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우지 않고 통째로 이해하는 통세계사 1 - 인류의 탄생에서 중세까지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역사
김상훈 지음 / 다산초당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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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세계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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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3/12 -2024/03/22


예전에 나왔던 책인데 개정판이 새로 나왔다. 나는 개정판을 처음 읽었다.

세계사를 동양과 서양을 구분해서 읽게 하는 책은 별로다. 동양과 서양 심지어 아메리카와 교류를 하면 발전했는데 따로따로 공부하다보면 숲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같은 시대라면 동서양을 계속해서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동양의 한나라 이야기를 하면서 서양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중간중간 상기시켜준다.

시험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처럼 좋은 팁이 없다.

시험이 아니더라도 동서양의 교류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기에 좋은 방법이다. 

다른 세계사 책에서는 한세기마다 동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방식을 쓰기도 하던데 통사로 읽은 책은 이런 방법이 이해하기에 좋은 것 같다. 

청소년용인 것 같지만 성인이 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통사를 읽으면 각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통사만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ㅜㅜ


p25 기원전 2350년경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어. 그가 바로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 1세란다. 모든 도시국가들이 그의 용맹 앞에 무릎을 꿇었지. 사르곤 1세는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정복해 최초의 지배자로 등극했어.

p74 함무라비 왕이 사망하자 쇠퇴하기 시작한 거야.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잇달아 이민족인 히타이트와 엘람의 지배를 받았단다. 이윽고 바빌로니아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가 등장했지. 그 나라가 바로 아시리아야

p96 로마신화에서는 로물루스라는 영웅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돼 있어. 하지만 실제로는 그때 이탈리아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의 한 종족인 루마족에서 로마라는 이름이 유래했을 것이란 주장이 더설득력을 얻고 있지

p110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300명의 정예전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계곡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맞섰지. 그러나 적수가 되지는 않았어. 영화 300의 줄거리 그대로 스파르타 군대는 전멸했지. 페르시아는 아테네로 진격했어. 이때 등장한 그리스 영웅이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야. 그는 아테네 시민을 모두 대피시킨 후 해전을 준비했지. 마침내 페르시아 함대가 눈앞에 나타났어. 테미스토클레스는 조심스레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 만으로 유인했어. 이 해안은 폭이 좁아 페르시아의 큰 함선이 잘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거지. 그 예상은 적중했단다. 후퇴하던 아테네 해군이 반격에 나서자 페르시아 함선들은 서로 부딪치며 우왕좌왕했어. 페르시아는 더 좋은 함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2차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어

p155 쿠시 왕국은 새로운 선택을 했어. 아프리카 고유의 문화권을 건설하기로 한 거지. 이후 쿠시 왕국은 더 이상 오리엔트 지역으로 진출하지 않았어. 그 대신 아프리카에 정착하려고 노력했지. 그 덕분에 쿠시 왕국은 아프리카의 가장 모범적인 국가가 됐단다.

p192 흉노의 왕국이 세워진 기원전 3세기 초반, 아소카 왕이 등극했어. 그는 왕에 오르자마자 정복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어. 얼마 후 타밀 지역을 뺀 인도 전역을 통일했지. 아소카 왕은 정말 냉혹한 정복왕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그랬던 그가 갑자기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어. 수많은 정복전쟁을 치르면서 너무나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는 데 생각이 미친거지.

p224 팍스 로마나의 범위를 좁히면 이 네르바 황제 시절부터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범위를 넓히면 로마 공화정 말기의 내분과 혼란을 종결시킨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오른 시점부터 팍스 로마나로 보지

p25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로마 제국을 동방 지역과 서방 지역으로 쪼갰어. 각각의 지역에는 1명의 황제와 1명의 부황제를 두었지. 그러나 모든 권력을 혼자 쥐고 있었어. 사실 로마 제국을 분할한 것은 다른 3명의 황제와 부황제에게 국토 방위 임무를 맡기기 위한 정책에 불과했단다

