 괘불탱은 영산회상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대규모 의식이 행해질 때면 옥외에 불단을 차린다. 이를 야단법석이라고 하는데 이때 내거는 대형 불화를 괘불탱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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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가야 여행기 - 내가 사랑한 가야,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잊혀진 나라 여행기
정은영 지음 / 율리시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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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5/10/11 -2025/10/20


알려지지 않은 나라. 가야..

우리나라 고대사는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많다보니 항상 신화에 쌓여있다. 

그러다보니 얼토당토 않은 사이비 역사가들의 허풍과 거짓말의 잔치가 계속 벌어진다. 

가야는 더더욱 안 알려진 나라.. 임나일본부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그런 가야를 탐방하는 책이 있다 해서 열심히 읽었다. 

저자는 가야의 영향력이 있는 지역을 매우 넓게 보았다. 

가야의 중심지인 김해, 부산, 고령, 함안 뿐만이 아니라 전주까지도 가야의 영향력 하에 두고 탐방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유물과 유적, 그리고 고고학적 성과가 있었다. 

순장이 있었던 고분도 발굴이 됐고, 많은 고분군과 토기, 철제류가 연구됐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구슬에 꿰어 보배로 만들고 있었다. 

반성한다.. 가야에 대해서 더 배워야갰다.. 

좋은 책을 읽어서 즐겁고 행복하다. 


p7 고고학의 목적은 화려한 유물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인간이다. 저자는 역사에 과잉된 내셔널리즘을 투영하는 것을 경계한다. 대신 수많은 무덤에서 사랑하고 때론 다투던 과거 사람들의 외침을 느낀다.

p29 흉노족 후손이 가야뿐만 아니라 신라를 이끌었다는 주장은 두 개의 비석 문무왕릉비와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 발견되면서 주목받았다. 문무왕릉비에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 7대를 이어 내려와라고 되어 있고, 대당고김씨부인모명에는 김씨 부인의 선조가 요동지방으로 피난하고 번성해진 김일제의 후손으로 소개되어 있다.

p40 봉황대가 바다였음을 알려주는 유적은 회현리 패총이다.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 등 쓰레기들이 모여 있는 유적으로 그곳이 옛날에 바다였음을 알려주는 자리다. 봉황대의 회현리 패총은 특히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진 곳으로 중요한데, 지금도 봉황대 아랫마을 입구에는 이를 기억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

p44 신화는 역사가 놓칠 수 있는 진실을 담고 있다.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여러 세대를 지나는 동안 사람들의 소망과 마음이 모여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함께 신화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p51 이곳의 발굴은 1969년부터 2008년 일단락되기까지 4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오랜 시간의 정성스러운 발굴 결과로 무덤만 총 20여기가 발견되었고 가야토기, 철제무기류, 갑옷, 금동관 등 1만여 점이 넘는 유물이 나왔다. 복천박물관은 복천동 고분에서 나온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1996년 개관한 곳이었다. 미지의 왕국으로 남아 있는 가야의 신비를 풀며, 고대 부산에 있었던 가야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p58 덧널무덤의 특징은 덧널의 흔적을 안타깝게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 나무의 특성 때문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껴묻거리만 있고 관의 흔적이 없을 때 고고학자는 이를 덧널무덥으로 추정한다. 덧널무덤을 볼 때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떠오른다.

p69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아라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함안을 샅샅이 뒤졌다. 1917년 일본의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의 첫 발굴, 1918년 야쓰이 세이이치의 말이산 정상 13호분 발굴이 있었다. 이때 발굴된 유물들을 일본인들이 화차로 실어 가 남아 있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p76 이곳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529년 안라고당회의 장소였다는 설이 있다. 안라고당회의는 당시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놀의하기 위해 신라, 왜, 아라가야, 백제가 함께 만난 국제회의로 알려져 있다. 그 회의를 위해 고당을 새로 지었다는 이야기다.

p87 소가야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대가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았다는 의미의 작은 가야라는 설도 있고, 철이 많이 나는 쇠가야가 잘못 전해야 소가야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소가야가 언제 멸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가야 멸망했다는 562년경으로 짐작되고 있다.

p10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신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p117 해인사에는 대가야 시조 신화의 주인공인 산신 정견모주를 모신 국사단이 있다. 해인사의 국사단은 절을 구성하는 단순한 전각이 아니라 대가야를 지탱했던 성소이다.

p125 지방 박물관들은 흔히 고분을 끼고 있다. 고령의 대가야박물관, 김해의 대성동박물관, 고성의 고성박물관의 입지가 다 그러하다.

p143 일본서기에 512년 있었다는 임나4현 할양 기사는 조심스레 읽어내릴 필요가 있다. 임나 4현은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인데 호남 동부를 아우른다. 백제가 왜에 조공하며 임나 4현을 달라고 해서 주었다는 기록이다. 백제와 왜의 조공과 할양 부분은 왜곡되었지만, 6세기 초 호남 동부가 가야에서 백제로 넘어가는 일단의 과정을 시사한다.

p153 기억나는 것은 청정한 장수의 밤을 강타하는 시원한 물소리였다. 알고 보니 장수는 물의 마을이었다. 금강의 발원지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우물지인 뜬봉샘이 바로 장수에 있다. 그날 밤 내가 들은 물소리는 깊은 소나무를 뚫고 나오는 세찬 빗소리 같았다.

p162 순천의 가야는 인디언 서머처럼 짧고 굵은 시간이었다. 순천의 가야는 5세기에서 6세기까지 채 100여 년이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시기를 제외한 대다수 시간은 마한과 백제 문화권에 속했다.

