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클래식 수업 9 - 드뷔시, 소리로 그린 풍경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9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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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처한 클래식 수업 9

 : 민은기

 : 사회평론

읽은기간 : 2025/01/20 -2025/02/06


1년에 1권꼴로 나오는 것 같다. 이번 작곡가는 드뷔시다.

지난번 바그너도 그렇고 드뷔시도 음악은 너무나 좋은데 사람은 개차반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가 이야기했듯이 신은 왜 이런 개차반인 사람들에게 이렇게나 아름다운 재주를 주었을까?

음악과 사람을 분리해서 듣기는 하지만 드뷔시 역시 엄청난 이기주의자에 질투쟁이였던것 같다. 

인성이 삐뚤어졌어도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다. 

고생도 많았고, 질타도 많았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좋은 음악을 남겨줘서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다음번 작곡가는 누가 나올까? 20세기부터는 겁이 난다. 

윤이상 작곡가도 한번 해주면 참 좋겠다. 


p21 드뷔치 음악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음향이에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사운드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드뷔시 작품의 참신한 세련미를 유지하는 비결이랍니다.

p36 인상주의가 미술을 중심으로 발현했다면 상징주의는 문학을 바탕 삼았어요. 드뷔시는 샤를 보들레르, 폴 베를렌, 스테판 말라르메 같은 상징주의 문학가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며 자신의 음악적 개성을 여기에서 찾았죠

p135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유럽에서 동양 문화를 소비하는 흐름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했어요. 서구에서는 동양이라는 왜곡된 환상을 만들어서 도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거예요. 동양을 신비롭고 매혹적인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서양의 지배가 필요한 원시 상태로 간주했으니까요.

p146 드뷔시는 새로운 음악을 접했다고 해서 이를 마냥 따라 하지 않았어요. 낯선 재료를 충분히 이해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적용해 색다르게 요리한 음악가가 드뷔시였죠

p161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상징주의 시인이었던 말라르메는 드뷔시라면 자신의 시를 탁월하게 음악적으로 표현할 거라 믿었죠. 그 결과 드뷔시의 최초 대작이자 성공작인 목신의 오후 전주곡 L.86이 탄생합니다.

p165 이 음계의 간격은 모두 온음으로, 드뷔시가 즐겨 쓰는 온음계의 일부입니다. 앞서 몇 번 설명했듯 온음만 사용하면 조성이 느껴지지 않아서 선율의 특별한 방향성이 없어지는데, 여기에 상승과 하강까지 반복하니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죠.

p196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리진 못했죠. 새 연인 엠마가 워낙 잘살았고, 엄청난 갑부였던 그녀의 삼촌의 유산도 상속받을 것으로 알려졌었거든요. 드뷔시는 돈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버린 파렴치한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죠.

p208 드뷔시는 슈슈에게 헌정한 작품에 자신이 못다이룬 어린 시절의 꿈을 투영한 듯해요. 물론 과거에도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소품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린이를 교육하는 목적이었어요. 그러다가 19세기 초 슈만의 어린이 정경Op15를 시작으로 어린이의 세상을 표현한 작품이 나왔죠

p217 드뷔시도 한 파격했지만 니진스키는 한술 더 떴어요. 니진스키는 목신의 오후에서 드뷔시의 몽환적이고 나른한 음악 위에 각지고 딱딱한 안무를 얹었는데요. 무용수의 몸통은 정면을 바라보고 고개는 옆으로 돌리고, 팔다리는 구부린 상태를 유지하는 식이었죠

p223 그만큼 서사나 인물들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죠. 드뷔시는 오묘한 분위기와 인물의 섬세한 심리를 최대한 살려서 음악에 담아요.

p243 이 작품의 핵심은 플루트, 비올라, 하프의 조합을 시도한 거예용. 흔하지 않은 구성이죠. 하프는 아무리 음색이 섬세해도 작은 음얄 때문에 피아노에 밀려 존재감이 희미한 악기에요. 전성기 때에도 앙상블에서 화음 반주를 맡던 보조 악기였는데요. 드뷔시는 그런 하프를 플루트, 비올라와 동등한 위치로 올려놨어요.

p270 매일 똑같은 회색 벨벳 양복을 입던 사티는 자기 집을 누구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었어요. 훗날 사티가 세상을 떠난 뒤 가보니 단칸방에 낡고 허름한 옷가지 몇 점이 전부였다고 해요. 하루를 분 단위로 기록하고, “하얀 음식만 먹는다” “한쪽 눈만 감고 잔다” 등 일상 하나하나가 비범했죠. 놀라울 만큼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티의 음악에 딱 들어맞는 인생이었어요.

p275 전통적인 권위를 익살스럽게 비꼬았다고 할까요. 클래식 음악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바다 생물을 소재로 삼고, 여기에 유명 음악가와 작품을 패러디했으니까요.