p284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5년이 지났어.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방에서 프랑크족의 클로비스란 인물이 프랑크 왕국을 창건했지. 481년 클로비스가 세운 왕조를 메로빙거 왕조라고 불러. 751년까지 280년간 계속됐지

p335 이슬람 군대는 지금의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 도착했어. 그들은 보르도 지방을 초토화 시킨 다음에 투르 지방까지 진격했지. 프랑크 군대가 막아섰어. 프랑크 왕국의 권력을 쥐고 있던 궁제 카를 마르텔이 직접 군대를 지휘했어. 프랑크 군대는 푸아티에 평원에서 이슬람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 이게 그 유명한 투르-푸아티에 전투야. 이 전쟁의 승리는 프랑크에 돌아갔어. 그 후 이슬람 제국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

p350 샤를마뉴의 업적은 너무 많아. 프랑크 왕국은 유럽 역사상 서로마 제국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 됐어. 문화도 발달했단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로마의 전통적인 라틴 문화는 많이 잊혀갔어. 샤를 마뉴는 그 라틴 문화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했어. 신부들이 신을 섬기는 수도원도 이때부터 발달했지. 유럽 사람들은 샤를마뉴가 통치하던 이 때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러. 매우 번영했다는 뜻이야

p371 710년 일본은 아예 당나라의 수도인 시안을 그대로 본뜬 도시를 나라 지역에 건설했어. 단지 도시 모습만 따온 게 아니야. 율령을 비롯해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 것과 비슷하게 고쳤지. 문화도 당연히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귀족적이었어. 이때부터 약 70년 동안의 일본을 나라시대라고 한단다. 8세기 말에는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겼어. 헤이안시대가 열린 거야. 헤이안시대는 훗날 가마쿠라 바쿠후가 만들어질 때가지 약 390년간 계속됐어

p438 십자군이 왜 이렇게 흉악했는지 아니? 교황을 포함해 이때 유럽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어. 그들은 성전을 촉구하면서 동방에 막대한 보물이 있다고 선전했단다. 그래야 군인들이 더 잘 모이니까. 많은 기사와 농민들이 이 선전에 마음이 움직여 심자군에 자원한 거야. 어쩌면 이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종교적 순수함보다 돈을 벌려는 욕심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어

p492 일 칸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한 다음 페르시아인들과 투르크인들을 힘으로 다스렸어. 당연히 반발이 있었겠지?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어. 그 결과 14세기 중반이 되면 일 칸국은 여러 왕조들로 쪼개지고 말았단다. 이때 등장한 왕조 가운데 몽골 혈통의 티무르 왕조, 페르시아 혈통의 사파지 왕조, 투르크족 혈통의 오스만 왕조가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

p511 바이바르스 1세는 프랑스의 루이 9세 왕을 사로잡은 데 이어 몽골 군대까지 물리쳤어. 그는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이자 영웅으로 떠올랐단다. 바이바르스 1세는 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나가 4대 술탄을 제거하고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어

p527 합스부르크 왕조는 스위스 출신이었어. 독일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가 포함하는 신성로나 제국의 황제를 독점했지. 신성로마 제국에 속한 나라들은 근대로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영방 체제를 유지했어. 그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조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의 역사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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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2 -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 국토박물관 순례 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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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토박물관 순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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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비

읽은기간 : 2024/03/05 -2024/03/10


두번째 책.. 앞으로 계속 나올 시리즈가 기대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비슷한듯 하면서 좀 다른 느낌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지역을 돌면서 씌여진 책이라면 이 책은 지역을 돌기는 하지만 박물관을 끼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덕분에 몰랐던 박물관을 알게 되는 수확이 있다. 

내가 지방에 여행을 가면 가능하면 들리는 곳이 성당, 동네책방인데 지역 박물관을 추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백제와 가야에 대한 답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사실 둘 다 가본곳이 별로 없다. 

백제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고 가야, 특히 비화가야는 처음 들어본 곳이다.

창년이라는 곳이 이렇게 매력적인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쓰면 이렇게 가보고 싶게 글을 쓸까? 부럽기만 하다. 