p165 순천은 6세기 백제가 조공을 바쳐 임나5현을 요청하니 왜가 이를 허락했다는 문제의 임나4현으로 거론되는 곳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맞다면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의 4현이 왜의 땅이었다는 얘기다. 상다리와 하다리는 여수, 모루는 광양으로 비정되고 사타가 바로 순천이었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다.

p168 우리의 근대에 간송 전형필이 있다면,. 우리의 현대에는 한창기가 있다. 전시실의 카피가 말하듯, 한창기는 흉내 낼 수 없는 사람이다.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이 있어서 순천은 더욱 그리운 곳이 될 것 같다.

p192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된 유물의 10퍼센트가 리움미술관 소장이다. 고미술은 4층 청자, 3층 분청사기, 2층 고서화, 1층 불교미술과 금속공예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고, 4층에서부터 한 층씩 계단을 내려오면서 관람하는 동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층을 다 보는 것도 좋지만, 관심이 있는 층을 집중적으로 보는 것도 괜찮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거쳐 나눠보기 방식이다. 4층은 국보와 보물 천지다. 3층에는 호랑이의 눈빛과 털이 생생한 김홍도의 송하맹호도가 있다.

p202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와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고 보존하고 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탄생한 박물관이다. 가야가 생경했던 1998년 개관했으니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가야인의 삶과 생업, 전쟁과 사랑, 철의 제국과 해상강국 등의 모든 이야기를 다 담아놓았다. 김해, 함안, 부산, 창년 발굴 가야 유물들을 전부 포함하고 있다. 금관가야, 아라가야, 비화가야 등 가야 소국들의 유물을 함께 관람하며 서로의 양식과 특징을 비교해볼 수 있어 가야 문화 전반에 대한 조망이 가능하다.

p210 굴가마라는 토기 기술의 혁신을 이끌어낸 가야인들의 과학정신도 대단하지만, 가야토기는 다양성에서 더욱 빛난다. 여러 가야 소국이 연맹과 네트워크로 작동한 정치체를 운영했던 것의 문화적 결과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데서 창조성과 다양성이 꽃핀다.

p226 5세기 죽막동은 대가야가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으나, 그 땅의 주인은 백제였다. 그 백제 땅에서 주변국의 토기들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백제, 가야, 왜의 토기, 금세공품, 철기들이다. 이 유물들이 서로 섞여 투명박스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국적이 다른 유물들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이곳은 국제 해양 제사가 열린 곳으로 알려지게 된다. 풍어와 해상의 안전, 나라의 평안에는 국경이 따로 없다.

p228 순장은 원래 스키타이, 흉노 등 북방 유목민들의 풍습이었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스키타이족의 순장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스키타이 왕이 죽으면 왕의 시신을 안치한 후 왕의 후궁, 술따르는 사람, 요리사, 마부, 집사를 각 한 명씩 죽여 순장했다. 그 왕의 1주기가 되면 왕의 시종 50명과 말 50필을 죽여 이들을 서로 연결해 무덤 주위에 빙 둘러 배치한다. 마치 50명의 기마병이 죽은 왕을 호위하고 있는 느낌이다.

p243 아요디아가 아유타국으로 지목된 데는 쌍어문과 허황옥을 일생에 걸쳐 좇은 두 연구자의 공이 크다. 아동문학가이자 삼국유사 연구자인 이종기와 고고학자이자 한양대학교 교수였던 김병모다. 이종기가 펜클럽대회 참석차 들른 아요디아에서 쌍어문을 발견했듯이, 김병모 또한 아요디아에서 쌍어문을 찾았다.

p257 아내이자 엄마로 살면서 나라가 부를 때 갑옷과 투구를 쓰고 참전한 주체적인 가야 여성을 대성동박물관에서 만났다. 특히 57호분 순장녀들이 여전사들이었음을 보다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는 홀로그램을 만날 수 있었다.

p262 죽음을 앞두고 그는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힐까. 차차리 돌로 덮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자손은 구형왕의 유지를 받들어 돌무덤을 만들었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7층의 돌무덤이 되었다.

p273 그는 1961년 북한 노동당의 기관지 로동신문에 우륵의 음악 활동이라는 글을 남겼다. 진흥왕이 낭성에 이르러 우륵과 제자를 불러 하림궁에서 연주를 들은 해 551년을 기점으로 141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진흥왕과 우륵의 역사적 만남이 북한 땅에서도 기억되고 있다.

p287 무엇보다 가야를 하나로 묶는 기능은 건국신화가 했을 듯하다. 가야에는 두 개의 건국신화가 있다. 금관가야 중심의 것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수로왕의 구지봉 신화다. 지금의 김해 땅에 있는 얕은 언덕, 구지봉에 6개의 황금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알에서 6명의 동자가 깨어났다. 그 중 가장 먼저 깨어나온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 동자는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또 하나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인데 조선시대 진증동국여지승람에 신라 말기 최치원이 쓴 석이정전의 내용으로 소개되었다.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지가 만나 형제를 낳는다. 뇌질주일과 뇌질청예다. 뇌질주일은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왕이고 뇌질청예는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이다.

p304 하워드 카터가 왕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 수천년의 시간 동안 마른 한 묶음의 꽃다발을 만나게 되었다. 무엇일까. 어린 나이에 홀론 된 왕비가 남편인 투탕카멘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이지 않을까. 이렇듯 무덤은 남은 자들이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선물이 그윽한 곳이다.