p294 모두 바로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춤곡이니까요. 물론 춤곡을 바탕으로 삼았어도 음악을 들으면 이리저리 뛰는 선율과 불협화음과 금방이라도 스텝이 엉켜버릴 것 같지만요

p311 스윙은 흔들거리다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절로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재즈 특유의 역동적인 리듬감을 말해요. 그래서 초창기 재즈처럼 신나게 춤추기 좋은 재즈 스타일을 스윙이라고 부르죠. <싱, 싱, 싱 위드어 스위>을 들으면 금새 감이 올 거예요.

p320 독일의 사상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위대한 예술이었던 음악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는데요. 개성 없이 획일화된 음악, 나아가 지적인 성취를 멈춘 채 수동적으로 이를 소비하며 쾌락만을 추구하는 감상자들의 태도도 신랄하게 지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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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기원 -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기후가 만든 한국인의 역사
박정재 지음 / 바다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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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의 기원

 : 박정재

 : 바다출판사

읽은기간 : 2024/12/23 -2024/12/31


기후변화에 따라 인종이 이동을 시작했으며, 그 이동으로 인해 인류가 구분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책이다.

한국인의 기원이지만 사실 전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전반부는 기후변화에 따라 아프리카에 있던 호모사피엔스가 어떻게 유럽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후반부는 아시아쪽의 이동경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연구가 핫한 트렌드라서 그런지 비슷한 류의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중 한국인에 대한 내용이다 보니 더 관심이 갔다. 

아직은 가설을 확인해야 할 사항이 많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인류세라고 불리우는 우리 시대는 더더욱 기후변화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 지구별은 사람이 살기 힘든 행성이 될지 다시금 복원력을 발휘할 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에 따라 한국인의 미래까지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책이다. 


p12 기후 자료와 고유전체 및 고고학 자료를 함께 살펴보면 과거 동북아 지역민들의 이동을 부추긴 요인들 가운데 핵심은 기후 변화였음이 잘 드러난다. 왜라는 빈칸에 기후변화가 들어갈 때 동북 아시사의 대대적인 인구 변동이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p16 한반도인은 홀로세 초기 아무르강 유역에서 내려온 수렵채집민 집단과 홀로세 후기 산동, 라오동, 랴오시 등에서 이주한 농경민 집단이 섞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p44 수십만 년 전 한반도에서는 베이징 원인으로 알려진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다. 경기 연천군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의 주인공들이다. 호모 에렉투스가 한반도에서 사라진 후에는 데니소바인들이 잠깐 들락거렸을 가능성이 있다.

p82 지금까지 설명한 매듭무늬토기문화, 비커 문화, 아파나시에보 문화, 안드로노보 문화는 모두 암나야 유목민의 후손이 이룬 성과라 할 수 있다. 폰틱-카스피해 초원에서 출발한 유목민이 넓게 퍼져나가면서 각지의 농경민과 교잡하고 유목과 농경을 혼합하여 지역문화를 창출했다.

p86 우리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선조들의 이동은 활발했다. 이는 인류가 꽤 이른 시기에 말을 가축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과거인에 대한 자료 없이 현대인의 자료만으로 인류의 이동 역사와 경로를 정확하게 복원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p96 한국인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집단으로 아무르강 집단이 있다. 아무르강 집단은 티안유안 계통에서 분기하여 아무르강 유역, 몽골, 시베리아 등 아시아 북부의 광대한 지역에 퍼져 있던 수렵채집민 사회다.

p108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의 차이(이형집합도)를 분석하면 집단 내 유전적 다양성을 파악할 수 있다. 한국인 집단 내에는 대략 0.08%의 유전적 차이가 존재한다. 사람의 전체 염기 수가 30억개 이므로 한국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균적으로 240만여 개의 서로 다른 염기를 갖는다.

p126 우리 인류는 과거의 간빙기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훨씬 길게 이어지고 있는 간빙기를 겪는 중이다. 여기에 인류가 초래한 지구 온난화까지 더해져 홀로세는 전례 없이 새로운 형태의 간빙기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이 인위적 간빙기를 인류세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p140 영거드라이아이스 말기의 빠르고 짧았던 온난화가 끝나고 기후가 안정세에 접어든 후에야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수렵채집민에게는 농경은 한 해의 대부분을 투자하면서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그야말로 위험한 모험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p151 태양활동과 기후 변화의 관계는 이미 여러 고기후 자료에서 확인된 바 있다. 태양 활동이 홀로세의 기후 변화를 결정했던 핵심 요인이라 믿는 학자들은 태양 활동의 변화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이 다양한 피드백을 통해 충분히 증폭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p158 정리해 보면 홀로세 초기(그린란드기)에는 북대서양의 열염순환이, 홀로세 후기(매갈리야기)에는 적도 태평양의 해수면 온도변화가 기후 변동의 주된 원인이었다.

