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사
앙드레 모루아 지음, 신용석 옮김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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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사 

 : 앙드레 모루아 

 :  김영사

읽은기간 : 2026/01/11 -2026/02/16


미스테리한 것은 이 책을 내가 왜 샀을까다..

가격이 싸지도 않고, 책도 엄청 두껍고, 좋아하는 나라의 주제도 아닌데 덥석 이 책을 주문했다. 

출판사가 김영사여서 산걸까? 어쨋든 책장에 장소만 차지하고 있던 책을 결국 꺼내 읽었다. 

남의 나라 통사를 이렇게 열심히 읽다니... 나를 칭찬한다. 

읽고난 소감.. 

어느 나라나 자기나라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나구나..

국뽕이 없는 국사책은 없다.. 그리고 자랑하고 싶은 건 열심히 자랑해야 한다 ^^

흥미로운 건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제2차 세계대전때까지 프랑스 정치는 제대로 굴러간 적이 거의 없어보이는데도 세계 각지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과학, 미술, 인문, 군사 영역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유지했는가다. 프랑스는 신기한 나라다. 

최근에 주경철 선생님이 프랑스사를 냈는데 외국인이 보는 프랑스 통사는 어떤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그 책도 엄청 두껍다. 벽돌책에 다시 도전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p7 국가가 형성되고 백년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프랑스 국민은 정당한 일이라고 믿으면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이든 감수했다라고 국가가 형성된 후 프랑스 국민정신을 정의한다.

p21 세계에서 프랑스의 페리고르 지방을 흐르는 베제르 강 유역만큼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곳도 드물다.

p22 프랑스 인종이란 것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 현재 프랑스를 구성하는 지역은 유럽대륙의 서쪽 끝이라 침략을 마무리하거나 침략자가 정착하는 곳이다.

p23 고대 그리스 학자들은 북쪽 지방에 사는 야만족, 즉 알프스 산 너머에 있는 키가 크고 백색 피부에 금발인 종족을 통칭해 켈트인이라고 불렀다.

p24 프랑스인의 혈관에는 리구리아인과 이베리아인의 혈액에 켈트인, 로마인을 비롯한 기타 수많은 인종의 혈액이 혼합되어 흐르고 있다.

p28 골족 사회는 미개했지만 야만 상태는 아니었다. 총명하고 언어의 심미 감각이 예민하며 로마인의 생활에 호기심이 많던 골족은 재주 있는 장인과 용감한 군인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p30 카이사르는 로마에서도 감히 시행하지 않던 방법으로 골족을 가혹하게 다뤘다. 그는 부족 대표들을 체포해 재물을 몰수했고 수천명의 포로를 무자비하게 팔아치웠다.

p31 독립전쟁은 1,2 년간 계속되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참혹하게 진압했다. 100만 명이 넘는 포로가 형을 받거나 팔려 나갔고 수많은 사람이 오른팔을 잘렸다.

p37 근동에서 태베사막으로 간 사람들은 현세의 유혹을 피하고 홀로 준엄한 금욕생활에 몰입하기를 희망한 것이다. 골 지방에서는 수도원이 현세를 떠나 공동으로 영적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을 모았다.

p38 학문하는 수도사는 공부에 전력하고 일반 수도사는 여행하며 주서를 교환한 덕분에 로마제국은 멸망했어도 그리스도교는 생기를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p43 476년 기어코 서로마제국은 멸망했고 동로마 황제가 서유럽의 권위를 억지로 유지하려 했다. 황제는 서구의 권력을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크에게 위임했다. 일설에 따르면 로마 주교에게 위임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훗날 교황이 세습적 권리를 주장하는 법적 근거로 작용했다

p44 프랑크족의 수장 클로비스가 골 지방에 거주하던 모든 게르만족을 제압했고 이 지역에서 점차 카톨릭교회의 세력이 강해졌다.

p47 메로빙거 왕조는 발루아 왕조보다 긴 300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p55 페팽은 메로빙거 왕조 최후의 왕인 힐페리히 3세를 수도원에 유폐하고 그의 아내 베르트라다와 함게 성 보니파스 주관 아래 대관식을 치렀다. 이는 두 사람 사이에 탄생할 아들이 이중을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현명한 책략이었다.

p87 그는 신앙심이 깊었으나 교회의 권리 주장에 맞서 국가의 권한을 유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교황 인토켄티우스 3세는 국왕들을 자기 신하처럼 여겼지만 필리프 2세는 거기에 승복하지 않았다.

p94 1270년에 사망한 루이 9세는 자신이 조상에게 상속받은 권위보다 훨씬 더 위대한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이때부터 카페 왕조의 왕은 세습군주로 인정받았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최고회의를 거치지 않고 무엇이든 집행할 수 있는 신의 대표자가 되었다.

p103 필리프 4세는 별세 후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댓 왜 그는 증오를 받았을까? 그는 왕의 절대권력을 강화했고 봉건권력과 교회권력에 맞섰으며 개인의 이익을 공중의 이익으로 전환했다. 이 모든 일은 그 자체로는 유용했지만 가의 신하인 법률가들이 부당한 수단을 행사하지 않고는 수행하기 어려웠다. 만약 루이 9세였다면 그처럼 고통스러운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도 같은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p113 당대의 대시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는 알리에노르의 딸 마리 백작부인이 살던 상파뉴 궁정에 머물렀는데, 백작부인은 그에게 사랑하는 귀부인에게 몸을 바치는 기사를 주제로 한 란슬롯 이야기를 기술하게 했다.

p125 이것은 두 나라의 왕관을 한 몸에 차지하려는 영국 왕의 욕심이 아니었다면 백년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한 비교적 정확한 견해다.

p132 샤를 5세는 허약하고 체구가 작았으나 경건하고 박식한 위대한 국왕이었다. 그는 냉정해 보였는데 이는 정력이 부족한 사람이 흔히 그렇듯 절제 때문이었다.

p143 영국인과 부르고뉴파의 눈에 잔은 마녀이자 이단자였다. 그녀의 몸에 악마가 붙어 있지 않고서야 어찌 무력도 없이 짧은 기간에 이런 승리를 거둘 수 있겠는가?