창녕도 가봐야 하고 부여도 가봐야 해서 올해도 갈 곳이 참 많다..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p17 부연 설명하기를 인물 : 탑 옆에서 (관람하며)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이 탑은 무조건 탑을 바라보며 관람하는 인물과 함께 찍어야 사진이 제대로 나온다. 그래야 실물크기가 확실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p35 이에 창왕은 자신을 대신하여 백성 100명을 출가시켜 부처님을 받들게 하고 자신은 왕위를 이어갔다. 젊은 시절의 패기로 엄청난 실수를 했던 경험이 그를 크게 성장시켰던지 이후 창왕은 45년간의 치세 동안에 백제문화를 꽃피워 사실상 문화적 전성기를 이룩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능사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이다.

p58 위덕왕 재위기는 진실로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지금 나성에서 떠올리는 유적과 유물 외에 백제의 미소로 칭봉받는 서산마애삼존불, 미스 백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규암 출토 금동보살입상, 비록 국적과 시대가 명확치 않지만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이 6세기 후반 백제 미술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위덕왕 때 유물이다.

p70 사비성의 인구는 5만 명에서 기껏해야 10만 명 정도였으니 궁녀가 3천이 될 수가 없고 부소산 관북리 왕궁은 3천 명의 궁녀가 머물 공간도 없었다. 시인들은 단지 시어로 삼천을 읊었는데 대중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새기면서 낙화암은 의자왕의 호화방탕한 삶의 상징처럼 회자되었던 것이다.

p80 키 큰 상수리나무에 기대 쉬면서 곁에 있는 학부모에게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대재각을 다시 찾아온 것이 한 6,7년 만인것 같은데 그사이 근력이 쇠해진 것 아닌가 싶네요”라고 슬픈 듯이 말했더니 곧바로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만치 않은 산길이네요. 교수님 따라가는 우리가 더 힘드네요”라고 하여 금방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남과 이야기할 때는 이 학부모처럼 상대방이 듣기 좋은 얘기를 먼저 해야겠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p85 매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거의 광적으로 좋아한 식물이라 좋은 매화나무 갖기를 너도 나도 원했다. 오죽했으면 퇴계 이황 선생이 운명하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저 매화 화분 물줘라”였겠는가.

p93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향락에 빠졌던 왕이 아니라 재위 20년(641-660) 내내 신라를 공략한 전쟁의 제왕이었다.

p129 이 합장묘는 먼저 만든 북분은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나중에 만든 남분은 돌방무덤이어서 신라의 묘제가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p133 각기 연구원들을 대동하고 10월 12일 경주에 도착하여 유물들을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겨 놓고 21일까지 열흘간 조사했다. 금관총에서는 금관, 금제 관식, 금제 허리띠, 금제팔찌, 금제반지, 금제귀걸이, 금동신발, 유리잔, 청동제초두 등 1만 여점의 유물을 확인했다.

p145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는 모두 세 자루로 판명됐고 두자루에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다. 금관총 출토 금속편 중 칼집과 은제 허리띠에 이, 십, 팔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의 주인이 이사지왕인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p151 신라 고분의 의미와 함께 우리의 전시 디스플레이 수준이 이렇게 높아져 있음에 높은 문화적 자부심이 생기기도 했다.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내던 15년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전시를 보면서 울컥하는 감격이 일어나 어른답지 않게 절로 눈물이 나왔다.