p168 최적기 시기 지중해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유럽 문명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몇몇 유물만이 남아 흐릿하게 과거를 비춰줄 뿐이다. 이시기의 유럼 분화를 대표하는 유물을 고르라면 거석 무덤이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p175 최근에 고DNA 분석결과가 연이어 발표되면서 중국 내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랴오허 문명과 홍산 무화를 해석하기 어려워졌다. 신석기 시대 홍산 문화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현대인이 한국인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p194 하지만 유라시아의 유목민은 이러한 생태적 취약성 문제를 자신들만의 힘으로 극복하였다.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질 때면 이들은 여지없이 주변의 정주 국가를 침범하여 약탈하였다. 금속과 특히 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능력은 유목민이 정주민과의 싸움에서 항상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p230 한반도에서 수렵채집민의 존재를 나타내는 세석기, 슴베찌르개, 돌날 등의 유물은 2만 9000년 전부터 증가한다. 그리고 2만 1000년 전 사이에 정점에 달한다.

p244 전라남도 비금도와 광양의 꽃가루 분석 결과는 8200년 전에 한반도의 식생 구성이 크게 달라지느 ㄴ모습을 잘 보여준다. 참나무를 위시한 나무의 비율이 급감한 반면, 이끼나 양치류 등의 포작식물의 비율은 크게 높아졌다. 이런 생태계 변화는 당시 한반도의 기후가 갑자기 춥고 건조해졌음을 시사하는데, 한반도 또한 8200년 전 북반구 전역을 덮쳤던 한랭화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p252 악마문 동굴인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또한 한국인이 주로 갖고 있는 미토콘드리아 계열과 동일했다. 이는 8200년 전 추위가 심해지자 동북아시아에서 아무르강 유역에서 내려와 한반도를 채웠던, 즉 한민족의 바탕이 되었던 그 사람들의 후손이 악마문 동굴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

p264 로베이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수렵채집민의 수가 늘어나는 5500년 전 이후의 한반도 고DNA 자료가 필요하다. 더불아 조몬인의 영향을 받은 해안가가 아니라 해안에서 먼 내륙 안쪽의 자료가 확보되어야 홀로세 중기의 인구 변동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p290 북방에서 밀려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수도작 문화가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송국리형 문화가 정확히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금강 중하류에 나타났는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p298 히타이트족은 무엇보다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민족으로 유명한다. 같은 시기의 이웃 국가들인 미케네, 이집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이 청동기 문화에 머물러 있을 때 히타이트는 도구 제작에 철을 이용했다.

p307 강력한 가뭄이 도래한 2800년 전과 2300년 전뿐 아니라 그 사이 기간에도 기후는 점차 한랭 건조해지는 경향을 띠었으므로 동북아시아의 지역 사회가 연이은 기후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반도를 주도하던 송국리 문화인은 두 차례의 가뭄을 겪으면서 인구가 많이 감소했다.

p311 한반도 남부에서는 대략 2600년 전부터 점토대토기가, 2300년 전에는 세형동검이 나타난다. 모두 기후 변화와 사회 갈등에 지쳐 북쪽의 랴오시와 야로둥 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전한 것이다.

p314 로베이츠와 달리 코넬대학교의 언어학자 존 휘트먼은 원시 한국어가 2300년 전 랴오허 지역에서 세형동검을 지니고 한반도로 들어온 유목 문화 배경의 집단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원시 일본어는 그 이전에 벼 농경과 함께 랴오둥에서 한반도 그리고 일본 순으로 순차적으로 전달되었다고 보았다.

p319 제트 기류의 남하로 편서풍이 강해짐에 따라 서유라시아에서 강수량이 증가하여 초원의 생산성이 높아졌는데, 그 결과 많은 야생 동물이 서유라시아의 초원 지대로 모여들었고 수렵을 병행한 스키타이족 또한 사냥감을 좇아 중앙아시아를 떠나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p332 많은 이가 궁금해하지만 신라와 흉노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정확한 사실 관계르 ㄹ파악하기는 어렵다. 설령 어던 특수한 관계가 밝혀지더라도 그러한 발견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지도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선진 문화는 북쪽에서 들어왔고 북방의 기마 문화 또한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p350 온조 집단과 김수로 집단 모두 북방의 선진 문물을 앞세워 토착 세력을 누르고 어르면서 지역의 지배권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당시에 한반도 남부에서 거주하던 토착민들은 이전에 내려와 정착한 고조선 유민의 후손들로 보인다.

p353 철기 저온기 때 스키타이족이 서쪽으로 넓게 확산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목민은 기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기동성 덕분에 이들은 이주가 필요할 때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p360 그리스 도시들의 파괴는 유럽에 긴 암흑기를 불러올 만큼 파장이 컸지만, 이는 게르만의 대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지칠 줄 모르던 알라리크는 이번에는 동로마가 아닌 서로마 제국을 향해 움직였다.

p395 한반도인은 양쯔강, 랴오허강, 황허강, 아무르강 등의 4개 유역에서 기원한 사람들이 이동하고 섞인 결과 형성되었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특히 랴오허강 유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유전적으로 기여를 많이 했다는 점도 여러 번 강조했다.