p144 선입관 없는 재판관이라면 법정 심문에서 나온 그녀의 존경할 만한 답변을 통해 잔 다르크의 숭고한 신념가 애국심을 확인했을 것이다. 교육도 받지 않은 어린 처녀가 고귀하고 순결한 답변을 하자 그 음흉한 법정도 여러 번 당혹스러워했다.

p175 이 회복 능력은 비옥한 토지와 근면한 농민을 비롯해 자신의 운명에 대한 본능적인 자신감과 프랑스인은 프랑스인일 수밖에 없다는 뿌리 깊은 신념에서 우러난 것이다

p181 15세기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도교적 도덕이 쇠퇴하고 있었다. 성생활 개방이 음탕할 정도였고 살인을 해도 살인자가 예술가인 경우 관대하게 처리했다. 피렌체의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경받을 만한 젊은이란 사람을 많이 살해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p184 문예부흥의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는 그 문화가 일부 특권계층의 수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반면 중세기 문명은 민중적이었다. 음유시인과 방랑 연예인은 거리의 광장에서 노래를 불렀고 대성당에서는 신비극을 상연했다. 성당도 도시 전체의 협력을 얻어 무명의 건축가가 건립했다.

p198 독일과 플랑드르의 자본이 승리해 카를 5세가 당선되었고 프랑스는 치명적 위기를 맞았다. 프랑스는 플랑드르 지방의 출입구에 독일군이 진주하는 것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플랑스와 게르만인 사이에는 최근의 전쟁이 무색할 만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p208 현명한 사람들은 이를 승인했다. 드디어 프랑스는 정복자, 침략자, 점령자 등 원한의 대상만 될 뿐 아무런 이득도 없던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프랑스 국토의 안전보장에 기여할 메츠, 투르, 베르됭을 수비하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p225 스페인 식민지에서 유입된 막대한 금은으로 인해 물가가 급격히 상승했던 것이다. 물가 상승기에는 국가 전체적으로는 번영하지만 고정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농지를 임대하는 지주는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기 때문에 무산계급과 귀족계급 양측에서 이중의 불만이 생긴다. 경제는 정신에 영향을 주고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쉽게 이단을 받아들인다

p256 토지 경작과 목축은 프랑스의 두 개의 젖줄이며 이느 ㄴ페루의 금광 및 보물과도 같다

p261 그 후 10세대에 걸쳐 모든 사람이 이단을 시인했고 앙리 4세는 샤를마뉴 황제, 잔 다르크, 성 루이 왕과 함께 프랑스의 영웅 반열에 올라 있다. 그는 프랑스의 신비적인 면은 물론 용기, 양식, 즐거움 같은 위대성도 대표한다

p270 상류 부르주아계급은 모피로 몸을 휘감고 백합꽃 문장이 붙은 모든 좌석에 홍색 또는흑색의 관복을 펼쳤다. 과거에는 귀족이 되려면 전쟁이란 수단을 택했는데 이제 부르주아 계급은 행정가 사법 분야를 이용해 귀족이 되었다. 이들 부르주아계급은 그들 특유의 질서와 재산을 모으는 열의, 해박한 지식, 때로 카톨릭동맹에 도전한 고등법원장 아를리의 경우처럼 용기를 귀족사회에 도입했다.

p283 당연한 일이지만 성직자는 공무를 집행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더러운 짓을 하지 않습니다. 독신생활을 하는 성직자들은 세상에 영혼 외에 남길 것이 없으므로 지상에서 국왕과 조국을 위한 봉사에 전념한 뒤 멀리 천국에서 영예롭고 완전한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p287 사형을 고집한 것은 국왕이지 추기경이 아니었다. 가능하면 사면하려 하는 리슐리외에게 국왕은 아래의 칙서를 보냈다. “사건과 관련된 제후들은 주인의 은혜를 망각한 자들이다. 짐은 경에게 자비심으로 그들을 동정하거나 관대하게 처리하지 않도록 명령한다”

p289 리슐리외는 늘 자신이 기존 계획을 따를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에게 원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단지 방법만 있었을 뿐이다. “정치는 미리 계획한 의사보다 사태의 진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움직인다” 이것은 거의 모든 행동가가 말하는 최고의 예지다.

p296 그는 실제로 프랑스 국민에게 사고에서는 명철한 논리를, 실천에서는 확고한 신념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프랑스 국민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동시에 성급하고 우둔해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p300 독일은 자주적인 군비와 외교정책을 보유한 350개의 독립연방국가로 분할되었다. 게르만이 자유를 회복하는 동시에 프랑스의 안전도 보장된 것이다. 그토록 많은 연방국가가 결속해 프랑스에 도전할 수도 없고 설령 도전할지라도 프랑스가 그중에서 동맹국을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제국의회는 잔존했으나 만장일치 채택제라 이는 앞으로 아무것도 결의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307 시청에서 마자랭을 당대에 제일 더러운 인물이라고 욕설을 퍼붓던 이자생활자조합은 추기경 겸 재상인 마자랭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실각했을 때 가장 먼저 지독한 욕설을 퍼부은 사람들이 그가 다시 득세하자 제일 빨리 머리를 숙였다.

p324 스페인의 왕위 계승 전쟁은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를 고난으로 빠드리면서 1713년까지 이어졌다.

p336 1685년 10월 17일 국왕은 낭트 칙령을 취소하고 신교도의 공개예배를 금지했다. 여기에는 거국적인 찬동이 있었으나 만장일치란 언제나 강압의 상징이다. 개혁파 중에서 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영국, 네델란드, 독일 그리고 아메리카로 탈출해 그곳에서 사실상 존경을 받은 위그노파 공동체를 건설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유능한 육군, 해군, 법관, 상공업자를 약 40만 명이나 잃었다. 이것은 루이 14세 치세에 가장 중대한 실정이었다.