p167 신라 고분의 출토품 중에 금관이 하이라이트로 여겨져 여타의 금속공예품들이 덜 조명받고 있지만 금관이 출토될 때는 금귀걸이, 금반지, 금허리띠, 금수식, 목걸이, 가슴걸이 등이 세트를 이룬다. 금령총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정교한 기교의 장신구들이 홀세트로 출토되었다

p176 출토 유물을 살펴보면 나무널 안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착장하고 있었던 금관과 관수식, 금제 태환식 귀걸이, 마노 대롱옥, 수정 다면옥, 각종 곡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 금,은,유리구슬을 꿰고 끝에 비취 곡옥을 단 가슴 장식, 금제과대(허리띠와 장식), 금은 팔찌와 유리 팔찌, 금반지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서봉총은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p186 한국전쟁 중에는 서울에 남아 박물관을 지켰는데, 서울을 점령한 북한이 유물을 북쪽으로 반출하려고 조선물질문화조서 보존위원회 완장을 찬 사람들이 유물 포장을 지시했다. 그러나 최영희, 최순우, 김원용 등 박물관 직원들이 포장 시간을 길게 끌며 지연시켰고, 결국 서울 수복 후 미군의 도움을 얻어 유물들을 부산으로 대피시켰다.

p223 껴묻거리를 넣어두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새날개모양 관모장식, 환두대도, 금그릇, 은그릇, 유리그릇, 칠기 등이 출토되었다. 딸린덧널 안에서는 도기 1,500점과 철기 300점, 금동안장 등 각종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중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금동말안장과 페르시아풍이 역력한 봉수형 유리병과 유리잔은 당시 신라의 교역 범위가 상상 이상으로 넓었음을 말해주어 발굴단을 놀라게 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남분 2만 2,700점, 북분 3만 5,648점으로 약 5만 8천 점이다.

p227 신라는 뛰어난 금속 세공 기술이 있었다. 금속판을 끌이나 톱으로 도려내고 음각으로 무늬를 새기는 투조 기법, 판판한 금속파네 일정한 무늬를 망치로 두드려 나타내는 타출 기법, 옥이나 칠보 같은 보석을 감싸는 감옥 기법, 그리고 고난도 기술이 누금 세공 기법까지 구사했다.

p264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현지 실사를 거쳐 등재 권고라는 의견을 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가야는 1세기 무렵부터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번성한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로, 여러 가야 고분군은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

p270 비화가야의 비화는 빛들 또는 빛이 좋은 들이라는 뜻으로 비사벌이라고도 부른다. 비스듬한 기울기를 갖고 있는 창녕 비사벌은 과연 빛이 좋은 들판이다.

p276 오구라컬렉션보존회는 기증의 말에서 이 수집품으로 고대사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고 말하면서 미안한 마음의 표시는 어디에도 하지 않았다. 오구라의 법적인 잘못을 따지는 것은 별도로 해두더라도, 학술적 입장에서 그가 크게 잘못한 것은 장물아비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구입 경위와 출토 장소에 대해 끝내 입을 다물었다는 점이다.

p276 송현이는 쌀과 보리, 콩과 견과류 등 식물류를 주로 섭취했는데 영양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송현이 머리의 수직 길이는 19.3 센티미터로 8등신이며, 허리둘레는 21.5인치로 현대 만 16세 여성의 평균 허리둘레 26.2인치보다 5인치가량 가는 개미허리였다.

p287 동삼층석탑은 진흥왕 척경비와 함께 일찍이 국보로 지정된 창녕의 자랑이다. 또한 갈항상 동삼층석탑, 불구사 석가탑과 함께 고전미의 3요소인 비례, 균형, 조화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p305 요새 사람이 지으면 아마도 포클레인으로 반반히 평지를 만들어놓고 시작했을텐데 옛 분들은 주어진 지형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 배치했어요. 저 작은 건물들을 보세요. 층층이 높이를 달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비켜앉아 건축적 리듬감이 있죠. 관룡서는 평면보다 입면의 배치가 탁월한 절집입니다.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땅에 대한 컨트롤에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우리 전통 건축은 이처럼 컨트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어요

p307 관룡사는 절집에서 정상 쪽으로 500미터 위쪽에 있는 용선대라는 벼랑에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사찰이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3.18미터로 대좌와 불상으로 구성되는데, 불상은 근엄하고 좌대는 제법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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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고고학 - 돌과 뼈로 읽는 인간의 역사 사계절 1318 교양문고
김상태 지음 / 사계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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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단한 고고학

 : 김상태

 : 사계절

읽은기간 : 2024/03/04 -2024/03/10


꽤 흥미로운 책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읽히지는 않았다. 