p410 랴오둥의 농경민은 북쪽에서 내려온 외부인과의 갈등과 기후위기에 따른 사회 내부의 혼란을 피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여 최초의 수도작 문화인 송국리형 문화를 발전시켰다. 다른 한랭화 시기와 달리 3200년 전에는 기후가 나빠졌음에도 한반도 남부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움직임을 전혀 볼 수 없다. 외부 세력이 대거 진입한 후 수도작 농경을 기반으로 빠르게 규모를 키웠기 때문이다.

p414 약 8200년 전 추위를 피해 아무르강 유역에서 내려온 수렵채집민 집단, 중기 청동기 저온기와 약 3200년 전 산둥, 랴오둥, 랴오시 등에서 이주한 농경민 집단, 철기 저온기에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남하한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 중세 저온기에 북방에서 내려온 고조선과 부여의 유민이 혼합하여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p428 한반도에서 마운더 극소기에 경신대기근(1670-1671년)과 을병대기근(1695-1699년)이 일어나 수백만 명이 아사하거나 난민으로 전락하면서 사회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 두 대기근은 마운더 극소기 내에서도 흑점 수가 특히 적었던 시기(1670-1700년)에 일어났는데 당시 태양 활동에 한반도 사회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p441 기온이 높아져 지구가 아간병기로 들어설 때마다 지구의 자기 조절 매커니즘(여기서는 열염순환)이 작동하면서 다시 정상 상태인 아빙기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영거드라이아스기가 끝난 1만 1700년 전 밀란코비치주기에 의한 기온 상승은 열염순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의 큰 변화였다. 결국 지구는 현 간병기인 홀로세로 진입하였고, 빙기의 저온 상태로 회귀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p449 과거 이주의 흐름은 인구증가라는 인문 지리적 요인과 기후변화라는 자연 지리적 요인이 겹칠 때 더욱 강하게 나타나곤 했다.

p478 기후 변화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이동을 야기한 주요인이었다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생물이 과거 환경 변화에 대응하면서 어떻게 이동했는지 알아야 지금이 생물 분포를 설멸할 수 있듯, 인간이 과거에 왜 그리고 어떠한 경로로 움직였는지를 알아야 현 인간 집단의 형성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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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사랑한 밤 - 명화에 담긴 101가지 밤 이야기
정우철 지음 / 오후의서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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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가가 사랑한 밤

 : 정우철

 : 오후의 서재

읽은기간 : 2024/12/08 -2024/12/08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설명하는 정우철 님의 시리즈...

내용이 어렵지 않고 많은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쉽게 읽고 넘긴다.

그렇지만 그림은 내용을 읽는 것보다는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 장르같다.

한번 쭉 읽었지만 그림은 좀 더 멈춰 서서 봐야할 것 같다.

역시 미술관에서 멈춰서서 봐야 그 맛이 더 나는 것 같다. 

가보고 싶은 장소가 점점 넓어진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 


p18 달빛에 비친 풍경은 루벤스의 마지막 시기를 로맨틱하게 담아낸 걸작입니다. 이미 부와 명예를 얻은 루벤스는 말년에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엔트워프 외곽의 시골 저택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한 그림을 그리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p28 그는 생전에 세상에 가치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했죠. 그의 바람은 결국 사후에 이루어졌습니다.

p72 그의 예술은 독창성과 깊이, 그리고 체코의 문화와 정체성을 담아내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무하는 작품을 통해 체코 역사와 민족적 자긍심을 표현하며 예술적 혁신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러한 면모는 그를 단순한 상업 예술가가 아닌, 진정한 거장으로 만들어줬습니다.

p102 예술가 부부는 가구도 직접 디자인해서 제작하며 가족의 따스한 보금자리를 만들었는데요. 그의 그림 속 인테리어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브랜드가 바로 이케아라는 걸 아시나요? 한 화가가 세상에 주는 영향력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p139 꿈을 꾸던 화가의 끝은 참으로 창대했습니다. 그의 상상력은 후대에 등장하는, 꿈을 그리는 초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 작가들은 쟁쟁한 예술가들을 제치고, 루소를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지목했습니다. 이는 루소가 시대를 앞선 위대한 화가였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순간이었습니다.

p160 호안 미로는 고야, 달리, 피카소의 계보를 잇는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입니다. 2022년 그의 전시 해설을 진행했을 때가 떠오릅니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들은 그의 이름처럼 미로에 빠진 얼굴이었습니다. 알아볼 수 없는 형태들, 어린아이가 낙서한 것 같은 색채까지, 하지만 점점 아이처럼 웃으며 감상하는 관람객들의 모습을 보며 미로의 의도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p169 그의 그림 속 단골 주제는 푸른 밤하늘과 꽃, 그리고 연인이 되었습니다. 그림 속엔 어느 마을의 모습이 종종 보이는데요. 벨라를 만난 고향, 비테프스크입니다. 벨라를 마주한 다리도 보이네요. 생전에 왜 이렇게 꽃다발을 많이 그리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꽃다발이었다”라고 대답한 것이 참 로맨틱합니다.

p173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 -에드워드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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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상 -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3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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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상

 : 임용한

 : 레드리버

읽은기간 : 2024/11/30 -2024/12/06


믿고보는 작가님 가운데 한 분...