p362 군의 장군과 애첩들도 모두 전쟁을 희망했고 모두가 국왕에게 영국이 강대해져 프랑스에 위험한 존재가 되었으니 자유주의적인 프로이센 왕을 도와 오스트리아를 격파해야 영국이 손해를 본다고 진언했다. 드디어 국왕이 양보했다. 이 전쟁은 범죄 이상으로 커다란 과오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영국에 재해권을 프로이센에 독일 지배권을 상납했다

p372 고등법원은 국가에 해독을 끼쳤고 과세를 방해했으며 편견에 치우쳐 고문을 자행했다. 파리 고등법원은 전국의 고등법원을 통합해 국왕의 명령에 반대했다. 볼테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처럼 극심한 무정부 상태가 지속될수는 없다. 왕정이 권위를 회복하든 고등법원이 이기든 결론이 나야 한다”

p378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고난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면 이러하다. 옛적에 한 자연인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인위적인 인간을 끌어들였더니 그때부터 동굴 안에 내란이 발생해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그 인위적인 인간, 즉 전통과 미신을 고수하는 인간을 제거하면 동굴 안에 평화를 재건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p385 프랑스는 사교적 회합이 역사적 전환기로 작용한 유일한 국가다. 궁정에서 남녀의 정사가 성행한 이후부터 프랑스인은 여성과의 교제와 대화를 즐겼다. 18세기에는 몇 개의 저택이 사상의 증권거래소처럼 유명해졌고 철학가들은 그곳에서 국내의 남녀 유지를 비롯해 외국의 저명인사들을 만났다

p397 그러나 국가의 채무가 10억 리브르에 달했고 당시 이것은 너무 막대한 금액이었다. 미슐레는 이렇게 말했다. “아메리카는 자유를 얻고 스페인은 미시시피와 플로리다를 획득했는데 프랑스는 영예와 파산을 짊어졌다”

p399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판의 희생자가 되었고 간소한 생활을 좋아하는 그녀가 모든 국민과 함께 즐기려고 오페라와 무도회까지 참석하는 미덕을 발휘해도 그것은 오히려 비난의 소재가 되고 말았다. 다른 왕비였다면 이런 행동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을 테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반대파는 이것을 죄악으로 내몰았다.

p409 진보적인 소수파는 어떤 혁명이든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이 시작한 혁명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절제력을 갖춘 워싱턴의 사례는 역사상 대단히 희귀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p426 공격자 측의 손해가 상당한 것을 보면 영웅이 많았고 점령이 끝난 후 사령관과 수비병이 무저항 상태에 있었는데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을 보면 몰상식한 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p439 각 연대는 군대와 국가의 통솔관게를 재건하기 위해 파리의 샹 드마르 연병장에서 거행할 바스티유 점령 혁명기념일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했다. 당시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연방이란 개념이 유행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전국에서 대표를 보내겠다고 약속했고 파리에서는 조국의 제단 앞에 잔디 계단을 구축하기 위해 궁정신하, 수도사, 석공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p447 당통은 사랑할 만한 것은 모조리 사랑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자기 자신만 사랑했다. 당통은 투쟁을 선호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아첨을 선호했다.

p472 당시에는 밀고가 시민의 의무였고 단두대는 미덕의 제단이었다. 혁명재판소는 14개월 동안 쉼 없이 열렸고 핏기 없는 입술에 이마가 좁은 냉혈적인 검사 앙투안 캉탱 푸키에-탕빌의 말 한마디면 피를 뿜으며 목이 잘렸다.

p484 부유해진 농민과 이득을 얻은 자코뱅 당원들은 정부가 현 상태를 유지하길 기대했다. 그들은 혁명을 끝내고 싶어 하는 동시에 혁명의 이득만큼은 보장받기를 바란 것이다. 즉, 그들은 기득권 포기와 반혁명의 보복은 원치 않았다.

p500 공화제란 국민이 열중하는 하나의 공상에 불과하다. 이것도 다른 공상들처럼 스스로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들은 허영심을 만족시켜줄 명예를 바랄 뿐 자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p519 그는 도처에서 질시와 반감의 먹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는 누구보다 이런 사정을 잘 알았고 자신이 구축한 체제가 허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여러 왕국을 분여한 자기 가족의 자격이 불충분하다는 것도 분명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끌고 갔다.

p536 사자가 쇠사슬에 묶였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은 이때까지 향을 태우며 숭상하던 사람을 저주하는 데 필요한 욕설을 찾느라 분주했다. 사람들은 외국인을 영접하러 나가면서 마치 코블렌츠에서 돌아온 망명자처럼 행세했다. 백기로 손수건, 속옷을 흔들었고 청홍색기는 발로 짓밟아버렸다. 더욱이 가장 열과적으로 날뛴 사람들은 이때까지 보나파르트를 가장 내세우던 이들이었다.

p541 백색테러는 프랑스를 바르게 통치하려면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하지만 앙리 4세의 전통을 답습하려던 루이 18세는 살롱의 초과격파 여성을 다루기엔 너무 연로했고 더구나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p566 루이 18세는 구체제의 온건파로 18세기의 자유사상가였고 샤를 10세는 철저한 망명자로 경건한 고집쟁이였다.

p594 군사적 영예가 없던 7월 왕정은 그대로 무너졌다. 대혁명과 제정시대의 영예에 젖어 있는 프랑스는 타국의 비위를 맞출 정도로 평화주의를 추종한 왕정을 너절한 정권으로 여긴 것이다.

p601 카톨릭교도로 와정주의자였던 발자크는 인간의 열정을 그대로 방치하면 얼마나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가를 묘사해 도덕적, 정치적 전통의 필요성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p605 중용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에게만 유리했으면 노동게급은 아사 직전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1789년보다 더 비참했던 노동계급은 더욱 단결했고 자신들의 실력을 인식하고 있어서 혁명을 조성하는 데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p625 1830년에는 부르주아계급이 실세였고 1848년에는 민중이, 1851년에는 군대가 실세였다. 이것을 믿고 승리에 도취한 도당들은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

p631 그의 정부는 값싼 식량과 대규모 토목사업, 축전, 휴가를 베풀었다. 그는 진심으로 선량하고 유능한 독재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에 선량한 독재자란 없는 법이다

p626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계급의 사업가와 농민이 1848년 6월 이후 사회주의와 별안간 강력하게 성장한 노동자에게 공포를 느낀 나머지 무력을 선호하고 제정에 찬성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불만과 실망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포기했다.