p314 고고학자 강인욱은 고고학 여행에서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랑이라고 했다. 작별을 준비하면서 가야인들은 토기를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p321 신라의 탈해왕이 된 석탈해는 철기 집단의 수장이라는 추정이 우세한데, 기록에 보면 석탈해가 가야에 와서 수로왕과 술법을 겨루는 장면이 있다. 이 술법 싸움을 석탈해와 수로왕의 철기 집단 사이의 패권 다툼으로 보는 해석이 우세하다. 캄차카반도에서 이주한 석탈해 중심의 철기 집단이 먼저 이주해온 김수로왕의 철기 집단에 싸움을 걸었다가 패배하고 결국 신라로 갔다는 해석이 있다.

p341 1970~1980년대 한국 고고학은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넘어 빛나는 성취를 보여준다. 가장 드라마틱했던 발굴은 1977년 고령 지산동 고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순장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한 고고학계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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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새벽 - 다시 쓰는 인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외 지음, 김병화 옮김, 이상희 감수 / 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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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것의 새벽

 : 데이비드 그레이버

 : 김영사

읽은기간 : 2025/06/27 -2025/09/20


벽돌책답게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처음 대여를 했는데 책이 두꺼워 다 못읽고 반납을 했다가 다시 빌려서 봤다. 

제목이 매우 매력적인데 읽는데는 쉽지 않았다. 

인류 역사 초기의 문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흥미롭긴 하지만 머릿속으로 정리하기엔 쉽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기존 역사와 믿음과는 다른 내용이다 보니 더 수용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초기 문명시절에도 평등한사회에서 왕과 권력자가 생겼다는 단선적인 방향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 민주사회, 왕 및 귀족사회등 다양한 사회가 파노라마처럼 함께 있었고, 단선적인 방향으로 역사가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특히 그동안 많은 내용을 알지 못하는 아메리카의 초기 문명을 중심으로 내용이 설명이 되니 흥미롭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저자는 수십년 내에 이와 같은 문명발달사가 주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 아니면 기존의 이론이 더 많은 증거를 보강해 강화될 지는 모르지만 초기 문명의 다양한 아규와 토론이 문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재미있지만 읽기는 쉽지 않았다. 


p19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물질적 자원(토지, 칼로리, 생산수단)이 확실히 중요하다고는 해도 인간의 역사에서 궁극적인 질문은 그런 것을 얻을 기회가 평등한지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방법에 관한 결정에 도움을 줄 능력이 평등한가다.

p28 고대 무덤의 증거에서 얻어진 건강 관련 지표들이 발견되는 통계적 빈도를 근거로하여 인간 사회가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 일반적 결론을 내리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면 우리는 홉스와(그리고 핑커와도)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원래 인간이라는 종은 기르고 보살핌을 베푸는 종이며, 삶이 불쾌하고 잔혹하거나 짧아야 할 필연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p34 그녀는 야노마미족의 습격의 잔혹성을 묘사한다. 하지만 그는 1956년에 그녀가 야노마미족을 떠나 원래 가족을 찾아 나섰고 다시 서구 문명에서 살게 되었지만, 수시로 굶주리고 끊임없이 거부당하여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얼마 뒤 충분한 상황 인식에 근거하여 판단할 능력이 생기자 엘레나 발레로는 야노마미족과의 삶이 더 좋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돌아갔다.

p48 갑자기 유럽의 더 강력한 몇몇 왕국들이 지구상의 방대한 지역을 장악했고, 유럽 지성인들은 중국과 인도문명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사회적, 과학적, 정치적 이념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 세 이념의 홍수가 초래한 최종 결과가 계몽주의라 알려진 현상이다.

p51 우리는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점차 그들 나름으로 유럽의 제도에 대해 놀랄만큼 일관성 있는 비평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비평이 유럽 자체에서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53 토머스 홉스, 휘호 흐로티위스, 존 로크같은 저자들은 다들 출발점으로 삼는 성경의 서사를 건너뛰고, 다음의 질문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인간이 가진 것이 인간성뿐이라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p61 그들은 호의에 응답하며 읍과 마을에 거지가 한 명도 없도록 서로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도와준다. 그리고 프랑스에 그토록 궁핍한 거지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그것을 아주 나쁜 일로 여겼고, 그것이 우리에게 자선의 마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여 우리를 심하게 비난했다.

p68 정치적 기준에서 프랑스인들과 아메리카인들이 토론한 것은 평등이 아니라 자유에 대해서였다.

p88 칸디아롱크의 의견은 독일어, 영어, 네델란드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고, 한 세기가 넘도록 여러 판본으로 계속 출판되었다.

p92 프랑스의 관찰자들은 거의 모든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개인의 자율성과 행동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본다는 것-어떤 인간 존재가 다른 존재의 의지에 복종하는 일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운영하며, 그런 이유로 프랑스 사회를 본질적으로 파벌적 노에의 삶으로 본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으면서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p113 칸디아롱크 같은 선주민 비평가들의 안내를 받아 인간의 과거에 대한 증거에 새로운 눈으로 접근해야 한다.

p121 우리가 고대 선조들의 사회적 조직에 대해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지극히 다양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고대의 인간은 해안과 열대우림부터 산지, 사바나까지 무척 다양한 자연환경에서 살았다. 그들은 오늘날의 인간보다 훨씬, 훨씬 더 신체적으로 다양했다.