전쟁사 토크멘터리에서 봤는데 그 거대한 전쟁 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설명이 쉽다고 깊이가 없는게 아니다. 거대한 담론을 이렇게 정리해서 알기 쉽게 말하려면 얼마나 내공이 쌓여야 하는걸까?

이번에는 임진왜란이다..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조선의 수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선조가 나름 똑똑하고 능력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변방의 이순신을 수군으로 보내 장수가 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선조는 꽤 뛰어난 왕이었던 것 같다.

문제는 의심병..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다. 전쟁에 패한 왕과 싸우면 이기는 능력있는 장수가 있는데 백성들이 누구를 지지할까? 

더구나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인기있는 장군이니 당연히 견제를 했을것..

그런 악조건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이순신이라는 장군이 더 대단해보인다.

하권도 있는 것 같은데 기대가 되는 책이다. 


p29 1591년에 조선이 일본의 침공 의도를 몰랐거나 전쟁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도요토미가 에둘러 말했지만, 그는 서신으로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p37 편제를 마치면 사열과 활쏘기 훈련을 진행한다. 급박한 때에 무슨 사열이냐 싶지만, 병사들을 전선에 내보내 적과 죽음과 마주하게 하려면 먼저 지휘관, 동료, 군에 대한 신뢰가 확보되어야 한다.

p46 이때(후에도 또 이런 적이 있다) 이순신의 행동을 신중함으로만 해석하는 건 껍데기만 보는 것이다. 이순신을 이순신으로 만든 미덕은 맹목적인 신중함이 아니라, 전쟁의 생리와 병사의 심리에 대한 깊고도 정확한 이해였다.

p84 이때 각 배에 어떤 방법으로 신호를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목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이 붙어서 항해하면서 소리로 전달했을까? 현선을 전령처럼 사용했을까? 우리의 전사 기록은 이런 상세한 부분의 묘사가 너무 소홀해서 안타깝다.

p111 2층설과 3층설은 당대의 논쟁이 아니고 후대 학자들의 논쟁이다. 2층이든 3층이든 거북선은 성공적으로 운용되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진실은 무적의 거북선을 위해 거북선 승무원들은 마치 유보트 승무원들처럼 그 어떤 배보다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p138 조선군은 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당항포 전투는 조선 수군의 전술 능력이 교과서적으로 발휘된 전투였다. 거북선이 돌격해서 적을 동요시키고, 총탄을 맞으며 대응 사격을 한다. 그 뒤로 탄옥선이 들어가 팀별로 사냥감을 잡는다. 화포와 화살 공격으로 제압사격을 하며 적함에 접근한다. 화공으로 태우기도 하지만, 적병이 사격에 거의 쓰러지거나 배를 포기하고 도주하면 승선해서 나포한다. 승선해서 잔존병력을 죽이고, 포로를 구하고, 전리품을 거두고 불태운다.

p155 일본군의 위기는 승리의 정점을 찍은 것처럼 보이던 5월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핵심은 이순신의 보급로 차단으로 인한 군량 문제였다. 그렇다면 결론도 간단해지는데, 호남을 정복해야 안정적인 식량 생산지와 군량 수송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p195 안골포에서 매복하지 않은 것은 이런 신뢰를 위한 결단이다. 하지만 이런 전장의 리더십과 고뇌를 조정 관료들이 납득할 리 만무했다. 매복하지 않은 이유를 대면 비겁하다고 닦달을 해댈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의 장계는 상세한 설명을 생력하고 필요한 말만 남긴 것이다.

p231 자신들이 선발하고 녹봉을 주며 길러 낸 무장들이 얼마 안 되는 일본군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초야에서 일어난 의병이 일본군을 곧 섬멸할 수 있다는 황당한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이 인식은 조선의 문관들이 전쟁에 대해 얼마나 문외한이며 그동안 국방, 군사정책을 얼마나 엉망으로 짜 왔는지, 그들이 시행해 온 관리 등용책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지 자인하는 격이었지만, 또 그런 반성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p249 이순신은 기가 막혔다. 전쟁이 나기 전에는 제대로 된 도움은 안주고 훼방만 놓다가, 막상 전쟁이 터지자 아무것도 못 하던 인간들이 뭐가 좀 된다 싶으니 다시 입을 열어 쓸데없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선조의 자애로운 명령이 떨어지자 갑자기 병력의 반 이상이 사라졌다.

p251 유가의 정치사상은 훌륭한 내용도 많지만 유독 군비와 전쟁에서는 판타지를 만든다. 그 판타지의 정수가 도덕과 정의감으로 무장한 백성의 궐기다.