p649 1866년 프로이센은 몇 주 만에 오스트리아군에 대승함으로써 처음으로 근대전의 과학적, 공학적, 우월성을 확인했는데 동원의 신속성, 무기의 우월성, 철도의 조직적 이용 등이 프로이센에 전격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p660 황제의 사상은 때로 광채와 관용에 빛났고 또 때로는 무정견과 환상에 사로잡혀 유럽을 프로이센에 넘겨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p665 표면적으로는 근엄한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영국인은 황색 표지의 프랑스 소설을 숨어서 탐독했다. 영국인은 바람을 피우려 파리로 건너왔고 쾌락을 즐기면서도 그 쾌락 때문에 파리를 비난했다.

p668 제정 몰락은 정신적 퇴폐를 낳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다. 1815년의 패전은 세기의 청년과 도피문학을 낳았으나 1871년의 패전은 반대로 선량하 사람들에게 활기를 주고 그들을 현실 활동으로 이끌었다.

p683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는 리슣리외를 이겼고 베스트팔렌 조약은 폐기되었다.

p709 수개월 후 44세의 강베타는 사고와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창조하고 구제하고 강화한 공화국으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은 셈이었다. 정치가로서 그의 민첩하고 현명한 자질은 언제나 정세가 혼란에 빠질 위기에서나 그 가치를 발휘하는 난국 돌파형이었다. 사람들은 모든 죄악 중에서도 우수한 재능이란 것을 가장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p717 언론인 카롤린 세베린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느 ㄴ카이사르처럼 출발해 카틸리나처럼 살다가 로미오처럼 죽었다”

p723 그의 무고함을 확신한 가족이 계속 조사해 각서의 필자로 페르낭 에스테라지를 고발했다. 정보부의 조르주 피카르 대령도 드레퓌스가 무지라는 확증을 잡고 상관에게 진상을 발표하도록 진언했다. 하지만 완고, 오만, 편견이 정의뿐 아니라 신중성을 제압했다.

p734 대혁명 이래 프랑스는 정치적 균형 상태와 확고한 합법성을 가진 정치체제를 꾸준히 추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국내는 극도로 분열되어 있지만 1871년 이후에는 독일에 대한 불신과 복수심 그리고 영예를 회복할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려는 요망에 모든 당파가 집결했다.

p741 프랑스에서는 문학자와 과학자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존경을 받았다. 연극 초연, 서적 출판, 아카데미 프랑세즈 선거, 때론 문법 토론까지도 대단한 사회 사건으로 취급했다. 이러한 사회적 관심이 흥미 본위의 화제에 불과하거나 천박한 호기심일 때도 있었으나 정신 분야의 노력에 대한 존경은 프랑스의 항국적이고 고귀한 특징 중 하나로 남았다

p743 베르그송은 철학가 특히 예술가에게 언어라는 부호를 떼어내고 언어적 인식 밑에 깔려 있는 실체를 추구하라고 강조했다.

p748 마른의 승리는 프랑스가 전 역사를 통해 과시해온 탁월한 반격전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독일의 전격적인 승리를 불가능하게 했으나 프랑스의 국토를 해방하지는 못했다.

p754 개전 초기 러시아가 독일의 60개 사단을 동부전선으로 유도하지 않았다면 마른의 승리는 없었을 테고, 영국의 육해군이 아니었으면 전쟁을 4년이나 지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의 사단이 없었다면 승리는 했을지 몰라도 오랫동안 사투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미국의 생산 능력 역시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p759 정권은 1914년 이전처럼 급진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신교도이며 급진파인 가스통 두메르그가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루르 지방에서 철병했고 소득세 창설자인 카요가 재무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금전의 장벽에 부딪쳐 쓰러지고 말았다.

p761 그는 국제연맹을 위해 온갖 수완과 열변을 토했으나 이 제네바 기구는 미국의 불참과 영국의 무관심으로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p765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최종 목적은 프랑스 파멸이고 그 수단은 영국과의 친선이라고 선언했다. 프랑스의 통치게급은 확실한 동맹국이 없었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1933년 무솔리니가 로카르노 조약에서 폴란드를 제외한 새로운 4대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조약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불안을 느낀 폴란드는 프랑스에서 이탈했다.

p767 히틀러는 영국 못지않게 강렬한 프랑스의 평화에 대한 욕구를 철저히 이용했다. 독일은 어떠한 정복도 원치 않는다고 누차에 걸쳐 언명했다.

p775 27일 벨기에 국왕이 항복했고 28일에는 고트 장군이 됭케르크에서 영국군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베이강 장군은 자신의 작전대로 전투를 진행할 수 없자 됭케르크 교두보에 수비를 명령해 구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로를 통해 구출하도록 했다.

p780 제3공화국은 이렇게 숨을 거두었다. 패전과 함께 운명하긴 했으나 제3공화국은 존속한 전 기간을 통해 행운과 영예에 가득 찬 정치체제였다. 1875~1914년 동안제3공화국이 프랑스의 국력을 강화했기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프랑스 장군에게 최고지휘권을 주고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를 클레망소가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p792 많은 고난을 겪은 국민은 그 고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희망했다. 무엇보다 런던과 알제 도는 국내 레지스탕스파에서 위험한 여건을 무릅쓰고 투쟁해온 사람들이 그 지도권을 계속 보유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프랑스공화국은 임시정부가 관리하고 제헌의회를 선출해 여기서 제정한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인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p806 이 모든 원주민에게 개혁을 약속한 프랑스는 국내 문제에 정신을 빼앗겨 폭발적인 사태가 발생하기까지 식민지의 애로사항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p809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는 망데스-프랑스 정부의 방식은 매우 인기가 좋았다. 이 불안정한 시기에도 여전히 진부한 자세를 버리지 못한 의회는 비판을 받았다.

p813 드 골은 국가에 봉사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으나 헌법 절차에 따르지 않고는 정권을 인수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코티 대통령은 즉각 이 목적을 위해 합법적인 절차를 취하기로 했다.