p124 사피엔트 패럭독스(유적적, 해부학적 현생 인류의 등장과 현생 인류와 관련된 복잡한 행동의 발달 또는 문명의 등장 사이에 왜 긴 시간 간극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리킨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왜 후기 구석기 문화가 나온 이후 오랜 정체 상태를 거쳐 마지막 빙하시대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신석기 문화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옮긴이)라고, 몇몇 연구자들은 심지어 인간 두뇌에 어떤 뒤늦은 변이가 있다고 가정하고 후기 구석기 혁명에서 보이는 외견상 탁월한 문화적 능력을 그것으로 설명하려고도 있지만, 그런 견해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p131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가 낳은, 그래서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선사시대 수렵 채집인에 대한 견해를 바꾸게 만든 또 하나의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거대 구조물의 출현이다. 유라시아에 있는 이런 구조물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튀르키예 남동부의 하란 평원을 바라보는 게르무스산맥에 위치한 석조 신전이다. 1990년대에 그 평원의 북쪽 경게를 조사하던 독일 고고학자들이 그 지방에서 괴베클리 테페라 부르는 장소에서 아주 오래된 고대 유적을 발견했다.

p142 어떤 인간 사회에나 회의론자와 비순응주의자가 있다고 믿을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차이점은 타인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있다.

p146 남비콰라족 족장을 그토록 유달리 눈에 익은 정치적 인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특성이었다. 공동의 이익과 개인적 야망 간의 규형을 맞추면서도 사실상 다른 두 가지 사회 시스템 사이를 이동하면서 유지하는 차분한 지혜라는 특성 말이다.

p151 거의 모든 사람은 아예 매장되지도 않는 와중에 일부 사람들이 풍부한 부장품과 함께 매장되는 상황이 문제되는 것이다.

p154 다른 말로 하면, 또 그 자체로 놀랍기는 하지만, 기우너전 3000년대에도 분명히 영국제도의 많은 지역에서 모종의 협동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톤헨지가 지배 씨족의 고위급 설립자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면-현재 몇몇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들 계보의 일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요구했을 가능성은 크다.

p158 로위가 관찰했듯이, 이런 명명백백한 독재는 엄격히 게절적이고 일시적인 수준에서만 작동했다. 사냥철이 -그리고 그 다음에 집단적으로 거행하는 선댄스 제의가- 끝나면 그런 독재는 그가 아나키스트적 조직 형태라 부른 것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면, 사회는 다시 한번 작고 기동력 있는 무리로 쪼개진다. 로위가 관찰한 내용은 놀랍다.

p162 그들은 교대디는 사회적 설정 사이에서 계속 왕복하고, 거대한 구조물을 지었다가 다시 허문다. 한 해의 특정한 시기에 전제주의적 구조가 등장하도록 허용한 다음 그것들을 해체한다. 그 모든 행동은 특정한 사회적 질서가 결코 고정되거나 불변적이지 ㅇ낳다는 것을 아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p173 왜 위계 형식들을 구축했다가 해체하면서 수천 년을 보낸 뒤에, 호모 사피엔스-영장류 가운데 가장 영리하다고 하는-는 영구적이고 고치기 어려운 불평등 시스템이 뿌리를 내리게 허용했는가?

p178 동부 아프리카의 하드자족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마르투족 그룹들에 대한 연구는 현재의 채집인 사회가 수적으로는 작은 규모일지 몰라도 구성원들의 성격은 놀랄 만큼 국제적임을 보여준다.

p184 만약 모든 사회가 특정한 핵심 가치(부, 경건성, 미, 자유, 지식, 전투 기량)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평등 사회는 모든(혹은 거의 모든) 구성원이 최상의 가치가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분배되어 있다고 동의하는 그런 사회다.

p193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최초의 질문을 다시 다듬어볼 수 있다. 진짜 수수께끼는 족장이나 심지어는 왕과 여왕이 처음 등장한 게 언제인가가 아니라, 그들을 웃음의 대상으로 치부하여 궁정에서 몰아내는 것이 언제부터 불가능해졌는가이다

pp198 살린스가 제시한 큰 그림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해둘 필요가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평균적으로 억압하에서 살아간 중세 농노도 아홉 시에서 다섯 시까지 근무하는 현대의 사무직이나 공장 노동자보다 적게 일했으며, 스톤헨지를 짓기 위해 큰 석판을 끌고 온 헤이즐넛 채집인과 유목민의 평균 작업 시간은 분명히 그보다 더 적었다.

p200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은 것은 단순히 농사를 지어야 할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몽공고 넛이 사방에 천지인데 왜 식물을 심어야 하는가? 쿵족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p203 인간은 농업에 손을 대기 오래전부터 수만 년 동안 상이한 삶의 방식을 실험해왔다. 차라리 변화의 전반적인 방향을 찾아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우리가 던진 질문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어찌하여 한때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본성이던 유연성과 자유를 잃고 영구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고착되었는가

p216 정착민이 야만적이고 손대 않은 황무지라고 여기는 땅은, 대개 알고 보면 선주민들이 소각 관리, 잡초 제거, 잡목림 식립, 비료 주기, 가지치기를 통해 또는 특정한 야생 식물군의 서식지를 넓히기 위해 하구 땅을 계단식으로 관리하고, 조개의 번식력을 높이기 위해 개펄에 대합 밭을 조성하며, 연어, 농어 등을 잡기 위한 보를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수천 년 동안 능동적으로 관리되어온 땅이었다.