p286 그럼에도 선조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만의 하나의 가능성도 용납할 수 없었다. 리더의 자질로 보면 심각한 결격사유고, 한심하고 졸장부 같은 행동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평소에 선조는 똑똑하고 판단력 빠르고 상대를 배려할 줄도 아는 꽤 훌륭한 리더십을 보이는 군주였지만,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자신의 모든 장점을 잃고 돌변했다.

p361 362 뛰어난 관료이자 온화한 인품과 덕으로 유명했던 이원익은 인조, 광해군대에 영의정까지 역임한다. 조선시대에 명재상 리스트를 만든다면 반드시 들어갈 사람이 이원익이다

p377 난중잡록에는 가토가 섬에 갇혀 있다고 요시라가 이순신에게 직접 통지했는데, 이순신이 듣지 않아서 가토를 놓쳤다고 했다. 난중잡록은 요시라와 고니시도 혼동하고 있는데, 전쟁 중에 도는 가짜뉴스가 이렇게 무섭다.

p401 원균은 사퇴하지 않았고, 선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책임회피 근성이 발동한 선조는 승정원에 쪽지를 보내 원균의 보고서를 반드시 역사에 상세하게 기록해 두라는 명령만 내렸다. 책임감을 잃은 2명의 리더가 조선의 장병과 백성을 사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p424 18일 칠천량해전 소식이 전해지자 권율은 선조에게 이순신 복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선조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이순신에게 달려왔다. 난감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이순신은 명장다운 간결한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가서 직접 보고 대책을 구상하겠습니다”

p426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과도한 견제와 이기적인 고집은 조선 수군의 전멸만이 아니라 그동안 적의 침략을 면했던 경상우도 지역과 순천, 남원 등 전라남부 지역에 끔찍한 피해를 초래했다.

p442 더 신속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안위나 김응함은 훌륭한 전사였다. 아무튼 이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제일 먼저 대장곁으로 달려온 장수들이다. 그래도 이순신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장수를 꾸짖기보다는 병사들을 분발시키려는 어법이었을 것이다.

p479 장군의 후예들은 특별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모든 전쟁에서 승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기상과 명예, 충절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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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여행자를 위한 노르망디×역사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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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여행자를 위한 노르망디x역사

 : 주경철

 : 휴머니스트

읽은기간 : 2024/11/20 -2024/11/29


책이 나오면 꼭 읽게되는 주경철 선생님의 신작읽기...

이번에는 노르망디다..

노르망디하면 역시 몽생미셀.. 책은 몽생미셀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노르망디의 역사가 나온다.. 

그저 바이킹들이 내려오고 프랑스 왕이 땅을 주고 봉신으로 삼았다는 정도만 알고있는 나에게 재미있는 역사이야기가 쏟아졌다. 

노르망디에 가본 곳은 몇 곳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이 생겼다..

다시 놀러가야지. 그때는 렌트해서 다녀야지.. 

주경철 선생님 책은 가보고 싶게 만든다.. 

빨리 다시 가봐야지.. 



p18 이 가운데 지금껏 남은 가장 유명한 곳이 몽생미쉘 수도원이다. 이곳이야말로 세상과 동떨어져 기도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수동원이 되기에 알맞은 세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으니, 성스러운 섬이면서 사람을 피하는 동굴이면서 하늘과 가까운 산이 그것이다.

p26 큰 변화가 시작된 계기는 966년 루앙 백작 라사르 1세의 주도로 이곳이 베네딕트 수도원이 된 것이다. 이후 수도사 약 50명이 거주하는 제법 큰 규모가 되었다. 이시기에 처음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물을 축조했다.

p28 메르베유는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 크고 작은 공간들이 미로를 이룬다. 이곳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서, 동쪽 부분에는 예배당, 손님맞이 방, 수도사들이 모두 모여 식사하던 대식당이 있고, 서쪽 부분에는 포도주 창고, 백년전쟁 당시 기사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는 기사의 방 그리고 회랑이 있다.

p35 이 섬의 DNA에는 사람을 잡아 가두는 형질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수도사든 학자든 혹은 범죄자든.

p46 역상의 풍상을 겪으며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지만, 그 뼈대 자체가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그래서 보통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로 알려져 있다. 유홍준 선생은 역사 답사의 백미는 원래의 건물이 사라진 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p50 1795년에 피에르 레퀴에, 1802년에 장바티스트 르포르라는 사업가가 수도원을 구입한 다음 건물을 허물고 목재와 석재를 채취하여 팔아넘겼다. 말하자면 수도원 전체가 채석장으로 변한 것이다.

p73 현재는 행정적으로 노르망디에 속해 있지도 않고 거의 아무런 역사 유적도 남아 있지 않은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마을이 역사적으로 노르망디의 탄생지가 된 것은 911년 이곳에서 프랑크 왕국의 국왕과 바이킹 무리의 수장 사이에 맺어진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 때문이다.