p824 1066년의 정복으로 수립된 영국 왕정은 곧 지방권력의 자유를 허용할 만한 실력을 갖췄다. 프랑스 왕정은 초창기부터 몹시 물안정했기에 국가를 단계적으로 건설하면서 한편을는 지방의 전제 권력과 투쟁해야 했다.

p826 프랑스인은 영국인, 독일인, 미국인보다 행정 규칙을 준수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대신 어떤 완전한 이상이 하나의 지상 명령으로 부과되면 설령 성문화하지 않은 법이라도 준수한다.

p828 프랑스 국민은 과거의 전통 때문에 분수 이상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의 영향을 전적으로 군사력만으로 평가한다면 이 말은 타당한 견해라고 할 수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은 사실 지적이고 정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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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세계사 - 문명의 탄생부터 국제 정세까지 거침없이 내달린다
김도형(별별역사) 지음, 김봉중 감수 / 빅피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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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세계

 : 김도형

 :  빅피시

읽은기간 : 2026/03/05 -2026/03/09


역사란 결국 후대의 역사가가 선택하여 기술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책이라는 것도 저자가 내용을 취사선택하고 해석을 부친 책이다. 

이 말은 저자의 시각에 따라 일어난 사건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의 같은 내용을 기술한 역사책이라도 저자가 달라지면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내용이 많아진다. 

현대사는 잘 모르는 내용이 많아 새롭게 알게 된 게 많았고, 중세나 근대역사는 나와 생각이 달라 생각할 게 많았다. 

어렵게 쓰여있지 않아 읽기에도 좋았다. 


p57 러시아의 역사는 완충지 확보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더 많은 완충지, 즉 안전지대가 되어줄 땅을 원했고 끝없이 영토를 팽창했기 때문이죠

p88 이탈리아군은 계속해서 후퇴합니다. 영국군은 공격하는 대로 계속 밀리는 이탈리아군을 보고 무려 이탈리아령 리비아까지 진격해 버립니다. 패퇴하던 이탈리아군 23만 명 중 무려 13만 명이 영국군의 포로가 됩니다.

p107 초반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해서 전력을 최대한 약화시키고 동시에 나치 독일 해군이 대서양에서 미국을 견제한다. 그 사이 중국, 동남아를 점령한 후, 자원 확보용 인프라를 구축한 뒤 유리한 조건으로 미국과 협상한다. 문제는 상상과 현실은 크게 달랐다는 점입니다.

p175 종교가 중심이었던 이 혁명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민주주의에도 크게 기여합니다. 의회의 입법권이 왕권을 제압했고, 종교적 자유와 저항권, 자유주의 사상이 제도화됐습니다. 또 청교도들이 주장한 양심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는 오늘날까지도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주요 사상입니다.

p187 카를 5세는 돈을 구할 데가 필요했는데, 문제는 그가 스페인을 이용하여 돈을 조달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무역과 식민지를 통해 엄청난 수입을 거두고 있었으니까요. 스페인은 기것 번 돈을 죄다 전쟁 비용으로 지출해야 했고, 결국 스페인의 지출은 수입의 2배가 넘게 됩니다.

p259 몽골제국의 제2대 황제 오고타이 칸 때는 유럽을 침공해서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를 차례로 격파하고, 이슬람 제국인 아바스 왕조까지 멸망시킵니다. 엄청난 영토를 차지한 몽골.

p268 제국은 천천히 몰락합니다. 먼저 차가타이 한국은 내분으로 인해 동서로 분열됐다가 정복자 티무르가 세운 티무르 제국에 정복당했고 일한국 역시 내분으로 혼란하다가 당시 흑사병으로 황족들이 죽어 나가자 서서히 해체됩니다. 참고로 이때 킵차크한국은 약해진 일한국에 쳐들어가 멸망의 결정타를 날렸죠. 그러나 킵차크한국도 곧 명을 다합니다. 역시 티무르 제국의 공격을 받은 데다가 러시아 세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킵차크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고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다 1502년에 멸망합니다.

p285 북한 경제는 무너졌고, 1995년부터 3년간 이어진 폭우와 가뭄으로 인해 이재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1990년대에 나라 시스템 전체가 붕괴됐고, 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24만 명부터 많게는 350만 명이 아사했다고 추정됩니다. 이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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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31가지 방식
윌 곰퍼츠 지음, 주은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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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

 : 윌곰퍼츠

 : RHK코리아

읽은기간 : 2026/01/25 -2026/02/11


이래서 제목이 중요한거다.

만약 제목이 미술작품 더 깊이 읽기같은 거였으면 안읽었을 것이다. 

미술관에 갔는데 내가 놓친게 있어? 그게 뭘까? 궁금해하면서 책을 읽었다. 

결국 내가 놓친것은 미술작품의 디테일이었다. 그리고 그 디테일은 작가를 이해하고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상당수 그림이 현대작품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작가는 그 그림을 해석할 수 있도록 작가를 소개하고 작품을 소개한다. 

설명을 듣다보면 작품을 이렇게 해석해야 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설령 그것이 작가의 해석이라 하더라도 작품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대부분의 작가는 잘 모르는 작가들이었고,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책을 한 권 읽었다고 현대작가들의 작품전에 내가 갈 것 같지는 않지만 다섯살짜리가 그리는 그림같다는 생각은 안할 것 같다. 