p249 이런 특에 의거하여 볼 때, 재구성된 문화 지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질문이 된다. 그것은 농경을 수용할지 말지와 같은 결정이 단순히 칼로리상의 이익 계산이나 무작위적인 문화 취향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그리고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여기는 지)에 대한 질문, 그리고 서로서로 어떤 관게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p284 그들이 그런 수탈이 자신들의 사회에서도 가능한 줄 알고 있었지만 거부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노예 보유는 자신들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살이 찌고 게을러질 것이다)

p293 우리는 미래의 사건을 예견할 수 없지만, 그런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가 힘들어진다.

p307 김부타스는 이런 식의 논리를 제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중동과 신석기시대의 유럽에 여성의 자율성과 제의적 우선권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자 그녀의 생각 가운데 많은 부분이 에코페미니즙이나 뉴에이지 종교, 또 다른 수많은 사회운동의 현장에 수용되었다.

p336 중요시해야 할 지점을 농경과 길들임이 아니라 식물학이나 텃밭농사로 옮겨본다면 어떨까? 우리는 단번에 신석기시대 생태학의 현실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들은 야성적인 자연을 길들이거나 한 줌의 풀씨에서 최대한 많은 칼로리를 쥐어짜내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마당의 텃밭을 만드는 일이었던 것 같다.

p349 오랫동안 농업혁명의 요람이라 여겨져온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사실은 구석기시대의 채집인에서 신석기시대 농부로의 전환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로 야생 자원으로 먹고살던 단계에서 식량 생산에 근거하는 삶으로의 이행은 약 3,000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리고 농업으로 인해 부가 더 불평등하게 집중될 가능성이 생겼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거의 모든 경우에 그 가능성의 씨앗이 뿌려지고 나서 1,000년 뒤에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의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사실상 시험 삼아 짓는 농사, 취미 농사를 시도하고 있었고, 각자의 사회적 구조를 이리저리 전환하면서 생산 양식을 바꾸었다.

p366 농경의 안팎으로 이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혹은 그 문턱에서 머무는 것은 결국 알고 보면 인간 종이 과거의 오랜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해온 일이었다. 그런 유동적인 생태적 설정-텃밭 경작, 호수나 오아이스 주변 범람 퇴수 농법, 소규모의 지형 관리(가령 불지르기, 가지치기, 계단식 밭 조성)와 반야생 상태에서 동물의 길들임과 사육과 광범위한 수렵, 어로, 채집 활동의 혼합-은 과거 세계 여러 지역 인간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p376 이런 반려동물은 흔히 사냥당해 잡아먹힌 동물의 새끼인 경우가 많다. 인간 양부모에게 받아들여지고, 어렸을 때는 먹이를 얻어먹고 보살핌을 받다가, 주인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된다. 이런 복종은 성체가 되어서도 지속된다. 반려동물은 잡아먹히지 않는다. 또 그 주인들이 새끼를 치는 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반려동물들은 저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사람들은 반려동물들을 아이들처럼 키우며 애정의 대상이자 즐거움의 원천으로 여긴다.

p394 마치 현대의 채집인 사회가 근본적으로 다른 두 규모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하나는 작고 친밀한 규모이며, 다른 것은 광대한 영토, 심지어는 대륙에까지 확장되는 규모다. 이는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인지과학의 시각에서 볼 때는 완벽하게 타당하다.

p411 주민들의 식물성 식단에는 밀, 보리, 공과 식물 외에 사과, 배, 체리, 자두, 도토리, 헤이즐넛, 살구도 포함되어 있다. 메가 유적의 거주민들은 농사를 짓고 삼림을 활용하는 동시에 붉은 사슴, 노루, 멧돼지를 사냥했다. 그것은 거대한 규모의 취미 농사였다. 이는 도시 인구가 엄청나게 다양한 야생 식품과 함께 소규모의 재배와 목축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형태다.

p429 우루크가 유명해진 것은 그쓰기 덕분이다. 그곳은 우리가 문자 기록을 대량으로 갖게 된 최초의 도시이며, 이런 자료 가운데 일부는 왕의 지배가 들어서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석하게도, 그런 자료는 읽을 수는 있지만 해석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p449 지금까지 우리는 유라시아의 별개의 세 구역에서 도시가 처음 출현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았다. 각 경우에 우리는 군주제나 전사 엘리트가 존재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것과, 그와 함께 각각의 도시가 공동체의 자치 제도를 개발했을 가능성도 지적했다.

p454 투웨이 강변의 스마오에서 이루어진 발굴은 이 모든 것과 함께 복잡한 공예와 전쟁의 증거를 풍부하게 제시했으며, 기원전 2000년경 있었던 전쟁, 대량 살해와 포로 매장의 증거도 보여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후대의 궁정 전통의 연감에서 상상되던 것보다 훨씬 더 활발한 정치적 장면을 발견한다.

p459 지금 우리는 도시 테오티후아칸이 멕시카족이 오기 전 여덟 세기 동안, 그리고 스페인인들이 오기 1,000년도 더 전에 전성기를 누렸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세워진 시기는 기원전 100년경이며, 몰락한 것은 기원후 600년경이었다. 또 그 몇백 년 동안 테오티후아칸은 제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의 로마와 쉽게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장엄하고 수준높은 도시가 되었다.

p474 거대 구조물 건설의 모든 작업에는 노동력과 자원만이 아니라 인간 생명을 바치는 공양이 요구되었다. 건설의 중요한 단계마다 항상 제의적 살해의 고고학적 증거와 결부된다. 피라미드 두 기와 신전에서 나온 인간 유골을 합치면 희생자의 수는 수백에 이를 것이다. 그들의 시신은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그 위로 솟아오를 구조물의 평면도를 그리게 될 구덩이나 참호에 놓였다.