어렵지도 않고, 글씨도 커서 잘 넘어갈것 같았는데 머릿속에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건 책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였다. 아무래도 몸이 피곤할 때 읽어서 그런것 같다. 

구석기시대의 발굴과 연구에 대해서 자세하게 씌여있기에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특히 구석기 시대를 알기 위해 직접 구석기 유물들을 만들어보고 사용해 본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는 차돌이 많아 주먹도끼도 날렵하거나 예쁘게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구석기 유물에서 가장 귀하게 취급받는 흑요석은 백두산 근처에서만 나오기에 딱딱한 다른 돌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구석기 유물을 보면서 기술의 발달을 보기엔 고려할 사항이 많다는 걸 배웠다. 

인류의 대부분의 시대가 구석기시대였는데 하나하나 역사를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 정말 멋지다. 

고고학은 배울수록 재미있다. 


p38 구석기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르발루아 기술 등장 이전을 전기 구석기 시대, 그 이후를 중기 구석기 시대로 구분하기로 했습니다. 르발루아는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새로운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의 등장과 지적 성장의 결과입니다.

p46 당시의 사람들이 흑요석을 갖고 이동한 것인지 혹은 동아시아의 일정한 지역 범위 안에 흑요석을 교환하는 원시 교역 체계가 존재했는지, 또한 바다를 어떻게 건넜는지 등의 문제는 앞으로 연구자들이 더 밝혀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찾은 증거물로 볼 때, 구석기인들에게 흑요석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p61 슴베찌르개는 반드시 이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혼펠스를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게, 일본 규슈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는 더 좋은 석재가 많기 때문입니다.

p103 사냥한 동물을 동굴로 옮겨 와 가족과 먹었겠지요. 그리고 같은 장소에 네안데르탈인의 무덤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재발굴을 진행하면서 무덤 주위의 흙에서 다량의 꽃가루를 확인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네안데르탈인들이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려고 꽃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습니다.

p131 연구자들은 약 300만 년에 걸친 구석기 시대를 크게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합니다. 시기를 나누는 기준은 뗀석기 제작 기술의 발달 정도입니다. 석기 기술의 발달에 따라 구분한 구석기 시대의 각 시기는 인류의 진화 과정과도 대략 일치합니다. 진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구상에 출현한 여러 종의 인류 가운데 지적 수준이 높은 종들이 생존한 과정입니다.

p142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노인이 이런 상태로 상당 기간 생존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예순 살 무렵까지 천수를 누린 뒤 정성껏 조성한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이 시기에 인류가 집단의 생존에는 보탬이 되지 않는 동료를 끝까지 보살폈고 사망 후 장례를 치그로 애도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p155 2014년 6월 충청북도 단양군 수양개 유적 6지구에서 눈금이 새겨진 돌이 발견된 것입니다. 눈금 돌이 발견된 지점의 토양 연대는 지급으로부터 약 4만 년 전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돌날 기술을 필두로 새로운 문화가(후기 구석기 시대)로 들어선 무렵입니다.

p169 연구자들은 구석기 유물을 볼 때 단지 외양만 보지 않고 구석기인들의 의도를 찾으려고 합니다. 인간이 의도를 갖고 만든 뗀석기와 그렇지 않은 짱돌을 구분하는 방법은 구석기 고고학자에게 기초이자 필수 지식입니다.

p192 뗀석기 제작 기술의 백미는 강한 힘으로 내려치는 것이 아니라, 눌러떼기입니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정교한 창 중에는 망치를 아무리 섬세하게 두드려도 똑같이 만들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망치가 아니라 뿔과 같이 단단한 도구의 끝부분으로 돌을 강하게 눌러서 작은 조각을 떼는 눌러떼기 기술로 만든 도구들이 그렇습니다.