책이 두껍고 작품과 작품에 대한 설명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읽기에는 좀 불편했다. 


p10 하비의 아버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모든 예술가는 보는 일의 전문가다. 그들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사람과 장소, 사물을 시각적으로 캐묻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p67 어느 날 봄의 도래, 이스트 요크셔 월드게이트와 같은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현실에 대한 전혀 다른 경관을 보여주고 당신이 다시 보도록 만든다.

p264 매우 익숙한 것(구름 낀 하늘)을 보는 동시에 처음 보는 것(구름 낀 하늘만을 그린 그림)이기도 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 작품을 접한 날부터 나는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고 있다. 컨스터블의 구름은 흐린 날과 나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다.

p91 칼로가 어떻게 보았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를 고려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칼로는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196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이 개념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고 주장하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

p99 나는 결코 꿈을 그린 적이 없다.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렸다. 이것이 그녀의 예술이 시작된 지점이다.

p102 이 작품은 사실에 입각한 회화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예술적 상상력이 나래를 펼친 결과물이다. 그림은 쇤베르크가 작곡한 무조의 소리에 반응하는 칸단스키의 내면 감정과 감각을 드러낸다.

p116 구사마에게 검은색 물감은 그물이 없었다면 빠져들었을 무한한 우주를 의미했다. 구사마의 작품은 앞에 서서 탐구하도록 이끄는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이다. 동양과 서양 미학이 결합된 그녀의 작품은 처음에는 친절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점점 골치 아프다. 마치 바다 아래의 어두운 무언가가 끝없는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p126 그는 그곳에서 펑크족과 시인, 힙합 프로듀서, 지하철 스프레이 화가들 무리의 일원이 되었다.이는 돈과 대규모 사업이 아니라 재능과 아이디어로 움직이는 DIY문화였다.

p142 그는 작곡가가 피아노 건반을 다루듯이 얼굴 근육을 다루어 복잡한 표정 관계를 발전시키고 해법을 찾았으며,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주제의 본질을 드러냈다. 그는 피부를 채색할 때 느슨하고 섞이지 않은 붓질로 질감 효과를 내 이 모든 것을 대단히 정확하게 전달했다.

p149 이들의 가장 유명한 창작물은 포장된 국회의사당으로 예술적인 쇼맨십을 보여주는 정말로 대담한 작품이다. 예술에 목적이 있다면 세게를 다르게 보게 하는, 즉 새로운 것을 보여주거나 평범한 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능력에 있다.

p150 크리스토는 자신들의 동기가 공공장소를 며칠동안 빌려서 조용한 소동을 벌이는 것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

p155 사람들에게 놀라운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충동에 의해 촉발되고 그것을 구현하려는 예술가들의 열망 말고는 다른 존재 이유가 없었다.

p160 워커는 그림과 드로잉을 그리고 글을 쓴다. 그리고 드물긴 하지만 가끔은 대형 공공 조각 작품을 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대표적인 매체는 실루엣이다. 실루엣은 값싼 형식의 그림자 초상화를 이르는 데, 긴축 재정을 펼친 루이 15세 시대의 재무 장관 에티엔 드 실루엣의 이름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

p173 그는 엄청난 지성과 깊은 영성,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겸비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서양 미술의 정전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을 그렸다.

p183 그는 사물의 원래 목적 너머를 보면서 그것이 아무리 변변치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를 관찰한다. 그의 접근법, 즉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을 통찰하는 것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p191 문밖을 나서면 배운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뉴욕이나 베를린의 동료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예술 창작 재료가 그가 있는 지역에서는 그만큼 풍부하지 않았다. 이때 그는 오래된 병뚜껑부터 버려진 통나무, 점토 조각에 이르기까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일상적인 재료를 활용하는 작품 제작 철학을 발전시켰다.

p198 모든 문학 활동의 시작과 끝은 내 안에 있는 세계를 통해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개인적인 형식과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설명되고 재창조되고 만들어지고 재구성된다.

p201 그의 작품은 그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탐구이면서 동시에 이 시선을 드러낸다.

p215 요즘 사람들은 공포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지만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에는 공포스러운 그림을 보기 위해 줄을 섰다

p266 세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짧은 문장에서 세잔은 보는 것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에 대해 선언한다.

p277 글로 쓰인 이야기는 수백 페이지에 걸쳐 전달될 수 있는 반면 미술 작품은 단 하나의 이미지로 같은 일을 해야 한다.

p285 이 작품은 다섯 살짜리 내 아이도 이렇게 만들 수 있겠다는 현대 예술 작품에 대한 악명 높은 혹평을 받을 만한 유력한 후보다. 고인이 된 트웜블리는 이 혹평에 불쾌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p299 이 풋내기 예술가는 그녀가 받았던 예술 교육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녀는 초상화를 그릴 때 현실을 해석하려고 하는 대신 사실적인 것을 시도하고 만들기 위해 허구적인 초상화를 그렸다.

p307 노구치가 주어진 물리적 영역과 우리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오브제를 의도적으로 배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꽃병을 조심스럽게 배치하고자 할 때 보기 좋은 위치라고 생각해 식탁 한가운데 놓았다면 그것은 조각 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다.

p334 이 연작에서 레고가 제작한 인상적인 큰 그림들은 감상자를 동요하게 만들 것이다. 여기에는 고통, 불결함과 결합된 불편한 에로티시즘이 깃들어 있다.

p342 흡연가의 상자는 여러 측면에서 놀랍도록 현대적인 작품이다. 장식과 과장을 덜어낸 단순한 미학, 오브제의 기하학적 형태, 뒷벽 돌이 이루는 수평, 수직의 격자가 그렇다.

p348 다윈의 입장에서는 놀랍게도, 윌리스는 더 높은 지능을 믿었고 그에 따라 정당하게 사실에 기반한 과학의 엄격한 유물론을 무시하고, 심령술사나 신비주의자들의 불확실한 주장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p368 이 모든 것을 멈추고 그냥 해요!

p387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해도 기념비적인 산의 그늘아래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p391 전 세계의 국가들은 예술과 예술가들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승인하는 작업에 한한 이야기다. 예술의 힘이 기성 권력을 공격하면 상황은 금새 험악해진다.

p413 이 예술가들은 그들이 어떤 독특한 렌즈로 세계와 세계 안의 자신의 위치를 관찰하는지 보여준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언제든 방문해도 좋다는 초대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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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는 밤 - 그림과 문장과 삶을 엮은 내 영혼의 미술관
이소영 지음 / 청림Life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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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읽는 

 : 이소영

 : 청림Life

읽은기간 : 2026/01/04 -2026/01/08


믿고 읽는 큐레이터 이소영님의 신작. 

제목부터 확 끌린다.. 그림 읽는 밤이라니..

그림 한점과 그림에 대한 설명, 그리고 작가에 대한 설명과 본인의 수필 이렇게 한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 

48컷의 크림을 보면서 고요함과 외로움을 느껴보게 되어 있다.