p482 이 설명에는 기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틀라스칼라에는 왕이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의미로도 왕국의 연합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만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수상 경력이 있는 과학 분야의 언론인이지만, 16세기 중앙아메리카 역사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아닌 그는 2차 자료에 의존했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p491 의회는 합리적인 논의와 장시간의 숙고를 통해, 필요하다면 몇 주일씩이라도 심의한 뒤에 결정을 내리고 합의를 추구했다.

p495 틀락스칼라 의회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개인적 카리스마나 경쟁자를 능가할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하, 심지의 수치의 정신을 실행해야 한다. 그들은 도시 주민들에게 복종하도록 요구받는다.

p525 저서 문화 성장의 설정에서 크로버는 인류의 전체 역사에서 예술, 철학, 과학, 인구의 관계를 살펴보았지만 어떤 일관된 패턴이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또 그런 패턴은 같은 노선을 계속 밟아나간 더 최근의 몇몇 연구에서도 파악되지 못했다

p529 장래의 이집트학자들이 아무리 그것들을 높이 평가하게 될지라도, 중왕국 때 쓰인 시누헤 이야기 같은 문학의 우아함과 오시리스 숭배의 번영은 수천 명의 징집 병사, 강제 노역자, 처형된 소수민족 들에게는 전혀 위안을 주지 못했다. 그 이전의 암흑시대에 그들의 조부 세대는 대부분 아주 평화롭게 살았는데 말이다

p536 올멕에서도 그랬지만, 그 영향력의 놀랄 만큼 많은 부분이 행정적, 군사적 혹은 상업적 제도와 관련된 기술의 전파보다는 이미지의 형태-안데스의 경우, 작은 도기그릇과 개인 장신구와 직물에 그려져 분포되었다-로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p544 위대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반 나체즈족은 매우 다른 삶을 살았던 것 같고, 그들의 표면상의 지배자의 소원을 기쁘게 무시하는 모습도 흔히 보인다. 그들은 독자적인 상업과 군사적 원정을 행하며, 때로는 위대한 태양이 보내는 신하들이나 친척들을 통해 전해진 명령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p548 지금까지 우리는 처음에 시작한 세 원칙-폭력, 지식, 카리스마-각각이 1차 체제에서 어떻게 하여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국가라 여기는 것과 닮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명백히 닮지 않은 정치 구조의 토대가 되는지 살펴보았다.

p553 수십 명,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에 달하는 인간 제물, 특별히 이 행사를 위해 살해된 인간 제물로 둘러싸인 왕의 무덤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왕조적 도시국가인 우르에서 누비아의 케르마 정치집단, 중국의 상 왕조에 이르기까지 군주제가 결국 확립된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국, 티베트, 일본, 러시아 초원에도 믿을만한 문장으로 된 묘사가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남아메리카의 모체와 와리 사회, 그리고 미시시피강 유역의 도시 카오키아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569 사실상 왕이 내린 모든 결정은-전쟁이든, 동맹이든, 새 도시의 건설이든, 심지어 왕실의 사냥터를 확장하는 것 같은 외견상 사소해 보이는 문제든- 신과 조상 혼령, 즉 지고의 권위에 의해 인증되어야만 진행될 수 있었다.

p591 전쟁은 대체로 농사를 짓지 않는 계절에 하는 일이었다. 사제와 법관 역시 전업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사실 이집트 고왕국, 중국의 상 왕조,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왕조, 또는 고전기 아테네의 거의 모든 정부 기관을 맡은 직원들은 순환제로 일했고, 시골 영지의 관리자, 상인, 건설업자, 그 밖에 다른 직업인으로서 다른 삶을 살았다.

p597 이 책 전체에서 계속 다루었듯이, 세계 전역에서 작은 공동체들은 확대된 도덕적 공동체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명을 형성했다. 영속적인 왕, 관료나 상비군 없이도 그들은 수학적 지식, 달력과 관련한 지식의 성장을 촉진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야금술을 개발했고, 올리브, 포도, 대추야자를 재배했으며, 발효 빵과 발효 밀백주를 발명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옥수수를 기르고 식물에서 독과 약품, 향정신성 물질을 추출하는 법을 익혔다. 이 참된 의미에서의 문명은 직물과 광주리짜기에 적용된 주요 직물 기술과 도자기 제작용 물레, 석재 산업과 구슬 가공, 돛과 항해술 등등을 개발했다.

p604 학자들은 여사제 집단이 다스린 도시란 민족지학적 기록이나 역사적 기록에 전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동일한 논리에 따라 남성이 지배하는데도 시각적 표상에서는 권위 있는 인물이 모두 여성으로 묘사된 왕국의 전례 역시 없었다고 똑같이 지적할 수 있다. 크레타에서는 뭔가 색다른 일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다

p631 투커의 지적에 따르면 씨족은 외교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단순히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외교적 임무의 의전을 정하고 전쟁을 막기 위한 보상을 지급하거나 포로를 받아들이는 일도 포함된다.

p651 체로키, 치카소, 촉토, 크리크, 세미놀레 부족을 말한다. 그런 부족들은 모두 참여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며 합의 도출의 과정에 의해 운영되는 공동체 위원회가 다스리는 패턴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두가 원로 사제들, 카스트, 군주의 흔적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세습적 지도부가 19세기까지도 남아 있으면서 더 민주적인 정부 형태를 선호하는 광범위한 추세에 거역하면서 최대한 버텼다.

p663 북아메리카의 사례는 전통적인 진화론 구도를 혼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국가 형성의 덫에 한번 걸리게 되면 출구가 없다는 말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명확하게 입증했다.