p77 이 기록에 따르면 원래 신하가 될 사람, 즉 롤롱이 국왕의 발에 키스를 해야 했다. 바이킹 전사가 다른 사람 발에 키스를? 그런 일을 하면 바이킹이 아니지! 롤롱이 부하에게 대신 하라고 지시하자 부하는 국왕의 발을 번쩍 들어 넘어뜨린 다음 키스를 했고, 모든 사람이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바이킹 전사라 할만하지 않겠는가

p93 노르만 정복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자료 중 하나가 <방디와 태피스트리>다. 바이외 태피스트리 박물관에 소장된 이 유물은 노르만 정복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프랑스사와 영국사에서 워낙 중요한 사료이므로 이 박물관은 늘 많은 방문객들로 붐빈다.

p115 대표적으로 런던탑은 윌리엄이 1070년대 지시하여 캉의 석재를 들여와 지었다. 그 외에 캔터베리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등도 부분적으로 캉의 석재를 써서 건축했다. 일단 이 돌로 지은 이상 후대에 보수할 때도 같은 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색상과 질감이 달라 보기가 안좋다. 그래서 이후 시기에 보수할 때도 캉의 석재를 들여와야 했다. 19세기에도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시계탑 빅벤을 다시 캉 석재로 지었다.

p123 이 성은 중세 군사용 성채의 걸작이며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 요새였다. 성 앞에는 삼각형 모양의 외보가 있고, 그 둘레는 폭 20미터, 깊이 10미터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다시 말해 본성 바로 가깥에 보호 장치를 하나 더 설치하고, 주변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p136 사형을 선고받은 잔 다르크는 루앙 시내 비와마르세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5월 30일 아침 8시, 그녀를 끌고 나와 형 집행 의식을 행했다.

p144 중후한 고딕 건물인 법원 건물은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장대하고도 멋진 외관은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잘생긴 얼굴에 흉한 자국들이 가득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져 건물 벽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많이 생겼는데, 시 당국은 이 또한 역사의 일부라 판단하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p152 모네가 우리가 아는 그런 화가가 된 데는 1856년에 만난 외젠 부댕의 역할이 크다. 모네 자신도 화가가 된 것은 부댕 덕분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자연에서 그려라. 이것이 부댕이 모네에게 해준 말이다. 후일 한 기자가 모네에게 화실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센강을 가리키며 이곳이 나의 화실이오 하고 말했다고 한다.

p162 저녁이 오면 마치 모네가 처음 집을 보러 왔던 그날처럼 본래의 조용한 시골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은 사실 몇 집 안 된다.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큰기을 따라 가면 곧 마을 전체를 볼 수 있다. 저녁 혹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산보하면 신선한 노르망디 마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그 범용한 시골 마을이 어떻게 모네의 눈과 손을 거쳐 아름다운 그림으로 화했는지 느껴볼 수 있다.

p168 장례식에 온 클레망소의 이야기가 전한다. 장례식에서 관 위에 검은 천이 덮혀 있는 것을 보고 클레망소가 그것을 치워버리며 ‘모네에게 검은색은 안 돼’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p177 인상파 화가들을 사회 현실에서 유리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인상파의 효시를 알린 모네의 그림 <인상, 인출>만 해도 그렇다. 그냥 수평선이 아니라 르아브르 산업 단지의 공장 굴뚝들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사회 변화에 완전히 눈감고 순수하게 미학적 태도만 견지하는 화가란 없다.

p183 루앙에는 좋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은데, 루앙 미술관은 반드시 가볼 곳이다. 인상파 작품들이 많을 뿐 아니라 푸생, 다비드, 들라크루아, 제리코, 코로 등 프랑스의 대가들, 그리고 베로네제, 벨라스케스, 카라바조, 루벤스 등 외국 대가들의 작품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입장료가 화끈하게 무료다.

p196 밀레 생가를 찾아 이 먼 땅끝 마을까지 일부러 찾아갔다면 간김에 코당탱반도의 경관을 둘러볼 만하다. 매우 높은 절벽들, 작은 모래사장, 매력적인 소항구들이 이어지는 곳이어서 드라이브를 해도 좋고 차에서 내려 해변 모래언덕을 올라가 보는 것도 멋진 일이다.

p208 거의 무한의 느낌을 줄 정도로 반복되는 작은 네모 모양의 빛의 조각들이 공중에 그득하다. 오직 그뿐, 성당 내부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와 성 요셉 동상만 있고 그 외 다른 장식, 조각, 그림 같은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깔끔하다.

p258 말하자면 바이킹 선조들의 배 만드는 기술이 전수되어 온 것인데, 이들이 배를 건조하는 방식을 원용해서 목조 성당을 지은 것이다. 과연 성당 내부에서 보면 선체를 거꾸로 뒤집은 듯한 모양이 확연하다.