그림의 상당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중반의 작품이니 후기 인상주의에서 현대그림들이다. 

그렇지만 어려운 그림은 없다. 보면 마음이 따듯해지고, 몰입하게 되고, 고요해지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을 모르는 내가 보고 읽어도 공감이 가는 책이다. 

올해 첫번째로 읽은 책인데 올해의 책 후보다. 올해는 운이 좋다. 

그림에 몰입하고 있는 나도 좋지만 올해는 사람에 몰입하는 내가 되면 더 좋겠다. 


p51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운율은 있다. 생각의 궤적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주기성이 마음의 경험을 지배한다.

p62 평생 파리를 떠나 본 적 없는 루소였지만, 그의 상상력은 전 세계를 여행했다. 그의 정글 연작들은 실제 경험이 아닌 파리의 식물원과 동물원, 자연사 박물관 등을 방문해 표본들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탄생한 것이다. 그의 이국적 취미와 리얼리즘의 독특한 결합을 보여 준 이 같은 접근법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p74 관찰을 넘어선 그의 애정 어린 응시는 욕실과 식탁 시리즈에서도 두드러진다. 곧장 “색은 감정의 언어다”라고 주장한 그답게 노랑, 주황, 분홍빛이 어우러진 색채는 삶의 온기를 찾아내는 그만의 감각적 언어이다.

p88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는 ‘예술에는 나이가 없다’라는 말을 가장 아름답게 증명한 화가로, 본명보다 모지스 할머니로 더 유명하다.

p93 마치 하루가 그곳에서 종말을 고하듯 저녁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만물이 거기서 탄생하듯이 아침을 바라보아라. 그대의 눈에 비친 것들이 모든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 -앙드레 지드

p123 삶의 평온이 꺼지는 순간, 인간이 느끼는 막막함과 초월의 감정이 이 배 안에 실려 있다. 뵈클린은 이 그림을 다섯 번이나 반복해 그렸는데, 유럽의 여러 수집가들과 황제들, 영화감독, 심지어는 프로이트와 히틀러 그리고 레닌까지 이 작품에 매혹되었다.

p143 이 작품이 그려진 1880년대의 프랑스는 표면적으로는 진보의 시대였다. 교육개혁이 이루어지고,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섬세한 눈은 이 진보의 빛 바깥에 남겨진 이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여성 화가로서 끊임없이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기에, 아마도 이 소녀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겹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p173 그림 속에서 인물들은 간격을 두고 서 있다. 가까이 있지만 서로를 움켜 쥐지 않는다. 그렇다고 멀리서 방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곁에서 각자의 빛을 지켜낸다. 이 절묘한 거리감은 인간관계의 비밀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살며시 어루만지는 것, 페리시가 그린 장면은 바로 이러한 태도의 시각적 은유처럼 보인다.

p179 내가 꿈꾸는 예술은 순수와 고요가 깃든 세계이다. 이러한 예술은 작가나 사업가 같은 모든 정신 노동자들의 지친 영혼에 편안한 안락의자와 같은 쉼을 준다. -앙리 마티스

p203 우리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인 것이었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의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져 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모순, 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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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교양과 상식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
유홍준 지음 / 눌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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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유홍준

 : 눌와

읽은기간 : 2025/12/09 -2025/12/23


언제나 좋은 책을 쓰시는 유홍준 박물관장님의 새책을 읽었다. 

이번 책은 한국미술사다. 개론서로서 아주 좋다. 

꼭 국립박물관장님이 되셔서 앞으로 박물관에 오면 이런 작품들을 중심으로 감상하라고 쓴 책같다. 구석기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 건축, 회화, 공예를 총 망라해서 다양한 한국의 미술품들을 설명하고 도해해서 보여준다.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알아야 할 문화재들을 잘 공부했다. 

아무래도 현대에 가까울수록 수록된 문화재가 점점 많아진다. 심지어 조선회화는 조선전기, 중기, 후기, 말기로 구분되어 써야할 만큼 방대한 문화재를 소개한다. 

내용이 많아지니 내가 한국사 시험을 볼 것도 아닌데 이런 문화재도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가, 이런 작품을 모르고 죽으면 또 억울할 것 같아 열심히 읽고 표시했다. 

결국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다. 박물관에 가서 유명한 작품도 봐야겠지만 스쳐 지나가지 않아야 하는 작품들도 잘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2026년도 박물관 방문이 기대된다. 


p16 신석기시대는 크게 여섯 가지 특징이 있다. 집, 농경, 목축, 옷, 간석기, 토기 등이다.

p23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알타이, 오르도스, 몽골과 밀접한 천연성을 지녔으며 중국과는 큰 연관이 없다. 그래서 인종, 언어, 유물 어느 것으로 보아도 한민족은 뿌리를 몽골, 알타이에 연원을 둔 북방 민족으로 생각되고 있다.

p50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기마인물모양도기는 무덤의 주인을 저승에 이르는 길로 안내하는 영혼의 동반자라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속이 비어 있는 용기로 말의 꼬리는 손잡이이고 등에는 깔때기가 달렸으며, 가슴 앞으로는 주구가 길게 나와 있다. 주인과 시종의 모습, 말의 형상과 말안장 모두가 정교하게 묘사된 하나의 조각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p58 3세기 무렵부터는 돌방흙무덤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현재 접안에 있는 1만 1300여 기의 고구려 무덤 중 반은 돌무지무덤, 반은 돌방흙무덤이다. 그리고 4세기 이후 돌방흙무덤에 벽화가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약 100기가 발견되었다. 벽화고분은 대개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으로 생각되고 있다.

p96 신라에서 금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으로도 확인된다. 특히 9세기 이슬람의 기행문인 이븐 크루다지바의 도로와 왕국 총람에는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와서 이슬람교도들이 영구 정착한 것은 그곳의 이런 이점 때문이라고 한다”라고 나와 있다. 이처럼 신라는 금이 풍부하고 기술이 뛰어났기 대문에 수많은 순금 공예품을 만들어, 일본의 기록에서 신라를 두고 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p126 이와 같은 뛰어난 비례 감각에 의해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은 고상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건축물로 탄생한 것이다. 늘씬하게 올라간 상승감과 적당한 기울기를 갖고 있는 추녀 끝 곡선은 백제의 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이다.