p677 드농비유를 무찌른 뒤 기조나세는 군대를 해산하고 대위원회를 재구성하기 위해 새 공직자를 선출하는 과정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다르게 행동하기로 선택했더라도 전례없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p691 아이러니한 일인데, 앞에서 보았듯이 이제 그의 성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현대 고고학의 결과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지만, 호카트가 예언한 대로, 구석시대 후번은 거창한 부와 명예를 대부분 죽었을 때 끌어모은 것으로 보이는 개인들을 위해 꼼꼼하게 연출된 장대한 매장의 증거를 정말로 남겼다.

p704 그들을 진정으로 경악하게 한 것은 채찍질하고, 끓는 물에 넣고, 낙인을 찍고, 살을 베는-때로는 요리하여 먹기까지 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웬다트족 마을이나 소도시의 거의 모두가, 여성들과 아이들까지도 거기에 참여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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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서울 사찰 여행 - 조선 불교 이야기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15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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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서울 사찰 여행

 : 황윤

 : 책읽는고양이

읽은기간 : 2025/08/11 -2025/08/23


우리나라 유물, 유적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황윤님의 2025년 책..

예전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처럼 이야기체로 글이 쓰여져 있어서 읽기 쉽고, 내용도 알차다. 

이번 내용은 서울의 사찰이야기다. 그것도 주로 조선시대 사찰이야기다. 

이 책을 읽으면서 보신각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동했었는지, 봉은사는 어떤 의미인지, 조계사가 어떻게 지어졌는지에 대해서 알게 됐다. 

생각보다 서울의 유적을 내가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가 다르다보니 불화나 부처님에 대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책에서 꽤 자세하게 설명을 해줘서 나중에 부처님을 보러 가게 되면 삼존불이니, 삼세불이니 하는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교와 유교의 충돌속에서도 불교는 조선시대 내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물이 사찰과 불화로 나타난다는 것도 재미있다. 

과거 사람들과 대화하며 내가 사는 세상을 돌아볼 수 있어서 역사가 참 좋고 재미있다. 

좋은 책이다. 


p38 간경도감은 11년간 운영되다 친 불교 기관이라는 비판 속에 성종 2년인 1471년에 문을 닫았는데, 짧은 기간 동안 한문, 한글 불경까지 합쳐 무려 47권 이상의 책을 인쇄 출판하였다.

p51 성리학 근본주의에 빠지면 빠질수록 불교를 더욱 업신여기며 비판하곤 했다. 이와 달리 왕실, 특히 왕실 여성들의 불교에 대한 신앙은 계속 이어졌기에 왕의 입장에서는 난처한 경우가 종종 생겨났다.

p56 정확안 위치는 현재 명동성당이 자리 잡은 장소다. 그러다가 광해군 때 옛 종루 터에 종루를 짓고 종을 다시 옮겨왔으니, 앞서 보신각에서 이야기했듯 이때부터 사실상 보신각종이 된다.

p70 사실 이러한 조선 초 무덤 디자인은 불교가 국교였던 시절 조성된 고려 공민왕의 능을 모범으로 조성된 것으로 세종 시대를 기점으로 유교 의례가 강조됨에 따라 불교식 디자인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p107 이르 ㄹ미루어 보 ㄹ때 연산군 말기부터 중종 초반까지 조선의 분위기는 1960-1970년대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대혁명과 유사했던 모양이다. 특히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반달리즘이라는 부분이 동일하다.

p120 18세기 후반부터 사대부들의 불교에 대한 관점은 조선 전기에 비해 상당히 우호적이었다는 사실.

p132 아미타불이 모셔진 장소는 극락전, 극락보전, 무량수전 등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면 사찰 여행 때 큰 도움이 될 듯하다.

p152 하나의 그림 안에 동일한 사람이 여러 번 등장하고 있으니, 이는 시간 순서에 따라 이어지던 여러 사건을 하나의 그림 안으로 묶어 표현한 스토리텔링으로 보인다. 즉 해당 그림은 석가모니 탄생때 벌어지던 여러 일을 묶어 한 폭으로 그려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p209 석가모니 양 옆에 위치한 문수보살은 최고의 지혜를 상징하며 보현보살은 실천을 상징한다. 한마디로 최고의 지혜를 깨닫고 이를 실천해야 함을 의미. 이에 따라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에는 보통 석가모니의 오른편에는 문수보살을, 왼편에는 보현보살을 모신다. 아미타불 옆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함께하는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이를 협시보살이라 부른다.

p224 석가모니가 포함되어 삼신불 또는 삼세불이 구성되는데, 이에 따라 사찰에서는 하나의 전각 안에 1. 석가모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 삼신불을 모시기도 하고, 또는 2. 아미타불, 석가모니, 약사불 = 삼세불을 모시기도 한다.

p232 미를을 표현한 것으로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이 유명하며, 본인이 미륵이라 주장한 궁예, 고려 말 미륵 신앙에 기댄 이성계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더 자세한 미륵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국립중앙박물관을 참고하면 좋겠다

p232 흥미로운 부분은 자장보살에게 기도를 하면 설사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이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조상에 대한 제사 문화가 남달랐던 조선 시대에 들어와 특별히 더 사랑받는 보살이 되었다는 점이다.

p237 은퇴한 왕실 여성들은 정업원 외에도 궁궐 주변의 궁가에 머물기도 했는대, 예를 들면 의빈궁, 자수궁, 혜빈궁, 신빈궁, 수성궁, 창수궁, 정청궁, 인수궁 등이 그것이다. 선왕의 후궁들이 머문다 하여 격을 높여 궁이라 부른 것인데, 궁궐 법도에 따르면 왕이 죽으면 왕비를 제외한 나머지 후궁들은 궁궐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기에 이들의 거처가 따로 필요했다.