p266 보들레르의 의부는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에게는 그런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따. 아들로부터 정녕 시인의 길을 가고자 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의 반응이 애처롭다. “가슴 아픈 일이야. 샤를이 아버지 뜻을 따랐다면 경력이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그러면 문학사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겠지만 우리 모두 훨씬 더 행복했을걸”

p273 청중들에게 부담 없이 자유롭게 듣기를 권하는 그의 음악은 간결하고 쉽고 감미로우며, 반복되는 동기의 연주로 현대 미니멀리즘의 선구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의 음악이 오늘날 더욱 사랑받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말대로 ‘너무 늙은 시대에 너무 젋게 세상에 온 사람’인지 모른다

p291 쿠튀리에의 직업을 건축가 및 화가의 직업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드레스를 만들 때 구조와 건축의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식의 설명도 듣고 보니 수긍이 된다. 하여튼 내가 H라인, 뉴룩혁명 같은 내용을 유심히 살펴볼 줄은 몰랐다. 여행하다 보면 몰랐던 내용을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이 있다. 늙은 개도 새로운 재주를 배울 수 있고, 중늙은이도 패션에 눈뜰 수 있다.

p308 푸홀은 어찌나 연기를 잘했는지 1944년 히틀러에게 알라릭 요원으로서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몇 달 후에는 영국 정부가 가르보요원에게 연합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영제국 기사훈장을 수여했다. 이중간첩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나치와 연합군 양측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극소수 인물 중 한 명이다.

p328 이 지역 전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말해 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군 90보병사단이 코탕탱에 도착하고 6주가 지났을 때 중대마다 100-400퍼센트의 손실을 입었다. 400퍼센트의 손실은 중대원이 전부 죽어 새로 갱신하고 그 중대원들이 또 모두 죽어 다시 갱신하는 식의 일이 네 번 있었다는 의미다.

p335 이 영화는 코르시카 해안에서 촬영했다. 촬영을 시작하려는 데 웬 이타리아 남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해변을 이용하려면 1만 5,000달러를 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만일 돈을 주지 않으면 자동차를 몰고 촬영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겠다고 협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전쟁 영화인데 1960년대 자동차가 왔다 갔다 하면 큰일 아닌가. 별수 없이 돈을 주고 영화를 찍었는데, 코르시카 해변에는 개인 사유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기꾼에 걸려든 것이다.

p343 사실 할머니 집은 창녀 집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에디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집에 기거하는 창녀 언니들만이 그녀를 귀여워했다. 그러던 중 심한 각막염으로 거의 실명 위기에 빠지자, 할머니와 언니들이 아이를 데리고 리지외 성당으레 찾아가서 기도하고 테레즈 무덤의 흙을 가져다가 매일 밤 눈에 그 흙을 대주었다. 기도가 통한 걸까. 에디트는 눈을 번쩍 떴다. 기적을 경험한 그녀는 평생 테레즈 성녀에게 기도하고 특히 공연 전에는 꼭 성녀의 메달을 걸고 지냈다.

p353 개인적 경험의 소산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바는 뵈브롱앙오주(오주 지방의 뵈브롱이라는 의미) 마을이 특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캉과 리지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노르망디에서 아름다운 마을로 손꼽히는 것은 물론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p356 프랑스인들은 사는 법을 압니다. 이들은 즐거움에 정통합니다. 나도 그 의견에 공감한다. 프랑스인들은 요리도 맛있게 하고 진정 즐거움을 위해 살아간다.

p365 프랑스인들은 하여튼 먹는 데에는 진심이어서, 온갖 방법을 만들어 낸다. 혹시 소맥처럼 칼바도스+시드로 같은 것은 없을까? 물론 있다. 이름하여 포모 드 노르망디. 사전적 정의와 설명은 이렇다. “오크통에서 최소 14개월 이상 숙성한 시드르용 사과즙과 칼바도스를 블렌딩한 혼합주인 포모는 대개 식전주로 차게 마시며 푸아그라, 멜론 및 몇몇 디저트에 결들이기도 한다.

p368 병을 개봉해서 조앙에게 한 잔 따라주자, 조앙이 조금 마시더니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는 여태까지 이런 것을 마셔본 적이 없어요. 이건 마시는 게 아니라… 그냥 숨만 쉬면 되는군요” 라비크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낭만주의자가 될 거요. 칼바도스적 낭만주의자”

p379 비무티에에는 카망베르 기념관도 있다. 건물자체가 카망베르 통 모양이라고 주장하는 데, 솔직히 그렇게 이상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기념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이곳을 찾아가니 직원 세 사람이 모여서 밥을 먹고 있다가 ‘손님 왔다’ 하면서 밥 먹다 말고 카운터로 가서 표를 파는 식이다.

p395 프랑스 속담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나라만 보고 산다면 이 세상은 첫 장만 읽은 책과 같다” 잠시 우리 사는 세상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 사는 세상은 어떤지 보고 오도록 하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이면 우리 마음의 공간이 조금 더 커지고 우리 생각이 조금 더 지혜로워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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