p148 통일신라의 문화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대에 활짝 꽃피웠다. 불국사, 석굴암, 석가탑 사리장엄구 등 우리나라 건축, 조각, 공예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p157 통일신라시대에는 3층석탑 정형의 완성과 동시에 이형탑이 탄생하였다. 70퍼센트의 전형에 30퍼센트의 변형이 이루어져 통일신라 석탑은 통일 속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p175 석굴암은 토함산 정상에 가까운 해발 565미터 되는 지점에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동남 30도 방향으로 세워졌다. 이 방향은 물리학자 남천우의 설명에 의하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연중 일조량이 가장 많다. 수학자 김용운은 석굴암에서 신라인들이 기하학을 응용한 예를 열가지 들면서,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인 root2의 전개를 기본으로 하여 석굴암 입구와 내부의 평면도는 정육각형의 한 변과 외접원의 관계이며, 본존불과 대좌의 구성은 정팔각형과 내접원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p202 발해는 기록뿐만 아니라 문화유산마저 남긴 것이 미미하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유물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빈약하다. 이런 경우 미술사는 유물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과 함께, 잃어버린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을 과제로 동반하게 된다.

p209 발해 도기에는 유약을 바른 삼채가 등장한다. 삼채는 자기로 가는 앞 단계에 나타난 기법이다. 납으로 만든 연유에 철, 구리 등을 섞어 가마에서 구워내면 초록, 노랑, 갈색 등 세 가지 색깔이 자연스럽게 번지는, 당시로서는 고급 도예 기술이다. 이 기법은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여 당삼채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p233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에서 볼 수 있듯이 본래 보살상은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고려불상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p305 나전칠기는 나무로 기물을 만든 다음 굵은 삼베를 바르고 그 위에 자개를 붙인 후 옻칠을 덧입혀 반반하게 만든 것이다. 대체로 헝겁 바르기 —> 칠하기 —> 나전 시문 —> 칠하기 —> 나전무늬의 칠 벗겨내기 —> 광내기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칠기를 목심저피칠기라고도 부른다

p318 이러한 조선시대의 건축은 동양미술사 내지 세계미술사의 시각에서도 독특한 문화적 위상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창덕궁, 종묘, 수원 화성, 한국의 서원, 산사,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남한산성, 조선왕릉 등 모두 8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p328 조선시대 서원의 최고 명작은 희재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서애 류성룡을 모신 안동 병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은 아름다운 계곡가에 위치해 있고 병산서원은 낙동강 변의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병산을 마주한 언덕자락에 세워져 있다.

p350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초기 미술사가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어 왔다. 고유섭은 비정제성이 주는 구수한 큰 맛, 최순우는 어진 선 맛에서 일어나는 너그러움, 김원용은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화가 김환기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에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p366 조선 전기 백자의 상징이 매죽무늬 항아리이고, 조선 후기 금사리 가마 백자의 상징이 달항아리라면 조선 중기 백자의 상징은 철화백자 운룡무늬 항아리, 화룡준이다. 용준이라고도 불린 이 항아리는 본래 의례 때 사용하는 술항아리이다.

p379 백자 달항아리의 이런 아름다움은 후대에 거의 전설이 되어 무수한 찬미를 낳았다. 김환기는 백자 달항아리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고 했고, 최순우는 잘생긴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넉넉함이 있다고 했고, 이동주는 서민들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사대부의 지성미가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고 했다.

p425 소상팔경도는 북송의 송적이 처음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 사계절 산수의 대명사가 되어 뭇 화가와 시인들이 이를 그리고 시로 읊었다. 초봄 산시청람 : 푸른 기운 감도는 산마을, 늦봄 연사만종 : 안개 낀 절의 저녁 종소리, 초여름 어촌석조 : 어촌의 저녁노을, 늦여름 원포귀범 : 멀리 포구로 돌아오는 배, 초가을 소상야우 :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늦가을 동정추월 : 동정호의 가을 달, 초겨울 평사낙안 :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 늦겨울 강천모설 : 저녁 무렵 산야에 내리는 눈

p468 이 속화첩은 사제첩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사제는 사향노루의 배꼽으로 이는 향기가 짙어 암수 사랑의 계기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사냥꾼의 표적이 된다는 뜻이다. 표제 오른쪽에는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엄중한 경고문이 쓰여 있다. 이는 조영석이 환쟁이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p486 정조 시대는 앞 시기인 영조 연간의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등이 개척한 속화, 진경산수, 문인화풍들이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긍재 김득신 등 화원들에 의해 결실을 맺는 시기였다. 즉 진보적 지식인(문인화가)이 개척한 화풍을 테크노크라트라 할 전문인(화원)이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교량 역할을 한 인물이 표암 강세황이다.

p501 그가 그린 속화와 미인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풍류와 낭만은 물론이고 당시의 아름다운 색감을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하기로 혜원은 춘화를 그려 도화소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실제로 혜원이 그린 춘화가 여러 폭 전한다.

p519 조희룡은 추사의 충실한 지지자로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 갈 때 그의 측근으로 연좌되어 임자도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조희룡의 글씨는 추사의 글씨를 빼닮았는데 추사의 글씨는 강하고 조희룡의 글씨는 예쁘다는 인상을 준다. 조희룡은 난초, 매화, 산수 모두에서 기량이 뛰어나 추사가 추구한 문인화를 가장 잘 구현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p531 석파 이항은이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1849년 추사 나이 64세. 이하응 나이 30세 때이다. 이때부터 그는 추사의 난보를 보고 익혀 추사로부터 “압록강 이동에 이런 난초 그림은 없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p604 임진왜란을 계기로 불교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의승군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었지만 조선 후기 불교가 크게 부활한 것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p617 영산재는 석가모니가 영취선에서 법화경을 강의했던 장면을 재구성한 의식이었기에 괘불탱은 영산회상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대규모 의식이 행해질 때면 옥외에 불단을 차린다. 이를 야단법석이라고 하는데 이때 내거는 대형 불화를 괘불탱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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