p197 표준화의 이면에는 중요한 의미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인류는 주먹도끼를 100만년 이상 사용하면서 이 도구의 형식적 특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같은 시대의 구성원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후손에게도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주먹도끼를 만든 사람들은 원시적이지만 소통 가능한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p209 유전자 교류는 네안데르탈인이 우리와 같은 종일 가능성도 내포합니다. 다만 현재까지는 이종 교배에 따른 유전자 교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연계에는 극히 예외적으로 이종 교배로 태어난 개체가 다음세대를 생산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도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합니다. 아무튼 구구한 오해들은 네안데릍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와 매우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p218 사우투올라는 전문 연구자들을 불러 동굴을 찬찬히 조산 뒤 이듬해에 고고학계에 정식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찬사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조작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은 사우투올라가 화가를 고용하여 벽에 몰래 그림을 그리고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구석기 시대의 유물로 보기에는 너무도 선명하고 화려했기 때문입니다.

p224 만일 그들이 한반도로 이동했다면 추운 북쪽을 경유하기보다는 동식물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고황허를 따라 이동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더 합리적입니다. 중국측 주장에 따르면 황허와 양쯔강 유역에서 70-80만년 이상 된 유적이 발굴되었고, 우리나라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도 전곡리를 비롯해서 남한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이 분포해 있기 대문에 저 또한 고황허 이동설의 가능성을 높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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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이재형 지음 / 디이니셔티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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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 이재형

 : 디이니셔티브

읽은기간 : 2024/02/26 -2024/03/03


내가 산 책은 아니지만 '읽어야지, 읽어야지'하면서도 계속 미루다가 이제야 읽게됐다.

표지를 봤을때는 어린 작가인줄 알았는데 번역일도 오래 하신 중년의 작가였다. 

예전에 파리3부작이라는 주제로 씌여진 파리관련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의 다이제스트 느낌이었다. 

파리를 거닐면서 만날 수 있는 장소와 에피소드를 소개해준다. 

마치 파리를 걸어다니며 여행하는 느낌이다. 나도 나름 파리를 여러번 갔었는데 모르는 곳이 참 많았다.

유명한 곳도 나오지만 마레지구의 카페나 작은 공원처럼 나름 유명하지만 관광객이 자주 오지 않는 곳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사진과 함께 소개하니 읽거나 감상하기는 훨씬 좋다

예전에 봤던 파리 3부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글만 있어서 모든 걸 상상해야 했는데 사진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가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RER선을 타고 갈 수 있는 파리 근교도 소개되어 있고, 몽생미쉘도 소개하고 있어 나름 파리와 북부 프랑스의 상당부분을 커버한다. 

파리가 그렇게 내게 매력적인 곳은 아니지만 들러보고 구경하고 싶은만큼 매력적인 도시로 그려져 있다. 여행가고 싶다. 


p42 리스트는 소리가 선명하고 멀리까지 들려서 콘서트홀에 어울리는 에라르 피아노를 좋아한 반면, 쇼팽은 더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더 섬세한 기교를 요구하는 플레엘 피아노를 좋아했다.

p109 대상을 몇 번의 붓질로 순간적으로, 감각적으로 그려내서 그 윤곽이 뚜렷하지 않고, “빛은 색채다”라는 모네 자신의 말처럼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들이 다채롭게 사용되었다.

p123 전체적으로 겨울을 나타내는 색조가 사용되어 왠지 모르게 멜랑콜리한 이 작품에서는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모네의 정신적, 물질적 불안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p149 각자가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이 화가의 우두머리 격인 폴 고갱은 모든 방법을 시도해보고, 모든 색을 과감하게 써보고, 자연을 찬양하고, 본질로 갈 수 있는 권리를 옹호했다.

p163 작가 발자크는 미지의 걸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캔버스에 아무것도 없어” 그가 주제 없는 그림이라고 말했던 그림이 바로 멀리 강과 작은 만이 보이는 풍경이다. 투명한 노란색 하늘과 푸르스름한 호수,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강, 희뿌연 공기, 갈색 땅, 모래, 노란 풀, 물과 땅, 공기라는 자연 요소가 흐릿한 공간 속에서 합쳐져 꿈꾸듯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p167 희끗희끗한 머리칼, 깊게 팬 주름,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코. 세월의 풍파가 그대로 새겨진 저 얼굴은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노인의 한없이 너그러운 눈길을 보라. 적잖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조금씩 따뜻해진다.