p249 문정왕후의 400점 불화 조성은 왕실 여성이 지원한 조선 시대 불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p262 견성사는 성종의 능이 조성되자 이번에는 왕릉을 위한 능침사가 되었다. 대군의 원찰에서 왕의 원찰로 격이 크게 상승한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선릉 동쪽으로 조금 이동한 후 견성상에서 봉은사로 이름이 바뀐다.

p287 금표가 세워지자 에전처럼 유생들리 사찰로 마음대로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것을 막게되었으며, 금표 내 모든 물자를 왕실의 재산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사찰과 왕실 간 상부상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p291 마륵대불 뒤편의 언덕쪽에서 코엑스를 바라보면 사찰과 코엑스 주변 건물이 함께하는 엄청난 뷰가 등장한다.

p303 1593년에는 사명대사를 당상관으로, 1594년에는 정3품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로, 1602년에는 종2품 하계 가선대부 및 동지중추부사로 증진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1605년 종2품 가의대부에 이르게 된다.

p305 조선 불교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호국 불교의 이미지로 다시 한 번 부활하였다. 그동안 매번 불교와 승려는 나라에 쓸모없는 존재라며 비판하던 유학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쾌거이기도 했다.

p310 이 판전은 김정희가 죽기 불과 사흘 전에 쓴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사실. 유배 생활이 완전히 마무리된 1852년부터 과천에서 지내던 그는 이 당시 아예 승복을 입은 채 봉은사를 다녔다고 하는데, 젊을 때부터 유달리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힘든 유배생활을 거치며 말년에는 더욱 깊은 종교인이 된 듯하다.

p316 사실상 판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근현대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아쉬운 마음에 만일 임진왜란 때 피해를 받지 않았다면 봉은사에 얼마나 수준 높은 옛 작품들이 많이 있었을까 종종 상상해본다.

p332 이 일을 기점으로 정조의 옥불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식어버렸는지 어떠한 기록에도 더이상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별다른 효험이 없는 불상으로 여겨지며 무관심 속에 사라진 모양이다.

p338 제목이 관음32응신도인 이유는 앞서 보았듯이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이 부처님부터 집금강신까지 총 32가지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p342 제목은 수월관음보살도로 이때 달=영원불면한 불법, 물=불성을 뜻한다. 마치 하늘에 떠 모든 곳을 비추는 달처럼 불법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고 있으니, 마음을 맑게 하여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다면 맑은 물에 달이 비추듯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진리를 관세음보살이 알려주고 있는 장면이라 하겠다.

p363 참고로 불교 5대 명절은 석가모니 탄생일(음력 4월 8일), 석가모니 출가일(음력 2월 8일), 석가모니 깨달은 날(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 열반일(음력 2월 15일), 백중(음력 7월 15일)이다.

p380 이러한 인식은 동시대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덕분에 우란분재 또한 점차적으로 지장신앙과도 연결되기에 이른다. 지옥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는 지장보살이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시점이 된 것이다.

p384 지장보살은 이전에 이야기했듯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내려와 새로운 부처가 될 때까지 석거모니를 대신하여 여러 죄를 짓고 지옥의 고통을 받는 이들을 해탈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p390 사실 창빈 안씨의 묘가 현충원에 있는 이유는 이곳 현충원 영역의 대부분이 본래 창빈 안씨의 묘 영역이기 때문이다 즉 창빈 안씨 묘 영역에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현충원을 조성했기에 지금까지도 창빈 안씨의 묘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이 주변 땅의 원주인이니까

p397 우리가 전에 방문했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흥천사는 명부적 이름을 지닌 건물 안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그 주위로 사후세계를 관리하는 10명의 왕과 지옥 관리들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p400 뛰어나고 영험한 지장보살이란 무슨 의미일까? 이는 곧 49재를 마친 직후 가족의 꿈에 돌아가신 분의 모습이 너무나 평온하고 기분 좋아 보이는 경험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p410 달마사 도착 후 한강뷰를 바라본다. 기와지붕 사이로 펼쳐지는 한국 전통건축의 미와 현대 건축이 어우러져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낸다. 여의도가 지척이라 63빌딩을 포함한 여러 높은 빌딩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걸. 특히 요즘 들어 서울에서는 한강뷰를 최고로 꼽던데, 그렇게 보면 최고의 한강뷰를 지닌 사찰이 아닐까 싶다

p421 한때 보천교의 중심 건물로 지어졌던 건물이 조계사 대웅전이라 하겠다.

p432 만일 조계사에 영산전이 만들어진다면 한정된 부지 내 건물뿐만 아니라 그안에 조성할 부처님 제자인 십육나한 조각과 불화까지 조성해야 하니 엄청난 불사가 필요하겠구나. 이렇듯 엄청난 규모의 사업이기에 쉽게 진도가 가가지 않는 듯하다

p436 이렇듯 조계사의 역사는 아직 채 100년이 안되었기 때문에 대웅전에서 만날 수 있는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근현대에 조성된 모습이다.

p439 감로도는 당대 풍속이 가장 아래 부분에 그려진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근대인 1939년에 그려진 흥천사 감로도에는 양복을 입은 사람이나 스케이트를 즐기는 모습, 도로 공사, 자동차, 코끼리가 등장하는 서커스, 근현대 전쟁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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