p219 예술은 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법이다. 18세기 후반기, 철학자들이 개인의 자유와 각 인간존재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자 화가들도 르브룅처럼 모정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p262 선명한 붉은색을 띤 수틴의 가죽을 벗긴 소는 날것의 아름다움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가장 어두운 검은색 위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소의 붉은 살덩어리는 비극적이고 처연하다. 도살의 잔혹함이, 삶의 고통이, 갑작스러운 죽음의 폭력이 온몸에 느껴진다.

p272 나는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는 이 조각상에서 느껴지는 고집스러움이야말로 발자크가 평생 빚에 좇기면서도 방대한 인간희극을 쓰게 만든 창작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p281 30년 동안이나 무명으로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가 쓸쓸하게 죽어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무덤도 갖지 못했다. 그녀를 망각의 세게에서 구해낸 것은 안느 델베가 쓴 책 카미유 클로델과 이자벨 아자니가 연기한 영화 카미유 클로델이었다.

p355 여기서 전원생활을 만끽하고 시작한 지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789년 10월 5일 오후, 그녀는 그토록 행복했던 시간을 보낸 이 촌락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루이 16세와 함께 파리로 끌려간 마리-앙투아네트는 1793년 10월 16일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진 단두대에 목이 잘렸다.

p361 르누아르가 물 위에 반사된 햇빛을 그린 <라 그루누이에르>는 1883년까지 계속될 그의 인상파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작품이다.

p366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는 무엇보다도 삶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다. 르누아르는 삶에서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자 했다. 자기 그림에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남겨놓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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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1 - 선사시대에서 고구려까지 국토박물관 순례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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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토박물관 순례1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2/23 -2024/02/25


글잘쓰고 말잘하는 유홍준 교수님의 새로운 시리즈..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를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고, 국토박물관 순례를 읽으면서 지역박물관의 멋짐과 아름다움을 알게 됐다. 

시대순으로 쓰신다고 했는데 시대가 너무 쭉쭉 나간다. 시리즈가 길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 책은 구석기시대부터 고구려시대까지다..

역사에서 제일 긴 시대이긴 하지만 유적이나 유물이 많지 않아서인지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동상동 패총에 대해서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설명을 들은 건 처음인 것 같다. 

덧띠무늬토기도 설명을 들으며 보니 그동안 못보던 멋과 미를 볼 수 있었다.

고구려시대는 읽기만 해서는 머리에 정리가 잘 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지도가 머리속에 없어서인것 같다. 

하루 빨리 북한과 만주를 마음껏 답사할 수 있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2권을 빨리 읽어야겠다.. 


p18 5월 14일 첫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단은 먼저 인근의 벽돌공장 주변부터 조사했다. 본래 구석기시대를 조사하는 고고학자들에게 벽돌공장은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이다. 벽돌을 만들기 위해 채취한 절토 속의 돌맹이들은 불순물 같은 것이어서 이를 잘 골라 버리기 때문이다.

p31 유명한 주먹도끼지만 아무리 보아도 깨진 강자갈 돌맹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그냥 깨진 돌이 아니라 깨트려 만든 돌연장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행위에 목적이 들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p40 고인류학에서 유전자 분석 방식이 도입되면서 인류는 단일 계보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여러 비슷한 종들이 혼재해 살아오면서 생서, 소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지구상에는 최소한 25종의 호모가 등장했다고 생각하고, 비슷한 유형을 끼리끼리 묶은 계통수로 인류 진화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

p51 술을 좋아해 실수도 많았는데, 예를 들어 전곡리 발굴 현장이 대통령 특별 후원금을 받은 날 기분이 한껏 좋아진 선생은 한탄강 매운탕 집에서 실컷 술을 마시고 차를 몰아 서울로 가서 또 2차로 술을 마시고는 마침내 남의 차를 들이받아 음주운전으로 경찰서에 연행됐다는 것을 자기 글에 솔직히 고백해놓기도 했다.

p86 이 덧띠무늬토기는 높이 12.4센티미터, 지름 16.4센티미터의 아담한 크기로 구연부에 덧띠무늬가 W자형으로 둘러져 있는데, 형태도 아름답고 상태도 완벽하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가 빗살무늬토기로 일반화되기 전에 덧띠무늬토기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p93 패총은 이처럼 천 년, 2천 년을 두고 쌓이고 쌓여 다 삭아서 산성화되어 대부분 가루나 흰 더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개더미가 높은 약 1미터, 길이는 100미터 내외가 되는 것이니 내가 어려서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p101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쓴 아르놀트 하우저는, 구석기인은 오직 자연에 대한 경험에 의지하면서 단순한 동물적 본능으로 사물에 대한 애정과 인내를 그렸지만 신석기인은 사물을 의식으로 파악하고 표시하려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부호화, 개념화, 상징화하려는 경향이 생겨 추상무늬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했다

p110 대포산 산마루에 위치한 복천동 고분군에는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조성된 가야와 신라 고분 약 170기가 모여 있다. 이곳에서는 금동관과 철제 갑옷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가야토기, 신라토기가 2,500점, 철기 금속류가 3,200점, 유리구슬 등 장신구가 4,010점, 거기에 인골 5구, 말 이빨 7개가 발굴되었는데, 그 양도 양이지만 유물들의 질이 아주 높고 아름답다.

p150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주자학을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면서 주희가 무이산 아홉 굽이에 무이구곡을 경영한 것을 벤치마킹하여 제각기 풍광 수려한 계곡에 자신의 독자적인 구곡을 경영하며 학문적 수련과 휴식의 공간으로 삼았다.

p165 반구대암각화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으로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인데 반구대암각화의 내용은 모두 어로와 수렵에 관한 그림일 뿐이고 농경에 관한 그림이나 청동기시대의 추상무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설득력 있다.

p211 남측은 맘대로 여행한다는데 뭐 하느라고 압록강에 처음 왔단말입니가? 농을 섞어 대거리하는 것이 여지없는 평양 말씨인데 그 억양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p223 답사의 기초 지식은 지리다. 그중에서도 그곳 땅의 생김새를 알려주는 자연지리가 기본이다. 자연지리를 알아야 그 땅에서 살던 민족과 나라가 남긴 역사지리가 이해되고 역사지리가 머릿속에 그려져야 비로소 고구려라는 나라의 역사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올바로 그릴 수 있다.

p231 하나는 환인에 사는 오녀산성이고, 또 하나는 집안에 있는 적석총입니다. 집안 통구에 가서 수천 기의 고구려 적석총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장대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p239 고구려인들은 항상 도성을 두 곳 건설했습니다. 하나는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또 하나는 전쟁시 방어용 진지로 마련한 산성입니다. 둘이 한 세트인 셈이지요. 환인에 있는 평지성이 졸본성입니다. 이는 집안으로 천도해서도 마찬가지여서 평지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p255 집안의 압록강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강폭이 단동의 압록강과 달리 아주 좁아 강 건너 만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p285 고구려의 건국이 부여에 뿌리를 두었으나 고구려는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부여는 이내 쇠퇴하면서 후대에 생긴 착시현상으로, 고구려 주몽 설화는 부여 동명왕 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350년 무렵부터 668년 멸망까지 300년간 조성되면서 초기 100년간은 여러 칸 무덤의 초상화, 중기 100년간은 2칸 무덤의 풍속화, 후기 100년은 1칸 무덤의 사신도 벽화로 이동하는 양식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무덤의 주체가 초기는 피장자 개인, 중기는 내세의 삶이 영위되는 공적인 공간, 후기는 영혼의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 등으로 변해간 것을 말해준다. 즉, 고구려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점점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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